, ,

아리스토텔레스와 음악

임영근 정치경제연구소 대안 상임연구원

 

음악은 만국 공통의 언어라는 말을 흔히 한다. 수긍이 가는 말이다. 전 세계를 통틀어 음악과 춤이 없는 문화는 없다. 자장가 없는 문화도 없다. 자장가가 없는 문화가 없을 뿐 아니라 엄마와 아이가 교감하는 자장가는 서로 비슷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우르르 까꿍 하며 어를 때처럼 음높이는 높아지고 박자는 느려진다고 한다. 이처럼 우리 인간의 마음 깊숙이 음악을 즐기는 심성이 자리 잡고 있다는 뜻에서 음악은 만국 공통의 언어일 수 있다.

하지만 똑같은 이유로 음악을 통해 소통하기는 매우 어려운 게 현실이다. 음악이 우리 감성을 강력하게 흔드는 그 이유 때문에 음악에 대한 선호가 민감해진다. 취향에 맞지 않는 음악을 듣는 것보다 참기 힘든 고통도 없다. 나는 ‘트로트’ 음악을 들을 때면 어렸을 때 시외버스 터미널을 떠올리곤 한다. 흔히 보는 테이프는 아니었다. 보통 테이프보다 훨씬 커서 도톰한 수첩만 한 플라스틱 통이었다. 그 물건을 운전석 앞의 구멍에 기사 아저씨가 꽂으면 어김없이 나오던 트로트 음악. 버스는 출발할 생각도 않고 꿍짝 꿍짝 하는 리듬에 사랑이니 이별이니 눈물이니 하는 가사가 되풀이되는 노래가 이어진다. 몇 곡이 흘러도 그 노래가 그 노래 같아 분간이 안 가는 노래. 제발 음악 좀 끄고 이제 그만 출발해 주세요. 이렇게 마음속으로 빌며 견뎌야 했다. 물론 이것은 그 당시의 내 취향을 얘기하는 것일 뿐 트로트 음악에 대한 평가는 아니다. 그런 내 취향이 생겨난 데에는 당시 어른들 세계에 대한 반감이 어떤 식으로든 작용한 결과일 것이다.

음악에 꽂힌 호모 사피엔스

음악은 청각을 통해 받아들인다. 청각의 특징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결코 외면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트로트가 들리는 동안 안 들을 도리가 없다. 아무리 귀를 틀어막는다 해도 우리 귀로 끝없이 스며든다. 그 자리를 빨리 벗어나는 수밖에 없다.

청각의 또 다른 특징은 자극과 반응이 매우 단선적이고 직접적이라는 것이다. 혀와 코에는 수많은 수용기들이 있어 특정 물질에 반응한다. 시각도 망막에 있는 수많은 세포를 통해 받아들인다. 이에 비해 귀는 단 한 가지 신호를 받아들일 뿐이다. 공기의 진동, 이 한 가지 신호만을 처리할 뿐이다.

‘클래식’음악을 즐겨 듣는 사람 가운데는 실황 음악 음반을 선호하는 사람이 많다. 스튜디오에서 녹음한 교향악단의 깔끔한 소리보다 기침 소리 같은 소음이 섞인 음반을 좋아하는 것이다. 현장감을 즐기기 위해서다. 그런데 우리가 듣는 것은 하나의 소리 파동일 뿐이다.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공기 압력을 듣는 것이다. 연주하는 소리, 기침 소리, 코 푸는 소리, 이 모든 것이 합쳐진 하나의 소리 파동을 듣는다. 설사 여기에 기차가 지나간다 해도 그 소리까지 합쳐져 만들어진 하나의 파동을 듣는 것이다.

참으로 놀라운 능력이 아닐 수 없다. 여러 가지 소리가 합쳐진 단 하나의 파동을 들으면서도 우리는 각각의 소리를 어려움 없이 분간해 낼 수 있다. 연주하는 소리, 기침 소리, 코 푸는 소리, 기차 소리를 분간해 들을 수 있다.

한때 라디오에서 일반인을 상대로 노래 제목 알아맞히기 프로그램을 진행한 적이 있다. 노래 시작 부분을 아주 잠깐만 들려 주고 어떤 노래인지 알아맞히는 방식이다. 나도 몇 번 들은 적이 있는데, 프로그램에 나온 일반인들이 대부분의 노래를 척척 알아맞혔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들은 노래를 어떻게 맞힐 수 있지? 여러 번 진행될수록 너무 쉽게 맞히는 바람에 퀴즈가 싱거워질 정도였다. 내가 그 노래들을 알아맞히지 못한 이유는 딱 한 가지였다. 내가 들어 보지 못 한 노래였기 때문이다. 잘 아는 노래가 나왔다면 처음 몇 개의 음만 들어도 알아맞혔을 것이다.

이처럼 음악에 민감한 우리의 능력을 실험한 사례가 『음악 본능』에 소개되어 있다. 베토벤의 <엘리제를 위하여> 같은 유명한 노래의 멜로디를 들려 주고 알아맞히는 실험이다. 처음 두 음을 들려 주었을 때 알아맞힌 사람이 무려 56퍼센트였다. 자기가 잘 아는 음악이라면 처음 두 음만 들어도 반 이상이 알아맞히는 것이다. (세 번째 음까지 듣고 알아맞힌 사람은 69퍼센트였고, 여섯 번째 음까지 들려 주었을 때는 100퍼센트 알아맞혔다.) 나머지 바그너의 <결혼행진곡>이나 독일 가곡 <소나무>에 대한 실험에서도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추세는 비슷했다고 한다.

이처럼 소리와 음악에 민감한 우리 인간은 음악에 대한 정서적 반응도 강력하다. 이 책에서는 음악에 대한 정서적 반응을 실험한 사례로 소개하고 있다. 토마스 프리츠Thomas Fritz가 카메룬의 산악지대에 사는 마파Mafa족을 상대로 한 실험이었다. 마파족은 서양음악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고 고립되어 살아온 민족이다. 당연히, 유럽인이 볼 때 아주 낯선 음악을 즐기는 사람들이었다. 프리츠는 바흐에서 탱고, 로큰롤까지 여러 음악을 들려 주고 즐거운 곡, 슬픈 곡, 위협적인 곡으로 분류하도록 요청했다. 분류 결과는 놀랄 만큼 잘 들어맞았다고 한다.

서양인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서양인들 또한 마파족 음악을 정서적으로 잘 들어맞게 분류한 것이다. 음악을 들으면 즐거운지 슬픈지 따분한지 신나는지 누구나 느낄 수 있다는 말이다.

이후 생략된 전체 글은 PDF파일로 다운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

최저임금 논란, 무엇이 문제인가?

조혜경 정치경제연구소 ‘대안’연구원

 

최저임금 논란이 뜨겁다. 이 글은 최근 최저임금에 대한 논란이 왜 끊이지 않는지 그 원인을 짚어 보려고 한다.

최저임금제도의 취지 자체에 반대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저기서 아우성이 쏟아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최저임금제도는 1987년 민주화와 개헌의 산물로 도입되어 약 3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1988년부터 최저임금제도가 시행에 들어간 이래 매년 최저임금 시급이 인상되어 왔는데 그때마다 연례행사처럼 최저임금 수준을 놓고 노사 양측이 팽팽한 평행선을 달리며 대립각을 세웠다. 최저임금 논란은 늘 있어 왔던 일이라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다.

올해는 양상이 좀 다르다. 과거에는 최저임금안을 결정하기 직전에 노동자위원 또는 사용자위원이 퇴장하거나 표결에 불참하는 파행이 일어나면서 노사 간 갈등이 최고조에 도달했다가 우역곡절 끝에 최종안이 확정되면 논란은 자연스레 사그라졌다. 한마디로 최저임금 수준 결정 과정에서 당자사인 노사 양측의 대립과 갈등이 논란의 중심이었다. 2018년 최저임금안 협상 과정도 예외가 아니었다. 늘 그랬듯이 난항에 난항을 거듭하다가 시한을 넘겨 합의가 아닌 표결로 최종안이 확정되었다. 하지만 이번엔 예년과는 달리 그것으로 논란이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왜 그럴까?

 

한국 최저임금제도의 역사와 목표

최저임금 논란 해부에 앞서 먼저 우리나라 최저임금의 개념 정의, 그 역사와 목적을 간단히 살펴보자. 우리나라의 경우 최저임금에 관한 헌법 조항이 있고 「최저임금법」이라는 별도의 법제가 존재한다. 이 글에서는 그 법에 명시된 최저임금의 개념 정의와 목적을 소개한다. 법률적 개념 정의는 정책 시행의 준거로 사용되는 것이므로 학문적 논의에서의 개념과는 차이가 있다.

최저임금제도는 국가가 노사 간의 임금 결정 과정에 개입하여 임금의 최저 수준을 정하고, 사용자에게 이 수준 이상의 임금을 지급하도록 법으로 강제함으로써 저임금 근로자를 보호하는 제도를 말한다. 이러한 개념 정의에서 알 수 있듯이, 노동시장 당사자 간의 자율적 결정에 맡겨둘 수 없다는 판단이 전제된다. 따라서 정부가 시장을 강제하는 방식, 즉 법률에 의한 구속력이 불가피하다. 우리나라 최저임금 제도는 이미 1950년대 초반 법률적 근거가 마련되었으나 시행되지 않다가 1986년 「최저임금법」이 제정된 이후에야 비로소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1953년 제정된 「근로기준법」에 최저임금제도의 실시 근거 를 마련했으나, 당시 경제 상황에서 최저임금제도 시행이 어렵다는 판단에 따라 그냥 종잇장에 적힌 문구에 불과했다. 1970년대 중반에는 정부가 행정지도를 통해 기업을 압박하기도 하다가 1986년 12월 31일 「최저임금법」 제정으로 구체적인 시행 규정이 마련됨에 따라 1988년 1월 1일부터 시행이 되었다.

1987년 민주화운동의 성과로 탄생한 헌법 제32조 제1항에 국가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최저임금제도를 시행하여야 한다는 조항이 포함되어 최저임금제도의 헌법적 기초가 마련되었다. 「최저임금법」 제1조에서 명시하고 있는 최저임금제도의 목적은 “근로자에 대하여 임금의 최저수준을 보장하여 근로자의 생활안정과 노동력의 질적 향상을 꾀함으로써 국민경제의 건전한 발전에 이바지”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최저임금위원회가 제시한 최저임금의 효과를 보자. 최저임금위원회 홈페이지를 인용하자면, 최저임금제도의 실시로 최저임금액 미만의 임금을 받고 있는 근로자의 임금이 최저임금액 이상 수준으로 인상되면 다음과 같은 효과가 나타난다. 첫째, 저임금 해소로 임금격차가 완화되고 소득분배 개선에 기여하며, 둘째 근로자에게 일정한 수준 이상의 생계를 보장해 줌으로써 근로자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근로자의 사기를 올려주어 노동생산성이 향상되고, 마지막으로 저임금을 바탕으로 한 경쟁 방식을 지양하고 적정한 임금을 지급토록하여 공정한 경쟁을 촉진하고 경영합리화를 이룬다.

최저임금위원회가 밝히고 있는 최저임금의 효과를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저임금 해소, 임금격차 완화, 노동자의 생활 안정, 생산성 향상, 경영 합리화 등 노사 양측에 모두 행복을 안겨주는 엄청난 제도처럼 들린다. 하지만 최저임금제도가 현실에서 그런 효과를 낳는지는 전혀 다른 문제다. 특히 최저임금제도가 노동 빈곤의 문제, 즉 열심히 일해도 빈곤을 벗어나지 못하는 “워킹 푸어” 문제를 해소하는 데 기여하고 있는 것인지, 그래서 노동자의 생활이 안정되고 시장소득의 양극화가 줄어들고 있는지를 따져 볼 필요가 있다. 이하에서는 최저임금 이슈를 최저임금의 실제 효과의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논의하고자 한다.

이후 생략된 전체 글은 PDF파일로 다운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

특수고용노동자의 권리를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

유승경 정치경제연구소 ‘대안’ 부소장

 

전자 제품 수리 기사, 택배 기사, 배달원, 골프장 캐디, 보험설계사, 학습지 교사, 판촉 담당자, 간병인, 미용사 등은 일의 성격에 비춰보면 전통적인 의미의 노동자다. 하지만 십 수 년 전부터 이들 대부분은 법적으로 더 이상 고용관계에 묶여 있는 노동자가 아니라 독립적인 개인 사업자, 즉 자영업자로 바뀌었다.

최근에는 ‘플랫폼 노동’, ‘긱 노동’, ‘온 디맨드 노동’ 등으로 불리는 새로운 노동 형태가 확산되면서 전통적인 의미에서 노동자도 아니고 개인 사업자도 아닌 제3 유형의 직종에 취업한 사람들이 나날이 늘고 있다.

기술과 제도의 변화에 따라 새로운 유형의 노동과 취업자가 등장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이 경향은 사회경제적 문제를 낳고 있다. 그 이유는 이런 유형의 취업자들은 대부분 사회경제적 입지가 취약한데, 이들을 보호할 수 있는 법과 제도가 마련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전통적인 산업사회는 자본을 가진 자본가와 그들에게 노동력을 판매하는 노동자가 사회경제관계의 기본 토대를 형성했다. 이러한 구도에서 사회경제적인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법과 제도는 자본가에게 고용된 노동자를 기본 모델로 하여 마련되었다. 법적으로 기본적인 노동조건을 강제하는 한편 노동자에게 노동삼권을 보장했다. 그리고 사회적 안전망인 사회보험제도도 회사에 직접 고용된 노동자를 기본 대상으로 삼아 구축되었다. 그 결과, 제3 유형의 새로운 사회경제적 약 자는 사회적 균형을 맞추기 위한 법과 제도로부터 소외되어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제3 유형의 취업자를 보호할 대응책의 마련 이 시급하다. 세계적으로 제3 유형의 취업자를 보호하기 위한 노력은 기존에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해 마련된 법과 제도를 새로운 유형으로까지 확대하는 방향으로 추진되고 있다. 달리 말해, 제3 유형을 특수한 형태의 노동자로 규정하고, 노동자와 동일한 근로조건을 법으로 강제하고 노동3권을 부여하며, 기본적인 사회보험의 혜택을 제공하자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세계적 추세와 흐름을 같이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제3 유형의 취업자에게 (1) 노동3권의 부여 (2) 근로조건의 보호 (3) 사 회보험 보호를 제공하기 위한 논의가 우리나라에서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를 살피고 당면 과제가 무엇인가를 검토해 본다.

 

1. 제3 유형, 노동자인가 독립 사업자인가?

제3 유형의 취업자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법적으로나 학문적으로 합의된 바가 없다. 사실 정해진 호칭도 없다. 서구에서 는 근로자의 속성인 ‘dependent employment’와 자영업자를 의미하는 ‘self-employed’를 합성하여, ‘종속된 자영업자the dependent self-employed’라고 하기도 하며, ‘유사 노동자employ-like person’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김도균 외, 『 자신에게 고용된 사람들』, 2017년, 후마니타스, 244 쪽). 우리나라에서는 “특수유형근로 종사자” 혹은 “특수고용노동자” 등으로 불린다. 이 글에서는 “특고노동자”로 지칭한다.

특고노동자에게 노동자로서의 권리와 보호를 제공한다고 했을 때 한 가지 어려운 문제가 있다. 법적으로 개인 사업자인 특고노동자와 일반적인 독립적 개인 사업자를 어떤 기준에 따라 구분할 것인가?

이 문제가 왜 중요한가를 국내 최장기 비정규직 투쟁 기록을 가지고 있는 재능교육 학습지 교사의 사례를 통해 살펴보자. 재능교육 학습지 교사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하자 회사 측은 노조 활동을 이유로 교사들을 해고(명목상은 ‘위탁 계약 해지’)했고, 이에 교사들이 소송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 1심 재판부는 학습지 교사도 회사에 경제적으로 종속되어 있기 때문에,「 근로기준법」상의 근로자는 아니지만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이하 ‘「노동조합법」’)상의 근로자에는 해당한다고 판결했다. 하지만 2심 재판부는 교사들이 회사로부터 상당한 지휘와 감독을 받지 않는다는 등을 이유로 「노동조합법」상의 근로자가 아니라고 판결했다.

이에 대한 대법원의 판결은 아직 나오지 않았는데, 이처럼 특고노동자를 개인 사업자와 법적으로, 개념적으로 구분하는 것은 매우 논쟁적이며 사실상 정치적이다. 이렇다 보니, 특고노동자에 대한 통계도 제각각이다. 국가인권위원회에 따르면 약 230만 명에 달하지만, 통계 청에서는 그보다 훨씬 적은 약 50만 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우리나라 법률에서는 “특수형태근로종사자”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이 명칭은 「산업재해보상보험법」(‘「산재보험법」’)에 유일하게 등장한다. 2007년에 개정된 「 산재보험법」은 “계약의 형식에 관계없이 근로자와 유사하게 노무를 제공함에도 「근로기준법」 등이 적용되지 아니하여 업무상의 재해로부터 보호할 필요가 있는 자” 가운데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직종에 종사하는 자”를 “특수형태근로종사자”로 정의했다. 이 조항에 따라 현재, 골프장 캐디, 학습지 교사, 보험설계사, 레미콘 기사, 택배 및 퀵 서비스 기사, 대출 모집인, 전속 대리운전기사 등 총 9개 직종이 특수형태근로종사자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법에 따르면 특고노동자는 9개 직종뿐이며, 이것도 「산재보험법」에 한정된 것이다.

제3 유형의 직종을 개인 사업자가 아니라 특고노동자로 할 때의 기준은 ‘근로자성’이다. 달리 말하면 노동자로서의 성격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 판단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특고노동자가 법적으로 개인 사업자의 형식을 띠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다.

근로자성을 판단하는 데는 통상적으로 “사용 종속성”(“인적 종속성”)과 “경제 종속성”의 두 기준을 사용하거나 여기에 “조직 종속성” 을 더해 세 가지 기준을 적용한다(김도균 외, 위의 책, p. 236). 사용 종속성은 주로 (1) 사용자의 지휘와 감독을 받는지, (2) 사용 자가 근무 장소와 시간을 지정하는지로 판단한다. 경제 종속성은 (3) 근로 제공 관계가 지속적이며 사용자에게 전속되어 있는지, (4) 제3자를 고용해서 업무를 대체할 수 있는지, (5) 근로자가 재정적 위험을 부 담하는지, (6) 보수가 유일한 수입의 원천인지 등으로 판단한다. 그리고 조직 종속성은 (7) 노동이 기업 조직 내로 통합되는지로 판단한다.

이 기준은 대략적인 기준일 뿐 절대적인 기준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 위의 기준 중에서 몇 개를 충족시켜야 노동자라 할 수 있는지를 정하는 것은 지극히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위의 기준에 비춰 보면 화물 기사, 방송 작가, 대리운전기사는 근로자성이 약한 것으로 나온다. 그렇다고 이들이 노동자가 아니며 노동 법제와 사회보험의 보호가 필요 없다고 단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따라서 제3 유형의 직종을 노동자로 규정하고 노동 법제와 사회보험제도로 보호하기 위해서는 법규와 제도의 개선이 이뤄져야 한다.

이후 생략된 전체 글은 PDF파일로 다운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

4차 산업혁명 시대, 플랫폼 노동과 사회보장 개혁*

서정희 군산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백승호 가톨릭대학교 사회복지전공 교수

 

 

Ⅰ. 서론

남성 생계부양자의 유급노동을 통한 임금만으로 가족의 충분한 생활을 유지하기 어려워진 것은 이제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맞벌이 가구도 마찬가지다. 제조업 중심의 산업구조가 서비스업 중심으로 이동하면서 저임금 일자리 비율이 늘고 고용 불안정성이 증가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실업의 만연, 실직의 두려움, 낮은 임금으로 인한 불안정성은 장시간 근로와 직장에서의 충성을 강요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4차 산업혁명의 바람은 인간의 노동을 기계와 인공지능으로 점차 대체할 가능성을 예시한다. 보다 더 근본적인 변화는 4차 산업혁명으로 ‘플랫폼 노동’이 확산되면서 고용관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제조업의 쇠퇴는 숙련노동의 비중을 축소시켰고, 동시에 숙련노동의 확보 및 유지에 필요한 비용을 자본이 일정 비율 이상 부담할 필요 역시 축소시켰다. 서비스산업 중심의 경제에서는 평균적으로 제조업 중심의 산업구조에서보다 숙련노동의 비중이 낮으며 저생산성을 특징으로 하기 때문이다. 낮은 생산성을 특징으로 하는 서비스산업 경제에서 사용자들은 한편으로는 저임금 노동의 비중을 늘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비용의 중요한 원천인 사회보장 기여금을 절감하는 전략을 선택하여 왔다. 이러한 전략에서 주요하게 활용된 방식이 고용관계를 계약관계로 전환시키고 위장된 고용관계를 확대하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인공지능 혁명’ 시기의 플랫폼 경제는 사용자·노동자·자영업자라는 고용관계의 구분 틀 자체를 모호하게 만들고 있다. 플랫폼 경제에서는 사용자도 노동자도 사라지고 자영업자와 이용자와 이들을 연결시키는 플랫폼만이 남게 되었다. 이렇듯 노동시장에서는 유급노동이 불안정해지고 일자리의 축소 및 질적인 변화가 예견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보장제도는 여전히 전통적 고용관계 개념에 기초하여 대상자 적격성을 판단하고 있다. 결국 사회보장의 대상자 적격성을 충족시키기 어려워지는 고용관계가 확대되고 있는 추세를 고려해 보면, 이에 대비하여 사회보장제도에서 근본적인 관점의 변화가 있지 않다면 아무리 잘 갖추어진 사회보장제도라 하더라도 제대로 작동하기 어려울 것이다. 여기에서 근본적인 관점의 변화란 현재 사회보장제도가 천착하고 있는 노동 중심적 접근에 대한 재검토에서부터 출발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본 연구는 노동 중심성 문제를 근본적으로 되짚어 보고자 한다.

Ⅱ. 4차 산업혁명과 노동의 변화

1. 노동의 양적 변화

4차 산업혁명이 화두가 되면서 미래에는 일자리가 사라지고 노동 없는 미래가 도래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Frey, C. B. and Osborne, M. A., 2017). 노동 없는 미래에 대한 예측은 2016년 1월 스위스 다보스에서 ‘제4차 산업혁명’을 주제로 세계경제포럼(“Mastering the Fourth Industrial Revolution”)이 열린 이후 크게 부각되었다. 여기에 서 발표된 「일자리의 미래The Future of Jobs」 보고서는 로봇이 사람들의 일자리를 대신하여 2020년까지 710만 개의 일자리가 사라지고 200만 개의 일자리가 새로 만들어져서 총 500만 개의 일자리가 사라질 것이 라는 노동 없는 미래를 전망하였다(World Economic Forum, 2016). 이 외에도 세계은행 등 국제기구들의 전망과 직무 분석을 통한 많은 학자들의 노동시장 전망은 대체로 일자리의 총량이 줄어들 것이라는 예측이 지배적이다.

반면에 이전의 산업혁명도 그러했듯이 새로운 형태의 일자리가 만들어질 것이라는 전망 또한 제기되고 있다(Autor, D. H., 2015). 그러나 일자리의 양적 변화에 대한 이러한 상반된 견해에도 불구하고, 일자리의 질, 즉 불안정한 일자리가 증가할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큰 이견이 없다. 특히 4차 산업혁명으로 인한 온라인 플랫폼 노동의 확산은 새로운 노동과정을 만들어 냄으로써 노동의 질적 변화를 추동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 이 글은 서정희·백승호(2017)을 대폭 수정 보완한 것임을 밝힙니다.

이후 생략된 전체 글은 PDF파일로 다운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

자기를 돌보는 일

박기순 충북대 철학과 교수

 

1. 도덕의 무능력, 혹은 윤리와 정치의 분리

어느 때보다도 ‘윤리’나 ‘도덕’이라는 말이 중요하게 다가오고 있다. 사회적으로 인정받던 사람들이 그동안 숨겨져 왔던 비도덕적인 행위들로 인해 비난과 한탄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있다. 어떤 ‘구조’, ‘분위기’ 혹은 ‘상황’ 때문에 자신에게 행해지는 부당함을 온전히 감내해야만 했던 사람들의 상처와 고통에 대한 공감, 그리고 이제 용기 내어 말하기 시작한 사람들에 대한 지지와 연대를 보내는 우리 마음의 또 다른 한편에는 놀라움과 당혹감 또한 크게 자리하고 있다. 특별히 이러한 당혹감은 도덕적 비판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 그동안 보여 주고 이룩한 것들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일 경우에 더 크게 다가올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일반적으로 ‘윤리’와 ‘정치’를 서로 무관한 것이 아니라 동일 선상에 있는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둘 사이의 이러한 친화성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현실정치의 무대에서 정치인들은 사람들에게 신뢰를 얻기 위해 스스로를 ‘좋은 사람’이라고 주장한다. 이때 ‘좋은 사람’은 타인, 더 나아가 공동체 전체에게 좋은 것을 하고자 하는 의지와 품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의미할 것이다. 이렇게 보면,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은 정치의 필수 불가결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이 점과 관련하여 가장 고전적인 담론을 제시한 철학자는 플라톤이었다. 통치의 원리가 되어야 하는 ‘정의’가 무엇인지를 탐구하고 있는 책 『국가』에서 플라톤은 통치술의 고유성을 설명한다. 모든 기술은 좋은 목적에 사용될 수도 있고 나쁜 목적에 이용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의술은 병든 사람을 살리는 기술이기도 하지만 나쁜 의도로 사용될 경우 사람을 죽게 만드는 기술일 수도 있다. 따라서 통치술을 한갓 기술로만 이해한다면 그것은 정치를 잘못 이해하게 되는 결과를 만들어 낸다. 플라톤의 적대자였던 트라시마코스의 주장대로 정의란 ‘강한 자의 이익’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플라톤에게 이러한 귀결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정치란 강자가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는 행위가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좋음을 돌보는 행위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정치 개념은 우리가 보기에 이중의 의미에서 윤리에 기초해 있다고 할 수 있다. 첫째, 좋음이란 무엇인지, 혹은 어떤 것이 좋은 것인지에 대한 이해를 전제해야 하기 때문이다. 좋은 것이란 이익이 되는 것에 다름 아니라고 하더라도, 어떤 것이 누구에게 진정으로 이익이 되는 것인지를 정하기란 쉽지 않으며 깊은 성찰과 논의를 필요로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좋음에 대한 인식, 즉 윤리학은 정치의 전제가 되어야 한다. 둘째, 정치는 특별히 나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내가 아닌 전체의 이익과 좋음을 도모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정치는 그 자체로 윤리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윤리와 정치가 사람들에게 분리해서 나타날 수 있는 가능성은 이러한 논리 위에 정립된 윤리-정치의 연속성에서 연원한다. 그리고 이 연속성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특히 윤리에 대한 특정한 이해 방식이다.

이후 생략된 전체 글은 PDF파일로 다운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