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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체적인 것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을 위하여!

김교성, 백승호, 서정희, 이승윤, 『기본소득이 온다: 분배에 대한 새로운 상상』, 사회평론아카데미, 2018년.

안효상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상임이사

 

급진적인 사회 변화를 꿈꾸는 사람들이라면 노아의 홍수 같은 ‘신적 폭력’을 바랄 때가 있을 것이다. 그건 깨끗한 상태에서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는 조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마처럼 얽힌 인간사의 처지는 그런 사치를 허용하지 않는다. 아무리 우리가 가진 이상이 높다 하더라도 우리 발은 부드러운 흙을 밟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근대의 혁명 과정은 ‘테러’와 ‘독재’라는 형식으로 그 부드러운 흙을 쿵쿵 밟아 단단하게 다짐으로써 도약을 꾀하기도 했지만, 최소한 현재까지는 자기 발목을 부러뜨리는 효과를 낳았을 뿐이다.

오늘날 다양한 위기와 변화의 전망 속에서 가장 유력한 대안으로 주목받고 있는 기본소득‘운동’도 비록 정신적인 차원이긴 하지만 그런 갈림길에 놓여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기본소득 아이디어는 지향하는 목표나 터 잡고 있는 근거에서 도덕적 우월성과 현실적이면서도 급진적인 태도를 확보할 수 있었다. 기본소득 아이디어는 역사적 사회주의의 붕괴 속에서도 그 홍수에 함께 떠밀려 가지 않은 ‘최소 기준’으로서의 자유, 평등, 사회정의, 인간의 존엄성을 그 어떤 사상이나 정책보다 확고하게 옹호하고 실현하는 것이며, 예상되는 사회 변화에 가장 능동적이고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대안으로 자신을 제시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런 도덕적 우월성과 현실적인 대안이기에, 머지않아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을 때가 올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신적 폭력의 유혹을 피해야만 한다면 현실의 변화는 정치적인 것의 자리에 스며들어야 하고, 정치의 장을 통과해야 한다. 이는 여기서 시작해서 저곳으로 어떻게 갈 것인가에 관한 경로를 제시하는 문제이고, 실제로 이 경로를 통과하는 실천이다.

스스로를 “상상하는 리얼리스트들”이라고 부르는 사회복지 연구자 네 명의 공동 저작인 『기본소득이 온다: 분배에 대한 새로운 상상』은 이런 경로에 대한 탐색이라는 점에서 주목받을 만하다. 네 사람은 기본소득의 필요성을 “자본주의의 질적 변화”에서 도출하는 것에서 시작해서, “한국형 기본소득”의 모델을 제시할 뿐만 아니라 기존 제도와의 실천적 비교 속에서 구체적인 이행의 문제를 검토하고 있다. 더 나아가 그동안 한국에서 이루어진 기본소득 논의와 실천, 정치적 투영과 전망 등을 검토함으로써, 한바탕 소용돌이처럼 몰아쳤던 기본소득 논의를 새로운 정치적 실천으로 끌고 갈 수 있는 쉼표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외면할 수 없는 성과물이라 할 수 있다.

우선 『기본소득이 온다』는 구성이라는 면에서도 독특하다고 할 수 있다. 그건 기본소득의 필요성과 정당성을 무엇보다도 저자들이 “자본주의의 질적 변화”라는 말로 포착하는 현실의 변화에서 찾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모든 책은 저마다 독특하고, 현대적인 의미의 국제 기본소득운동의 새로운 순환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는 2017년에 기본소득의 베테랑들이 각기 출판한 책도 마찬가지이기는 하다. 필리프 판 파레이스는 야니크 반더보르트와 함께 쓴 책에서 기본소득을 “자유의 도구”로 제시하고 있으며, 가이 스탠딩은 기본소득에 대한 정의에서 출발하며, 애니 밀러는 기존 복지국가의 문제점에 자기 논의를 근거하고 있다. 하지만 이 세 권의 책은 이른바 “철학적 정당화”라는 것에서 출발한다는 점에서 유사한 프레임을 가지고 있다. 그건 그동안 국제 기본소득운동이 걸어온 궤적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완전히 희망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공산주의는 사실상 무너져 가고 있었고 전쟁의 잿더미 속에서 다른 방식으로 정의를 구현하고자 한 복지국가는 점점 더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던 시점에서, 기본소득에서 어렴풋하나마 빛을 찾고자 한 사람들이 취할 수 있었던 태도는 무엇보다 그 정당성을 논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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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 시작되는 곳

첫눈에 반한다는 말이 있다. 나무랄 데 없는 두 사람이 만난다. 첫눈에 반해 금세 사랑에 빠진다. 이런저런 우여곡절이야 겪겠지만, 결국 사랑의 결실을 맺고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이런 얼개의 이야기는 판타지일 뿐 현실에서는 거의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소개팅에서 첫눈에 반한 상대를 만난 적이 있다는 선배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소개팅이었으니 이런저런 사회적 배경은 맞췄을테니 뜻밖의 배경을 지닌 사람을 만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용모나 매너에 반했다는 말일 텐데, 소개팅에서 첫눈에 반한 사람을 만났으니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을 것이라 예상했다. 지금 남편 자랑하려고 이 얘기를 꺼내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선배 얘기로는 첫눈에 반하고, 그뿐이었다고 했다. 다음에 만날수록 조금씩 단점이 보이고 부족한 면이 드러나고. 만날수록 재미가 없어지더라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평범한 사랑의 힘은 설렘과 놀람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쁘지 않네’ ‘호감이 가네’ ‘계속 만나 볼까’ 하는 정도의 감정을 일으키는 사람을 처음 만난다. 만날수록 이런 면모 저런 면모가 보이며, ‘어, 이런 면이 있었네’ 또는 ‘오, 멋진데’ 하며 놀라기도 하고, 이런 놀람에 다음 만남이 설레게 되고. 그러다 어느 순간 두 사람의 감정이 확 달아오르고, 뜨겁게 달아오른 감정을 지금까지 쌓아 온 믿음과 정으로 연착륙시켜서 오래 지속되는 관계로 만드는 것. 이런 관계가 아마 가장 일반적인 사람들의 사랑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말하자면, 놀람-탐색-설렘이 이어지며 사랑과 믿음과 정을 쌓아 가는 그런관계말이다.

앎이란 무엇인가

버트런드 러셀은 수학과 논리학에서 시작해서 철학의 거의 모든 분야를 다룬 저작을 펴낸 20세기의 대표적인 철학자다. 반전 평화 활동도 활발히 펼쳤고 대중서도 많이 펴냈기에 아마 가장 널리 읽히는 철학자 축에 낄 것이다. 그런 러셀은 자서전말고도 철학 자서전이라고 할 『나는 이렇게 철학을 하였다』도 썼다. 그 책에 평생에 걸친 철학 연구의 여정을 담았다. 러셀은 자신의 길고도 다채로운 철학 탐구를 다음과 같은 한마디로 간추려 말했다.

내가 평생 동안 계속 열심히 탐구했던 관심사는 오직 한 가지였다. 나는 철학을 시작해서 지금까지 우리가 안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되며, 또 우리가 안다고 주장하는 것이 어느 정도나 확실할 수 있고 어느 정도나 의심할 수 있는 것인가를 몹시 알고 싶어 했다.

러셀만이 아닐 것이다. 앎이 무엇이며, 어떻게 앎을 얻을 수 있고, 그렇게 얻은 앎의 옳고 그름을 어떻게 알 수 있는지 하는 물음은 서양철학사의 오래된 물음이다. 플라톤의 대화편 가운데 이런 물음을 다룬 것으로 『테아이테토스』가 있다. 소크라테스의 대화 상대자로 테아이테토스가 나온다. 이 대화편에서 보면 플라톤이 몹시도 테아이테토스의 자질을 아끼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실제로도 무리수 이론을 정립하고 입체기하학을 창시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이 대화편에서는 열여섯 살 정도의 어린 나이로 나온다.

『테아이테토스』는 후대에 많은 영향을 미쳤지만, 어렵기로 유명하고 그만큼 학자들 사이에서 해석을 둘러싸고 논란도 많은 대화편이다. 그런 와중에도 자주 회자되는 대목이 몇 가지 있는데, 저 유명한 산파술이 이 대화편에 나온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고상하고 건장한” 산파인 파이나레테의 아들로 소개하며 자신도 산파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 단, 산파들이 사람들의 몸을 출산하도록 돕는 데 비해 자신은 사람들의 영혼을 살핀다는 점에서 다르다고 하며 이렇게 말한다.

우리네 기술에서 가장 대단한 건, 젊은이의 생각이 모상과 거짓을 출산해 내는지 아니면 씨알 있는 참된 것을 출산해 내는지 온갖 방식으로 시험할 수 있다는 것이네. ( 『테아이테토스』, 150c)

젊은이의 영혼을 돌보며 젊은이들이 참된 지혜를 산출하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산파는 산파일 뿐 스스로 아이를 낳지는 못한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자기 스스로는 지혜를 낳지 못한다고 말한다. “신께서는 나로 하여금 산파 역할을 강제하셨지만, 직접 낳는 건 금하셨네.” 이렇게 말하며 “앎이 무엇인지” 젊은 테아이테토스가 깨달을 수 있도록 산파 역할을 시작할 테니 같이 잘해 보자며 격려한다. 이렇게 “앎은 지각이다” 하는 문제를 테아이테토스와 함께 한창 탐구해 나가는 가운데 소크라테스는 테아이테토스에게 잘 따라오고 있는지 묻는다. 젊은이에게는 거듭 이어지는 이 모든 논의가 일종의 충격처럼 다가온다.

소크라테스 선생님. 저는 이런 것들이 도대체 무엇인지 엄청나게 놀라고 있고, 때로는 저것들을 바라보다가 정말이지 현기증을 느끼기까지 합니다. ( 『테아이테토스』, 155d)

이런 말을 하는 테아이테토스에게 역시 뛰어난 자질을 보여 주는 젊은이라고 칭찬하며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말한다.

놀라워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철학자의 상태이기에 하는 말이네. 이것 말고 철학의 다른 시작은 없으니까. ( 『테아이테토스』, 155d)

놀라워하는 것thaumazein, 새로운 사실을 깨닫고 경이로워하는 것. 이것을 철학의 시작이라고 말하는 유명한 대목이다. 여기서 잠깐 놀람의 감정을 살펴보자. 놀라움은 원시 환경의 인간에게는 생존에 큰 도움이 되는 감정이었을 것이다. 갑자기 나타난 맹수처럼 새로운 위험이 닥쳤을 때 놀라지 않고 무덤덤했다면 닥친 위험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놀람은 다른 동물들에게도 흔히 보이는 감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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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통상 정책의 정치경제학

유승경 정치경제연구소 ‘대안’ 부소장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자국 시장 보호를 위한 강력한 통상 정책을 실행에 옮김에 따라 세계경제의 긴장이 높아지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가 보호주의적 통상 정책을 취하는 목적은 자국의 무역 적자를 줄이는데 있다. 실제로 미국은 다음 쪽의 그래프가 보여 주는 것처럼 1970년대 중반부터 무역 적자를 기록하기 시작하였고 그 이후 그 폭이 지속적으로 확대되었다.

트럼프는 만성적인 무역 적자 때문에 미국의 성장이 방해 받고 일자리가 줄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무역 적자가 발생하는 이유를 미국이 맺고 있는 무역협정이 불공정하고 무역 상대국이 환율 조작 등 불공정 무역 행위를 자행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트럼프 통상 정책의 기조는 자유무역을 옹호하는 대다수 경제학자들의 강한 비판을 받고 있다. 저명한 경제학자들이 나서서 트럼프와 그의 보좌관들은 경제학 개론 수준의 기초 이론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실제로 일부 경제학자는 각종 매체를 통해서 무역 적자 발생의 원인에 대한 기초 이론을 트럼프 행정부에게 강의한다.

그렇지만 트럼프의 정책에 반대하는 학자들이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경제학의 기초 이론에 대한 해석을 두고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일부 경제학자는 무역 적자는 문제가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하며, 다른 일부 경제학자는 만성적 무역 적자는 문제이지만 통상 정책은 적절한 해결책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최근의 이러한 논쟁 때문에 대학자들까지도 경제학의 기초에 대해서 다른 해석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

이 글에서는 트럼프 통상 정책을 지지하는 학자와 그에 반대하는 학자들의 다양한 주장과 그 근거를 검토해 보고, 이를 토대로 향후 트럼프의 통상 정책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를 전망해 본다.

1. 트럼프 통상 정책의 이론적 근거

미국은 2000년대 들어와서 경제성장이 매우 느려졌다. 2000년부터 2017년까지 미국의 연평균 성장률은 2.0%에 그쳤는데, 그 이전 50년간 평균 3.0%를 상회한 것에 크게 못 미치는 수준이다. 보호주의 정책의 옹호자들은 1990년대 중반부터 특히 심화된 무역 적자가 미국 경제의 성장을 둔화시킨 가장 큰 요인이라고 주장한다.

트럼프 행정부의 통상 정책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는 경제학자는 캘리포니아 어바인 대학의 피터 나바로 교수다. 그는 현재 상무성 장관인 윌버 로스와 함께 2016년 트럼프의 정책을 뒷받침하는 보고서를 발표한 바 있다. 그들의 논거는 의외로 단순했고 많은 학자들로부터 “경제학 문맹Economic Illiteracy”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나바로와 로스는 공동으로 집필한 「트럼프의 경제계획 평가」라는 논문에서 무역 적자가 성장을 저해한다는 근거로서 “국민소득은 소비, 투자, 정부 지출, 수출의 합에서 수입을 뺀 것(GDP=C+I+G+X-M)”이라는 국민소득 균형 식을 제시했다. 이에 근거하여 수출은 GDP에 기여하며 수입은 GDP를 삭감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트럼프의 목표는 아주 간단하게 수출을 늘리고 수입을 줄이는 것이라고 못 박고 있다. (Peter Navaro & Wilbur Ross, Scoring the Trump Economic Plan, 2016, p. 9, p. 29.)

여기에 대해서 유명 학자들이 나서서 트럼프 측의 주장은 국민소득 균형 식에 대한 어처구니없는 몰이해에 기반하고 있음을 지적했다. 소비(C), 투자(I), 정부 지출(G), 수출(X)의 합에서 수입을 빼는 이유는 소비, 투자, 정부 지출에 이미 수입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이중 계산을 피하기 위해서 수입을 차감한 것일 뿐, 수입이 성장을 저해하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한다. (Noah Smith, Trump’s Trade Chief Makes a Rookie Mistake, Bloomberg View, 2016, p. 12, p. 28.)

이 지적은 정확한 이야기이지만 트펌프의 통상 정책을 자문하는 사람들은 괘념치 않는다. 그들의 계산법도 간단하다. 미국은 2015년 5,000억달러의 무역 적자를 기록했고, 미국의 2015년 명목GDP는 2014년에 비해서 6,440억달러 증가했다. 따라서 미국이 무역균형을 달성했다면 명목GDP의 증가분은 두 수치를 합친 11,440억달러가 되었을 것으로 계산한다(Peter Navarro & Wilbur Ross, 위의 책).

이들은 트럼프 정책에 대한 주된 비판에 대해서도 완강하고 강력하게 반박한다. 트럼프의 정책에 대한 널리 공유되고 있는 비판은 두 가지다. 첫 번째는 해외의 값싼 제품의 수입을 막으면 인플레이션이 발생할 것이며 이로 인해 저소득 가계에 부담을 가중시켜, 수입제한은 역진세의 효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트럼프의 정책이 무역 전쟁을 야기해서 대공황과 같은 경제 위기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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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대 총선 이후 한국 정당체제의 변화

지병근 조선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1. 정당

한국에서 정당의 수명은 대체로 정치인의 수명보다 짧다. 그 이유는 단순히 정당의 지도부가 지조가 없거나, 부도덕하거나, 능력이 없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는 정당이 정치인들에게 권력을 창출하는 하나의 수단일 뿐이지 목적 자체는 아니기 때문이다. 집권 수단으로 기능하지 못하는 정당은 정치인들에게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숭고한 조직이 아니라, 필요하면 과감히 버려야 할 소모품일 뿐이다. 물론 일체감을 강하게 느끼거나 이념적으로 신성화되었다면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정당은 그러한 위치에 있지 않다.

물론 정당의 존재 이유는 국회의 의석수 확대나 집권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정당은 다양한 목표를 두고 있으며, 오히려 행정부의 장악보다는 당헌과 강령에 묘사된 사회상을 현실화시키기 위해 사회로 ‘침투penetration’하는 데 목적을 둘 수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정당은 단기적인 집권을 위해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지 않거나 때로는 스스로 변형시키곤 한다. ‘선거 정당’ 혹은 ‘포괄 정당’으로의 변신은 사회주의체제의 몰락으로 가속화되었다. 사실 탈냉전기 현대 정당정치의 역사는 다름 아닌 이념으로부터의 탈출기exodus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민주화는 정당 중심의 정치 발전을 촉진하는 기폭제가 되었으며, 정당들의 이념과 정책적 지향을 유연화시킴으로써 이들 사이의 이합집산을 자유롭게 만들었다. 대표적으로 1997년 대선을 앞두고 국민회의가 급속히 우경화된 공약을 제시하며 김대중과 김종필이 DJP 연합을 형성한 것이나, 2012년 총선과 대선에서 새누리당이 자신의 이념적 위치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경제민주화를 공약으로 제시했던 것이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최근 정의당 지도부가 민주평화당과 공동교섭단체를 구성하기로 합의한 것도 유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당체제가 개별 정당의 생애처럼 빈번하게 바뀌는 것은 아니다. 1987년 민주화 이후 한국의 정당체제는 ‘지역주의적 정당체제’를 공고화시켜 왔다. 비록 일반 유권자들은 기억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거의 모든 정당이 당명을 바꾸거나 분열과 통합을 거듭해 왔지만, 영호남 출신의 정치인들은 지역을 대표하는 정당을 만들고 유권자들은 이들을 일관되게 지지하는 패턴이 반복되어 왔다. 아울러 한국은 권위주의 체제하에서 형성된 ‘노동 없는 정당체제’를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 2004년 이후 민주노동당이 원내에 진입하는 성과를 얻었지만, 그 규모는 10석 내외에 불과하였으며, 그 후신인 통합진보당은 헌법재판소에 의해 해산당하고 말았다. 비록 그 후에도 정의당이 통합진보당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지만, 의석수가 한자리 수에 머무르는 등 노동과 진보를 대표하는 정당들의 성과는 미약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당체제가 항상 변함이 없는 것은 아니다. 표면적으로는 동일한 정당체제가 유지되더라도 이를 구성하는 정당이나 이들 사이의 관계는 끊임없이 변화하며 요동치기 마련이다. 이 글은 20대 총선을 전후로 이루어진 한국의 정당들의 통합과 분열의 역사를 개괄적으로 탐색하고 임박한 6·13 동시 지방선거를 계기로 한국의 정당체제가 재편될 가능성에 대한 전망을 간략히 제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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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저임금제는 앞으로도 유효할까?

금민 정치경제연구소 ‘대안’ 소장

최저임금제는 노동시장 외부에서 국가가 임금 최저선wage floor을 결정하고 사용자가 그 이상의 임금을 지급하도록 법률로 강제하는 제도다. 법정 임금 최저선은 통상적으로 시간당 최저임금, 곧 최저시급의 형태로 정해진다. 임금 최저선을 노동시장의 수요와 공급에 맡기지 않고 시장의 외부에서 결정하는 제도로 법정 최저임금제만 있는 것은 아니다. 협약임금제는 노동시장의 수요와 공급이 아니라 단체협약에 의해 임금을 결정하는 제도이며, 산업별 단체협약은 동일 산업 내에서 적용되는 임금 최저선을 정할 수 있다. 단체협약의 구속력이 노조에 가입하지 않은 노동자에게도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제도를 택하고 있는 경우, 해당 산업의 임금 최저선은 법정 최저임금이 아니라 산업별 단체협약의 임금 최저선에 의해 결정된다. 물론 이 경우에도 산업별 단체협약의 임금 최저선은 법정 최저임금보다 높을 수는 있지만 결코 낮을 수는 없다. 노동시장 외부에서 임금 최저선이 결정된다는 점은 협약임금과 최저임금의 공통적인 특징이며 최저임금제만의 특징은 아니다. 따라서 협약임금에 대비하여 최저임금제만의 고유한 특징은 노사 당사자의 자율적 결정이 아니라 국가에 의해 전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임금 최저선이 결정된다는 점이라고 보아야 한다.

신자유주의 이전의 자본주의 황금기에는 산별 단체협약이 임금 최저선 기능을 비교적 충실히 수행했다. 당시에는 법정 최저임금제의 필요성은 노조의 힘이 상대적으로 약했던 영미권 국가들에 국한되었다. 하지만 전 세계적으로 신자유주의에 의해 불안정노동이 확산되면서 고용과 소득의 탈동조화 현상이 심화된 상황에서, 게다가 노조 조직률이 신자유주의 이전과 비교하여 절반 이하로 떨어지고 단체협약의 효력 확장 조항도 제 구실을 못하게 된 상황에서는 협약임금제의 임금 최저선 기능은 무력화되고 저임금 노동에 대한 보호 기능은 주로 법정 최저임금제가 떠맡게 된다. 이런 사정으로 신자유주의를 거치면서 그 이전에는 없던 법정 최저임금제가 도입된 나라가 있다. 산별협약의 일반적 구속력 제도에 의해 임금 최저선을 결정하던 독일은 2015년부터 법정 최저임금제를 도입한다. 2008년의 경제 위기 이후 긴 침체기가 이어지자 국제노동기구ILO 학자들은 최저임금 인상을 임금 주도 성장의 주요 수단으로 제시했다(Stockhammer and Lavoie, 2012). 이러한 입장은 주요 국가의 정책에도 수용되어 미국과 유럽 여러 나라 정부는 최저임금 인상 흐름을 만들어 갔다. 마찬가지로 문재인 정부도 소득 주도 성장이라는 이름 아래 2018년도 최저임금을 16.4% 인상했고 최저임금 인상을 감당하지 못할 영세기업에 대해서는 인상률만큼 임금 보조금을 지급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최저임금제가 과연 앞으로도 저임금 노동을 없애고 임금격차를 줄이는 역할을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 질문은 세 가지 차원에 걸쳐 있다.

첫째, 플랫폼 노동이 폭발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오늘날에도 최저 시급제는 여전히 임금 최저선의 기능을 가질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고, 둘째, 최저임금제와 노동자의 협상력의 상관관계, 또한 이 문제와 연동된 질문으로서 최저임금이 인상되면 다른 조건과 무관하게 평균 임금 인상 효과가 생겨나는가라는 질문이며, 셋째, 최저임금 인상과 GDP 대비 노동소득분배율의 상관관계에 대한 질문이다. 이러한 문제들을 다루면서 이 글은 일자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임금 최저선을 보장해 주는 최저임금제와 모든 사람에게 ‘소득 최저선income floor’을 보장하는 기본소득의 효과를 상호 비교할 것이다.

1. 최저시급제와 플랫폼 노동

산업자본주의는 생산과 재생산, 노동시간과 여가시간의 명확한 분리를 전제로 했다. 최저시급제는 산업자본주의의 전일제 고용에 알맞다. 최저시급제는 개별적인 노동이 공장노동으로 균질화되어 노동시간의 양적 크기로 계량될 수 있던 산업자본주의 시대의 산물이다. 계절과 기후에 따라 가변성을 가지는 ‘농경적 시간agrarian time’과 달리 ‘산업적 시간industrial time’은 균질적인 양적 단위로 분할할 수 있다. 최저시급제가 저임금 보호제도로 기능할 수 있으려면 경제의 시간 개념이 ‘산업적 시간’으로 이루어져 있어야 한다. 반면에 노동과 활동의 구분이 불분명해지고 양적 단위로 나눌 수 없는 ‘제3의 시간tertiary time’에 의해 경제활동이 진행되면 최저시급제가 임금 최저선으로 기능하기 어렵다(Standing, 1999: 3∼9; 2013: 5; 2017: 160, 189). 여기에서 굳이 노동시간 척도의 미래에 대해 더 깊이 다룰 필요는 없다. 오히려 논의의 폭을 좁혀 오늘날 폭발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플랫폼 노동에 대해 최저시급제의 보호 기능은 대단히 제한적이라는 점만을 살펴보자.

플랫폼 노동은 ‘주문형 앱 노동on-demand work via app’과 ‘크라우드 노동crowdwork’의 두 형태로 구분된다. 주문형 앱 노동이란 서비스 요청자와 제공자의 연결은 온라인 플랫폼에서 이루어지지만 실제 서비스의 제공은 오프라인에서 대면 관계로 이루어지는 형태다. 주문형 앱 노동에서는 노동시간 못지않게 대기시간이 길지만, 대기시간에 대해서는 최저시급제가 적용되지 않는다. 대기시간까지 노동시간으로 보지 않는다면 최저시급을 올려도 기대한 만큼 노동보호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다(Huws, 2018). 그런데 대기시간에 대해서도 최저시급제를 적용한다는 것은 대기시간에 대해 일단 임금을 지급한다는 것이고 누군가가 이를 부담해야 한다는 뜻이다. 즉 주문형 앱 노동에 전형적인3 각 관계인 플랫폼 기업, 서비스 요청자, 제공자의 관계에서 플랫폼 기업과 서비스 제공자의 관계를 사용-종속 관계로 정형화해야만 대기시간에 대해서도 임금을 지급할 수 있다. 법률적으로 우버 택시 운전자는 우버의 피고용자로 보고 우버는 운전자들에게 대기시간에 대해서도 최저임금을 지불해야 하고 결과적으로 우버 서비스요금은 올라갈 것이다. 결국 이와 같은 법률적인 정비는 우버나 배달앱처럼 서비스 중개를 하는 ‘린 플랫폼lean platform’의 수익을 없앨 것이고 경제적으로는 금지하는 효과를 낳을 것이다. 사용-종속 관계의 정형화는 린 플랫폼 기업의 비즈니스 모델인 불안정노동의 동원을 통한 지대 수익을 불가능하게 만들 것이므로 차라리 폐업을 택할 가능성이 높다.

주문형 앱 노동의 경우에는 적어도 서비스의 제공은 대면 관계를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사용-종속 관계의 확대가 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대기시간까지 포함하는 최저시급제를 적용할 여지는 적어도 논리적으로는 남아 있다. 하지만 온라인 플랫폼에서 특정 업무가 공시된 후 전 지구적 차원에서 불특정 다수가 참여하여 작업한 양만큼 보상을 받는 크라우드 노동에 대해서는 명확한 사용-종속 관계를 따지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크라우드 노동자가 제공하는 서비스를 노동시간 단위로 계측하는 일도 쉽지 않다. 오늘날 크라우드 노동은 저임금의 다른 이름이다. 아마존 미케니컬 터크Amazon Mechenical Turk가 제공하는 업무의 90%는 시간당 임금으로 계산하면 2달러 이하의 저임금 노동이지만, 전 지구적 범위에서 노동이 중개되기 때문에 국민국가의 노동법이나 사회보장법에 의하여 보호받지 못하고 최저시급제를 적용할 수도 없다. 크라우드 노동에 대한 보호 문제가 공동 결정권과 정보권을 중심으로 논의되는 실정은 이러한 사정을 반영한다(Leist et. al., 2017: 67∼69).

*문재인 정부의 최저임금 인상 정책의 명암에 대해서는 『시대』 2018년 3월호(제56호)에 실린 조혜경의 글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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