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저임금 1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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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저임금으로 국민주권을 지키려는 맥도날드 라이더

최저임금 1만원

최저임금 1만원.
알바들의 유쾌한 반란 개정판
박정훈 지음| 2018년 7월 | 240쪽 | 박종철출판사

김태호 발행인

1.

2012년 대통령 선거에 한 여성 청소 노동자가 후보로 등록했다. 민주노총 울산지역연대노조 울산과학대 지부장 김순자. 선거운동본부 ‘순캠’은 비정규직노동자를 후보로 내세운 선본답게 “최저임금 1만원”, “온 국민 안식년 제도”, “기본소득” 등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얻은 표만 보자면 커다란 의미를 남겼다고 할 수 없겠지만, ‘순캠’에 모였던 젊은이들의 이후 운동은 한국에서 최저임금을 둘러싼 논의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2013년 1월 1일 ‘비정규불안정노동자와 함께하는 알바연대’(‘알바연대’)의 “출범을 알리는 기자회견에는 단 한 명의 기자도 없었”다(182쪽).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알바연대는 새벽에 편의점이나 PC방을 돌며 알바를 만나 실태를 조사했고, 세상에 왜 최저임금이 시간당 1만원은 되어야 하는지를 알렸다. 그리고 2013년 8월 5일 아르바이트노동조합(‘알바노조’)이 설립됐다.

2014년 3월에 나온 박정훈의 『알바들의 유쾌한 반란』은 알바연대의 활동을 알리고 ‘최저임금 1만원’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책이었다. 기획자로 되어 있는 “권문석”은 알바연대 대변인으로 활동하며 ‘최저임금 1만원’ 운동에 앞장서다 2013년 여름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 사람이다.

『최저임금 1만원』은 2014년에 나온 그 책의 개정판이다. “낡은 통계자료들을 최근 통계자료로” 바꾸었으며, 문재인 정부 들어 “최저임금이 예전보다 많이 오르면서 등장한 새로운 논쟁 지점”을 추가했다(11쪽).

2.

지금도 그런 용어가 쓰이는지 모르겠으나, 1980년대 운동권에는 ‘시각 교정용 도서’라는 것이 있었다. 주입되어 지니고 있던 생각을 뒤흔들 만한 책을 가리키는 것이다. 주로 한국의 근현대사에서 감추어져 있던 사건을 파헤치거나 처참한 사회 현실에 대한 고발을 담은 책이었다. 결국 더 많이 알고 더 많이 행동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만드는 책을 그렇게 불렀다.

초판 『알바들의 유쾌한 반란』이 그랬듯이 개정판 『최저임금 1만원』도 경어체로 되어 있다. 차근차근 이야기하며 독자에게 손을 내미는 듯한 분위기다. 말하자면 이 책은 “최저임금 1만원 운동”을 중심으로 하는 이 시대의 ‘시각 교정용 도서’로 기획된 듯하다.

3.

제1장(“알바생 vs. 알바노동자”)은 “최저임금 1만원”이라는 주제와 관련된 본격적인 논의에 들어가기에 앞서, 한국 사회에서 “알바”란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를 묻고 있다. “망한 인생의 상징일까? 자유의 상징일까?”

저자는 “알바노동 자체에 이중적인 성격이 존재하기도”(31쪽) 한다고 본다. 수입과 고용이 안정된 일자리를 얻지 못한 처지이지만, 출퇴근 시간에 얽매이는 정규직보다 자유롭다는 것이다. 원하는 시간만큼만 일하고 나머지 시간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으니까. 가이 스탠딩이 프레카리아트를 두고 “희생자로서의 정체성과 영웅으로서의 정체성이라는 이중 정체성”(『프레카리아트. 새로운 위험한 계급』, 박종철출판사, 12쪽)이라 한 것과 유사하다 하겠다.

아울러 저자는 “알바생”이라는 표현에 담긴 편견을 폭로하고 “알바노동자”로 부를 것을 제안한다. “알바노동”이 “학생이 부업으로 하는 일쯤으로 전락”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34쪽). 실제로 현재 알바노동자는 학생 연령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알바생”이라 여기면서 여러 갑질이 벌어진다. 권문석의 삶을 다룬 얼마 전에 나온 책 제목이『‘알바생’ 아니고 ‘알바노동자’입니다』다.

이런 식으로 “이데올로기”가 어떤 효과를 낳는지를 필자는 다른 예로도 보여 준다. “청소 노동자는 한 시간 7,359원, 이건희는 하루 3억원이 당연하다?”, “노동조합은 빨갱이가 하는 짓?”, “일은 군필자가잘한다?” 필자는 이런 것들을 “이데올로기가 주는 가상”이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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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소득은 어떻게 노동자 소유 기업을 활성화시킬 수 있는가? ― 경제민주주의를 향한 투 트랙 전략*

이건민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운영위원, 정치경제연구소 ‘대안’ 상임연구원

1. 서론: 경제민주주의 차원에서의 기본소득과 노동자 소유 기업

오늘날 자유, 평등, 시민권, 민주주의 등의 추상적인 가치들을 급진적이고도 해방적인 방향으로 확장하고자 고민하는 그 누구라도 기본소득이라는 아이디어와 만나게 되고 이와 고투하게 된다. 기본소득을 지지하고 옹호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기본소득이 다음과 같이 자리매김되는 것은 너무도 자명한 일이다. 기본소득은 자유의 측면에서는 형식적 자유에서 실질적 자유로(Van Parijs, 1995; Van Parijs and Vanderborght, 2017), 가장 확장된 자유의 개념인 공화주의적 자유로(Raventós, 2007; Casassas, 2016; Casassas and De Wispelaere, 2016;Standing, 2017) 나아가기 위한 필수 요소다. 평등의 면에서는 현재의 극심한 사회경제적, 젠더 차원의 불평등을 좀 더 평등한 방향으로 변화시키기 위한 필요조건이다(Fraser, 1994; Zelleke, 2008, 2011; 이건민, 2017). 시민권과 민주주의의 차원에서는 인구학적 상황, 경제적 상황, 종사상의 지위와 계급 등에 상관없이 모두에게 지급되는 정당하고도 바람직한 사회배당이자, 공민권과 정치권, 절차적 민주주의를 넘어서 사회경제적 권리와 경제민주주의로 나아가기 위한 필수 구성 요소다.

그런데 우리 시대에서 경제민주주의를 심화, 발전시키기 위한 주요한 방안으로는 기본소득뿐만 아니라 노동자 소유 기업(노동자 소유 협동조합을 포함하여)도 함께 떠오른다. 본고에서는 경제민주주의를 다음과 같은 사중의 능력으로 정식화한 카사사스(David Casassas, 2016:1)의 정의를 따를 것이다. “(ⅰ) 일하기 위해 ‘진입’하기를 바라는 사회적 관계들을 정할 능력. (ⅱ) 우리가 머무르고 일하기로 한 공간의 (비)물질적 성격을 결정할 능력. 그것은 실질적으로 들리는 ‘목소리 (발언권)’를 갖는 능력을 필요로 한다. (ⅲ) 이 공간의 성격과 기능이 우리의 삶에서 바라는 바에 반하는 경우 이 공간에서의 ‘탈출’을 선택할 능력. (ⅳ) 떠나기로 선택한 경우에, 그 다음의 기회들을 위한 이전 직장의 외부에서 제공되는 수단들에 의지할 수 있는 능력. 즉 지금과는 다른 조건과 상태에서 (재)생산적 삶을 효과적으로 ‘다시 시작할’ 능력.” 이러한 경제민주주의의 추구라는 점에서 보자면, 기본소득과 노동자 소유 기업은 조금은 다른 점들을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기본소득이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생산과 노동, 작업장의 영역을 넘어서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들에서 광범한 의미에서의 경제민주주의의 만발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되는 반면, 노동자 소유 기업은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생산과 노동, 작업장 영역에서의 민주주의, 즉 기업민주주의나 산업민주주의의 심화, 발전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되어 왔다.

경제민주주의 측면에서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노동자 소유 기업은 기본소득과 관련하여 거의 연구되어 오지 않았다. 이는 일자리의 양과 질 모두 문제시된다고 전망되자 일자리 보장과 참여소득이 기본소득의 대안이 될 수 있는지, 무엇이 더 우월한지, 대체 관계에 있는지 보완 관계에 있는지 등이 활발히 연구되어 온 것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하지만 비록 지금까지 거의 논의되어 오지 않긴 했지만 경제민주주의 혹은 산업민주주의 면에서 일자리 보장이나 참여소득보다 훨씬 대담한 제안은 바로 노동자 소유 기업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이 기본소득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 살펴보는 것은 비판적, 해방적 사회과학과 사회정책을 추구하는 데 핵심적이다.

이 글에서는 기본소득의 도입과 노동자 소유 기업의 발흥이 경제민주주의의 핵심을 이룬다는 관점 하에서, 기본소득이 노동자 소유 기업의 활성화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경로와 기제를 탐구할 것이다.

이 글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우선 노동자 소유 기업이 자본주의적 기업에 대해 지니는 비교우위와 비교열위를 검토한다. 다음으로 기본소득의 도입이 노동자 소유 기업의 활성화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경로와 기제를 탐구한다. 이 글의 마지막에서는, 경제민주주의를 향한 투 트랙 전략으로서 기본소득의 도입과 노동자 소유 기업의 활성화가 우리 시대의 주요한 해방적 대안이 될 수 있음을 강조하면서 글을 맺는다.

 

* 이 글은 제18차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 대회(2018년 8월 24~26일, 핀란드 탐페레대학교) 세션 B4에서 필자가 발표한 “How Can Basic Income Activate and Encourage Labor-Managed Firms?: A Two-Track Strategy for Economic Democracy”를 번역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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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중 무역 전쟁과 미국적 자유주의의 쇠락

유승경 정치경제연구소 ‘대안’ 부소장

1. 도입

미국이 중국을 상대로 무역 전쟁을 시작했다. 미국무역대표부USTR는 지난 7월 6일 이제까지 공언했던 바대로 340억달러어치의 중국산 수입품에 25%의 관세를 실제로 부과했다. 중국은 그 즉시 같은 규모의 미국 수입품에 대해서 보복관세를 부과했고, 미국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추가적으로 8월 23일부터 나머지 160억달러에 대해서도 25%의 관세를 부과할 것이라고 예고했다. 중국도 역시 이에 대해서도 같은 규모로 25%의 보복관세를 부과한다는 방침을 결정했다. 이것이 끝이 아니다. 미국은 25% 관세를 2,000억달러어치로 확대하는 것을 검토 중이라고 밝혔으며, 중국도 그럴 경우에 600억달러어치의 미국 수입품에 대해서 5~25%의 보복관세를 부과할 수 있다며 맞불을 놓고 있다.

미국의 이러한 조치는 국제무역기구WTO에 의해서 뒷받침되는 자유무역의 질서를 부정하는 것이다. 미국이 WTO의 틀에서 벗어난 것은 여러 측면에서 의외의 일로 받아들여진다. 우선 1995년에 출범한 WTO는 냉전 종식 이후 조성된 미국 주도의 세계 질서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WTO의 출범은 분명히 미국이 대변하는 경제적 자유주의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었다(Gregory Shaffer, China’s Rise: How It Took on the U. S. at the WTO, University of Illinois Law Review, 2018).

또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헤게모니가 관철되던 지역 내에서는 자유무역에 대한 강한 정치적 합의가 있었다. 보호무역은 국제무역을 위축시켜 경제성장을 저해할 뿐만 아니라 세계경제의 분할로 이어져 국민국가 간 전쟁을 불러올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합의는 1930년대에 미국을 필두로 서구 제국들이 보호무역을 실시한 것이 대공황을 심화시켰고 결국에는 세계대전을 야기했다는 널리 공유되는 인식에 근거한 것이다. 자유무역에 대한 신념은 미국과 영국에서 발달한 주류 경제학에 의해서도 더욱 강화되었다. 세계적 차원에서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자유주의 경제학은 스미스와 리카도의 이론을 원형으로 삼아 오랫동안 자유무역을 이상으로 간주해 왔기 때문이다. 게다가 1990년대 초 소련 및 동유럽 사회주의의 붕괴는 자유로운 시장 및 무역의 승리를 역사적으로 확인시켜 준 것으로 여겨졌다.

이런 이유로 아직까지 미국의 대다수 경제학자들은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을 비판하고 있으며, 무역 전쟁이 야기할지도 모르는 세계 경제의 혼란에 대해서 우려하고 있다. 그러면 왜 미국의 트럼프 행정부는 서구 세계의 오랜 합의였던 자유무역을 부정하고 자국이 만든 WTO의 질서에서 벗어나려는 것일까? 이 글에서는 미국이 WTO의 틀을 깨고 보호무역을 추진하는 이유에 대해서 살펴본다.

2. WTO 가입 이후 중국의 무서운 추격

미국의 표면적인 명분은 현재의 WTO 규칙이 진정한 의미의 자유무역에서 벗어난 중국의 불공정 행위를 시정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현재의 WTO 규칙이 미국에게 불리하고 중국에게 유리하게 만들어져 버렸다고 판단하고 있다. 미국이 그런 주장을 펴는 이유는 중국이 WTO에 가입한 2001년 이후 양국 간의 경제 실적의 놀라운 격차에서 확인할 수 있다.

미국은 자국이 주도하여 중국의 WTO 가입을 허용했다. 당시 클린턴 대통령을 비롯한 미국의 정치인들은 중국이 자유무역 체제에 들어오게 되면 미국의 기업과 노동자들에게 많은 새로운 기회를 창출할 것으로 굳게 믿었다. 중국이 WTO 규칙에 따라 관세를 낮추면, 미국이 우월한 산업적, 금융적 경쟁력을 통해서 중국으로의 수출을 확대하고 그것에 힘입어 미국의 고용도 확충될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은 결과적으로 크게 빗나갔다.

그 결과는 통계에서 분명히 확인된다. 미국의 대중對中 무역 적자는 2000년 약 831억달러였는데, 2017년에는 약 3,756억달러로 거의 4.5배로 늘어났다. 미국의 수출이 늘어나기는 했지만, 수입의 증가에 의해서 완전히 압도되어 버렸다. 무역 적자가 중국의 노동 집약적인 저가 상품에 의해서만 야기된 것은 아니다. 시간이 갈수록 컴퓨터, 전기 장비, 전자 및 부품 등 고기술 제품의 비중이 증가하고 있다. 2018년 7월에 발표된 미 의회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의 대중 수입에서 “선진 기술 제품”이 차지하는 비중이 33.8%에 이른다(Wayne Morrison, China-US Trade Issues, CRS, 2018).

대중 무역 적자의 문제는 단지 그 규모에 한정되지 않는다. 무역적자의 증대는 미국의 일자리를 감축시켰다. 2014년에 발표된 경제정책연구소Economic Policy Institute의 보고서에 따르면, 2001년부터 2014년 사이에 대중 무역 적자로 인해 320만 개의 미국 내 일자리가 사라진 것으로 추정했다(EPI, China Trade, Outsourcing and Jabs, 2014).

위 통계에 비춰 보면, 미국 행정부는 미중 무역에서 발생하는 적자를 계속해서 감내하기 어려운 상황에 있다. 그런데 미국이 우려하는 것은 무역 적자의 규모 자체가 아니라 2001년 이후 중국이 보여 주고 있는 놀라운 정도의 경제적 추격이다. 2001년 미국의 경제 규모는 명목 GDP 기준으로 중국의 7.9배에 달했지만, 2017년에는 1.6배에 불과하다(IMF, World Economic Outlook). 이 추세라면 중국은 미국을 조만간 추월하게 된다.

중국의 추격은 거시적 차원의 지표에 그치지 않는다. 중국은 세계 500대 기업에 속하는 기업의 수가 미국 다음으로 많다. 세계 4대 은행이 전부 중국 기업이며, 100대 은행에 속하는 은행의 수도 세계에서 가장 많다(Mark Wu, The “China, Inc.”, Challenge to Global Trade Governance, 2016).

미국의 정치 지도자들은 중국의 WTO 가입이 중국을 미국적 규칙에 복속시켜 미국에게 유리할 것으로 생각했지만, 17년이 지나고 보니 중국이 미국의 세계 패권을 위협하고 있다. 이로 인해 미국은 현재 WTO의 규칙이 중국의 경제적 추격을 허용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하고, 중국의 세계 패권 도전을 막기 위해 자신들이 확립한W TO의 규칙을 전반적으로 재검토하고 있다.

사실, 미국이 WTO 체제를 부정하려는 움직임은 돌출적인 정치인인 트럼프에 의해서 처음 제기된 것은 아니다. 2010년경부터 WTO가 중국에게 유리하고 미국에게 불리하게 만들어졌다는 주장은 미국 내에서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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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의 죽음과 노회찬의 죽음

박기순 충북대 철학과 교수

1. 자살이란 무엇인가?

지난 7월 23일 정의당 국회의원이었던 노회찬 의원이 세상을 떠났다. 자살이었다.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사실이 드러나면서 자신의 “어리석은 선택”에 책임을 지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한국진보운동과 함께해 왔던 그의 삶을 알기에 많은 사람이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충격을 받았고 슬퍼했다. 그리고 또 많은 사람은 ‘꼭 그래야만 했는지’를 물으며 아쉬워하고 안타까워했다.

사실 일반적으로 스스로 삶을 마감하는 ‘자살’이라는 행위는 쉽게 이해될 수 없는 종류의 것이다. 왜냐하면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흔한 경우는 아니지만 때로는 목숨을 걸고 어떤 일을 하는 경우도 물론 있지만, 이 경우에도 죽음이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다. 두려운 것이기 때문에 ‘무릅써야’ 하는 결단이 필요한 것이 아니겠는가? 따라서 두려움의 대상인 죽음을 자발적으로 선택한다는 것은 쉽게 이해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이다. 사실 우리는 살기를 원한다. 어쩌면 이것은 모든 살아 있는 생명체의 가장 원초적이고 기본적이며 보편적인 욕구일 것이다. 이렇게 보면, 자살은 살아 있는 존재에게는 자기모순적 행위다. 즉 그것은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행위인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인간은, 존재들 가운데 가장 뛰어나다고 간주되는 인간은 살고자 하는 자연적 욕구를 거스르는 행위를 하는가?

현상적으로 자살의 형태를 띠고 있는 행위들이 엄밀히 말해 모두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외견상으로는 자살이지만 실제로는 타살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요즈음 뉴스를 매일같이 장식하는 이러저러한 자살 소식들은 더 이상 놀라운 일이 아니다. 우울해서, 살길이 막막해서, ‘왕따’를 당해서 사람들은 자살을 선택한다. 그러나 이 선택은 강제된 선택이다. 살기를 원했지만 최소한의 살아갈 의지마저도 앗아간 이러저러한 환경과 원인 때문에 더 삶을 계속할 의지를 상실한 것이기에, 최종 행위자는 자기 자신이지만 그 행위의 진정한 원인은 외부에 있다. 이러한 이유로 철학자 스피노자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자살은 우연히 칼을 든 손이 외부의 힘에 의해 자신의 심장을 찌르는 행위라고 정의한 바 있다.

이 정의에 따르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자살’로 부르지 않는 행위도 앞에서 말했던 자살적 행위와 같은 것이 된다.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 그것도 잘 살기 위해서는 부와 쾌락과 명예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들을 맹목적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추구한다. 그러는 사이 우리 삶은 황폐해지고, 돌보고 사랑해야 할 많은 것을 잃는다. 이 경우, 우리가 살기 위해서 하는 많은 것은 실제로는 우리의 삶을 파괴하게 된다. 스스로의 행위를 통해서 부지불식간에 자신을 죽이는 것이지만, 실제로 여기에서도 죽음의 실제적인 원인은 내가 아니라 외부 원인에 있다. 예를 들어 보자. 즐거운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즐거운 것들을 추구할 것이다. 그러나 나를 즐겁게 하는 모든 것이 나를, 나의 삶을 아름답고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많은 경우 그것들은 반대로 나의 삶을 불행에 빠뜨리거나 파괴한다. 그런데 이렇게 내가 나의 삶을 파괴하게 되는 것은 내가 행복(잘 사는 것, 잘 존재하는 것)을 쾌락적인 삶으로 혼동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혼동은 외부의 어떤 것(나에게 쾌락을 주는 것)이 나에게 미친 영향(쾌락)에 굴복하여 그것을 올바르게(나에게 진정으로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판단하지 못한 것에서 온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잘못 살아가는 것’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자살’이라고 부르는 것과 하등 다를 바가 없다. 즉 그것은 자살의 형태를 띠고 있는 타살인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의미의 자살은 없는가? 이것이 우리가 생각해 볼 문제다. 고 노회찬 의원의 자살은 분명 앞에서 언급한 ‘자살의 형태를 띤 타살’과는 조금 달라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경우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 경우를 성찰할 수 있게 해 주는 사례 하나가 철학사에 있다. 다름 아닌 소크라테스의 죽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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