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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 왕자와 천장의 눈

임영근 정치경제연구소 ‘대안’ 상임연구원

종교적 신념을 가진 사람들은 종교에는 도덕성을 떠받치는 강력한 힘이 작용한다고 믿는 듯하다. 이런 생각을 다음과 같은 시나리오에서 엿볼 수 있다. 커다란 방에 이 세상에서 딱 하나밖에 없는 예술품이 설치되어 있다고 상상해 보자.

방 중앙의 작은 테이블 위에 아름답고 멋지고 난해한 예술 작품이 놓여 있다. 다채로운 색깔의 온갖 손잡이와 황금빛 지렛대, 반짝이는 크리스털, 은빛의 공, 귀여운 종, 스파이크가 박힌 바퀴, 붉은 바큇살, 부서지기 쉬운 나뭇가지, 거미집처럼 얽힌 철사 등이 상상 속에서나 나올 것 같은 사이키델릭한 형태로 배열되어있어서 정말로 화려해 보인다. 그런데 이 작품은 손상되기 쉬운데다 유일한 것이기도 하다. 이 작품을 만든 작가는 이미 고인이 되었다. (필 주커먼, 『종교 없는 삶』, 43~4쪽.)

이제 이 방에 아홉 살짜리 어린이를 들여보내야 한다. 부서지기 쉬운 이 작품에 손 대지 않고 잘 보고 나올 수 있도록 미리 당부하고자 한다면 어떻게 말해야 할까? 우선 처음 떠올릴 수 있는 방법은 처벌과 보상으로 아이의 마음을 다잡는 방법이다. “방에는 너 말고 아무도 없을 거야. 하지만 예술 작품을 건드리면 안 돼. 아주 섬세하고 부서지기 쉬운 데다 하나뿐인 작품이거든. 또한 천장에 작은 구멍이 있어서, 이 구멍으로 교장 선생님이 널 살펴볼 거야. 선생님의 눈이 내내 널 지켜볼 거야. 만약에 네가 작품에 손을 대면, 선생님이 그걸 보고 단단히 화가 날거야. 그래서 네가 방에서 나오면 큰 벌을 내릴 거야. 하지만 네가 작품을 건드리지 않고 방에서 나오면 네게 멋진 상을 주실 거야.”

천장에 난 작은 구멍으로 지켜보는 “교장 선생님”에서 하느님을 쉽게 떠올릴 것이다. 하느님이 늘 지켜보는 가운데 벌을 피하고 상을 받기 위해 우리가 도덕적으로 행동한다는 주장을 뒷받침해주기 위해 지어낸 짧은 이야기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이런 시나리오를 별로 탐탁지 않게 여길 듯하다. 사실, 필 주커먼이 여러 무신론자를 인터뷰하면서 들은 이야기 가운데 63세의 소냐라는 여성이 들려준 것이라고 한다.

소냐는 똑같은 상황에서 방으로 들어갈 어린이에게 이렇게 당부할 수 있다고도 한다. 좀 더 세련되고 공감을 이끌어내는 방법이다. “방에는 너 말고 아무도 없을 거야. 하지만 예술 작품을 건드리면 안돼. 아주 섬세하고 부서지기 쉬운 데다 하나뿐이 작품이거든. 손을 대면 사고로 부서지거나 얼룩이 묻을 수도 있어. 작품이 달라질 수도 있지. 작품이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지면 다른 아이들은 본래의 작품을 못 보게 될 수도 있어. 물론 네가 작품에 손을 대서 작품이 사고로 망가져도, 우린 널 벌하지는 않겠지만 굉장히 슬플 거야. 그래서 네가 작품을 건드리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라.”

“천장의 구멍”을 통해 지켜보는 신 없이도 얼마든지 도덕적 행동이 가능하다는 무신론자의 태도를 보여 준다. 예술 작품의 가치에 대해 이해하기 때문에 처벌이나 보상 없이도 도덕적 행동이 가능하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시나리오다. 무신론자의 입장에서는 이런 해피엔딩을 기대하겠지만, 모든 인류 문화에 오랫동안 갖가지 종교가 번성하는 것을 보면 그저 작은 소망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개구리 왕자」를 읽으며 우리 마음에 일어나는 일

종교 현상이 다양한 만큼이나 종교의 기원을 설명하는 이론 또한 다양하다. 곤혹스러운 자연현상이나 사물의 기원을 설명하기 위해서, 아니면 악과 고통이 존재하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 종교가 필요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또는 결국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서 필연적으로 종교적 설명이 필요하다거나, 불안을 잠재우며 안락한 세계를 만들기 위해 종교가 생겨났다는 설명도 있다. 또 사회질서를 세우거나 도덕성을 뒷받침하기 위해 종교가 생겨났다는 견해도 있다. 그런게 아니라 그저 이성이 잠들어 있어서 그런 미신에 매혹되었을 뿐이라는 해석도 있다. 이런 설명들이 모두 일리가 있고 종교의 다양한 효과를 잘 설명해 주는 듯하다. 하지만 이런 설명은 근본적인 뭔가를 놓치고 있다는 느낌을 떨치기 어려운 것 또한 사실이다.

종교의 뿌리가 깊은 만큼, 종교적 심성은 우리 마음에도 깊이 뿌리 박혀 있는 어떤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종교를 쉽게 받아들이고 전파하게 하는 우리 마음의 작동 방식에서 종교의 기원을 찾는 학자가 있어 읽어 보았다. 이번 글은 파스칼 보이어가 쓴 『종교, 설명하기』에 나온 내용을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심리학자이자 인류학자인 파스칼 보이어는 카메룬에서 인류학 현지 조사를 하면서 팡족의 전통 종교를 연구한 결과를 이 책에 담았다.

우선, 널리 알려진 민담 가운데 「개구리 왕자」를 떠올려 보자. 이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여자아이들이 개구리와 공주가 뽀뽀하는 장면에서 “아이, 징그러워!” 하며 얼굴을 찌푸리던 기억이 난다. 그때 나는 ‘개구리가 왕자였다니, 참 신기한 이야기네.’ 하고 이야기에 끌렸던 것 같다. 그런데 나나 여자아이들이나 이 이야기를 따라가며 듣는데 아무 어려움이 없었다. 개구리가 공주가 연못에 빠뜨린 황금 공을 찾아줄 테니 결혼해 달라고 말하는 순간부터 더 이상 개구리는 개구리가 아니라 사람처럼 여겨지게 된다. 그 뒤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행동을 해도 전혀 거부감 없이 스토리를 따라가게 된다. 개구리가 어떻게 말을 하고 결혼해 달라고 하고 같이 음식을 먹게 해 달라고 하며 같은 침대에서 잘 수 있게 해 달라고 할 수 있는가 하는 생각조차 들지 않고 스토리를 따라가는 것이다.

더 이상 개구리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의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 해도 개구리로서의 특성을 잃어버리는 것은 아니다. 폴짝폴짝 뛴다든지 피부가 끈적끈적 하다든지 하는 특성을 우리는 잊어버리지 않는다. 그러니 개구리가 뽀뽀하는 장면에서 “아이, 징그러워!” 하는 반응을 보인 것도 당연한 일이다. 여담이지만, 다시 읽어본 그림 형제 판본에서는 키스하는 장면이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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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가와 휴식

박기순 충북대 철학과 교수

1. 필요한 일과 필요하지 않은 일

플라톤이 남긴 저작들은 대부분 마치 희곡처럼 대화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그것들은 “대화편”이라 불리기도 한다. 그렇다면 그는 왜 그렇게 글을 썼을까? 답은 아주 간단하다. 그에게 대화는 철학하는 방식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플라톤의 철학적 방법으로 알려진 ‘변증술dialectics’이 ‘대화하다dialegesthai’ 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것이라는 사실에서도 잘 나타난다. 변증술은 말logos을 할 줄 아는 두 사람이 서로 주장하고 반박하고, 그리고 의견을 수정해 가면서 중요한 질문, 예를 들면 정의란 무엇인지 혹은 사랑은 무엇인지 등의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방법을 일컫는다. 플라톤의 각 대화편에는 고유한 대화 주제가 있고 그 주제를 논하는 등장인물들이 있다. 플라톤은 자신의 스승인 소크라테스를 항상 주인공으로, 그리고 그의 적대자들이었던 소피스트들이나 깨우침을 받아야 할 젊은이들을 대화 상대자로 등장시켰다. 대화편의 제목은 보통 대화 주제나 대화 상대자를 따라 지었다.

『파이드로스』는 이 대화편 가운데 하나다. 파이드로스라는 대화 상대자의 이름을 제목으로 하는 이 대화편은 사랑과 연설술을 논의 주제로 삼고 있다. 이렇게 하나의 대화편이 두 개의 주제를 가지고 있는 것은 다소 이례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이 글에서 논의하고자 하는 것은 정작 이 주제들과는 상관없는 것이다. 우리의 관심은 오히려 이 두 주제에 관한 대화들 사이에 마치 간막극처럼 끼워져 있는 매미 신화와 관련이 있다.

소크라테스는 어떤 의미에서는 사랑을 한다는 것이 곧 철학함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파이드로스에게 설명한 후, 어떻게 하는 것이 말을 잘하고 글을 잘 쓰는 것인지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한다.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대화의 도입부에서 파이드로스가 뤼시아스라는 사람으로부터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소크라테스를 만나 뤼시아스가 사랑에 대해 아주 아름다운 말을 했다고 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을 잘했다던 뤼시아스의 이야기는 결국 소크라테스에 의해 반박되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파이드로스에게 도대체 말을 잘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한번 검토해보자는 의미에서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제안에 파이드로스는 이렇게 답한다. “필요가 있느냐고 물으시는 거예요? 막말로 그런 즐거움을 위해서가 아니라면 누군들 뭐 하러 살겠어요?”(플라톤,『 파이드로스』, 258e, 김주일 옮김, 이제이북스, 103쪽.) 소크라테스는 필요한가를 물었고, 파이드로스는 긍정으로 답한다. 그런데 여기서 합의되고 있는 필요성, 즉 대화의 필요성은 어떤 종류의 필요성일까? 살기 위해서 우리가 먹고 마시고 잠자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할 때의 그 필요성일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무엇보다도 두 사람이 그 대화를 하지 않는다고 해도 죽는 일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생존을 위해서 꼭 해야만 하는 그런 일은 아닌 것이다. 이 대화의 필요성은 그러한 필요를 넘어서는 것이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사실은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다. 필요 이상의 것이고, 혹은 생존의 관점에서 보면 사치스러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왜 소크라테스와 파이드로스에게는 필요한 일인가? 심지어 파이드로스는 그것을 하지 않는다면 살 가치도 없다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삶에 필요한 것인가? 당연히 그것은 생존으로서의 삶에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다른 의미의 삶, 즉 생명의 단순한 보존으로서의 삶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삶,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인간에게만 허락되는 좀 더 고결한 삶에 필요한 일일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파이드로스가 말하고 있듯이 그러한 일은 우리에게 즐거움을 준다. 단순히 먹고 살기 위해서 하는 일은 우리에게 즐거움을 줄 수가 없다.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필요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어떤 일을 할 때, 우리는 어떤 필연성에 얽매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한에서 우리는 예속되어 있고 자유롭지 못하다. 또한 그러한 필연성에 얽매 있을 때, 우리는 타인에 대해 폭력을 행사하게 된다. 남의 것을 빼앗고 남의 나라를 침범하는 등의 일은 모두 생존의 필연성에 묶여 있을 때 사람들이 하는 것들이다.

반면 우리가 꼭 해야만 하는 일은 아니지만 좀 더 고귀하고 아름다운 삶을 위해서 하는 일은 우리가 자유롭게 선택해서 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러한 한에서 그것은 우리에게 즐거움을 준다. 생각을 하고, 그 생각을 타인과 나누면서 대화를 하는 일, 이것이 그러한 일에 속한다. 그래서 파이드로스는 삶은 오직 이것을 할 때만 의미와 가치가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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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 산업혁명론과 디지털 전환

장흥배 정치경제연구소 ‘대안’ 연구원

1. 문제의 제기

‘4차 산업혁명’이라는 용어가 널리 쓰이게 된 계기는 클라우스 슈밥Klaus Schwab 세계경제포럼 회장이 2016년 1월 다보스포럼에서 정보통신기술ICT의 발전으로 인한 사회의 변화상을 이 용어로 기술하면서부터다. 이 용어는 그 이후 정부, 기업, 학계, 언론 등이 널리 사용하면서 대중적으로 자리 잡았다. 한국에서는 2016년 인공지능AI 바둑 프로그램 알파고가 이세돌과 대결해 승리하는 사건이 이 용어를 받아들이는 큰 계기가 됐다. 2017년 9월에는 대통령 직속 4차산업혁명위원회가 출범했다.

반면, 이 용어가 현재와 임박한 미래의 사회상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며, 특별히 생산성 지표에서 ‘산업혁명’에 준하는 변화가 진행 중이거나 임박했다는 증거가 없다는 반론도 끊이지 않는다. 이와 같은 반론은 주류 경제학계 내부에서 터져 나왔지만, 기왕의 수많은 정보화 담론이 지닌 친자본 반노동의 정치적 효과를 비판해 왔던 좌파 세력도 4차 산업혁명론에 대한 냉소적 기류에 일조해 왔다. 기술 변화가 노동시장 유연화, 산업 구조조정 등 노동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을 기술 변화의 불가피성으로 설명하며 이에 대한 적응을 개인 책임으로 돌리는 서사로 그동안 정보화 담론이 기능해 온 것은 어느 정도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한편, 기본소득운동 진영은 정보통신기술 발전이 신자유주의 불안정노동체제를 심화시키는 측면에 주목하면서 이를 과거의 복지국가 시스템이 더 이상 작동하기 어려운 근거의 하나로 강조하고자 했는데, 이들도 4차 산업혁명이라는 용어를 별다른 비판적 검토없이 수용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4차 산업혁명론이 제기된 과정과 그에 대한 찬반 입장들을 중심으로 논의를 정리해 보았다. 사회과학적 개념으로는 ‘4차 산업혁명’보다는 ‘디지털 전환’이 더 적합한 용어다. 그러나 용어와 개념에 집착하다 디지털 전환의 내용과 성격에 대한 분석, 새로운 좌파 대응 전략을 방기해서는 안 될 것이다. 디지털 전환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2. 4차 산업혁명론의 전개

1) 세계경제포럼의 4차 산업혁명론

슈밥의 4차 산업혁명론이 대중적으로 알려진 계기는 2016년 다보스포럼의 연설이었다. 슈밥의 4차 산업혁명론의 근거는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현재의 “전환이 3차 산업혁명의 연장이 아니라 그것과는 뚜렷이 구분되는 4차 혁명의 도래를 대표하는 세 가지 이유”는 전환의 속도, 규모, 시스템 충격이다. 변화는 전례 없이 “기하급수적”이며(속도), 그 파괴적 영향은 “모든” 산업에 걸쳐 있고(규모), 이 변화의 폭과 깊이가 생산, 관리, 거버넌스 시스템의 “완전한” 전환을 알린다는 것(시스템 충격)이다. 둘째, 4차 산업혁명은 “물리적, 디지털적, 생물학적 경계를 흐리는 융합”에 의해 촉진된다.

슈밥 역시 역대 산업혁명을 전통적인 방식으로 분류하고, 4차 산업혁명이 “3차 산업혁명의 기반 위에서” 구축된다고 본다. 따라서 그에게 “융합”은 4차를 3차와 구별 짓는 중요한 특징이다. 그리고 그 역시 역대 산업혁명의 핵심인 “생산성 혁신”을 거론한다. 교통과 통신비가 떨어지고 물류와 글로벌 공급 체인은 더 효율적이 되어 교역 비용이 감소하여 이것이 새로운 시장을 열고 경제성장을 견인할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에게 이 생산성 혁신은 “미래로in the future” 유보되어 있고, 이 미래의 시간적 원근은 제시되지 않으며 그저 이미 진행 중이거나 임박한 것으로 전제된다.(Klaus Schwab, 2016. 1. 14.)

슈밥의 다보스포럼 연설로부터 며칠 뒤 세계경제포럼 집행위원회위원이자 사회혁신팀장인 니콜라스 다비스는 「4차 산업혁명이란 무엇인가?」(Nicholas Davis, 2016. 1. 19)라는 글을 게재한다. 그러나 제목에서 기대하는 것과 달리 그의 4차 산업혁명 개념 정의는 슈밥 회장의 그것보다 더 빈약하다. 그는 4차 산업혁명을 “가상-현실 시스템cyberphysical systems(CPS)의 출현”으로 묘사한다. 4차 산업혁명은 “기술이 사회에, 심지어 인간의 몸에 내장되는 완전히 새로운 방식”을 대표하는데, 게놈 편집, 새로운 형태의 기계 지능, 혁명적 소재, 블록체인과 같은 암호화 기술이 4차 산업혁명을 대표하는 신기술들이다. 이것이 개념 정의의 전부이고, 나머지 논의들은 4차 산업혁명이 사회와 경제에 미치는 영향들로 채워져 있다.

CPS는 원료, 생산, 물류, 서비스, 제품 등 상품 생산 전체 과정을 내장형 시스템embedded system을 통해 네트워크화한 생산 시스템을 말한다. CPS는 2007년 8월 미국에서 대통령과학정책자문위원회 권고에 따라 주요 연구 분야로 지정됐고, 제조업 기술혁신 전략인 독일의 산업 4.0 전략에서는 스마트 공장 체계의 핵심적인 기술 동인이다(현대경제연구원,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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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이주노동자의 죽음

고영란

위험한 일에 내몰리는 현실

지난 12월 11일 새벽 태안화력발전소 9·10호기 컨베이어 벨트 사고로 인한 스물네 살 김용균 씨의 죽음은 원청과 하청, 간접고용 등으로 최소한의 인원만 일터에 투입하는 용역 회사 노동자의 현실을 그대로 드러내 주었다.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반지가 갖고 싶었던 김용균 씨에게 택배가 도착했지만, 반지의 주인공은 세상을 떠나고 그의 꿈과 낭만은 유품으로 남았다.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전국의 또 다른 ‘김용균’들이 컵라면과 팻말을 들고 연말에 추모 행사와 촛불행진을 하게 된다. 비정규직노동자들의 근무 환경에 대한 증언도 계속되면서, 전봇대나 옥상, 난간 등에서 혼자 일하는 인터넷 설치 기사, 여름철에 실내 온도 40도가 넘는 조리실에서 일하는 노동자 등은 ‘다치거나 아프면 대부분 자기 부담으로 치료해야 하는 현실’을 고발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일하지 않으려는 제조업, 건설업, 농축산업, 어업 분야 등에서 한국 경제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이주노동자의 현실은 어떨까?

한국에 처음 온 이주노동자들은 우선 한국어로 의사를 소통하는 것이 가장 답답하고 힘들다. 고용허가제로 입국하려면 한국어 능력 시험을 치르고 합격해야 하지만, 실제로 타국에 와서 부당한 대우를 받거나 몸이 아프거나 사고로 다쳤을 때 충분히 의사소통이 되지 못하면 어려움을 겪는다. 한국에 온 지 6개월 미만인 이주노동자들에게 특히 사고가 많이 발생하는데,‘ 언어’와‘ 일의 숙련도’ 부분에서 미숙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영세한 제조업체의 경우, 안전 교육이 체계화되어 있지도 않고, 낡은 기계와 장비를 교체하지 않은 채 무리하게 공장 가동을 하는 경우가 많다. 산업재해가 일어날 수 있는 상황임에도 사업주 쪽에서 위험에 대한 주의를 충분히 하지 않고 방치하다가 사고가 나기도 한다.

2017년 5월 경북 군위 등에서 축사 정화조를 청소하던 중국, 네팔, 태국 출신 노동자 네 명이 사망한 사건은 이런 현실을 그대로 드러내준다. 사업주들은 마스크 등 안전 장비를 지급하지 않았고, 분뇨 유해 가스 농도를 측정하지도 않았던 것으로 나타났다.

이주노동자의 산재 피해 상황을 조사한 한 자료(『2017 경기도 외국인 산업재해자 실태 조사』,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에 의하면, 산재를 당한 이주노동자들 중 산재보험에 따른 보상을 신청한 경우는 10%에 불과했다. 산재 신청을 하지 않은 경우가 52.9%에 해당하고,  이들 중에 산재 치료비를 본인이 부담한 경우는 36.4%에 해당했다. 산재를 당했음에도 산재보험을 신청하지 않은 이유는 “신청할 수 있는지 몰라서”(36.1%), “불법체류·불법고용이 드러날까 봐”(12.5%), “신청하지 않겠다고 사업주와 약속해서”(5.6%) 등으로 나타났다. 산재 피해 이주노동자들은 치료나 요양이 끝난 뒤에 계속 일하는 경우가 64.4%였고, 그중에서 70.9%는 사고가 났던 사업장으로 복귀했다. 산재 치료가 완벽하지 않은 상태에서 치료나 요양이 종결되고(45.7%), 사업장 이동이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대부분은 본래 일하던 사업장으로 돌아가서 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자료: 고용노동부·안전보건공단>

한편, 고용노동부에서 집계한 『2012~2017년 이주노동자 재해 현황』을 보면, 5년 동안 산재로 이주노동자 511명이 사망했다. 숫자상으로만 파악되는 이들의 죽음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통계에 나오지 않은 인원을 포함하면 그 수는 더 늘어날 것이다.

고영란
르포 작가, 프리랜서 편집자,『우린 잘 있어요, 마석』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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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롱 정책의 파산에 대한 고찰

– 진보적 신자유주의란 가능한가?

유승경 정치경제연구소 ‘대안’ 부소장

들어가며

프랑스에서 지난해 11월 17일부터 ‘노란 조끼 시위 le Mouvement des Gilets Jaunes’가 일어난 직접적인 계기는 마크롱 정부가 단행한 유류세 인상이다. 유류세 인상은 단순히 세수를 올리기 위한 조치가 아니라 화석연료 의존도를 줄이기 위한 친환경 정책의 일환이기도 했다. 프랑스는 2016년에 체결된 파리기후변화협약의 가입국으로서 이산화탄소 배출 감축 목표를 달성해야 한다. 그래서 마크롱 정부는 유류세 인상을 통해서 화석연료 사용을 줄이는 한편 그 재원을 전기차 보조금 등으로 활용할 계획이었다.

이 사안만을 놓고 보면, 프랑스 서민들의 거센 저항을 납득하기 어렵다. 화석연료 사용과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자는 것은 전 세계 환경 단체의 요구이자 대부분의 국가가 합의하고 있는 사안이다. 또한 마크롱 대통령은 2017년 5월 프랑스뿐만 아니라 유럽에서 포퓰리즘의 도전으로부터 자유주의를 구원할 지도자로서 기대를 한 몸에 받고 당선되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파리기후변화협약에서 탈퇴하여 포퓰리스트로 지목된 것과는 대조적이다.

마크롱은 결국 시위대에게 항복했다. 마크롱 정부는 지난 12월 초 문제가 된 유류세 인상을 철회했을 뿐만 아니라 2019년부터 최저임금을 월 100유로 인상하는 등 시위대의 요구 대부분을 수용했다. 이러한 사실은 노란 조끼 시위가 마크롱이 추진하고 있던 정책 전반에 대한 반대였음을 보여 준다.

이 글은 마크롱이 집권한 후 1년 반 동안 어떠한 구도에 따라 정책을 추진했는지를 검토해 봄으로써 프랑스의 노란 조끼 시위의 의미와 파장을 가늠해 보고자 한다.

마크롱 정부의 정치적 지향

마크롱의 정책 구상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가 대통령에 당선되는 과정을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프랑스의 정치체제에는 수많은 흐름이 존재하지만, 1958년부터 최근까지는 대체로 두 개의 정치 동맹이 각각 하나의 지배적인 정당으로 결집해 있었다. 프랑스고등사범학교École normale supérieure 교수인 필리프 아스크나지에 따르면, 자유주의자와 좌파는 사회당으로 결집해 있었고, 보수주의자들과 신자유주의자들은 공화당을 지지했다(Philippe Askenazy, The Contradictions of Macronism, Dissent, Winter 2018).

전통적인 두 정당은 세부적인 정책 차이에도 불구하고 대체적으로 자유주의적이고 민주적인 유럽 통합에 우호적이었다. 그런데 2000년대 들어와서 유럽 통합에 반대하는 국수주의적인 극우 국민전선Front National이 급부상하여 기존의 정치 구도를 위협하고 있으며, 좌파측에서도 신자유주의적 유럽연합에 반대하는 흐름이 독자적인 정치 세력을 형성했다. 필리프 아스크나지 교수는 마크롱이 지배적인 두 동맹 체제를 해체시키고 자유주의자와 신자유주의자들을 한데 묶어 새로운 정치 동맹을 구축했다고 평가한다.

여기서 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가 어떤 개념으로 사용되는지를 설명할 필요가 있다. 자유주의에 대한 정의와 구분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자유주의는 대체로 20세기로 넘어오면서, 국가의 역할을 최소화하는 자유방임적 혹은 고전적 자유주의Classical Liberalism에서 벗어나 자유의 신장에서 국가의 적극적 역할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전환된다. 자유주의의 내용 변화는 복지국가의 등장과 맥락을 같이하는데, 복지국가와 병존하는 자유주의는 미국에서는 근대적 자유주의Modern Liberalism로 불리기도 하며. 유럽적 맥락에서는 사회민주주의Social Democracy를 포괄한다. 이에 반해 신자유주의는 자유방임적인 고전적 자유주의로의 복귀를 주창하면서 복지국가에 반대하는 시장 자유주의 혹은 자유 지상주의Libertarianism를 의미한다.

프랑스에서는 ‘개혁하자’라는 뜻으로 “근대화하자moderniser”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마크롱으로 결집한 정치세력들은 근대성에 대한 비전은 상이하지만 모두 프랑스를 근대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유주의자들에게 있어서 근대성이란 대체로 소수자를 포함하여 모두가 동등한 권리를 갖는 것을 의미하는 반면, 신자유주의자들은 근대성을 프랑스를 디지털 혁명의 창업 국가로 만드는 것에서 찾는다.

마크롱은 이 두 흐름에 포함되는 다양한 집단으로부터, 예를 들어 성소수자 조직에서부터 첨단 산업의 기업가에 이르는 다양한 집단으로부터 지지를 받아서 집권에 성공했다. 그는 선거 기간 동안 여성의 권리를 보호할 것이며 성평등 혐오주의자와 싸워 소수자의 권리를 확대하겠다고 약속함으로써 사회적으로 진보적인 지식인과 자유주의자들의 지지를 이끌어 냈다. 또 다른 한편으로 전직 투자은행가로서의 경력을 살려 일관되게 친기업적 강령을 내세움으로써 신자유주의자의 지지를 받았다. 마크롱으로 결집된 정치세력들의 공통점이라면 소수자까지 포함하여 동등한 권리를 옹호하는 한편 개방적이고 다문화적인 프랑스를 지지하면서 유럽 통합에 우호적이라는 점이다.

이런 정치적 동맹에 힘입어, 마크롱은 유럽 통합과 이민에 반대하는 극우 민족주의자인 르 펜과 동성 결혼에 반대하는 보수 가톨릭 신자인 공화당의 프랑수와 피용를 패퇴시킬 수 있었고, 디지털 혁명에 부응하는 신자유주의적 시장 개혁을 내세워 신자유주의적 유럽연합에 반대하는 전통적인 좌파 후보인 장뤼크 멜랑숑을 따돌렸다. 물론 그의 승리는 놀라운 것이었지만 압도적이지는 않았다. 마크롱은 1차 선거에서 24%의 지지를 받았지만, 르 펜과 피용도 각각 21.4%와 20%의 지지를 받았다. 만약 중도파인 프랑수아 바이루가 마크롱을 지지하면서 사퇴하지 않았다면 마크롱은 대통령 결선투표에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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