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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 해방, 사회주의

 

얼마 전 한 라디오방송과 기본소득을 주제로 짧게 전화로 인터뷰를 했다. 미리 받아 본 질문지에 적힌 내용은 꼭 필요한 질문이긴 했지만, 꼭 필요하다는 것은 이런 식의 인터뷰를 여러 번 했던 사람에게는 흥미가 떨어진 것이었다는 말도 된다. 그렇다고 해서 짧은 시간에, 그것도 어떤 영국 작가가 커뮤니케이션의 역사에서 “실수”라고 말한 적이 있는 전화를 통해 조리 있게 대답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이 인터뷰가 끝나고 나면 누구나 하는 후회가 밀려들었다. ‘더 잘할 수 있었을 텐데, 이건 저렇게 대답해야 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꼭 필요한, 다시 말해 흔한 질문 가운데 그렇지 않은 질문이 하나 끼어 있었다. 대략 질문의 요지는 다음과 같았다. ‘기본소득이 모두에게 소득을 보장해 주는 것이라면 사회주의/공산주의와는 어떻게 다른가?’ 인터뷰 때에는 이 질문을 살짝 틀어서 ‘정의의 문제’로 바꾼 다음, “공유부에 기초한 기본소득은 각자에게 각자의 몫을 주는 고전적인 정의의 원칙”에 부합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사실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었다. 좀 더 시간이 많고 대면한 상태의 인터뷰였다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설마 농담이시겠죠? 사회주의/공산주의야말로 노동에 따른 분배에 충실한 사회입니다. 도리어 자본주의가 노동에 따른 분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사회죠.’

내 대답이 여기에 그쳤다면 특정한 사회주의/공산주의에 대해 해설하는 일을 한 셈이다. 그러면서 진짜 사회주의/공산주의가 무엇일까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바뵈프에서 시작하는 현대 공산주의는 ‘공동 소유, 공동 노동, 공동 향유’라는 원칙을 간직해 왔다. 물론 현실사회주의에서 이 원칙이 얼마나 철저하게 관철되었는지는 의문이다. 현실사회주의가 ‘전 인민의 소유’나 ‘국가 소유’라는 방식으로 공동 소유를 설사 실현했다고 하더라도, 실제 나타난 결과가 권력에 따른 위계와 불평등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권력의 문제, 국가의 문제를 다른 시각에서 볼 수 있는 근거를 얻을 수 있었다. 이는 형식적 소유의 문제와 상관없이 노동과정에서도 관철되는 문제였다는 것도 드러났다.

추상적인 수준에서 혹은 선동적인 수준에서 현대 사회주의/공산주의가 하고자 한 일이 인간에 대한 인간의 착취와 억압을 종식하고 진정한 인간의 역사를 열겠다는 것이었다면, 포스트자본주의를 고민하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유토피아를 포함하지 않은 세계지도는 쳐다볼 가치조차 없다” 라는 말로 유명한 오스카 와일드의 「사회주의에서의 인간의 영혼」(1891년)은 이런 점에서 흥미로운 글이다.

오스카 와일드는 사회주의가 “공동체의 각 구성원에게 물질적 행복을 보장”해 줄 것이라고, 다시 말해 “삶에 필요한 기반과 적절한 환경을 제공”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한 가지가 더 필요하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바로 개인주의다. 이때 그가 말하는 “진정으로 아름답고 건강한 개인주의”는 “그 누구도 재물과 재물의 상징들을 쌓아가는 데 인생을 낭비하지 않”고 사람들로 하여금 “살아가게” 하는 것이다.

이 글에서 오스카 와일드가 옹호하고자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예술이 아니라 예술가 자신에게서 비롯되는 예술이다. 그리고 그 기초가 개인주의다. 그는 이렇게까지 말한다. “예술은 인류가 알고 있는 가장 강력한 개인주의의 발현이다. 나는 심지어 예술은 우리가 알고 있는 유일한 개인주의의 발현이라고 말하고 싶다.”

20세기 최대의 아이러니가 인간에 대한 인간의 착취를 종식한다는 사회주의/공산주의가 다시 억압적 체제로 바뀐 것이다. 물론 이 아이러니는 민중 혁명 속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으로 해소되었다. 하지만 사회주의/공산주의를 해방의 프로젝트라고 한다면 이 아이러니는 언제고 다시 등장할 것인데, 이때 우리는 어떤 방향의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까?

해결책을 찾기 위한 전제는 사회주의/공산주의를 공동의 향유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 공동의 향유는 말 그대로 개인들의 삶의 토대를 확보하는 일이 된다. 물질적인 것을 말 그대로 물질적인 것으로 바라보고, 그 위에서 다시 인간이란 무엇인가, 각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질문해야 할 것이다. 이때 오스카 와일드가 말한 개인주의의 참뜻이 드러날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인공지능, 로봇, 자동화 등에 대해 일자리를 빼앗긴다고 우려할 일이 아니다. 오스카 와일드는 이미 이렇게 선언한다. “마치 시골의 신사가 잠들어 있는 동안에도 풀은 자라나는 것처럼, 인류가 삶을 즐기면서 노동 대신 인간의 목적이 되어야 할 우아한 여가를 보내거나, 아름다운 것들을 만들고 아름다운 것들을 읽거나 그저 세상을 관조하며 감탄과 기쁨을 느끼는 동안, 기계는 필요하고 힘든 일들을 모두 처리하게 될 것이다.”

이럴 경우 사회주의/공산주의는 20세기에 그러했던 것처럼 경제적 권력이기를 멈추고, 말 그대로 인간적 삶의 토대가 될 것이다.

 

편집위원회를 대신하여
안효상

 

이 글은 『시대』 2019년 07~08월호 통권70호에 실린 ‘책 머리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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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조를 못 깨면 회사 문을 닫겠다

― 서울 독산동 신영프레시젼 투쟁

임성용

여성 친화 기업 회장님의 두 얼굴

서울 금천구 독산동에 있는 신영프레시젼은 1993년에 설립된 금형 회사다. 1998년 모토로라사의 휴대폰 금형 제작과 사출성형으로 기반을 다지고 LG사의 우수 협력사로 선정되면서 급성장했다. 초정밀 금형부터 중소형 금형까지 설계하고 제작할 수 있는 기술을 보유하여 금형 설계와 제품 사출, 코팅, 후가공, 조립에 이르기까지 일관 생산 능력을 가진, 동종 업계에서는 유명한 회사다.

회장 신창석은 전남 영암군 학산면 출신이며, 《학산서초등학교 카페》에 그의 행적과 선행이 상세히 나열되어 있다.

카페 글에 따르면, 신창석은 학산면 매월리 미교마을 출신으로 가정 형편이 어려워 일찍 상경해 직장 생활을 하며 야간대학에 다닌다. 다우정밀을 공동으로 운영하다가 1993년 지금의 신영프레시젼의 모태인 신영정밀을 설립했다. 1995년 법인으로 전환하고, 창업 13년 만에 국내 휴대폰 케이스의 금형 및 사출로 연 매출액 2,000억 원에 이르는 데 성공한다. 이 공로를 인정받아 전국중소기업인대회에서 정부로부터 은탑산업훈장을 수상하기도 했다.

카페 글은 신창석이 기업인으로 성공했을 뿐 아니라, 사회 공헌에서도 남다른 면을 보여 주고 있다고 칭찬한다. 독거노인, 소년 소녀 가장, 장애인, 편부·편모 자녀, 교회 등 여러 곳에 상당한 후원금을 지원하고 있으며 이 공로로 ‘학산면민의 상’을 수상했고, 마을 사람들이 마을 입구에 공적비까지 세워 주었다고 한다.

노동조합의 확인에 따르면, 신창석은 가족이 다니는 반석교회, 회사가 위치한 금천구청, 성모재가노인복지회 등에 일 년에 수억의 기부금을 내고 있었다. 어려운 이웃을 위한 사회 공헌 활동을 인정받아 2016 대한민국 자원봉사대상 국무총리 표창을 받았다. 여성가족부장관으로부터 ‘여성 친화·가족 친화 인증’도 받았다. “일과 가정 양립, 가족 친화 직장 문화 조성, 여성이 일하기 좋은 환경 조성, 여성 인재 육성 등”이 표창의 주된 사유였다.

과연 이 많은 표창을 받을 만큼 신창석 회장은 사회 공헌에 기여하고 투철한 공공 정신을 실천하는 사람이었을까? 실제로는 그와 정반대였다. 신창석이야말로 자본가 개인의 인성과 자본가로서의 행위는 아무런 상관이 없음을 보여 주는 사례라 할 만하다.

2015년 10월 29일, 공정거래위원회는 수급 사업자를 상대로 납품 단가를 후려친 신영에 대해 과징금 1억5천만 원을 부과한다. 이른바 갑질 횡포를 저지른 악덕 기업으로 신영이 등장한 것이다.

2019년 3월 29일 금천구청 앞에서 신영 노동자들의 금요문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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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용
화물 운수 노동자, 시인. 시집으로 『하늘공장』 등이 있고, 산문집으로 『뜨거운 휴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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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핵운동은 정당하다, 저항하라!

원익선 원불교 교무, 원광대학교 정역원 연구교수

1. 우리가 아는 것은 무엇인가

봄이다. 신기하게도 그 메마른 가지에서 꽃이 피고 잎이 돋는다. 어떤 과학자도 그 메마른 가지 안에 꽃이 들어 있고 잎이 숨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꽃과 잎은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이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세계를 창조한 조물주造物主밖에 없다. 우리는 그가 누구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세상(物)을 만든(造) 조물주라고 한다. 그의 이름조차도 모른다. 하나님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이름이 아니다. 하나의 임이다. 우주 전체를 하나로 보기 때문이다. 우리도 모르는 분을 그렇게 부를 수밖에 없다. 도대체 우리가 아는 것은 무엇인가.

사실 우리는 실존철학에서 말하듯이 피투성被投性의 존재다. 즉 우리가 목격하는 이 세계 내에 내던져진 존재다. 이 말은 그만큼 인간의 고독을 표현한 것이기는 하지만, 다른 말로 하자면 어디에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존재라는 것이다. 우리는 임대아파트에서 살다가 기간이 지나면 나가야 하는 것처럼, 이 지구 위에서 일정한 시간을 살다가 이 지구라는 방을 비워야 할 처지에 놓인 존재다. 넉넉잡아 2백 년 전에 살던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2백 년 뒤에 살아남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도 이 지구를 자기 혼자만의 방인 양 어지럽혀 놓고 사라진다. 청소는 후손들의 몫이 되고 있다.

이처럼 자연의 신비나 우주의 주재자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존재인 인간이 고작 백 년 안팎의 삶을 살면서 이 지구를 황폐하게 만들고 있다. 과학도 스쳐가는 한때의 진리일 뿐임에도 영원한 것처럼 숭배되고, 개인보다 센 자본과 국가의 힘에 의지해 이 지구를 오염시키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인 핵발전소다. 핵발전소를 양산하는 ‘핵 마피아’의 핵심 세력은 과학, 국가, 자본주의다. 이 셋이 자신의 무명無明(불교식으로 이야기한다면, 자신의 본성과 존재 의미와 행위의 결과를 모르는 것)에 말려들어 인류의 미래마저 어둡게 하고 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이들 과학, 국가, 자본주의는 철두철미한 삼각동맹을 맺고 있다. 과학은 국가나 자본주의의 후원이 없으면 성장할 수 없다. 폭력을 독점한 국가는 과학과 자본주의에 내재된 맹목적 이성 및 탐욕과 제휴하며 공존하는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집단이다. 자본주의는 과학과 국가를 전진기지로 삼아 세계 전체를 자신의 발아래 두고 있다. 신자유주의란 국가나 과학을 시녀로 두고 자본만의 완전한 자유를 향해 돌진하는 것을 말한다.

핵발전소는 근본부터 이러한 과학, 국가, 자본주의의 불순한 동맹 하에 건설되었다. 이와 관련된 과학자, 공무원, 핵 산업계는 핵발전소가 전력 문제를 완전히 해결할 수 있다는 확신을 대중들에게 끊임없이 주입시킴으로써 이와 관련된 숱한 문제점들을 은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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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 플랜트 노동자와 전국플랜트건설노동조합

권준덕 전국플랜트건설노동조합 울산지부 조합원

 

플랜트 건설 현장 (출처: 네이버 블로그 《대한민국 플랜트 산업의 부흥을 꿈꾸는 자의 이야기》)

 

1970년 분신한 전태일 열사의 마지막 외침은 시간이 지나 2005년 내가 속해 있는 노동조합의 파업 구호가 되었다. 한때는 우리 조합 조끼 뒷면에 ‘인간답게 살고 싶다’라는 문구까지 있었다. 지금은 많이 개선돼 밥상을 펼쳐 놓고 밥 먹고 쉬는 시간에 편하게 커피 한잔의 여유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민주노총 전국플랜트건설노동조합 울산지부에 소속된 조합원이다. 울산지부는 울산과 경남 일부 지역을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다.

아직도 플랜트 노동자들이 하는 일에 대해 궁금증을 나타내는 이들을 종종 본다. 당연한 일이다. 그들이 이 사회에 얼굴을 비춘 것이 지난 1989년 포항건설노조 창립 때이니 말이다. 포항을 시작으로 여수, 전남 동부, 울산, 충남에 조직된 지역노조들이 2007년 산별조직인 전국플랜트건설노동조합을 만들었고, 그 뒤 전북지부와 산별 전환에 실패했던 여수지부가 가입했고, 또 경인지부와 강원지부가 가입해 전국 8개 지부 10만의 조직으로 성장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지난 ‘충남지부 사태’로 충남지부는 현재 지역노조로 전환된 상태다. (‘플랜트노조 충남지부 사태’에 대해서는 본지 2018년 7∼8월호에 실린 「노동자에 의한 테러와 민중당」을 보라. ― 편집자)

공장을 만드는 노동자

우리가 하는 일은 공장과 산업 설비 등을 건설하고 유지, 보수하는 일이다. 이런 공장들이 집중된 곳인 ‘국가산업단지’를 중심으로 우리 8개 지부가 있다고 봐도 좋다. 우리 플랜트 노동자의 삶은 지난 박정희 시절 중화학공업 중심의 산업구조가 시작될 때부터 시작한다.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현대중공업, 현대자동차, SK에너지, S-Oil 등 중화학 공장을 만드는 일, 석유화학 공장에서 일시적으로 공장의 생산 설비를 멈추고 진행하는 일명 ‘셧다운shutdown’이라는 정기적인 보수 공사, 여름철 휴가에 맞춰 공장을 보수하는 ‘휴무 작업’ 등이 우리의 주된 일이다. 그러니 우리는 어찌 보면 정규직이 일하지 않을 때 일을 많이 할 수밖에 없다. 휴무 작업에 들어가면 여름휴가도 없고 설과 추석 때도 당일만 쉬고 일한다.

이런 공장과 생산 설비 등을 설치하고 정비하는 일에는 여러 가지 세부적인 직종이 있을 수밖에 없다. 노동조합 산하에 지역별로 지부가 있고, 지부에는 직종별로 분회가 있다. 전기와 관련된 작업을 하는 계전분회, 펌프나 컨베이어 등 각종 기계 설비를 담당하는 기계분회, 현장 배관 및 모든 구조물에 페인트 작업을 하는 도장분회, 보온재와 함석을 이용해 높은 온도의 배관이나 열교환기를 보호하는 보온분회, 연료나 공정에 필요한 화학물질들을 파이프로 연결하는 배관분회, 중량물의 설치와 관련 작업이 쉽게 이루어질 수 있게 발판 등을 설치하는 비계분회, 주로 배관 파이프를 용접하는 용접분회, 화기 감시 등 현장에서 일하는 모든 여성 노동자들로 구성된 여성분회, 배관 파이프를 지지하는 작업을 주로 하는 제관분회, 각종 물질을 저장하는 탱크를 제작하는 탱크분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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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성은 인간의 일자리 영역으로 남을까? 인공지능의 발전 현황

장흥배 정치경제연구소 ‘대안’ 연구원

창조성은 동물과 인간의 경계다. 이제 인공지능(이하 ‘AI’) 시대에 창조성은 기계와 인간의 경계로 다뤄지는 주제가 되었다. 그러나 전자가 여전히 유지되는 경계라면, 후자는 논쟁적인 주제가 되었다. 이미 인간의 초보적인 창조성을 구현한 AI의 등장으로 창조성은 인간을 정의하는 고유한 기준으로서의 지위를 잃어 가는 것으로 보인다. 철학적인 논쟁은 여전히 필요하고 진행형일 것이다. 그러나 일자리의 미래와 관련해 인간과 AI의 창조성의 질적 차이를 논하는 것은 실익이 없어 보인다.

여기서는 범용 AI 개발 경쟁으로 치닫는 AI의 발전사를 핵심 기술의 발달과 함께 짚어 보고, 범용 AI 개발이 일자리의 미래에 대해 갖는 함의를 간략하게 다루고자 한다.

기계 학습과 심층 학습

AI의 개발이 궤도에 오른 1950년대에 AI 개발 방법론은 크게 두 가지 길을 걷게 되었다. ‘규칙 기반(또는 상징적) AI’와 ‘확률·통계적 패턴 인식 기반 AI’가 그것이다. 전자를 성인이 규칙과 문법을 숙지하고 단어를 암기하는 방법으로 외국어를 배우는 방법에 비유할 수 있다면, 후자는 어린아이가 모국어를 배우는 방식에 비유할 수 있다(Erik Brynjolfsson & Andrew McAfee, 2018).

기호를 처리하거나 인간의 논리적 사고를 재현하는 전자의 방법은 AI 개발 초창기에 주된 방법론이었다. 하지만 규칙 기반 접근법은 언어 인지, 번역, 이미지 분류 등의 영역에서 수십 년의 연구에도 불구하고 성과가 더뎠고, 결국 1980년대 말에 이르러 ‘AI 겨울’을 맞고 말았다. 이는 기계에 모든 규칙과 패턴을 입력하여 기계가 제대로 사용하게 만드는 것이 너무 어려웠기 때문이다.

AI에 가구류의 이미지를 인식하는 규칙을 넣는다고 가정해 보자. 의자는 다리가 있지만 좌대에 붙어 있거나 아래를 천으로 감싸거나 천장에 매달려 있는 경우는 예외라는 식의 모든 사항을 규칙화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Brynjolfsson & McAfee, 2018). 번역을 예로 들면, 규칙 기반 접근은 프로그래머에게 엄청난 시간을 요구하고 그 효율성은 규칙과 단어 정의의 명확성에 크게 의존한다. 이것은 기계에 해당 언어의 모든 문법 규칙, 어휘, 숙어의 기원 등을 입력할 것을 요구한다. 그런데 단어는 사전적辭典的 정의로 축소될 수 없고 문법 규칙에는 수많은 예외가 존재한다(Brugel.org, 2017).

로봇공학에서 인간과 같은 신체 능력을 가진 로봇을 만들기가 극히 어려운 이유는 흔히 로봇공학자 한스 모라벡Hans Moravec의 이름을 딴 “모라벡의 역설”로 설명되어 왔다. “지능 검사나 서양장기에서 어른 수준의 성능을 발휘하는 컴퓨터를 만들기는 상대적으로 쉬운 반면, 지각이나 이동 능력 면에서 한 살짜리 아기만 한 능력을 갖춘 컴퓨터를 만드는 일은 어렵거나 불가능하다.” 현재의 로봇은 모라벡의 역설을 극복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Brynjolfsson & McAfee, 2016)

로봇이 아이의 신체 능력처럼 쑥쑥 성장하는 것을 막았던 것이 모라벡의 역설이라면, 규칙 기반 AI의 실패를 불러온 것은 영국인 화학자이자 철학자 마이클 폴라니Michael Polanyi의 이름을 딴 “폴라니의 역설”이다. 사람이 타인의 얼굴을 인식하거나 자전거를 타는 것은 쉽지만 그 이유를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폴라니는 이를 “우리는 말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이 안다”라는 말로 요약한다. 규칙 기반 AI는 인간의 ‘상식’적인 감각 기능이 해내는 일들을 기계에 규칙과 절차로 모두 입력할 수 없는 한계 앞에서 좌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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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움에 부딪힌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 브렉시트의 원인, 쟁점, 향방

유승경 정치경제연구소 ‘대안’ 부소장

“브렉시트Brexit.” 영국이 유럽연합European Union(이하 ‘EU’)에서 떠난다는 말이다. 브렉시트 시행일은 두 차례 연기된 끝에 2019년 10월 31일까지로 정해졌다. 영국은 2016년 6월 23일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브렉시트를 결정했고, 2019년 3월 29일이 조약에 따른 탈퇴 시행일이었다. 하지만 영국과 EU 간의 탈퇴 합의안이 영국 하원에서 세 차례나 부결되는 바람에 브렉시트 시행일이 연기되었다.

이제 영국은 10월 31일까지 EU와 다시 협상하여 새로운 탈퇴 합의안을 마련하여 의회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합의 없는 브렉시트’, 곧 ‘노 딜 브렉시트No Deal Brexit’로 말미암아 영국과 EU의 관계가 단절되는 파국을 맞을 수 있다.

EU에서 탈퇴한다는 것은 경제 교류, 안보, 이민 등과 관련하여 EU차원의 규율에서 벗어난다는 것을 의미함과 동시에 유럽 차원에서 단일 주권의 정치 공동체를 수립한다는 정치적 기획에 더 이상 참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계화가 급진전되어 세계적인 차원에서 국경을 초월한 경제협력이 이뤄지고 있는 현실에서, 민족국가의 틀을 뛰어넘는 정치 공동체를 실현한다는 대의로부터 이탈하겠다는 영국의 결정은 대세와 여망을 거스르는 돌출적인 행동으로 비쳐지기도 한다. 그리고 실제로 탈퇴 절차, 방식 그리고 이후의 새로운 관계를 둘러싸고 영국은 정치적 혼란에 빠져 있으며, 영국과 EU의 미래 관계에 대한 불확실성으로 인해 세계경제의 안정이 위협받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여러 가지 의문이 든다. 영국은 왜 EU 탈퇴 여부를 두고 국민투표를 실시했는가? 영국 국민 과반수는 왜 EU 탈퇴를 찬성했는가? 탈퇴 결의에도 불구하고 왜 탈퇴 과정에서 난항을 겪고 있는가? 향후 브렉시트 문제는 어떤 식으로 전개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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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운동가 권문석을 추모하며

 

육 년 전 급작스러운 그의 죽음을 접한 우리는, 잠시 머뭇거리긴 했지만, 그를 떠나보내는 자리의 이름에 “사회운동가 권문석”이라고 썼다. 그리고 우리는 살아남은 자의 슬픔 속에 꼬박꼬박 그가 떠나간 날을 지나고 있다.

사회운동은 프랑스혁명을 거치면서 변화가 정상적인 사태로 인식된 이후 등장한 현상이다. 그리고 그 변화는 바로 다수의 힘으로 이루어질 터였다. 변화가 정상적인 사태가 되자, 이 변화에 대한 태도 속에서 이른바 이데올로기가 형성되었다. 보수주의, 자유주의, 맑스주의 등등.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변화가 다수의 힘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본 사람들은 그 다수를 구성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와 조직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고, 이 속에서 사회운동이 탄생했다. 사회운동은 사회주의와 민족주의처럼 거대 담론을 가지고 국가를 투쟁의 중심 지점으로 보는 것부터 20세기 후반의 새로운 사회운동까지, 변화를 추구한 사람들이 선택한 삶의 형태가 되었다.

사회운동을 선택한 사람들은 햄릿이 말한 것처럼 “시대가 탈구되어 있다”라고 생각했고, 사태를 제자리에 놓는 비판을 시도했으며, 더 나은 미래를 꿈꾸었다. 권문석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학생운동가로서 성년의 삶을 시작한 그가 진보정당의 활동가로, 정책 기획가로 활동하기 시작했을 때, 상황은 많이 변해 있었다. 노동자운동과 진보정당은 적극적인 전망을 내놓기는커녕 과거의 성취를 지켜내는 것도 힘든 상태였다. 게다가 여성의 권리 등 새로운 권리 운동의 등장과 생태적 위기에 맞서는 환경 쟁점의 부상에 대해 힘겹게 즉자적으로 대응할 뿐인 상황이었다. 이 바탕에는 “보편적 계급”, “세계사적 사명을 가진 계급”으로서의 노동자운동의 정체성화와 주변화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런 변화는 지역에 따라 이미 오래전에 감지되었으나 한국에서는 늦게까지도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몰랐다기보다는 기존의 진보운동이라는 틀로 다 욱여넣으려고 했다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어쨌든 혁신이 필요했다. 하지만 세상을 바꾸려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바꾸는 것은 무척이나 힘들었다. 그 원인을 다 드러내기는 어려우니, 일단 기존의 성취를 잃어버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고 해 두자. 굳이 하나를 더 들자면, 추상적 대의와 현실적 전략을 일치시키지 못하는 무능력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이데올로기가 작동했을 것이다. 그 이데올로기는 자신을 구성하게는 하지만 한번 구성된 정체성을 바꾸는 데는 걸림돌로 작용한다.

그러니 목숨을 건 도약이 필요했을 텐데, 그것은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는 일이긴 하지만 자유낙하는 아니었다. 그것은 적절한 착륙 지점에 도착하기 위한 몸부림이었고, 게다가 허공에서 이루어져야 할 일이었기에 그 어떤 준거점도 주위에서 발견할 수 없이 감행해야 하는 일이었다. 우리의 권문석이 이 일의 선두에 섰다고 말하는 것은 물론 과장일 것이다. 하지만 그가 누구보다 땅에 발 딛고 서기를 원했고 맑은 눈으로 세상을 보려 했다는 것만은 틀림없다.

우리가 그를 그 무엇보다 “사회운동가”로 부른 것은 이 때문이다. 과거에는 세상의 변화를 추구한 것이 사회운동가였다면, 오늘날에는 그 변화를 따라가기 위해 스스로를 변화시켜야 하는 게 사회운동가의 운명이 되었다. 사회운동가 권문석은 기본소득이라는 의제와 알바노동이라는 형태에서 스스로를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세상을 바꿀 어떤 것을 찾아내려고 했다. 기본소득이 모두에게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함으로써 알바들의 내적 힘을 형성하고 이것이 다시 변화의 원동력이 되도록 만드는 장기적인 프로젝트라면, 알바노동의 가시화는 변화하는 우리의 노동 현실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알바들이 목소리를 내게 함으로써 우리 사회의 약한 고리를 가리키려는 시도였다. 이런 이유로 오늘날의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는 권문석을 창립 회원일 뿐만 아니라 명예 의장이라고 생각하며, 알바연대는 그를 대변인으로 기억하고 있다.

시간이 흘러 그가 내세운 의제, 그가 개척하고자 한 활동이 조금씩이나 의미 있는 것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가 우리와 함께 있었다면, 단두대로 가면서 시드니 카턴이 했던 말을 반복했을지 모르겠다. “내가 지금 하는 일은 내가 지금껏 했던 어떤 일보다 훨씬 더 나은 일이라네.” 이런 점에서 조숙한 사람, 시대와 불화를 일으킨 사람과 함께했던 우리는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느낄 수밖에 없는 일이다.

편집위원회를 대신하여
안효상

이 글은 『시대』 2019년 06월호 통권69호에 실린 ‘책 머리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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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 사납금제 폐지와 완전월급제는 시행될 수 있을까?

임성용

 

세계 최장기 고공농성

지난 1월 26일. 전주시청 앞 20m 높이의 조명탑 위에서 고공농성을 벌이던 전국공공운수노조 택시지부 전주지회장 김재주 씨가 땅을 밟았다. 무려 510일 만이었다. 단일 고공농성으로는 세계 최장기라고 한다.

고공농성은 막다른 길에 선 노동자가 목숨을 걸고 하늘로 올라가는 마지막 선택이다. 요구가 관철되지 않으면 농성을 풀지 않겠다는 결사적 의지를 담고 있다. 한두 달도 아니고 일 년, 아니 일 년 반이 넘도록 눈과 비를 맞고 바람을 맞고 여름이면 땡볕을, 겨울이면 혹한을 견뎌야 했다. 계절이 여섯 번, 일곱 번이나 바뀌도록 비좁은 하늘 감옥에서 하루하루를 버티고, 날로 쇠진한 몸으로 오랜 시간을 살기란 결코 쉽지 않다. 말 그대로 사투다. 그래서 다른 나라에서는 좀체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다. 가히 세계적인 일이다.

김재주 지회장은 2017년 9월 4일, 택시 사납금제 폐지와 완전월급제를 요구하며 조명탑으로 올라갔다. 본인도 그때는 농성이 그렇게 길게 갈 것인지는 몰랐을 것이다. 법이 정한 전액관리제(이하 ‘완전월급제’) 투쟁을 끝내야 한다는 일념이었다. 그 일념 속에는 무엇보다도 택시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세상에 알리겠다는 ‘분노’가 들어 있었다. 사납금이라는 족쇄에 묶여 현대판 노예나 다름없는 택시 노동자들의 노동 여건을 개선해 달라는 그의 요구는 단순했다. “제발 법대로 하라!” “법 좀 지켜라!”

전주시청 앞 조명탑에 올라 사납금제 폐지를 요구하며 농성 중이던 김재주 지회장 (출처: 임성용)

택시지부와 전주시는 2018년 12월 말부터 교섭을 진행해 왔다. 그러나 또 한 해가 지나고 고공농성이 500일을 넘기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끝장’ 교섭에 들어갔다. 1월 23일부터 25일까지 사흘 동안 마라톤 교섭을 계속했다. 마침내 고공농성 509일째이던 1월 25일 밤에 합의안이 만들어졌다.

그 다음 날, 택시지부와 전주시는 전주시청에서 조인식을 했다. 김양원 전주시 부시장과 김영만 전국공공운수사회서비스노동조합 택시지부장이 ‘확약서’라는 이름으로 된 합의안에 서명했다. 교섭 내내 핵심 쟁점이었던 ‘행정처분(처벌)’과 관련된 합의가 명시되었다. 이로써 세계 최장기 고공농성을 마무리하게 된 것이다.

 

임성용
화물 운수 노동자, 시인. 시집으로 『하늘공장』 등이 있고, 산문집으로 『뜨거운 휴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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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4/4분기 가계동향조사 관련 논란에 부쳐*

이건민 기본소득신진연구자네트워크

 

1. 여는 말

지난 2월 21일 통계청에서 ‘2018년 4/4분기 가계동향조사(소득부문) 결과’를 발표하였다. 통계청장 교체의 배경으로 알려진 2018년 1/4분기와 2/4분기의 가계동향조사 결과 발표 때 벌어졌던 논란에 이어, 소득불평등 악화를 시사하는 이번 발표로 인하여 가계동향조사 통계를 둘러싼 논란이 재점화되었다.

이 글에서는 우선 2018년 4/4분기 가계동향조사 결과 발표 내용과 이를 둘러싼 몇 가지 논란을 간략히 요약한다. 다음으로 여기서 제기된 몇 가지 쟁점들을 검토할 것이다. 쟁점 검토 결과, (최)상위 소득자가 누락되고 과소 소득 보고에 취약하다는 가구 조사가 가진 근원적 한계, 계절성을 갖는 분기별 통계로 인한 소득분포 및 소득불평등 추이를 분석하는 것의 부적절성, 2016년, 2017년, 2018년 조사에 걸쳐 이루어진 조사 모집단, 조사 방식, 표본 등의 급격한 변화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볼 때, 적어도 가계동향조사 결과만으로는 소득불평등 심화의 원인으로 지목된 각 요인들이 소득불평등 확대에 미친 상대적 기여도를 정확히 파악하기 힘들 뿐만 아니라 소득불평등이 어느 정도로 심화되었는지, 심화되기는 한 건지조차 확인하기 어렵다고 주장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번 논란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시사점과 함의를 제공하면서 글을 맺는다.

2. 2018년 4/4분기 가계동향조사 결과 발표와 이를 둘러싼 논란

2018년 4/4분기 가계동향조사(소득부문)의 주요 내용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통계청, 2019).** 먼저 월평균 소득의 불평등을 살펴보자. 소득 1분위 가구(소득 하위 20%에 속하는 가구)의 월평균 소득은 전년 동 분기(2017년 4/4분기) 대비 17.7% 감소(2003년 통계 집계 이후 4분기 기준 역대 최대폭 감소)한 123만8천원에 그친 반면, 소득 5분위 가구(소득 상위 20%에 속하는 가구)의 월평균 소득은 전년 동 분기 대비 10.4% 증가한 932만4천원이었다. 1분위 가구의 소득 감소와 5분위 가구의 소득 증가로 인해, 2018년 4/4분기 월평균 소득의 5분위 배율은 7.53으로 매우 높은 수치를 기록하였다. 1분위 경상소득은 123만6천원으로 전년 동 분기 대비 14.6% 감소한 반면, 5분위 경상소득은 917만7천원으로 전년 동 분기 대비 10.5% 증가하였다. 소득 주도 성장을 표방해 온 정부 입장에서 특히나 난감한 통계는 바로 1분위 근로소득과 사업소득이 전년 동 분기 대비 각각 36.8%와 8.6% 감소하였다는 것이다. 전년 동 분기와 비교할 때 5분위는 2018년 1분기부터 4분기까지 계속해서 소득 증가를 보인 반면, 1분위는 2018년 1분기부터 4분기까지 줄곧 소득 감소를 보일 뿐만 아니라 2018년 4분기의 경우 2018년 1∼3분기에 비해 감소율이 훨씬 커진 양상을 나타내었다.

 

* 본고의 일부 내용은 정치경제연구소 ‘대안’에서 제작한 ‘이럿타 107회-1부. 통계청 가계동향조사 논란’에서 소개된 바 있음을 밝힌다.

** 주요 용어를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여기서 말하는 “소득”은 비교적 정기적이고 예측 가능한 소득을 뜻하는 “경상소득”과 일시적이고 예상치 못한 소득을 의미하는 “비경상소득”을 더한 것이다. “경상소득”은 근로소득, 사업소득, 재산소득, 이전소득(공적 이전소득 + 사적 이전소득)의 합이다. “가처분소득”은 경상소득에서 공적 이전지출(경상조세 + 연금 등 사회보험료)을 뺀 것이다. “균등화가처분소득”은 가구의 가처분소득을 가구원수의 제곱근으로 나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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