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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와 음악

임영근 정치경제연구소 대안 상임연구원

 

음악은 만국 공통의 언어라는 말을 흔히 한다. 수긍이 가는 말이다. 전 세계를 통틀어 음악과 춤이 없는 문화는 없다. 자장가 없는 문화도 없다. 자장가가 없는 문화가 없을 뿐 아니라 엄마와 아이가 교감하는 자장가는 서로 비슷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우르르 까꿍 하며 어를 때처럼 음높이는 높아지고 박자는 느려진다고 한다. 이처럼 우리 인간의 마음 깊숙이 음악을 즐기는 심성이 자리 잡고 있다는 뜻에서 음악은 만국 공통의 언어일 수 있다.

하지만 똑같은 이유로 음악을 통해 소통하기는 매우 어려운 게 현실이다. 음악이 우리 감성을 강력하게 흔드는 그 이유 때문에 음악에 대한 선호가 민감해진다. 취향에 맞지 않는 음악을 듣는 것보다 참기 힘든 고통도 없다. 나는 ‘트로트’ 음악을 들을 때면 어렸을 때 시외버스 터미널을 떠올리곤 한다. 흔히 보는 테이프는 아니었다. 보통 테이프보다 훨씬 커서 도톰한 수첩만 한 플라스틱 통이었다. 그 물건을 운전석 앞의 구멍에 기사 아저씨가 꽂으면 어김없이 나오던 트로트 음악. 버스는 출발할 생각도 않고 꿍짝 꿍짝 하는 리듬에 사랑이니 이별이니 눈물이니 하는 가사가 되풀이되는 노래가 이어진다. 몇 곡이 흘러도 그 노래가 그 노래 같아 분간이 안 가는 노래. 제발 음악 좀 끄고 이제 그만 출발해 주세요. 이렇게 마음속으로 빌며 견뎌야 했다. 물론 이것은 그 당시의 내 취향을 얘기하는 것일 뿐 트로트 음악에 대한 평가는 아니다. 그런 내 취향이 생겨난 데에는 당시 어른들 세계에 대한 반감이 어떤 식으로든 작용한 결과일 것이다.

음악에 꽂힌 호모 사피엔스

음악은 청각을 통해 받아들인다. 청각의 특징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결코 외면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트로트가 들리는 동안 안 들을 도리가 없다. 아무리 귀를 틀어막는다 해도 우리 귀로 끝없이 스며든다. 그 자리를 빨리 벗어나는 수밖에 없다.

청각의 또 다른 특징은 자극과 반응이 매우 단선적이고 직접적이라는 것이다. 혀와 코에는 수많은 수용기들이 있어 특정 물질에 반응한다. 시각도 망막에 있는 수많은 세포를 통해 받아들인다. 이에 비해 귀는 단 한 가지 신호를 받아들일 뿐이다. 공기의 진동, 이 한 가지 신호만을 처리할 뿐이다.

‘클래식’음악을 즐겨 듣는 사람 가운데는 실황 음악 음반을 선호하는 사람이 많다. 스튜디오에서 녹음한 교향악단의 깔끔한 소리보다 기침 소리 같은 소음이 섞인 음반을 좋아하는 것이다. 현장감을 즐기기 위해서다. 그런데 우리가 듣는 것은 하나의 소리 파동일 뿐이다.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공기 압력을 듣는 것이다. 연주하는 소리, 기침 소리, 코 푸는 소리, 이 모든 것이 합쳐진 하나의 소리 파동을 듣는다. 설사 여기에 기차가 지나간다 해도 그 소리까지 합쳐져 만들어진 하나의 파동을 듣는 것이다.

참으로 놀라운 능력이 아닐 수 없다. 여러 가지 소리가 합쳐진 단 하나의 파동을 들으면서도 우리는 각각의 소리를 어려움 없이 분간해 낼 수 있다. 연주하는 소리, 기침 소리, 코 푸는 소리, 기차 소리를 분간해 들을 수 있다.

한때 라디오에서 일반인을 상대로 노래 제목 알아맞히기 프로그램을 진행한 적이 있다. 노래 시작 부분을 아주 잠깐만 들려 주고 어떤 노래인지 알아맞히는 방식이다. 나도 몇 번 들은 적이 있는데, 프로그램에 나온 일반인들이 대부분의 노래를 척척 알아맞혔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들은 노래를 어떻게 맞힐 수 있지? 여러 번 진행될수록 너무 쉽게 맞히는 바람에 퀴즈가 싱거워질 정도였다. 내가 그 노래들을 알아맞히지 못한 이유는 딱 한 가지였다. 내가 들어 보지 못 한 노래였기 때문이다. 잘 아는 노래가 나왔다면 처음 몇 개의 음만 들어도 알아맞혔을 것이다.

이처럼 음악에 민감한 우리의 능력을 실험한 사례가 『음악 본능』에 소개되어 있다. 베토벤의 <엘리제를 위하여> 같은 유명한 노래의 멜로디를 들려 주고 알아맞히는 실험이다. 처음 두 음을 들려 주었을 때 알아맞힌 사람이 무려 56퍼센트였다. 자기가 잘 아는 음악이라면 처음 두 음만 들어도 반 이상이 알아맞히는 것이다. (세 번째 음까지 듣고 알아맞힌 사람은 69퍼센트였고, 여섯 번째 음까지 들려 주었을 때는 100퍼센트 알아맞혔다.) 나머지 바그너의 <결혼행진곡>이나 독일 가곡 <소나무>에 대한 실험에서도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추세는 비슷했다고 한다.

이처럼 소리와 음악에 민감한 우리 인간은 음악에 대한 정서적 반응도 강력하다. 이 책에서는 음악에 대한 정서적 반응을 실험한 사례로 소개하고 있다. 토마스 프리츠Thomas Fritz가 카메룬의 산악지대에 사는 마파Mafa족을 상대로 한 실험이었다. 마파족은 서양음악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고 고립되어 살아온 민족이다. 당연히, 유럽인이 볼 때 아주 낯선 음악을 즐기는 사람들이었다. 프리츠는 바흐에서 탱고, 로큰롤까지 여러 음악을 들려 주고 즐거운 곡, 슬픈 곡, 위협적인 곡으로 분류하도록 요청했다. 분류 결과는 놀랄 만큼 잘 들어맞았다고 한다.

서양인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서양인들 또한 마파족 음악을 정서적으로 잘 들어맞게 분류한 것이다. 음악을 들으면 즐거운지 슬픈지 따분한지 신나는지 누구나 느낄 수 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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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저임금 논란, 무엇이 문제인가?

조혜경 정치경제연구소 ‘대안’연구원

 

최저임금 논란이 뜨겁다. 이 글은 최근 최저임금에 대한 논란이 왜 끊이지 않는지 그 원인을 짚어 보려고 한다.

최저임금제도의 취지 자체에 반대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저기서 아우성이 쏟아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최저임금제도는 1987년 민주화와 개헌의 산물로 도입되어 약 3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1988년부터 최저임금제도가 시행에 들어간 이래 매년 최저임금 시급이 인상되어 왔는데 그때마다 연례행사처럼 최저임금 수준을 놓고 노사 양측이 팽팽한 평행선을 달리며 대립각을 세웠다. 최저임금 논란은 늘 있어 왔던 일이라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다.

올해는 양상이 좀 다르다. 과거에는 최저임금안을 결정하기 직전에 노동자위원 또는 사용자위원이 퇴장하거나 표결에 불참하는 파행이 일어나면서 노사 간 갈등이 최고조에 도달했다가 우역곡절 끝에 최종안이 확정되면 논란은 자연스레 사그라졌다. 한마디로 최저임금 수준 결정 과정에서 당자사인 노사 양측의 대립과 갈등이 논란의 중심이었다. 2018년 최저임금안 협상 과정도 예외가 아니었다. 늘 그랬듯이 난항에 난항을 거듭하다가 시한을 넘겨 합의가 아닌 표결로 최종안이 확정되었다. 하지만 이번엔 예년과는 달리 그것으로 논란이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왜 그럴까?

 

한국 최저임금제도의 역사와 목표

최저임금 논란 해부에 앞서 먼저 우리나라 최저임금의 개념 정의, 그 역사와 목적을 간단히 살펴보자. 우리나라의 경우 최저임금에 관한 헌법 조항이 있고 「최저임금법」이라는 별도의 법제가 존재한다. 이 글에서는 그 법에 명시된 최저임금의 개념 정의와 목적을 소개한다. 법률적 개념 정의는 정책 시행의 준거로 사용되는 것이므로 학문적 논의에서의 개념과는 차이가 있다.

최저임금제도는 국가가 노사 간의 임금 결정 과정에 개입하여 임금의 최저 수준을 정하고, 사용자에게 이 수준 이상의 임금을 지급하도록 법으로 강제함으로써 저임금 근로자를 보호하는 제도를 말한다. 이러한 개념 정의에서 알 수 있듯이, 노동시장 당사자 간의 자율적 결정에 맡겨둘 수 없다는 판단이 전제된다. 따라서 정부가 시장을 강제하는 방식, 즉 법률에 의한 구속력이 불가피하다. 우리나라 최저임금 제도는 이미 1950년대 초반 법률적 근거가 마련되었으나 시행되지 않다가 1986년 「최저임금법」이 제정된 이후에야 비로소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1953년 제정된 「근로기준법」에 최저임금제도의 실시 근거 를 마련했으나, 당시 경제 상황에서 최저임금제도 시행이 어렵다는 판단에 따라 그냥 종잇장에 적힌 문구에 불과했다. 1970년대 중반에는 정부가 행정지도를 통해 기업을 압박하기도 하다가 1986년 12월 31일 「최저임금법」 제정으로 구체적인 시행 규정이 마련됨에 따라 1988년 1월 1일부터 시행이 되었다.

1987년 민주화운동의 성과로 탄생한 헌법 제32조 제1항에 국가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최저임금제도를 시행하여야 한다는 조항이 포함되어 최저임금제도의 헌법적 기초가 마련되었다. 「최저임금법」 제1조에서 명시하고 있는 최저임금제도의 목적은 “근로자에 대하여 임금의 최저수준을 보장하여 근로자의 생활안정과 노동력의 질적 향상을 꾀함으로써 국민경제의 건전한 발전에 이바지”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최저임금위원회가 제시한 최저임금의 효과를 보자. 최저임금위원회 홈페이지를 인용하자면, 최저임금제도의 실시로 최저임금액 미만의 임금을 받고 있는 근로자의 임금이 최저임금액 이상 수준으로 인상되면 다음과 같은 효과가 나타난다. 첫째, 저임금 해소로 임금격차가 완화되고 소득분배 개선에 기여하며, 둘째 근로자에게 일정한 수준 이상의 생계를 보장해 줌으로써 근로자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근로자의 사기를 올려주어 노동생산성이 향상되고, 마지막으로 저임금을 바탕으로 한 경쟁 방식을 지양하고 적정한 임금을 지급토록하여 공정한 경쟁을 촉진하고 경영합리화를 이룬다.

최저임금위원회가 밝히고 있는 최저임금의 효과를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저임금 해소, 임금격차 완화, 노동자의 생활 안정, 생산성 향상, 경영 합리화 등 노사 양측에 모두 행복을 안겨주는 엄청난 제도처럼 들린다. 하지만 최저임금제도가 현실에서 그런 효과를 낳는지는 전혀 다른 문제다. 특히 최저임금제도가 노동 빈곤의 문제, 즉 열심히 일해도 빈곤을 벗어나지 못하는 “워킹 푸어” 문제를 해소하는 데 기여하고 있는 것인지, 그래서 노동자의 생활이 안정되고 시장소득의 양극화가 줄어들고 있는지를 따져 볼 필요가 있다. 이하에서는 최저임금 이슈를 최저임금의 실제 효과의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논의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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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수고용노동자의 권리를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

유승경 정치경제연구소 ‘대안’ 부소장

 

전자 제품 수리 기사, 택배 기사, 배달원, 골프장 캐디, 보험설계사, 학습지 교사, 판촉 담당자, 간병인, 미용사 등은 일의 성격에 비춰보면 전통적인 의미의 노동자다. 하지만 십 수 년 전부터 이들 대부분은 법적으로 더 이상 고용관계에 묶여 있는 노동자가 아니라 독립적인 개인 사업자, 즉 자영업자로 바뀌었다.

최근에는 ‘플랫폼 노동’, ‘긱 노동’, ‘온 디맨드 노동’ 등으로 불리는 새로운 노동 형태가 확산되면서 전통적인 의미에서 노동자도 아니고 개인 사업자도 아닌 제3 유형의 직종에 취업한 사람들이 나날이 늘고 있다.

기술과 제도의 변화에 따라 새로운 유형의 노동과 취업자가 등장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이 경향은 사회경제적 문제를 낳고 있다. 그 이유는 이런 유형의 취업자들은 대부분 사회경제적 입지가 취약한데, 이들을 보호할 수 있는 법과 제도가 마련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전통적인 산업사회는 자본을 가진 자본가와 그들에게 노동력을 판매하는 노동자가 사회경제관계의 기본 토대를 형성했다. 이러한 구도에서 사회경제적인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법과 제도는 자본가에게 고용된 노동자를 기본 모델로 하여 마련되었다. 법적으로 기본적인 노동조건을 강제하는 한편 노동자에게 노동삼권을 보장했다. 그리고 사회적 안전망인 사회보험제도도 회사에 직접 고용된 노동자를 기본 대상으로 삼아 구축되었다. 그 결과, 제3 유형의 새로운 사회경제적 약 자는 사회적 균형을 맞추기 위한 법과 제도로부터 소외되어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제3 유형의 취업자를 보호할 대응책의 마련 이 시급하다. 세계적으로 제3 유형의 취업자를 보호하기 위한 노력은 기존에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해 마련된 법과 제도를 새로운 유형으로까지 확대하는 방향으로 추진되고 있다. 달리 말해, 제3 유형을 특수한 형태의 노동자로 규정하고, 노동자와 동일한 근로조건을 법으로 강제하고 노동3권을 부여하며, 기본적인 사회보험의 혜택을 제공하자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세계적 추세와 흐름을 같이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제3 유형의 취업자에게 (1) 노동3권의 부여 (2) 근로조건의 보호 (3) 사 회보험 보호를 제공하기 위한 논의가 우리나라에서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를 살피고 당면 과제가 무엇인가를 검토해 본다.

 

1. 제3 유형, 노동자인가 독립 사업자인가?

제3 유형의 취업자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법적으로나 학문적으로 합의된 바가 없다. 사실 정해진 호칭도 없다. 서구에서 는 근로자의 속성인 ‘dependent employment’와 자영업자를 의미하는 ‘self-employed’를 합성하여, ‘종속된 자영업자the dependent self-employed’라고 하기도 하며, ‘유사 노동자employ-like person’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김도균 외, 『 자신에게 고용된 사람들』, 2017년, 후마니타스, 244 쪽). 우리나라에서는 “특수유형근로 종사자” 혹은 “특수고용노동자” 등으로 불린다. 이 글에서는 “특고노동자”로 지칭한다.

특고노동자에게 노동자로서의 권리와 보호를 제공한다고 했을 때 한 가지 어려운 문제가 있다. 법적으로 개인 사업자인 특고노동자와 일반적인 독립적 개인 사업자를 어떤 기준에 따라 구분할 것인가?

이 문제가 왜 중요한가를 국내 최장기 비정규직 투쟁 기록을 가지고 있는 재능교육 학습지 교사의 사례를 통해 살펴보자. 재능교육 학습지 교사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하자 회사 측은 노조 활동을 이유로 교사들을 해고(명목상은 ‘위탁 계약 해지’)했고, 이에 교사들이 소송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 1심 재판부는 학습지 교사도 회사에 경제적으로 종속되어 있기 때문에,「 근로기준법」상의 근로자는 아니지만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이하 ‘「노동조합법」’)상의 근로자에는 해당한다고 판결했다. 하지만 2심 재판부는 교사들이 회사로부터 상당한 지휘와 감독을 받지 않는다는 등을 이유로 「노동조합법」상의 근로자가 아니라고 판결했다.

이에 대한 대법원의 판결은 아직 나오지 않았는데, 이처럼 특고노동자를 개인 사업자와 법적으로, 개념적으로 구분하는 것은 매우 논쟁적이며 사실상 정치적이다. 이렇다 보니, 특고노동자에 대한 통계도 제각각이다. 국가인권위원회에 따르면 약 230만 명에 달하지만, 통계 청에서는 그보다 훨씬 적은 약 50만 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우리나라 법률에서는 “특수형태근로종사자”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이 명칭은 「산업재해보상보험법」(‘「산재보험법」’)에 유일하게 등장한다. 2007년에 개정된 「 산재보험법」은 “계약의 형식에 관계없이 근로자와 유사하게 노무를 제공함에도 「근로기준법」 등이 적용되지 아니하여 업무상의 재해로부터 보호할 필요가 있는 자” 가운데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직종에 종사하는 자”를 “특수형태근로종사자”로 정의했다. 이 조항에 따라 현재, 골프장 캐디, 학습지 교사, 보험설계사, 레미콘 기사, 택배 및 퀵 서비스 기사, 대출 모집인, 전속 대리운전기사 등 총 9개 직종이 특수형태근로종사자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법에 따르면 특고노동자는 9개 직종뿐이며, 이것도 「산재보험법」에 한정된 것이다.

제3 유형의 직종을 개인 사업자가 아니라 특고노동자로 할 때의 기준은 ‘근로자성’이다. 달리 말하면 노동자로서의 성격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 판단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특고노동자가 법적으로 개인 사업자의 형식을 띠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다.

근로자성을 판단하는 데는 통상적으로 “사용 종속성”(“인적 종속성”)과 “경제 종속성”의 두 기준을 사용하거나 여기에 “조직 종속성” 을 더해 세 가지 기준을 적용한다(김도균 외, 위의 책, p. 236). 사용 종속성은 주로 (1) 사용자의 지휘와 감독을 받는지, (2) 사용 자가 근무 장소와 시간을 지정하는지로 판단한다. 경제 종속성은 (3) 근로 제공 관계가 지속적이며 사용자에게 전속되어 있는지, (4) 제3자를 고용해서 업무를 대체할 수 있는지, (5) 근로자가 재정적 위험을 부 담하는지, (6) 보수가 유일한 수입의 원천인지 등으로 판단한다. 그리고 조직 종속성은 (7) 노동이 기업 조직 내로 통합되는지로 판단한다.

이 기준은 대략적인 기준일 뿐 절대적인 기준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 위의 기준 중에서 몇 개를 충족시켜야 노동자라 할 수 있는지를 정하는 것은 지극히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위의 기준에 비춰 보면 화물 기사, 방송 작가, 대리운전기사는 근로자성이 약한 것으로 나온다. 그렇다고 이들이 노동자가 아니며 노동 법제와 사회보험의 보호가 필요 없다고 단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따라서 제3 유형의 직종을 노동자로 규정하고 노동 법제와 사회보험제도로 보호하기 위해서는 법규와 제도의 개선이 이뤄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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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 산업혁명 시대, 플랫폼 노동과 사회보장 개혁*

서정희 군산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백승호 가톨릭대학교 사회복지전공 교수

 

 

Ⅰ. 서론

남성 생계부양자의 유급노동을 통한 임금만으로 가족의 충분한 생활을 유지하기 어려워진 것은 이제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맞벌이 가구도 마찬가지다. 제조업 중심의 산업구조가 서비스업 중심으로 이동하면서 저임금 일자리 비율이 늘고 고용 불안정성이 증가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실업의 만연, 실직의 두려움, 낮은 임금으로 인한 불안정성은 장시간 근로와 직장에서의 충성을 강요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4차 산업혁명의 바람은 인간의 노동을 기계와 인공지능으로 점차 대체할 가능성을 예시한다. 보다 더 근본적인 변화는 4차 산업혁명으로 ‘플랫폼 노동’이 확산되면서 고용관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제조업의 쇠퇴는 숙련노동의 비중을 축소시켰고, 동시에 숙련노동의 확보 및 유지에 필요한 비용을 자본이 일정 비율 이상 부담할 필요 역시 축소시켰다. 서비스산업 중심의 경제에서는 평균적으로 제조업 중심의 산업구조에서보다 숙련노동의 비중이 낮으며 저생산성을 특징으로 하기 때문이다. 낮은 생산성을 특징으로 하는 서비스산업 경제에서 사용자들은 한편으로는 저임금 노동의 비중을 늘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비용의 중요한 원천인 사회보장 기여금을 절감하는 전략을 선택하여 왔다. 이러한 전략에서 주요하게 활용된 방식이 고용관계를 계약관계로 전환시키고 위장된 고용관계를 확대하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인공지능 혁명’ 시기의 플랫폼 경제는 사용자·노동자·자영업자라는 고용관계의 구분 틀 자체를 모호하게 만들고 있다. 플랫폼 경제에서는 사용자도 노동자도 사라지고 자영업자와 이용자와 이들을 연결시키는 플랫폼만이 남게 되었다. 이렇듯 노동시장에서는 유급노동이 불안정해지고 일자리의 축소 및 질적인 변화가 예견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보장제도는 여전히 전통적 고용관계 개념에 기초하여 대상자 적격성을 판단하고 있다. 결국 사회보장의 대상자 적격성을 충족시키기 어려워지는 고용관계가 확대되고 있는 추세를 고려해 보면, 이에 대비하여 사회보장제도에서 근본적인 관점의 변화가 있지 않다면 아무리 잘 갖추어진 사회보장제도라 하더라도 제대로 작동하기 어려울 것이다. 여기에서 근본적인 관점의 변화란 현재 사회보장제도가 천착하고 있는 노동 중심적 접근에 대한 재검토에서부터 출발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본 연구는 노동 중심성 문제를 근본적으로 되짚어 보고자 한다.

Ⅱ. 4차 산업혁명과 노동의 변화

1. 노동의 양적 변화

4차 산업혁명이 화두가 되면서 미래에는 일자리가 사라지고 노동 없는 미래가 도래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Frey, C. B. and Osborne, M. A., 2017). 노동 없는 미래에 대한 예측은 2016년 1월 스위스 다보스에서 ‘제4차 산업혁명’을 주제로 세계경제포럼(“Mastering the Fourth Industrial Revolution”)이 열린 이후 크게 부각되었다. 여기에 서 발표된 「일자리의 미래The Future of Jobs」 보고서는 로봇이 사람들의 일자리를 대신하여 2020년까지 710만 개의 일자리가 사라지고 200만 개의 일자리가 새로 만들어져서 총 500만 개의 일자리가 사라질 것이 라는 노동 없는 미래를 전망하였다(World Economic Forum, 2016). 이 외에도 세계은행 등 국제기구들의 전망과 직무 분석을 통한 많은 학자들의 노동시장 전망은 대체로 일자리의 총량이 줄어들 것이라는 예측이 지배적이다.

반면에 이전의 산업혁명도 그러했듯이 새로운 형태의 일자리가 만들어질 것이라는 전망 또한 제기되고 있다(Autor, D. H., 2015). 그러나 일자리의 양적 변화에 대한 이러한 상반된 견해에도 불구하고, 일자리의 질, 즉 불안정한 일자리가 증가할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큰 이견이 없다. 특히 4차 산업혁명으로 인한 온라인 플랫폼 노동의 확산은 새로운 노동과정을 만들어 냄으로써 노동의 질적 변화를 추동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 이 글은 서정희·백승호(2017)을 대폭 수정 보완한 것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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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를 돌보는 일

박기순 충북대 철학과 교수

 

1. 도덕의 무능력, 혹은 윤리와 정치의 분리

어느 때보다도 ‘윤리’나 ‘도덕’이라는 말이 중요하게 다가오고 있다. 사회적으로 인정받던 사람들이 그동안 숨겨져 왔던 비도덕적인 행위들로 인해 비난과 한탄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있다. 어떤 ‘구조’, ‘분위기’ 혹은 ‘상황’ 때문에 자신에게 행해지는 부당함을 온전히 감내해야만 했던 사람들의 상처와 고통에 대한 공감, 그리고 이제 용기 내어 말하기 시작한 사람들에 대한 지지와 연대를 보내는 우리 마음의 또 다른 한편에는 놀라움과 당혹감 또한 크게 자리하고 있다. 특별히 이러한 당혹감은 도덕적 비판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 그동안 보여 주고 이룩한 것들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일 경우에 더 크게 다가올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일반적으로 ‘윤리’와 ‘정치’를 서로 무관한 것이 아니라 동일 선상에 있는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둘 사이의 이러한 친화성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현실정치의 무대에서 정치인들은 사람들에게 신뢰를 얻기 위해 스스로를 ‘좋은 사람’이라고 주장한다. 이때 ‘좋은 사람’은 타인, 더 나아가 공동체 전체에게 좋은 것을 하고자 하는 의지와 품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의미할 것이다. 이렇게 보면,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은 정치의 필수 불가결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이 점과 관련하여 가장 고전적인 담론을 제시한 철학자는 플라톤이었다. 통치의 원리가 되어야 하는 ‘정의’가 무엇인지를 탐구하고 있는 책 『국가』에서 플라톤은 통치술의 고유성을 설명한다. 모든 기술은 좋은 목적에 사용될 수도 있고 나쁜 목적에 이용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의술은 병든 사람을 살리는 기술이기도 하지만 나쁜 의도로 사용될 경우 사람을 죽게 만드는 기술일 수도 있다. 따라서 통치술을 한갓 기술로만 이해한다면 그것은 정치를 잘못 이해하게 되는 결과를 만들어 낸다. 플라톤의 적대자였던 트라시마코스의 주장대로 정의란 ‘강한 자의 이익’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플라톤에게 이러한 귀결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정치란 강자가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는 행위가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좋음을 돌보는 행위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정치 개념은 우리가 보기에 이중의 의미에서 윤리에 기초해 있다고 할 수 있다. 첫째, 좋음이란 무엇인지, 혹은 어떤 것이 좋은 것인지에 대한 이해를 전제해야 하기 때문이다. 좋은 것이란 이익이 되는 것에 다름 아니라고 하더라도, 어떤 것이 누구에게 진정으로 이익이 되는 것인지를 정하기란 쉽지 않으며 깊은 성찰과 논의를 필요로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좋음에 대한 인식, 즉 윤리학은 정치의 전제가 되어야 한다. 둘째, 정치는 특별히 나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내가 아닌 전체의 이익과 좋음을 도모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정치는 그 자체로 윤리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윤리와 정치가 사람들에게 분리해서 나타날 수 있는 가능성은 이러한 논리 위에 정립된 윤리-정치의 연속성에서 연원한다. 그리고 이 연속성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특히 윤리에 대한 특정한 이해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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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랫폼 자본주의의 문제들: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의 논리에 대한 이해

닉 스르니첵 / 번역 안효상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상임이사)

닉 스르니첵Nick Srnicek

닉 스르니첵Nick Srnicek은 런던킹스칼리지King’s College London에서 디지털 경제를 가르치고 있으며, “Platform Capitalism”(2016년)을 통해 새로운 자본주의의 특징과 작동 방식을 개념화하고자 했다. 알렉스 윌리엄스Alex Williams와 함께 쓴 “Inventing the Future”(개정판, 2016년)는 포스트자본주의에 대한 좌파적 전망을 제출한 책으로 주목받았다.

아래 글은 플랫폼 자본주의에 대한 유용한 요약이라 할 수 있는데, 플랫폼 기업의 핵심적 성격을 무엇보다 데이터 추출에서 찾고 있고, 그 속성상 팽창적이기 때문에 향후 자본주의의 경제의 중심적 자리를 차지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번역은 저자의 허락을 받아 이루어졌으며, 각주는 모두 원문의 것이다. https://www.ippr.org/juncture-item/the-challenges-of-platform-capitalism

주위를 둘러보면 “플랫폼”이라 불리는 모호한 실재들이 점차 세계를 만들어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페이스북은 가짜 뉴스를 영속시키고 미국 선거 결과를 바꾸었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고 있다. 아마존은 급격하게 물류를 바꾸고 일자리 없는 자동화된 미래를 창출하고 있다. 구글은 이미 우리 주위의 기술과 우리가 상호작용하는 방식을 바꾸고 있는 새로운 인공지능 기술을 급속하게 발전시키고 있다. 한편 우버는 새로운 초과착취 고용 모델을 개시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실재는 무엇이며, 이들 사이에 어떤 종류의 공통성이 있는가?

대부분의 경우 이러한 회사들에 대한 비판적 성찰은 이 회사들을 정치적, 문화적 행위자로 보는 데 맞추어져 있다. 가짜 뉴스를 둘러싼 논란은 가장 최근의 예이며, 이 회사들의 역사는 종종 프라이버시 침해와 정치적 로비로 점철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이 회사들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에 대해 비평가들이 주장할 때도 그 논변은 종종 가치의 언어로 이루어져 있다. 캘리포니아 이데올로기, 자유지상주의, ‘정보는 자유를 원한다’ 같은 것 말이다. 하지만 이 회사들에 대한 이렇게 낡은 접근법은 이 회사들이 무엇보다 경제적 행위자라는 사실을 가린다. 그뿐만 아니라 이 회사들은 자본주의경제 내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경제적 행위자다. 이때 자본주의경제란 특정한 요구를 회사들에 부과하는 그런 유형의 경제를 말한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서 플랫폼을 자본주의 내의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로 바라볼 때 우리는 이 회사들의 일부 미스터리한 행동을 조명할 수 있게 된다.

플랫폼이란 무엇인가?

본질적으로 플랫폼은 새롭게 지배적인 유형이 된 비즈니스 모델로, 서로 다른 집단을 하나로 묶어 주는 것에 근거한다. 페이스북과 구글은 광고주, 기업, 일상 사용자를 연결한다. 아마존과 지멘스는 현대 경제의 기초를 이루는 플랫폼 인프라를 건설하고 임대하고 있다. 이런 플랫폼 기업 모두에 핵심적인 것 – 그리고 자본주의의 더 커다란 변화의 지표 – 은 데이터 중심성이다. 데이터는 이 기업들을 추동하는 기본 자원이며, 경쟁자들에 비해 이 기업들이 우위를 갖게 되는 것도 바로 데이터다. 반대로 플랫폼은 그러한 데이터를 추출하고 이용하는 메커니즘으로 설계되어 있다. 인프라 및 서로 다른 집단 사이의 매개를 제공함으로써 플랫폼은 이 집단들 사이의 모든 상호작용을 감시하고 추출할 수 있는 위치에 있게 된다. 이러한 위치 잡기positioning가 이 회사들의 경제적, 정치적 힘의 원천이다.

이러한 성격은 첫 번째 미스터리를 이해하는 데도 도움을 준다. 기술 부문 외부에 있는 회사들이 플랫폼 요소를 채택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경제 내에서 데이터가 기술 부문과 비기술 부문 모두에서 중심적인 자원이 되면서 회사들은 이 정보를 빨아들이고 한데 모으는 방법을 급속하게 발전시켜야만 한다. 플랫폼은 이 문제에 대해 기성의 솔루션을 제공한다. 그 결과, 세계 최대의 농기계 회사인 존 디어 같은 회사들이 농부, 종자 생산업자, 화학물질 생산업자, 장비 센서, 트랙터 등등을 하나로 연결하는 플랫폼을 만들고 있다. 존 디어 자체는 데이터를 추출하고, 이 플랫폼을 이용해서 고객에 대한 서비스(특정 곡물을 언제 어디에 심어야 하는지에 대한 예측)를 개선하고 생산물을 개선하고(예를 들어 기계 손상 감소) 궁극적으로 경쟁자에 비해 이점을 가지고 경쟁자를 물리친다. 이는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것이다.

하지만 더 많은 데이터에 대한 충동은 부도덕한 결과를 낳는다. 프라이버시에 대한 침해는 플랫폼 자본주의의 필수적인 특징이 되었다. 쇼산나 주보프Shoshana Zuboff가 주장한 것처럼 플랫폼이 더 많은 데이터를 필요로 한다 – 과거의 철도 독점체가 석탄을 집어삼켰듯이 – 는 사실은 이 회사들에게는 현재 우리가 사적 영역이라고 간주하는 것의 한계를 깨려는 내적 충동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구글은 구글스트리트뷰 자동차를 운행하면서 가정의 와이파이 데이터를 수집했다는 이유로 비난받았다. 페이스북은 개인 생활을 너무 많이 이용한다는 이유로 끊임없이 비난받고 있다. 비지오는 스마트 티비를 통해 사람들을 염탐한다는 이유로 비난받았다. 이런 일들은 우연적인 과도함으로 볼 것이 아니라 플랫폼 자본주의의 필연적인 귀결로 보아야 한다. 데이터가 중심적인 자원이라면, 자본주의적 경쟁이 데이터를 얻는 것에 가장 큰 의미를 둔다면, 우리 시대는 필연적으로 프라이버시 스캔들로 점철될 것이다.

팽창, 독점, 불사신

플랫폼이 지니는 데이터 욕구는 또한 이 기업들이 지속적으로 팽창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는 프라이버시에 대한 우려를 낳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형태가 자본주의적 집중화의 데이터 중심적 논리에 따라 성장하고 팽창한다는 것도 의미한다. 구글, 페이스북, 아마존 같은 회사들이 합병과 취득에 열을 올리는 것은 데이터 추출이 이러한 회사들의 구조적 필요성이라는 것을 입증한다. 이 회사들은 핵심 사업에 만족할 수 없다. 도리어 이 회사들은 지속적으로 새로운 영역으로 데이터 추출기구를 확장해야 한다. 데이터 추출의 잠재력을 보여 주는 혁신적인 스타트업 기업들을 이 회사들은 재빨리 사들인다. 링크드인이나 트위터같은 2급 플랫폼조차 주요 플랫폼의 만족하지 못하는 데이터 욕구를 위한 사료가 된다. 이 모든 것은 구글과 같은 검색 엔진 회사가 자신과 아무 관련이 없는 자율주행차나 소비자 사물인터넷 등의 벤처 사업에 투자하고 있는 이유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것들은 그저 데이터를 추출하는 새로운 방법일 뿐이다. 포드주의적 회사들의 고전적인 수직적 통합과 달리 플랫폼은 통합의 리좀적 행태를 취한다.

이러한 플랫폼의 팽창적 성격은 완전히 다른 영역에서 활동하는 회사들이 경쟁적으로 데이터를 추출해야 한다는 압력 하에서 합병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원래 검색 엔진 회사인 구글은 이제 소셜 네트워킹 사이트로 시작한 페이스북과 경쟁하고 있고, 두 회사 모두 한때 이커머스 회사였던 아마존과 경쟁하고 있다. 현재 이 주요한 플랫폼 사이의 명시적인 적대감은 낮은 수준이긴 하지만, 이들이 새로운 영역으로 팽창함에 따라 점차 직접적으로 경쟁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소비자 사물인터넷이 좋은 예인데, 아마존과 구글은 각자 데이터 추출 제국의 이러한 부문을 지배하려는 노력에서 주요한 행위를 하고 있다. 온라인 상거래는 또 다른 마찰 지점인데, 페이스북은 기업 거래를 자신의 플랫폼으로 가져오려 하며, 이는 구글과 아마존에 어쨌든 직접적 위협이 된다. 이러한 사업들이 팽창하면서 경쟁이라는 자본주의적 필요성이 강력해짐에 따라 서로 간에 더욱 공격적으로 될 것이라고 예측해야 한다.

이러한 동학은 독점을 향한 대항 흐름에 의해 균형추가 맞추어지고 있다. 플랫폼의 핵심적인 특징 가운데 하나는 네트워크 효과에 대한 의존(그리고 네트워크 효과 창출 능력)이다. 더 많은 사용자가 어떤 플랫폼을 이용하게 될수록 이 플랫폼은 모두에게 더 가치 있는 것이 된다. 그 결과는 승자독식 시장으로 이어지는 선순환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페이스북에 가입하는 이유는 이미 그곳에 친구와 가족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동시에 소셜 네트워크 영역에서 페이스북의 중심성과 독점적 성격을 강화한다. 우리는 이러한 독점 경향이 주요 플랫폼 – 비서구권의 경쟁자인 알리바바와 텐센트는 말할 것도 없고 구글, 페이스북, 아마존 – 의 스펙트럼을 가로질러 나타나는 것을 목격하고 있다. 각각은 자신의 핵심 사업 영역에서 절대적인 지배권을 가지려 한다. 이들이 이런 위치를 점하게 되면 국가 지원 플랫폼부터 노동자 소유 플랫폼 협동조합까지 경쟁자들이 사실상 도전할 수 없는 위치에 있게 된다.

공유경제sharing economy의 죽음 충동

이에 따른 결과는 점차 공격적인 방식으로 경쟁하는 유사 독점적 플랫폼을 향하는 경향이다. 이는 분명 일부 심각한 피해자를 낳게 되는 길이다. 실제로 가장 잘 나가는 유형의 플랫폼 – 공유경제와 연관이 있는 플랫폼 – 이 가장 지속 가능하지 않기도 하다. 우버, 에어비엔비, 딜리버루 같은 회사들은 가능한 한 비용의 많은 부분을 외주화해서 운영되고 있다. 노동자들이 연료비, 유지비, 보험료 등등을 우버대신 부담하며, 호스트가 청소비와 보험료를 에어비엔비 대신 부담한다. 피고용인은 이들 회사 대부분에게 초과 착취당하고 있으며, 임금은 낮고 가져가는 것은 없다. 한편 플랫폼은 이 플랫폼으로 인해 가능하게 된 모든 거래에서 임대료를 거둬들이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이점에도 불구하고 이 회사들은 여전히 이윤을 내지 못하고 있고, 벤처 자본의 복지에 기대 생존하고 있다. 실리콘벨리(그리고 다른 곳)에서 만들어진 기금이 이 회사들로 흘러들어와 수 년 동안 손실에도 불구하고 사업을 유지하고 있다. 우버는 몇몇 도시에서 가까스로 이윤을 내긴 했지만 (이윤을 내지 못하는) 중국의 경쟁자와 싸우면서 여전히 매년 10억달러의 손실을 보고 있다.** (우버는 이 싸움을 포기했고, 패배를 인정했다.***) 더 넓게 보자면 이 회사들은 규제 및 노동자들보다 앞서 가는 것에 의해서만 ‘성공’했다. 도시와 나라 들이 이를 따라잡고 적절한 규제를 시작하면서, 노동자들이 착취적인 관행에 집단적으로 맞서고 더 나은 임금을 확보하면서, 이 회사들은 재정적으로 안정된 것이 아니라 더 어려워졌다. 이 때문에 공유경제는 단기 현상이 될 것이다. 이 회사들 대부분은 파산하거나 부자를 위한 럭셔리 서비스로 바뀌거나 다른 사업 모델로 전환할 것이다. (어쨌든 후자가 우버의 전략인데, 자율주행차를 발전시키고 소유하려 한다.) 어느 경우든 공유 경제 플랫폼은 오래 가지 못할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문제는 데이터 중심 플랫폼 모델의 내재적인 경향 및 이들의 반反직관적인 결과와 맞서는 것이며, 이 힘에 맞설 수 있는 전략을 세우는 것이다. 그들의 지배력에 대한 과소평가는 그들의 위치를 보장할 뿐일 것이며, 이 플랫폼이 글로벌 경제에서 점차 중심적인 자리를 차지하면서 이들의 기능에 대해 이해하는 게 더욱 중요해질 것이다.

* S. Zuboff (2016), “The Secrets of Surveillance Capitalism,” Frankfurter Allgemeine, 5 March 2016.
http://www.faz.net/aktuell/feuilleton/debatten/the-digital-debate/shoshana-zuboff-secrets-of-surveillance-capitalism-14103616.html

** Reuters (2016), “Uber losing $ 1 billion a year to compete in China,” February 2016.
https://www.reuters.com/article/uber-china/uber-losing-1-billion-a-year-tocompete-in-china-idUSKCN0VR1M9

*** B Stone and L. Y. Chen (2016), “Uber Slayer: How China’s Didi Beat the Riding-Hailing Superpower,” Bloomberg Businessweek, 6 October 2016. https://www.bloomberg.com/features/2016-didi-cheng-wei

 이 글은『시대』 2018년 05월호 통권58호에 실린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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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테르의 『미크로메가스』

임영근 정치경제연구소 대안 상임연구원

실존 인물이 아닌 철학자 가운데 가장 유명한 캐릭터를 꼽으라면 팡글로스 박사가 먼저 떠오른다. 볼테르의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에 나오는 인물이다.

캉디드은 베스트팔렌 지방의 고귀한 남작의 성에 사는 소년이다. 성에서 오래 지낸 하인들은 남작 누이와 이웃에 사는 마음씨 좋은 신사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일 거라고 짐작했다고 한다. 이 남작의 성에서 “형이상학적-신학적-우주론 바보학”을 가르치는 선생이 팡글로스 박사다. (볼테르는 이런 우스꽝스런 용어로 형이상학적-신학적-우주론을 얼치기 학문이라고 놀려대고 있다.) 팡글로스 박사는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는 것, 이 가능한 최선의 세계 안에서 남작의 성이 모든 성들 가운데 가장 아름답다”는 것을 증명해 보였다. 또한, 남작 부인이 모든 남작 부인들 가운데 가장 아름답다는 것을 멋지게 증명해 보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캉디드는 “이 지방에서 가장 훌륭한 철학자이므로 당연히 지구에서 가장 훌륭한 철학자인 팡클로스 선생”의 강의를 듣는 것이 행복했다. 물론 그보다 행복한 것은 이 세상에 퀴네공드 양이 있다는 것, 그녀를 매일 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퀴네공드 양은 열일곱 살 난 남작의 딸인데, “혈색이 좋고 풋풋하고 포동포동하고 탐스러운” 아가씨였다. 한편, 퀴네공드 또한 “자신이 젊은 캉디드의 ‘충족 이유’가 될 수 있고 캉디드도 자신의 ‘충족 이유’가 될 수 있으리라 상상했다.”

드디어 두 사람은 병풍 뒤에서 만난다. “입술이 서로 맞닿았고 눈길이 불타올랐다. 무릎이 떨렸고 손은 어찔할 줄을 몰랐다.” 병풍 근처를 지나던 남작이 이 “원인과 결과”를 보더니 캉디드를 발길로 걷어차 성에서 내쫓아 버렸다. 여기까지가 1장의 내용이다. 팡글로스 박사가 라이프니츠를 풍자하는 인물임을 쉽게 알 수 있다. 라이프니츠에 대한 풍자가 애교스럽게 그려져 있다.

팡글로스 박사

성에서 쫓겨난 캉디드는 “불가리아” 군대에 억지로 끌려가게 되고 아바르족과 불가리아 군 사이의 참혹한 전쟁으로 주변 마을은 비참한 모습으로 바뀐다. 남작의 성도, 성 안에 있던 사람들도 참혹한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어렵사리 전쟁터를 벗어난 캉디드는 네덜란드로 도망친다. 그곳에서도 오물을 뒤집어쓰는 수모를 당하지만 선량한 재세례파 신자, 자크를 만나 도움을 얻는다. 도움에 감격한 캉디드는 자크의 관대함에 감사하며 이렇게 말한다. “그래서 팡글로스 선생님께서는 이 세상 모든 것은 최선의 상태에 있다고 제게 늘 말씀하셨군요.”

다음날 캉디드는 거지 하나를 만난다. 거지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종기가 잔뜩 나고 눈빛은 퀭하고 코끝은 빨갛고 입은 비뚤어지고 이빨은 누렇고 목구멍에서 그렁그렁 소리가 나고 심한 기침으로 괴로워하더니 그때마다 침을 뱉어냈다.” 이 거지를 본 캉디드는 연민에 사로잡혀 자크에게 받은 은화 두 닢을 모두 준다. 거지는 눈물을 흘리며 캉디드의 목을 끌어안았다. 팡글로스를 못 알아본단 말인가? 거지는 팡글로스 박사였다.

팡글로스는 이 모든 게 “인간의 위로자이며 우주의 수호자”인 사랑 때문에 벌어졌다며 이렇게 사연을 들려준다.

자네도 파케트를 알겠지. 우리 존귀하신 남작 부인의 귀여운 시녀 말일세. 나는 그녀의 품에서 천국의 행복을 맛보았는데, 그것이 지금 자네가 보다시피 나를 집어삼킨 지옥의 고통을 낳았다네. 그녀는 성병에 걸려 있었고 아마도 그 때문에 죽었을 게야. 파케트는 꽤나 학식 있는 성 프란체스코 수도회 수사한테서 그 선물을 받았지. 역사는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네. 왜냐하면 그 수사는 늙은 백작 부인에게서 그 병이 옮았고 백작 부인은 기병대장에게서, 기병대장은 후작 부인에게서, 후작 부인은 어느 시동에게서, 시동은 한 예수회 수사에게서 옮았다니까. 그는 수련 수사 시절에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일행 중 한 사람에게서 그 병을 옮겼다네.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 4장)

당시 유럽에 매독이 아무리 창궐했다 해도 라이프니츠와 매독을 연결 짓는 것은 너무 짓궂은 처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별다른 스캔들 없이 평생 독신으로 지낸 라이프니츠였다. 게다가 나중에 프로이센의 황후가 되는 조피 샤를롯테와 철학적인 서신을 주고받으며 이어진 우정은 유명한 얘기였다. 그리고 볼테르는 여기서도 예수회를 비롯한 가톨릭 성직자들을 함께 물고 들어간다. 예수회 신부들에 대한 풍자와 야유는 볼테르의 작품 곳곳에 늘 한자리를 차지한다. 그만큼 볼테르와 예수회 신부들 사이의 대립이 심했음을 알 수 있다. 예수회는 1534년에 이냐시오 데 로욜라가 설립한 수도회였는데, 반反종교 개혁의 선봉대 같은 역할을 했으므로 볼테르와 날을 세울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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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자리 없는 사회와 기본소득

금민 정치경제연구소 대안 소장

 

Ⅰ. 일자리의 미래와 기본소득

 

일자리 없는 사회

최근 기본소득 논의의 확산에는 두 가지 배경이 있다. 하나는 1980년대 이후의 소득불평등 심화이고, 다른 하나는 4차 산업혁명과 더불어 일자리의 희소화가 더욱 심각해질 것이라는 전망이다. 여기서는 주로 두 번째 문제에 초점을 맞춘다.

기술진보가 총고용을 감소시키지 않을 것이라는 낙관적 전망은 대다수 기존 일자리가 파괴되었지만 신규 일자리가 크게 늘어났던 1차 및 2차 산업혁명의 역사적 경험에 근거한다. 하지만 4차 산업혁명에서도 이와 같은 가정이 들어맞을지는 알 수 없다. 오히려 일자리 총량이 크게 줄 것이라는 연구가 주목을 끌고 있다. 미국 노동부 온라인 서비스의 직업 및 직능 데이터를 이용하여 직업별 컴퓨터화 가능성을 분석한 프레이와 오스본(Frey & Osborne, 2013)의 연구는 미국의 일자리 중에서 47%가 빠르면 향후 10년, 늦어도 20년 이내에 소멸할 수 있다고 예측한다.* 프레이와 오스본의 방법론에 따라 한국 직업들을 분석한 김석원(2016)에 따르면, 국내 고용의 63%가 고위험군에 속하여 미국의 47%보다 더 많은 고용이 컴퓨터로 대체될 위험에 놓여 있다. 한편 2016년 세계경제포럼은 주요 기업의 인사 담당자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한 결과를 발표했는데, 주요 15개국의 18억6천만을 고용하고 있는 371개 글로벌 기업의 응답을 수집한 결과 2015년에서 2020년 사이 일자리는 710만 개 감소하고 200만 개가 새로 창출되어 결과적으로 510만 개가 감소할 것이라고 예측했다(World Economic Forum, 2016). 가장 비관적인 예측은 2017년 12월 맥킨지 글로벌 연구소의 보고서다. 46개국 800개 직업, 2,000개 업무를 분석한 결과, 최대 8억 명, 중간 시나리오에 따른다고 해도 4억 명이 자동화로 실직할 것으로 예측했다(McKinsey Global Institute, 2017: 2).

물론 낙관적인 전망도 있다. 컨설팅 회사 딜로이트Deloitte는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센서스 데이터를 활용하여 1871년 이후 140년간 기술발전으로 파괴된 일자리보다 더 많은 일자리가 창출되었음을 보여 주었다(Allen, 2015).** 하지만 딜로이트의 연구에서 4차 산업혁명이 일자리를 감소시키지 않을 것이라는 결론을 끌어내기에는 두 가지 난점이 따른다. 첫째, 설령 장기적 관점에서 일자리 총량이 늘거나 줄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단기적으로는, 특히 기술진보의 초기에는 급격한 일자리 감소가 나타날 수도 있다는 점이다. 두 번째 난점은 과연 인공지능을 중심으로 하는 4차 산업혁명의 파급력에 대하여 지난 140년간의 경험을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다.

여기에서 굳이 낙관론이나 비관론의 근거를 자세히 검토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기본소득 논의와 관련하여 세 가지를 먼저 확인해 둘 필요가 있다.

첫째, 4차 산업혁명이라는 용어가 우리에게 익숙해지기 수십 년 전부터 이미 제조업의 ‘고용 없는 성장’, 즉 생산성과 고용의 탈동조화decoupling가 진행되었으며, 또한 이에 따른 서비스업 일자리의 증대는 고임금 제조업 일자리와 저임금 서비스업 일자리의 양극화를 낳았다. 일자리 양극화도 GDP 대비 노동소득분배율labor share의 하락에 일조했지만, 보다 중요한 요소는 지식자산 생산의 GDP 점유율이 꾸준히 상승했다는 점이다. 고용을 통해 임금으로 분해되지 않는 지식자산 생산의 점유율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노동소득분배율은 지속적으로 감소했다. 이러한 과정이 수십 년간 거듭된 결과, 고용과 소득 간의 탈동조화 현상은 이미 굳어진 현실이 되었다. 서구 산업자본주의 황금기인 1950년대와 60년대의 ‘괜찮은 일자리decent job’를 기준으로 삼는다면, 우리는 이미 오래 전부터 신자유주의 시대 속에서 ‘일자리 없는사회jobless society’를 살아왔다.

둘째, 일자리 희소화에서 기본소득 도입의 필요성을 찾을 수도 있겠지만, 이는 임금노동을 중심에 둔 생각일 수 있다. 이러한 생각은 연중에 기본소득을 실업에 대한 보상으로 간주한다. 하지만 여러 기회에 여러 차례 밝혔듯이, 기본소득은 모두의 것을 모두에게 평등하게 돌려주는 제도로서 공유부共有富의 배당이다. 기본소득이 이 시대에서 절박해진 이유는 실업만이 아니라 디지털 공유지의 확대와 디지털 자본의 GDP 점유율의 비약적인 상승, 이를 통해 극심해져 가는 소득불평등, 가족 돌봄 활동의 상품화 경향으로 인한 사회재생산 위기 등에서도 찾을 수 있다.

셋째, 노동력 절감 기술의 발전으로 인한 기술적 실업technical unemployment에 대한 관점은 기본소득 논의에서 매우 중요하다. 케인스는 1930년에 쓴 「손자 세대의 경제적 가능성」에서 기술혁신으로 실업이 증대하는 현상에 대해 그 이면에 놓여 있는 역사적 운동을 지적한다. 케인스는 기술적 실업은 역설적으로 인류가 경제 문제를 해결해나가고 있다는 증거이며, 이러한 과정을 거쳐 물질적 풍요의 시대가 개막될 것이며, 바야흐로 인간은 자신의 에너지를 비경제적 목적에 쓸 수 있게 되고, 희소성에 바탕을 둔 경제학의 역할이 축소되어 경제학자는 치과의사 정도로 대접받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Keynes, 1963). 자동화는 두 가지 상반된 결과를 낳는다. 하나는 희소성의 경제가 풍요의 경제로 대체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기술적 실업과 일자리의 희소화다. 자동화의 부정적 결과인 실업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도 자동화의 긍정적인 결과인 경제적 풍요를 어떻게 나눌 것인가의 문제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 자동화에 반대함으로써 일자리를 존속시키려는 러다이트Luddite 운동이나 생산성이 낮은 일자리를 억지로 만들려는 시도는 해답이 될 수 없다. 오히려 자동화와 풍요의 경제는 역설적으로 일자리와 소득의 연계에 대한 오래된 믿음에 대해 근본적으로 다시 검토해 볼 것을 촉구하며 사회적 부를 분배하는 방식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점을 보여 준다.

* 최근 프레이(Frey & Rahbari, 2016)는 컴퓨터화로 인한 일자리 대체가 2013년 연구에서 예상한 것보다는 좀 더 늦춰질 수 있지만 디지털 기술의 도입으로 인한 기술적 실업의 증가는 어쩔 수 없는 추세라고 말한다.
** 최근 『매일경제』와 딜로이트컨설팅은 4차 산업혁명으로 한국에서 2025년까지 최대 68만 개의 일자리가 늘어날 것이라고 예측했다(http://opinion.mk.co.kr/view.php?year=2017&no=287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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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자본주의와 무조건적 기본소득: 강력한 폭발력을 지닌 유토피아*

로날드 블라슈케 번역 조혜경

* 로날드 블라슈케Ronald Blaschke의 이 글의 원제는 “Utopie mit Sprengkraft. Das bedingungslose Grundeinkommen im digitalen Kapitalismus”이며, 출처는 Blätter für deutsche und internationale Politik, 11/ 2017, S. 104∼112다. 로날드 블라슈케는 기본소득독일네트워크의 공동 창립자이자 이사이며, 독일연방의회의 학술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필자의 동의를 얻어 정치경제연구소 대안의 조혜경 연구원이 발췌하여 번역했다.

최근 들어 무조건적 기본소득 논의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기본소득을 지지하는 세력은 사회운동 단체, 단일 의제 정당인 기본소득동맹Bündnis Grundeinkommen, 또는 좌파당과 녹색당의 일부만이 아니다. 이제는 기독민주연합 소속의 전 튀링엔 주지사 디이터 알트하우스Dieter Althaus, 독일텔레콤 대표이사 티모테우스 회트게스Timotheus Höttges도 기본소득을 지지하고 나섰다. 디지털 혁명으로 인해 일자리가 줄어들 것이라는 문제의식이 확산되면서 보수 진영에서도 기본소득 지지자들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기본소득 지지층이 다양한 이념적 성향을 보인다는 것은 하나의 기본소득 모델이 없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실제로 서로 다른 세계관과 정치적 배경을 가진 다양한 기본소득 구상이 존재하며 사회개혁의 방향과 목표도 상이하다. 그에 따라 지급 금액, 재원 조달 방법, 조세제도 개혁, 기존 노동 및 사회 시스템과의 관계등 기본소득의 구체적 방안에서도 입장들이 다양하게 갈라진다.

독일에서 최초의 기본소득 논쟁은 1980년대 초 실업자운동의 생계급여Existenzgeld 요구에서 시작되었으며 그 뒤를 이어 등장한 것이 ‘녹색대안Grün-Alternative’이다. 임금노동, 과잉 소비, 산업사회, 환경 파괴, 임금노동 중심주의에 빠진 비민주적이고 관료주의적인 사회복지국가에 대한 비판이 녹색대안으로 이어진 것이었다. 21세기에 들어 독일 기본소득운동의 기반은 지속적으로 확대되고 있다. 슈뢰더 총리의 “아젠다 2010”과 “하르츠 IV” 법제화에 대한 대응으로 2004년에 기본소득네트워크가 결성되었으며, 이 네트워크에는 독일연방청소년연맹, 가톨릭 계통의 독일노동자운동, 독일가톨릭청년연맹, 자연친화청소년, 노동자복지협회 산하 연방청소년협회와 같은 대규모 대중조직들이 참여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페미니즘, 포스트가부장사회, 탈성장주의 진영, 반세계화 운동, 글로벌 사회권 운동, 공유재 및 연대경제 논쟁에서도 기본소득 지지가 확산되고 있으며 노동조합 진영에서도 우호적인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그런데 기본소득 구상이 사회변혁의 동력으로 작용할 것인지는 기본소득의 구체적 방안과 제반 사회 여건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크게 두 가지 입장, 신자유주의적 기본소득 모델과 해방적 기본소득 모델로 구분된다. 신자유주의 모델은 무조건적 기본소득을 노동시장 유연화 확대, 조세제도 및 복지 이전소득 제도의 극단적 단순화를 실현하는 수단으로 본다. 그에 반해 해방적 모델의 기본소득은 근대사회를 지배하는 자본주의 논리의 극복을 지향한다.

신자유주의적 기본소득 vs. 해방적 기본소득

신자유주의적 기본소득 구상의 전형은 밀턴 프리드먼Milton Friedman, 해방적 기본소득 구상의 전형은 에리히 프롬Erich Fromm에서 찾을 수 있다. 프리드먼과 프롬 모두 1960년대 미국에서 기본소득 구상을 제시했다.

신자유주의적 또는 시장자유주의적 기본소득 구상은 임금노동에 대한 경제적 강제는 그대로 유지하고 노동소득을 보완한다는 의미에서 부분기본소득을 주장한다. 독일에서는 토마스 슈트라우브하르Thomas Straubhaar와 디터 알트하우스가 대표적인 지지자에 속한다. 이들은 임금노동의 유인을 강화하는 효과를 특별히 강조한다. 또한 해고 제한, 산별 효력 확장 제도, 최저임금제도 등 노동자를 위한 각종 노동 시장 규제를 폐기할 것과 복지 행정 비용의 축소, 더 나아가 기존의 사회보험, 기타 사회보장 급여나 지원 제도를 폐지할 것을 요구한다. 다시 말해 사회보장 비용을 줄이고 저임금 부문을 육성하는 것이 이들의 목표인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신자유주의적 기본소득 구상은 고소득층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조세제도 개혁을 요구하고 노동시간 단축 또는 젠더 임금 평등을 위한 노동정책을 부정한다.

그에 반해 해방적 기본소득 지지자들은 – 독일에서는 좌파당 주도의 기본소득연구회, 실업자운동, 아탁 활동그룹 “모두에게 충분하게”가 여기에 해당한다 – 모든 사람이 시장시스템 및 관료주의적 국가의 족쇄에서 해방되어 자유롭게 자신의 능력을 펼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와 동시에 모든 사회구성원이 경제 및 기타 사회적 영역의 민주적 의사 결정 과정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한다. 여기서기본소득은 위로부터 아래로의 소득재분배를 이루어내고 기본 생계를 보장하며 사회참여를 가능하게 할 것이다.

이러한 해방적 기본소득 구상은 사회변혁을 추구하는 정치적 지향을 내포하고 있다. 경제, 금융, 정치, 교육, 문화, 사회보장제도, 공공인프라 및 공공서비스 등 모든 사회 영역을 민주적으로 개조하여 모든 사회구성원에서 그에 대한 접근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보험은 보편적인 시민보험으로 개편되어야 하고 상호 협력에 기초한연대경제와 자조 활동을 촉진하며 생산, 소비, 생활방식을 생태적으로 지속 가능한 방향으로 조직해야 한다고 한다. 이를 위해서는 단체협약과 법률에 의거한 노동시간 단축, 최저임금 도입, 공공인프라 및 공공서비스의 확대가 필요하다. 기본소득은 유럽 전역, 더 나아가 글로벌 차원에서 도입되어야 하고 글로벌 사회권과 인권으로서 간주되어야 한다고 한다. 또한 해방적 기본소득은 젠더 정책의 문제도 직시하고 동일 노동 동일 임금의 실현, 전형적인 여성 직업의 가치 격상, 임금노동, 가사노동, 돌봄 노동의 젠더 평등적 재분배, 교육, 임금노동, 시민적 참여의 동등한 접근권 보장을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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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세계금융위기를 불러올 수 있는 위험 요인들

유승경 정치경제연구소 대안 부소장

I. 들어가는 말

2018년은 글로벌금융위기가 발생한 지 10년이 되는 해다. 지난 위기 이후 세계경제의 회복 속도는 다른 때에 비해 유난히 더뎠기 때문에, 세계경제가 장기 침체에 빠져들었다는 진단까지 나왔다. 그렇지만 주식, 채권, 부동산 등 금융시장과 자산시장은 전후 어느 때보다도 좋은 실적을 올렸다. 실물경제의 성장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는 자산 가격의 급등을 ‘경제거품economic bubbles’이라고 한다. 현재의 세계경제에는 경제거품이 가득하고 이는 또 다른 금융위기를 예고하고 있다.

2008년 금융위기의 진앙이자 세계경제의 약 24%(경상GDP 기준)를 차지하는 미국 경제를 보자. 미국의 실업률은 지난 위기 이후 한때 10.0%에 달했지만 2017년 10월 4.1%까지 내려왔다. 이를 근거로 미국경제가 완전히 회복되었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2017년 성장률은 2.2%로, 1980년 이후 평균성장률인 2.6%보다 낮다. 2010년 이후 미국의 경제성장률이 2.6%를 상회한 것은 2015년이 유일하다. 사정이 이렇기 때문에 낮은 실업률에도 불구하고 실질임금은 정체되어 있다. 미국 중산층의 가계소비가 늘고 있다지만, 소득 증가가 아니라 부채와 저축의 감소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장기적인 성장의 기반이 되지는 못한다.

그러나 주식, 채권, 자산 등의 시장의 동향을 보면, 현재 세계경제가 최고의 호황을 누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예를 들어, 다우존스 산업평균지수의 경우, 2008년 금융위기 이전의 정점은 약 14,000이었다. 그 후 7,000수준으로 폭락했다가 8년이 지난 현재에는 24,500을 넘어섰다. 금융위기 직전의 정점과 비교했을 때 75% 이상 상승한 것이다. 미국의 주택시장도 마찬가지다. 미국의 주택 가격은 2008년 위기로 거품인 것이 판명된 가격수준을 넘어선 지 오래다. 심지어 암호화폐인 비트코인과 미술품 가격의 동향을 보여 주는 그래프는 에펠탑 모양을 하고 있다. 실질임금이 정체된 상황에서의 금융시장과 자산시장의 활황은 금융회사, 직업적 투자자, 상위 1%의 부자들에게 엄청난 자본이득을 가져다주어 소득불평등을 더욱 악화시켰다.

역사적 경험이 말해 주는 분명한 사실은 거품은 좋지 않은 결과를 남기면서 사라진다는 것이다. 이하에서는 2018년 세계경제에 형성되어 있는 경제거품의 붕괴를 촉발할 수 있는 세계경제의 위험 요인을 점검해 본다.

 

II. 새로운 금융위기의 촉발 요인

1. 중앙은행의 금리 인상과 양적 완화 해소

미국의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RB는 2017년에 이어서 2018년에도 기준금리를 계속 인상할 것이라는 신호를 보내고 있다. 그와 함께 양적 완화를 통해 그동안 쌓아둔 금융자산을 매각한다는 방침을 발표했다. 유럽중앙은행도 양적 완화의 축소tapering를 시작했으며, 영국 중앙은행은 10년 만에 처음으로 금리를 인상할 수도 있다.

주요국 중앙은행이 기준금리를 인상하고 자산을 매각하겠다는 것은 시중에 풀린 돈을 흡수하겠다는 이야기다. 이런 정책이 전제하고 있는 것은 지난 금융위기를 야기한 제반 문제가 해소되어 경제가 정상화되었으며 금리 인상과 자산 매각이 실물경제나 금융시장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진단이다.

그러나 경제의 구조적 측면과 금융시장의 동향을 고려하면 통화긴축을 실시하는 것이 용이하지 않아 보이고, 만약 통화 긴축을 실행에 옮긴다면 금융시장과 자산시장을 급격히 위축시킴과 동시에 수면에 가라앉아 있던 구조적 문제를 다시 부각시킬 가능성이 높다.

지난 위기 동안, 주요국 정부는 공적 자금을 투입하여 부실 금융기관을 구제했고, 중앙은행은 기준금리를 제로 수준으로 낮추고 시장의 부실채권을 떠안는 방식으로 자본주의체제를 구제했다. 즉 중앙은행은 제로 금리를 유지하는 가운데 채무자가 상환할 수 없는 부실채권을 현금을 주고 떠안았다. 이런 방식으로 시중으로 풀린 돈이 미국의 경우 10조달러에 이르고, 유럽, 일본, 영국까지 합치면 20조달러에 달한다.

이러한 조치는 금융기관과 기업의 연쇄적인 파산을 막고 투자의 불씨를 되살리는 역할을 했지만, 이와 동시에 금융시장과 자산시장에서 전례 없는 가격 상승을 초래했다.

중앙은행들은 공개적으로는 시장 붕괴와 시스템 위기의 가능성을 낮게 평가하지만, 예외적인 통화 완화가 금융 불안을 심화시키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FRB를 비롯한 주요국 중앙은행은 금리를 점진적이나마 인상하려는 이유를 명목적으로는 인플레이션에 대한 우려에서 찾고 있다. 하지만 현재의 인플레이션율은 실제로 그리 높지 않고 2% 내에서 안정되어 있다. 사실 중앙은행들이 점진적이나마 통화긴축을 단행하려는 것은 금융시장의 지나친 과열 때문이다.

통화 긴축이 현재의 경제거품을 붕괴시키게 되는 경로로는 여러가지를 상정할 수 있다. 우선 통화 긴축으로 신용 경색을 불러오고 이로 인해 취약한 금융시장의 한 부분을 타격할 수 있다. 지난번 위기는 미국 주택 가격의 급락으로 비우량 주택 대출subprime mortgage 시장에서 대규모 파산이 일어나면서 시작되었다. 그 이후 금융규제가 강화되었기 때문에, 다시 미국의 주택 가격이 하락하더라도 지난번과 같은 대규모 파산은 일어나지 않을 것 같다.

그런데 위기는 언제나 이전의 위기와는 다른 방식으로 도둑처럼 찾아온다. 미국 연방정부의 학자금 대출이 위기 촉발의 방아쇠가 될 수도 있고, 자동차 할부 시장이 위기의 출발점이 될 수도 있다. 이 부문에서는 고위험 소비자들에게 대출이 계속 이뤄져 왔기 때문이다.

또한 미국의 경우에는 통화 긴축이 달러의 평가절상과 함께 개도국의 통화가치를 떨어뜨린다는 사실로 인해 위기를 촉발시킬 수도 있다. 달러의 평가절상은 미국 다국적기업의 해외 수익을 잠식하며 미국 제품의 수출 경쟁력을 떨어뜨려서 미국의 경상수지를 악화시키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법인세 인하를 통해서 기업의 경쟁력을 보완하려고 하지만, 감세는 재정 적자를 심화시키는 또 다른 문제를 일으킨다.

제로 금리와 양적 완화는 대공황 이후 최대 경제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취했던 역사상 전례 없는 실험이었다. 마찬가지로 금융시장이 과열된 상태에서 금리를 높이고 양적 완화를 해소하는 것도 분명 미지의 세계로의 여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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