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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드러운 악에 맞서는 정의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 재판을 보면서 악의 진화를 알아차리고 악의 평범성 혹은 평범한 악에 대해 논구했다. 평범한 악은 추악하거나 기괴한 모습으로 그려지는 종교적 악과 달리 범속하고 일상적이다. 아렌트는 평범한 악에 맞서 개별적 감수성인 양심을 내세운다. 아렌트 이후 악의 평범성 혹은 평범한 악은 어느덧 상식이 되었다. 우리와 한참 떨어져 있는 거대한 악만큼이나 일상 속에 악이 스며들어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일이다.

이런 상식에 맞서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철학자 김진영은 “부드러운 악”이라는 개념으로 악의 평범성을 대체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오늘날 악은 “선과 악의 경계를 알고 있지만 그에 대한 생각을 포기하거나 도덕적 양심을 외면하는 그런 의지적인 악이 아니다.” 오늘날 악은 “선악의 경계가 지워진 악, 양심 자체가 이익을 따라서 선과 악의 경계를 자유로이 넘나드는 부드러운 악이다.”

김진영은 부드러운 악이라는 개념을 내세운 게 악의 평범성이 시효 만료되어 새로운 인식이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선과 악의 경계가 지워진 악을 어떻게 확인하고 어떻게 여기에 대처할 수 있는가? 선과 악이라는 구도는 불가피하게 경계를 요구한다. 그렇다면 결국 경계를 짓는 일이 필요한데, 부드러운 악이라면 그만큼 경계 짓기가 어렵고 가능하다 하더라도 경계가 유동적일 가능성이 크다.

부드러운 악이라는 개념과 마주하면서 당장 세 가지 정도가 떠오른다. 권력의 절대적 부패 가능성이라는 고전적 테제가 첫 번째이고, 영구 혁명이라는 맑스주의적 테제가 두 번째이며, “단단한 모든 것은 연기처럼 사라진다”라는 근대성 테제가 세 번째다. 물론 이 테제들은 조금씩 수정해야 한다. 권력은 좁은 의미의 정치권력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 사이에서 작동하는 힘의 관계를 말한다. 맑스주의 전통 속에서의 영구 혁명은 정치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공산주의사회를 종착점으로 한다. 모든 것이 연기처럼 사라진다면 인간관계로서의 사회는 불가능하며, 아무리 미끄러진다 하더라도 잠정적인 고정점이 필요하다.

다시 부드러운 악이라는 사태에 맞서기 위해 경계를 짓는 일로 돌아가면 지속적인 경계警戒 이외에 다른 방법이 있을까? 물론 경계는 고발을 수반한다. 마키아벨리는 갈등과 대립의 사사화私事化를 방지하기 위한 공적 질서의 확립을 강조하는 맥락에서 고발의 중요성을 말한 바 있다. 하지만 대립과 갈등을 공개적인 공적 권위를 통해 해결할 수 없을 때 고발은 격심한 사회적 불안정의 요소가 될 것이다. 결국 문제는 공공성publicness을 어떻게 구성할 수 있는가다. 공적인 것을 가리키는 라틴어 publicus는 ‘성숙한’이라는 뜻의 pubes의 영향을 받아 사람 혹은 인민을 가리키는 populus가 변해서 생긴 말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공공성은 인민의 성숙을 조건으로 하며 또 이를 목표로 한다.

그렇다면 인민의 성숙은 어디서 오며, 어떻게 가능한가? 이에 대한 근대적인 대답은 도야Bildung겠지만, 고대적인 대답은 정의의 실현일 것이다. 정의가 자리 잡을 때만 공적 권위가 유지될 것이고, 이럴 때에만 개인적인 도야가 의미가 있을 것이다.

고대적인 의미에서 정의가 실현된다는 것은 각자가 자기 몫을 가지는 것이다. 이를 근대로 넘기면 소유와 분배의 문제가 될 것이다. 노동에 대한 정당한 보상 그리고 공유에 대한 접근권과 공유부에 대한 몫의 권리 등 분배의 정의를 실현하는 것만이 아니라 자산에 대한 공적 통제가 필요하다.

이는 부드러운 악에 맞서기 위한 기반일 뿐이다. 하지만 이 기반이 사람들에게 자율적 시간 혹은 주권적 시간을 부여한다면 부드러운 악에 맞서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주체적 조건을 마련하는 일이 될 것이다. 이는 소크라테스에 기대 한나 아렌트가 말하는 도덕적 감수성을 날카롭게 하는 일이 될 것이다.

 

편집위원회를 대신하여
안효상

 

이 글은 『시대』 2018년 12월호 통권64호에 실린 ‘책 머리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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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가 아닌 권리로서의 기본소득, 어떻게 해야 시행 할 수 있을까?

김태호 발행인

기본소득. 일과 삶의 새로운 패러다임
가이 스탠딩 지음, 안효상 옮김 | 2018년 7월 | 창비

1.

처음으로 번역된 가이 스탠딩의 글을 접한 한국 독자들은 당황했을 것이다. 적어도 이 글을 쓰는 사람은 그랬다. 「CIG, COAG, COG:논쟁에 대한 비평」(『분배의 재구성. 기본소득과 사회적 지분 급여』,나눔의 집, 2010년). 한국에서 기본소득에 대한 논의가 막 시작되던 시점에 그 글은 제목부터 너무 전문적이어서 쉽게 읽을 수 없다는 느낌을 주었다.

그 책은 2006년에 나온 “Redesigning Distribution. Basic Income and Stakeholder Grants as Cornerstones for an Egalitarian Capitalism”을 번역한 것이다.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사회적 불평등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분배를 재구성할 방법으로 기본소득이 더 나은지 사회적 지분 급여가 더 나은지를 놓고 벌인 토론에서 발표된 글들을 모은 책이다.

가이 스탠딩 글 제목에 나오는 “CIG”란 Citizenship Income Grant, 즉 “시민소득급여”의 약자다. 기본소득이라 봐도 좋다. “COAG”란 Coming-of-Age-Grant(“미래 세대를 위한 수당”)의 약자이며, “사회적 지분 급여 혹은 자산급여 구상”을 말한다. 21세가 되는 국민에게 일정한 액수의 현금을 지급해 삶을 준비할 수 있게 하자는 기획이다. 이 둘이 논쟁의 두 축이다. 여기에 더해 스탠딩이 주장하는 “COG”란 Community Capital Grant, 즉 “공동체 자산급여”를 말한다.

가이 스탠딩은 CIG와 COAG를 비교할 때는 CIG를 지지하지만, 더 나아가 COG, 즉 “공동체 자산급여”를 새로운 대안으로 주장한다. COG의 예로는 초기의 스웨덴 임금노동자 기금이 있고, 이제 『시대』 독자들에게는 익숙한 알래스카영구기금이 있다. “COG는 진정한 민주주의의 확장, 즉 경제적 민주주의의 확장이며 실질적인 자산 분배일것이다.”(276쪽)

2.

가이 스탠딩은 1948년 영국에서 태어나 1977년에 캠브리지대학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5년부터 2006년까지는 국제노동기구ILO에서 활동했고, 특히 후기에는 사회경제보장프로그램Socio-Economic Security Programme을 마련하는 작업의 책임자였다. 그의 글에 이 프로그램에 대한 설명이 자주 나오는 이유다.

오스트레일리아의 모나쉬대학Monash University에서 노동경제학 교수 지위도 얻었지만, 2006년부터는 영국의 배스대학University of Bath에서 강의를 했고, 2013년에 런던대학University of London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때 인도에서 이루어진 기본소득 실험에 관여해 많은 연구 성과를 냈다. 2015년 영국 노동당 대표 선거에서 제레미 코빈Jeremy Corbyn이 당선되는 데 일조하기도 했다.

가장 중요한 약력은 BIEN과 관련된 것이다. 1986년 기본소득유럽네트워크Basic Income European Network 창립에 참여했고 공동의장이 되었다. ‘좋다’는 뜻의 프랑스어 ‘bien’을 단체 이름의 약자로 하자고 한 사람이라고 한다(최광은, 『모두에게 기본소득을』, 2011년, 박종철출판사, 190쪽).

그런 가이 스탠딩이 기본소득과 관련된 논의를 정리한 책을 냈고, 그 책이 얼마 전 한국에서 번역됐다. 한국어판 뒤표지에 적혀 있는 “가이 스탠딩이 말하는 기본소득의 모든 것”이라는 문구가 과장이 아니라 할 만한 책이다. 하지만 그의 다른 책을 먼저 다루는 것이 필요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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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콜라철학과 고딕건축

임영근 정치경제연구소 ‘대안’ 상임연구원

서양의 미술 작품을 깊이 있게 읽어 내는 작업은 아주 어려운 일이다. 작품을 읽는 일이 왜 그렇게 어려운지 미술사학자 에르빈 파노프스키Erwin Panofsky(1892~1968)의 설명을 들어 보면 어느 정도 추측이 가능하다. 파노프스키는 『도상해석학 연구』에서 미술 작품을 어떻게 분석할 것인지를 다루면서 다음과 같은 경우를 생각해 보자고 한다.

미술 작품을 어떻게 분석하는가

길을 걸어가는데 건너편에서 아는 사람이 모자를 벗으며 인사를 한다. 순전히 시각 작용의 관점에서만 보면 우리는 한 “집합체의 세부요소들”이 이렇게 저렇게 바뀌는 모습을 본다. 색과 형태를 지닌 한 집합체의 변화를 바라보는 것이다. 이 집합체를 자연스럽게 “하나의 사물”(내가 아는 사람)로 확인하고 세부 요소의 변화를 “사건”(모자를 벗는 행위)으로 받아들이면 이제 “형식적인 인식 행위”를 넘어서 의미의 영역으로 들어서게 된다. 이처럼 어떤 행위자가 특정한 행동을 할 경우 우리는 곧장 그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다. 이것을 파노프스키는 “사실 의미”라고 부른다.

이렇게 확인된 물체와 사건들은 내 마음에 특정한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그의 표정이나 몸짓을 보고 나에 대한 그의 감정 상태가 살가운지 머쓱해하는지 따위를 곧장 알아차릴 수 있다. 일종의 감정이입 상태가 되면서 심리적 반응을 일으키며 또 하나의 의미를 전달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감정을 일으키는 또 하나의 의미를 전달하므로 이것을 “표현 의미”라고 부른다. 아는 사람이 모자를 들어 올리는 사실을 즉각 알아차림과 동시에 심리적 반응이 일어나므로 사실 의미와 표현 의미를 한 범주로 취급하여 “일차적 의미” 또는 “자연적 의미”라 하자고 파노프스키는 말한다.

그런데 모자를 벗는 일을 인사 행위로 알아차리게 된다면 이제 전혀 다른 해석의 영역으로 들어가게 된다고 파노프스키는 말한다. 사실 모자를 벗는 인사법은 우리에게 익숙한 것은 아니다. 서양 고유의 인사법이기 때문이다. “무장한 병사들이 헬멧을 벗어 평화적 태도를 보이며 상대방에 대한 신뢰를 표현하던 중세 기사들”의 습성에서 비롯된 관습이다. 그러므로 다른 문화권에 속한 사람은 이런 행위가 “공손함을 뜻하는 기호”임을 알지 못한다. 어떤 행동에 담긴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려면 특정 문화의 고유한 관습과 문화 전통을 알아야만 한다. 그래야 이런 이차적 또는 관습적 의미를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일차적(자연적) 의미는 감각으로 느끼는 것이지만 이차적(관습적) 의미는 지적으로 인식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파노프스키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나의 친지가 한 행동은 이렇듯 시간과 공간 속에서 자연스러운 사건을 구성하고, 분위기와 느낌을 자연스럽게 표출하며, 관례에 따른 인사의 뜻을 전달하고 있다.
(파노프스키, 『도상해석학 연구』, 24쪽)

그런데 여기에 더해 그 행동은 그의 ‘인격’을 드러내주기도 한다고 파노프스키는 덧붙인다. 그가 어느 나라 사람이고 사회적 교육적 배경은 무엇이며 사회적 경력과 현재의 상황이 어떠한지가 그의 인격을 결정하는 요소가 될 것이며 아울러 “사물을 관조하고 주위 세계에 반응하는 방식”에서 다른 사람과 구별이 될 것이다. 흔히 우리가 세계관이나 철학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물론 모자를 벗어 인사하는 단순한 행위를 통해 이 모든 것을 파악할 수는 없다. 단지 그런 징후가 드러날 뿐이라고 파노프스키는 말한다.

단순히 이 행동 하나를 근거로 해서는 그 사람의 내면적 초상화를 그려 내기 어려울 것이다. 이와 유사한 수많은 관찰 결과를 서로 조합하고, 그가 살았던 시대, 국적, 사회계급, 지적 전통 등에 관해 우리가 알고 있는 정보와 연관시켜 해석해야만 그의 정신세계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정신적 초상화에서 명료히 드러나게 될 질적 요소들은 각각의 개별 행동에도 암암리에 내재해있다. 그래서 거꾸로 모든 개별 행동에서 그러한 질적 요소들을 해석해 낼 수 있는 것이다.
(같은 책, 25쪽)

미술 작품을 해석하는 일은 이를테면 내면의 초상화를 그려 내는 작업이 된다. 그 사람을 형성해 온 배경과 역사 를 샅샅이 살펴야 하는 한편, 개별 행동에 스며 있는 질적 요소들을 해석해 내기도 해야 한다.이런 식으로 발견되는 의미를 파노프스키는 “본래 의미”라고 말한다. 앞에서 말한 일차적 의미와 이차적 의미가 현상에 해당한다면, 본래 의미는 본질에 해당한다. 파노프스키에 따르면, 시각이 전달하는 의미 아래 숨겨져 있는 본래 의미를 찾는 작업이 미술 작품을 해석하는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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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 투쟁에 내몰리고 있는 문재인 정부의 경제정책과 노동정책*

임운택 계명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1. 문재인 정부의 경제 및 고용정책의 민낯

문재인 정부가 외환위기 이후 구조화된 극단적 노동유연화에 기초한 신자유주의적 경제 패러다임을 타파하기 위해 내세운 ‘소득 주도 성장론’이 심하게 흔들리고 있다.

첫째, 국제수지 흑자 행진이 지속되고 심지어 지난 5월 기준 경상수지 흑자가 86억8천만달러로 2017년 이후 가장 높게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한국은행 2018년 7월 5일 발표), 민생에 깊숙이 영향을 주는 고용 지표는 거꾸로 가고 있다. 20∼30대 경제활동인구의 감소에 따라 동일 연령대의 취업자 인구가 줄어드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라고해도 40∼50대 중장년층의 제조업, 서비스업 취업자 수의 감소는 통계청장을 교체할 만큼 요란법석을 떨어도 별반 개선을 기대하기 어려운구조적 특성을 보인다.

둘째, 2년 연속 두 자릿수 최저임금 인상이 경기와 고용 악화의 주범으로 내몰리고 있다. 소득 주도 성장은 프레카리아트화(불안정화)된 노동시장에서 불안정노동자들의 소득 및 사회안전망 개선을 통해 소득분배율을 높이고 이를 통해 유효수요를 창출하여 경제성장을 견인하는 데 주요 목적이 있다. 그러나 소위 소득 주도 성장 정책에 따라 노동소득률(국민소득에서 노동소득이 차지하는 비율)조차 별로 개선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평상시 재벌과 대기업의 하청업자 노릇을 하던 정치인과 신자유주의자들은 소득 주도 성장론이 마치 경제 침체의 핵심 원인을 제공한 주범이라도 된 듯 이 정책의 철학에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면서, 오랫동안 시장에서의 적자생존 상황을 방치해 놓고 정치적으로만 이용해 왔던 중소기업과 자영업자의 수호자 노릇을 하는 우스꽝스러운 상황마저 발생하고 있다. 《뉴스타파》에 보도된 삼성 장학생 명단으로 곡학아세의 전형적 인물이 된 어느 학자에게도 시장의 ‘을’을 대변하는 반전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으니, 소득 주도 성장론의 정치적 효과는 대단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이러한 상황은 문재인 정부 스스로 불러온 바가 크다. 최저임금 인상폭 때문에 아우성을 치는 중소기업과 자영업자에 대한 정치적 불안감 때문에 올 초 최저임금 산입 범위를 확대시키면서 소득/임금 주도 성장에 대한 회의론에 불을 지폈고, 그렇다고 이를 보완할 만한 여타 산업정책은 분명하게 제시하지 못한 채 창조경제와도 별 차별성을 보이지도 않는 ‘혁신 성장’의 허울 아래 고용정책의 미래도 가늠할 수 없는 4차산업혁명 논의만 무성하니 정부의 경제정책과 고용정책에 대한 신뢰가 생길 리 만무하다.

2008년 ‘대침체Great Recession’ 이후 금융시장 주도적 신자유주의 경제 패러다임으로 만신창이 된 자본주의가 1960년대 이후 장기 침체에 들어선 자본주의의 수요 측면을 만회하기 위해 기술 주도적 산업구조조정(소위 ‘4차산업혁명’패러다임을 표방한 새로운 슘페터주의)이나 노동생산성 증대(최저임금을 비롯한 노동소득률 재조정), 혹은 생태친화적 발전 패러다임 등 전 세계적으로 다양한 자본주의 전환의 시도가 이루어지는 마당에, 소위 ‘촛불혁명’의 유산으로 탄생했다는 문재인 정부는 노동 친화적 경제 패러다임은커녕 여전히 신자유주의의 망령에 사로잡혀 있는 형국이다. 아래에서는 간략하게 그 원인과 대안을 탐색해 보고자 한다.

 

* 이 글에서는 ‘노동이 존중받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문재인 정부의 기본 가치를 검증할 수 있는 노사 관계법이 아직 논의도 되지 않는 점을 고려하여 노동정책에 관해서는 판단을 유보하고 경제정책과 고용정책(일자리정책)에 논의를 집중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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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용 부진의 진상과 원인

유승경 정치경제연구소‘대안’부소장

1. 머리말

최근 고용 부진을 둘러싸고 문재인 정부와 보수 진영이 크게 충돌하고 있다. 보수 진영은 문 정부가 추진한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이 ‘고용 참사’를 낳았다며 정부의 정책 기조인 ‘소득 주도 성장’을 전면 철회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 정부는 고용 부진은 최저임금 인상이 아니라 인구구조 변화와 제조업 경기 악화에 따른 것이라며 정책 기조를 바꿀 이유가 없다고 맞서고 있다.

실제로 고용 사정이 안 좋다 보니 정부 내에서도 이견이 나오고 있다. 처음부터 청와대 주도의 소득 주도 성장에 적극적이지 않았던 관료 출신의 김동연 경제부총리는 보수적 여론의 지원을 배경으로 최저임금 인상을 유보할 수 있다는 의견을 표명하며 현 정부의 정책 기조에 수정을 가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문재인 정부는 소득 주도 성장과 함께 ‘혁신 성장’을 내세우고 있다. 현 정부는 여러 측면에서 보수 진영과 다양한 진보 진영의 요구를 절충하는 방식으로 정국을 운영하고 있다. 사실 소득 주도 성장은 서민 경제를 지원하는 것을 주 내용으로 하지만, 혁신 성장은 “과도한 서민 위주 정책”에 대한 재계와 보수층의 반발을 달래기 위한 정책이다. 정부는 최저임금 인상, 노동시간 단축 등을 추진하는 한편으로 친재벌 행보를 통해서 보수층의 반발을 무마하는 방식으로 경제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그런데 보수 진영은 고용 사정의 악화를 빌미로 현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최소한의 친서민 정책까지 포기할 것을 압박하고 있다. 사실 정부가 말하는 소득 주도 성장은 내용이 모호하며 최저임금 인상, 노동시간 단축 외에는 구체적인 정책 내용을 마련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소득 주도 성장이 문재인 정부의 지향성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에 보수 진영은 고용 부진을 이유로 현 정부의 정국 주도권에 상처를 내기 위해서 집요하게 공격을 가하고 있다.

그러면 보수 진영이 주장하듯이 최저임금의 인상이 현재의 고용부진에 가장 큰 원인을 제공했을까? 사실 사태의 진상을 제대로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정부나 보수 진영 모두 자신에게 유리한 통계만을 집중적으로 부각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현재의 고용 사정을 최대한 객관적인 자료에 근거해서 검토해 보고, 고용 지표의 부진을 낳은 원인이 무엇인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악화되는 고용 지표

보수 진영이 고용 참사의 대표적인 지표로 내세우는 것이 월별 취업자 수 증가 폭의 급격한 둔화다. 통계청이 정기적으로 발표하는 고용 통계(e-나라지표)에 따르면, 지난 2017년까지만 해도 취업자가 전년도 같은 달에 비해서 매달 최소 30만 명 이상 증가했는데, 2018년 2월 들어서부터 그 수치가 10만 명대로 떨어지더니 7월에는 5,000명 수준으로 급락했고 8월에는 3,000명으로까지 하락했다. 이것이 보수 언론이 말하는 ‘고용 참사’의 대표적인 지표다.

보수 진영이 이 지표를 유난히 강조하는 이유는 이 지표가 사태를 실체보다 더욱 심각하게 인식하는 착각을 가져올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월별 취업자 증가 수는 앞 달과 비교한 것이 아니라 전년도의 같은달과 비교한 수치를 말한다. 따라서 2017년에 매달 취업자가 평균 30만 명 이상 증가했다는 말은 2017년을 합쳐서 360만 명 이상이 늘어났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2017년 특정 달의 취업자 수를 2016년 같은 달의 취업자 수와 비교했을 때, 취업자 수가 어떻게 변했는가를 보여 주는 것이다. 그래서 12월을 기준으로 한다면, 2017년 취업자수는 2016년에 비해서 25만 7천 명이 늘어났다.

물론 이런 점을 고려하더라도, 취업자 수의 증가가 둔화된 것은 분명하다. 2018년 1월의 경우 2017년 1월에 비해 취업자가 33만4천 명이나 많았는데, 2018년 8월의 경우 2017년 8월에 비해 불과 3,000명 많은 데 그쳤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보수 진영은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과 같은 정부 정책 원인 이외에 고용 지표의 악화를 설명할 길이 없다”라고 주장한다(「일자리 정부의 일자리 붕괴」, 『중앙일보』 2018년 9월 13일). 보수 언론은 최저임금뿐만 아니라 노동시간 단축까지 고용 부진의 원인으로 돌린다(「KDI, 정부와 다른 ‘고용참사’ 결론」, 『조선일보』 2018년 9월 13일). 논리적으로나 실제적으로나 노동시간 단축이 고용을 감소시켰다는 주장은 납득하기 어렵지만, 보수 진영은 고용 부진을 빌미로 문정부가 추진한 정책 전반을 문제 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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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국민에게 ‘기본소득을 받을 권리’를 ― 온국민기 본소득운동본부 활동을 돌아보며

용혜인 기본소득정치연대 공동대표

‘기본소득을 받을 권리’를 위해 모이다

2017년 5월 18일, 광주민주화항쟁이 벌어진 지 37주년이 되는 날이었죠. 그리고 국정 농단에 분노해 타오르기 시작한 촛불로 박근혜 대통령을 끌어내리고 대통령 선거를 통해 문재인 후보가 19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지 9일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이날 제37주년 5·18민주화 운동 기념식에 참석한 문재인 대통령은 “5·18 정신을 헌법 전문에 담아 개헌”을 추진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부터 이슈가 되어 왔던 개헌이 대통령의 입에서 처음으로 나왔던 순간이었습니다.

기본소득을 의제로 한 대중운동의 필요성을 고민하고 있던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의 몇몇 청년 회원들은 30년 만에 개헌이 실제로 추진된다면 사회적 논의가 널리 진행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한국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을 합의하는 개헌 과정에서 ‘기본소득을 받을 권리’가 우리에게 있음을 적극적으로 이야기하기로 마음을 모았습니다. 구체적인 모델에 대한 견해 차이로 인해 기본소득을 지지하면서도 함께 힘을 모으지 못했던 지난 시기들을 되돌아보며, 우리에게 ‘기본소득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에 동의하는 모든 이들을 모아 내는 것을 목표로 기본소득 개헌운동을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한달 뒤인 6월 17일,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운영위원회에서 기본소득 개헌을 위한 ‘온국민기본소득운동본부’ 추진이 결정되었습니다.

그런데 약 일주일 뒤인 6월 26일, 국가인권위원회에서 기본소득이 포함된 개헌안을 공개했습니다. 온국민기본소득운동본부의 워킹 그룹을 형성했던 청년들은 신이 났습니다. 아직 많은 국민이 기본소득을 알고 있다고 말하긴 어렵겠지만 그래도 국가인권위 개헌안을 보면서 최근 기본소득 논의 확대에 힘입어 ‘기본소득을 받을 권리’가 이번 개헌 과정에서 완전히 뜬금없는 이야기는 아니겠구나, 하는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에 기본소득 개헌운동을 제안한 청년 회원은 다섯 명이었지만, 어느새 워킹 그룹에는 열 명이 넘는 사람이 모였습니다. ‘기본소득 기본권’에 동의하는 전국의 시민들을 너르게 모으기 위해 전국을 돌며 기본소득을 지지하는 시민들을 직접 만나 기본소득 개헌운동에 대해 설명하고, 온국민기본소득운동본부의 발기인으로 개헌운동에 함께 힘을 모아 주시기를 제안하기로 했습니다.

온국민기본소득운동본부는 전국을 돌며‘ 기본소득 개헌’을 설명했다.

그렇게 해서 7월 17일, 대전, 청주, 전주, 부산, 대구, 인천, 수원, 광주, 목포의 시민들을 만나기 위한 1차 전국 투어를 떠났습니다. 이후 계속해서 여러 지역에서 기본소득 개헌운동에 대한 설명을 듣기 위해 온국민기본소득운동본부를 불러주셨고 천안, 고양, 창원, 울산, 제주,서울까지 포함하여 총 15개 지역에서 기본소득 개헌운동 설명회가 열렸습니다.

생각보다 많은 지역에서 온국민기본소득운동본부를 불러 주셨고, 생각보다 많은 시민이 설명회 자리에 직접 찾아오셨습니다. 기본소득 개헌운동을 제안한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의 회원들, 기본소득을 당론으로 채택한 노동당, 녹색당, 우리미래의 지역 당원들, 그리고 기존에 연결 고리를 갖고 있지 않았던 새로운 분들을 기본소득에 동의한다는 한 가지 공통점을 통해서 만나는 일은 정말 설레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만난 사람들이 온국민기본소득운동본부의 발기인으로 함께하겠다고 힘을 모으는 장면을 보는 것은 정말 가슴 뜨거워지는 일이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 전국에서, 그리고 온/오프라인에서 총 543명의 시민이 온국민기본소득운동본부의 발기인으로 함께해 주셨습니다.

기본소득 개헌을 지지하는 개인들을 모아내는 것과 함께, 각 단체와 세력이 지지하는 구체적 기본소득 모델을 넘어 기본소득을 지지하는 단체들의 힘을 모으고 기본소득운동 세력의 영역을 확장하기 위한 시도도 있었습니다. ‘기본소득을 받을 권리’라는 간단한 명제에 동의하는 단체들을 모아 내기 위해 시민사회단체들에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비록 많은 단체가 모이지는 않았지만, 제안 단체였던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를 포함해 개혁연대민생행동, 문화연대, 소박한 자유인, 알바노조, 정치경제연구소 대안, 청년좌파(현 청년정치공동체 너머), 청년초록네트워크, 평등노동자회까지 아홉 개의 단체가 힘을 모았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온국민기본소득운동본부의 참가 단체로 함께하지는 않았지만 각 지역에서는 앞에서 이야기했듯 노동당, 녹색당, 우리미래까지 세 개 진보정당의 당원들이 모여 힘을 합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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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오의 어둠

우리가 처한 상황을 아서 쾨슬러의 소설 제목 『정오의 어둠』에서 따오는 것은 변주이긴 하지만 그리 이상하지는 않다. 1920년대와 30년대에는 유토피아적 이념의 고양과 환멸이 교차했다면, 촛불혁명의 밝음은 우리 삶의 구석구석에 박혀 있는 어둠과 대조된다. 한편으로 우리는 추상적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구체적인 인격에 투사했지만, 일상의 삶은 추상적인 패러다임이 여전히 지배하고 있다. 이는 사립 유치원 원장들이 가장 노골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데, 바로 재산권의 신성함이다. 물론 더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곳은 부동산이다. 공동체 내의 다른 사람들의 삶을 상관하지 않고 더 나아가 짓밟는 사태가 재산권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설령 많이 양보한다 하더라도 자기 노동에 기초하지 않는 재산권이 지배하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이런 사태의 배후에 신자유주의가 있다고 간단하게 말해 버렸을 것이다. ‘자유’라는 이름 아래 그 무엇보다 경제적 자유를 우선시하는 신자유주의가 기소당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할 것이다. 하지만 한국에서 교육을 사유화/사영화하고, 토지와 주택을 절대적 소유로 바라보는 태도를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로 환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도리어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그렇게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집단적 심성을 파악하는 일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시인 김수영은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좋다”라고 노래했지만, 우리에게 그런 것이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식민지, 분단, 전쟁을 거치면서 이 땅에는 그 어떤 도덕적 준거점도 남지 않고 오직 개인과 ‘가족’만 남은 것으로 보인다. 사실 개인주의가 가장 강한 나라가 미국이라 할 수 있는데, 미국의 경우 개인주의가 하나의 이념인 반면 우리의 경우에는 강요된 삶의 태도라는 점이 차이다.

사실 우리에게 이념적 지표가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근대화/산업화, 민주화, 통일 등이 그런 역할을 했을 것이다. 이보다 하위 범주로 진보, 복지, 인권 등도 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 어느것도 이 정치체의 ‘좌표’로 기능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그저 돈과 땅에 대한 사랑만이 넘쳐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이기에 절차적, 추상적 민주주의만이 유일하게 남아 있는 준거점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땅에서 진보를 추구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헌법 애국주의’에 기대고 싶은 유혹이 들 것이다. 하지만 헌법이 사회적 관계를 규제하는 틀이라 해도 이 틀은 다시 사회적 관계에 의해 구성된 것이라 할 때, 헌법에 대한 호소는 제한적일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무엇에 기초하여 사회적 관계를 바꾸려 해야하는가? 그것은 공동성을 새롭게 구성하는 노력에서 나올 것이다.

어떤 정치체의 공동성을 새롭게 구성하는 것은 그 물질적 기초의 공동성을 확인하는 일이 될 것이다. 이것은 토지와 자연자원, 사회적 생산 등에 대해 모두가 몫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일이다. 이는 거의 신성시되고 있는 재산권의 범위를 재규정하는 작업을 필요로 한다.

현재의 정치적 지형을 볼 때 이는 새로운 ‘좌파’의 출현을 요청한다. 이 좌파는 낡은 체제의 위기에서 자양분을 가져오는 게 아니라 이제 출현하고 있는 미래에서 정당성과 에너지를 얻어야 한다. 새롭게 출현하고 있는 디지털 경제에 대한 지적 인식, 공동성의 실천을위한 도덕적 헌신, 실질적 민주주의를 위한 정치적 도전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좌파이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2천 년 전에 어느 랍비의 말을 떠올려야 하지 않을까?

“내가 아니라면 누가, 지금이 아니라면 언제, 이 일을 하겠는가?”

 

편집위원회를 대신하여
안효상

 

이 글은 『시대』 2018년 11월호 통권63호에 실린 ‘책 머리에’이다.

최저임금 1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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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저임금으로 국민주권을 지키려는 맥도날드 라이더

최저임금 1만원

최저임금 1만원.
알바들의 유쾌한 반란 개정판
박정훈 지음| 2018년 7월 | 240쪽 | 박종철출판사

김태호 발행인

1.

2012년 대통령 선거에 한 여성 청소 노동자가 후보로 등록했다. 민주노총 울산지역연대노조 울산과학대 지부장 김순자. 선거운동본부 ‘순캠’은 비정규직노동자를 후보로 내세운 선본답게 “최저임금 1만원”, “온 국민 안식년 제도”, “기본소득” 등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얻은 표만 보자면 커다란 의미를 남겼다고 할 수 없겠지만, ‘순캠’에 모였던 젊은이들의 이후 운동은 한국에서 최저임금을 둘러싼 논의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2013년 1월 1일 ‘비정규불안정노동자와 함께하는 알바연대’(‘알바연대’)의 “출범을 알리는 기자회견에는 단 한 명의 기자도 없었”다(182쪽).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알바연대는 새벽에 편의점이나 PC방을 돌며 알바를 만나 실태를 조사했고, 세상에 왜 최저임금이 시간당 1만원은 되어야 하는지를 알렸다. 그리고 2013년 8월 5일 아르바이트노동조합(‘알바노조’)이 설립됐다.

2014년 3월에 나온 박정훈의 『알바들의 유쾌한 반란』은 알바연대의 활동을 알리고 ‘최저임금 1만원’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책이었다. 기획자로 되어 있는 “권문석”은 알바연대 대변인으로 활동하며 ‘최저임금 1만원’ 운동에 앞장서다 2013년 여름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 사람이다.

『최저임금 1만원』은 2014년에 나온 그 책의 개정판이다. “낡은 통계자료들을 최근 통계자료로” 바꾸었으며, 문재인 정부 들어 “최저임금이 예전보다 많이 오르면서 등장한 새로운 논쟁 지점”을 추가했다(11쪽).

2.

지금도 그런 용어가 쓰이는지 모르겠으나, 1980년대 운동권에는 ‘시각 교정용 도서’라는 것이 있었다. 주입되어 지니고 있던 생각을 뒤흔들 만한 책을 가리키는 것이다. 주로 한국의 근현대사에서 감추어져 있던 사건을 파헤치거나 처참한 사회 현실에 대한 고발을 담은 책이었다. 결국 더 많이 알고 더 많이 행동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만드는 책을 그렇게 불렀다.

초판 『알바들의 유쾌한 반란』이 그랬듯이 개정판 『최저임금 1만원』도 경어체로 되어 있다. 차근차근 이야기하며 독자에게 손을 내미는 듯한 분위기다. 말하자면 이 책은 “최저임금 1만원 운동”을 중심으로 하는 이 시대의 ‘시각 교정용 도서’로 기획된 듯하다.

3.

제1장(“알바생 vs. 알바노동자”)은 “최저임금 1만원”이라는 주제와 관련된 본격적인 논의에 들어가기에 앞서, 한국 사회에서 “알바”란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를 묻고 있다. “망한 인생의 상징일까? 자유의 상징일까?”

저자는 “알바노동 자체에 이중적인 성격이 존재하기도”(31쪽) 한다고 본다. 수입과 고용이 안정된 일자리를 얻지 못한 처지이지만, 출퇴근 시간에 얽매이는 정규직보다 자유롭다는 것이다. 원하는 시간만큼만 일하고 나머지 시간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으니까. 가이 스탠딩이 프레카리아트를 두고 “희생자로서의 정체성과 영웅으로서의 정체성이라는 이중 정체성”(『프레카리아트. 새로운 위험한 계급』, 박종철출판사, 12쪽)이라 한 것과 유사하다 하겠다.

아울러 저자는 “알바생”이라는 표현에 담긴 편견을 폭로하고 “알바노동자”로 부를 것을 제안한다. “알바노동”이 “학생이 부업으로 하는 일쯤으로 전락”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34쪽). 실제로 현재 알바노동자는 학생 연령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알바생”이라 여기면서 여러 갑질이 벌어진다. 권문석의 삶을 다룬 얼마 전에 나온 책 제목이『‘알바생’ 아니고 ‘알바노동자’입니다』다.

이런 식으로 “이데올로기”가 어떤 효과를 낳는지를 필자는 다른 예로도 보여 준다. “청소 노동자는 한 시간 7,359원, 이건희는 하루 3억원이 당연하다?”, “노동조합은 빨갱이가 하는 짓?”, “일은 군필자가잘한다?” 필자는 이런 것들을 “이데올로기가 주는 가상”이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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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소득은 어떻게 노동자 소유 기업을 활성화시킬 수 있는가? ― 경제민주주의를 향한 투 트랙 전략*

이건민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운영위원, 정치경제연구소 ‘대안’ 상임연구원

1. 서론: 경제민주주의 차원에서의 기본소득과 노동자 소유 기업

오늘날 자유, 평등, 시민권, 민주주의 등의 추상적인 가치들을 급진적이고도 해방적인 방향으로 확장하고자 고민하는 그 누구라도 기본소득이라는 아이디어와 만나게 되고 이와 고투하게 된다. 기본소득을 지지하고 옹호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기본소득이 다음과 같이 자리매김되는 것은 너무도 자명한 일이다. 기본소득은 자유의 측면에서는 형식적 자유에서 실질적 자유로(Van Parijs, 1995; Van Parijs and Vanderborght, 2017), 가장 확장된 자유의 개념인 공화주의적 자유로(Raventós, 2007; Casassas, 2016; Casassas and De Wispelaere, 2016;Standing, 2017) 나아가기 위한 필수 요소다. 평등의 면에서는 현재의 극심한 사회경제적, 젠더 차원의 불평등을 좀 더 평등한 방향으로 변화시키기 위한 필요조건이다(Fraser, 1994; Zelleke, 2008, 2011; 이건민, 2017). 시민권과 민주주의의 차원에서는 인구학적 상황, 경제적 상황, 종사상의 지위와 계급 등에 상관없이 모두에게 지급되는 정당하고도 바람직한 사회배당이자, 공민권과 정치권, 절차적 민주주의를 넘어서 사회경제적 권리와 경제민주주의로 나아가기 위한 필수 구성 요소다.

그런데 우리 시대에서 경제민주주의를 심화, 발전시키기 위한 주요한 방안으로는 기본소득뿐만 아니라 노동자 소유 기업(노동자 소유 협동조합을 포함하여)도 함께 떠오른다. 본고에서는 경제민주주의를 다음과 같은 사중의 능력으로 정식화한 카사사스(David Casassas, 2016:1)의 정의를 따를 것이다. “(ⅰ) 일하기 위해 ‘진입’하기를 바라는 사회적 관계들을 정할 능력. (ⅱ) 우리가 머무르고 일하기로 한 공간의 (비)물질적 성격을 결정할 능력. 그것은 실질적으로 들리는 ‘목소리 (발언권)’를 갖는 능력을 필요로 한다. (ⅲ) 이 공간의 성격과 기능이 우리의 삶에서 바라는 바에 반하는 경우 이 공간에서의 ‘탈출’을 선택할 능력. (ⅳ) 떠나기로 선택한 경우에, 그 다음의 기회들을 위한 이전 직장의 외부에서 제공되는 수단들에 의지할 수 있는 능력. 즉 지금과는 다른 조건과 상태에서 (재)생산적 삶을 효과적으로 ‘다시 시작할’ 능력.” 이러한 경제민주주의의 추구라는 점에서 보자면, 기본소득과 노동자 소유 기업은 조금은 다른 점들을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기본소득이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생산과 노동, 작업장의 영역을 넘어서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들에서 광범한 의미에서의 경제민주주의의 만발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되는 반면, 노동자 소유 기업은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생산과 노동, 작업장 영역에서의 민주주의, 즉 기업민주주의나 산업민주주의의 심화, 발전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되어 왔다.

경제민주주의 측면에서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노동자 소유 기업은 기본소득과 관련하여 거의 연구되어 오지 않았다. 이는 일자리의 양과 질 모두 문제시된다고 전망되자 일자리 보장과 참여소득이 기본소득의 대안이 될 수 있는지, 무엇이 더 우월한지, 대체 관계에 있는지 보완 관계에 있는지 등이 활발히 연구되어 온 것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하지만 비록 지금까지 거의 논의되어 오지 않긴 했지만 경제민주주의 혹은 산업민주주의 면에서 일자리 보장이나 참여소득보다 훨씬 대담한 제안은 바로 노동자 소유 기업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이 기본소득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 살펴보는 것은 비판적, 해방적 사회과학과 사회정책을 추구하는 데 핵심적이다.

이 글에서는 기본소득의 도입과 노동자 소유 기업의 발흥이 경제민주주의의 핵심을 이룬다는 관점 하에서, 기본소득이 노동자 소유 기업의 활성화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경로와 기제를 탐구할 것이다.

이 글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우선 노동자 소유 기업이 자본주의적 기업에 대해 지니는 비교우위와 비교열위를 검토한다. 다음으로 기본소득의 도입이 노동자 소유 기업의 활성화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경로와 기제를 탐구한다. 이 글의 마지막에서는, 경제민주주의를 향한 투 트랙 전략으로서 기본소득의 도입과 노동자 소유 기업의 활성화가 우리 시대의 주요한 해방적 대안이 될 수 있음을 강조하면서 글을 맺는다.

 

* 이 글은 제18차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 대회(2018년 8월 24~26일, 핀란드 탐페레대학교) 세션 B4에서 필자가 발표한 “How Can Basic Income Activate and Encourage Labor-Managed Firms?: A Two-Track Strategy for Economic Democracy”를 번역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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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의 죽음과 노회찬의 죽음

박기순 충북대 철학과 교수

1. 자살이란 무엇인가?

지난 7월 23일 정의당 국회의원이었던 노회찬 의원이 세상을 떠났다. 자살이었다.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사실이 드러나면서 자신의 “어리석은 선택”에 책임을 지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한국진보운동과 함께해 왔던 그의 삶을 알기에 많은 사람이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충격을 받았고 슬퍼했다. 그리고 또 많은 사람은 ‘꼭 그래야만 했는지’를 물으며 아쉬워하고 안타까워했다.

사실 일반적으로 스스로 삶을 마감하는 ‘자살’이라는 행위는 쉽게 이해될 수 없는 종류의 것이다. 왜냐하면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흔한 경우는 아니지만 때로는 목숨을 걸고 어떤 일을 하는 경우도 물론 있지만, 이 경우에도 죽음이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다. 두려운 것이기 때문에 ‘무릅써야’ 하는 결단이 필요한 것이 아니겠는가? 따라서 두려움의 대상인 죽음을 자발적으로 선택한다는 것은 쉽게 이해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이다. 사실 우리는 살기를 원한다. 어쩌면 이것은 모든 살아 있는 생명체의 가장 원초적이고 기본적이며 보편적인 욕구일 것이다. 이렇게 보면, 자살은 살아 있는 존재에게는 자기모순적 행위다. 즉 그것은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행위인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인간은, 존재들 가운데 가장 뛰어나다고 간주되는 인간은 살고자 하는 자연적 욕구를 거스르는 행위를 하는가?

현상적으로 자살의 형태를 띠고 있는 행위들이 엄밀히 말해 모두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외견상으로는 자살이지만 실제로는 타살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요즈음 뉴스를 매일같이 장식하는 이러저러한 자살 소식들은 더 이상 놀라운 일이 아니다. 우울해서, 살길이 막막해서, ‘왕따’를 당해서 사람들은 자살을 선택한다. 그러나 이 선택은 강제된 선택이다. 살기를 원했지만 최소한의 살아갈 의지마저도 앗아간 이러저러한 환경과 원인 때문에 더 삶을 계속할 의지를 상실한 것이기에, 최종 행위자는 자기 자신이지만 그 행위의 진정한 원인은 외부에 있다. 이러한 이유로 철학자 스피노자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자살은 우연히 칼을 든 손이 외부의 힘에 의해 자신의 심장을 찌르는 행위라고 정의한 바 있다.

이 정의에 따르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자살’로 부르지 않는 행위도 앞에서 말했던 자살적 행위와 같은 것이 된다.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 그것도 잘 살기 위해서는 부와 쾌락과 명예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들을 맹목적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추구한다. 그러는 사이 우리 삶은 황폐해지고, 돌보고 사랑해야 할 많은 것을 잃는다. 이 경우, 우리가 살기 위해서 하는 많은 것은 실제로는 우리의 삶을 파괴하게 된다. 스스로의 행위를 통해서 부지불식간에 자신을 죽이는 것이지만, 실제로 여기에서도 죽음의 실제적인 원인은 내가 아니라 외부 원인에 있다. 예를 들어 보자. 즐거운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즐거운 것들을 추구할 것이다. 그러나 나를 즐겁게 하는 모든 것이 나를, 나의 삶을 아름답고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많은 경우 그것들은 반대로 나의 삶을 불행에 빠뜨리거나 파괴한다. 그런데 이렇게 내가 나의 삶을 파괴하게 되는 것은 내가 행복(잘 사는 것, 잘 존재하는 것)을 쾌락적인 삶으로 혼동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혼동은 외부의 어떤 것(나에게 쾌락을 주는 것)이 나에게 미친 영향(쾌락)에 굴복하여 그것을 올바르게(나에게 진정으로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판단하지 못한 것에서 온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잘못 살아가는 것’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자살’이라고 부르는 것과 하등 다를 바가 없다. 즉 그것은 자살의 형태를 띠고 있는 타살인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의미의 자살은 없는가? 이것이 우리가 생각해 볼 문제다. 고 노회찬 의원의 자살은 분명 앞에서 언급한 ‘자살의 형태를 띤 타살’과는 조금 달라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경우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 경우를 성찰할 수 있게 해 주는 사례 하나가 철학사에 있다. 다름 아닌 소크라테스의 죽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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