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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소득의 역사적 운명

지난 5월 19일, 독일 메르켈 총리는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과 온라인으로 합동 기자회견을 열어, 5천억 유로의 유럽 공동 구제기금을 조성하는 데 합의한다고 발표했다. 지난 십 년 동안 우리가 보던 유럽의 모습, 즉 이른바 북유럽과 남유럽의 긴장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누구나 알 수 있듯이, 코로나바이러스 위기가 유럽의 단결과 공동 대응을 가져온 것이다. 이렇게 된 배경은 그 자리에서 메르켈 총리가 한 다음과 같은 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비상한 상황은 비상한 조치를 요구합니다.”

코로나바이러스 위기라는 비상한 상황에서 나온 비상한 조치 가운데 하나는 모든 사람에 대한 긴급한 현금 지원이다. 홍콩에서 시작해서 미국, 한국, 일본 등이 이런 조치를 취했거나 취하고 있다. 물론 이렇게 된 하나의 이유는 어려운 상황에 맞서 사람들을 지원해 줄 수 있는 적절한 제도가 이런 나라들에는 취약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주목할 점은 상황에 맞추어 긴급하게 행동했다는 것이다. 어떤 정책도 진공상태에서 논의되거나 실시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감안할 때, 상황에 맞는 적절한 판단과 행동이 정책 실시의 주요한 경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전 세계적으로 기본소득 지지자가 “비상사태 기본소득Emergency Basic Income”을 주장했지만, 현 상황에서 기본소득 논의가 가장 활발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재난 기본소득이라는 이름의 긴급 지원이 실시된 곳은 한국이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앞서 말했듯이 소득보장 제도가 취약하다는 것에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재난 상황은 소득보장에 대한 열망을 자극했고, 이는 기초연금과 아동수당 실시의 경험과 겹쳐져서 보편적인 권리 주장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이런 열망을 기본소득이라는 기표로 고정하는 일은 또 다른 문제다. 이는 기본소득 연구자, 운동가, 정책가 등의 업무였다. 기본소득당에서 시작해서 LAB2050, 시대전환,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그리고 여러 개인이 이 일을 담당했다. 이들은 코로나바이러스 위기는 무차별하며 무엇보다 긴급한 대처가 요구되기 때문에 보편성, 무조건성, 개별성을 원칙으로 하는 기본소득 방식의 지원이 가장 적합할 뿐만 아니라 효율적이라고 말했다.

재난 기본소득이라는 이름으로 고정되게 만들고 이후 한국의 복지체제가 기본소득을 포함해야만 한다는 방향으로 논의가 가게 만든 것은 정치가들의 몫이었다. 경남의 김경수 지사는 그가 가지고 있는 정치적 상징성으로 인해, 경기의 이재명 지사는 수행 능력으로 인해, 재난 기본소득을 중심적인 의제로 만들어냈다. 그리고 총선이 지난 지금 기본소득을 말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지형이 바뀌었다.

 

이렇게 몇 년 전만 해도 진기한 아이디어에 불과했던 기본소득이 아젠다 테이블의 중심으로 진입하자 이에 대한 노골적 반대도 당연히 따라 나오고 있다. 이 반대는 이른바 ‘복지국가 진영’에서 나오고 있는데, 이런 점에서 3년 전에 있었던 작은 논쟁의 반복이기도 하다. 대통령 탄핵 이후에 벌어진 2017년 대선에서 거의 모든 야당 후보가 기본소득이라는 정책을 내건 적이 있었다. 문제는 한 후보를 제외하곤 기본소득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게 적절하지 않은 정책을 그런 이름으로 포장했다는 것이다. 아동이나 노령층에 주는 현금 수당에다 기본소득이라는 이름을 쓴 것이다. 물론 기본소득을 단번에 실시할 경우에 드는 재정 부담과 복지 선진국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현금 수당을 감안할 때, 그런 식의 정책을 내건 것이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혼란을 가져온 것도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기본소득에 대한 이른바 ‘복지국가 진영’의 공격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기본소득이 아닌 것에 기본소득이라는 이름을 붙여 혹세무민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기본소득을 제대로 실시하려면 막대한 재정이 소요된다는 것, 그리고 이럴 경우 다른 사회서비스를 제대로 확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 깔려 있는 기본 전제는 기존의 복지국가 모델이 여전히 적실성이 있다는 것, 하지만 한국에서 재정을 확대하는 게 쉽지는 않다는 것이다.

3년의 세월이 흐르고 코로나바이러스 위기를 겪고 있는 지금도, 이른바 복지국가 진영의 공격은 같은 무기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이상이 복지국가소사이어티 공동대표는 「재난 기본소득, 정명(正名)이 아닌 이유」라는 글에서 “기본소득제도 주창자들이 이런 엉터리 용어를 만들고 유포”했다고 말하면서 크게 우려를 표시한다. 그러면서 기본소득제도를 구성하는 다섯 가지 핵심 내용이라고 생각하는 보편성, 무조건성, 개별성, 정기성, 충분성을 든다. 이에 따르면 모든 도민에게 지급한 경기도 재난 기본소득조차 정기성과 충분성의 원칙에 위배되기 때문에 기본소득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상이 공동대표가 재난 기본소득을 기본소득이 아니라고 말하는 이유는 제대로 된 기본소득을 하자고 주장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회서비스 중심의 보편적 복지국가”가 여전히 적실성이 있다고 주장하기 위해서다. 그가 보기에 보편적 복지국가의 핵심 내용은 “보편적 복지가 경제 및 일자리와 유기적으로 연계, 통합돼”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주장할 수 있는 것은 복지국가의 기둥인 사회보험이 “근로를 통해 소득이 있는 모든 사람들이 강제로 가입”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가 또 다른 핵심으로 보는 사회서비스가 “인적 자본과 사회적 자본을 육성하고, 모든 국민에게 기회의 평등을 보장하는 제도적 장치”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사회서비스는 “사람의 능력을 키울 기회를 모두에게 공평하게 제공한다는 측면에서 일자리에 대한 접근 형평성을 높여” 준다는 것이다.

그가 보편적 복지국가와 기본소득을 이렇게 대비하면서 목소리를 높이는 이유는 “사회서비스 중심의 보편적 복지국가가 가지는 본질적 장점이 여전히 크고, 어떤 선진 복지국가들도 기본소득제도의 도입을 고려하지 않고” 있으며, “당장 역동적 복지국가를 건설해야 할 중대한 과제를 안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현금 포퓰리즘 논란을 불러올 개연성이 큰 기본소득 이슈가 복지의 외피”를 쓴 채 번져 나가는 것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이상이 공동대표가 보편적 복지국가를 사회서비스를 중심으로 설명하는 데 반해, 연세대 양재진 교수는 「기본소득과 복지국가의 원리는 상충한다」라는 글에서 현대 복지국가는 “거대한 공적 보험 시스템”이라고 하면서, 재원 부담의 보편성과 복지 급여의 필요성을 부각시켜 설명하고자 한다. 다시 말해 “사회적 위험에 빠진 사람이나 사회적으로 인정되는 욕구가 있는 시민에게 급여가 제공”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의 분노를 유발한 자동차보험의 비유가 나온다. 누구나 자동차보험에 가입하고 보험료를 내지만 자동차 사고가 난 소수의 사람에게, 또 사고의 정도에 따라 보상금을 달리 주는 것과 원리상 동일하다는 것이다.

그도 세상의 변화를 알기에 플랫폼 노동자나 사각지대의 문제를 언급한다. 하지만 소수 취약계층을 기존의 사회보장제도로 포괄하려는 노력을 펼치는 게 더 맞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고용보험법」은 사업장 관리에서 인별 관리로 전환하여 가입률을 높이고, 그래도 발생하는 사각지대의 노동자는 일반 재정으로 운영하는 실업 부조 제도를 통해 보호하면 된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기본소득은, 그가 보기에 막대한 재정이 든다. 그리고 그가 보기에 이런 막대한 돈을 기본소득에 쓰게 되면 분명 공공사업과 서비스, 사회보장 사업이 축소되거나 사라질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본소득 아이디어와 정책은 어떻게 해서든 막아야 할 어떤 것이다.

 

공산주의 이후 “잠정적 유토피아” 혹은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한 가장 나은 사회라는 평가를 받는 북유럽 복지국가를 준거점이자 목표로 삼는 이른바 복지국가 진영과 모든 사람에게 경제적 보장을 제공하는 것을 통해 좀 더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를 실현하자는 기본소득 진영 사이에 이렇게 커다란 경멸의 폭포수가 흐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들 수 있는 것은 역사적 감각과 이러한 역사적 감각을 낳는 현실 인식의 차이다. 이른바 복지국가 진영도 복지국가가 역사적 체제라는 것을 인정하긴 한다. “노동계급의 성장과 함께 만들어진 정치적 산물”이라는 말이 그렇고, “기존의 보편적 복지국가 모델도 역사 속으로 사라”질 수 있다는 표현도 그렇다. 하지만 앞서도 인용했듯이 여전히 복지국가 모델이 유용하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이는 기본소득에 대한 찬반 논의와 함께 많이 거론되고 있는 기술 변화 및 일자리의 미래에 대한 전망과도 닿아 있다. 이들은 과거의 예를 들어 기술 변화로 새로운 일자리가 생길 수 있다고 말하며, 그보다 더 중요하게는 교육과 재훈련을 통해 사람들이 새로운 일자리를 찾거나 거기에 적응할 수 있도록 하는 게 복지국가의 임무라고 말한다.

이른바 복지국가 진영의 이러한 ‘확신’에 비하면 기본소득 진영은 사회체제가 어떻게 변화해야 하고 그 속에서 기본소득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관한 청사진이 아직 없다고 말하는 것이 솔직할 것이다. 이제 구성해야 할 과제이니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잠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기본소득이 모든 개인에게 경제적 보장을 제공함으로써 역량을 발휘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럴 경우 기존의 모든 불평등한 관계를 바꿀 수 있는 잠재력이 생길 것이다. 다른 한 가지는 기본소득이 경제적, 사회적 활동을 사태 합리성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조직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시장, 사회적 경제, 공적 부문이 각기 자기 역할을 하면서도 균형을 이루는 전체 체제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복지국가 진영과 기본소득 진영을 나누는 더 큰 차이는 서로 다른 정의관에 있는 것 같다. 양재진은 자신의 책 『복지의 원리』에서 복지국가에 합리성이 있으며 그 바탕에는 존 롤스의 정의의 원칙이 반영되어 있다고 말한다. 이때 말하는 정의는 “이기적인 개인들이 자발적인 계약을 통해 만들어낸 정의”다. 이런 개인들은 “무지의 베일”에 가린 채 어떤 합의에 도달하는데, 롤스는 이를 두 가지 원칙에 기초한 사회 운영 원리일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는 자유의 원칙인데, 이를 통해 개인의 선택과 자유로운 발전이 보장된다. 다른 하나는 차등의 원칙으로, 사회적 부가 불운한 최소 수혜자에게 최대한 도움이 되도록 차등적으로 분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자리는 롤스의 정의관에 대해 논평하는 자리가 아니므로 다음과 같은 것을 지적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롤스가 말하는 정의의 원칙은 구성의 원리가 아니라 현실의 사회, 즉 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지배적인 사회를 설명하거나 변호하는 논리라는 점이다.

이에 반해 기본소득 진영에서 말하는 정의는 “각자에게 각자의 몫을” 주는 것이다. 이는 주어지거나 함께 만든 자연적, 사회적 부에 대해 모든 개인에게 일정 비율로 동등한 몫이 있다는 것이며, 따라서 개별적으로 분배되는 것이 정의롭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는 현재의 사적 소유에 대해 공산주의와는 다른 방식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공산주의가 공유를 분할할 수 없는 것이라 보았다면, 기본소득의 소유관에서는 개인적 소유와 공유가 있으며 공유의 일정 부분은 개별적으로 분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정의관이 등장한 것은 “이중 혁명” 시기였다. 이때는 폭력적, 법률적 인클로저 속에서 사적 소유권이 확립되는 한편,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더욱 확대되어 가던 시기였다. 이는 관습적, 공동체적 권리 속에서, 그리고 도덕 경제 속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에게서 생존의 권리를 박탈하는 것이자, 새로운 원리인 노동/소유에서 살아가도록 강제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 이후의 역사는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노동/소유에 대한 세 가지 이데올로기, 즉 자유주의, 사회민주주의, 공산주의의 경합의 역사였고, 최종적으로 지난 세기말에 자유주의의 승리로 끝났다(이른바 “역사의 종말”). 이처럼 한편에서는 역사의 종말이 선언되었지만 자본주의의 인클로저는 지속되고 있었다. 전통적인 공유인 토지에서 시작해서 물, 천연자원, 종자를 지나 디지털혁명 속에서 등장한 공동의 지적 생산물까지 전방위적이었다. 누구는 이를 두고 “제2의 인클로저”라고까지 불렀다.

기본소득 아이디어는 이런 장기적이면서도 국면적인 맥락 속에서 다시 부상했다. 이런 점에서 보면 기본소득 아이디어가 분명 기존 복지국가의 역사적 한계나 체제적 한계를 드러내긴 하지만, 그 아이디어는 거기에 머물지는 않는다. 기본소득 아이디어는 이보다 훨씬 오래된 문제인 공유/사적 소유/(재)공유라는 역사적 주기 속에 자리를 잡고 있다. 이 속에서 기본소득 아이디어는 추상적 개인이라는 분리된 존재론을 넘어서서 관계의 존재론에 기반하고 있다. 그리고 이 관계의 존재론을 인간 사이의 관계를 넘어서서 존재하는 모든 것의 관계론으로 확장하는 것은 우리의 숙제다.

 

편집위원회를 대신하여
안효상

 

이 글은 『시대』 2020년 06월호 통권79호에 실린 ‘책 머리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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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정치하는 청소년이 온다

최유경 청소년 페미니스트 네트워크‘ 위티’ 공동대표

2019년 12월 27일, 만 18세에게도 선거권이 생긴 것을 축하하는 활동가들.

선거 연령 하향 이전, 청소년으로 산다는 것

2019년 12월 27일, 드디어 만 18세로 선거 연령을 하향하는 것을 포함하는 공직선거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이를 통해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된 전국의 만 18세들은 약 14만 명으로 추산되니, 이 법안 통과가 대한민국의 14만 명의 국민에게 주권을 돌려준 셈이다.

선거 연령 하향이라는 결과는 함께 활동했던 동료들의 단체 소통방으로 확인했다. 어느 동료는 눈물이 났다고 말했고, 어느 동료는 믿을 수 없다고 말했다. 나는 끝없는 기자회견도, 끊임없이 벽을 대고 말하는 듯한 기분도 끝이구나 생각했다. 그리고 이제껏 내가 청소년이라는 이유로 ‘시민’일 수 없었던 시간들을 떠올렸다.

선거철이 다가올 때마다, 길거리에서 부지런히 공보물을 나눠 주던 분들은 ‘청소년처럼 보이는’ 내가 지나가면 꼭 하던 일을 거두며 딴청을 피웠다. 온 뉴스며 방송이며 선거로 난리 법석인 국가에서 나는 어쩐지 이방인이 된 기분이었다. 쩌렁쩌렁한 스피커와 함께 오가는 선거 차 역시 소음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어느 인터뷰에서 비유했듯, 전 세계를 시끌벅적하게 만드는 올림픽 시즌에 꼭 나만 상관없는 사람이 된 기분이랄까. 그뿐인가. 할 수 있는 것보다 할 수 없는 것이 더 많은 청소년이라는 정체성을 선거철에는 더욱 두드러지게 느껴야 했다. 청소년이라는 이유만으로, 지지하는 후보를 밝힐 수도 없었고 정당에 입당할 수도 없었다. 이처럼 선거철이면 꼭 찾아왔던 불쾌감과 부끄러움 같은 것들을 여전히 기억한다.

나는 청소년 페미니스트 네트워크 ‘위티’와 촛불청소년인권법제정연대의 활동가로서, 또 이번 선거 연령 하향으로 투표권을 가지게 된 만 18세로서 청소년 참정권 운동에 동참했다. 물론 활동을 하지 않을 때에도 내가 청소년이기에 겪어야 했던 경험들은 ‘말하기’를 다시 시작할 힘이 되고는 했다.

말하는 일은 동시에 배우는 일이기도 했다. 사실 나는 운동을 시작한 기점인 작년 9월 이전엔 청소년 참정권은 물론이고 정치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시사는 또래 친구들보다도 몰랐고, 청소년 참정권은 남의 일처럼 느껴졌다. 아무것도 모르고, 또 알 수 없으니 그러려니 하는 수밖에 없었다. 참정권을 박탈당했다는 건 권리를 박탈당한 것만이 아니라 그 권리에 대해 알 권리조차 박탈당한다는 뜻이었다.

이건 나뿐만이 아닌 대한민국의 많은 청소년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의 청소년이 모두 이번 선거 연령 하향에 찬성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공식적인 자리에 나와서까지 반대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리고 역시 하향을 반대하는 일부 여론은 그 당사자들의 반대를 주요한 근거로 삼기도 했다. 그들조차 그들에게 확신이 없는데, 어떻게 그들에게 이렇게 중요한 권리를 줄 수 있냐고! 하지만 선거 가능 연령이 되는 순간부터 딱 잘라 자신에게 투표를 할 능력이 있다며 확신을 가지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그 누가 청소년들에게 참정권이 얼마나 중요하고 당연한 권리인지 알려주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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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당의 청년기초자산제 공약에 대한 비판적 평가

이건민 기본소득신진연구자네트워크

1. 열며

올 1월 초 정의당은 청년기초자산제를 4·15 총선의 1호 공약으로 내놓았다. 청년기초자산제는 만 20세가 되는 청년 모두에게 3천만 원을 일시금으로 지급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만 20세 청년 중에서 양육시설 퇴소자 등은 3천만 원 위에 「아동복지법」에 따라 지원받는 자립정착금을 포함한 2천만 원이 얹어짐으로써 총 5천만 원을 일시금으로 받게 된다.

정의당이 청년기초자산제를 총선의 1호 공약으로 삼은 것은 그만큼 청년문제가 심각하다는 것, 특히나 청년층 내에서도 주거, 교육, 취업, 창업 등 다양한 방면에서 기회의 불평등이 극심하다는 것에 주목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아울러 총선에서 정의당을 지지할 주요(잠재) 세력으로 생각하고 청년층에 크게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인 것으로 짐작된다.

우리 사회의 불평등 문제를 심각하다고 보고 그것에 대처하기 위한, 특별히 청년층의 불평등 문제에 대처하기 위한 정책을 고심하여 마련했다는 점은 칭찬할 만하다. 하지만 어떠한 정책이 불평등 문제, 특히 청년층의 불평등 문제에 착목함으로써 도출되었다고 해서, 그리고 선의를 가지고 제출된 것이라고 해서, 그것이 곧바로 좋은 정책임을 담보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본고는 기본소득과의 비교 맥락에서 정의당의 청년기초자산제 공약에 대한 비판적 평가를 수행함으로써, 기본소득이 청년기초자산제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할 것이다.

이 글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제2절에서는 청년기초자산제를 2018년 3월 14일 심상정 의원이 대표발의한 청년사회상속제(안)와 비교함으로써, 무엇이 달라졌는지를 살핀다. 제3절에서는 기본소득과의 비교 속에서 청년기초자산제를 비판적으로 평가한다. 마지막으로 정책제언을 제시하면서 글을 맺는다.

이 글 전체에서, 청년기초자산제의 내용은 정의당 블로그(2020. 1. 14)를, 청년사회상속제(안)의 내용은 ‘청년사회상속법안, 심상정 의원 대표발의, 의안번호: 12473, 발의연월일: 2018. 3. 14, 발의자: 심상정, 윤소하, 추혜선, 노회찬, 이정미, 김종대, 김종훈, 이용주, 최운열, 정동영, 박주현, 제윤경 의원(12인)’을 기초로 파악하였음을 밝힌다.

 

2. 청년기초자산제와 청년사회상속제(안)의 비교

청년기초자산제와 청년사회상속제(안)을 비교해 보기로 하자. 참고로, 청년사회상속제(안)에 대한 비판적 평가로는 이건민(2019)이 있다.

청년사회상속제(안)(이하“ 청년사회상속제”)와 비교했을 때 청년기초자산제에서 바뀐 점은 크게 네 가지다. 첫째, 지급 대상. 둘째, 지원금의 수준. 셋째, 재원 마련 방안. 넷째, 용처 제한 유무.

첫째, 지급 대상이 달라졌다. 우선 청년사회상속제에서는 만 19세 청년에게 지급하지만(안 제3조), 청년기초자산제에서는 만 20세 청년에게 지급한다. 다음으로 청년사회상속제에서는 일정 금액 이상으로 개인적 상속을 받은 청년들을 지급 대상에서 완전히 제외되지만(안 제3조), 청년기초자산제에서는 만 20세 청년 모두에게 지급하는 대신 개인적 상속을 많이 받은 청년들에게는 세금으로 환수clawback한다고 밝히고 있다. 비록 개인적 상속액이 매우 클 경우에 100% 세금으로 환수할 수도 있을지 여부는 명확하게 제시되지 않았으나, 만약 100% 세금으로 환수하는 경우는 없다고 가정한다면 적어도 ‘보편성’(물론 만 20세 청년이라는 집단 내에서의 보편성) 차원에서는 청년기초자산제가 청년사회상속제보다 진일보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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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정치와 기본소득 (1)

안효상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상임이사

 

현대적 의미의 기본소득이 정립되던 시기에 기본소득에 대한 생태주의적 옹호가 주요한 흐름 가운데 하나였던 것을 감안하면, 기후변화의 도전이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하게 느껴지는 지금 생태주의에 근거한 기본소득 주장이 크게 눈에 띄지 않는 것은 아이러니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 경제성장론이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이자 담론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인지 최근 부상한 기본소득 주장은 ‘일자리 없는 미래’에 대한 보완책으로 제기되었다. 또한 기후변화에 대한 가장 포괄적이면서도 낙관적인 대응인 녹색 뉴딜의 경우, 기본소득에 반대하면서 일자리 보장을 주된 정책으로 내세우고 있다. 따라서 기본소득과 함께 사회적, 생태적 전환을 도모하는 사람들에게 현재 기본소득을 둘러싼 논의는 하나의 도전이다.

기본소득을 주장하는 사람은 좌우의 어느 이데올로기에 속하지만 기본소득 자체는 좌도 우도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기본소득은 생태적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생태주의적 관점에서 기본소득을 옹호하는 것은 규범적인 방식의 정당화와 달리 기본소득의 효과에 주목하고 그 효과가 이른바 생태적 전환에 어떤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라고 가정하는 데서 나온다. 이때 보통 말하는 기본소득의 효과란 (완전)고용을 위해 경제성장을 자극할 필요가 없다는 것, 시장 노동 이외의 활동을 뒷받침할 수 있다는 것, 이런 활동이 탈물질적이고 관계적 활동일 수 있다는 것, 더 나아가 자본주의적인 소비 주체가 아닌 새로운 주체성의 형성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 등이다. 하지만 효과에 주목해서 기본소득을 옹호하는 방식 가운데 하나가 노동시장 참여 및 경제활동 촉진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기본소득에 대한 생태주의적 옹호는 여전히 논란거리다. 이는 어떤 기본소득인가, 그리고 기본소득은 어떤 다른 정책, 제도, 가치 등과 결합할 때 이른바 진보적일 수 있느냐는 질문을 던진다.

게다가 지금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생태적(기후적) 도전은 매우 심각하다. 따라서 기본소득이 생태적 전환에 미칠 수 있는 효과를 말하기 전에 우선 우리가 직면한 생태적 도전과 그 해법을 정리하는 일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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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해요, 리키》 ― 켄 로치에 대해 말하자!

강준상*

2014년 《지미스 홀 Jimmy’s Hall》 이후 켄 로치는 돌연 은퇴를 선언한다. 그러나 2016년 《나, 다니엘 블레이크 I, Daniel Blake》로 다시 찾아왔고, 그 작품은 칸에서 그의 두 번째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많은 사람은 《나, 다니엘 블레이크》가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될 것으로 생각했지만, 이번에 《미안해요, 리키》(2019)라는 작품으로 다시 찾아왔다.

그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영국 보수당 정부의 복지정책에 분노해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만들지 않을 수 없었을 거라고 말한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는 주인공인 케이티가 푸드뱅크에서 생필품을 얻는 장면이 있는데, 켄 로치는 그때 많은 노동자가 임금이 형편없이 낮아 푸드뱅크에서 식품을 배급받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때부터 《미안해요, 리키》를 준비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올해로 그의 나이 84세, 《미안해요, 리키》가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되지 않길 바란다.

《미안해요, 리키》의 원제는 “Sorry We Missed You”다. “미안해요, 우리가 당신을 놓쳤어요.”쯤 될 것이다. 의미하는 바가 궁금했다. 영화에 이 문장은 두 번 등장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리키가 아내에게 식탁 위에 남기는 메시지

주인공인 리키는 택배업을 하는데, 하루는 딸 리사와 함께 일한다. 방문한 집에 사람이 부재할 때 물건을 함에 넣어 두고 가며 딸 리사가 남겨 두는 스티커에 적혀 있는 문구로 이 문장이 처음 나온다. 한국의 택배 관행으로 본다면 택배 노동자가 남겨 놓는 문자메시지 ‘상품을 문 앞에(또는 경비실에) 보관(또는 전달)하였습니다’와 같은 의미일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같은 스티커 장면이 한 번 더 나온다. 리키는 부상을 당해 일하러 나가선 안 될 상황인데, 새벽에 가족들 몰래 집을 나서며 탁자 위에 아내에게 메시지를 남긴다. “화내지 마 애비, 난 괜찮을 거야, 사랑해”라는 메시지를 앞서 말한 스티커에 쓰고 집을 나선다. 이 마지막 장면에서 ‘당신을 놓쳐서 미안하다’는 의미는 가족들에게 전하는 아버지의 메시지가 된다.

켄 로치 감독이 “Sorry We Missed You”라고 영화의 제목을 전할 때 여기서 “We”는 켄 로치 스스로이기도 하고 동시대 우리 모두이기도 하다. 또한 “You”는 리키와 같은 불안정 노동을 하는 노동자들, 그리고 그들의 가족들이기도 하다. 우리는 무엇을 놓치고 있을까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강준상
다큐멘터리 《달려라 휠체어, 달려라 박정혁》,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등을 연출했으며, 공연연출작으로 《옹달샘》, 《꼴》, 《줄탁동시》, 《스퀘어 – 다시 지금 여기에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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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염병 시대, 사람의 길

신석준신의한술TV

 

어느새 전염병은 우리 곁에

역시 병病에 대해서는 장담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특히, 전염병은 말입니다. 제가 들은 바로 코로나19감염증은 만만한 병이 아닙니다. 한때 유행했던 사스, 신종플루, 메르스와 비교해도 전염력만큼은 엄청나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쉽게 생각했습니다. ‘코로나19는 이제 끝난 것 아닌가? 적어도 한국에서는.’ 그만큼 상황을 낙관했습니다. 2월 18일까지는 그랬습니다.

그러나 하루 사이에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매일매일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병이 퍼지고 있습니다. 31명이던 감염자는 불과 열흘만인 2월 29일을 기준으로 3,000명을 넘었습니다. 목숨을 잃은 사람 또한 17명이나 됩니다. 어느새 코로나19감염증은 사람들의 대비를 비웃듯 우리 곁에 와 있었습니다. 세상은 한순간에 얼어붙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이미 오래전부터 전염병과 함께 살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사람이 모여 살기 시작하면서, 문명이라는 것을 만들면서, 전염병은 늘 사람들 곁에 있었습니다. 이름을 달리하면서 맴돌았습니다. 사람들은 참혹했던 기억을 이야기로 만들어 전했습니다. 입에서 입으로 전한 것 말고도 기록으로 남은 전염병 이야기는 적지 않습니다.

역사 속의 전염병

우리 역사에서 전염병에 대한 첫 기록은 기원전 15년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백제 시조인 온조왕 때 기록입니다.

봄과 여름에 가뭄이 들어 기근이 들고 전염병이 돌았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시조 온조왕 4년)

고구려도 안원왕 5년(535년) 겨울에 전염병이 크게 돌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534년 중국에서 북위北魏가 멸망한 다음, 많은 유랑민과 귀순자가 고구려로 들어오면서 전염병도 함께 들어왔을 가능성이 큽니다.

『삼국사기』에 가장 많은 전염병 기록을 남긴 것은 신라입니다. 661년 초 신라에는 “군사와 말을 징발할 수 없을” 정도로 전염병이 크게 돌았습니다. 한 해 전인 660년 백제를 침공한 당나라군 13만과 신라군 5만에 이를 방어하던 백제군 5만이 뒤엉켜 벌였던 전쟁 때문이었을 것으로 짐작합니다. 전쟁과 전염병은 늘 붙어 다닙니다.

또한 신라 때는 선덕왕宣德王이 785년 1월에, 문성왕文聖王이 857년 9월에 “질진에 걸려” 죽었습니다. “질진疾疹”이란 전염병을 말하며, 전문가들은 이를 천연두나 홍역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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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코로나 시대(?)

신종코로나바이러스 대유행은 비극일 뿐만 아니라 아이러니이기도 하다. 4월 말 현재 한국의 확진자는 1만 명이 넘으며 사망자도 250명 가까이 되었다. 전 세계적으로 보면 상황은 더 심각하다. 확진자는 300만 명이 넘고 사망자도 20만 명에 가까워지고 있다. 하지만 3월 초에 나사NASA가 발표한 것에 따르면, 초기에 심각한 타격을 받은 중국의 경우 대기오염 정도가 전년도에 비해 10∼30% 정도 낮아졌다. 이는 산업 활동이 15∼40% 정도 감소하고 이에 따라 석탄과 석유 등 탄소 에너지 소비가 줄어든 결과다. 이뿐만 아니라 베네치아 앞바다가 깨끗해져 돌고래가 돌아왔다거나 미국의 대도시에 코요테가 나타났다는 등의 뉴스도 전해지고 있다. 이로 인해 대기오염에 기인한 질병으로 사망하는 사람이 줄어들 것이라는 예측이 나온다. 이렇듯 재난은 고통이고 비극이지만, 상상할 수 없었던 것을 상상할 수 있게 함으로써 인류의 고통과 진전의 오랜 원천이었던 희망을 불러낸다. 하지만 그 희망이 근거를 가지려면 이 사태를 제대로 인식할 수 있는 사고의 틀이 필요할 것이다.

바이러스의 창궐은 이미 많은 사람이 예측한 것이지만, 그래도 이번 신종코로나바이러스 대유행은 우리로 하여금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진화생물학에 따르면, 인지능력의 진화 등 복잡성을 추구하는 진화 전략을 택한 인간과 그 인간에 기생하면서 빠른 속도로 복제할 수 있기 위해 단순성을 추구하는 진화 전략을 택한 바이러스가 일대 격돌을 벌이고 있는 게 현 상황이다. 그리고 이 싸움은 바이러스가 전적으로 유리한 형국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인간이 인간의 생태적 영역 내에서는 지배적이지만 인간의 영역과 중첩되어 있으면서 전혀 다른 규칙에 의해 작동하는 다른 수많은 영역이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지구 건강planetary health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바이러스의 창궐은 생물다양성을 파괴한 인간 활동의 결과다. 『인수공통 모든 전염병의 역사』를 쓴 데이비드 쾀멘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나무를 베었다. 우리는 동물을 죽이거나 우리에 가두었고 시장에 보냈다. 우리는 생태계를 파괴했고, 우리는 바이러스들이 자연적 숙주에서 벗어나도록 충격을 주었다.” 이렇게 보면 자연이 우리를 위협하는 원천이 아니라 진짜로 해를 끼치는 것은 인간의 행위일 것이다. 이 속에서 분명한 것은 언제일지는 모르나 팬데믹이 확실히 온다는 것이다.

여기서 두 가지는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인간의 공통성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다. 인간 집단을 나누고 있는 다양한 분할선이 있고 이 선을 따라 이루어지는 차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공통성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서로 다른 종이 다양한 방식으로 상호 침투하고 있고 공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이런 인식을 지니는 것은 아니다. 또한 설사 모두가 이런 인식을 지닌다 하더라도, 기존의 지배적인 질서를 유지하려는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 사이의 충돌 없이 미끄럽게 “뉴노멀”로 이행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인식을 지니지 못하거나 그런 인식을 지녔음에도 이런 사태를 낳은 것은 바로 지배적인 질서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배적인 질서를 가리키는 이름은 그 질서의 어느 측면을 강조하느냐에 따라 다르다. 자본주의, 산업주의, 소비주의, 진보주의 등등. 그렇다면 그 반대편, 즉 인간의 공통성과 종들의 공생을 승인할 뿐만 아니라 실현할 수 있는 질서에는 어떤 이름을 붙여야 하는가? 이름을 붙이는 일은 방향을 설정하는 일이자 주체를 부르는 일이다. ‘포스트코로나 시대’는 이런 점에서 임시적인 이름일 것이고, 그다음 시대의 이름을 위한 쟁투가 벌어지는 이름일 것이다.

편집위원회를 대신하여
안효상

 

이 글은 『시대』 2020년 05월호 통권78호에 실린 ‘책 머리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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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와 정치의 관계

박기순 충북대 철학과 교수

 

1. 정치는 윤리에 기초해야 하는가?

플라톤의 가장 유명한 대화편인 『국가』는 제목이 알려주는 것처럼 국가의 본성을 탐구하고 논의한다. 국가란 무엇인가? 그런데 이 물음은 그에게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으로 제기된다. 왜냐하면 국가는 모름지기 정의의 원칙에 의해 통치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정의는 국가의 본성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정의롭지 않은 나라는 나라라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정의는 무엇일까? 달리 말하면 국가는 무엇의 실현을 목표로 삼아야 하는가? 플라톤에 따르면 그것은 ‘전체의 좋음’이다. 일부 구성원에게만 좋은 어떤 것을 국가가 실천한다면 그 국가는 정의로운 국가가 아니다. 제도를 마련하고 법을 설립할 때 원칙이 되어야 하는 것은 모두의 좋음이다. 물론 모두에게 좋은 정책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이 문제를 두고 다양한 사람 혹은 집단 사이의 논쟁과 불화가 있을 수 있다. 이것을 무엇보다도 잘 보여 주는 것이 민주주의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플라톤은 민주주의에 대해 비판적인 가장 대표적인 철학자다. 그의 철학 전체는 바로 이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을 근본 동기로 해서 구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왜 그는 민주주의에 대한 가장 강력한 비판자가 되었을까?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성을 가진 존재라면 결코 회의할 수 없는 옳고 그름의 절대적 기준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기준과 관련하여 논쟁이나 불화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그 기준을 논의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 그 일에 끼어들어 근거 없는 이야기들을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플라톤은 민주주의를 말의 과잉으로, 말할 자격과 능력이 없는 사람들에 의한 불필요한 말들의 잔치로 규정한다.

옳은 것은 인식될 수 있고 그럴 수 있는 한 그것은 불화의 이유가 되지 못한다고 플라톤은 굳게 믿었다.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원칙 혹은 사실이 존재한다는 믿음, 이것이 플라톤의 철학 사상을 이끌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플라톤의 이러한 생각을 먼 과거의 것으로만 간주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생각이 다양한 모습으로 정치 무대에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절대적 희생자’ 혹은‘ 절대적 약자’의 프레임이 그것이다. ‘정치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누군가가 ‘정치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회의 약자나 희생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이라고 답한다면, 그는 본질적으로 플라톤의 논리를 따르고 있는 셈이다.

이 플라톤의 논리를 “윤리주의”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정치가 실현해야 할 어떤 절대적 윤리가 있다고 가정되는 한에서 정치의 본질은 윤리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윤리주의 정치론은 정치를 부차적인 것으로 만든다는 데 문제가 있다. 더욱 심각한 것은 그것이 정치의 봉쇄를 함축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이유를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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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권화폐론이 제기되는 이유

유승경 정치경제연구소 ‘대안’ 부소장

 

2008년 이후 여러 선진 자본주의국가가 실시하고 있는 양적완화 정책은 경제정책과 이론 부분에서 다양한 새로운 제안과 이론적 시도를 촉발했다. 72호(2019년 10월호 「현대화폐이론의 실제적 함의」)에서는 정부재정에 의한 완전고용 보장을 주장하는 “현대화폐이론”에 대해 살펴보았고, 지난 호에서는 중앙은행의 발권력을 활용하여 모두에게 일시적으로 돈을 지급하거나 공적 사업에 필요한 자금을 조성하자는 “모두를 위한 양적완화론”을 살펴보았다(2019년 12월호 「국가발권력을 활용한 경제정책 대안들」). 이번 호에는 지난 호에서 간략히 소개한 바 있는 “주권화폐론”을 더 상세히 검토해 보기로 한다.

오늘날에는 중앙은행이 법정화폐를 창조하긴 하지만 유통 중인 화폐의 대부분은 상업은행이 대출을 통해 공급한 은행화폐다. 다시 말해, 중앙은행은 경제 내의 자산을 매입하는 방식으로 법정통화를 공급하고 상업은행은 대출을 통해 은행화폐를 공급한다. 주권화폐론은 상업은행의 화폐창조 기능을 없애고 국가가 발행한 법정화폐가 유통화폐의 역할을 전담하도록 할 것을 제안한다. 주권화폐론이 제시하는 새로운 화폐제도에서는 국가가 재정지출이나 기본소득 지급을 통해 화폐를 경제에 공급한다.

1. 주권화폐란?

먼저 용어부터 정의하자. ‘주권화폐’란 법정통화를 말한다. 그리고 ‘법정통화’란 세금을 내거나 민간에서 부채를 청산할 때 국가가 그 수단으로 인정해 주는 국가가 직접 발행한 화폐를 의미한다. 이에 반해 현재 널리 사용되는 화폐는 상업은행에 예금 형태로 기록되어 있는 ‘은행화폐’다. 가계와 기업은 상업은행에서 대출을 받아서 그 돈을 요구불예금계좌에 넣어 두고 수표 발행이나 계좌이체를 통해 지불 행위를 할 수 있다. 은행화폐도 세금을 내거나 부채를 청산하는 데 사용되지만, 법적으로는 법정통화에 대한 청구권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오늘날 주권통화로는 상업은행의 지급준비금으로 불리는 비현금성 중앙은행화폐와 현금(지폐와 주화)을 들 수 있다.

현재 유통화폐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은행화폐다. 유로존의 경우 은행화폐가 82%, 주화가 1%, 지폐가 17%를 차지한다. 그런데 은행화폐는 상업은행의 대차대조표에서 부채 항목에 기록되어 있는 안전하지 못한 화폐다. 은행화폐는 은행이 파산하면 정부가 예금보험을 통해 보장해 주더라도 그 자체는 일단 사라질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지난 그리스 위기 때 그리스 사람들은 상당 기간 은행으로부터 돈을 인출할 수 없었다.

주권화폐론은 현재의 은행화폐를 법정통화로 모두 대체하자는 개혁안이다. 은행화폐를 법정통화로 대체하려면 은행의 신용창조 기능을 없애야 한다. 은행이 현재와 같이 예금의 일부만을 지급준비금으로 남기고 나머지를 대출하여 은행화폐를 창조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이 주권화폐론의 전제다. 그리고 주권화폐론은 중앙은행이 아니라 정부가 화폐를 발행할 것을 주장한다. 정부가 화폐를 발행하는 것은 현재의 중앙은행 제도가 정비되기 전까지는 오히려 전형적인 화폐발행 방식이었다. 근대로 들어와서 미국의 링컨 대통령은 남북전쟁 때 정부지폐를 발행했으며, 케네디 대통령도 정부지폐 발행을 검토했다. 현재에도 미국에서는 재무부가 주화를 발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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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 뉴딜의 지향과 쟁점

안효상 편집주간

 

주기적인, 게다가 더욱더 날카로워지는 과학자들의 경고, 그레타 툰베리와 선 라이즈 운동으로 상징되는 새로운 주체의 등장, 미국 대통령 선거. 이런 계기들보다 기후위기에 대한 긴급한 대응을 촉구하기에 좋은 조건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미국의 『타임』이 툰베리를 올해의 인물로 선정한 것에서 예감할 수 있듯이, 사후적으로 2019년은 인류가 말로만이 아니라 실질적인 행동으로 기후위기에 대처한 원년으로 기록될지 모른다. 이러한 행동은 현재 “녹색 뉴딜”이라는 슬로건이자 계획으로 등장하고 있다.

녹색 뉴딜은 그 말 자체에서 알 수 있듯이, 기후위기에 대한 집단적, 특히 국가적 대처와 환경적 대응뿐만 아니라 경제적 전환, 제대로 된 일자리의 제공, 막대한 공공 인프라 투자 등도 내용으로 담고 있다. 또한 뉴딜을 경과하면서 코포라티즘 체제가 등장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녹색 뉴딜은 집단적 행위자의 조직화를 통한 새로운 사회 협약의 구성을 전제이자 목표로 삼고 있다.

하지만 유비類比는 상이점이 드러나지 않게 가릴 수 있으며, 교훈 또한 상이점을 충분히 파악하지 않을 경우 희망이나 절망의 맹목적인 근거가 될 수 있다. 따라서 현재 제출된 몇 가지 녹색 뉴딜 계획의 쟁점을 제대로 드러내는 일은 희망과 절망 사이의 좁은 오솔길을 걷기 위해 꼭 필요한 일이 된다.

2019년 미국의 녹색 뉴딜

현재 논의되고 있는 녹색 뉴딜을 검토하기 위해서는 지난 2월 5일 미국 의회에서 통과된 「녹색 뉴딜을 만들어 내기 위한 연방정부의 의무를 인정하는 결의안」에서 출발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 결의안은 미국에서 논의되고 있는 녹색 뉴딜의 기본 방향과 원칙을 추상적인 수준이긴 하지만 담고 있으며,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논의의 준거점이기 때문이다.

2018년 10월에 나온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의 「지구온난화 1.5도에 관한 특별 보고서」와 11월에 나온 「제4차 국가 기후 평가」에 기초한 이 결의안은 인간 행위가 지난 세기 기후변화의 지배적인 원인이며, 그 기후변화가 해수면 상승, 산불 발생 증가, 심각한 폭풍, 가뭄, 기타 극심한 기상 악화 사태 등을 일으켜 인간의 삶, 건강한 공동체, 주요 인프라를 위협하고 있다고 본다. 그리고 이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기온 상승 폭을 산업화 이전 기준 1.5도로 억제해야 한다고 보는데, 이는 2030년까지 2010년 기준 온실가스를 40∼60% 감축하는 것이며 2050년까지에는 온실가스 배출 “순純제로”를 달성한다는 것이다.

그다음으로 미국이 현재 경험하고 있다고 보이는 위와 연관된 몇 가지 위기를 언급한다. 그것은 미국 인구의 상당수가 깨끗한 공기와 물, 건강한 음식, 적절한 의료, 주택, 교통, 교육 등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 40년 동안 지속된 경제적 침체, 탈산업화, 반노동 정책으로 인해 임금이 정체되고 노동자의 협상력이 약화했다는 것, 1920년 이래 소득 불평등이 가장 커졌다는 것 등이다. 게다가 기후변화, 오염, 환경파괴는 여러 집단에 대해 차별적으로 영향을 미침으로써 체계적인 인종적, 지역적, 사회적, 환경적, 경제적 불의를 키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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