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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비정규직노동자 김용균, 빛으로 묻히다

글·사진 / 임성용

김용균이라는 빛

2월 9일, 싸늘한 겨울 해가 넘어가는 늦은 오후였다. 5시 반이 지나면서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 앞이 분주해졌다. 대형 버스들이 공원 입구로 들어오기 시작했고 노동조합 차량들도 점차 늘어났다. 버스 전면에는 ‘謹弔’ 알림이 붙어 있고 ‘청년 비정규직 故 김용균 노동자 민주사회장’이라는 문구가 보였다. 김용균이 죽은 지 62일이 지나고 나서 비로소 장례식이 열린 것이다.

버스에서 많은 사람이 내렸다. 민주노총 조합원들, 비정규직노동자들, 세월호 유가족들, 일반 시민들이었다. 이들은 이날 이른 새벽부터 충남 태안과 서울대 병원에서 발인제를 하고 노제를 지내고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영결식을 마쳤다. 그리고 마지막 안장을 위해 모란공원으로 함께 온 사람들이었다.

2019년 2월 9일, 죽은 지 62일 만에 ‘청년 비정규직 고 김용균 노동자 민주사회장이’ 열렸다.

수십 개의 만장이 줄을 이었다. 김용균의 얼굴이 그려진 커다란 현수막이 앞장서고, 영정을 고등학생쯤으로 보이는 앳된 친구가 들었다. 김용균의 큰이모의 아들이라고 했다. 영정 뒤에는 붉은 바탕에 흰색 글씨로 “김용균이라는 빛”이라고 쓴 대형 명정이 뒤따랐다.

큰 ‘빚’을 진 사람들에게 김용균은 하나의 ‘빛’으로 돌아왔다. 김용균의 죽음 이후에서 장례식까지, 한 사람의 청년 노동자가 죽어 비정규직 투쟁의 빛으로 되살아났다. 일명 “김용균법”이라는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이 28년 만에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정부와 민주당에서도 당정대책회의를 통해 공공과 민간 기업들의 경영 방식 변화가 필요한 “위험의 외주화 개선 방안”을 논의했다. 하지만 일부 위험한 업종에서 도급을 제한하고 안전 조치 위반 사업장에 대한 처벌을 강화한다고 해서 제2의 김용균을 막을 수 있을까? 해결해야 할 근본적인 과제가 남아 있다. 그러므로 김용균은 빚이면서 빛이고, 빛이면서 빚이 되었다.

김용균은 누구인가?

충남 태안화력발전소 산하 한국서부발전 하청 업체인 한국발전기술에서 일하다 숨진 김용균은 군대를 갓 제대하고 사회에 첫발을 디딘 스물네 살의 청년이었다.

1994년 12월 6일 경상북도 구미 출생
2018년 9월 17일 한국발전기술 입사, 서부발전 태안화력본부 트랜스퍼타워 배치.
2018년 12월 11일 오전 3시 23분 컨베이어 벨트 구간에서 발견.

참으로 짧은 삶이었다. 한 인간의 생이 기계에 휘말려 비참한 죽음으로 끝났다. 한치 앞도 분간하기 힘든 어둠과 분진 속에서 석탄가루를 뒤집어쓴 그의 몸은 일순간에 갈기갈기 찢겨졌다. 입사 3개월 만에 머리와 몸통이 분리된 그의 몸은 비정규직노동자들의 참담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그의 몸이 곧 비정규직이라는 이름표를 단 노동자들의 몸을 대변했다. 그의 몸은 단순한 비극이 아니었다. 슬픔과 추모만으로 대치할 수 없는 분노였다. 그래서 그의 몸은 냉동고에 두 달이 넘게 얼어 있었으나 그의 심장은 식지 않았다.

2월 15일. 광화문 세월호광장에 있는 故 김용균 시민분향소에서는 김용균 사망사건 규탄 시민단체(한국작가회의) 기자회견이 열렸다. 작가들은 김용균의 죽음을 이렇게 규정했다.

김용균은 왜 죽었습니까?
일하다 잘못해서 죽은 겁니까? 작업 중에 실수로 죽은 겁니까?
고장 난 손전등이 하청 노동자 김용균이 왜 죽어야만 했는지를 증명합니다.
핸드폰 후레쉬를 비추면서 혼자 일하다가 컨베이어 벨트에 말려들었습니다.
그곳은 이미 열 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목숨을 잃은 죽음의 작업장이었습니다.
(중략)
김용균의 죽음은 공기업 민영화, 죽음의 외주화가 부른 타살이었습니다.
세계적인 석학 노암 촘스키는 말했습니다.
“부패한 정부는 공기업을 민영화시킨다.”

– 한국작가회의 성명서, 「비정규직 철폐하고 죽음의 외주화를 당장 멈춰라」

 

임성용
화물 운수 노동자, 시인. 시집으로 『하늘공장』 등이 있고, 산문집으로 『뜨거운 휴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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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으로 돌아가다 –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 원직 복직 합의

임성용

서른 번째 죽음을 안고

지난 9월까지만 해도 대한문 앞에는 쌍용자동차 희생자 분향소가 있었다.

서울 시청역 2번출구, 지하철에서 나와 대한문 쪽으로 걸어가면 덕수궁 돌담 곳곳에 여러 현수막들이 걸려 있었고 가장 먼저 눈에 띠는 건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의 서른 번째 죽음을 추모하며”라는 글귀였다.

“여기 잊지 말아야 할 또 하나의 죽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또 하나의 죽음을 맞는 또 하나의 죽음, 또 한 사람 위에 쌓인 또 한 사람의 죽음들이었다. 무려 서른 명의 목숨이 잿빛으로 사라지는 동안, 국가와 사회는 어떤 짓을 저질렀던가?

국가는 노동자의 삶을 처절하게 짓밟았고 사회는 노동자들의 잇따른 죽음마저 외면했다. 그 쓰라리고 참담한 세월은 정리해고, 국가 폭력, 사법 살인으로 이어진 잔인한 시간이었다.

쌍용차 정리해고 이후에 9년이라는 길고 긴 죽음의 터널 속에서, 순박하게 살아온 쌍용차 해고노동자와 그 가족들이 죽어 갔다. ‘쌍용자동차 희생자 시민분향소’에는 영정으로 남은 희생자들이 열 명, 스무 명, 서른 명까지 늘어났다. 분향소는 22번째 희생자가 생기면서 대한문 앞에 설치되었고 1년 7개월 동안 농성을 벌였다.

2013년에 집권한 박근혜 정부는 가장 먼저 쌍용차 분향소부터 강제 철거하면서 노동자 탄압을 시작했다. 당시 세 명의 노동자가 지키고 있던 분향소에 경찰 병력 280명과 중구청 직원 50여 명이 들이닥쳐 기습 철거를 감행했다. 분향소에는 화단을 만들었다. 그 후, 여덟 명이 더 목숨을 끊었다.

2018년 7월 3일. 쌍용차 노동조합은 김주중 조합원이 자살하며 희생자가 서른 명에 이르자 대한문에 다시 분향소를 차렸다. 보수 단체의 방해와 충돌 속에서 5년 만에 두 번째로 설치된 분향소였다. 쌍용차 지부는 이날 기자회견을 통해 촉구했다.

“정부는 쌍용차 희생자와 가족 앞에 사과하고 국가폭력 사법 농단 책임자를 처벌하라!”

회사 측에는 해고자 전원 복직 합의를, 정부에는 해고자들을 대상으로 한 퇴직금 가압류 조치와 손해배상 소송의 철회를 요구하며 농성을 시작했다. 해고자로 남은 노동자들 전원이 공장으로 돌아가기 위해 오체투지로 몸을 길바닥에 뉘였다. 청와대까지 행진을 하고, 범국민대회를 열고, 지부장은 단식을 했다. 분향소에서는 종교, 문화, 노동, 사회 단체가 참여하는 문화제가 이어졌다. 시민들의 관심과 발길도 끊이질 않았다.

그렇게 뜨거운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다. 분향소가 설치된 지 3개월이 지난 9월 중순, 마침내 쌍용차 해고자 복직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9월 14일, 2009년 투쟁 당시의 노조인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2009년 투쟁 이후 금속노조를 탈퇴한 쌍용자동차 노조, 그리고 쌍용자동차 회사 측이 해고자 복직을 합의한 것이다.

이에 쌍용차 지부는 대한문 분향소를 해체하기로 했다. 강제 철거가 아닌 자진 철거였다. 분향소를 설치한 지 73일 만이었다. 쌍용차 지부는 밝혔다.

“정부의 사과와 손해배상, 가압류 철회 등 우리의 요구 사항에 대해 정부가 성의 있게 나선 것에 대해 존중하는 뜻에서 분향소를 정리하기로 했다.”

청와대 시민사회수석이 분향소를 방문하여 정부의 공식 사과와 퇴직금 가압류·손해배상 취하 절차를 밟겠다는 뜻도 전했다. 2019년 상반기까지 해고자 전원에 대한 복직, 해고자 119명 가운데 60%를 2018년 연말까지 우선 채용, 나머지는 2019년 상반기까지 단계적 채용 등이 합의 내용이었다. 2019년 상반기 복직 대상자 중에서 부서 배치를 받지 못한 인원에 대해서는 6개월간 무급휴직으로 전환한다는 내용도 포함되었다.

임성용
화물 운수 노동자, 시인. 시집으로 『하늘공장』 등이 있고, 산문집으로 『뜨거운 휴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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