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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은 삼성 해고자 김용희 앞에 떳떳하십니까?

임성용*

 

삼성 해고자 김용희, 철탑 위에 오르다

2019년 6월 10일 새벽이었다. 강남역사거리 교통관제탑 아래에 배낭을 멘 사람이 나타났다. 크레인 트럭이 한 대 왔다. 그는 망설임 없이 크레인을 타고 25m 높이 관제탑으로 올라갔다. 손잡이도 없는 쇠기둥 하나, 그곳은 교통 CCTV가 설치된 곳이었다. 철제 난간이 설치된 원형의 공간은 지름 50cm도 채 못 되어서 사람이 두 발을 뻗고 누울 수도 없다. 그 비좁은 철탑에 오른 이는 배낭에서 두 개의 현수막을 꺼내 기둥에 매달았다. 하얀 바탕에 붉은 글씨로 쓴 현수막에는 “국정농단범죄자 이재용을 구속하라”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난간에는 “삼성해고자복직투쟁위원회”라는 현수막을 묶었다. 삼성그룹에서 24년 전에 해고된 김용희였다.

이미 일주일 전부터 강남역 8번 출구 부근에 있는 삼성 해복투 천막에서 단식을 하고 있었다. 김용희와 함께 천막을 지켜 온 해고자 이재용의 말에 따르면, 김용희는 단식 사실을 누구에게 알리지도 않고 그냥 밥을 굶고 있었다고 한다. 단식을 하던 그는 이재용에게 대뜸 사거리 철탑에 오르겠다고 말했다.

“아무 준비도 없이 어떻게 철탑을 오르려고?”

이재용은 김용희를 말렸고, 주변과 상의해서 행동할 것을 권했다.

“준비는 해 놓았어!”

김용희는 현수막을 직접 만들고 배낭까지 꾸려 놓은 상태였다. 단식을 시작할 때부터 사거리 철탑을 눈여겨보아 둔 모양이다.

“일주일이면 돼!”

이재용의 만류를 김용희는 듣지 않았다.

“강남역사거리가 마비될 거여.”

“만약 안 되면?”

“철탑에서 죽을 거여.”

얼마나 자기 이야기를 세상에 알리고 싶었던 것일까? 정말 그의 바람대로 강남 일대 교통이 마비되는 큰 사건이라도 일으켜 절규하고 싶은 심정이었나 보다. 아무리 호소해도 자기 말을 들어주지 않는 세상, 아무리 억울하다고 쫓아다녀도 외면하는 사람들에게 그는 생을 걸고 외치고 싶었던 것이다. 김용희는 CCTV를 수리한다고 크레인을 불렀고, 혼자서 철탑에 올라 고공농성을 시작했다.

김용희의 결심을 막을 수 없다고 판단한 이재용은 창원으로 내려가 버렸다. 김용희의 유일한 동료라고 할 수 있는 이재용은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둘 다 삼성 해고자로 길거리를 떠돈 지 십수 년, 올해 예순으로 나이도 같았다. 김용희는 전라도 사람, 이재용은 경상도 사람이었다. 20여 년 전부터 창원에서 삼성에 노조를 만들기 위해 싸운 동료였지만 작년까지는 서로를 잘 몰랐다. 서울에서 삼성과 싸움을 하던 중에 만나 친구가 되었다.

결국 이재용은 창원으로 내려간 지 나흘 만에 다시 상경해 천막농성을 재개했다. 도저히 혼자 싸우게 할 수가 없었다. 이 나라에는 삼성과의 싸움을 함께할 사람이 없다.

2018년 2월 28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청원 하나가 올라왔다. “무노조 삼성재벌 추악한 만행을 막아 주세요”라는 제목이었고, 글을 올린 사람은 김용희였다. 그러나 한 달이라는 청원 기간에 참여한 인원은 8명에 불과했다. 참여자가 20만 명 이상이 될 때만 청와대에서 답변한다. 그런데 겨우 8명만이라니! 공교롭게도 삼성의 지배자와 동명이인인 이재용은 자신마저 빠지면 김용희가 살지 못하리라 걱정하여 나흘 만에 다시 합류할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무슨 사연이 있기에 김용희는 이토록 목숨을 걸었을까?

*임성용
화물 운수 노동자, 시인. 시집으로 『하늘공장』 등이 있고, 산문집으로 『뜨거운 휴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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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쁘지 않은 생일, 전교조 30돌

임성용

참교육의 깃발을 들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하 ‘전교조’)은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민주노조운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전투경찰과 백골단을 동원한 무장 병력으로 민주주의를 짓밟던 전두환과 노태우 군사 쿠데타 세력에 맞서 이뤄낸 1990년의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와 1995년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이하 ‘민주노총’) 창립 과정에서 전교조의 역할을 빼놓아서는 안 된다.

교원 노조가 합법성을 인정받지 못한 1986년에 「교육민주화 선언」을 이끌었던 교사들은 1987년 6월항쟁의 열기를 “교육민주화 실현”으로 되살렸다. “민족·민주·인간화 교육”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참교육 실현, 사립학교 민주화, 교육 악법 개정 투쟁에 나선 교사들은 1989년 5월 28일 전교조를 창립했다. 법외노조였다.

당시 노태우 정부는 교사들이 노동조합을 만드는 것은 불법이라며 「국가공무원법」 위반 혐의로 42명의 교사를 구속하고 1,527명의 교사를 파면 또는 해임하는 등 강경하게 탄압했다. 그중 1,329명만이 1994년 3월에야 교단으로 복귀했다.

합법성 쟁취 투쟁 10년 만인 1999년 7월 1일, 마침내 전교조는 합법화됐다. 민주당 김대중 정부 시절이었다. 「교원의 노동조합 설립 및 운영 등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었다. 이에 따라 전교조는 같은 해 7월, 조합원 6만2,654명으로 노동부에 노조 설립 신고서를 제출함으로써 합법적인 노조로서 정식 활동을 시작했다.

그런데 전교조는 노동법이 아닌 특별법에 따라 합법화됨으로써 애초부터 일반적인 노조와 동등한 권한을 갖지 못했다. 노동3권 중 단체행동권을 제외한 단결권, 단체교섭권만을 갖게 되었다. 쟁의 행위는 금지되고 조합원 자격도 「초·중등교육법」에 따른 교원과 유치원 교원은 포함하되 대학교수는 제외되었다. 또한 전국 단위와 시도 단위의 조직은 허용되지만 학교 단위의 노조는 설립할 수 없었다.

공문 한 장으로 박탈당한 합법성

노조와 관련된 현행법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동조합법’), 「공무원의 노동조합 설립 및 운영 등에 관한 법률」(‘공무원노조법)’, 「교원의 노동조합 설립 및 운영 등에 관한 법률」(‘교원노조법’). 이 세 가지 가운데 「노동조합법」은 일반법이고 나머지 둘은 특별법이다. 교원은 특별법인 「교원노조법」의 적용을 받는다. 하지만 이 법에서 규정하지 않는 사항은 「노동조합법」, 즉 일반법의 적용을 받는다. 교원은 국공립학교에 속하더라도 국가공무원이긴 하지만 「공무원노조법」의 적용은 전혀 받지 않는다.

전교조가 법외노조로 되는 과정에서 가장 큰 쟁점이 된 것은 「교원노조법」 제2조와 「노동조합법 시행령」 제9조 제2항이었다. 「교원노조법」 제2조는 조합원의 자격을 재직 중인 교원으로 제한하고 있다. 「노동조합법 시행령」 제9조 제2항은 “노동조합이 설립신고증을 교부 받은 후 …… 반려사유가 발생한 경우에는 행정관청은 30일의 기간을 정하여 시정을 요구하고 그 기간 내에 이행하지 아니하는 경우에는 당해 노동조합에 대하여 이 법에 의한 노동조합으로 보지 아니함을 통보하여야 한다.”라고 되어 있다.

바로 이 법률 조항에서 심각한 충돌이 발생한다. 「교원노조법」 제2조의 조합원 자격 규정은 실업자나 해고자들도 조합원이 될 수 있는 「노동조합법」에 배치된다. 특히 「노동조합법 시행령」에 담긴 ‘행정관청 시정 요구’와 ‘노동조합으로 보지 아니함을 통보’한다는 규정은 전교조를 법외노조로 결정하게 한 핵심적인 조항이었다.

이 조항들로 인해, 이미 설립신고를 하고 활동하고 있는 노동조합에 대해 행정부는 법외노조 통보를 할 수 있었다. 더구나 법외노조 통보는 법률이 아닌 시행령에 따른 것이다. 시행령이 노동조합의 존립 기반을 흔들고 있다. 이 같은 모순된 법률이 정부와 전교조의 법외노조 다툼을 야기한 가장 큰 원인이라고 볼 수 있다. 전교조는 해당 조항의 개정을 요구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10년, 고용노동부는 전교조에 ‘해직자 조합원 인정’ 등 5개 규약에 대해 시정명령을 했고 전교조는 이를 거부했다. 그러자 박근혜 정부가 들어선 이듬해인 2013년 10월 고용노동부는 해직 교사 9명을 조합원으로 포함하고 있다는 이유로 전교조에 법외노조임을 통보했다. 팩스로 날아온 공문 한 장으로 전교조는 다시 법외노조가 되고 말았다. 6만 명의 조합원이 소속된 노동조합의 지위를 하루아침에 박탈당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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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용
화물 운수 노동자, 시인. 시집으로 『하늘공장』 등이 있고, 산문집으로 『뜨거운 휴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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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우리나라에서는 기타를 만들지 않겠다는 회사

― 콜텍 해고노동자 임재춘, 13년간의 눈물

임성용

2019년 4월 23일 콜텍의 노사가 드디어 합의문에 서명했다. “4,464일”이라는 긴 시간 동안 함께한 공동대책위가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출처: 임재춘 페이스북)

장장 13년의 투쟁이었다. 국내 최장기 투쟁 사업장 중의 한 곳이었던 (주)콜텍 해고노동자들이 13년의 복직 투쟁 끝에 마침내 회사와 합의했다.

지난 4월 23일, 노사는 아홉 차례에 걸친 교섭 끝에 어렵사리 합의안을 마련하고 조인했다. 노동자들이 부당한 정리해고에 맞서 투쟁한지 4,464일 만이었다.

합의문의 주요 내용은 회사의 유감 표명, 그리고 해고노동자 이인근, 김경봉, 임재춘의 명예로운 복직과 퇴사였다. 아울러 콜텍지회 조합원(25명)에 대한 합의금 지급과 민형사상 소 취하 등도 합의했다.

충남 논산에 있던 콜텍은 2007년에 일방적으로 회사 문을 닫았다. 콜텍에서 통기타를 만들던 노동자들은 모두 해고당했다. 해고노동자가 복직해도 지금은 돌아갈 공장이 없다. 그래서 합의문을 보면, 이인근(콜텍 지회장) 등은 “5월 2일 복직시키되 5월 30일부로 퇴직”하기로 했다. 또한 “소급해서 근로관계를 부활시키거나 해고 기간의 임금 등을 지급하지는 아니한다”라고 했다. “회사는 국내 공장을 재가동할 시 희망자에 한해 우선 채용한다”라고 했지만, 그럴 일은 절대 생기지 않을 것이다.

콜텍 사장 박성호는 이미 공장을 인도네시아로 이전하면서, 이제 우리나라에서는 기타를 만들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는 인천 부평에서 함께 운영하던 (주)콜트악기도 폐업한 후 중국으로 이전했고 콜트 노동자들 역시 전원 해고되었다. 두 회사 모두 사장은 박성호이며 법인만 다를 뿐이다. 따라서 콜트와 콜텍은 똑같은 정리해고 사업장이었고, 이 같은 상황 속에서 콜트-콜텍 노동자들은 한 몸으로 연대해 왔다. 다만 콜텍이 먼저 합의했다. 합의서 한 장 받는 데 13년이 걸렸다.

20년 동안 기타를 만들었던 사람

회사는 지독했다. 노사 협상이 시작된 것은 복직 투쟁이 시작되고 무려 12년 만인 2018년 12월 말이었다. 노동자들이 협상 당사자인 박영호 사장을 처음 만난 것은 13년 만인 2019년 3월 7일에 있었던 8차 협상에서였다. 사장을 만난 그날도 협상은 결렬되었고, 3월 12일 ‘콜텍 투쟁 승리를 위한 공동대책위’는 서울 강서구 콜텍 본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 자리에서 콜텍 해고노동자 임재춘 조합원이 단식을 선언하고 무기한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임재춘은 합의가 이루어지기까지 42일 동안 단식했다. 그의 나이는 57세. 흰색 한복을 입고 앉아서 단식하는 그의 머리카락은 한복만큼이나 하얗게 변해 있었다. 그가 해고될 당시에 마흔네 살이었을 테니, 그 길고 어두운 시간을 견뎌 온 세월이 버림받은 노동자의 이력으로 고스란히 묻어났다.

지난 4월, 필자가 단식투쟁을 지지하기 위한 집회에 참석했을 때, 그의 몸무게는 47kg으로 줄어들어 있었다. 약간 말을 더듬는 듯한 충청도 특유의 사투리로 그는 말했다.

“13년을 길거리에서 싸우고 농성할 줄 알았으면 아무도 하지 않았을 겁니다. 이렇게 길어질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깊고 강인한 눈빛을 가진 눈에 고인 눈물이 안타까웠다. 옆에 앉은 이인근 지회장과 김경봉 조합원은 차마 그 모습을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들의 눈가에도 눈물이 맺혀 있었다.

“여전히 제 꿈은 명품 기타를 만드는 겁니다.”

과연 그는 이번 생에 다시 기타를 만들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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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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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조를 못 깨면 회사 문을 닫겠다

― 서울 독산동 신영프레시젼 투쟁

임성용

여성 친화 기업 회장님의 두 얼굴

서울 금천구 독산동에 있는 신영프레시젼은 1993년에 설립된 금형 회사다. 1998년 모토로라사의 휴대폰 금형 제작과 사출성형으로 기반을 다지고 LG사의 우수 협력사로 선정되면서 급성장했다. 초정밀 금형부터 중소형 금형까지 설계하고 제작할 수 있는 기술을 보유하여 금형 설계와 제품 사출, 코팅, 후가공, 조립에 이르기까지 일관 생산 능력을 가진, 동종 업계에서는 유명한 회사다.

회장 신창석은 전남 영암군 학산면 출신이며, 《학산서초등학교 카페》에 그의 행적과 선행이 상세히 나열되어 있다.

카페 글에 따르면, 신창석은 학산면 매월리 미교마을 출신으로 가정 형편이 어려워 일찍 상경해 직장 생활을 하며 야간대학에 다닌다. 다우정밀을 공동으로 운영하다가 1993년 지금의 신영프레시젼의 모태인 신영정밀을 설립했다. 1995년 법인으로 전환하고, 창업 13년 만에 국내 휴대폰 케이스의 금형 및 사출로 연 매출액 2,000억 원에 이르는 데 성공한다. 이 공로를 인정받아 전국중소기업인대회에서 정부로부터 은탑산업훈장을 수상하기도 했다.

카페 글은 신창석이 기업인으로 성공했을 뿐 아니라, 사회 공헌에서도 남다른 면을 보여 주고 있다고 칭찬한다. 독거노인, 소년 소녀 가장, 장애인, 편부·편모 자녀, 교회 등 여러 곳에 상당한 후원금을 지원하고 있으며 이 공로로 ‘학산면민의 상’을 수상했고, 마을 사람들이 마을 입구에 공적비까지 세워 주었다고 한다.

노동조합의 확인에 따르면, 신창석은 가족이 다니는 반석교회, 회사가 위치한 금천구청, 성모재가노인복지회 등에 일 년에 수억의 기부금을 내고 있었다. 어려운 이웃을 위한 사회 공헌 활동을 인정받아 2016 대한민국 자원봉사대상 국무총리 표창을 받았다. 여성가족부장관으로부터 ‘여성 친화·가족 친화 인증’도 받았다. “일과 가정 양립, 가족 친화 직장 문화 조성, 여성이 일하기 좋은 환경 조성, 여성 인재 육성 등”이 표창의 주된 사유였다.

과연 이 많은 표창을 받을 만큼 신창석 회장은 사회 공헌에 기여하고 투철한 공공 정신을 실천하는 사람이었을까? 실제로는 그와 정반대였다. 신창석이야말로 자본가 개인의 인성과 자본가로서의 행위는 아무런 상관이 없음을 보여 주는 사례라 할 만하다.

2015년 10월 29일, 공정거래위원회는 수급 사업자를 상대로 납품 단가를 후려친 신영에 대해 과징금 1억5천만 원을 부과한다. 이른바 갑질 횡포를 저지른 악덕 기업으로 신영이 등장한 것이다.

2019년 3월 29일 금천구청 앞에서 신영 노동자들의 금요문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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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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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 사납금제 폐지와 완전월급제는 시행될 수 있을까?

임성용

 

세계 최장기 고공농성

지난 1월 26일. 전주시청 앞 20m 높이의 조명탑 위에서 고공농성을 벌이던 전국공공운수노조 택시지부 전주지회장 김재주 씨가 땅을 밟았다. 무려 510일 만이었다. 단일 고공농성으로는 세계 최장기라고 한다.

고공농성은 막다른 길에 선 노동자가 목숨을 걸고 하늘로 올라가는 마지막 선택이다. 요구가 관철되지 않으면 농성을 풀지 않겠다는 결사적 의지를 담고 있다. 한두 달도 아니고 일 년, 아니 일 년 반이 넘도록 눈과 비를 맞고 바람을 맞고 여름이면 땡볕을, 겨울이면 혹한을 견뎌야 했다. 계절이 여섯 번, 일곱 번이나 바뀌도록 비좁은 하늘 감옥에서 하루하루를 버티고, 날로 쇠진한 몸으로 오랜 시간을 살기란 결코 쉽지 않다. 말 그대로 사투다. 그래서 다른 나라에서는 좀체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다. 가히 세계적인 일이다.

김재주 지회장은 2017년 9월 4일, 택시 사납금제 폐지와 완전월급제를 요구하며 조명탑으로 올라갔다. 본인도 그때는 농성이 그렇게 길게 갈 것인지는 몰랐을 것이다. 법이 정한 전액관리제(이하 ‘완전월급제’) 투쟁을 끝내야 한다는 일념이었다. 그 일념 속에는 무엇보다도 택시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세상에 알리겠다는 ‘분노’가 들어 있었다. 사납금이라는 족쇄에 묶여 현대판 노예나 다름없는 택시 노동자들의 노동 여건을 개선해 달라는 그의 요구는 단순했다. “제발 법대로 하라!” “법 좀 지켜라!”

전주시청 앞 조명탑에 올라 사납금제 폐지를 요구하며 농성 중이던 김재주 지회장 (출처: 임성용)

택시지부와 전주시는 2018년 12월 말부터 교섭을 진행해 왔다. 그러나 또 한 해가 지나고 고공농성이 500일을 넘기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끝장’ 교섭에 들어갔다. 1월 23일부터 25일까지 사흘 동안 마라톤 교섭을 계속했다. 마침내 고공농성 509일째이던 1월 25일 밤에 합의안이 만들어졌다.

그 다음 날, 택시지부와 전주시는 전주시청에서 조인식을 했다. 김양원 전주시 부시장과 김영만 전국공공운수사회서비스노동조합 택시지부장이 ‘확약서’라는 이름으로 된 합의안에 서명했다. 교섭 내내 핵심 쟁점이었던 ‘행정처분(처벌)’과 관련된 합의가 명시되었다. 이로써 세계 최장기 고공농성을 마무리하게 된 것이다.

 

임성용
화물 운수 노동자, 시인. 시집으로 『하늘공장』 등이 있고, 산문집으로 『뜨거운 휴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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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비정규직노동자 김용균, 빛으로 묻히다

글·사진 / 임성용

김용균이라는 빛

2월 9일, 싸늘한 겨울 해가 넘어가는 늦은 오후였다. 5시 반이 지나면서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 앞이 분주해졌다. 대형 버스들이 공원 입구로 들어오기 시작했고 노동조합 차량들도 점차 늘어났다. 버스 전면에는 ‘謹弔’ 알림이 붙어 있고 ‘청년 비정규직 故 김용균 노동자 민주사회장’이라는 문구가 보였다. 김용균이 죽은 지 62일이 지나고 나서 비로소 장례식이 열린 것이다.

버스에서 많은 사람이 내렸다. 민주노총 조합원들, 비정규직노동자들, 세월호 유가족들, 일반 시민들이었다. 이들은 이날 이른 새벽부터 충남 태안과 서울대 병원에서 발인제를 하고 노제를 지내고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영결식을 마쳤다. 그리고 마지막 안장을 위해 모란공원으로 함께 온 사람들이었다.

2019년 2월 9일, 죽은 지 62일 만에 ‘청년 비정규직 고 김용균 노동자 민주사회장이’ 열렸다.

수십 개의 만장이 줄을 이었다. 김용균의 얼굴이 그려진 커다란 현수막이 앞장서고, 영정을 고등학생쯤으로 보이는 앳된 친구가 들었다. 김용균의 큰이모의 아들이라고 했다. 영정 뒤에는 붉은 바탕에 흰색 글씨로 “김용균이라는 빛”이라고 쓴 대형 명정이 뒤따랐다.

큰 ‘빚’을 진 사람들에게 김용균은 하나의 ‘빛’으로 돌아왔다. 김용균의 죽음 이후에서 장례식까지, 한 사람의 청년 노동자가 죽어 비정규직 투쟁의 빛으로 되살아났다. 일명 “김용균법”이라는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이 28년 만에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정부와 민주당에서도 당정대책회의를 통해 공공과 민간 기업들의 경영 방식 변화가 필요한 “위험의 외주화 개선 방안”을 논의했다. 하지만 일부 위험한 업종에서 도급을 제한하고 안전 조치 위반 사업장에 대한 처벌을 강화한다고 해서 제2의 김용균을 막을 수 있을까? 해결해야 할 근본적인 과제가 남아 있다. 그러므로 김용균은 빚이면서 빛이고, 빛이면서 빚이 되었다.

김용균은 누구인가?

충남 태안화력발전소 산하 한국서부발전 하청 업체인 한국발전기술에서 일하다 숨진 김용균은 군대를 갓 제대하고 사회에 첫발을 디딘 스물네 살의 청년이었다.

1994년 12월 6일 경상북도 구미 출생
2018년 9월 17일 한국발전기술 입사, 서부발전 태안화력본부 트랜스퍼타워 배치.
2018년 12월 11일 오전 3시 23분 컨베이어 벨트 구간에서 발견.

참으로 짧은 삶이었다. 한 인간의 생이 기계에 휘말려 비참한 죽음으로 끝났다. 한치 앞도 분간하기 힘든 어둠과 분진 속에서 석탄가루를 뒤집어쓴 그의 몸은 일순간에 갈기갈기 찢겨졌다. 입사 3개월 만에 머리와 몸통이 분리된 그의 몸은 비정규직노동자들의 참담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그의 몸이 곧 비정규직이라는 이름표를 단 노동자들의 몸을 대변했다. 그의 몸은 단순한 비극이 아니었다. 슬픔과 추모만으로 대치할 수 없는 분노였다. 그래서 그의 몸은 냉동고에 두 달이 넘게 얼어 있었으나 그의 심장은 식지 않았다.

2월 15일. 광화문 세월호광장에 있는 故 김용균 시민분향소에서는 김용균 사망사건 규탄 시민단체(한국작가회의) 기자회견이 열렸다. 작가들은 김용균의 죽음을 이렇게 규정했다.

김용균은 왜 죽었습니까?
일하다 잘못해서 죽은 겁니까? 작업 중에 실수로 죽은 겁니까?
고장 난 손전등이 하청 노동자 김용균이 왜 죽어야만 했는지를 증명합니다.
핸드폰 후레쉬를 비추면서 혼자 일하다가 컨베이어 벨트에 말려들었습니다.
그곳은 이미 열 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목숨을 잃은 죽음의 작업장이었습니다.
(중략)
김용균의 죽음은 공기업 민영화, 죽음의 외주화가 부른 타살이었습니다.
세계적인 석학 노암 촘스키는 말했습니다.
“부패한 정부는 공기업을 민영화시킨다.”

– 한국작가회의 성명서, 「비정규직 철폐하고 죽음의 외주화를 당장 멈춰라」

 

임성용
화물 운수 노동자, 시인. 시집으로 『하늘공장』 등이 있고, 산문집으로 『뜨거운 휴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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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으로 돌아가다 –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 원직 복직 합의

임성용

서른 번째 죽음을 안고

지난 9월까지만 해도 대한문 앞에는 쌍용자동차 희생자 분향소가 있었다.

서울 시청역 2번출구, 지하철에서 나와 대한문 쪽으로 걸어가면 덕수궁 돌담 곳곳에 여러 현수막들이 걸려 있었고 가장 먼저 눈에 띠는 건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의 서른 번째 죽음을 추모하며”라는 글귀였다.

“여기 잊지 말아야 할 또 하나의 죽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또 하나의 죽음을 맞는 또 하나의 죽음, 또 한 사람 위에 쌓인 또 한 사람의 죽음들이었다. 무려 서른 명의 목숨이 잿빛으로 사라지는 동안, 국가와 사회는 어떤 짓을 저질렀던가?

국가는 노동자의 삶을 처절하게 짓밟았고 사회는 노동자들의 잇따른 죽음마저 외면했다. 그 쓰라리고 참담한 세월은 정리해고, 국가 폭력, 사법 살인으로 이어진 잔인한 시간이었다.

쌍용차 정리해고 이후에 9년이라는 길고 긴 죽음의 터널 속에서, 순박하게 살아온 쌍용차 해고노동자와 그 가족들이 죽어 갔다. ‘쌍용자동차 희생자 시민분향소’에는 영정으로 남은 희생자들이 열 명, 스무 명, 서른 명까지 늘어났다. 분향소는 22번째 희생자가 생기면서 대한문 앞에 설치되었고 1년 7개월 동안 농성을 벌였다.

2013년에 집권한 박근혜 정부는 가장 먼저 쌍용차 분향소부터 강제 철거하면서 노동자 탄압을 시작했다. 당시 세 명의 노동자가 지키고 있던 분향소에 경찰 병력 280명과 중구청 직원 50여 명이 들이닥쳐 기습 철거를 감행했다. 분향소에는 화단을 만들었다. 그 후, 여덟 명이 더 목숨을 끊었다.

2018년 7월 3일. 쌍용차 노동조합은 김주중 조합원이 자살하며 희생자가 서른 명에 이르자 대한문에 다시 분향소를 차렸다. 보수 단체의 방해와 충돌 속에서 5년 만에 두 번째로 설치된 분향소였다. 쌍용차 지부는 이날 기자회견을 통해 촉구했다.

“정부는 쌍용차 희생자와 가족 앞에 사과하고 국가폭력 사법 농단 책임자를 처벌하라!”

회사 측에는 해고자 전원 복직 합의를, 정부에는 해고자들을 대상으로 한 퇴직금 가압류 조치와 손해배상 소송의 철회를 요구하며 농성을 시작했다. 해고자로 남은 노동자들 전원이 공장으로 돌아가기 위해 오체투지로 몸을 길바닥에 뉘였다. 청와대까지 행진을 하고, 범국민대회를 열고, 지부장은 단식을 했다. 분향소에서는 종교, 문화, 노동, 사회 단체가 참여하는 문화제가 이어졌다. 시민들의 관심과 발길도 끊이질 않았다.

그렇게 뜨거운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다. 분향소가 설치된 지 3개월이 지난 9월 중순, 마침내 쌍용차 해고자 복직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9월 14일, 2009년 투쟁 당시의 노조인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2009년 투쟁 이후 금속노조를 탈퇴한 쌍용자동차 노조, 그리고 쌍용자동차 회사 측이 해고자 복직을 합의한 것이다.

이에 쌍용차 지부는 대한문 분향소를 해체하기로 했다. 강제 철거가 아닌 자진 철거였다. 분향소를 설치한 지 73일 만이었다. 쌍용차 지부는 밝혔다.

“정부의 사과와 손해배상, 가압류 철회 등 우리의 요구 사항에 대해 정부가 성의 있게 나선 것에 대해 존중하는 뜻에서 분향소를 정리하기로 했다.”

청와대 시민사회수석이 분향소를 방문하여 정부의 공식 사과와 퇴직금 가압류·손해배상 취하 절차를 밟겠다는 뜻도 전했다. 2019년 상반기까지 해고자 전원에 대한 복직, 해고자 119명 가운데 60%를 2018년 연말까지 우선 채용, 나머지는 2019년 상반기까지 단계적 채용 등이 합의 내용이었다. 2019년 상반기 복직 대상자 중에서 부서 배치를 받지 못한 인원에 대해서는 6개월간 무급휴직으로 전환한다는 내용도 포함되었다.

임성용
화물 운수 노동자, 시인. 시집으로 『하늘공장』 등이 있고, 산문집으로 『뜨거운 휴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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