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아리스토텔레스와 음악

임영근 정치경제연구소 대안 상임연구원

 

음악은 만국 공통의 언어라는 말을 흔히 한다. 수긍이 가는 말이다. 전 세계를 통틀어 음악과 춤이 없는 문화는 없다. 자장가 없는 문화도 없다. 자장가가 없는 문화가 없을 뿐 아니라 엄마와 아이가 교감하는 자장가는 서로 비슷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우르르 까꿍 하며 어를 때처럼 음높이는 높아지고 박자는 느려진다고 한다. 이처럼 우리 인간의 마음 깊숙이 음악을 즐기는 심성이 자리 잡고 있다는 뜻에서 음악은 만국 공통의 언어일 수 있다.

하지만 똑같은 이유로 음악을 통해 소통하기는 매우 어려운 게 현실이다. 음악이 우리 감성을 강력하게 흔드는 그 이유 때문에 음악에 대한 선호가 민감해진다. 취향에 맞지 않는 음악을 듣는 것보다 참기 힘든 고통도 없다. 나는 ‘트로트’ 음악을 들을 때면 어렸을 때 시외버스 터미널을 떠올리곤 한다. 흔히 보는 테이프는 아니었다. 보통 테이프보다 훨씬 커서 도톰한 수첩만 한 플라스틱 통이었다. 그 물건을 운전석 앞의 구멍에 기사 아저씨가 꽂으면 어김없이 나오던 트로트 음악. 버스는 출발할 생각도 않고 꿍짝 꿍짝 하는 리듬에 사랑이니 이별이니 눈물이니 하는 가사가 되풀이되는 노래가 이어진다. 몇 곡이 흘러도 그 노래가 그 노래 같아 분간이 안 가는 노래. 제발 음악 좀 끄고 이제 그만 출발해 주세요. 이렇게 마음속으로 빌며 견뎌야 했다. 물론 이것은 그 당시의 내 취향을 얘기하는 것일 뿐 트로트 음악에 대한 평가는 아니다. 그런 내 취향이 생겨난 데에는 당시 어른들 세계에 대한 반감이 어떤 식으로든 작용한 결과일 것이다.

음악에 꽂힌 호모 사피엔스

음악은 청각을 통해 받아들인다. 청각의 특징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결코 외면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트로트가 들리는 동안 안 들을 도리가 없다. 아무리 귀를 틀어막는다 해도 우리 귀로 끝없이 스며든다. 그 자리를 빨리 벗어나는 수밖에 없다.

청각의 또 다른 특징은 자극과 반응이 매우 단선적이고 직접적이라는 것이다. 혀와 코에는 수많은 수용기들이 있어 특정 물질에 반응한다. 시각도 망막에 있는 수많은 세포를 통해 받아들인다. 이에 비해 귀는 단 한 가지 신호를 받아들일 뿐이다. 공기의 진동, 이 한 가지 신호만을 처리할 뿐이다.

‘클래식’음악을 즐겨 듣는 사람 가운데는 실황 음악 음반을 선호하는 사람이 많다. 스튜디오에서 녹음한 교향악단의 깔끔한 소리보다 기침 소리 같은 소음이 섞인 음반을 좋아하는 것이다. 현장감을 즐기기 위해서다. 그런데 우리가 듣는 것은 하나의 소리 파동일 뿐이다.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공기 압력을 듣는 것이다. 연주하는 소리, 기침 소리, 코 푸는 소리, 이 모든 것이 합쳐진 하나의 소리 파동을 듣는다. 설사 여기에 기차가 지나간다 해도 그 소리까지 합쳐져 만들어진 하나의 파동을 듣는 것이다.

참으로 놀라운 능력이 아닐 수 없다. 여러 가지 소리가 합쳐진 단 하나의 파동을 들으면서도 우리는 각각의 소리를 어려움 없이 분간해 낼 수 있다. 연주하는 소리, 기침 소리, 코 푸는 소리, 기차 소리를 분간해 들을 수 있다.

한때 라디오에서 일반인을 상대로 노래 제목 알아맞히기 프로그램을 진행한 적이 있다. 노래 시작 부분을 아주 잠깐만 들려 주고 어떤 노래인지 알아맞히는 방식이다. 나도 몇 번 들은 적이 있는데, 프로그램에 나온 일반인들이 대부분의 노래를 척척 알아맞혔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들은 노래를 어떻게 맞힐 수 있지? 여러 번 진행될수록 너무 쉽게 맞히는 바람에 퀴즈가 싱거워질 정도였다. 내가 그 노래들을 알아맞히지 못한 이유는 딱 한 가지였다. 내가 들어 보지 못 한 노래였기 때문이다. 잘 아는 노래가 나왔다면 처음 몇 개의 음만 들어도 알아맞혔을 것이다.

이처럼 음악에 민감한 우리의 능력을 실험한 사례가 『음악 본능』에 소개되어 있다. 베토벤의 <엘리제를 위하여> 같은 유명한 노래의 멜로디를 들려 주고 알아맞히는 실험이다. 처음 두 음을 들려 주었을 때 알아맞힌 사람이 무려 56퍼센트였다. 자기가 잘 아는 음악이라면 처음 두 음만 들어도 반 이상이 알아맞히는 것이다. (세 번째 음까지 듣고 알아맞힌 사람은 69퍼센트였고, 여섯 번째 음까지 들려 주었을 때는 100퍼센트 알아맞혔다.) 나머지 바그너의 <결혼행진곡>이나 독일 가곡 <소나무>에 대한 실험에서도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추세는 비슷했다고 한다.

이처럼 소리와 음악에 민감한 우리 인간은 음악에 대한 정서적 반응도 강력하다. 이 책에서는 음악에 대한 정서적 반응을 실험한 사례로 소개하고 있다. 토마스 프리츠Thomas Fritz가 카메룬의 산악지대에 사는 마파Mafa족을 상대로 한 실험이었다. 마파족은 서양음악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고 고립되어 살아온 민족이다. 당연히, 유럽인이 볼 때 아주 낯선 음악을 즐기는 사람들이었다. 프리츠는 바흐에서 탱고, 로큰롤까지 여러 음악을 들려 주고 즐거운 곡, 슬픈 곡, 위협적인 곡으로 분류하도록 요청했다. 분류 결과는 놀랄 만큼 잘 들어맞았다고 한다.

서양인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서양인들 또한 마파족 음악을 정서적으로 잘 들어맞게 분류한 것이다. 음악을 들으면 즐거운지 슬픈지 따분한지 신나는지 누구나 느낄 수 있다는 말이다.

이후 생략된 전체 글은 PDF파일로 다운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 ,

볼테르의 『미크로메가스』

임영근 정치경제연구소 대안 상임연구원

실존 인물이 아닌 철학자 가운데 가장 유명한 캐릭터를 꼽으라면 팡글로스 박사가 먼저 떠오른다. 볼테르의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에 나오는 인물이다.

캉디드은 베스트팔렌 지방의 고귀한 남작의 성에 사는 소년이다. 성에서 오래 지낸 하인들은 남작 누이와 이웃에 사는 마음씨 좋은 신사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일 거라고 짐작했다고 한다. 이 남작의 성에서 “형이상학적-신학적-우주론 바보학”을 가르치는 선생이 팡글로스 박사다. (볼테르는 이런 우스꽝스런 용어로 형이상학적-신학적-우주론을 얼치기 학문이라고 놀려대고 있다.) 팡글로스 박사는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는 것, 이 가능한 최선의 세계 안에서 남작의 성이 모든 성들 가운데 가장 아름답다”는 것을 증명해 보였다. 또한, 남작 부인이 모든 남작 부인들 가운데 가장 아름답다는 것을 멋지게 증명해 보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캉디드는 “이 지방에서 가장 훌륭한 철학자이므로 당연히 지구에서 가장 훌륭한 철학자인 팡클로스 선생”의 강의를 듣는 것이 행복했다. 물론 그보다 행복한 것은 이 세상에 퀴네공드 양이 있다는 것, 그녀를 매일 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퀴네공드 양은 열일곱 살 난 남작의 딸인데, “혈색이 좋고 풋풋하고 포동포동하고 탐스러운” 아가씨였다. 한편, 퀴네공드 또한 “자신이 젊은 캉디드의 ‘충족 이유’가 될 수 있고 캉디드도 자신의 ‘충족 이유’가 될 수 있으리라 상상했다.”

드디어 두 사람은 병풍 뒤에서 만난다. “입술이 서로 맞닿았고 눈길이 불타올랐다. 무릎이 떨렸고 손은 어찔할 줄을 몰랐다.” 병풍 근처를 지나던 남작이 이 “원인과 결과”를 보더니 캉디드를 발길로 걷어차 성에서 내쫓아 버렸다. 여기까지가 1장의 내용이다. 팡글로스 박사가 라이프니츠를 풍자하는 인물임을 쉽게 알 수 있다. 라이프니츠에 대한 풍자가 애교스럽게 그려져 있다.

팡글로스 박사

성에서 쫓겨난 캉디드는 “불가리아” 군대에 억지로 끌려가게 되고 아바르족과 불가리아 군 사이의 참혹한 전쟁으로 주변 마을은 비참한 모습으로 바뀐다. 남작의 성도, 성 안에 있던 사람들도 참혹한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어렵사리 전쟁터를 벗어난 캉디드는 네덜란드로 도망친다. 그곳에서도 오물을 뒤집어쓰는 수모를 당하지만 선량한 재세례파 신자, 자크를 만나 도움을 얻는다. 도움에 감격한 캉디드는 자크의 관대함에 감사하며 이렇게 말한다. “그래서 팡글로스 선생님께서는 이 세상 모든 것은 최선의 상태에 있다고 제게 늘 말씀하셨군요.”

다음날 캉디드는 거지 하나를 만난다. 거지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종기가 잔뜩 나고 눈빛은 퀭하고 코끝은 빨갛고 입은 비뚤어지고 이빨은 누렇고 목구멍에서 그렁그렁 소리가 나고 심한 기침으로 괴로워하더니 그때마다 침을 뱉어냈다.” 이 거지를 본 캉디드는 연민에 사로잡혀 자크에게 받은 은화 두 닢을 모두 준다. 거지는 눈물을 흘리며 캉디드의 목을 끌어안았다. 팡글로스를 못 알아본단 말인가? 거지는 팡글로스 박사였다.

팡글로스는 이 모든 게 “인간의 위로자이며 우주의 수호자”인 사랑 때문에 벌어졌다며 이렇게 사연을 들려준다.

자네도 파케트를 알겠지. 우리 존귀하신 남작 부인의 귀여운 시녀 말일세. 나는 그녀의 품에서 천국의 행복을 맛보았는데, 그것이 지금 자네가 보다시피 나를 집어삼킨 지옥의 고통을 낳았다네. 그녀는 성병에 걸려 있었고 아마도 그 때문에 죽었을 게야. 파케트는 꽤나 학식 있는 성 프란체스코 수도회 수사한테서 그 선물을 받았지. 역사는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네. 왜냐하면 그 수사는 늙은 백작 부인에게서 그 병이 옮았고 백작 부인은 기병대장에게서, 기병대장은 후작 부인에게서, 후작 부인은 어느 시동에게서, 시동은 한 예수회 수사에게서 옮았다니까. 그는 수련 수사 시절에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일행 중 한 사람에게서 그 병을 옮겼다네.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 4장)

당시 유럽에 매독이 아무리 창궐했다 해도 라이프니츠와 매독을 연결 짓는 것은 너무 짓궂은 처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별다른 스캔들 없이 평생 독신으로 지낸 라이프니츠였다. 게다가 나중에 프로이센의 황후가 되는 조피 샤를롯테와 철학적인 서신을 주고받으며 이어진 우정은 유명한 얘기였다. 그리고 볼테르는 여기서도 예수회를 비롯한 가톨릭 성직자들을 함께 물고 들어간다. 예수회 신부들에 대한 풍자와 야유는 볼테르의 작품 곳곳에 늘 한자리를 차지한다. 그만큼 볼테르와 예수회 신부들 사이의 대립이 심했음을 알 수 있다. 예수회는 1534년에 이냐시오 데 로욜라가 설립한 수도회였는데, 반反종교 개혁의 선봉대 같은 역할을 했으므로 볼테르와 날을 세울 수밖에 없었다.

이후 생략된 전체 글은 PDF파일로 다운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

왕의 말은 어디로 갔는가

임영근 정치경제연구소 대안 상임연구원

 

어렸을 때 맨 처음 읽은 추리소설은 에드가 앨런 포Edgar Allan Poe의 『모르그 가의 살인』이었다. 『모르그 가의 살인』은 여러 평론가들과 학자들이 최초의 추리소설로 꼽는 작품이다. 나중에 『모르그 가의 살인』이 최초의 추리소설로 평가받는다는 이런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뭔가 기묘한 우연의 일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내가 최초로 읽은 추리소설이 역사상 최초의 추리소설이라니. 하지만 이런 정도의 일을 기묘한 우연이라고 여기는 것은 별다른 의미가 없는 일이리라. 그 당시 어린이 책은 전집류가 대세였고, 추리소설 전집이라면 첫머리에 포의 작품이 오는 것은 당연했을 것이다.

포의 작품을 최초의 추리소설로 꼽는다고 했지만, 이것은 다수의 견해일 뿐이고 이에 동의하지 않는 소수의 사람들도 분명히 있다. 되도록 먼 과거까지 거슬러 올라가 뿌리를 찾고자 하는 사람들이 늘 있게 마련이다. 이들은 성서, 헤로도토스, 볼테르에게서 “추리의 조각을 찾는 사람들”이다. 이 중에서 볼테르의 작품은 실제로 추리소설의 한 대목처럼 읽힌다. 『자디그』 3장에 나오는 「개와 말」 이야기다. 『자디그』는 1747년에 처음 출판된 책이다. 『모르그 가의 살인』이 1841년에 발표되었으므로 최초의 추리소설보다 백 년쯤 앞선 작품이다.

 

개와 말

『자디그』는 일종의 우화집으로 『아라비안나이트』의 분위기를 짙게 풍기는 작품이다. 주인공인 자디그는 바빌론의 지혜로운 젊은이인데, “신께서 우리들 앞에 펼쳐 놓으신 위대한 책의 비밀을 읽어내는 철학자”보다 행복한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는 인물이다. 어느 날 숲에서 산책하고 있는데 왕비의 환관 우두머리와 여러 신하들이 몹시 근심스런 표정으로 달려왔다.

그들은 가장 귀중한 것을 잃어버리고는 다시 찾으려 넋을 잃은 사람들처럼, 이리저리 뛰고 있었다. 환관장이 자디그에게 물었다.

“젊은이, 혹시 왕비님의 개를 보지 못하셨소?”

그러자 자디그가 겸손하게 대답하였다.

“수캐가 아니라 암캐이지요.”

“당신의 말씀이 옳소.” 환관장이 대꾸하였다.

“아주 작은 스패니얼 종이지요. 얼마 전에 새끼를 낳았고, 왼쪽 앞다리를 절며, 귀가 매우 길지요.” 자디그가 그렇게 덧붙였다.

“그렇다면 개를 보셨다는 말씀이오?” 환관장이 아직도 숨을 헐떡이며 물었다.

“아닙니다. 그 개를 본 적은 없습니다. 또한 왕비께서 암캐 한마리를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도 전혀 몰랐습니다.”

그런데 같은 시간 “운명의 변덕 탓으로” 왕의 마구간에서도 사건이 터졌다. 마구간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말이 도망친 것이다. 왕실의 경비대장도 여러 관리들과 함께 다급하게 말을 찾아 나섰다. 이 우두머리의 근심도 환관장 못지않았다. 경비대장이 자디그에게 왕의 말이 지나가는 것을 보지 못하였느냐고 물었다. 이번에도 자디그는 아무런 설명 없이 직설적으로 대답할 뿐이었다.

“어느 말보다도 잘 달리며, 키는 5피에이고, 굽이 매우 작지요. 꼬리의 길이는 3.5피에이고, 재갈의 장식은 23캐럿 황금으로만들었으며, 편자는 11드니에 은으로 주조했지요.” [1피에=약0.324미터, 1드니에=약 1.296그램]

“그 말이 어느 길로 들어섰소? 그것이 어디에 있소?” 경비대장이 물었다.

“나는 그 말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아니, 그러한 말이 있다는 이야기조차 들은 적이 없습니다.” 자디그의 대답이었다.

사태가 이렇게 전개되니 경비대장과 환관장은 자디그가 왕의 말과 왕비의 암캐를 훔쳤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결국 자디그는 대재판관들에게 끌려가 태형과 시베리아 유형에 처해졌다. 그런데 다행히도 형이 선고된 직후에 말과 암캐가 발견된다. 어쩔 수 없이 판결은 취소되었지만, 자디그는 “보고도 보지 못하였다고 말했다”는 죄목으로 황금 400온스의 벌금을 부과받게 된다. 일단 벌금을 내고 나서야 자디그는 변론을 펼 수 있었다.

이후 생략된 전체 글은 PDF파일로 다운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

황제와 신 포도

임영근 정치경제연구소 대안 연구원

 

지금 기억하기에, 맨 처음 가져 본 철학 책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이었다. 중학교를 졸업할 때 받은 상에 딸려 온 상품으로 받은 것이었다. 딸려 왔다고 표현했지만 상장보다야 상품에 마음이 끌리는 법. 책이 귀하던 시절에 상품으로 받은 책이 무척이나 반가웠다. 노란색 표지에 비닐 커버가 씌워져 있어서 매끄러운 감촉이 기분 좋았다. 하지만 기쁜 마음은 딱 거기까지였다.

로마의 황제가 썼다는 점이 흥미를 끌기는 했지만, 『명상록』이라는 제목이 썩 내키지 않았다. 더구나 책을 펼쳐 보니 세로쓰기로 되어 있어 읽고 싶은 마음이 또 한 번 꺾였다. 그래도 몇 줄 읽어 보았지만 무슨 말인지조차 이해하기 힘들었다. 중학교를 갓 졸업한 까까머리 남학생과『명상록』이 어울린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어린 내가 읽어서 도움 안 되는 내용이 많을지도 몰라.’ 아마 이런 식의 합리화도 했을 것이다. 비닐 커버를 씌우는 기술이 좋지 않아 비닐 커버에 갇힌 표지가 우는 경우가 많았다. 이 『명상록』도 표지가 비닐 속에서 울고 있었다. 나와『명상록』이 어긋난 것처럼.

그 뒤에 철학과에 입학을 했지만 『명상록』을 읽을 기회가 오지는 않았다. 한참 뒤에 영화 《글래디에이터》를 보면서는 한번 읽어 봐야할까 하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회색빛 전투 장면에 강한 인상을 받았는데, 그 한가운데서 마치 달관한 듯한 태도로 묵묵히 있는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모습이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때에도 『명상록』을 찾아 읽지는 못했다. ‘어차피 좋은 번역본도 없을 거야,’ 이런 자기 위안도 했을 것이다. 이렇게 저렇게 핑계를 대며 뒤로 미뤄 둔 책이 어디 한두 권이겠는가?

 

황제의 조언

『명상록』을 읽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믿을 만한 번역본이 나온 지도 오래 되었고, 사 두고 오랫동안 묵혀 두는 일이 민망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이 꼭지의 글을 쓰기 위해서였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Antoninus(121~180)는 로마제국의 16대 황제이자 오현제의 마지막 황제이며 스토아철학자로 유명한 인물이다. 『명상록』은 후대에 많은 학자에게 큰 영향을 미쳤고 이천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꾸준히 여러 사람의 사랑을 받고 있다.

지도자들이 자신의 지도력을 과시하기 위해 고전을 읽는다고 내비치는 경우가 종종 있다. 1980년대에 전두환이 대통령 전용기 안에서 정약용의 『목민심서』를 읽는 것처럼 ‘코스프레’를 펼친 적이 있는데, 우리들끼리 실컷 조롱했던 기억이 난다. 미국의 빌 클린턴에게는 『명상록』이 그런 책이었던 것 같다. 클린턴이 『명상록』을 즐겨 읽으며 삶의 교훈을 얻는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다. 하지만 “고결한 행동”을 높이 평가하는 스토아주의 철학자의 책을 클린턴이 제대로 읽었으리라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더군다나 르윈스키 스캔들을 생각하면 클린턴은 별로 할 말이 없을 것이다. 미국의 어떤 비평가의 말마따나, “왜냐하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성적 열정의 무분별함을 설교했던 반면 빌 클린턴은 이를 실천했기 때문이다.”

『명상록』은 모두 열 두 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권의 구성이 특이하다. “나의 할아버지 베루스 덕분에 나는 순하고 착한 마음씨를 갖게 되었다.” 이 첫 문장을 시작으로 자신의 삶이 가족들과 여러 스승에게 빚지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일관성 있게 서술된 점으로 미뤄 볼 때 1권은 따로 쓰인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1권 끝에는 “그라누아 강변의 과디족 사이에서 적다,” 2권 끝에는 “카르눈툼에서 적다,” 이렇게 밝히고 있어 이 두 권은 전장에서 쓴 글임이 분명하다.) 나머지 권들은 모두 짧은 경구로 이루어져 있다. 몇 가지 필사본에 제목으로 적혀 있다는 “자기 자신에게”처럼 이 책은 자기 자신에게 쓴 수상록 같은 책이다. 그러므로 본문에 나오는 “너”는 저자 자신으로 읽어야 할 것이다.

우선 『명상록』에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만한 경구들이 가득했다. 몇 가지 경구를 먼저 읽어 보자.

네 안을 들여다보라. 네 안에는 선의 샘이 있고, 그 샘은 네가 늘 파내어야 늘 솟아오를 수 있다. (7권 59)

불의의 공격에 대비하여 꿋꿋이 서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삶의 기술은 무용의 기술보다는 레슬링의 기술과 더 비슷하다. (7권 61)

네가 화가 나 폭발하더라도 사람들은 여전히 같은 일을 하고 있을 것이다. (8권 4)

남의 과오는 있던 자리에 그대로 내버려 두라. (9권 20)

최선의 복수 방법은 네 적처럼 되지 않는 것이다. (6권 6)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유명한 대목도 있다. 마르쿠스의 풍부한 감수성이 잘 드러나 있다.

우리는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에 수반되는 현상들도 우아하고 매력적인 면이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예컨대 빵을 굽다 보면 몇 군데 균열이 생기는데, 이런 균열은 어떤 의미에서는 빵 굽는 사람의 의도에 어긋나지만 우리의 주목을 끌어 나름대로 식욕을 돋운다. 무화과도 가장 잘 익었을 때 갈라지고, 농익은 올리브도 썩기 직전에 아름답다.

이처럼 누구나 아름답다고 느낄 만한 것들만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얼핏 보기에 전혀 아름답지 않은 모습도 마르쿠스는 아름답다고 이어서 말한다.

이후 생략된 전체 글은 PDF파일로 다운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