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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 신세대, 신지예

안재성 소설가

 

1. 변화는 어디서부터 시작되는가?

당년 29세 여성. 역대 서울특별시장 선거 최연소 후보인 녹색당 신지예 후보의 이력은 남다르다. 이번 2018년 6월 13일에 실시되는 제7회 지방선거에 출마하는 후보들마다 무슨 대학이니 무슨 고시 출신이니 하는 상투적인 관록을 내세우느라 바쁘다. 그런데 다르다. ‘하자학교’ 출신과 ‘오늘공작소’ 대표다.

보통 사람들은 잘 이해 못할 이 짧고 명쾌한 이력만 보아도 신지예가 처음부터 기성의 문화나 제도와는 다르게 인생을 시작한, 그야말로 신세대 중의 신세대임을 알 수 있다. 이름 지어 ‘녹색 신세대’다. 누구에게 배우거나 영향을 받지 않았음에도 중학교 시절부터 스스로 변화를 택하고 2000년대 진보운동의 최선봉에 섰던 이 당찬 청년운동가의 삶을 살펴보면, 세상은 어떻게 변화하게 되는가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변화가 시작되는가, 미미하지만 그 단초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아 이 달에 만나 볼 인물로 선정했다.

선거를 40여 일 앞둔 2018년 4월 말, 서울 서초구 방배동에 있는 신지예 후보 사무실을 찾았다. 50평은 될 꽤 넓은 3층 공간. 아직 플래카드도 걸지 않고 집기도 들여놓지 않은 상태로 당원들이 한창 청소와 정리를 하는 중이다. ‘한 다리 건너’ 아는 이가 내부 수리를 위해 잠시 비워 둔 곳을 매우 저렴하게 빌릴 수 있었다고 한다.

늘 살짝 웃음을 띤, 밝고 씩씩한 인상이다. 한 시간 한 시간이 금쪽같은 후보이니 만나자마자 서울시장에 출마한 이유에 대해 단도입적으로 물었다. 답은 명쾌하다.

“이번 선거는 문재인 대통령의 지방자치단체 정책에 대한 중간평가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문 대통령이 집권한 후 서울이 변화했느냐 아니냐를 판정하는 선거인데, 저는 서울이 거의 변하지 않았다고 봐요. 문재인 대통령이 좋은 대통령이고 박근혜보다는 진일보했지만 보수적인 한계는 벗어나지 못했다고 봐요. 지난해 핵발전소 문제에서 보여 주었듯이 탈핵 문제에 대한 입장이나 현재 민주당에서 내놓은 개헌안을 보면 역시 보수가 맞다고 봅니다. 그래서 녹색당이 필요하다고 보고 제가 나선 것입니다.”

삼선에 도전한 박원순 서울시장에 대한 평가는 이렇다.

“박원순 시장님 역시 좋은 분입니다. 그러나 역시 기존의 패러다임에 갇혀 있는 분이라고 저는 봅니다. 먼저, 박원순 시장에게서도 개발주의자의 면모가 보입니다. 서울시는 현재 서부간선도로, 동부간선도로 등 주요 간선도로를 지하로 파 넣으려 하고 있습니다. 최대 깊이 70m에 왕복 4차선 도로입니다. 환기, 안전 등 여러 가지 우려도 있고 주민과 협의도 안 된 상황입니다만, 지금도 유례없는 크기의 지하차도가 발밑에 뚫리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계획 중인 지하 개발이 많습니다. 여러 가지 환경문제 때문에 이명박 때도 안 했던 토목공사를 박원순 시장이 강행하고 있는 것이죠. 이 문제를 지적해야 합니다.”

대한민국을 다른 말로 쓰라면 ‘건설 공화국’, ‘토목 공화국’, ‘도로 공화국’이 정답이다. 자연을 파괴하고 인성을 파괴하는 토목공사에 쏟아 붓는 세금으로 할 수 있는 좋은 일이 얼마나 많을까? 그 문제에 대한 민주당 정권의 안목은 거의 제로라 해도 좋을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과 그를 둘러싼 신흥 권력자들도, 박원순 시장도 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고 신지예는 본다. 박원순 시장의 개인적인 성향에 대해서도 지적한다.

“서울시장은 시민 전체의 삶을 바꿀 혁신적인 큰 그림을 그리고 추진해야 하는데, 박원순 시장님은 제도권 안에서 작은 변화를 주는, 중간 관료들이 해야 할 일을 간섭하고 들여다보는 스타일이죠. 저는 서울시민, 나아가 대한민국 국민이 한걸음 더 질 높은 삶으로 나가려면 새 정당, 새 정치가 필요하다는 걸 선전하려고 선거에 나섰습니다.”

거슬러 올라가 해방 직후 한민당이란 이름으로 창당한 이래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민주당 세력에 대해서도 일갈한다. 벌써 세번째 집권으로 하부 구성원들까지 권력의 단맛을 알게 된 민주당 세력에 대한 신지예 후보의 시각은 냉정하다.

“촛불혁명의 덕분에 집권한 더불어민주당은 새로운 보수 기득권 세력이 되고 있습니다. 기존의 권력과 이권을 분배해 차지하는 것은 물론이요, 진보세력 내지 신진 세력의 진출을 억제하고 있어요. 이번 지방선거구 협상할 때도, 소수 정당이 당선될 수 있도록 4인 당선 선거구를 35개로 늘리고자 했는데 더불어민주당이 총력으로 반대해 무산시켰습니다. 심지어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은 토론회장의 문을 잠가 버려 시민들의 출입까지 막으면서 자기들에게만 유리하게 법을 만들었습니다.”

2017년 영국 리버풀에서 열린 제4회 세계녹색당대회에 참가하여 미국 참가자와 함께 사드 배치 반
대를 외치고 있는 신지예(앞줄 왼쪽에서 네 번째)

신지예는 말한다. 자신이 속한 녹색당은 아직 권력에 물들지 않았다고. 그러나 권력 잡으면 언제든지 변할 수밖에 없는 게 인간이라고. 지금 민주당과 싸우고 견제를 해야 하듯이, 그때가 되면 자신은 녹색당을 견제하고 싸울 것이라고 말한다.

진정, 권력과 돈은 사람을 사악하게 만드는 가장 큰 원인임에 틀림없다. 끊임없이 비판하고 견제하여 정치 생태계를 정화해 나가지 않으면 언제든 폭압적인 독재정권이 등장할 수 있는 게 인간 사회다. 세계 많은 나라에 하나의 이름으로 보조를 함께하는 녹색당은 그 정화제의 역할을 하는 소중한 존재다. 이번 선거에서 신지예의 득표율에 관심을 두는 이유다.

녹색당과 청년 정치인들의 제도권 진출이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다. 지난해 2017년에만도 네덜란드 총선에서 녹색당이 역사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며 뉴질랜드에서는 스물세 살의 녹색당원 크로에 스워브릭이 국회에 진출했다. 신지예처럼, 그들도 스스로 변화를 만들어 낸사람들이다.

“서울은 너무 비대하고 모든 게 과잉 상태입니다. 면적은 국토의 0.6%에 불과하지만 전체 인구의 5분의 1이 살고 있고 전력의 10%를 사용하고 있어요. 우리나라의 사회적, 생태적 위기의 많은 문제가 여기서부터 발생하고 있지요. 이런 상태에서는 지방분권의 의미도, 정의도 찾을 수 없어요. 저는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 평등한 서울, 소유하지 않고도 안심하고 살 수 있는 도시 서울, 비대한 수도권이 아니라 건강한 도시 서울을 만들 것입니다.”

자신이 살고 싶은 삶을 상상에 담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삶을 주도적으로 살아가는 이 당당한 청년 정치인이 장차 한국 정치를 미래로 이끌어 나갈 수 있으리라 기대를 걸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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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의제를 선도하다, 김종철

안재성 소설가

『녹색평론』 발행인 김종철은 의제를 선도하는 사람이다. 1991년에 격월간지 『녹색평론』의 창간으로 한국에서 생태주의의 문을 열었고, 2012년에는 녹색당을 창당하는 데 적극 나섰다. 이후에 제시한 기본소득은 수년 만에 이 사회의 중요한 화두가 되었으며, 소농 공동체를 지향하는 운동도 ‘진정 행복한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을 던져 주었다. 최근에 제시한 ‘추첨제 민주주의’라는 독특한 의제도 새로운 화젯거리가 되고 있다.

새로운 주장을 내세운다는 것은 기존의 논리에 대한 비판을 수반하기 마련이다.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생산력 발전을 사회 발전의 동력으로 보는 발전론에 대한 비판에서부터 한국의 문화 풍토와 문학 평론에 만연한 지적 허영심에 이르기까지, 그의 날카로운 비평을 피해갈 대상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인가, 오해도 많다. 당면한 현실을 무시하고 이상주의적 원칙만을 강조하는 원리주의자일 거라는 선입견은 인터뷰에 나선 필자도 긴장시켰다. 발전 반대론자인 만큼 핸드폰 같은 건 안 쓸 거라든지, 원리 원칙만 이야기하며 조금만 생각이 다르면 날카롭게 지적하리라는 예상이었다.

예상은 틀렸다. 2017년 8월 8일 인사동의 한 찻집에서 시작된 만남은 술자리까지 거의 6시간이나 계속되었고, 선생이 하는 이야기마다 폭소를 터뜨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진보운동권을 포함한 사회 문화 전반에 대한 냉엄한 비평이 필자와 공감대를 이루는 부분이 많은 데다, 다른 글에서는 볼 수 없던 선생의 성장기도 재미가 있었다.

문학, 정치, 환경, 경제 등 다방면에 걸친 선생의 생각을 정리하기에는 지면이 허락하지도 않거니와 직접 본인의 글을 읽어 보는 게 가장 정확하리라. 『녹색평론』과 여타 지면에 실리는 글들과 『시와 역사적 상상력』, 『간디의 물레』, 『비판적 상상력을 위하여』 등의 저서들은 주제가 명쾌하고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문장으로 이뤄져 퍽 읽기 쉽다. 요즘 지겹도록 보게 되는 번역체 문장들의 비비 꼬인 난해함이며 외래어도 아닌 외국어의 나열이 없어서 좋다. 대학을 나온 이들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뒤틀린 문장을 쓰는 이들은 김종철 선생에게 되게 맞아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제시하는 의제들이 단순한 것은 아니다. 특정 정책의 변화나 특정 법률의 개폐를 주장하는 소승적인 범주를 뛰어넘어, 이 사회, 나아가 인간 사회 전체가 가야 할 길을 제시하는 본원적인 지향을 갖고 있기에 꼭 읽어 볼 만하다.

 

1. 전쟁의 기억

『녹색평론』 발행인 김종철이라고 하면 대구 사람일 거라는 추측도 여러 오해 중 하나다. 영남대에서 오래 교편을 잡은 결과 생긴 오해다. 지금도 영남대 교수라고 알고 있는 이들도 많지만 그만두고 서울로 옮긴 지가 13년이나 되었다.

고향은 경남 진동이다. 진동은 오늘날에는 행정구역상 창원시에 포함되어 있는, 마산에서 서쪽으로 길고 험한 진동고개를 넘어가면 나오는 아늑한 어촌 겸 농촌 마을이다. 친가와 외가 모두 이 지역에서 대대로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어머니는 딸 없이 아들만 다섯을 낳아 키웠는데, 그는 막내였다. 해방되고 이태 뒤 1947년 1월에 태어났다.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으나 한국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1953년까지는 진주에서 살았다. 둘째 아들이던 아버지가 일제 치하에서 상업학교를 나와 금융조합에서 서기로 일하다가 진주의 한 운수회사에 회계과장으로 옮기면서 이사를 갔던 것이다.

국내에 대학이 거의 없던 식민지 시대의 상업학교나 농업학교는 아주 가난하지는 않되 일본으로 유학 갈 경제력은 안 되는 청년들이 택하던 기술학교였다. 금융조합 서기 중에는 친일파라 불릴 정도로 협조적인 사람도 있었겠지만, 아버지는 자신의 일상 업무에 충실한 그저 고지식한 소시민이었다. 진급이나 출세에 관심이 없을 뿐더러 자식들을 큰 인물로 만들겠다는 욕심도 없었다.

진주의 생활은 비교적 유복한 편이었다. 어린애의 시선으로 본 규모지만 마당이 무척 넓은 집으로 꽤 큰 텃밭에 토마토가 주렁주렁했던 것을 그는 기억한다. 집의 한편에 있던 광에 들어가면 늘 떡이나 곶감같은 게 있었다. 전기도 들어왔고 개인집으로는 꽤 넓은 우물도 집안에 있었다.

짧은 호사는 전쟁으로 박살났다. 1950년 6월 25일 개전과 함께 밀물처럼 쓸고 내려온 인민군은 한 달여 만에 진주까지 점령했다. 진주를 거점으로 마산을 함락시키기 위한 인민군의 대공세가 시작된다. 인민군은 진동까지 진출했고, 인천 상륙작전으로 후퇴하기까지 진동고개에서 국군과 일진일퇴의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진동고개만 넘으면 마산 시내였고, 마산에서 부산까지는 평지라 일사천리로 진군할 수 있었다. 진주에서 제법 컸던 그의 집은 인민군에 의해 징발되었다. 아버지는 식구들을 이끌고 거제 근처 무인도로 피난을 갔는데, 김종철의 기억에는 두 장면이 선명히 남아 있다.

쪽배를 타고 섬으로 가는데 미군 함정이 나타나더니 조사를 한다며 키가 큰 미군 하나가 훌쩍 뛰어내리는 것이 아닌가? 거의 뒤집어질듯이 배가 한쪽으로 확 기울 때의 그 공포감을 아직 잊지 않고 있다. 섬에 도착해 보니 이미 몇 가족이 피난 와 있었는데 샘이 없었다. 바위 틈새로 한 방울씩 흘러내리는 물을 받기 위해 온종일 바가지를 들고 줄을 서 있던 광경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나야 어려서 기억도 안 나지만, 인민군은 아이들을 모아 놓고 노래를 가르쳐 주는 등 우호적으로 사람들을 대했다죠. 그래도 우리 부모님과 형들은 반공 보수주의자들이 되었어요. 어쨌든 전쟁을 시작한 것은 공산주의자들이었으니까요. 농민들도 그랬다지요. 불완전하나마 조봉암이 주도했던 농지개혁으로 이미 내 땅이 생긴 다수 농민들의 입장에서는 인민군이 반가울 리 없었죠. 농민은 기질적으로 원래 보수적이잖아요. 김일성은 남쪽으로 밀고 내려가면 농민들로부터 대대적인 환영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다지만, 착각한 거죠. 그런 점에서 대한민국이 존속하는 데 일등 공신은 조봉암 선생이었죠. 그 조봉암 선생을 나중에 이승만이 간첩죄를 씌워 처형했으니, 참 말도 안 되는 아이러니죠.”

인민군 주력은 두 달 만에 물러났으나 전쟁은 계속되었다. 후퇴하지 못한 인민군들은 지리산을 중심으로 남부 전역에서 빨치산이 되어 3년 가까이 교전을 계속한다. 김종철의 식구가 진주를 떠나 고향 마산으로 돌아간 것은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던 1953년, 그가 국민학교에 들어가던 해였다.

아버지는 예전에 다니던 금융조합에 다시 다니게 되었다. 일곱 식구는 마산 시내의 금융조합 관사에 기거하게 되었다. 김종철은 마산에서 제일 큰 국민학교였던 성호국민학교에 들어갔는데, 그가 입학할 때까지도 미군이 운동장 일부를 쓰고 있었다. 임시로 지은 막사 같은 건물에서 3학년 때까지 수업을 해야 했다.

“지금은 농협으로 바뀐 그때 금융조합 서기라 하면 고정 봉급을 받고 사는 처지니까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했다고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이론적으로만 그렇지 식구가 많아서였는지 사실은 굉장히 가난했어요.”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공공사업체인 철도청, 전매청 등도 마찬가지였다. 매달 월급을 받는다는 것뿐이지, 한 달 일해 봐야 쌀 몇 말밖에 받지 못했다. 밥과 김치가 전부이던 시절이라 일곱 식구면 한 달에 쌀 한 가마니는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할 줄 아는 일이 회계밖에 없었다.

자식들을 먹여 살린 데는 어머니의 힘이 컸다. 돈 없는데 뭐 하러 대학을 보내냐는 말을 곧잘 하던 아버지와 달리, 자식 농사에 의욕이 많던 어머니는 자식들을 공부시키려고 온갖 험한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계란 장사 등, 행상을 하더니 나중에는 밀수품까지 팔았다. 친척 중에 세관에 근무하던 이가 있었는데 언젠가부터 스스로 밀수꾼이 되어 화장품이며 양산 같은 물건을 일본에서 몰래 들여왔다. 어머니는 그 물건들을 치마 속에 감추고 친척과 지인들을 통해서 팔았다. 하기는 남쪽 해안 도시에는 일제 밀수품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사람들이 허다한 시절이었다. 어쨌든 어머니의 고생 덕분에 다섯 아들은 모두 대학을 나올 수 있었다.

당시는 겨울이 몹시 추웠다. 눈도 많이 내렸다. 아버지도 겨울 외투 없이 추위에 많이 떨면서 출퇴근을 했다. 스웨터 하나 걸치는 게 소원이었다. 그러다가 마산고등학교에 입학하던 날 털실 두 뭉치를 얻었다. 경남 의령 출신인 당시 제일모직 사장이 도내 고교 수석 입학생들에게 털실을 두 뭉치씩 나눠 준 것이었다. 요즘이야 줘도 받을 사람이 없겠지만, 당시는 꽤 값진 것이었다. 어머니가 그걸로 손수 빨간색 스웨터를 짜서 아들에게 입히고 자신은 녹색 스웨터를 짜 입었다. 이병철 덕에 누린 사치였다.

어머니의 부지런한 생활 자세는 그 어머니, 곧 김종철의 외할머니로부터 비롯되었던 듯하다. 외할머니는 중년에 과부가 된 후 일곱 남매를 혼자 힘으로 키워 결혼시키고 노년에는 손자, 손녀들까지 돌보다가 돌아가신 분이었다. 요즘 자식 하나 키우는 데도 다들 진이 빠진다고 하는데, 그 가난하던 시절에 재산이라고는 기껏 논 몇 마지기와 밭뙈기밖에 없는 과부가 일곱 자식을 키워 내고 말년까지 늘 노동을 하는 모습은 그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김종철은 어린 시절의 환경이 자신을 리얼리스트로 만들었으리라 생각한다. 어머니나 외할머니가 고생스럽게 사는 모습을 보며 자란 탓인지 없는 사람들의 고달픈 삶에 늘 관심이 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젊었을 적에 문학평론을 할 때나 지금이나 그는 한국에서 글을 쓰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받는 원고료에 대해 관심이 많다. 그는 물가나 봉급은 계속 오르는데도 쥐꼬리만 한 원고료는 10년, 20년이 지나도 그대로인데다가 심지어 원고료를 지불하지 않는 간행물도 많은 현실을 개탄했다. 이런 현실에서 어떻게 자주적인 정신으로 오래 글을 쓰는 게 가능하겠느냐고.

철저한 리얼리스트야말로 원대한 이상주의자가 될 수 있다. 현실의 문제점, 현재의 모순을 온몸으로 느끼기에 이를 개선하려는 꿈을 키울 수 있는 것이다. 현실에서 벌어지는 고통들을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찌 현실을 타개하고 이상적 사회를 만들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이성적으로만이 아니라 감성적으로도 모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어머니는 이야기꾼이기도 했다. 자신이 고생하며 살아온 이야기들을 얼마나 실감 나게 이야기해 주는지, 같은 이야기를 몇 번씩 들어도 재미있었다. 김종철은 자신이 문학에 취미를 붙이게 된 것도 어머니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2. 문학에 미치다

신문이 온통 한자로 뒤덮여 있던 시대였다. 아주 부잣집이 아닌 이상, 단행본이든 전집이든 책이 있는 집도 거의 없던 시절이었다. 학교에서 따로 배울 것도 없이 생활 속에서 어른들에게 묻고 공부하며 한자를 깨우치던 시절이기도 했다.

책 사 볼 여유가 없는 집에서 접할 수 있는 주된 읽을거리는 아버지가 보는 일간신문과 농협에서 매월 발행하는 기관지 『협동』이었다. 한국은 이야기의 나라인지라 모든 신문과 잡지에 꼭 문학, 특히 소설을 게재했는데, 소설만큼은 한글로 되어 있었다.

그는 한글을 깨우치자마자 이들 소설부터 읽었다. 일간신문에 연재되는 장편소설과 농협 기관지에 실린 단편소설들을 읽는 게 좋았다. 그때는 문예지는 드물고, 당대의 주요 작가들이 그런 은행이나 농협 등에서 내는 기관지에 글을 써서 생활하던 시절이었다. 50년대의 대표적인 작가들이라 할 수 있는 이범선, 하근찬 등의 소설을 처음 읽었던 지면도 『협동』이었다.

전쟁 때 부산, 마산으로 피난 온 사람들 중에는 지식인들도 많았다. 그들은 전쟁의 와중에도 소중히 싸 가지고 왔던 책을 생계 때문에 길바닥에 내놓아야 했다. 덕분에 부산 보수동에는 헌책방 거리가 생겨 지금까지 공부에 뜻이 있는 가난한 사람들의 전당이 되어 왔다. 서울 사람들이 돌아가고 난 휴전 후, 마산에도 여기저기 헌책방이 생겨 온갖 잡다한 책들을 볼 수 있었다.

소년 김종철은 중학생이 되면서 종일 헌책방 구석에 앉아 책을 읽곤 했다. 기특하게 본 것인지 딱하게 본 것인지 모르지만 주인아저씨가 집에 가서 읽고 가져와도 된다면서 책을 공짜로 빌려주었다. 그렇게 읽은 책 중에는, 그때는 그게 중요한 금서인 줄도 몰랐지만, 벽초의 『임꺽정』도 들어 있었다. 그런 시절을 거치는 동안 차츰 문학에 대한 동경심이 생겼다.

그러다가 학교 선생님을 따라 우연히 백일장에 나갔다가 입상하기도 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는 시인 서정주의 강연을 들으러 갔다. 서정주가 친일을 했느니 하는 이야기는 아직 나오지 않은 때였다. 서정주가 마산에 와서 강연을 한다는 소식에 수업을 빼먹고 참석한 김종철은 강연 내용과 상관없이 분위기만으로 감동을 받았다. 사십대였을 서정주의 어눌하면서도 청중을 사로잡는 독특한 화법에 매료되어 결심했다. “저 분의 제자가 되어야겠다.”

서정주는 동국대 교수로 있었다. 동국대 국문과로 목표를 세우니 입시 공부를 별로 할 필요가 없었다. 당시 입시는 대학별로 자율화되어 있었는데, 동국대 문과 계열의 입시 과목은 국어와 국사 딱 둘 뿐이었다. 그러니 애써 공부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때부터 대놓고 수업을 빼먹었다. 책가방에 시집이나 소설책과 도시락만 넣고 학교에 가서, 담임을 만나는 조회 시간에만 앉아 있다가 학교 뒷산으로 올라가 혼자 책을 보거나 산길을 걸어 다니는 날이 많았다. 그래도 뭐라고 꾸지람하는 선생님들이 없었다. 해방 후 우리나라 고등학교 교육이 그때만큼 느슨하고 자유로운 때가 없었던 것 같다고 김종철은 회상한다. 지방이어서 그랬겠지만 그가 고등학교 다닐 때는 과외니 입시 학원이니 하는 것은 특수한 학생들만의 관심사였다.

‘엉뚱하게’ 서울대 영문과에 진학하게 된 것은 3학년 담임선생의 끈질긴 설득 때문이었다. 그때 담임은 나중에 전국의 입시 학원가에서 큰 인기를 얻게 된 영어 학습서 『정통 종합영어』와 『성문 종합영어』를 저술한 송성문 선생이었다. 서울대에 입학하려면 다섯 과목을 치러야 했는데, 3학년에 올라와 치른 시험에서 수학은 거의 빵점이었다. 3학년 여름방학부터 공부를 시작해서 그해 겨울 입시에 겨우 합격할 수 있었다. 부모님은 어렵사리 등록금은 마련해 주었으나 생활비는 지원할 처지가 못 되었다. 1965년이었다.

서울대 문리대가 동숭동에 있을 때였다. 이웃한 명륜동에 가 보니 눈이 휘둥그레지도록 부유한 집이 많았다. 시골에서는 부자라 해 봐야 양복점이나 양조장집이 좀 사는 정도일까, 다들 엇비슷했는데 서울의 부자는 달랐다. 크고 호화스런 집집마다 처음 보는 자가용을 갖고 있었다. 한두 칸 방에서 예닐곱 식구가 자고 먹고 쉬는 것을 모두 해결하던 시골과 달리, 침실과 거실과 식당이 따로 분리되어 있는 것도 신기했다.

같은 대학생이라도 시골 출신과 서울 출신이 또 달랐다. 김종철은 서울에서 성장한 친구들과 자기와 같은 시골 출신 사이에 상당한 문화적 격차가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가 짜장면을 처음 먹어 본 것도 중학생 때였다. 그리고 대학생이 되었음에도 처음 몇 달 동안은 고등학교 때 입었던 교복 바지에 운동화를 신고 다녔다. 서울 출신들은 정치적 식견도 높았다.

마산은 4·19학생혁명의 시발점이었다. 중학생이던 그도 3·15부정선거에 항거하여 일어난 시위 사태를 경험했다.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한 그날 저녁이었다. 집이 경찰서 근처에 있었는데, 경찰의 발포가 시작되자 몸을 피하던 군중들이 그의 집 대문을 밀고 쏟아져 들어오는 바람에 문짝이 박살이 났고, 그 와중에 사람들이 집 뒷담을 넘어 피신하도록 도왔다. 얼마 후 최루탄이 눈에 박힌 김주열의 시체가 바다에 떠올랐을 때, 마산 시내 전체가 격앙되어 들끓었다. 중학생인 그도 하루 종일 김주열의 시체가 안치된 도립병원 주변으로 흥분한 채 뛰어다녔다.

그러나 실은 영문도 모르고 뛰어다닌 것 같다고 말한다. 소설은 많이 읽었지만, 역사적 지식도 없고 가르쳐 주는 어른도 없었으므로 그는 그런 엄청난 사건을 보면서도 그게 무슨 의미를 갖는지는 잘 몰랐고, 큰 관심도 없었다.

서울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닌 또래들은 달라 보였다. 상당수의 학생은 일찍부터 독재자 이승만의 실정을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마산과 같은 지방에서는 이승만의 생일이라고 백일장이 열려 상을 받으면 그것을 영예스럽게 여기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제일 부러웠던 것은 서울 출신 학생들의 정치의식이나 옷차림이 아니었다. 서울 학생들은 가난하든 부자든 안정된 주거, 즉 잠잘 곳이 있었다. 대학 생활 상당 기간 동안 그에게는 하루하루 잠잘 곳, 먹을 것이 걱정이었다.

지방 출신 가난한 학생들이 제일 손쉽게 생활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입주 과외 선생을 하는 것이었다. 부잣집에 들어가 기거하면서 그 집 아이를 가르치면 잠잘 곳과 먹을 것이 해결되고 약간의 돈까지 생겼다. 서울대생이라면 맘만 먹으면 그렇게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생활을 하지 못하는 게 그의 체질이었다. 두어 번 부잣집 아이들을 가르쳐 보기는 했는데, 어쩐지 굴욕감 때문에 그만두었다.

그렇게 지내니 어떤 때는 몇 달이나 이발도, 목욕도 하지 못했다. 그때 『대학신문』에 글이 발표되면 학생들에게도 소액이지만 원고료가 지급되었다. 글을 투고해 원고료를 받는 날은 비슷한 처지의 친구와 둘이서 목욕과 이발을 했다. 소주 두 병과 오징어 한 마리, 게다가 백양 담배 한 갑까지 살 수 있었다. 그런 날은 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그런데 학교 생활은 별로 재미가 없었다. 영문과에 들어가면 문학을 논하고 세계 문화를 논하는 멋진 친구들이 꽤 있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20명의 동기생 중 대다수가 원래 법대나 상대를 가려다가 재수 끝에 영문과에 들어왔거나 장차 영어를 도구로 하여 출세할 생각을 가지고 입학한 친구들이었다. 문학이 재미있어서 문학 공부를 본격적으로 하려고 입학한 친구는 거의 없었다.

그래서 1학년 2학기에 접어들면서 재미없는 학교를 그만두기로 마음먹었다. 아버지가 보내 주신 등록금을 들고 당시 광화문에 있던 외서 전문 서점 두 곳, 즉 ‘범문사’와 ‘범한서적’으로 갔다. 그동안 눈독만 들이고 손에 넣지 못했던 영어로 된 문고본 소설 20여 권과 문학사에 관한 책을 몇 권 샀다. 국립대 등록금은 얼마 되지 않을 때였다. 책값으로 쓰고 신세진 친구들에게 밥과 술을 한 번 사고 나니, 등록금은 다 사라졌다.

따로 갈 데도 없으니 학교에는 계속 나갔다. 학사 관리가 느슨했던 시대라 수업료를 내지 않았다고 바로 제적을 당하거나 청강이 제한되지도 않았다. 그러다가 결국 아버지에게 들통이 나서 마산 집으로 불려 내려갔다. 제1차 경제개발이란 이름으로 수출 주도 산업화가 시작되면서 외국어 인력이 절대 부족할 때였다. 영문과만 나오면 어디든 취직할 수 있는데, 학교를 그만두겠다고 등록금을 날리고 책만 읽는 그를 부모님은 별로 나무라지도 않았다. 그렇게 1년을 휴학했다.

복학을 하고도 생활은 여전히 어려웠다. 그러나 점차 자유롭게 영어책을 읽을 수 있게 되자 새로운 서양 작가와 시인들을 발견하여 그들에게 경도되어 열중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대학가에는 박정희의 굴욕적인 한일 수교에 항의하는 운동이 벌어졌지만, 역사나 사회과학에 관한 지식이 별로 없던 그는 그 문제가 왜 중요한지 확실히 알지못했다.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진 학생들과 접촉할 기회가 아주 없던 건 아니었다. 입학하고 얼마 안 되었을 때, 잠깐 동안이지만 친하게 지내던 동기생이 ‘널 보면 생각나는 친구가 있다’라며 조영래를 소개해 주었다. 친구가 소개한 이유는 둘 다 촌티와 빈티가 난다는 점 때문이었다. 1947년 생 동갑내기인 조영래는 경기고 출신의 법대생이었다. 이미 고교 시절부터 민주주의와 인권 문제에 관심이 많던 조영래는 몇 년 후 발생한 전태일 분신 사건을 계기로 마흔셋 짧은 평생을 노동문제에 바친다. 조영래 말고도 같은 마산 출신으로 공고를 나와 법대를 다니고 있던 장기표 등 장차 한국의 민주화 투쟁을 이끌 인물이 당시 동숭동의 대학가에 여럿 있었다. 그렇게 정치적, 사회적 문제에 예민한 동년배 학생들이 바로 지척에 있는데 자신은 오로지 문학에만 골몰한 채 역사나 정치에 무관심하게 지낸 바보였다고, 김종철은 말한다.

그러나 다양한 책을 읽고 있던 그가 정치와 사회, 인권과 민주주의 문제를 전혀 모를 수는 없었다. 졸업하던 해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평론이 입선되었다. 주제는 한용운이었다. 남한 문단이 거의 친일파 문인들로 장악되어 있을 때였다. 대표적인 항일 문인 한용운에 관해 쓴 것을 보면, 그가 대학생 시절을 정치나 사회문제에 대한 무관심 속에서 보냈다는 것은 과장된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의식은 있으되 적극적인 투쟁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는 이르지 못한 전형적인 문학청년이었다는 게 정확한 이야기일 것이다.

언제나 잠자리, 끼니 걱정에 시달리던 생활에서 벗어난 것은 4학년이 되어서였다. 농협을 퇴직한 아버지가 제일동포가 설립한 구로동의 한 회사에 취직이 되어 올라오신 것이다. 비록 좁은 셋방이지만, 부모님과 함께 생활을 할 수 있게 되니 잠자리 걱정, 끼니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안정된 주거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그때 실감했다.

급격한 산업화로 고급 인력이 태부족이어서 아무 대학이나 졸업만 하면 취업은 아주 쉬웠다. 반면, 대학원을 나와서는 강사 자리도 얻기 어려울 만큼 대학이 부족하던 시절이었으니 대학원에 가려는 학생은 거의 없었다. 대학원이 필수 과정이 되어 버린 요즘과는 많이 다른 시절이었다.

문학 공부를 계속하고 싶었던 그는 대학원에 진학했다. 대학까지 나온 놈이 부모덕을 보면 안 되는 거 알면서도, 회사에 취직하여 종살이를 한다는 것은 생각하기도 싫었다. 아버지도 직장을 갖고 계셨기 때문에 굳이 막내의 취직을 종용하지 않았다. 대학원에 들어가니 입학생 가운데 남자는 혼자였다. 조교 요원이 없어서 쩔쩔매던 때라 모처럼 남학생이 들어왔다고 교수들이 좋아했다.

그러나 병역 문제를 해결해야 했으므로 대학원 입학 반년 만에 선배의 주선으로 공군사관학교 교관 요원으로 입대했다. 그때는 육사의 교관이 되려면 석사 학위 이상을 소지하고 있어야 했지만, 공사나 해사의 교관은 대학을 나와 간부후보생 교육을 마친 초급 장교 신분으로도 가능했다. 그래서 소위, 중위 계급장을 달고 1970년 겨울에서 1974년 가을까지 4년 동안 공사 생도들에게 영어를 가르쳤다.

군대에 있는 동안 유신헌법이 발효되어 대한민국은 총통제 파시즘 국가로 변했다. 유신 체제를 다른 말로 정의하자면 병영 체제라 할 수 있으니, 이미 병영 안에 들어와 있던 군인들에게는 익숙한 체제였다. 육군은 박정희의 기반으로 유신 체제의 적극적인 지지 세력이 되었다. 육군 중심의 체제에서 소외돼 있었다고 할 수 있는 공군이나 해군의 분위기는 그러나 조금 달랐다.

공군사관학교 영내에서는 젊은 장교들끼리 비공식적인 자리에서 곧잘 유신을 비판했다. 그만큼 리버럴한 분위기가 있었다. 그 자리에 있던 누군가 한 명이라도 밀고를 하거나 했으면 온전치 않았을 것이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요즘 군대에서도 있을 수 없지만 그때는 참 겁도 없이 떠들었다고 김종철은 회상한다. 제대하고 수십 년이 지난 몇 년 전의 일이다. 어떤 시민단체의 모임에서 강연을 하고 나오는데, 나이 지긋한 참석자 한 사람이 다가오더니 자기가 공군사관학교 졸업생인데 예전에 생도였을 때 선생님께 배웠다며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반가운 김에 근처에서 맥주를 한잔 나누며 회포를 풀었는데, 재미있는 것은 그가 김종철을 영어 교관이 아니라 정치학 교관으로 기억하고 있는 것이었다. 수업 시간마다 민주주의를 강조하고, 대한민국 군대는 박정희의 군대가 아니라 국민의 군대라고 목소리를 높였다는 것이다. 유신헌법에 대한 대화조차도 금지되었던 긴급조치 시대에, 생도도 아니고 교관이 시간마다 독재를 비판하는 말을 했으니 누군가 신고라도 했다면 그는 결코 무사하지 않았을 것이다.

 

3. 보리를 갈아엎는 농민들

청년 시절의 김종철이 가진 현실 문제에 대한 관심 정도는 시대를 막론하고 지식인들의 일반적인 모습이라 할 만하다. 현실 문제에 천착해 감옥행을 마다하지 않고 직접 투쟁에 나서는 소수의 운동권을 모든 사람의 삶의 기준으로 삼을 수는 없을 것이다. 자신처럼 싸우지 않는 이들은 모두 비겁한 사람이라는 주장은 정의감이라는 명분으로 포장된 또 다른 파시즘일 수 있다.

김종철이 유독 문학에 열중한 것도 각자 자기 나름의 분야에 푹빠져 사는 사람들의 경우처럼 특별나다고 할 것은 없다.

진정으로 김종철을 그답게 만든 계기는 1975년 대전의 숭전대 전임강사로 가게 된 것이었다. 제대 후 서울의 몇몇 대학에 시간강사로 나가다가 시골로 가서 조용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컸는데, 마침 숭전대에 자리가 났던 것이다.

현재는 한남대학교로 이름을 바꾼 학교에 가 보니 학생들 다수가 충남 일대 농민의 자제들이었다. 초기의 『창작과 비평』이나 『문학과 지성』 등 잡지의 지면에서 가끔 보던 젊은 문학평론가가 자기들 학교선생으로 왔다는 것을 알고 학생들 몇몇이 찾아와서는 문학 서클 지도교수가 돼 달라고 했다. 나중에 졸업 후 전교조나 시민단체에서 활동하다 시인이 된 박용남, 유도혁, 이은봉, 조기호, 윤중호, 전인순 등등, 하나 같이 소박하고 정이 많은 농촌 출신 학생들이었다. 그들과 3년 동안 친구처럼 지냈다.

“이 친구들이 명절 때면 선물이랍시고 고향 집에서 키우던 닭을 가져와요. 살아 있는 닭을 보자기에 싸서요. 그 닭을 잡아서 소주를 같이 마셨지요.”

김종철은 농가 출신은 아니지만, 어려서부터 농사짓는 사람들 가까이서 지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방학이면 으레 진동의 외가에서 살았다. 거기서 여름내 농민들의 하루하루를 지켜보며, 사촌들과 더불어 풀 뽑기나 퇴비 작업을 도왔다. 추수 때는 마을의 장정들이 빙 둘러서서 함께 농요를 부르며 도리깨질을 하는 등, 전통적인 우리 농촌의 풍경은 지금도 머릿속에 선명히 담겨 있다.

몇 마지기 안 되는 논밭으로 자식들을 훌륭하게 키워 낸 외할머니의 사례에서 그가 훗날 이상적인 농촌공동체를 유추해 낼 수 있었던 것도 그때의 경험 때문이다. 그는 2008년 『문학동네』 겨울호 대담에서 이렇게 말했다.

할머니 혼자 힘으로는 안 되지요. 그게 가능했던 것은 마을의 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동네 사람들끼리 물심양면으로 상부상조하고 지내던 예전부터의 전통이 살아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지요. 식민지 시대를 겪고, 전쟁을 겪으면서 말할 수 없이 피폐해 졌으면서도, 우리나라의 농촌에는 아직도 사람끼리 서로 돕고 사는 전통이 죽지 않고 있었거든요. 이게 제일 중요하잖아요. 우리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길은 근본적으로 서양의 무슨 그럴듯한 사상이나 철학이 아니라 본래 우리나라 농촌공동체에 있던 풀뿌리 민중의 생활 방식에서 배워야 한다고 나는 늘 생각하는데, 그런 생각이 다 우리 외할머니에 대한 기억에서 오는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원래 막연하나마 마음속에 담겨 있던 농촌적 정서에 대한 애정이 그를 지방대학으로 가게 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대전에서 만난 학생 친구들과 교류하다가 예상치 못했던 현실에 눈을 뜨게 되었다.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그들의 집에도 찾아가 보고 하다가 우리의 농촌공동체가 철저히 파괴되고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새마을운동이었다. 박정희가 새마을운동을 시작하면서 농촌공동체는 뿌리째 뽑히고 있었다. 서울의 언론과 지식인들은 진실을 모르고 새마을운동을 찬미하고 있었지만, 그가 본 현장의 농촌은 새로운 형태의 파괴와 수탈로 황폐화 일로에 있었다. 서양이 식민지에서 약탈한 자원을 토대로 산업혁명을 이룬 것처럼 박정희는 농촌을 수탈해 산업개발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인식할 수 있었다. 새마을운동은 그런 현실을 은폐하는 기만적인 술책이었다. 수출 주도 산업 개발의 기반인 저임금은 저곡가로 유지되었고, 이는 도시로 올라와 저임금 노동자로 비참하게 살게 된 수많은 농민의 자녀들이 결국은 부모의 희생으로 살아간다는 뜻이었다.

그러다가 어느 해 봄 농민들이 전국 곳곳에서 스스로 농사지은 보리를 갈아엎거나 심지어 불태워 버리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것을 보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이전의 어느 시대에도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많은 농민들은 여전히 보릿고개를 겪고 도시의 노동자들은 보리밥조차 없어 국수로 끼니를 때우고 있는데, 팔아 봐야 생산비도 건질 수 없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막대한 손해를 입을 것이기 때문에 그냥 다 지은 곡식을 파묻거나 태워 버리는 그런 세상이 된 것이다. 농작물이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먹을거리가 아니라, 환금성을 가진 상품으로만 취급되는 자본주의의 정체를 똑똑히 본 느낌이었다.

대전에서 보고 느낀 것은 당시에는 아직 이론적으로 정립되지는 않았으나 생태주의, 환경문제를 숙고하는 계기가 되었다. 농민들로 하여금 자신의 생명 같은 곡물을 스스로 파괴하도록 강요하는 자본주의라는 기묘한 체제에 대한 근원적인 회의를 품게 된 시간이었다. 당시에는 생각도 못하고 있었지만, 십여 년 후 『녹색평론』을 구상하게 된 중요한 계기가 된다.

김종철은 1980년 봄, 박정희가 암살된 직후 대구의 영남대로 자리를 옮긴다. 대전에 있다가 1978년에 부천의 성심여대로 옮긴 지 2년이 채 안되었을 때인데, 다시 대구로 옮겨 간 것은 당시 영남대 총장 비서실장으로 있던 이수인 교수의 강권 때문이었다.

100만 평이 넘는 광활한 캠퍼스를 가진 영남대는 원래 대구의 두 사립대학을 박정희가 빼앗아 통합한 뒤 5·16재단 이름으로 운영하고 있었다. 그런 특수한 조건 때문에 유신 치하에서도 다른 대학들과 달리 상주하는 기관원도 없고 교수 처우도 좋고 총장의 자율권이 컸다.

박정희는 영리한 사람이라 영남대의 역대 총장을 보수 우익 인사이긴 하되 지식인 사회에서 어느 정도 신망이 있는 사람들 중에서 임명했다. 박정희가 암살되기 전 그가 임명한 영남대 마지막 총장은 일제 때 동경제대를 나온 교육학자 이인기 교수였는데, 대학 시절 김종철도 그에게 한 학기 동안 배운 경험이 있었다. 그런데 이인기 총장은 영남대로 부임하면서 자신의 비서실장으로 옛 친구의 아들인 정치학자 이수인(서울대 총장과 국무총리를 역임한 이수성의 아우)을 데리고 갔고, 그 비서실장에게 교수 채용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을 일임해 놓은 상태였다.

그래서 이수인은 그 기회를 활용하여 영남대를 진보학계의 근거지로 만들 생각을 했고, 실제로 한때 적잖은 진보적 지식인, 학자들이 영남대로 모여들었다. 미대에 김윤수, 국문과에 조동일, 최원식, 독문과에 염무웅, 사학과에 정석종, 심리학과에 장현갑, 인류학과에 박현수, 농대에 성삼경 등등, 평소 김종철이 이미 잘 알거나 알 만한 선후배들이 포진해 있었다. 살벌한 유신 시대에 박정희의 학교가 일시적이나마 ‘좌파’의 소굴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

김종철이 영남대로 옮긴 직후, 5월에 광주항쟁이 터졌다. 그날 5월 18일, 그는 전날 서울에서 내려온 친구들과 술을 마시며 놀고 있었다. 물론 광주 소식을 알지도 못했을 때지만, 광주에서 무고한 시민들이 학살을 당하고 있을 때 술을 마시고 있었다는 죄책감은 평생을 따라다닌다.

광주항쟁을 진압하고 들어선 전두환 정권은 전국의 대학에서 진보적 교수들을 대량 해고, 구속 시켰다. 영남대의 상황도 완전히 달라져 이인기 총장이 물러나고 김윤수, 이수인 등 여러 교수들이 해직되었다. 게다가 박근혜가 대학의 새 주인 노릇을 하면서 학교는 그야말로 뒤죽박죽이 되어 버렸다. 별다른 민주화운동 이력이 없는 김종철은 해직은 면했으나 스스로 혐오스런 현실을 참을 수 없었다. 평생 미국에 가지 않겠다고 작정한 젊었을 적의 객기를 접었다. 미국으로 가 대학원에 등록하고 새로운 학생 생활을 시작했다.

1991년 10월에 창간해 2008년 5-6월호로 100호를 맞은 『녹색평론』은 2017년 7-8월로 155호가 되었다.

뉴욕주립대학에 가자 한국의 대학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방대한 자료를 갖춘 도서관에 도취해 버렸다. 본래 마르크스주의 문학 이론에 관한 논문을 쓸 생각을 하고 갔지만, 도서관의 정기간행물실에 비치된 수백 종의 잡지들을 기웃거리다가 그만 강의실에는 들어가지 않고 밤낮으로 난생 처음 보는 잡지들을 보는 데 몰입했다. 한국에 돌아가서 새로 대학에 취직을 할 것도 아니니 모처럼의 기회에 실컷 잡지나 읽고 가자고 계획을 바꿔 버렸다. 그러다가 어느 날 자신이 에콜로지 분야의 글과 책들에 집중적으로 끌리고 있다는 것을 의식했다.

유럽의 지식인 사회에서 막 생태주의가 이야기되기 시작할 때였다. 1980년 창당한 독일의 녹색당이 1983년 처음으로 27명의 의원을 연방의회에 진출시킨 순간이었다.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녹색사상과 운동을 이야기하는 문헌에 빠져들었다. 방학마다 외가에 가서 본 농촌공동체의 모습, 그리고 대전에서 목도한 새마을운동의 본질과 자본주의화된 농업의 종말을 보며 품었던 생각이 생태주의 사상가들의 저술을 보는 동안 분명한 윤곽을 갖게 되었다.

그에게 생태주의는 학문의 대상이 아니었다. 새롭고 신기한 학문이라서가 아니라 오래 전부터 자신이 마음속에 품어온 생각과 일치했기에 열렬히 공감하고 빠져들었다. 1년 만에 관련 서적, 자료들을 대량으로 복사해 돌아왔다.

그러나 곧바로 생태주의운동을 시작할 순 없었다. 모두들 반독재 투쟁과 노동운동에 뛰어들어 피 터지게 싸우고 있는데 뜬금없이 생태주의니 녹색운동이니 하는 엉뚱한 소리를 꺼낼 수가 없었다. 친근한 사람들과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며 거의 10년의 세월을 기다렸다.

마침내 『녹색평론』을 창간한 것은 노태우 정권이 들어선 뒤인 1991년 가을이었다. 그리고 한국에서 녹색당 결성을 돕느라 전국을 뛰어다닌 것이 다시 21년이 지난 2012년이었다.

 

4. 생태주의에서 추첨제 민주주의까지

『녹색평론』을 창간한 이후 26년의 세월 동안 김종철이 해 온 일과 주장한 바가 너무 많아 이 지면에서 다 다룰 수는 없으니 간략한 흐름만 살펴보자.

생태주의운동은 이제 따로 설명을 하지 않아도 될 만큼 널리 알려졌다. 26년 전 『녹색평론』이 창간되었을 때만 해도 다들 생태주의를 낯설고 신기하게 여겼으나 이제는 환경운동 단체가 한두 개가 아니고, 대학마다 녹색사상에 관한 강좌가 빠지지 않고 설치되었을 정도로 생태주의는 일반적인 흐름이 되었다. 생태주의에 대한 김종철의 생각은 다소 길지만 계간 『사람의 문학』 2007년 여름호의 인터뷰를 인용하는 것으로 대신하자.

사실은 마르크스도 『자본론』에서 농촌과 대도시의 분리로 인한 이른바 ‘물질대사 균열metabolic rift’이라는 현상에 주목했어요. 자본주의 문명이 확대되면 사람들이 대도시로 몰려들고, 그 많은 사람들의 먹을 것이 결국 농촌으로부터의 약탈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그 약탈에는 농경지의 양분을 빼앗아 먹기만하고 되돌려 보충해 놓지 않는다는 의미도 있어요. 지금 우리 생활이 바로 그렇지요. 옛날 같으면 전부 땅에 도로 넣어 주었을 인간이나 동물의 배설물이 지금은 모두 강으로, 바다로 흘러들어가 버리잖아요. 그래서 농경지의 질은 갈수록 열악해지고, 그래서 화학비료, 농약을 점점 더 많이 쓸 수밖에 없는데, 그렇게 되면 결국은 땅이 사막으로 변해 버려요. 그리고 인간이나 동물의 배설물은 기본적으로 영양분 덩어리인데, 이게 강과 바다로 마구 들어가니까 부영양화 현상이 생기고, 적조현상이 생겨서 수중 생태계를 파괴하고 있잖아요. 이게 지금 사람들이 말하는 발달된 현대 문명이란 거예요. 마르크스가 이런 점을 일찍 주목한 것을 보면 역시 예리한 사람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마르크스를 선구적인 생태론자로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하여간 그동안 공업화를 위해서, 그리고 보다 나은 선진적인 문명화를 위해서 농촌의 희생은 불가피하다는 식으로 생각해 온 소위 진보적 지식인들도 깊이 반성해야 해요. 그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문명이란 결국은 사상누각이고 신기루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더 늦기 전에 제대로 인식할 필요가 있어요. 나는 인간 사회에는 진보라는 게 있다고 믿지 않아요. 단지 변화가 있을 뿐이지요. 어딘가 최종 목적지를 향해서 좀 더 진보해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전제가 있기 때문에 무조건 오래된 것보다는 새 것이 좋고, 농경사회를 버리고 선진 공업화, 정보화사회로 가야 하고, 국민소득 2만 달러에서 3만, 4만 달러로 가야 한다는 맹목적인 믿음이 계속되고 있거든요. 사람들끼리 비록 가난하더라도 서로 돕고 상부상조하면서 사는 게 제일 큰 행복이라고, 선현들이 끊임없이 가르쳐 왔는데도 불구하고, 덮어놓고 경제성장을 하고, 돈을 많이 가져야 행복해질 것이라고 하는 아무런 합리적 근거도 없는 신화적인 논리가 계속 활개를 치는 것도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이고요. 나는 소위 발전사관이라는 게 우리의 삶을 근본적으로 훼손해 온 파괴의 사상적 원천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요. 정말로 인류의 미래를 생각할 줄 아는 지식인이 되려면 우선 그러한 발전사관을 과감히 내던질 필요가 있어요.

2012년 2월 26일 충남녹색당 창당대회에서 격려의 이야기를 전하는 김종철. (출처: http://blog.ohmynews.com/onechuri/tag/%EC%B6%A9%EB%82%A8%EB%85%B9%EC%83%89%EB%8B%B9)

이런 주장이 처음 나왔을 때, 아니 현재까지도 현실에 적용되지 못할 몽상이라고 비판하는 이들이 많았다. 대학 시절의 은사이기도 했던 백낙청 교수 같은 이도 “산업문명에서 소위 공생 공락하는 그런 사회로 어떻게 돌아가느냐? 너무 비약해 버렸지 않았느냐?”고 지적한다.

이에 대한 김종철의 답은 훨씬 폭이 넓다. 예컨대 20세기 초반 일본의 진보적 지식인들이 전쟁에 반대하고 군국주의를 비판했다고 해서 전쟁을 막을 수 있던 건 아니다. 그러나 어두운 시대를 사는 지식인으로서 그런 식으로라도 저항의 흔적을 남겨 놓음으로써 후세를 위한 본보기가 될 수 있었고 후세는 그들의 주장을 실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우리는 대개 효과를 먼저 따져요. 성공하지 못할 걸 왜 시작하느냐는 거지요. 근데 성공 여부가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사람이 자기가 올바르다고 생각한 대로 살아 보려고 성실한 노력을 계속하면 그게 성공이에요. 지금 우리는 대체로 생각하는 게 너무 왜소해요. 당장에 성과가 날 일이 아니면 안 하려고 하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본래 이렇지는 않았잖아요?”

당장의 성과를 따지고 성공 여부에만 집착하는 자본주의식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자는 그의 주장이 갈수록 더 많은 사람의 공감을 얻고 있음은 분명하다.

기본소득도 몇 해 전에 처음 의제로 내세울 때는 보수파들은 물론이요 좌파들조차도 ‘누구에게나 기본생활비를 지급하면 누가 열심히 일을 하겠냐. 비현실적인 공상이다’ ‘현실을 개선하기 위한 대중의 투쟁력을 약화시킬 것이다’ ‘부르주아를 강화시키는 개량주의 정책이다’ 등등 비판해 댔는데, 이제는 좌파는 물론 보수 일각에서도 주장할 정도로 보편화되고 있다.

먼 미래를 지향한 이상주의 운동이라고 볼 수 있는 생태주의적 사고에 극히 현실적인 운동인 기본소득을 포함하게 된 이유에 대해, 김종철은 이번 만남에서 이렇게 말했다.

“생태주의사상은 이제 꽤 널리 확산되었습니다. 그러나 생태적으로 친화적인 사회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현할 것인지 생각하다 보면 역시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 안 되면 아무것도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기본소득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지요.”

하지만 그는 기본소득운동을 무슨 복지 문제 해법 차원의 이익 운동으로만 보는 좁은 시각은 뛰어넘어야 한다고 말한다.

“기본소득에 대한 사회적 인지도는 재작년이 다르고 작년이 또 다를 정도로 갈수록 높아지고 있어요. 하지만 대개는 기본소득을 일종의 생활보조금, 복지의 일부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그런 성격을 갖고 있기도 하지만, 나는 기본소득이라는 아이디어에는 우리의 삶 자체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혁명적 잠재력이 내포돼 있다고 생각합니다.”

최근에 제시했으나 아직 널리 공론화되지는 않은 의제인 ‘추첨제민주주의’는 아마도 지금까지 발의했던 어떤 주제들보다도 비현실적이고 실현 불가능한 주장이라고 매도될 가망이 높다. 선거제 민주주의가 정착한 지가 언제인데, 이 엄청난 인구와 복잡한 이해관계를 무시해 버리고 제비뽑기로 지도자를 선발하자니, 이보다 더 황당한 주장이 있을까?

그러나 ‘실현 가능성’ ‘성공 여부’ 같은 잣대로 모든 것을 판단하려는 사고방식으로는 결코 김종철의 주장들이 담고 있는 본원적인 의미를 깨달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추첨제로 가자는 식의 선언만 던져 놓는 것은 아니다. 자신도 요즘 왜 고대 아테네 시민들이 제비뽑기라는 방식을 택하게 되었는지, 나중에 왜 선거 민주주의로 바뀌게 되었는지를 연구하고 공부하는 중이다.

“공부를 하다 보면 역사의 현장은 언제나 있는 자와 없는 자의 싸움이더군요.”

추첨제 민주주의에 관해 이번 인터뷰에서 나눈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긴 시간이었음에도 너무 많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이 부분은 충분한 취재를 하지 못했다. 근년에 그가 강연이나 글을 통해서 이야기해 온 추첨제 민주주의의 중요성을 요약하자면 아마 다음과 같이 될 수 있을 것이다.

2015년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주최 기본소득학교 특강에서 강의 중인 김종철 (출처: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사람들은 민주주의라고 하면 보통은 선거를 생각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선거를 하면 거의 반드시 기득권층, 즉 명망가나 재산가(혹은 재산가의 비호를 받는 자)가 당선되기 마련이다. 트럼프 같은 질 낮은 인간이 대통령이 될 수 있는 것도 선거제도가 가진 본원적인 한계에 기인한다. 선거를 통해 뽑힌 ‘엘리트’ 중에는 물론 양심적인 사람도 있지만, 결국은 계급적 이해관계를 넘어서지 못하는 게 대부분이다. 그런데 민주주의란 원래 민중이 자신의 삶을 자율적으로 통제하는 정치시스템을 뜻한다. 그래서 다수 민중이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자면 소위 엘리트들에게 정치를 맡겨 놓아서는 안 되고, 민중의 집단적 지혜를 결집하고 사회 전체의 이해관계를 고르게 반영하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최근에 들어 ‘숙의 민주주의’가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은 그런 까닭이다. 즉 시민들 중에서 추첨을 통해 일정한 수의 대표자를 뽑아 실제로 회의가 가능한 회의체를 구성하여 거기서 충분하고 철저한 토론과 숙고를 거쳐서 결론을 내리는 방식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추첨을 통해 무작위로 대표자를 뽑는다는 점이다. 마치 미국의 형사 법정에서 배심원을 뽑는 원리와 같다. 이 방법은 원래 고대 아테네 민주주의의 핵심적인 작동 기제였다. 추첨으로 뽑힌 대표자는 어떤 특정 집단이나 특권층의 앞잡이 노릇을 할 이유가 없고, 충분한 자료를 숙지하고 전문가들의 조언을 들으면서 가장 공정하고 객관적인 판단을 내릴 조건을 구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지금 세계는 기후변화를 비롯하여 수많은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난제들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데, 이것들이 합리적으로 안 풀리는 이유는 세상을 이 지경으로 도탄에 빠트려 온 장본인들, 즉 기득권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치가들에게 의사 결정권이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 불합리한 상황을 타개하고, 민주주의를 질적으로 높이기 위해서는 추첨제 민주주의의 제도화가 꼭 필요하다.’

김종철 선생을 면담하면서 든 생각은 세상을 바꾸는 것은 경제나 정치 혹은 과학이 아니라 인문학적 상상력, 아니 문학적 상상력이 아닐까 하는 거였다. 앞으로 달려가기만 하는 저들이 빚어 놓은 난제들을 고민하고 해결하려 노력하는 것이 인문학의 역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김종철은 분명 끝을 모르고 질주하는 현대 문명의 비극적 종말을 막기 위해 노력하는, 그중에도 몇 안 되는 창조적 현자의 한 사람이다. 그의 진단과 주장이 비현실적으로 보인다는 것은 우리의 현실이 본질적인 행복으로부터 너무 멀리 벗어나 버렸다는 뜻이다. 그가 제시하는 원칙과 원리가 가슴을 뜨끔하게 하고 때로는 귀찮을지라도 깊이 귀담아 들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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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녹색평론』 발행인 김종철을 만나다 / 안효상,『월간 좌파』 2014년 12월호(제2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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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정당운동의 산증인, 노회찬

안재성 소설가

 

1. 조봉암을 닮은 사람

시원한 장마가 시작될 시기지만 지독한 가뭄이 끝날 줄 모르는 2017년 6월 20일, 국회의사당으로 정의당 원내대표 노회찬 의원을 찾았다. 웬일인지 여우비도 아닌 성긴 빗방울이 살짝 지나가는 오후 시간, 의사당 입구부터 아는 얼굴들이 눈에 띈다. 오래 전 노동운동을 함께하다가 인권 변호사가 된 선배도 만나고 보도연맹유족회의 낯익은 노인들도 만났다. 시골에서 올라온 행색이 역력한 노인들이 제각기 가슴에 표찰을 달고 의원회관 안팎을 물결지어 돌아다니는 사이로, 얼굴을 알 만한 의원들이 나와 배웅하느라 바쁘다.

“의원회관을 찾는 민원인이 하루에 2만 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국회의원이란 게 쉬운 직업이 아니지요.” 노 의원도 바쁘다. 온종일 십 분 여유도 없이 면담이 계속된다. 특히 이날은 댓 군데 방송과 인터뷰가 잡혀 있을 정도로 바쁘다. 문재인대통령이 추천한 장관 후보들을 낙마시키려고 트집 잡기에 혈안인 보수정당들을 상대로 특유의 촌철살인으로 당사자인 민주당 의원들보다 더 잘 싸우고 있는 그에게 언론의 취재가 집중된 탓이다.

“국회를 민의의 전당이라고 합니다. 민의의 전당에서는 민의가 이겨야 합니다. 정당들끼리 의견이 다르다면 민의를 쫓아가면 됩니다. 소속 정당이 달라도 잘하는 건 잘한다고 하고 못하는 건 못한다고 해야지요.”

민주당이 하는 일이면 무조건 비난하고 발목을 잡는 보수세력이나, 잘하는 일에는 모르는 척하면서 못하는 게 없는가만 찾고 있는 날선 진보세력과는 다르다.

그래서인가, 노회찬을 보면 조봉암이 생각난다는 이들이 있다. 조선공산당의 창당 주역이었으나 현실 공산주의의 국가폭력에 반대해 처음으로 사회민주주의를 주창했던, 필요에 따라 이승만과 손잡고 토지개혁을 주도하기도 하지만 또 이승만 독재에 맞서 싸우다가 처형된 조봉암의 일생을 떠올리는 것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조봉암은 야만적 시대의 제물로 갔으나 노회찬은 3선 의원으로 활약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여섯 석밖에 안 되는 정의당의 원내대표지만 그 여섯 석도 우리나라 진보정당 현실에는 소중하다. 물론 그가 속한 정의당이나 그가 천명해 온 주장은 진정한 진보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또 다른 여러 진보정당이 존재하지만, 국회의원이 있는 유일한 진보정당인 것이 사실이다.

노회찬을 두고 한국 현대 진보정당사의 산증인이자 주역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노회찬은 1987년 12월 대선에서 처음으로 민중후보를 내세운 이들을 중심으로 창당한 민중의 당(1988년)을 주도한 이래, 민중당(1990년)으로부터 진정추(1992년), 민주노동당(2000년), 진보신당(2008년), 통합진보당(2011년)을 거쳐 현재의 정의당(2012년)까지 한 번도 진보정당운동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을 뿐더러 늘 주역의 하나였다. 돌이켜보면 그가 만들거나 속했던 진보정당들이 모두 그와 다른 정파들에 의해 장악되어 그는 밀려나거나 스스로 분당해 나왔다.

그럼에도 맨 처음 진보정당운동을 시작했고, 많은 동지가 자의든 타의든 물러난 상황에서 유일하게 국회에 진출한 정당을 이끌고 있으니, 그를 두고 현대 진보정당사의 산증인이라고 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다.

백기완 선생이 민중후보로 나서면서 시작된 진보정당운동이 올해로 꼬박 30년째다. 노회찬의 진보정당운동 시계와 똑같다. 지겹게 들어 온 멍청한 질문이겠지만, 왜 오로지 이 운동에 일생을 바치는가 물으니 이렇게 답한다.

“한 사람이 평생에 한 가지 일만 추구해도 이루기 힘든데 어떻게 여러 가지 일을 하겠습니까? 학창 시절에 결심한 대로 이 사회의 약자와 빈자의 권익을 위해 일생을 바치겠다는 저 자신과의 약속을 지킬뿐입니다.”

신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실천이다. 일부러 낳지 않은 건 아니지만, 노회찬은 아이조차 없는 극히 검소한 생활로도 유명하다. 그럼에도 노동자를 위한 일간지 『매일노동뉴스』를 10년간 운영하느라 빚더미에 앉아 오랫동안 신용불량자로 살아야 했다. 처음 국회의원이 되었을 때 은행에서 의원용 신용카드를 발급받으려다 조건이 안 된다며 거절당한 일화도 유명하다. 지금도 그는 전세살이를 하고 있다. 삶과 사상이 일치하는, 이 변치 않는 무욕의 삶이 지금의 그를 있게 했을 것이다.

흔들리지 않음, 편향되지 않음, 재치 넘치는 특출한 표현,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욕심 없음 등등으로 표현되는 이 노회찬 특유의 인성은 어디서부터 비롯되었을까? 진보 진영 인사들은 대개 운동 경력만 내세울 뿐이다. 개인사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잡지에 이 꼭지가 만들어진 이유이기도 하다. 노회찬 의원이 부산 태생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도 많지 않을 것이다. 경상도 말은 억양이 강해서 고향을 떠나고 수십 년이 지나도 출신지를 숨기기 어렵다. 그런데 노 의원의 말투에서는 경상도 억양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 이유부터 물어보았다.

 

2. 첼로 연주하는 아이

아버지의 이력부터가 독특하다. 아버지 노인모 씨는 이북 출신이다. 일제 치하에서 흥남에 있는 조선질소비료라는 공장의 노동자로 일하다가 징병으로 끌려가 고생하고 돌아와서는 원산의 도서관에서 사서를 하던 문학예술의 열렬한 애호가였다. 6·25 때 부산으로 피난 내려와 초량동 산동네에 살면서 원태순 씨와의 사이에 셋을 낳아 키웠다.

노회찬은 위로 누나를 둔 맏아들로, 1956년 8월에 태어났다. 부모가 이북 말을 쓰니 노회찬도 자연히 이북 억양에 익숙해졌다. 노회찬이 부산 출신임에도 남과 북이 합쳐진, 어디 출신인지 짐작하기 어려운 특이한 억양을 가진 이유다.

초량동 산동네는 전쟁 피난민들이 많이 살던 빈민촌으로, 무허가로 얼기설기 지은 판잣집이 대부분이었다. 노회찬의 다섯 가족은 그나마 집도 없이 방 한 칸을 세 내어 살았다. 부산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진학할 때까지 그 집에 살았으니, 노회찬의 부산 생활은 초량동 빈민가의 셋방살이가 전부다.

산비탈 판잣집에서 셋방살이를 했어도 마음만은 빈곤하지 않은 가족이었다. 문화적으로는 다른 어느 가정보다도 풍요로웠다. 박봉이나마 안정된 수입이 있기도 했지만, 아버지가 자녀들에게 물질적 욕망보다는 문학예술을 사랑하도록 인도했기 때문이다. 방이 두 칸으로 늘자 암실부터 만들어 스스로 찍은 사진을 인화하던 멋쟁이 아버지였다.

“살림은 가난했어도 정신적으로는 풍요로웠어요. 아버지는 저에게 문학과 예술에 눈을 뜨게 해 준 분입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가 독서하는 것을 보고 배워서 밥을 먹으면서도 책을 읽을 정도였는데, 중학교 들어가니까 아버지가 전축 앞에 불러 놓고는 너도 이제 중학생이니 이걸 들어야 한다면서 베토벤의 <운명>을 틀어 주세요. 백 번은 더 들었을 거야. 토스카니니가 지휘하는 연주였는데, 처음에는 머리가 깨지는 줄 알았는데 나중에는 심취하게 되었죠.”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그 가난한 살림에 남편과 비싼 오페라 공연을 다니던 이였다. 월남을 하기는 했으나 북한에서 살면서 사회주의 교육의 좋은 점을 보았기 때문일까? 노회찬이 중학교에 들어갈 때가 되자 어머니가 먼저 나섰다. 아무리 형편이 어려워도 사람은 악기 하나는 다룰 줄 알아야 한다며 고르게 했다. 누나는 피아노를 택했고, 노회찬은 바이올린보다 큼직한 것이 배우기 쉬울 듯해 첼로를 택했다.

연습용 첼로는 가격이 그리 비싸지 않았지만 사사가 문제였다. 부산에는 첼로 선생이 한두 명밖에 없던 데다 수강료도 엄청났다. 운 좋게도 부산시립교향악단 첼로 수석주자였던 배종구 교수에게 직접 배울 수 있었고 경기고등학교에 진학한 후에도 역시 좋은 교수를 만났다. 다른 학생들과 달리 대학 진학을 위해 배우는 게 아니라 음악을 사랑해서 배우려는 것을 안 두 교수는 거의 돈을 안 받고 가르쳐 주었다. 그러나 재능은 없음이 분명하다. 그는 유쾌하게 웃으며 말한다.

“그분들께 꽤 여러 해 배웠는데 열심히 하라는 말만 잔뜩 들었지, 너는 재능이 있다고 말하신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그 대신에 제가 리코더는 아주 잘 불었어요. 무슨 노래든 듣기만 하면 즉석에서 악보로 옮겨 불 정도였지요.”

어렵게 배운 첼로 솜씨로 경기고등학교 재학 중 이화여고 축제에 초대 받아 3천원의 출연료까지 받고 공연한 적도 있었다. 첼로를 배우며 음악에 심취해, 당시 서울의 낭만파 학생이라면 필수적으로 출입하던 고전음악 감상실 르네상스에도 드나들고, 서정주의 시를 가사로 삼아 직접 작곡해 본 적도 있었다.

음악만이 아니었다. 문학, 철학 등 모든 분야의 책을 열독했고 영화도 무척 좋아해서 고등학교 때는 한 해 개봉된 모든 영화를 보러 다녔다.

책상물림의 샌님이 아니었다. 삼육국민학교, 부산중학교 다니는 내내 한 해도 빠지지 않고 반장을 했다. 아이들을 몰고 다니며 골목대장 노릇도 하고 중고등학교 때 선생들이 부당하게 굴면 바로 대들어 싸우기 일쑤였다.

“중학교 때부터 그랬고 고등학교 내내 그랬어요. 조금이라도 부당하다 싶으면 못 참고 선생님한테 바로 대들어서 엄청 많이 맞았습니다. 대걸레 자루로 엉덩이 맞기, 주먹으로 얼굴 맞기, 꽃병으로 머리두들기기 등등 정치나 학원이나 폭력이 일상이던 시절이었는데도 계속 반항했죠.”

잘못된 일에는 반항을 하되 상대방에 대한 기본적 애정과 존중심을 잃지 않는 그의 특징은 그때도 나타난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세계사 선생이 미국 인디언에 대해 무슨 이야기를 했는데 아이들이 피식거리며 동조를 하지 않자 “너희는 텔레비전도 못 봤냐?”고 성질을 냈다.이에 아이들이 전부 못 봤다고 하자 속 좁은 선생은 못 본 놈 나오라고 고함쳤다. 겁난 아이들은 아무도 나가지 않는데 노회찬이 혼자 나갔다. 자취방에는 진짜 텔레비전이 없었던 것이다. 시키는 대로 했을 뿐 인데도 대든다고 생각한 선생은 무자비하게 뺨을 때리기 시작했다. 억울한 일이었다.

“정말 무한대로 맞았어요. 싸대기를 양쪽으로 무한대로 맞고 나니까 기분이 좀 그랬죠. 선생님이 과도했고 어른답지 못하다, 그렇게 생각했지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괜히 폼을 잡아 선생님으로 하여금 학생을 때리게 만든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억울하게 맞고도 교무실에 찾아가서 ‘죄송합니다!’ 이랬어요. 그런데 선생님이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더라고요.”

아니다 싶으면 곧장 일어나 대드는 성격은 이후에도 변치 않아 참 많이 얻어터지며 학창 시절을 보냈다.

운동도 좋아해서 중학교 시절부터 펜싱과 육상은 선수급이었다. 덕분에 고등학교 2학년 때는 무술을 잘한다는 소문이 나서 노 씨 성을 따 ‘노지심’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운동도 잘했지만 아마도 커다란 체구에 그보다 더 큰 머리통, 그리고 두려움을 모르고 옳고 그름을 지적하는 대범한 성격에서 붙여진 별명이 아니었을까 짐작된다. 오늘의 그가 보수와 진보 양쪽의 공격을 개의치 않고 ‘민의’라는 상식적인 눈높이에서 나오는 소신 발언을 계속하는 이유를 알 만하다.

성격이 이렇다 보니 사회운동도 퍽 일찍 시작했다. 아는 선배의 영향을 받거나 학습 서클에 들어가 배운 게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고 주도했다. 경기고등학교 1학년이던 1973년의 일이니 참 조숙했다.

 

3. 인생의 미스터리들

인생이란 묘한 우연에 좌우되기도 한다. 나이대로 하면 1972년에 부산고에 입학해야 했던 그가 재수를 하고 한 해 늦게 경기고에 들어간 것은 그의 인생의 한 미스터리다. 지역의 명문이던 부산중학교에서는 넷 중 세 명이 부산고등학교에 들어갔다. 그런데 전교 10등 밑으로 내려가 본 적이 없던 노회찬이 낙방을 하고 만 것이다. 정말 이유를 알수 없었다. 평소 경기고에 가고 싶기는 했지만, 일부러 시험을 망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가족에게서 오해를 받는 것도 싫고 부끄럽기도 하여 고등학교를 아예 포기하겠다고 주장하는 그를 아버지는 서울로 보내 재수를 하게 했다.

“서울에 온 게 내 인생에 가장 큰 전환점이 된 거죠. 부산에 있었으면 아마 내가 이 길로 안 들어섰을 겁니다. 반항심만 극대화된 채 친구들과 어울려 이상한 길로 빠졌을 겁니다.”

어쨌든 전국의 수재가 모여든 경기고에 들어가자마자 그는 또 다시 인생의 전환을 맞는다. 이번에는 스스로 원해서 택한 길이었다.

한창 재수를 하고 있던 1972년 10월, 박정희는 소위 유신헌법을 선포해 ‘영구 대통령’의 길을 연다. 이건 분명 교과서에 나오는 민주주의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노회찬을 분개시킨 것은 국회를 해산시켰다는 점이었다.

“중학교 3학년 교과서에 나와요. 국회는 해산시킬 수 없다고. 그런데 국회가 해산됐다는 거야. 내가 잘못 알고 있는가 해서 책을 다시 봤어요. 확실히 잘못된 거라. 나는 그 다음 날 엄청난 데모가 일어날 줄 알았어. 국회가 해산됐으니까. 그런데 아닌 거야. 멀쩡한 거야. 이게 지금 뭐냐, 가만히 있으면 어떻게 하냐, 이래 가지고 어린 나이에 저항을 시작한 거죠.”

정부 발표는 일체 신뢰하지 않게 된 대신 『월간 다리』를 구독하고, 강제 폐간된 『사상계』를 청계천 헌책방에 가서 권당 30원씩 한 보따리씩 사다가 읽었다. 논문도 있고 논조도 어려워 이해할 수 있는 글이 별로 없었지만 열심히 읽었다.

재수 시절 혼자 그렇게 끙끙 앓고 지내다가 경기고에 들어가니 정광필, 이종걸 등 마음을 나눌 친구들이 몇 명 생겼다. 똑똑한 친구들과 독재에 대한 분노를 공유한 노회찬은 유신 체제를 비판하는 유인물을 제작해 학교에 배포하자고 제안했다. 다들 흔쾌히 응했다.

글은 노회찬이 썼으나 등사가 문제였다. 철필로 긁으면 공신력도 없거니와 글씨체가 드러나 체포되니 타자를 쳐서 등사하기로 했다. 타자기가 귀한 시절이고 칠 줄도 몰랐다. ‘청타’라 해서 푸른 등사 원지에 타자를 쳐 주는 몇 군데 청타집을 찾아다녔으나 원문을 읽어 보고는 즉석에서 거절하는 것이었다. 신고당하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겨우 한 군데 청타집에 사정해서 타자를 친 다음, 공범 중 한 명이 다니는 부천의 한 교회로 갔다. 전철이 없던 시절이라 완행 기차를 타고 소사역에 내려 밤중에 몰래 교회에 들어가 등사를 시작했다. 그런데 한참 등사 중일 때 목사가 불쑥 들어왔다. 밤중에 불이 켜진 것을 보고 온 것이었다.

“이제는 다 끝났구나, 신고를 당해 감방에 가고 학교에서 퇴학당하겠구나 생각했지요. 근데 목사님이 우리가 등사해 놓은 유인물을 한 장 집어 들고 죽 읽어 보더니 다시 내려놓고는 단 한 마디도 않고 나가서 문을 닫아 주는 거라. 참 고마운 목사님이었지요.”

무사히 1,200장 정도를 등사한 일행은 아무도 없는 시간에 학교에 들어가 책상 속에 한 장씩 넣어 두었다.

읽어 본 학생들이 웅성거리며 찬동하자 학교가 뒤집어졌다. 학교측은 학생들의 집단행동을 우려해 즉시 조기 방학을 선포하고는 모두 집에 가라고 내몰았다. 학생들이야 방학이 당겨졌으니 신이 나서 누가 뿌렸는지 몰라도 고맙다고 떠드는 것이었다. 경찰이 정문부터 학교를 빙 둘러 감싸고 있었지만 문제가 더 확대되지는 않았다.

이 일을 통해 규합된 친구들에게 노회찬은 기초부터 공부하자고 제안했다. 아무런 사회과학적 지식이 없는 상태로 선택한 것이 철학이었다. 지금은 없어진 종로서적에 가서 하드카버로 된 두꺼운 『세계철학사』를 사서 공부를 시작했다. 옛 소련의 아카데미에서 출간한 세계철학사와는 아무 상관없는, 플라톤이니 칸트가 등장하는 부르주아철학사였다. 도움이 될 리도 없고 재미도 없어 얼마 안 있어 포기하고 『다리』, 『사상계』를 함께 보는 시사 모임으로 바꿨다.

이듬해인 1974년 4월 3일은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이란 이름으로 전국의 주요 대학과 고등학교에서 공동으로 시위를 벌이기로 기획한 날이자, 박정희가 군대를 동원해 대학가에 위수령을 내리고 민청학련 관련자는 사형까지 내릴 수 있는 긴급조치 4호를 발표한 날이었다.

아침에 등교하던 경기고 학생 하나가 교문 밖에서 어떤 대학생이 선생님 주라며 준 서류 봉투를 받아다가 교탁 위에 올려놓았다. 선생님이 오기 전에 학생들이 열어 보았다. 유신 반대를 선동하는 민청학련 명의의 유인물이었다.

노회찬은 교실 문을 잠가 선생님들의 진입을 막고 큰 소리로 유인물을 낭독했다. 학생들은 박수를 치며 동조했고 즉석에서 독재 정부를 규탄하는 시사 토론회가 열렸다. 학생들의 수업 거부와 농성이 학교 전체로 퍼져나가자 학교 측은 또 다시 휴교를 선포했다. 교실에 들어갈 수 없게 된 학생들은 노회찬을 중심으로 도서관에서 시사 토론을 이어 갔다.

경기고 학생들의 이날 수업 거부는 전국이 공포로 얼어붙은 당시로서는 큰 사건이었다. 민청학련이란 이름으로 기획되었던 이날의 시위는 대부분 실패해 버렸는데 뜻밖에 고등학교에서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이 두 사건 외에도 고등학교 시절의 저항의 무용담이며 문화예술과 관련된 일화는 무궁무진하다. 자연히 좋은 성적을 유지할 수는 없었다. 서울대 철학과에 지원했으나 낙방하고 곧바로 입영 영장을 받는다. 베이비붐 시대라 웬만하면 현역병에서 제외될 때라 눈이 나쁘다는 이유로 보충역, 이른바 ‘방위’가 되었다.

1978년에 제대하고 다시 입시를 치러 고려대학교 정치외교과에 합격했다. 동갑내기들은 대개 75학번인데 4년 늦은 79학번이 된 것이다.

“대학에 간 이유는 오로지 데모를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고등학교 때 이미 혁명을 꿈꾸고 있었으니까요. 친구들이 대학에서 데모를 주동하다 보니 대학에 가기 전에도 벌써 몇 번 경찰서에 끌려가서 조사를 받기도 했고요.”

신입생이라지만 벌써 졸업했을 나이인 데다 이미 고교 1학년부터 경력이 화려한 그가 들어오자 학교에서는 선배이던 친구들이 곧바로 그에게 ‘이념 서클’을 맡겼다. 1학년이 지도하는 특이한 모양새가 된 것이다.

유신 독재의 마지막 해이던 1979년부터 시작해 4년 내내 마음껏 데모를 했다. 여러 이념 서클을 지원하고 고려대 처음으로 학회를 만들어 지도하는 등 학생이 아니라 ‘직업운동가’로 살았다.

이렇게 열심히 학생운동을 했으나 그는 학생운동이야 지나가면서 자동으로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나머지 긴 인생은 노동운동에 바치기로 했다. 그렇지 않아도 광주항쟁을 목도한 많은 대학생이 정치운동만으로는 사회를 바꿀 수 없다는 절박감으로 노동, 농민, 빈민 등 기층민중운동을 지향할 때였다.

성적과 취업에 목숨이 걸린 요즘과 달리 대학의 성적 관리가 느슨하던 시절이었다. 특히 운동권 학생이라면 출석을 거의 안 해도 시험만 치르면 학점을 주어 어서 졸업시켜 버리려 했다. 노회찬은 4학년이 된 1982년 서울기계공고 부설 영등포청소년직업학교에 등록해 전기용접기능사 2급 자격을 취득하고 현장 취업에 나섰다. 학교는 시험만보러 가서 졸업장은 받았다.

처음 취직한 곳은 인천에 있던 현대정공의 하청 공장이었다. 노동운동을 하려면 본인이 직접 노동자로 평생을 살아야 한다는 러시아혁명기의 인민주의적 분위기 속에 3년 가까이 열심히 공장에 다녔다. 이 3년간 받아 본 월급이 20여년 후 국회의원이 되기 전까지 받아본 거의 유일한 정규적 수입이었다.

노동자 생활은 오래 가지 못했다. 그가 공장에 다니는 동안, 대학생들 사이에는 현장 취업의 열풍이 불어 1985년쯤에는 전국에 위장 취업자가 만 명은 되리라는 말까지 돌았다. 출신 학교에 따라 소그룹을 만들거나 개별적으로 공장에 흩어진 이들을 전국적으로 조직하는 작업이 필요했다. 그렇지 않아도 수차례 시위를 주동하느라 경찰의 추적이 시작되어 공장에 다닐 수도 없게 되었다.

경찰은 그에게 공식적으로 수배령을 내렸고, 7년간의 기나긴 지하활동이 시작되었다. 정기 수입이라곤 없이 도대체 어떻게 먹고 살았는가가 알 수 없는, 그의 인생의 또 다른 미스터리가 시작된 것이다.

 

4. 인민노련에서 정의당까지

보수파가 이미 확보한 현실을 지키려는 사람들이라 이권다툼만 한다면, 진보파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상상해야 하니 논쟁이 필연적이다.

노회찬도 알게 모르게 우리 진보운동을 좌우한 중대한 논쟁과 이합집산의 한복판에 있던 인물이다. 독자적 진보정당을 만들 것인가 말것인가, 민족문제인가 계급문제인가, 사회주의인가 사회민주주의인가 등의 논쟁으로 야기된 주류 운동권의 분열 또는 연합을 이끌어 낸 사건들마다 그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이 논쟁들의 시원을 거슬러 올라가자면 ‘인민노련’이라는 약칭으로 더 잘 알려진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이라는 큰 바위를 만난다. 70년대 운동가들이 반파쇼 민주주의운동이라는 큰 틀 안에서 별다른 논점 없이 뭉쳐 있었다면, 잇달아 사회주의와 주체사상이 유입된 80년대 운동은 그 벽두부터 온갖 정파의 난립과 논쟁과 파쟁으로 얼룩졌다. 나쁜 의미든 좋은 의미든, 활동가들은 어딘가에 소속되거나 혹은 소속되기 위해 수백 종은 될 팸플릿을 읽고 밤새 논쟁을 벌여야 했다.

인민노련은 1986년부터 인천, 주안, 부천 등 경인 지역에서 활동하던 위장 취업자들이 결합해 투쟁을 전개하다가 1987년 6월 항쟁의 와중에 공식적으로 결성을 선포했다. 지도부는 노회찬, 주대환, 최봉근으로 구성되었는데 모두 민중민주주의적 성향(이른바 ‘피디PD’)이 강한 인물들이었다. 그래서인지 결성 직후 주체사상파를 포함한 민족해방 진영(이른바 ‘엔앨NL’)이 일방적으로 이탈하면서 인민노련의 성향은 더욱 선명해졌다.

인민노련은 당시 유행처럼 번지고 있던 주체사상파와 제헌의회파를 양 극단의 교조주의로 비판하며 실사구시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이에 양쪽으로부터 사민주의니 개량주의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으나 그 현실주의적인 노선은 인천뿐 아니라 전국의 활동가들로부터 상당한 지지를 확보해 나갔다. 탁월한 논객인 주대환, 최봉근, 황광우 등이 집필한 기관지의 영향도 컸다. 단시간 내에 정회원만 600명을 넘어서서 당시 전국에서 제일 큰 지하조직이라고 할 만했다.

노회찬 김지선 부부는 신영복 선생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덕에 결혼했다고 한다. 1994년 첫날 동해를 찾은 두 사람. (출처:노회찬 홈페이지)

 

인민노련에서 노회찬이 맡은 임무는 조직부장이었다. 그의 조직수완에 대해 주대환은 이렇게 증언한다.

“노회찬 씨는 자기주장을 먼저 내세우지를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서로 자기주장을 내세워 논쟁을 벌이도록 내버려 두고는 그중 다수를 차지한 주장을 선택해 자기 것으로 소화해 결론을 삼습니다. 자연히 큰 반발 없이 조직화에 성공합니다. 정략적으로 그렇게 한다기보다 본래 성품이 그런 사람이라고나 할까요? 타고난 조직가지요.”

조직 담당 중앙위원으로, 기관지 『사회주의자』 편집위원으로 인민노련을 이끌던 노회찬은 결국 수배 7년 만인 1989년 12월 24일, 성탄절 전야에 체포되어 2년 반의 옥살이를 해야 했다.

한편, 체포되기 1년 전인 1988년 12월에는 인천 지역의 다양한 노동자 조직에서 맹활약하고 있던 김지선과 결혼했다. 노회찬보다 한 살이 많아 1955년생인 김지선은 중앙여중을 졸업하고 16세 나이로 인천 대성목재 등 공장에 다니며 노동자로 일하다가 노동운동을 시작해 70년대에 두 차례나 구속된 적이 있는 맹렬한 활동가였다. 처음 보았을 때부터 그녀에게 반해 버린 노회찬은 둘이 처음 만난 자리에서 결혼하자고 구애했다가 거절당하는 등 적극적인 공세로 결혼에 성공한다.

둘 사이에는 아이가 없다. 혁명을 위해 안 가진 것이 아니라, 잇단 감옥살이와 수배 생활로 그럴 여유가 없다 보니 임신 적령기를 넘어 버린 것이다. 뒤늦게 한방과 양방을 다 동원해서 아이를 갖고 싶었지만 실패했다. 아이를 무척 좋아하는 두 사람은 입양이라도 하려고 신청했으나 집도 수입도 없다고 해서 자격 미달로 거절당했다.

1992년 석방되고 보니 인민노련을 주축으로 민중민주주의 계열의 여러 정파가 결합해 ‘진보정당추진위원회’, 약칭 진정추를 결성하고 있었다. 결성식에 5천 명이 모일 정도로 열의가 대단했다. 이미 1987년 대선에서 백기완을 민중 진영의 독자 후보로 내세운 주역이던 노회찬은 1992년 12월 선거를 맞아서도 백기완 선대본 조직위원장으로 활동했다. 선거 결과는 비참했다. 백기완은 1%밖에 얻지 못했고, 보수세력과 손잡은 김영삼이 당선되었다. 이에 많은 사람들이 진보정당운동을 포기하고 떠났지만 노회찬은 남았다.

진보정당 추진 세력은 우여곡절 끝에 1997년 민주노총, 전국연합 등과 합쳐 국민승리21을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이때도 노회찬은 진정추의 후신인 민중정치연합의 대표로 이를 주도했다. 국민승리21의 대통령 후보로 나선 권영길 역시 참패했으나 김대중의 대통령 당선으로 진보정당의 존립 여지는 넓어졌다.

이에 힘입어 2000년 1월에는 민주노동당을 결성했다. 이에 민족해방 계열도 대거 당에 합류하더니 다수파가 되었다. 이때부터 민족해방계열은 자주파로, 노회찬이 속한 민중민주계열은 평등파로, 권영길로 대변되는 중도파는 국민파로 불리게 된다.

운동권의 주류이던 자주파가 합류한 민주노동당은 2002년 지방선거와 2004년 총선에서 크게 선전했다. 비례대표 8명을 포함한 10명의 국회의원을 배출하여 조봉암의 진보당 이후 44년 만에 진보정당의 원내 진출에 성공한다.

2004년 선거는 노회찬에게도 처음으로 의원 배지를 안겨 주었다. 선대본부장을 맡았던 그는 당선되리라 예상하기 어려웠던 비례대표 8번으로 등재했는데 뜻밖에 턱걸이로 당선된 것이다.

선대본부장으로서 선거를 지휘하는 동안 그는 꼼꼼히 일지를 기록했다. 이는 ‘노회찬의 난중일기’라는 별칭으로 널리 알려졌고 『힘내라 진달래』라는 제목으로 제13회 전태일문학상 특별상을 수상했다. 한국 현대 노동운동의 기원이랄 수 있는 전태일의 이름으로 주어진 이상은 그가 받은 수많은 상 가운데 가장 가치 있는 상일 것이다.

초선 의원임에도 노회찬의 활약은 놀라웠다. 그는 국정감사의 피감기관이 뽑은 베스트 의원, 언론사 정치부 기자들이 뽑은 신사적인 의원, 시민운동가들이 뽑은 최우수 의정활동 1위, 방송국 피디들이 뽑은 최우수 의원 1위 등 여러 여론조사에서 최고의 인기를 얻는다. 출석률과 발언 등의 지표에서도 최우수 의원의 하나였고, 비정규직노동자 처우 개선 등 4년간 무려 467건의 법안을 발의해 31건을 가결시키는 등 입법 활동에서도 선두였다.

노회찬이라는 이름을 일반 국민들에게 널리 알리게 된 것은 이른바 ‘삼성 X파일’ 사건이었다. 1997년 대선 과정에서 안기부가 삼성그룹 이학수 부회장과 홍석현 『중앙일보』 사장의 통화를 불법으로 도청한 녹음테이프가 공개되었다. 그 속에는 삼성이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및 검찰 고위 간부들에게 거액의 뇌물을 뿌리며 인맥을 관리했다는 등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

‘삼성 X파일’과 관련한 2심에서 무죄를 받은 뒤 당시 진보신당 관계자들과 웃고 있는 노회찬. (출처: http://blacktv.tistory.com/501)

이 사실은 문화방송 이상호 기자가 먼저 방송을 통해 공개했는데 이때는 뇌물을 받은 검사들의 실명은 공개하지 않았다. 노회찬은 이에 해당 검사 7명의 실명을 공개해 불의 앞에 차별이 없음을 선포했다. 이에 검찰은 명예훼손, 「통신비밀보호법」 위반 혐의로 이상호 기자와 노회찬을 기소하고 나섰다. 길고 긴 재판 끝에 노회찬은 징역 6월에 자격정지 1년을 받아 국회의원 자격까지 잃었으나 2009년 2심에서 무죄판결을 받는다.

한편 2007년 12월, 다시 대선이 돌아왔다. 노회찬은 이 대선에 민주노동당 당내 경선에 나섰으나 국민파로 불리던 권영길에게 패했다. 북한 체제에 비판적이라는 이유로 평등파를 싫어하던 자주파가 집단적으로 권영길을 지지한 결과였다. 그러나 권영길은 처참한 득표로 패배하고 한나라당 이명박이 당선된다.

2007년 선거 후 민주노동당은 심각한 갈등에 빠져들었다. 주된 원인은 자주파 소속 간부 두 명이 민주노동당 당원 명단을 북한에 보고한 사건, 북한 핵실험에 대한 정파별 입장 차이, 당직 선거에서의 자주파의 전횡 등 대부분 자주파로 인한 것이었으나 자주파가 다수파로 주도권을 쥐고 있으니 개선이 어려웠다.

결국 노회찬은 2008년 심상정 등과 함께 민주노동당을 탈당해 진보신당을 결성하고 2009년 3월 단독으로 당 대표에 출마해 98%에 이르는 지지율로 당선된다. 이듬해에는 인민노련 동지이자 민노당 의원직을 함께 했던 조승수가 당대표로 선출되었는데, 다시 2010년 노회찬이 대표를 맡았다.

실패는 해도 실수는 하지 않을 듯 자기 관리에 엄격한 노회찬이 크게 실수를 하고 스스로 상처를 입은 사건은 2011년에 벌어졌다. 이 부분은 이번 인터뷰에서 이야기할 시간이 없었으므로 본인의 입장을 들어보지 못한 채 간략히 외부의 시선으로 정리해 보자.

진보신당은 2011년 들어 민주노동당과의 통합 논란에 휩싸인다. 2012년 총선을 앞두고, 진보신당의 역량만으로는 국회에 진출할 수 없으니 다시 민족해방 진영과 손을 잡자는 주장이 등장한 것이다.

이에 진보신당 당원의 다수가 반대했다. 민주노동당의 주류인 민족해방파와 이들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주체사상파와는 함께 할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일사불란하게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그들에 비해 기본적으로 자유로운 개인의 결합인 진보신당이 합류해 봐야 예전과 다를 게 없을 거라는 판단이었다. 결국 진보신당 대의원대회는 통합 안건을 부결시켰다.

그러나 노회찬은 대의원대회의 결정을 거부하고 심상정, 조승수 등과 함께 진보신당을 탈당해 새진보통합연대라는 조직을 만든다. 그리고 유시민이 이끌던 국민참여당과 함께 민주노동당과 결합, 통합진보당을 창당한다. 노회찬은 통합진보당의 대변인으로 선임되었다.

진보신당에서의 탈당을 두고 단순히 총선에서 당선되기 위한 것이라고만 폄하하기는 어려운 측면도 있는 게 사실이었다. 멋모르고 입당했다가 당원 게시판에서 일주일만 놀면 진저리를 치며 탈당해 버린다거나, 노무현을 지지했다가 입당한 사람에게는 반성문을 쓰게 한다는 등의 이야기가 나돌 정도로 경직되고 편협한 분위기가 지배하고 있던 게 사실이었다. 남자는 이래야 한다, 여자는 이래야 한다, 정치가는 이래야 한다는 식으로 상대방의 동의 없는 규칙을 창안해 놓고 이에 동조하지 않으면 적으로 규정하는 식의 오만과 편견이 진보운동권의 고질적인 허점인 것이 사실이다.

일단 통진당으로의 합류는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2012년 4월 11일의 총선에서 노회찬은 서울 노원 병 선거구에 출마해 두 번째로 당선되는 데 성공한다. 통진당은 노회찬 외에도 12명을 당선시키는 놀라운 성과를 이뤄냈다.

그러나 통진당은 선거 직후부터 극도의 혼란에 빠져 버린다. 당원 대다수가 이름도 모르고 있던 이석기가 비례대표 1번으로 선정되어 의원이 된 과정에 대한 반발로부터 시작된 분란은 한 달 후인 5월 12일 대의원대회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이 문제를 제기하던 유시민, 조준호 등이 소위 당권파 지지자 집단에 의해 공개적으로 폭행을 당하는 장면이 텔레비전을 통해 전국에 방송된 것이다.

이날의 폭력 사태로 노회찬, 심상정 등 다섯 명의 의원은 통합진보당을 탈당해 정의당을 만들게 된다. 그러나 노회찬은 삼성 X파일 사건으로 1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으며 당선 9개월 만에 의원직을 상실하고 말았다. 통합진보당도 2014년 결국 법원에 의해 강제 해산되어 의원 전원이 자격을 잃게 된다.

이 과정에서 노회찬은 본의 아니게 세 번이나 탈당하고 새 당을 만든 주역이 되고 말았고, 이로 인해 아직도 그를 비판적으로 보는 이들도 있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민주노동당 분당 사태 때나 진보신당에서의 탈당 사태 때나, 그는 최대한 당내 갈등을 완화시켜 통합을 유지하려 애쓴 인물로 평가되어 개인적 미움은 덜 받는 편이기도 하다.

2012년 10월 18일 진보정의당으로 창당해 2013년 정의당으로 당명을 바꾼 정의당은 구성원이 다양하다. ‘진보신당 탈당파’와 ‘통합진보당의 당내 패권주의와 종북 성향을 우려하던 혁신파’를 주축으로 시작된 정의당에는 진보신당의 후신인 노동당에서 추가로 탈당한 이들과 시민운동가들이며 소위 메갈리아 논쟁을 촉발한 여성주의자들까지 대거 합류해 있다.

왜 진보세력의 역량을 통합하지 않고 이합집산을 되풀이하는가 하는 비판은 일면의 진리만을 담고 있다. 좌파는 분열로 망한다는 말도 옳은 말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오지 않는 미래에 대한 상상과 계획은 무수히 많은 경우의 수로 나눠지는 게 정상이다. 유럽이나 남미처럼 진보세력은 평소에 녹색당, 사회당, 사민당, 기민당, 공산당, 좌파당 등 각자의 이론에 따라 별개의 정당으로 존재하는 것이 오히려 현실적이다. 억지로 통합시켜 끊임없는 분열상을 노출할 필요가 없이 평소에는 각자의 지론대로 나뉘어 활동하다가 선거 때 연합공천으로 뭉칠 수 있다. 공동 투쟁 사안이 생기면 또 뭉쳐 함께 싸울 수 있다. 무조건 뭉쳐야 한다, 무조건 통일되어야 한다는 말처럼 폭력적인 것도 없다. 이 세상에 단 하나의 진리가 있다는 믿음처럼 무서운 파시즘도 없다.

2016년 총선에서 노회찬은 창원성산에 출마해 더불어민주당 등 야권 후보와의 경선을 통해 단일후보로 확정되었고,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였던 문재인도 ‘야권 단일 후보’ 노회찬의 선거운동을 도왔다. (출처: http://gndomin.com/news/articleView.html?idxno=107829)

 

노회찬의 길이 항상 옳았다고 할 수도 없지만, 항상 옳은 단 하나의 진리의 길이 따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노회찬이든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이든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이든, 시기와 사안마다 옳다고 판단되면 서로 지지하고 틀리다고 판단되면 비판하면서 큰 길을 함께 걷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

노회찬 자신은 이런 문제에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을까? 영화감독 변영주와의 인터뷰에서 한 말을 인용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끝맺자. 진보신당 대표를 하던 2010년의 녹취록이다.

“진보를 좋아하고 진보를 지향하는 사람들 속에 가장 부족한 것이 다원주의, 다양성에 대한 이해와 관용의 태도라고 생각을 합니다. 자기하고 견해가 다르면 그것이 작은 일이든 큰 일이든 선을 확 그어 버리는 거죠. 저는 진보가 진보답지 않으면 보수를 이길 수 없다고 봐요. 자기가 지향하는 가치가 진보라는 이유로 자신의 모든 것이 다 합리화 될 순 없는 것이고, 끊임없이 진보는 진보적인 방식으로 풀려고 노력해야 하는데 오히려 바깥에서 진보세력을 볼 때 편협해 보이는 것이 현실이고 이것이 전혀 근거가 없는 건 아니라는 것이죠. 물론 과도하게 비판하는 면도 있지만 우리가 근거를 제공했다는 거죠. 이 싸움은 끝이 없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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