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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 신세대, 신지예

안재성 소설가

 

1. 변화는 어디서부터 시작되는가?

당년 29세 여성. 역대 서울특별시장 선거 최연소 후보인 녹색당 신지예 후보의 이력은 남다르다. 이번 2018년 6월 13일에 실시되는 제7회 지방선거에 출마하는 후보들마다 무슨 대학이니 무슨 고시 출신이니 하는 상투적인 관록을 내세우느라 바쁘다. 그런데 다르다. ‘하자학교’ 출신과 ‘오늘공작소’ 대표다.

보통 사람들은 잘 이해 못할 이 짧고 명쾌한 이력만 보아도 신지예가 처음부터 기성의 문화나 제도와는 다르게 인생을 시작한, 그야말로 신세대 중의 신세대임을 알 수 있다. 이름 지어 ‘녹색 신세대’다. 누구에게 배우거나 영향을 받지 않았음에도 중학교 시절부터 스스로 변화를 택하고 2000년대 진보운동의 최선봉에 섰던 이 당찬 청년운동가의 삶을 살펴보면, 세상은 어떻게 변화하게 되는가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변화가 시작되는가, 미미하지만 그 단초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아 이 달에 만나 볼 인물로 선정했다.

선거를 40여 일 앞둔 2018년 4월 말, 서울 서초구 방배동에 있는 신지예 후보 사무실을 찾았다. 50평은 될 꽤 넓은 3층 공간. 아직 플래카드도 걸지 않고 집기도 들여놓지 않은 상태로 당원들이 한창 청소와 정리를 하는 중이다. ‘한 다리 건너’ 아는 이가 내부 수리를 위해 잠시 비워 둔 곳을 매우 저렴하게 빌릴 수 있었다고 한다.

늘 살짝 웃음을 띤, 밝고 씩씩한 인상이다. 한 시간 한 시간이 금쪽같은 후보이니 만나자마자 서울시장에 출마한 이유에 대해 단도입적으로 물었다. 답은 명쾌하다.

“이번 선거는 문재인 대통령의 지방자치단체 정책에 대한 중간평가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문 대통령이 집권한 후 서울이 변화했느냐 아니냐를 판정하는 선거인데, 저는 서울이 거의 변하지 않았다고 봐요. 문재인 대통령이 좋은 대통령이고 박근혜보다는 진일보했지만 보수적인 한계는 벗어나지 못했다고 봐요. 지난해 핵발전소 문제에서 보여 주었듯이 탈핵 문제에 대한 입장이나 현재 민주당에서 내놓은 개헌안을 보면 역시 보수가 맞다고 봅니다. 그래서 녹색당이 필요하다고 보고 제가 나선 것입니다.”

삼선에 도전한 박원순 서울시장에 대한 평가는 이렇다.

“박원순 시장님 역시 좋은 분입니다. 그러나 역시 기존의 패러다임에 갇혀 있는 분이라고 저는 봅니다. 먼저, 박원순 시장에게서도 개발주의자의 면모가 보입니다. 서울시는 현재 서부간선도로, 동부간선도로 등 주요 간선도로를 지하로 파 넣으려 하고 있습니다. 최대 깊이 70m에 왕복 4차선 도로입니다. 환기, 안전 등 여러 가지 우려도 있고 주민과 협의도 안 된 상황입니다만, 지금도 유례없는 크기의 지하차도가 발밑에 뚫리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계획 중인 지하 개발이 많습니다. 여러 가지 환경문제 때문에 이명박 때도 안 했던 토목공사를 박원순 시장이 강행하고 있는 것이죠. 이 문제를 지적해야 합니다.”

대한민국을 다른 말로 쓰라면 ‘건설 공화국’, ‘토목 공화국’, ‘도로 공화국’이 정답이다. 자연을 파괴하고 인성을 파괴하는 토목공사에 쏟아 붓는 세금으로 할 수 있는 좋은 일이 얼마나 많을까? 그 문제에 대한 민주당 정권의 안목은 거의 제로라 해도 좋을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과 그를 둘러싼 신흥 권력자들도, 박원순 시장도 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고 신지예는 본다. 박원순 시장의 개인적인 성향에 대해서도 지적한다.

“서울시장은 시민 전체의 삶을 바꿀 혁신적인 큰 그림을 그리고 추진해야 하는데, 박원순 시장님은 제도권 안에서 작은 변화를 주는, 중간 관료들이 해야 할 일을 간섭하고 들여다보는 스타일이죠. 저는 서울시민, 나아가 대한민국 국민이 한걸음 더 질 높은 삶으로 나가려면 새 정당, 새 정치가 필요하다는 걸 선전하려고 선거에 나섰습니다.”

거슬러 올라가 해방 직후 한민당이란 이름으로 창당한 이래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민주당 세력에 대해서도 일갈한다. 벌써 세번째 집권으로 하부 구성원들까지 권력의 단맛을 알게 된 민주당 세력에 대한 신지예 후보의 시각은 냉정하다.

“촛불혁명의 덕분에 집권한 더불어민주당은 새로운 보수 기득권 세력이 되고 있습니다. 기존의 권력과 이권을 분배해 차지하는 것은 물론이요, 진보세력 내지 신진 세력의 진출을 억제하고 있어요. 이번 지방선거구 협상할 때도, 소수 정당이 당선될 수 있도록 4인 당선 선거구를 35개로 늘리고자 했는데 더불어민주당이 총력으로 반대해 무산시켰습니다. 심지어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은 토론회장의 문을 잠가 버려 시민들의 출입까지 막으면서 자기들에게만 유리하게 법을 만들었습니다.”

2017년 영국 리버풀에서 열린 제4회 세계녹색당대회에 참가하여 미국 참가자와 함께 사드 배치 반
대를 외치고 있는 신지예(앞줄 왼쪽에서 네 번째)

신지예는 말한다. 자신이 속한 녹색당은 아직 권력에 물들지 않았다고. 그러나 권력 잡으면 언제든지 변할 수밖에 없는 게 인간이라고. 지금 민주당과 싸우고 견제를 해야 하듯이, 그때가 되면 자신은 녹색당을 견제하고 싸울 것이라고 말한다.

진정, 권력과 돈은 사람을 사악하게 만드는 가장 큰 원인임에 틀림없다. 끊임없이 비판하고 견제하여 정치 생태계를 정화해 나가지 않으면 언제든 폭압적인 독재정권이 등장할 수 있는 게 인간 사회다. 세계 많은 나라에 하나의 이름으로 보조를 함께하는 녹색당은 그 정화제의 역할을 하는 소중한 존재다. 이번 선거에서 신지예의 득표율에 관심을 두는 이유다.

녹색당과 청년 정치인들의 제도권 진출이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다. 지난해 2017년에만도 네덜란드 총선에서 녹색당이 역사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며 뉴질랜드에서는 스물세 살의 녹색당원 크로에 스워브릭이 국회에 진출했다. 신지예처럼, 그들도 스스로 변화를 만들어 낸사람들이다.

“서울은 너무 비대하고 모든 게 과잉 상태입니다. 면적은 국토의 0.6%에 불과하지만 전체 인구의 5분의 1이 살고 있고 전력의 10%를 사용하고 있어요. 우리나라의 사회적, 생태적 위기의 많은 문제가 여기서부터 발생하고 있지요. 이런 상태에서는 지방분권의 의미도, 정의도 찾을 수 없어요. 저는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 평등한 서울, 소유하지 않고도 안심하고 살 수 있는 도시 서울, 비대한 수도권이 아니라 건강한 도시 서울을 만들 것입니다.”

자신이 살고 싶은 삶을 상상에 담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삶을 주도적으로 살아가는 이 당당한 청년 정치인이 장차 한국 정치를 미래로 이끌어 나갈 수 있으리라 기대를 걸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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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의제를 선도하다, 김종철

안재성 소설가

 

『녹색평론』 발행인 김종철은 의제를 선도하는 사람이다. 1991년에 격월간지 『녹색평론』의 창간으로 한국에서 생태주의의 문을 열었고, 2012년에는 녹색당을 창당하는 데 적극 나섰다. 이후에 제시한 기본소득은 수년 만에 이 사회의 중요한 화두가 되었으며, 소농 공동체를 지향하는 운동도 ‘진정 행복한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을 던져 주었다. 최근에 제시한 ‘추첨제 민주주의’라는 독특한 의제도 새로운 화젯거리가 되고 있다.

새로운 주장을 내세운다는 것은 기존의 논리에 대한 비판을 수반하기 마련이다.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생산력 발전을 사회 발전의 동력으로 보는 발전론에 대한 비판에서부터 한국의 문화 풍토와 문학 평론에 만연한 지적 허영심에 이르기까지, 그의 날카로운 비평을 피해갈 대상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인가, 오해도 많다. 당면한 현실을 무시하고 이상주의적 원칙만을 강조하는 원리주의자일 거라는 선입견은 인터뷰에 나선 필자도 긴장시켰다. 발전 반대론자인 만큼 핸드폰 같은 건 안 쓸 거라든지, 원리 원칙만 이야기하며 조금만 생각이 다르면 날카롭게 지적하리라는 예상이었다.

예상은 틀렸다. 2017년 8월 8일 인사동의 한 찻집에서 시작된 만남은 술자리까지 거의 6시간이나 계속되었고, 선생이 하는 이야기마다 폭소를 터뜨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진보운동권을 포함한 사회 문화 전반에 대한 냉엄한 비평이 필자와 공감대를 이루는 부분이 많은 데다, 다른 글에서는 볼 수 없던 선생의 성장기도 재미가 있었다.

문학, 정치, 환경, 경제 등 다방면에 걸친 선생의 생각을 정리하기에는 지면이 허락하지도 않거니와 직접 본인의 글을 읽어 보는 게 가장 정확하리라. 『녹색평론』과 여타 지면에 실리는 글들과 『시와 역사적 상상력』, 『간디의 물레』, 『비판적 상상력을 위하여』 등의 저서들은 주제가 명쾌하고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문장으로 이뤄져 퍽 읽기 쉽다. 요즘 지겹도록 보게 되는 번역체 문장들의 비비 꼬인 난해함이며 외래어도 아닌 외국어의 나열이 없어서 좋다. 대학을 나온 이들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뒤틀린 문장을 쓰는 이들은 김종철 선생에게 되게 맞아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제시하는 의제들이 단순한 것은 아니다. 특정 정책의 변화나 특정 법률의 개폐를 주장하는 소승적인 범주를 뛰어넘어, 이 사회, 나아가 인간 사회 전체가 가야 할 길을 제시하는 본원적인 지향을 갖고 있기에 꼭 읽어 볼 만하다.

 

1. 전쟁의 기억

『녹색평론』 발행인 김종철이라고 하면 대구 사람일 거라는 추측도 여러 오해 중 하나다. 영남대에서 오래 교편을 잡은 결과 생긴 오해다. 지금도 영남대 교수라고 알고 있는 이들도 많지만 그만두고 서울로 옮긴 지가 13년이나 되었다.

고향은 경남 진동이다. 진동은 오늘날에는 행정구역상 창원시에 포함되어 있는, 마산에서 서쪽으로 길고 험한 진동고개를 넘어가면 나오는 아늑한 어촌 겸 농촌 마을이다. 친가와 외가 모두 이 지역에서 대대로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어머니는 딸 없이 아들만 다섯을 낳아 키웠는데, 그는 막내였다. 해방되고 이태 뒤 1947년 1월에 태어났다.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으나 한국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1953년까지는 진주에서 살았다. 둘째 아들이던 아버지가 일제 치하에서 상업학교를 나와 금융조합에서 서기로 일하다가 진주의 한 운수회사에 회계과장으로 옮기면서 이사를 갔던 것이다.

국내에 대학이 거의 없던 식민지 시대의 상업학교나 농업학교는 아주 가난하지는 않되 일본으로 유학 갈 경제력은 안 되는 청년들이 택하던 기술학교였다. 금융조합 서기 중에는 친일파라 불릴 정도로 협조적인 사람도 있었겠지만, 아버지는 자신의 일상 업무에 충실한 그저 고지식한 소시민이었다. 진급이나 출세에 관심이 없을 뿐더러 자식들을 큰 인물로 만들겠다는 욕심도 없었다.

진주의 생활은 비교적 유복한 편이었다. 어린애의 시선으로 본 규모지만 마당이 무척 넓은 집으로 꽤 큰 텃밭에 토마토가 주렁주렁했던 것을 그는 기억한다. 집의 한편에 있던 광에 들어가면 늘 떡이나 곶감같은 게 있었다. 전기도 들어왔고 개인집으로는 꽤 넓은 우물도 집안에 있었다.

짧은 호사는 전쟁으로 박살났다. 1950년 6월 25일 개전과 함께 밀물처럼 쓸고 내려온 인민군은 한 달여 만에 진주까지 점령했다. 진주를 거점으로 마산을 함락시키기 위한 인민군의 대공세가 시작된다. 인민군은 진동까지 진출했고, 인천 상륙작전으로 후퇴하기까지 진동고개에서 국군과 일진일퇴의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진동고개만 넘으면 마산 시내였고, 마산에서 부산까지는 평지라 일사천리로 진군할 수 있었다. 진주에서 제법 컸던 그의 집은 인민군에 의해 징발되었다. 아버지는 식구들을 이끌고 거제 근처 무인도로 피난을 갔는데, 김종철의 기억에는 두 장면이 선명히 남아 있다.

쪽배를 타고 섬으로 가는데 미군 함정이 나타나더니 조사를 한다며 키가 큰 미군 하나가 훌쩍 뛰어내리는 것이 아닌가? 거의 뒤집어질듯이 배가 한쪽으로 확 기울 때의 그 공포감을 아직 잊지 않고 있다. 섬에 도착해 보니 이미 몇 가족이 피난 와 있었는데 샘이 없었다. 바위 틈새로 한 방울씩 흘러내리는 물을 받기 위해 온종일 바가지를 들고 줄을 서 있던 광경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나야 어려서 기억도 안 나지만, 인민군은 아이들을 모아 놓고 노래를 가르쳐 주는 등 우호적으로 사람들을 대했다죠. 그래도 우리 부모님과 형들은 반공 보수주의자들이 되었어요. 어쨌든 전쟁을 시작한 것은 공산주의자들이었으니까요. 농민들도 그랬다지요. 불완전하나마 조봉암이 주도했던 농지개혁으로 이미 내 땅이 생긴 다수 농민들의 입장에서는 인민군이 반가울 리 없었죠. 농민은 기질적으로 원래 보수적이잖아요. 김일성은 남쪽으로 밀고 내려가면 농민들로부터 대대적인 환영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다지만, 착각한 거죠. 그런 점에서 대한민국이 존속하는 데 일등 공신은 조봉암 선생이었죠. 그 조봉암 선생을 나중에 이승만이 간첩죄를 씌워 처형했으니, 참 말도 안 되는 아이러니죠.”

인민군 주력은 두 달 만에 물러났으나 전쟁은 계속되었다. 후퇴하지 못한 인민군들은 지리산을 중심으로 남부 전역에서 빨치산이 되어 3년 가까이 교전을 계속한다. 김종철의 식구가 진주를 떠나 고향 마산으로 돌아간 것은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던 1953년, 그가 국민학교에 들어가던 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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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정당운동의 산증인, 노회찬

안재성 소설가

 

1. 조봉암을 닮은 사람

시원한 장마가 시작될 시기지만 지독한 가뭄이 끝날 줄 모르는 2017년 6월 20일, 국회의사당으로 정의당 원내대표 노회찬 의원을 찾았다. 웬일인지 여우비도 아닌 성긴 빗방울이 살짝 지나가는 오후 시간, 의사당 입구부터 아는 얼굴들이 눈에 띈다. 오래 전 노동운동을 함께하다가 인권 변호사가 된 선배도 만나고 보도연맹유족회의 낯익은 노인들도 만났다. 시골에서 올라온 행색이 역력한 노인들이 제각기 가슴에 표찰을 달고 의원회관 안팎을 물결지어 돌아다니는 사이로, 얼굴을 알 만한 의원들이 나와 배웅하느라 바쁘다.

“의원회관을 찾는 민원인이 하루에 2만 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국회의원이란 게 쉬운 직업이 아니지요.” 노 의원도 바쁘다. 온종일 십 분 여유도 없이 면담이 계속된다. 특히 이날은 댓 군데 방송과 인터뷰가 잡혀 있을 정도로 바쁘다. 문재인대통령이 추천한 장관 후보들을 낙마시키려고 트집 잡기에 혈안인 보수정당들을 상대로 특유의 촌철살인으로 당사자인 민주당 의원들보다 더 잘 싸우고 있는 그에게 언론의 취재가 집중된 탓이다.

“국회를 민의의 전당이라고 합니다. 민의의 전당에서는 민의가 이겨야 합니다. 정당들끼리 의견이 다르다면 민의를 쫓아가면 됩니다. 소속 정당이 달라도 잘하는 건 잘한다고 하고 못하는 건 못한다고 해야지요.”

민주당이 하는 일이면 무조건 비난하고 발목을 잡는 보수세력이나, 잘하는 일에는 모르는 척하면서 못하는 게 없는가만 찾고 있는 날선 진보세력과는 다르다.

그래서인가, 노회찬을 보면 조봉암이 생각난다는 이들이 있다. 조선공산당의 창당 주역이었으나 현실 공산주의의 국가폭력에 반대해 처음으로 사회민주주의를 주창했던, 필요에 따라 이승만과 손잡고 토지개혁을 주도하기도 하지만 또 이승만 독재에 맞서 싸우다가 처형된 조봉암의 일생을 떠올리는 것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조봉암은 야만적 시대의 제물로 갔으나 노회찬은 3선 의원으로 활약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여섯 석밖에 안 되는 정의당의 원내대표지만 그 여섯 석도 우리나라 진보정당 현실에는 소중하다. 물론 그가 속한 정의당이나 그가 천명해 온 주장은 진정한 진보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또 다른 여러 진보정당이 존재하지만, 국회의원이 있는 유일한 진보정당인 것이 사실이다.

노회찬을 두고 한국 현대 진보정당사의 산증인이자 주역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노회찬은 1987년 12월 대선에서 처음으로 민중후보를 내세운 이들을 중심으로 창당한 민중의 당(1988년)을 주도한 이래, 민중당(1990년)으로부터 진정추(1992년), 민주노동당(2000년), 진보신당(2008년), 통합진보당(2011년)을 거쳐 현재의 정의당(2012년)까지 한 번도 진보정당운동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을 뿐더러 늘 주역의 하나였다. 돌이켜보면 그가 만들거나 속했던 진보정당들이 모두 그와 다른 정파들에 의해 장악되어 그는 밀려나거나 스스로 분당해 나왔다.

그럼에도 맨 처음 진보정당운동을 시작했고, 많은 동지가 자의든 타의든 물러난 상황에서 유일하게 국회에 진출한 정당을 이끌고 있으니, 그를 두고 현대 진보정당사의 산증인이라고 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다.

백기완 선생이 민중후보로 나서면서 시작된 진보정당운동이 올해로 꼬박 30년째다. 노회찬의 진보정당운동 시계와 똑같다. 지겹게 들어 온 멍청한 질문이겠지만, 왜 오로지 이 운동에 일생을 바치는가 물으니 이렇게 답한다.

“한 사람이 평생에 한 가지 일만 추구해도 이루기 힘든데 어떻게 여러 가지 일을 하겠습니까? 학창 시절에 결심한 대로 이 사회의 약자와 빈자의 권익을 위해 일생을 바치겠다는 저 자신과의 약속을 지킬뿐입니다.”

신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실천이다. 일부러 낳지 않은 건 아니지만, 노회찬은 아이조차 없는 극히 검소한 생활로도 유명하다. 그럼에도 노동자를 위한 일간지 『매일노동뉴스』를 10년간 운영하느라 빚더미에 앉아 오랫동안 신용불량자로 살아야 했다. 처음 국회의원이 되었을 때 은행에서 의원용 신용카드를 발급받으려다 조건이 안 된다며 거절당한 일화도 유명하다. 지금도 그는 전세살이를 하고 있다. 삶과 사상이 일치하는, 이 변치 않는 무욕의 삶이 지금의 그를 있게 했을 것이다.

흔들리지 않음, 편향되지 않음, 재치 넘치는 특출한 표현,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욕심 없음 등등으로 표현되는 이 노회찬 특유의 인성은 어디서부터 비롯되었을까? 진보 진영 인사들은 대개 운동 경력만 내세울 뿐이다. 개인사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잡지에 이 꼭지가 만들어진 이유이기도 하다. 노회찬 의원이 부산 태생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도 많지 않을 것이다. 경상도 말은 억양이 강해서 고향을 떠나고 수십 년이 지나도 출신지를 숨기기 어렵다. 그런데 노 의원의 말투에서는 경상도 억양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 이유부터 물어보았다.

 

2. 첼로 연주하는 아이

아버지의 이력부터가 독특하다. 아버지 노인모 씨는 이북 출신이다. 일제 치하에서 흥남에 있는 조선질소비료라는 공장의 노동자로 일하다가 징병으로 끌려가 고생하고 돌아와서는 원산의 도서관에서 사서를 하던 문학예술의 열렬한 애호가였다. 6·25 때 부산으로 피난 내려와 초량동 산동네에 살면서 원태순 씨와의 사이에 셋을 낳아 키웠다.

노회찬은 위로 누나를 둔 맏아들로, 1956년 8월에 태어났다. 부모가 이북 말을 쓰니 노회찬도 자연히 이북 억양에 익숙해졌다. 노회찬이 부산 출신임에도 남과 북이 합쳐진, 어디 출신인지 짐작하기 어려운 특이한 억양을 가진 이유다.

초량동 산동네는 전쟁 피난민들이 많이 살던 빈민촌으로, 무허가로 얼기설기 지은 판잣집이 대부분이었다. 노회찬의 다섯 가족은 그나마 집도 없이 방 한 칸을 세 내어 살았다. 부산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진학할 때까지 그 집에 살았으니, 노회찬의 부산 생활은 초량동 빈민가의 셋방살이가 전부다.

산비탈 판잣집에서 셋방살이를 했어도 마음만은 빈곤하지 않은 가족이었다. 문화적으로는 다른 어느 가정보다도 풍요로웠다. 박봉이나마 안정된 수입이 있기도 했지만, 아버지가 자녀들에게 물질적 욕망보다는 문학예술을 사랑하도록 인도했기 때문이다. 방이 두 칸으로 늘자 암실부터 만들어 스스로 찍은 사진을 인화하던 멋쟁이 아버지였다.

“살림은 가난했어도 정신적으로는 풍요로웠어요. 아버지는 저에게 문학과 예술에 눈을 뜨게 해 준 분입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가 독서하는 것을 보고 배워서 밥을 먹으면서도 책을 읽을 정도였는데, 중학교 들어가니까 아버지가 전축 앞에 불러 놓고는 너도 이제 중학생이니 이걸 들어야 한다면서 베토벤의 <운명>을 틀어 주세요. 백 번은 더 들었을 거야. 토스카니니가 지휘하는 연주였는데, 처음에는 머리가 깨지는 줄 알았는데 나중에는 심취하게 되었죠.”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그 가난한 살림에 남편과 비싼 오페라 공연을 다니던 이였다. 월남을 하기는 했으나 북한에서 살면서 사회주의 교육의 좋은 점을 보았기 때문일까? 노회찬이 중학교에 들어갈 때가 되자 어머니가 먼저 나섰다. 아무리 형편이 어려워도 사람은 악기 하나는 다룰 줄 알아야 한다며 고르게 했다. 누나는 피아노를 택했고, 노회찬은 바이올린보다 큼직한 것이 배우기 쉬울 듯해 첼로를 택했다.

연습용 첼로는 가격이 그리 비싸지 않았지만 사사가 문제였다. 부산에는 첼로 선생이 한두 명밖에 없던 데다 수강료도 엄청났다. 운 좋게도 부산시립교향악단 첼로 수석주자였던 배종구 교수에게 직접 배울 수 있었고 경기고등학교에 진학한 후에도 역시 좋은 교수를 만났다. 다른 학생들과 달리 대학 진학을 위해 배우는 게 아니라 음악을 사랑해서 배우려는 것을 안 두 교수는 거의 돈을 안 받고 가르쳐 주었다. 그러나 재능은 없음이 분명하다. 그는 유쾌하게 웃으며 말한다.

“그분들께 꽤 여러 해 배웠는데 열심히 하라는 말만 잔뜩 들었지, 너는 재능이 있다고 말하신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그 대신에 제가 리코더는 아주 잘 불었어요. 무슨 노래든 듣기만 하면 즉석에서 악보로 옮겨 불 정도였지요.”

어렵게 배운 첼로 솜씨로 경기고등학교 재학 중 이화여고 축제에 초대 받아 3천원의 출연료까지 받고 공연한 적도 있었다. 첼로를 배우며 음악에 심취해, 당시 서울의 낭만파 학생이라면 필수적으로 출입하던 고전음악 감상실 르네상스에도 드나들고, 서정주의 시를 가사로 삼아 직접 작곡해 본 적도 있었다.

음악만이 아니었다. 문학, 철학 등 모든 분야의 책을 열독했고 영화도 무척 좋아해서 고등학교 때는 한 해 개봉된 모든 영화를 보러 다녔다.

책상물림의 샌님이 아니었다. 삼육국민학교, 부산중학교 다니는 내내 한 해도 빠지지 않고 반장을 했다. 아이들을 몰고 다니며 골목대장 노릇도 하고 중고등학교 때 선생들이 부당하게 굴면 바로 대들어 싸우기 일쑤였다.

“중학교 때부터 그랬고 고등학교 내내 그랬어요. 조금이라도 부당하다 싶으면 못 참고 선생님한테 바로 대들어서 엄청 많이 맞았습니다. 대걸레 자루로 엉덩이 맞기, 주먹으로 얼굴 맞기, 꽃병으로 머리두들기기 등등 정치나 학원이나 폭력이 일상이던 시절이었는데도 계속 반항했죠.”

잘못된 일에는 반항을 하되 상대방에 대한 기본적 애정과 존중심을 잃지 않는 그의 특징은 그때도 나타난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세계사 선생이 미국 인디언에 대해 무슨 이야기를 했는데 아이들이 피식거리며 동조를 하지 않자 “너희는 텔레비전도 못 봤냐?”고 성질을 냈다.이에 아이들이 전부 못 봤다고 하자 속 좁은 선생은 못 본 놈 나오라고 고함쳤다. 겁난 아이들은 아무도 나가지 않는데 노회찬이 혼자 나갔다. 자취방에는 진짜 텔레비전이 없었던 것이다. 시키는 대로 했을 뿐 인데도 대든다고 생각한 선생은 무자비하게 뺨을 때리기 시작했다. 억울한 일이었다.

“정말 무한대로 맞았어요. 싸대기를 양쪽으로 무한대로 맞고 나니까 기분이 좀 그랬죠. 선생님이 과도했고 어른답지 못하다, 그렇게 생각했지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괜히 폼을 잡아 선생님으로 하여금 학생을 때리게 만든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억울하게 맞고도 교무실에 찾아가서 ‘죄송합니다!’ 이랬어요. 그런데 선생님이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더라고요.”

아니다 싶으면 곧장 일어나 대드는 성격은 이후에도 변치 않아 참 많이 얻어터지며 학창 시절을 보냈다.

운동도 좋아해서 중학교 시절부터 펜싱과 육상은 선수급이었다. 덕분에 고등학교 2학년 때는 무술을 잘한다는 소문이 나서 노 씨 성을 따 ‘노지심’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운동도 잘했지만 아마도 커다란 체구에 그보다 더 큰 머리통, 그리고 두려움을 모르고 옳고 그름을 지적하는 대범한 성격에서 붙여진 별명이 아니었을까 짐작된다. 오늘의 그가 보수와 진보 양쪽의 공격을 개의치 않고 ‘민의’라는 상식적인 눈높이에서 나오는 소신 발언을 계속하는 이유를 알 만하다.

성격이 이렇다 보니 사회운동도 퍽 일찍 시작했다. 아는 선배의 영향을 받거나 학습 서클에 들어가 배운 게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고 주도했다. 경기고등학교 1학년이던 1973년의 일이니 참 조숙했다.

 

3. 인생의 미스터리들

인생이란 묘한 우연에 좌우되기도 한다. 나이대로 하면 1972년에 부산고에 입학해야 했던 그가 재수를 하고 한 해 늦게 경기고에 들어간 것은 그의 인생의 한 미스터리다. 지역의 명문이던 부산중학교에서는 넷 중 세 명이 부산고등학교에 들어갔다. 그런데 전교 10등 밑으로 내려가 본 적이 없던 노회찬이 낙방을 하고 만 것이다. 정말 이유를 알수 없었다. 평소 경기고에 가고 싶기는 했지만, 일부러 시험을 망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가족에게서 오해를 받는 것도 싫고 부끄럽기도 하여 고등학교를 아예 포기하겠다고 주장하는 그를 아버지는 서울로 보내 재수를 하게 했다.

“서울에 온 게 내 인생에 가장 큰 전환점이 된 거죠. 부산에 있었으면 아마 내가 이 길로 안 들어섰을 겁니다. 반항심만 극대화된 채 친구들과 어울려 이상한 길로 빠졌을 겁니다.”

어쨌든 전국의 수재가 모여든 경기고에 들어가자마자 그는 또 다시 인생의 전환을 맞는다. 이번에는 스스로 원해서 택한 길이었다.

한창 재수를 하고 있던 1972년 10월, 박정희는 소위 유신헌법을 선포해 ‘영구 대통령’의 길을 연다. 이건 분명 교과서에 나오는 민주주의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노회찬을 분개시킨 것은 국회를 해산시켰다는 점이었다.

“중학교 3학년 교과서에 나와요. 국회는 해산시킬 수 없다고. 그런데 국회가 해산됐다는 거야. 내가 잘못 알고 있는가 해서 책을 다시 봤어요. 확실히 잘못된 거라. 나는 그 다음 날 엄청난 데모가 일어날 줄 알았어. 국회가 해산됐으니까. 그런데 아닌 거야. 멀쩡한 거야. 이게 지금 뭐냐, 가만히 있으면 어떻게 하냐, 이래 가지고 어린 나이에 저항을 시작한 거죠.”

정부 발표는 일체 신뢰하지 않게 된 대신 『월간 다리』를 구독하고, 강제 폐간된 『사상계』를 청계천 헌책방에 가서 권당 30원씩 한 보따리씩 사다가 읽었다. 논문도 있고 논조도 어려워 이해할 수 있는 글이 별로 없었지만 열심히 읽었다.

재수 시절 혼자 그렇게 끙끙 앓고 지내다가 경기고에 들어가니 정광필, 이종걸 등 마음을 나눌 친구들이 몇 명 생겼다. 똑똑한 친구들과 독재에 대한 분노를 공유한 노회찬은 유신 체제를 비판하는 유인물을 제작해 학교에 배포하자고 제안했다. 다들 흔쾌히 응했다.

글은 노회찬이 썼으나 등사가 문제였다. 철필로 긁으면 공신력도 없거니와 글씨체가 드러나 체포되니 타자를 쳐서 등사하기로 했다. 타자기가 귀한 시절이고 칠 줄도 몰랐다. ‘청타’라 해서 푸른 등사 원지에 타자를 쳐 주는 몇 군데 청타집을 찾아다녔으나 원문을 읽어 보고는 즉석에서 거절하는 것이었다. 신고당하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겨우 한 군데 청타집에 사정해서 타자를 친 다음, 공범 중 한 명이 다니는 부천의 한 교회로 갔다. 전철이 없던 시절이라 완행 기차를 타고 소사역에 내려 밤중에 몰래 교회에 들어가 등사를 시작했다. 그런데 한참 등사 중일 때 목사가 불쑥 들어왔다. 밤중에 불이 켜진 것을 보고 온 것이었다.

“이제는 다 끝났구나, 신고를 당해 감방에 가고 학교에서 퇴학당하겠구나 생각했지요. 근데 목사님이 우리가 등사해 놓은 유인물을 한 장 집어 들고 죽 읽어 보더니 다시 내려놓고는 단 한 마디도 않고 나가서 문을 닫아 주는 거라. 참 고마운 목사님이었지요.”

무사히 1,200장 정도를 등사한 일행은 아무도 없는 시간에 학교에 들어가 책상 속에 한 장씩 넣어 두었다.

읽어 본 학생들이 웅성거리며 찬동하자 학교가 뒤집어졌다. 학교측은 학생들의 집단행동을 우려해 즉시 조기 방학을 선포하고는 모두 집에 가라고 내몰았다. 학생들이야 방학이 당겨졌으니 신이 나서 누가 뿌렸는지 몰라도 고맙다고 떠드는 것이었다. 경찰이 정문부터 학교를 빙 둘러 감싸고 있었지만 문제가 더 확대되지는 않았다.

이 일을 통해 규합된 친구들에게 노회찬은 기초부터 공부하자고 제안했다. 아무런 사회과학적 지식이 없는 상태로 선택한 것이 철학이었다. 지금은 없어진 종로서적에 가서 하드카버로 된 두꺼운 『세계철학사』를 사서 공부를 시작했다. 옛 소련의 아카데미에서 출간한 세계철학사와는 아무 상관없는, 플라톤이니 칸트가 등장하는 부르주아철학사였다. 도움이 될 리도 없고 재미도 없어 얼마 안 있어 포기하고 『다리』, 『사상계』를 함께 보는 시사 모임으로 바꿨다.

이듬해인 1974년 4월 3일은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이란 이름으로 전국의 주요 대학과 고등학교에서 공동으로 시위를 벌이기로 기획한 날이자, 박정희가 군대를 동원해 대학가에 위수령을 내리고 민청학련 관련자는 사형까지 내릴 수 있는 긴급조치 4호를 발표한 날이었다.

아침에 등교하던 경기고 학생 하나가 교문 밖에서 어떤 대학생이 선생님 주라며 준 서류 봉투를 받아다가 교탁 위에 올려놓았다. 선생님이 오기 전에 학생들이 열어 보았다. 유신 반대를 선동하는 민청학련 명의의 유인물이었다.

노회찬은 교실 문을 잠가 선생님들의 진입을 막고 큰 소리로 유인물을 낭독했다. 학생들은 박수를 치며 동조했고 즉석에서 독재 정부를 규탄하는 시사 토론회가 열렸다. 학생들의 수업 거부와 농성이 학교 전체로 퍼져나가자 학교 측은 또 다시 휴교를 선포했다. 교실에 들어갈 수 없게 된 학생들은 노회찬을 중심으로 도서관에서 시사 토론을 이어 갔다.

경기고 학생들의 이날 수업 거부는 전국이 공포로 얼어붙은 당시로서는 큰 사건이었다. 민청학련이란 이름으로 기획되었던 이날의 시위는 대부분 실패해 버렸는데 뜻밖에 고등학교에서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이 두 사건 외에도 고등학교 시절의 저항의 무용담이며 문화예술과 관련된 일화는 무궁무진하다. 자연히 좋은 성적을 유지할 수는 없었다. 서울대 철학과에 지원했으나 낙방하고 곧바로 입영 영장을 받는다. 베이비붐 시대라 웬만하면 현역병에서 제외될 때라 눈이 나쁘다는 이유로 보충역, 이른바 ‘방위’가 되었다.

1978년에 제대하고 다시 입시를 치러 고려대학교 정치외교과에 합격했다. 동갑내기들은 대개 75학번인데 4년 늦은 79학번이 된 것이다.

“대학에 간 이유는 오로지 데모를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고등학교 때 이미 혁명을 꿈꾸고 있었으니까요. 친구들이 대학에서 데모를 주동하다 보니 대학에 가기 전에도 벌써 몇 번 경찰서에 끌려가서 조사를 받기도 했고요.”

신입생이라지만 벌써 졸업했을 나이인 데다 이미 고교 1학년부터 경력이 화려한 그가 들어오자 학교에서는 선배이던 친구들이 곧바로 그에게 ‘이념 서클’을 맡겼다. 1학년이 지도하는 특이한 모양새가 된 것이다.

유신 독재의 마지막 해이던 1979년부터 시작해 4년 내내 마음껏 데모를 했다. 여러 이념 서클을 지원하고 고려대 처음으로 학회를 만들어 지도하는 등 학생이 아니라 ‘직업운동가’로 살았다.

이렇게 열심히 학생운동을 했으나 그는 학생운동이야 지나가면서 자동으로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나머지 긴 인생은 노동운동에 바치기로 했다. 그렇지 않아도 광주항쟁을 목도한 많은 대학생이 정치운동만으로는 사회를 바꿀 수 없다는 절박감으로 노동, 농민, 빈민 등 기층민중운동을 지향할 때였다.

성적과 취업에 목숨이 걸린 요즘과 달리 대학의 성적 관리가 느슨하던 시절이었다. 특히 운동권 학생이라면 출석을 거의 안 해도 시험만 치르면 학점을 주어 어서 졸업시켜 버리려 했다. 노회찬은 4학년이 된 1982년 서울기계공고 부설 영등포청소년직업학교에 등록해 전기용접기능사 2급 자격을 취득하고 현장 취업에 나섰다. 학교는 시험만보러 가서 졸업장은 받았다.

처음 취직한 곳은 인천에 있던 현대정공의 하청 공장이었다. 노동운동을 하려면 본인이 직접 노동자로 평생을 살아야 한다는 러시아혁명기의 인민주의적 분위기 속에 3년 가까이 열심히 공장에 다녔다. 이 3년간 받아 본 월급이 20여년 후 국회의원이 되기 전까지 받아본 거의 유일한 정규적 수입이었다.

노동자 생활은 오래 가지 못했다. 그가 공장에 다니는 동안, 대학생들 사이에는 현장 취업의 열풍이 불어 1985년쯤에는 전국에 위장 취업자가 만 명은 되리라는 말까지 돌았다. 출신 학교에 따라 소그룹을 만들거나 개별적으로 공장에 흩어진 이들을 전국적으로 조직하는 작업이 필요했다. 그렇지 않아도 수차례 시위를 주동하느라 경찰의 추적이 시작되어 공장에 다닐 수도 없게 되었다.

경찰은 그에게 공식적으로 수배령을 내렸고, 7년간의 기나긴 지하활동이 시작되었다. 정기 수입이라곤 없이 도대체 어떻게 먹고 살았는가가 알 수 없는, 그의 인생의 또 다른 미스터리가 시작된 것이다.

 

4. 인민노련에서 정의당까지

보수파가 이미 확보한 현실을 지키려는 사람들이라 이권다툼만 한다면, 진보파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상상해야 하니 논쟁이 필연적이다.

노회찬도 알게 모르게 우리 진보운동을 좌우한 중대한 논쟁과 이합집산의 한복판에 있던 인물이다. 독자적 진보정당을 만들 것인가 말것인가, 민족문제인가 계급문제인가, 사회주의인가 사회민주주의인가 등의 논쟁으로 야기된 주류 운동권의 분열 또는 연합을 이끌어 낸 사건들마다 그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이 논쟁들의 시원을 거슬러 올라가자면 ‘인민노련’이라는 약칭으로 더 잘 알려진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이라는 큰 바위를 만난다. 70년대 운동가들이 반파쇼 민주주의운동이라는 큰 틀 안에서 별다른 논점 없이 뭉쳐 있었다면, 잇달아 사회주의와 주체사상이 유입된 80년대 운동은 그 벽두부터 온갖 정파의 난립과 논쟁과 파쟁으로 얼룩졌다. 나쁜 의미든 좋은 의미든, 활동가들은 어딘가에 소속되거나 혹은 소속되기 위해 수백 종은 될 팸플릿을 읽고 밤새 논쟁을 벌여야 했다.

인민노련은 1986년부터 인천, 주안, 부천 등 경인 지역에서 활동하던 위장 취업자들이 결합해 투쟁을 전개하다가 1987년 6월 항쟁의 와중에 공식적으로 결성을 선포했다. 지도부는 노회찬, 주대환, 최봉근으로 구성되었는데 모두 민중민주주의적 성향(이른바 ‘피디PD’)이 강한 인물들이었다. 그래서인지 결성 직후 주체사상파를 포함한 민족해방 진영(이른바 ‘엔앨NL’)이 일방적으로 이탈하면서 인민노련의 성향은 더욱 선명해졌다.

인민노련은 당시 유행처럼 번지고 있던 주체사상파와 제헌의회파를 양 극단의 교조주의로 비판하며 실사구시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이에 양쪽으로부터 사민주의니 개량주의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으나 그 현실주의적인 노선은 인천뿐 아니라 전국의 활동가들로부터 상당한 지지를 확보해 나갔다. 탁월한 논객인 주대환, 최봉근, 황광우 등이 집필한 기관지의 영향도 컸다. 단시간 내에 정회원만 600명을 넘어서서 당시 전국에서 제일 큰 지하조직이라고 할 만했다.

노회찬 김지선 부부는 신영복 선생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덕에 결혼했다고 한다. 1994년 첫날 동해를 찾은 두 사람. (출처:노회찬 홈페이지)

 

인민노련에서 노회찬이 맡은 임무는 조직부장이었다. 그의 조직수완에 대해 주대환은 이렇게 증언한다.

“노회찬 씨는 자기주장을 먼저 내세우지를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서로 자기주장을 내세워 논쟁을 벌이도록 내버려 두고는 그중 다수를 차지한 주장을 선택해 자기 것으로 소화해 결론을 삼습니다. 자연히 큰 반발 없이 조직화에 성공합니다. 정략적으로 그렇게 한다기보다 본래 성품이 그런 사람이라고나 할까요? 타고난 조직가지요.”

조직 담당 중앙위원으로, 기관지 『사회주의자』 편집위원으로 인민노련을 이끌던 노회찬은 결국 수배 7년 만인 1989년 12월 24일, 성탄절 전야에 체포되어 2년 반의 옥살이를 해야 했다.

한편, 체포되기 1년 전인 1988년 12월에는 인천 지역의 다양한 노동자 조직에서 맹활약하고 있던 김지선과 결혼했다. 노회찬보다 한 살이 많아 1955년생인 김지선은 중앙여중을 졸업하고 16세 나이로 인천 대성목재 등 공장에 다니며 노동자로 일하다가 노동운동을 시작해 70년대에 두 차례나 구속된 적이 있는 맹렬한 활동가였다. 처음 보았을 때부터 그녀에게 반해 버린 노회찬은 둘이 처음 만난 자리에서 결혼하자고 구애했다가 거절당하는 등 적극적인 공세로 결혼에 성공한다.

둘 사이에는 아이가 없다. 혁명을 위해 안 가진 것이 아니라, 잇단 감옥살이와 수배 생활로 그럴 여유가 없다 보니 임신 적령기를 넘어 버린 것이다. 뒤늦게 한방과 양방을 다 동원해서 아이를 갖고 싶었지만 실패했다. 아이를 무척 좋아하는 두 사람은 입양이라도 하려고 신청했으나 집도 수입도 없다고 해서 자격 미달로 거절당했다.

1992년 석방되고 보니 인민노련을 주축으로 민중민주주의 계열의 여러 정파가 결합해 ‘진보정당추진위원회’, 약칭 진정추를 결성하고 있었다. 결성식에 5천 명이 모일 정도로 열의가 대단했다. 이미 1987년 대선에서 백기완을 민중 진영의 독자 후보로 내세운 주역이던 노회찬은 1992년 12월 선거를 맞아서도 백기완 선대본 조직위원장으로 활동했다. 선거 결과는 비참했다. 백기완은 1%밖에 얻지 못했고, 보수세력과 손잡은 김영삼이 당선되었다. 이에 많은 사람들이 진보정당운동을 포기하고 떠났지만 노회찬은 남았다.

진보정당 추진 세력은 우여곡절 끝에 1997년 민주노총, 전국연합 등과 합쳐 국민승리21을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이때도 노회찬은 진정추의 후신인 민중정치연합의 대표로 이를 주도했다. 국민승리21의 대통령 후보로 나선 권영길 역시 참패했으나 김대중의 대통령 당선으로 진보정당의 존립 여지는 넓어졌다.

이에 힘입어 2000년 1월에는 민주노동당을 결성했다. 이에 민족해방 계열도 대거 당에 합류하더니 다수파가 되었다. 이때부터 민족해방계열은 자주파로, 노회찬이 속한 민중민주계열은 평등파로, 권영길로 대변되는 중도파는 국민파로 불리게 된다.

운동권의 주류이던 자주파가 합류한 민주노동당은 2002년 지방선거와 2004년 총선에서 크게 선전했다. 비례대표 8명을 포함한 10명의 국회의원을 배출하여 조봉암의 진보당 이후 44년 만에 진보정당의 원내 진출에 성공한다.

2004년 선거는 노회찬에게도 처음으로 의원 배지를 안겨 주었다. 선대본부장을 맡았던 그는 당선되리라 예상하기 어려웠던 비례대표 8번으로 등재했는데 뜻밖에 턱걸이로 당선된 것이다.

선대본부장으로서 선거를 지휘하는 동안 그는 꼼꼼히 일지를 기록했다. 이는 ‘노회찬의 난중일기’라는 별칭으로 널리 알려졌고 『힘내라 진달래』라는 제목으로 제13회 전태일문학상 특별상을 수상했다. 한국 현대 노동운동의 기원이랄 수 있는 전태일의 이름으로 주어진 이상은 그가 받은 수많은 상 가운데 가장 가치 있는 상일 것이다.

초선 의원임에도 노회찬의 활약은 놀라웠다. 그는 국정감사의 피감기관이 뽑은 베스트 의원, 언론사 정치부 기자들이 뽑은 신사적인 의원, 시민운동가들이 뽑은 최우수 의정활동 1위, 방송국 피디들이 뽑은 최우수 의원 1위 등 여러 여론조사에서 최고의 인기를 얻는다. 출석률과 발언 등의 지표에서도 최우수 의원의 하나였고, 비정규직노동자 처우 개선 등 4년간 무려 467건의 법안을 발의해 31건을 가결시키는 등 입법 활동에서도 선두였다.

노회찬이라는 이름을 일반 국민들에게 널리 알리게 된 것은 이른바 ‘삼성 X파일’ 사건이었다. 1997년 대선 과정에서 안기부가 삼성그룹 이학수 부회장과 홍석현 『중앙일보』 사장의 통화를 불법으로 도청한 녹음테이프가 공개되었다. 그 속에는 삼성이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및 검찰 고위 간부들에게 거액의 뇌물을 뿌리며 인맥을 관리했다는 등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

‘삼성 X파일’과 관련한 2심에서 무죄를 받은 뒤 당시 진보신당 관계자들과 웃고 있는 노회찬. (출처: http://blacktv.tistory.com/501)

이 사실은 문화방송 이상호 기자가 먼저 방송을 통해 공개했는데 이때는 뇌물을 받은 검사들의 실명은 공개하지 않았다. 노회찬은 이에 해당 검사 7명의 실명을 공개해 불의 앞에 차별이 없음을 선포했다. 이에 검찰은 명예훼손, 「통신비밀보호법」 위반 혐의로 이상호 기자와 노회찬을 기소하고 나섰다. 길고 긴 재판 끝에 노회찬은 징역 6월에 자격정지 1년을 받아 국회의원 자격까지 잃었으나 2009년 2심에서 무죄판결을 받는다.

한편 2007년 12월, 다시 대선이 돌아왔다. 노회찬은 이 대선에 민주노동당 당내 경선에 나섰으나 국민파로 불리던 권영길에게 패했다. 북한 체제에 비판적이라는 이유로 평등파를 싫어하던 자주파가 집단적으로 권영길을 지지한 결과였다. 그러나 권영길은 처참한 득표로 패배하고 한나라당 이명박이 당선된다.

2007년 선거 후 민주노동당은 심각한 갈등에 빠져들었다. 주된 원인은 자주파 소속 간부 두 명이 민주노동당 당원 명단을 북한에 보고한 사건, 북한 핵실험에 대한 정파별 입장 차이, 당직 선거에서의 자주파의 전횡 등 대부분 자주파로 인한 것이었으나 자주파가 다수파로 주도권을 쥐고 있으니 개선이 어려웠다.

결국 노회찬은 2008년 심상정 등과 함께 민주노동당을 탈당해 진보신당을 결성하고 2009년 3월 단독으로 당 대표에 출마해 98%에 이르는 지지율로 당선된다. 이듬해에는 인민노련 동지이자 민노당 의원직을 함께 했던 조승수가 당대표로 선출되었는데, 다시 2010년 노회찬이 대표를 맡았다.

실패는 해도 실수는 하지 않을 듯 자기 관리에 엄격한 노회찬이 크게 실수를 하고 스스로 상처를 입은 사건은 2011년에 벌어졌다. 이 부분은 이번 인터뷰에서 이야기할 시간이 없었으므로 본인의 입장을 들어보지 못한 채 간략히 외부의 시선으로 정리해 보자.

진보신당은 2011년 들어 민주노동당과의 통합 논란에 휩싸인다. 2012년 총선을 앞두고, 진보신당의 역량만으로는 국회에 진출할 수 없으니 다시 민족해방 진영과 손을 잡자는 주장이 등장한 것이다.

이에 진보신당 당원의 다수가 반대했다. 민주노동당의 주류인 민족해방파와 이들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주체사상파와는 함께 할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일사불란하게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그들에 비해 기본적으로 자유로운 개인의 결합인 진보신당이 합류해 봐야 예전과 다를 게 없을 거라는 판단이었다. 결국 진보신당 대의원대회는 통합 안건을 부결시켰다.

그러나 노회찬은 대의원대회의 결정을 거부하고 심상정, 조승수 등과 함께 진보신당을 탈당해 새진보통합연대라는 조직을 만든다. 그리고 유시민이 이끌던 국민참여당과 함께 민주노동당과 결합, 통합진보당을 창당한다. 노회찬은 통합진보당의 대변인으로 선임되었다.

진보신당에서의 탈당을 두고 단순히 총선에서 당선되기 위한 것이라고만 폄하하기는 어려운 측면도 있는 게 사실이었다. 멋모르고 입당했다가 당원 게시판에서 일주일만 놀면 진저리를 치며 탈당해 버린다거나, 노무현을 지지했다가 입당한 사람에게는 반성문을 쓰게 한다는 등의 이야기가 나돌 정도로 경직되고 편협한 분위기가 지배하고 있던 게 사실이었다. 남자는 이래야 한다, 여자는 이래야 한다, 정치가는 이래야 한다는 식으로 상대방의 동의 없는 규칙을 창안해 놓고 이에 동조하지 않으면 적으로 규정하는 식의 오만과 편견이 진보운동권의 고질적인 허점인 것이 사실이다.

일단 통진당으로의 합류는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2012년 4월 11일의 총선에서 노회찬은 서울 노원 병 선거구에 출마해 두 번째로 당선되는 데 성공한다. 통진당은 노회찬 외에도 12명을 당선시키는 놀라운 성과를 이뤄냈다.

그러나 통진당은 선거 직후부터 극도의 혼란에 빠져 버린다. 당원 대다수가 이름도 모르고 있던 이석기가 비례대표 1번으로 선정되어 의원이 된 과정에 대한 반발로부터 시작된 분란은 한 달 후인 5월 12일 대의원대회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이 문제를 제기하던 유시민, 조준호 등이 소위 당권파 지지자 집단에 의해 공개적으로 폭행을 당하는 장면이 텔레비전을 통해 전국에 방송된 것이다.

이날의 폭력 사태로 노회찬, 심상정 등 다섯 명의 의원은 통합진보당을 탈당해 정의당을 만들게 된다. 그러나 노회찬은 삼성 X파일 사건으로 1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으며 당선 9개월 만에 의원직을 상실하고 말았다. 통합진보당도 2014년 결국 법원에 의해 강제 해산되어 의원 전원이 자격을 잃게 된다.

이 과정에서 노회찬은 본의 아니게 세 번이나 탈당하고 새 당을 만든 주역이 되고 말았고, 이로 인해 아직도 그를 비판적으로 보는 이들도 있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민주노동당 분당 사태 때나 진보신당에서의 탈당 사태 때나, 그는 최대한 당내 갈등을 완화시켜 통합을 유지하려 애쓴 인물로 평가되어 개인적 미움은 덜 받는 편이기도 하다.

2012년 10월 18일 진보정의당으로 창당해 2013년 정의당으로 당명을 바꾼 정의당은 구성원이 다양하다. ‘진보신당 탈당파’와 ‘통합진보당의 당내 패권주의와 종북 성향을 우려하던 혁신파’를 주축으로 시작된 정의당에는 진보신당의 후신인 노동당에서 추가로 탈당한 이들과 시민운동가들이며 소위 메갈리아 논쟁을 촉발한 여성주의자들까지 대거 합류해 있다.

왜 진보세력의 역량을 통합하지 않고 이합집산을 되풀이하는가 하는 비판은 일면의 진리만을 담고 있다. 좌파는 분열로 망한다는 말도 옳은 말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오지 않는 미래에 대한 상상과 계획은 무수히 많은 경우의 수로 나눠지는 게 정상이다. 유럽이나 남미처럼 진보세력은 평소에 녹색당, 사회당, 사민당, 기민당, 공산당, 좌파당 등 각자의 이론에 따라 별개의 정당으로 존재하는 것이 오히려 현실적이다. 억지로 통합시켜 끊임없는 분열상을 노출할 필요가 없이 평소에는 각자의 지론대로 나뉘어 활동하다가 선거 때 연합공천으로 뭉칠 수 있다. 공동 투쟁 사안이 생기면 또 뭉쳐 함께 싸울 수 있다. 무조건 뭉쳐야 한다, 무조건 통일되어야 한다는 말처럼 폭력적인 것도 없다. 이 세상에 단 하나의 진리가 있다는 믿음처럼 무서운 파시즘도 없다.

2016년 총선에서 노회찬은 창원성산에 출마해 더불어민주당 등 야권 후보와의 경선을 통해 단일후보로 확정되었고,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였던 문재인도 ‘야권 단일 후보’ 노회찬의 선거운동을 도왔다. (출처: http://gndomin.com/news/articleView.html?idxno=107829)

 

노회찬의 길이 항상 옳았다고 할 수도 없지만, 항상 옳은 단 하나의 진리의 길이 따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노회찬이든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이든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이든, 시기와 사안마다 옳다고 판단되면 서로 지지하고 틀리다고 판단되면 비판하면서 큰 길을 함께 걷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

노회찬 자신은 이런 문제에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을까? 영화감독 변영주와의 인터뷰에서 한 말을 인용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끝맺자. 진보신당 대표를 하던 2010년의 녹취록이다.

“진보를 좋아하고 진보를 지향하는 사람들 속에 가장 부족한 것이 다원주의, 다양성에 대한 이해와 관용의 태도라고 생각을 합니다. 자기하고 견해가 다르면 그것이 작은 일이든 큰 일이든 선을 확 그어 버리는 거죠. 저는 진보가 진보답지 않으면 보수를 이길 수 없다고 봐요. 자기가 지향하는 가치가 진보라는 이유로 자신의 모든 것이 다 합리화 될 순 없는 것이고, 끊임없이 진보는 진보적인 방식으로 풀려고 노력해야 하는데 오히려 바깥에서 진보세력을 볼 때 편협해 보이는 것이 현실이고 이것이 전혀 근거가 없는 건 아니라는 것이죠. 물론 과도하게 비판하는 면도 있지만 우리가 근거를 제공했다는 거죠. 이 싸움은 끝이 없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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