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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시대가 변하고 있는가?

남북 정상회담에 이어 지난 6월 12일 북미 정상회담이 열렸다. 일부 언론과 이데올로그들이 합의문에 확실한 북한의 비핵화 원칙, 이른바 CVID가 담겨 있지 않다고 당연한 시비를 걸긴 했지만, 대체로 보아 새로운 시대를 향한 첫 걸음을 떼었다는 데는 대체로 동의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열린 지방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이 압승을 거두었다. (원내에서 진보로 분류되는 정의당의 성과는 애매하지만 제법 지지를 받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유권자의 의사가 투명하게 반영되지 않는 현행 선거제도로 인해, 그리고 대통령제 하에서 대통령이 현재 누리고 있는 인기 덕분에 더불어민주당이 커다란 승리를 거둔 것이 당장 눈에 들어오는 일이긴 하지만, 자유한국당의 몰락이 아마 더 큰 사태라는 점에도 모두가 동의할 것이다.

당연히 자유한국당은 ‘쇄신’의 노력을 할 것이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적응’하려고 애쓸 것이다. 하지만 당내의 분파 투쟁을 제외하더라도 현재로서는 쇄신의 가능성이 커 보이지 않는다. 그건 이들의 진정성이 부족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유한국당으로 이어지는 정치적 흐름이 더 이상 시대 변화를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좀 더 시간이 흐른 후 자유한국당을 지지했던 대중의 열망과 욕망을 받아 안을 수 있는 새로운 조건이 형성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자유한국당의 지배를 가능하게 했던 조건을 많은 사람은 냉전과 분단, 반공 이데올로기에서 찾을 것이다. 틀린 생각은 아니다. 하지만 대중민주주의에서 이데올로기가 주는 환상적 만족이나 억압만으로 장기간 통치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감안할 때, 대중이 누렸을 실질적 이득에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다. 그건 우리가 ‘산업화’라고 부르는 한국 경제의 성장과 그에 따른 어느 정도의 분배였을 것이다. 냉전이라는 역사적, 지정학적 배경이 (이 속에서 희생당한 사람들과 무관하게) 한국 경제의 성장을 뒷받침했다는 점에서 냉전과 반공은 최소한 한반도에서는 동전의 양면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 균열을 가져온 것이 이른바 ‘97년 체제’하의 사회 양극화였다. 성장과 고용의 ‘선순환’이 깨지면서, 다수에게는 당장의 삶이 어려워졌다. 또한 저성장 국면에서 자본은 투기에 의한 수탈, 보조금을 통한 강탈, 임금 비용의 절감을 통한 초과 착취에 몰두했다. ‘갑질’은 이런 양태가 두드러지게 드러난 일일 뿐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는 신자유주의에 포획당하면서 이런 문제에 대한 새로운 해법을 제시할 수 없었다. 진보라는 세력조차 방어적인 투쟁에 몰두하던 시절에 당시 정부에 무엇을 기대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긴 한다. 경제성장에 대한 욕망이 이명박이라는 일그러진 인물로 통해 투사된 것은 냉전과 반공이라는 지배적인 이데올로기가 무너지고 이를 대신할 그 어떤 공공선도 눈에 잡히지 않을 때 대중이 선택할 수 있었던 또 다른 일그러진 초상화가 아니었을까? 이런 점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이 아버지의 후광과 자신의 묘한 아우라 덕분에 대통령이 된 것도 사실이긴 하지만, 반사회적 가족과 개인만이 삶의 준거점이 된 시절에 그나마 대중을 통합할 수 있을 것 같은 이미지 덕을 입은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그 환상은 그의 오랜 벗이 드러나고 자신의 시간은 드러나지 않은 채 산산조각이 났다.

현 대통령이 대통령이 된 것은 일종의 경로 의존성처럼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의 앞에 놓인 두 가지 과제는 각각 무겁기도 하고 서로 연관되어 있기도 하다. 하나는 “적폐 청산”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좀 더 민주적이고 차별 없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소득 주도 성장”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일자리 창출을 통해 사람도 살리고 경제도 살리는 일일 것이다.

우선 적폐 청산이라는 말은 오해의 소지가 크다. 사회의 나머지 부분은 ‘정상적으로’ 돌아가고 있었는데 어딘가에, 주로는 권력과 돈이 있는 사람들이겠지만, 잘못된 관행이 쌓여 왔다는 것으로 쓰이는 게 적폐다. 하지만 적폐 따로 정상 따로 있었던 것이 아니고, 적폐만을 암세포 적출하듯이 없앨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일자리 창출의 경우, 공공부문에서 제대로 된 일자리를 어느 정도 만드는 것은 가능하면서도 바람직한 일이다. 하지만 전 세계적으로 과잉생산의 덫에 빠진 현 국면에서, 특히 수출 주도형 경제구조를 가진 한국 경제가 적절한 수준의 일자리를 만드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현 정부가 기대하는 것은 최저임금 인상을 통한 내수 활성화, 공정한 거래를 감독함으로써 다수 고용을 유지하고 있는 중소기업의 활력 제고다. 그런데 전자는 제한적인 효과만 있을 것이고, 후자는 쉽지 않은 일이다. 물론 양자를 관통하는 남북 관계의 개선이 있긴 하다. 하지만 아직 불확정적일 뿐만 아니라 바람직한 방식으로 이루어질지도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여기에 더해진 것이 미국과 중국의 무역 ‘전쟁’이다. 물론 이것은 앞서 말한 자본주의의 현 국면을 반영하는 ‘민족주의적, 포퓰리즘적’ 방식이다. 문제는 이것이 한국 경제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게 분명하다는 것이다.

최근 거세진 반페미니즘, 예멘 난민의 제주도 입국으로 불거진 포비아 등을 볼 때 적폐를 청산하고 돌아갈 우리의 정상적인 과거는 없다. 또한 최저임금 인상이나 일자리 창출 같은 방식으로 일으켜 세울 수 있는 정상적인 경제란 것도 없다. 사태는 언제나 중층적이고 정상은 언제나 새로운 것을 요구할 뿐이다.

자신의 삶의 비참함 때문에 타인을 혐오하지 않을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것, 새로운 사태를 상상할 수 있는 여유와 기회를 가지는 것만이 언제나 위기의 물결을 새로운 ‘정상’으로 데려다줄 물길로 만들 수 있다. 만약 기본소득을 포함해서 우리가 넓은 의미의 경제민주화라는 것을 달성할 수 있다면, 우리는 큰 파도 너머를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 먼저 적폐를 벗어날 필요가 있다. 익숙함이라는 적폐 말이다.

 

편집위원회를 대신하여
안효상

 

이 글은 『시대』 2018년 07~08월호 통권60호에 실린 ‘책 머리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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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에 불가능한 것을 요구한다는 것은

‘68년 혁명’ 당시에 나왔던 유명한 슬로건 가운데 하나는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라!”다. 물론 “리얼리스트가 되라!”라는 슬로건과 함께이긴 했지만, 이 슬로건은 68 혁명의 유토피아적 성격을 상징하는 어떤 것이 되었다. 그리고 신자유주의의 “대안은 없다!”라는 주문 속에 ‘혁명성’이 거세된 좌파의 소심함을 꾸짖는 목소리가 되었다.

유토피아적 기운이 가득했던 시절에서 꽤 긴 시간을 지나온 오늘날 우리가 요구할 수 있는 불가능한 것은 무엇인가? 혹은 우리가 말하는 변화는 어디까지인가?

과거의 사회주의/공산주의가 인간의 해방을 ‘생산력의 발전’에 건 도박이었다면, 아마 지금이야말로 해방을 이룰 확률이 가장 높은 시기일지 모른다. 생산력의 발전이 단순히 물질적 풍요만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필요 시간인 노동시간을 줄이고 자유 시간을 확대할 수 있을 때 해방이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좁은 의미의 경제적 변화가 이를 가져오지 않는다는 것도 분명하며, 이런 점에서 노동운동의 역사는 노동시간 단축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1960년대부터 새로운 국면을 연 여성운동과 반인종주의운동은 경제적 해방이 그 자체로 인간의 해방을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것을 매우 역설적인 방식으로 드러냈다. 민주주의와 해방을 요구한다고 하는 신좌파운동, 노동운동 내에서 기성 질서의 차별이 마찬가지로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폭로하는 과정이 있었다. 이는 여성과 특정 인간 집단을 차별하고 억압하는 또 다른 구조와 문화가 존재하며 거기에 맞는 또 다른 방식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또 다른 변화의 방향으로,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바꾸는 것이 있다. 이는 자유란 ‘필연성에 대한 인식’이라는 헤겔적인 의미에서만 해방적일 수 있는데, 왜냐하면 근대의 해방이라는 프로젝트 가운데 하나에는 ‘자연의 정복’을 통해 인간의 물질적, 자연적 제약을 극복한다는 방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프로젝트를 통한 자연의 정복이 인간적 삶을 발밑에서 허물고 있다는 자각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재인식을 요청했던 것이다.

그런데 위에서 말한 것은 논리적인 것에 불과하다. 그 어느 때보다 경제적 해방을 지향할 수 있는 오늘날, 사회 양극화는 더욱 심하고, 바로 그 때문인지 조금이라도 물질적 향상을 이룰 수 있다면 거기서 위안을 찾을 것만 같은 상황이다. 여성해방과 인종해방 같은 주제는 보편적인 것으로 고양되기는커녕 특정 집단의 요구로 폄훼되고 있고, 이에 따라 사회적 분할을 자극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재인식은 발화자의 현실적 위치에 따라 너무나 넓은 스펙트럼에 걸쳐 있으며, 이는 행동을 가로막는 것으로 기능하고 있다.

그렇다면 해방이라는 유토피아적 프로젝트는 더 이상 불가능하며,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는 것도 의미가 없는 일인가? 물론 포스트 공산주의 시대, 신자유주의의 ‘대안은 없다’라는 시절을 거쳐 온 우리에게는 ‘최소 원칙’이라는 게 있다. 거칠게 요약하면, 개인의 권리, 생태적 지속 가능성, 차별의 부재 등이다. 말 자체로는 상식적이다. 하지만 하나하나 따져보면 불가능한 일이다. 최소한의 사회경제적 보장이 없는 권리는 추상적 문구이며, 산업주의를 뒤집는 실질적 조치가 없는 생태적 지속 가능성은 헛된 구호이며, 무조건적 평등과 반권위주의가 관철되지 않고서는 차별의 철폐가 가능하지 않다.

게다가 각각의 요구를 실현하기 위한 조건이 마련된다는 것 자체가 그 조건들 사이의 충돌을 수반할지도 모르는 일이며, 그 조건들을 조화시킨다는 것 자체가 진정으로 불가능한 요구일지 모른다. 이를 가능케 하는 거의 유일한 근대적 요구는 평등-자유égaliberté일 것이다. 평등-자유는 개인과 모든 사물 사이의 새로운 관계를 수립하자는 요청인데, 이때 각 개인들은 존 던John Donne이 노래했던 다음을 떠올려야 할 것이다.

“어느 누구의 죽음이라도 나를 작아지게 하나니, 그것은 내가 인류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냐고 묻지 마라./ 종은 바로 그대를 위하여 울리는 것이므로.”

 

편집위원회를 대신하여
안효상

 

이 글은 『시대』 2018년 06월호 통권59호에 실린 ‘책 머리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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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혁명과 혁명의 새로운 정신

1968년 혁명에 어떤 혁명적 요소가 있었다면 그건 ‘혁명 속의 혁명’이었을 것이다. 어떤 연구자의 분석처럼 1968년 혁명의 독특한 면모는 지배세력에 대한 반항뿐만 아니라 기존 반체제세력의 나약함, 부패, 공모, 태만, 오만 따위에 대한 반항이 있었다는 것에서 나온다. 기존 반체제세력인 ‘구좌파’에 대한 공격 양상은 그 방향이나 정도에서 지역마다 달랐다. 프랑스와 이탈리아 같은 곳에서는 나약함과 공모, 다시 말해 체제를 변혁한다는 좌파의 본령에서 벗어났다는 것이 죄목이었고, 중국이나 체코슬로바키아 같은 곳에서는 부패와 태만, 즉 자기가 ‘대표하고 지도한다’라던 인민의 삶에서 벗어나 다른 삶을 살고 있다는 도덕적 고발이 있었다. 비록 도덕적 고발이 더 폭력적인 결과를 가져오긴 했지만 말이다.

1968년 혁명을 역사적 사건으로 보면, 해당 사회를 근대화시키는 넓은 의미의 자유주의적 변화라고 설명하면서 자기 변화를 옹호하는 레지 드브레 식의 평가이든, 자본주의 전환의 소실 매개자라고 하면서 무시하려는 태도이든, 아니면 세계체제론자답게 1917년의 지양이라는 월러스틴 식의 예언자적 시선이든, 다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혁명 속의 혁명’이었기 때문에 1968년 혁명 자체에 대한 평가와 상관없이 그 정신은 언제나 재활성화된다. 자본주의의 전환이든, 자본주의를 전복하려는 이전 혁명의 지양이든, 영구혁명이든, 혁명은 혁명의 새로운 정신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는 이중의 의미에서 혁명의 (새로운) 정신이 사라진 지 오래인 것으로 보인다. 어떤 급진적 이념을 마음 깊이 간직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주류 반체제 운동은 이미 그 끝과 궤적을 알 수 없는 점진적인 변화의 열차에 올라탔다. 1968년 혁명의 관점에서 말하자면 ‘나약함’과 ‘공모’라는 죄악을 범하고 있는 셈이다. 주류 반체제 운동이 이런 상황이라서 꼭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혁명 속의 혁명, 혁명의 새로운 정신도 고인 물처럼 썩어 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현실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태만이 도드라진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오만이 아닐까? 높은 이상이 있고, 굳은 결심이 있으며, 무엇보다 헌신한다는 생각이 스스로를 돌아볼 수 없게 만드는 검은 장막처럼 드리워져 있는 것은 아닐까?

사실 프랑스대혁명으로 시작된 근대 정치문화의 일부분인 혁명적 결사에는 논리적으로나 현실적으로 난점이 있다. ‘대중’과 구별되는 이 결사가 어떻게 대중을 대변할 수 있는가, 자기의식이 어떻게 보편적 지향일 수 있는가 등등의 난점 말이다. 누군가는 변증법에 기대 ‘민주집중제’라는 아이디어를 제시하기도 했고, 또 누군가는 ‘하방에 기초한 대중노선’을 말하기도 했다. 이런 아이디어와 방식이 어떤 때는 잘 작동하기도 했고, 또 어떤 시기에는 말장난에 그치기도 했다. 아마 여기서 나오는 결론은 결국 개방성과 수행성만이 잠정적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일 게다.

하지만 이런 구좌파적 해결 방식은 1968년 혁명을 거치면서 새로운 도전에 직면했다. 잠정적 진리조차 매우 불안정하여 실체적인 근거가 별로 없다는 것이다. 보편성은 기각되고 바야흐로 다양성의 시대가 열린 것처럼 보였다. 여기서 진리의 담지자이자 방향의 제시자로서의 전위적 결사체는 그 의미를 상실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의는 편재하고 인간의 존엄성은 여전히 추구할 만한 가치인 것으로 보일 때 이를 ‘자임’하는 사람들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어떤 포스트식민주의적 관점의 페미니스트 이론가는 오래 전에, 피억압자 대변하기가 아니라 그들에게 ‘말 걸기’를 제안한 적이 있다. 좀 더 나중에 영국의 사회학자인 케빈 맥도널드는 1968년 혁명이 사회운동의 의제와 방식을 ‘우리를 만드는 것’에서 ‘타자와의 조우’로 바꾸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신문 칼럼을 통해 케빈 맥도널드에 대해 알려 준 신현준에게 감사한다.)

어떻게 표현하든 결국 ‘대화’가 필요하다는 말인데, 대화를 제대로 하기 위해 요구되는 것은 적절한 위치를 확보하는 것과 대화의 규칙을 마련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여기서 말할 수 있는 것은 모두가 ‘동등한 사람 가운데 하나’임을 확인해야 한다는 것뿐이다. 이를 위해 결사는 지상으로 내려와야 하고 방에서 나와야 한다. 이럴 때에만 혁명의 새로운 정신이 가능할 것이다.

 

편집위원회를 대신하여
안효상

 

이 글은 『시대』 2018년 05월호 통권58호에 실린 ‘책 머리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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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움에 관하여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지만 지금 벌어지고 있는 ‘사건들’을 보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말이 후안무치일 것이다. 거짓말과 사기꾼의 대명사로 남을 가능성이 큰 전직 대통령의 구속부터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선거구를 획정하는 지방의회의 양당 의원들까지 구석구석 그렇지 않은 곳을 찾기 어려운 게 우리네 현실이다. 물론 부끄러움은 기성 질서의 이른바 기득권층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갑을 관계의 연쇄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태도를 당연한 것으로 만들었다. 조금 더 힘이 있는 사람은 자기보다 아래 있는 사람을 짓밟고 서려고 한다.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다. 살아가기 위해 그런다고들 말할 것이다. 이 속에서 우리가 목도하는 것은 사회의 분할과 해체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처럼 느껴지는 오늘날의 한국 사회가 ‘형성’된 데는 뿌리가 있을 것이다. 그건 식민지 시대, 해방 전후, 한국전쟁 등을 거치면서 지배계급의 헤게모니가 상실된 것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이전에 지배계급의 헤게모니가 있었는지 자체는 논외로 하자.) 물론 “헤게모니 없는 지배”는 사실상 불가 능하기 때문에 국시raison d’etat라는 게 제시되긴 했다. 그건 다 아는 것 처럼 반공과 경제성장 혹은 근대화였다. 이 두 가지 국시는 특정한 국면에서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고 실제로 작동하기도 했다. 한국전쟁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고 냉전의 방벽이 단단하던 시절에는 반공은 대단한 주술적 효과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산업화와 근대화를 뒷받침하는 배경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1987년 이후 그리고 1997년을 거치면서 반공 이데올로기 는 서서히 침식되어 갔고, 산업화와 근대화는 대중의 복지가 아니라 사회 양극화 속의 절망이라는 정반대 효과를 낳기 시작했다. 그 이후에는 자잘한 국시는 있었지만, 대중을 사로잡고 그 힘을 특정한 방향으로 행사할 수 있는 지표는 사실상 없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권리를 지키고 요구를 관철하고자 하는 대중의 다양한 투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것도 분할되어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만약 지난 촛불혁명이 의미가 있다면 그건 이 ‘정치 공동체’가 새로운 방향을 잡을 수 있다는 희망과 근거를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새로운 방향이란 민주공화국, 공정과 정의, 사람 사는 세상 등으로 표현되고 있으며, 대통령이 발의하는 헌법 개정안도 대체로 이런 방향에서 마련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이기 때문에 지금 벌어지고 있는 사건들이 더욱 부끄럽게 느껴지는 것이다.

문제는 공정과 정의, 그리고 최근 기대를 가지게 하는 한반도 평화 같은 구호가 새로운 국시가 될 수 있느냐다. 물론 추상적인 수준에서는 여전히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그 자체로 정치 공동체의 방향을 제시하고 대중의 에너지를 모을 수 있느냐 여부가 아니라 사람들이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결과를 가져오는 방책을 선택하고 실행하는가다. 그리고 이는 실제로 사람들의 삶을 얼마나 개선하고 그것이 모두에게 공정하고 정의로운 어떤 것이라는 점을 입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새로운 합의 혹은 새로운 사회계약이 필요할 텐데, 그것도 정치 공동체 구성원의 적극적인 참여 속에 이루어지는 합의 혹은 사회계약이어야 할 것이다. 반대로 새로운 합의 혹은 새로운 사회계약을 위해서라도 이 정치 공동체가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가라는 방향 제시가 필요하다. 아마 이 지점에서 ‘좌파’와 ‘민주파’ 사이에 쟁점이 형성될 것이다. 물론 당장 이 쟁점이 부각되지는 않을 것이다. 새로운 합의와 새로운 합의를 위한 참여의 장이 마련되기 위해서는 말 그대로 낡은 것을 청소하는 일이 필요할 것이고, 그 가운데 하나는 안팎의 반공주의를 일소하는 일이다.

하지만 좌파와 민주파의 논점은 머지않아 드러날 수밖에 없다. 현재와 미래의 삶의 절박함이 그리 많은 시간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문제는 좌파가 과연 미래를 향한 쟁점을 형성할 의지와 능력이 있는가다. 더 나아가 도덕적 설득력을 포함한 헤게모니를 확보할 수 있을까? 현재로서는 대답이 긍정적이지 않다.

아마 우리의 부끄러움은 여기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자신이 한 일을 하지 않았다고 하는 후안무치가 아니라 별다른 일을 할 수 없다는 고백의 부끄러움 말이다. 물론 부끄러움을 뼈저리게 느낀다면 약간이나마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편집위원회를 대신하여
안효상

 

이 글은 『시대』 2018년 04월호 통권57호에 실린 ‘책 머리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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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도 못할 일”을 상상할 수 있을까?

2018년 들어서면서 햄릿이 호레이쇼에게 했던 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하늘과 땅 사이엔 우리의 철학으론 상상도 못할 일이 수없이 많다.”

북한의 김정은 국무위원회 위원장은 신년사에서 “공화국 창건70돌”과 평창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하여 “동결 상태에 있는 북남 관계를 개선”하자고 했고, 이에 문재인 대통령이 2018년을 “한반도 평화 원년”으로 만들자고 화답하면서 북한의 동계올림픽 참가, 여자 아이스하키 단일팀 구성 등이 이루어졌다. 이후 김영남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과 김정은 위원장의 누이인 김여정 노동당 선전선동부 부부장이 방문했고, 폐막식에는 김영철 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겸 통일전선부장이 참석했다. 이 과정에서 김정은 위원장의 ‘남북 정상회담’ 제안이 있었고, 문재인 대통령은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물론 미국의 펜스 부통령은 김영남, 김여정 일행과 말 한마디 섞지 않았고, 김영철 부위원장의 방문은 ‘천안함 사태’의 책임 문제라는 명분 속에서 한국 내의 날카로운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대립을 낳고 있다.

올림픽이 서서히 무르익어 가던 2월 13일 지엠 본사는 한국지엠 군산 공장을 폐쇄했다. 폐쇄 결정을 발표하면서 지엠은 최근 3년간 군산 공장 가동률이 20퍼센트에 불과했고 한국지엠의 손실이 심각해서 내려진 불가피한 조치라고 설명했다. 당장 군산 공장 폐쇄로 2천 명의 노동자가 일자리를 잃게 되며, 1, 2차 협력업체 노동자 1만 명 이상도 같은 처지가 될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많은 사람은 지엠의 군산 공장 폐쇄를 완전 철수의 신호탄이라고 보고 있다. 그럴 경우 최대 수십 만 개의 일자리가 사라질 가능성이 있다. 이는 문재인 정부가 내세우고 있는 일자리 늘리기 정책에 찬물을 끼얹는 사태인데, 이 때문에 사실상 사기에 가까운 지엠의 경영 행태가 널리 알려졌음에도 정부는 지엠의 지원 요청에 대해 선뜻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물론 이 사태 속에서 지엠 같은 글로벌 기업이 2008년 이후 어떻게 생존하고 있는지, 그리고 향후 경영 전략이 무엇인지를 어느 정도 알게 되었다는 것은 소득 아닌 소득일 것이다. ‘Government Motors’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공적 자금에 기대 생존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앞으로는 상당한 일자리를 제공하는 전통적인 제조업체가 더 이상 아닐 것이라는 점 말이다.

끝으로 사건이라고 하기에는 장기 지속적인 일의 표출인 ‘미투’가 있다. 사실 왜 안 터지나라는 생각을 누구나 했을 것이다. 검찰에서 시작된 폭로는 ‘문화예술계’와 종교계에까지 나아갔고, 아마 타이틀을 붙일 수 있는 모든 사회 영역에서 분출할 것이다. 그리고 이전에도 간간히 노출되었던 학계와 스포츠계 등의 사건도 새롭게 주목받을 것이다. 도리어 문제는 이런 일이 문자 그대로 만연한 것이라고 한다면 타이틀을 붙일 필요가 없는 우리의 일상에서 벌어진 일들이 묻힐 수 있다는 것이다. 미투라는 사태 속에서, 여러 사람이 지적하듯이, 개인들을 비난하거나 징벌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런 개인의 그런 행태가 가능했던 구조적 문제, 이른바 ‘권력관계’가 재구성될 수 있는가가 관건적인 문제이리라. 하지만 그런 권력관계가 재구성되어 모두가 동등한 관계가 된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말할까?

그런데 앞서 이야기한 세 가지가 햄릿이 말한 “상상도 못할 일”인가? 누구도 그렇다고 하지 못할 것이다. 북한 정권이 ‘합리적인’ 전략적 판단을 하고 이에 근거하여 행동하는 주체라면 한편으로 핵무력의 완성을 선언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제재가 더욱 강해지고 있는 이 국면에서 한국을 하나의 지렛대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은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었다. 지엠의 군산 공장 폐쇄는 이보다 더 예측하기가 쉬운 일이었다. 인천 지역에서는 오래 전부터 지엠이 철수할 것이라는 소문 아닌 소문이 떠돌고 있었으며, 최근 몇 년 사이에 지엠이 다른 지역에서 보인 ‘경영’ 행태를 보면 예측이랄 것도 없는 예측이었다. ‘미투’ 역시 마찬가지다. 언제 어디서부터 시작하느냐가 문제였지 영원히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넘어갈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상상도 못할 일”인지를 헤아릴 게 아니라 상상도 못할 일 자체를 상상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우선 한반도의 상황과 관련해서 우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보통 평화 체제라고 말을 한다. 과거에 열망하던 방식의 통일이 의제로 올라와 있지는 않은 것 같다. 어쨌든 평화 체제란 무엇일까? 간단하게 전쟁이 없는 상태라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한국과 북한 그리고 주변 국가들의 변화까지를 포함하는 게 평화 체제이고, 또 평화 체제가 이런 변화를 가능케 할 것이다. 물론 세력 관계를 염두에 둘 때 한국이 할 수 있는 일이 제한적이라는 점은 모두가 인정하는 바다. 하지만 약자도 마땅히 해야 할 일만 하는 게 아니라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할 것이다. 전통적인 것은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남북의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하려는 노력일 것이고, 상상도 못할 일은 ‘일방적인 군축’이다.

지엠의 군산 공장 폐쇄에 대한 전통적인 대응은 지원과 일자리 유지일 텐데, 현재 지엠의 입장을 볼 때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 다음으로 나오는 해법이 새로운 산업의 유치 혹은 공장의 전환이다. 새로운 산업을 통해 일자리를 보존하는 것 자체가 현재 나쁜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기술의 전반적인 방향은 ‘생산’과 일자리의 탈동조화脫同調化다. 이 속에서 지엠과 같은 사태는 시작일 뿐이라고 하는 것이 그리 과장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할 수 없이 해야 하는 일을 할 것이 아니라 마땅히 할 만한 일을 찾아야 할 것이다. 생산과 소비, 노동과 여가, 한 마디로 우리가 경제라고 부르는 활동 전반에 대해 다시 사고하는 일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리고 새로운 경제로 가는 전환이 고통스럽다는 것까지 인정하면서 말이다.

독일의 화가인 샤롯데 베렌트 코린트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사실 해방되어야 할 여자란 없다. 바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남자들이 성숙되어야 한다는 것뿐이다.” 오래 전의 것이라 여자와 남자라는 두 개의 젠더만 나오기 때문에 오늘날의 상황에 맞게 고쳐 말해 본다면, 과거와 현재 권력관계에서 조금이라도 우위에 있는 모두가 성숙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이런 질문을 해 볼 수 있다. 모두가 성숙한 인간들로 이루어진 문명은 어떤 문명일까? 기존 문명의 옹호자들은 그걸 무질서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혼돈에서 새로운 질서가 등장할 것이다.

세 가지 사태에 대해 상상도 못할 일을 상상하는 것은 가능하기는 하지만 이를 실행에 옮기거나 실현하는 일은 참으로 어렵거나 현재의 주체 역량을 벗어나 있기까지 하다. 이럴 때 할 수 있는 일은 ‘시간 벌기’일 것이다. 물론 그냥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장기항전의 시간을 구성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당연히 장소와 공간이 필요하다. 장소는 모이는 곳이고 공간은 연결하는 것이다. 그러면 오래 걸리겠지만 시간 벌기는 성공할지도 모르겠다.

 

편집위원회를 대신하여
안효상

 

이 글은 『시대』 2018년 03월호 통권56호에 실린 ‘책 머리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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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헌 국면(?), 무엇을 할 것인가?

개헌국면(?), 무엇을 할 것인가

19세기 전반 프랑스의 유토피아 사회주의자 샤를 푸리에Charles Fourier(1772~1837)는 자신의 ‘사상’과 미래 계획을 구성하면서 인간의 변덕스러움을 주요한 전제로 삼았다. 이를 사회적, 기술적 혁신의 동기에 적용하든 생물학적 돌연변이에 대입하든 그럴듯하다. 하지만 인간은 꽤나 보수적이고 완강하다는 것도 사실이다. 일 년 전 가을과 겨울에 우리는 이를 경험했다. 거의 십 년에 가까운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를 지나면서 극악한 정치적, 사상적 탄압을 경험했음에도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과 행동의 의지는 계기만 있다면 언제든지 터져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입증했다. 광포한 신자유주의 시절을 이십 년쯤 겪었음에도 ‘이윤보다 인간’을 바라는 우리의 또 다른 욕망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87년 민주항쟁이 30주년을 지나면서 우리가 새삼 깨닫는 것은 (민주주의) 제도와 기성 정치의 완강함이다. 거리의 정치가 탄핵이라는 하나의 목소리를 낼 수 있게 했지만, 제도의 완강함은 제도의 정치적, 법적 절차를 따라가도록 했고, 이 경로 의존성은 결국 새로운 대통령의 선출로 끝났다. 물론 이렇게 선출된 대통령은 대중의 열망뿐만 아니라 그 과정도 잘 알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는 분명 기성 제도의 대통령이며 그 구조를 쉽게 뛰어넘을 수 없을 것이다.

물론 그 구조 속에서도 적절하게 통치 혹은 협치의 방법을 배워야 하고, 또 사회운동을 활성화하면서 변화의 힘을 끌어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재까지 그럴 조짐은 잘 보이지 않는다. 얼마 전 대통령이 일 년만 기다려 달라고 한 것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시간의 필요성만 말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 안에 어떤 전략적 판단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사회운동의 힘을 끌어내려는 시도는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통치 혹은 협치도 기성 정치 내에서 쉽지 않을 것이고, 이는 결국 대중에게 정치에 대한 혐오감을 심어 줄 가능성이 더 크다.

이런 이유로, “촛불은 개헌으로 완성된다”라는 구호에서 알 수 있듯이, 제도 자체를 바꾸려는 움직임이 편재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는 개헌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제도 속에서 제도를 바꾸려는 움직임이다. 그렇기 때문에 “개혁이 혁명보다 어렵다”라는 어떤 전임 대통령의 말처럼, 그렇게 제도 안에서 제도를 바꾸는 일이 쉽지 않은 일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다양한 이해관계 속에서 개헌 자체에 대한 요구는 광범위하고 또 강력한 것으로 보인다. 가장 먼저 들 수 있는 것이 권력 구조의 문제다. 박정희 시절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제왕적”이라는 수식어는 구체적인 인격에 따라 사실인 것처럼 느껴진다. 이 반대편에 있는 것이 ‘5년 단임제’다. 이는 충분한 역 사적 근거가 있는 제도이긴 하지만 대의제 정당정치의 책임성이라는 문제를 회피하게 만든다. (아예 모든 선출직의 단임제를 다른 시각에서 시행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직업적 정치가’라는 범주 자체가 사라져야 할 것이다.)

대통령의 권한이 인격에 따라 광범위하게 남용될 수 있다는 데는 모두가 동의한다 해도 이를 어떻게 바꾸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크게 갈린다. 하나는 임기 4년에 중임이 가능한 대통령제다. 다른 하나는 이원집정부제라 불리는 사실상의 내각제다. 여기에 순수 내각제를 더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대의제 정부라는 형태에서 이들 이외에 다른 것을 상상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스위스 같은 예도 물론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한국에서 대중적 호소력을 얻기는 어렵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대통령제와 내각제 가운데 어느 것이 대의제 정부에 적절한지를 따지자면 논리적으로는 내각제가 합당할 것이다. 대통령제는 유권자에 의해 선출된 두 개의 기관이 병립해 있는 양상이며, 현실적으로 대통령이 더 높은 위상을 차지하게 되어 있다. 하지만 입헌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입법 기능은 분명 의회에 있다. 이렇게 된 것은 왕이 부재한 체제에서 왕 대신에 꼭대기에 있는 자리를 만든 게 대통령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최소한 한국의 대통령은 대중의 열망을 대변하며 그 에너지를 하나의 방향으로 집행하는 힘이기도 했다. 게다가 기성 정치에 대한 대중의 불신은 내각제를 새로운 카스트를 위한 장식물에 불과하다고 보게 할 것이다. 그렇다면 대의제에 맞게 의회를 구성하고 의회가 적절한 권한을 가지도록 하는 개혁이 바람직할 것으로 보인다. 이를 위한 선거제도의 개혁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물론 개헌은 권력 구조 때문에만 나온 의제는 아니다. 우선 ‘국민’의 기본권을 제대로 보장하기 위해 헌법 내용을 수정하고 강화할 필요가 있다는 인식에서 개헌에 대한 요구가 나왔다. 이때 기본권 보장은 두 가지 방향을 지니고 있다. 하나는 사회의 변화에 따라, 그동안 주목하지 못했거나 무시했던 권리를 새로운 헌법에 분명히 새겨 넣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주로 ‘정체성’에 근거한 권리로 표현되며, 실질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차별의 금지다. 다른 하나는 추상적으로만 표현되어 있거나 국가의 의무를 분명하게 하지 않는 부분을 구체화하고 강화하는 것이다. 이는 특히 ‘사회권’과 관련이 있다.

기본권 보장과 관련한 개헌의 요구는 한편으로는 한국 사회의 성숙이라는 진화론적 관점에서 제기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기존의 기본권 보장이 역사적이고 특수한 것이며 새로운 지평에서 다시 정의되어야 한다는 관점에서도 제기된다. 예컨대 ‘양성평등’이라는 자유주의적 표현 대신 ‘성평등’이라는 규범을 제시할 때 이것이 현재의 지배적인 사회 질서와 양립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함께 담고 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기본권 보장의 요구는 현재의 사회경제적 질서가 넓은 의미에서의 민주주의와 양립 가능한가라는 의문을 바탕에 깔고 있다. 근원적으로 소유권 보장 및 이윤 추구의 자유라는 가치 위에 자리 잡은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모두가 동등하게 공공의 업무respublica에 참여하는 민주적 공화주의는 충돌하기 마련이다. 물론 역사 적으로 이러한 모순적 결합의 체제는 대중의 요구를 수용하기도 하고 조작하기도 하면서 유지되어 왔으며, 특히 제2차 대전 이후 상당한 활력을 보이기까지 했다. 여기에는 물론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대략적으로 말하자면 러시아혁명으로 성립한 사회주의체제의 이데올로기적 압력, 총력전에 따른 사회적 압력, 자본주의경제의 내적 모순에 따른 경제적 압력 등이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지난 세기말 이러한 압력은 여러 이유로 인해 사라졌고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그 극한에서 작동하고 있다. 이는 금융자본과 대기업의 지배라는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제도로서의 민주주의는 여전히 존재하나 그 실질은 사라진 형해화된 민주주의만 앙상하게 남아 있다.

이런 의문은 사회권 보장을 아주 획기적으로 밀어붙여야 한다는 주장과 경제적 질서의 바탕을 바꾸어야 한다는 견해로 이어진다. 전자의 대표적인 것이 기본소득이며, 후자의 경우 토지 공개념의 강화 및 사회적 경제를 새로운 헌법에 적절하게 포함해야 한다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렇게 보면 이번 개헌은 분명 1987년의 헌법 개정에 맞먹는, 아니 그 이상일 수 있는 커다란 변화일 수밖에 없다. 그런 이유로 제도적 방식의 제도 변화인 ‘개헌’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사실 기성 질서의 요구에 따른 개헌 이외에 의미 있는 개헌, 사실상의 제헌은 혁명이나 이에 준하는 상황 속에서만 가능했다. 물론 지금이 촛불의 연장선에 있는지 새로운 순환이 시작되었는지에 따라 판단이 다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앞서도 말한 것처럼 광화문에 모였던 대중의 힘은 대통령에게 많은 것을 의탁한 후 뒤로 물러섰다. 이 힘이 제도적 제도 변경인 개헌으로 모일지는 의문이다.

그렇다면 우리 앞에 놓인 선택지는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어쨌든 부분적으로라도 긍정적인 내용을 담은, 즉 대통령이 말하듯이 기본권 보장과 지방 분권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개헌을 6월에 이루어내기 위해 힘을 모을 것인가 아니면 좀 더 포괄적이고 제대로 된 개혁의 내용을 담은 개헌을 계속해서 ‘주장’할 것인가? 물론 현실에서 둘은 그리 다르지 않다. 하지만 실제 개헌은 국회의 정치과정을 통과해야 하기 때문에 현실의 정치 지형에는 다른 효과를 낳을 수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가장 어리석었지만 가장 길게 효과를 미친 것은 (실패한) 커다란 변동 뒤에 곧바로 그러한 변동을 기다리는 일이었다. 촛불혁명이 그만큼 성공했고 또 그만큼 실패한 것이라면, 금세 마찬가지 일이 일어나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면 우리야말로 완강한 제도와 변화된 정치 지형 속에서 견디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이를 ‘개헌 국면’에서 실행하는 일은 개헌이 사실상 ‘제헌’이 되도록 하는 활동일 것이다. 물론 이것만으로 개헌이 이루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도리어 이 속에서 우리가 얻어야 하는 것은 이후를 위한 새로운 주체와 조직의 형성일 것이다.

편집위원회를 대신하여
안효상

이 글은 『시대』 2018년 01~02월호 통권55호에 실린 ‘책 머리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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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단과 적폐

농단과적폐

 

마지막 달에 내는 잡지의 머리글이니 짧게라도 올해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올해’란 2017년 1월부터가 아니라 촛불이 시작된 2016년 10월 말부터 지금까지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세상에 드러난 직후 언론에 가장 많이 등장한 단어는 사람, 재단, 기구 따위의 이름을 제외하면 아마도 “농단”일 것이다.

“국정 농단”이라는 어색한 표현에서 ‘농락籠絡’을 떠올린 사람들이 있을 수 있지만, 사실 농단과 농락은 전혀 관계가 없는 말이다. ‘농단壟斷/隴斷’은 높은 언덕이라는 말이고, 『맹자』에 나오는 이야기에서는 그런 언덕에 올라 아래를 둘러보고 세상 돌아가는 것을 파악하고는 그로 인해 이득을 독점하는 것을 뜻한다.

“국정 농단”은 매우 너그럽고 고상한 표현이었다. 검찰이 박근혜 들을 기소할 때의 죄목은 직권남용, 강요 또는 강요 미수, 뇌물 수수, 공무상 비밀 누설 따위일 뿐이다. 따라서 부정 입학, 문화계 블랙리스트, 보안 손님 따위의 사태를 접하고 누군가 ‘농락’을 생각하게 된다면 자연스러운 일일 테다. 남을 교묘한 꾀로 휘잡아 제 마음내로 놀리거나 이용하는 것이 농락이니, 국정을 농락했다고 생각할 수 있으니까.

‘농단’ 세력에 대한 재판은 아직도 진행 중이고, 재판 진행 과정에서도 국민은 농락당하는 느낌이다.

그 인물들에 대한 수사나 재판과는 별도로, 새 정부가 들어선 이후 자주 등장한 단어로는 “적폐積弊”가 있다. 하지만 일찍이 2014년 현충일 추념사에서 당시 대통령 박근혜도 그 단어를 입에 올린 바 있다. “뿌리 깊은 적폐를 해소하지 않고는 국민 안전은 물론 경제 부흥도, 국민 행복도 이루기 어려울 것입니다. 지금이 아니고는 해낼 수 없는 일입니다.” “국민 안전”이 세월호 사건을 생각하고 한 말이라면 참으로 뻔뻔스러운 일이지만, 어쨌든 이때 말한 “적폐”가 언제부터 시작된 것인지는 불분명했다.

이와 달리 문재인 정부의 적폐 청산은 박근혜 정부에서 시작된 것을 겨냥하다가 이명박 정부까지 확장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두 정부를 거치며 ‘오랫동안 쌓이고 쌓인 폐단’을 쓸어 없애겠다는 것이 지금의 “적폐 청산”이다. 국정원에 적폐청산태스크포스가 설치되고 국방부에 적폐청산위원회가 설치되어, 박근혜가 당선되던 대통령 선거에 이명박 정부의 국정원이 ‘댓글 부대’를 운영했음을 밝혀냈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의 적폐 청산 의지를 의심하게 만드는 일은 적지 않다. 국회 인사청문회를 거치며 ‘고위 공직자’들이 하차하는 것이 그렇고, 세월호에서 유골을 발견하고도 쉬쉬하는 것이 그렇고, 청와대 정무수석이 뇌물 혐의로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이 그렇다.

백 번 양보해 이런 것은 일부 개인과 관련된 일이라 치더라도, 정책과 관련해서도 적폐를 청산하지 않고 오히려 그럴듯하게 포장하려는 모습을 문재인 정부는 보이고 있다. 이번 호에서, 박근혜 시절의 “규제프리존”이 “샌드박스”로 이름만 바뀌고 있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후보 시절 사드 배치 문제는 다음 정부에서 결정하자던 대통령은 사드 배치에 적극적이고, 건설 중인 핵발전소 문제는 공론화위원회라는 틀로 책임을 넘겨 공사를 지속할 수 있게 되었다. 한마디로 무엇이 청산할 적폐인지를 놓고 현 정부는 오락가락하고 있다.

행사장에서 대통령 옆에 앉게 되는 사람이 바뀌고, 대통령이 구내식당을 이용하고, ‘국민신문고’가 어느 정권보다 활성화되는 등 직전 정권과는 달리 소통하려는 모습을 보이는 것에는 성공한 듯하다. 탄핵된 대통령을 언론에서 아무 직함 없이 그냥 ‘박’으로 쓰는 것이 어쩌면 가장 큰 변화일지도 모른다.

“신자유주의 종식”이 시대의 과제라고 생각하는 우리로서는 답답할 뿐이다.

답답한 일은 그곳에서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번으로 두 번째인 민주노총 임원 직접선거는 애초의 취지를 보잘것없게 만들고 있다. 새로운 시대, 새로운 정권에 대응하는 전략을 준비해 조합원들과 토론하기보다는 그저 선거 일정을 진행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그리고 이른바 ‘좌파’가 공동으로 대응하기로 했던 시도가 있었지만, 공동의 대응이 불가능하게 끝났다. 반전과 평화를 말하려는 행사에 참가하려던 허영구 평등노동자회 대표는 일본 정부의 입국 불허로 인해 오사카공항에서 조사를 받다가 귀국했다.

이렇게 또 한 해가 지나갔다. 내년에는 좋은 소식을 기대해 본다. 기본권을 강화하자는 국가인권위원회의 개헌 권고안이 적극적으로 논의되고 있다거나, 모든 표가 같은 가치를 갖도록 선거제도 개혁이 진행된다거나, 온국민기본소득운동본부가 이름처럼 많은 국민의 운동을 포괄하는 활동을 한다거나. 한 해 동안 관심과 애정을 보인 모든 분들께 고마움을 전한다.

 

편집위원회를 대신하여
김태호

 

이 글은 『시대』 2017년 12월호 통권54호에 실린 ‘책 머리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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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의 확장과 ‘혁명적 개혁’

민주주의의 확장과 혁명적 개혁

 

지난 10월 20일에 있었던 신고리5,6호기공론화위원회의 공론 조사 결과 발표 및 최종 정책권고안 제시는 우리에게 몇 가지 시사점을 준다. 우선 탈핵과 관련해서 사람들이 보일 수 있는 이중적인 태도를 확인할 수 있었다. 당장 문제가 된 신고리 5, 6호기 건설의 중단과 재개에 대해서는 시민참여단의 59.5퍼센트가 건설 재개에 찬성표를 던져 신고리 5, 6호기는 한국 원자력발전소의 대열에 합류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원자력 발전의 축소, 유지, 확대’와 관련해서는 축소가 53.2퍼센트, 확대가 9.7퍼센트로 ‘장기적으로’ 탈핵으로 가는데 찬성했다. 471명의 시민참여단이 얼마나 대표성이 있는가, 그리고 그리 길지 않은 숙의와 토론 과정을 얼마나 의미 있게 볼 것인가와 상관없이, 장기적으로는 탈핵에 찬성하는 경향이 있지만 단기적으로는 현상 유지를 택하는 경향을 보여 주었다. 여기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을 텐데, 당장 쟁점이 된 건설 중단이냐 재개냐와 관련해서는 이른바 ‘매몰 비용’ 문제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건설 재개 찬성 쪽에서 제시한 ‘수출’, ‘국익’ 같은 것을 들 수 있는데, 이는 결국 ‘경제적 공포’를 부추긴 것이고 여기서 안전과 가치 등은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후 탈핵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의미 있는 로드맵을 제시하는가가 중요한 문제라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서 정부는 10월 24일 국무회의를 통해 ‘탈원전 로드맵’을 의결했다. 이에 따르면 신고리 5, 6호기를 제외한 신규 원전 6기 건설 백지화, 노후 원전 14기의 수명 연장 불허 등을 통해 2038년까지 원전을 14기로 줄인다고 한다. 이와 함께 2030년까지 신재생에너지 비율을 20퍼센트로 높인다고 한다. 끝으로 해당 지역과 산업이 ‘연착륙’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고 한다.

이런 로드맵을 보면서 우선 떠오르는 것은 시간이 매우 길다는 것이다. 탈원전은 직접적으로는 ‘위험한 에너지’를 더 이상 사용하지 말자는 것이지만, 기후변화를 초래하는 기존의 화석에너지 체제에서 재생에너지 중심의 새로운 에너지 체제로 전환하자는 맥락에서도 필요한 것이다. 이를 감안할 때 좁은 의미의 탈핵이 아니라 에너지 체제 전환이라는 큰 맥락에서 시간 계획을 다시 세울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는 에너지 체제의 전환만이 아니라 사회적 전환을 포함하는 것이 될 텐데, 과연 집권 세력이 이러한 상상력과 의지가 있는지는 의문이다.

시민이 참여하는 공론화 과정에 대해서는 대체로 여론이 호의적인 것으로 보인다. 특히 과거 정권에 ‘불통’이라는 트레이드 마크가 있었기 때문에 시민의 직접 참여, 토론, 의견 개진 등의 과정은 그 결과와 상관없이 주목을 받았고, 이후 발전시켜야 할 어떤 것의 지위를 얻었다. 그런데 이 자체를 발전시키는 것과 별개로 기존의 정치과정에 시민의 참여를 어떻게 폭넓게 보장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있다. 예컨대 한국의 헌법은 입법발의권이나 소환 등 직접민주주의의 요소가 하나도 없다. 또한 숙의 민주주의를 위한 조건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말해야 한다. 간단하게 말하면 시간과 돈은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다. 이것도 에너지 체제 전환과 마찬가지로 기존의 경제사회적 삶과 양립하기 어렵다. 그리하여 더 커다란 변화가 요구되고 있다.

 

신고리 5, 6호기를 둘러싼 공론화 과정은 민주주의적인 방식으로 변화 혹은 이행을 추구할 때 나타나는 난점을 보여 준다. 근본적인 문제는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저널리즘 용어로 말할 수 있는 기성 질서의 강고함이다. 사실 동어반복이긴 하지만 강고하고 지배적이기 때문에 우리가 기성 질서라고 부르는 것이다. 기성 질서의 강고함과 그 강고함을 유지하기 위한 유연함은 사실 87년 체제에서도 이미 경험한 바가 있다. 물론 민주주의 체제가 가지는 개방성으로 인해 권리의 진전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고, 체제 자체가 안정적이지 않다는 것도 분명하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적응력과 맞물린 기성 질서의 강고함과 유연함은 언제나 ‘포섭’의 위험을 안고 있다는 것도 분명하다.

특히 오늘날 문제가 되는 것은 혁명 혹은 대중의 봉기마저 흡수하는 민주주의 ‘체제’의 완고함이다. 이때 체제로서의 민주주의는 절차적 정당성뿐만 아니라 소유적 개인주의까지도 어느 정도는 확고하게 자신의 정당한 내용으로 삼고 있다. 현 정권을 탄생시켰다고 할 수 있는 ‘촛불혁명’조차 이런 민주주의 앞에서 무력했다고 할 수 있다. 아니 그 혁명의 주된 요구가 제한된 의미의 민주주의의 회복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적절한 수렴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더 커다란 변화의 가능성은 어디에 있으며, 어떤 전략이 필요한가? 아마 변화의 가능성은 민주주의의 확장과 이 속에서 나타날 틈새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이는 민주주의를 다시 정의하는 것에서 시작할 것이며, 현 체제의 난점과 모순을 찾아내는 일과 함께 이루어질 것이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기본소득개헌운동을 예로 들어보자. 국민의 권리이자 국가의 의무로 기본소득 보장을 새로운 헌법에 넣고자 하는 시도는 민주주의를 확장하려는 시도다. 현행 헌법에도 있듯이 현대 국가가 그 구성원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해야 한다는 것은 공히 인정되는 바다. 하지만 보장의 정도와 방법은 정해진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기존의 사회경제적 체제 속에서 사실상 보장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기본소득을 권리로서 보장하자는 것은 구체적인 방도를 헌법에 넣는 것일 뿐만 아니라 사회경제적 영역으로 민주주의를 확장하려는 시도다. 따라서 이는 커다란 충돌을 가져오거나 아니면 아예 무시당할 시도다. 하지만 담론 투쟁으로서의 이런 시도는 틈새에서 일어날 구체적인 투쟁의 나침반이 될 수 있고, 그렇게 되어야 하게 하려는 노력이다.

아마 틈새는 기성 질서와 실제 사이의 모순 혹은 충돌에서 찾게 될 것이다. 우리가 ‘청년문제’에 주목하면서 청년배당을 실시하는 것이 충분한 기본소득으로 가는 중요한 교두보라고 생각하는 것은 의식했던 그렇지 않던 간에 그런 방향을 지시한다. 제4차 산업혁명과 일자리 없는 미래라는 테제도 거대한 전환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완전고용의 신화와 노동 중심성에 머물러 있는 기성질서의 틈새가 될 수 있다. 물론 이만큼 심각한 것이 재생산 위기와 ‘초고령화 사회’라는 전망이다.

 

틈새를 파고드는 전략은 지난 9월말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열린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 대회BIEN Congress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기본소득의 실시Implementing a Basic Income”이라는 주제에서 알 수 있듯이, 기본소득의 제도화가 구체적인 시야에 들어왔다는 인식 하에 어떻게 하면 부드럽게 기본소득을 제도화할 수 있는가라는 발표가 제법 있었다. 예를 들어 음의 소득세(또는 마이너스소득세)를 “보편적인 방향”으로 개선해서 기본소득에 접근하자라든가 기본소득이 아니라 최저소득 보장을 우선적으로 제기한다든가 하는 접근법 등이다(리스본 대회에 관해 좀 더 자세한 것은 다음 호에 실릴 것이다).

이런 접근법을 그저 기각할 것이 아니라 앞서 말한 틈새를 찾는 시도로 볼 수도 있다. 물론 그것이 틈새를 찾는 것인지 아니면 기성질서에 포섭되는 것인지는 그러한 개혁 조치에 대한 면밀한 검토 속에서 드러날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이상에 비추어 여러 시도를 기각하는 것은 적절한 태도가 아닐 것이다.

이러한 개혁 조치들이 전면적 변화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앞서 말한 민주주의를 다시 정의하며 민주주의를 확장하는 일이 꼭 필요하다. 사실 지금 현 정부에 대한 거의 무조건적인 지지를 보내는 사람들과 우리 사이에 ‘경멸의 폭포수’가 흐르고 있다면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는 ‘새로운 사회 연대성’을 구성하는 서로 다른 지향 사이의 절연이다. 물론 촛불혁명은 죽었고 1주년은 추도식이 될 것이기 때문에 대칭적인 대립은 아니다. 하지만 이를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할 때만 우리의 싸움은 한 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편집위원회를 대신하여
안효상

 

이 글은 『시대』 2017년 11월호 통권53호에 실린 ‘책 머리에’이다.

시대 55호 책머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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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들의 자유와 존엄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개인들의 자유와 존엄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작년 가을과 겨울, 사람들은 광장에서 이런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이게 나라냐?” 이 외침은 근대의 정상 국가에 대한 열망을 담고 있으며, 한국 역사에서 반복적으로 드러났던 통치의 양상에 대한 조소를 띠고 있다. 하지만 최근 이어지고 있는 한반도 위기(?)는 국가에 대한 또 다른 질문을 낳을 수밖에 없다. 국가라는 것의 논리는 무엇인가? 여기서 국가는 물론 정상 국가다.

사실 두 질문은 겹쳐 있다. 후일 역사가들이 좀 더 상세하게 분석하고 치밀하게 서술하겠지만, 대통령 탄핵으로 이어지는 사태의 주요한 계기가 ‘세월호 참사’였다는 것은 분명하다. 통치 권력이 국가 구성원, 즉 정치 공동체의 구성원의 안전을 책임지지 못했다는 대중의 인식은 탄핵으로 이어지는 큰 흐름을 형성했다. 이것이 ‘스캔들’이었던 것은 안전을 책임지지 못한 게 통치자의 무능 때문만이 아니라 무책임과 사사로운 일 때문이었다는 (혹은 대중이 그렇게 느꼈다는) 점 때문이다. 더 나아가 현대 국가의 통치자가 대중과 완전히 분리되어 더 높은 곳 혹은 저 깊숙한 곳에 거처하고 있다는 인식은 자유와 평등의 관념으로 무장한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사실 견디기 힘든 모욕이었다.

이런 이유로 새로운 대통령이 등장했을 때 대중은 환호했다. 이 환호는 어려운 시기에 영웅의 등장을 기대하는 마음이라기보다는 자신과 같은 지평 위에 서 있는 보통사람에 대한 동일시였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그리고 당장 수행해야 하는 과제가 ‘적폐 청산’과 말 그대로의 의미에서의 ‘정상화’이기 때문에 과제의 난이도와 상관없이 방향의 제시만으로도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한반도 위기 속에서 강행되고 있는 사드 배치는 국가의 정상화가 아니라 정상 국가 자체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한다. ‘국가안보’라는 주장은, 사드는 목표로 하는 것을 달성할 수 없는 무기 체계라는 합리적 비판조차 무의미하게 만들며, 더 나아가 강정과 밀양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났듯이 해당 지역 보통사람들의 물질적, 사적 삶 자체를 파괴하는 것도 용인하게 한다. 여기서 ‘자유를 위해 자유를 제한한다’라는 것과 마찬가지의 역설이 발생한다. 사람들의 삶의 안전을 파괴하는 국가 안보는 도대체 무엇인가? 물론 여기에 대한 전통적인 답변이 없는 것은 아니다. 대의를 위해 희생해야 한다든가, 외적 압력 앞에서 정치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단결해야 한다든가 따위의 대답 말이다.

문제는 이런 답변을 그리 쉽게 반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소수자의 권리’는 좌우를 막론하고 국가 정치와 큰 담론에 가로막혔으며, 그나마 어느 정도 이런 권리들이 인정받은 20세기 후반 이후에도 반복적인 다툼을 벌이고 있는 형편이다. 또한 국가와 국가 사이의 충돌을 바라보는 ‘현실주의’ 논리를 넘어서는 틀과 행동도 여전히 발견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그렇다면 보편적인 자유와 평등의 논리는 불가피하게 국가라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부딪혀 축소될 운명인가? 이러한 축소는 힘의 충돌 속에서 결국 자유와 평등의 실현 불가능성으로 이어지는가? 이런 체념을 반박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다시 이상주의를 불러내는 일일 수밖에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건 선제적 예방 공격이 아니라 원리의 선제적 실현 노력이다. 대표적인 시도는 일방적 군축이다. 물론 전략적 사고까지 포기하자는 것은 아니다. 다자간의 힘의 균형 속에서 일방적 군축을 점진적으로 실현할 경우, 이는 그 무엇보다 현실주의적인 것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정치 공동체 내에서 개인과 개별 집단의 권리는 어떻게 보장되는가? 사실 소박하게 말하면 차이를 인정하면 될 일이다. 그런데도 동성애에 대한 일부 기독교계의 태도에서 볼 수 있듯이 차이의 인정은 고사하고 차이를 악마로 보고 처벌하려는 태도가 만연해 있다. 동성애를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개인의 성향과 지향대로 살겠다는 것에 불과한데도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비대칭성 및 지배의 문제와 만난다. 그저 차이가 아니라 어떤 것은 ‘우월’하고 어떤 것은 ‘열등’하며 또 어떤 것은 지배적이고 다른 것은 그렇지 않다.

이를 타개할 수 있는 한 가지 가능한 경로는 말 그대로의 의미에서 급진적 변화다. 하지만 역사의 경험은 급진적 변화조차 또 다른 지배적인 사회질서를 낳았다는 점을 보여 준다. 따라서 급진적인가 아닌가는 별개의 문제라 할 수 있다. 도리어 문제는 변화의 방향과 과정일 수 있다. 특정 집단의 해방인가 개인들의 해방인가, 하나의 지향을 가지는 변화인가 다층적인 변화인가? 물론 여기에는 이런 질문이 따라 나올 수 있다. 해당 사회, 즉 정치 공동체의 공통의 목표란 없는 것인가? 이에 대한 대답은 이렇다. 개인들의 자유와 존엄을 지키는 것이 최고의 목표다. 그렇다면 변화의 과정도 계속해서 이러한 목표를 향해 조정되어 가는 경로를 택해야 할 것이다. 하나의 변화가 개인들의 자유와 존엄을 확대하고 보장하며 ‘궁극적’으로도 그러한 방향 말이다.

기본소득 아이디어가 좀 더 현실감 있게 부상하고 있는 오늘날 이런 사고방식은 매우 중요한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기본소득을 둘러싼 논의는 주로 그 효과와 필요성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매우 필요하고 적절하긴 하지만 충분하지는 않다. 과연 기본소득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기본소득은 그 무엇보다 개인들의 자유와 존엄을 위한 것이다. 정말로 개인들의 자유와 존엄이 보장될 수 있다면 정치 공동체에 대한 우리의 시각도 바뀔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기본소득을 보장하는 내용을 새로운 헌법에 넣자는 시도는 그만큼의 의미가 있다. 다른 무엇보다 개인들의 자유와 존엄의 개인적인 물질적 기초를 이룰 수 있는 기본소득의 보장을 분명한 권리로 확보하고 이를 국가의 의무로 삼는다는 것은 매우 간단한 요구처럼 보이지만 심원한 목표와 역동적인 과정을 겨냥한 것이다. 그러니 당장은 한반도 위기 그리고 기타 정치적 개혁에 가려 크게 주목을 받고 있지 못하지만 기본소득을 헌법으로 보장하자는 요구는 커다란 발걸음이 될 것이다.

 

편집위원회를 대신하여
안효상

 

이 글은 『시대』 2017년 10월호 통권52호에 실린 ‘책 머리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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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국민주권 시대, 새로운 사회 구성의 연대를 위하여

새로운 국민주권시대,새로운 사회 구성의 연대를 위하여

 

1848년혁명 당시 민주파의 지도자였던 르드뤼-롤랭Ledru-Rollin은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현대 대중 정치의 중요한 측면을 드러냈다. “나는 저들의 지도자다. 나는 저들을 따라가야 한다.” 물론 좀 더 근본적인 사회변혁을 원하던 사람들은 그의 이 말을 조롱거리로 삼기도 했으며, 이를 가리키는 꽤 오래된 말이 있다. 대중 추수주의! 하지만 계몽, 이성, 지도라는 말로 행해졌던 참혹한 20세기의 사건들을 뒤로 한 이후, 누구도 함부로 ‘전위의 지도’를 말하기 어려워졌다. 게다가 포스트민주주의 하에서 점점 더 우스꽝스럽거나 철면피하거나 아무 생각이 없는 정치 지도자를 경험한 이후에는, 도대체 지도자라는 게 무엇인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피해 갈 수 없는 실정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르드뤼-롤랭의 말을 예시적인 것으로 읽으면서 긍정성을 부여할 수 있겠다.

그렇지만 여전히 또 다른 질문이 남아 있다. “따라가야” 할 “저들”이 어디에 있는가? 좀 더 근본적으로, “따라간다”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전자는 ‘대중의 형성’ 혹은 ‘주체의 형성’이라는 말로 바꾸어 쓸 수 있을 것이다. 후자는 ‘지도자와 대중의 관계’ 혹은 ‘지도자가 하는 행위에 대한 파악’으로 재개념화할 수 있다.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정치적) 주체화를 경험하는 것은 호명과 요구의 발화를 통해서다. 이때 호명은 사건에 의해 이루어지고, 요구의 발화는 처지의 인식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런 계기 자체에 대한 이해도 문제이긴 하지만, 더 큰 문제는 호명과 요구의 발화가 얼마나 넓은 지반 위에서 이루어지는가, 다시 말해 다수를 동원할 정도로 공통성이 있는가다. 한때 노동자 ‘계급’이 양적으로 다수일 뿐만 아니라 질적으로 변화의 ‘사명’을 지닌다고 생각하던 시절에 이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노동자의 파편화, 다른 요구 집단의 등장으로 인해 전반적인 변화의 공통 지반과 공통 요구가 무엇인지가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함께 주목받기 시작한 것이 ‘연대’라는 개념이다. 원래 연대는 중세적 질서가 해체된 이후 공적 단위인 국가와 개인 이외에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어떻게 사회를 구성할 것인가라는 문제의식에서 나온 것이다. 이는 고용노동과 사회보험이라는 형태로 구체화되면서 현대 국가와 사회의 기본적인 구성 원리로 자리 잡게 된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연대는 서로 다른 요구 집단 사이의 이해, 관용, 협력 등을 가리킨다. 간단하게 말해, 다르지만 함께할 수 있는 여지와 목표를 이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것이다.

지도자와 대중의 관계와 관련해서 우리는 카리스마적 지도자라는 초월적 이해(베버), 고차원적 의식의 투입 및 청교도적 삶이라는 변증법적이면서도 도덕적인 이해(레닌), 유기적 지식인이라는 생물학적 이해(그람시) 등의 전범典範이 있다. 카리스마적 지도자는 결과론적 이해이기 때문에 이를 성취할 수 있는 합리적인 경로를 파악하기 어렵다. 레닌의 이해 방식은 앞서 말한 역사적 결과물 때문에, 그리고 개인들의 역량과 감수성의 고양 때문에 환영받기 어렵다. 유기적 지식인은 목표와 태도를 가리키기는 하지만 생물학적 비유가 초월적 인식과 난점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과정에 대한 인식을 어렵게한다.

오늘날에는 지도자보다 집단 지성과 자발적 행위가 강조되고 있다. 물론 반대편에서는 ‘스타’에 대한 열망이 있다. 하지만 스타는 집단적 열망과 개인들의 바람이 잠시 머무르는 고정점이라고 할 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집단적 열망과 개인들의 바람이 흐르게 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대중조직에 대한 스탈린적 의미 부여(전달 벨트)와 반대의 의미에서 통로(채널)라는 관점에서 조직과 활동을 이해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얼마 전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100일을 맞이하는 기자회견 자리에서 “진정한 국민주권 시대가 시작되었다”라고 천명했다. ‘촛불혁명’의 힘으로 기존의 정치과정이 변경되면서 대통령 자리에 오른 사람이기에 당연한 말을 했다고 할 수 있고, 어쨌든 현행 헌법 체제 하에서도 할 만한 평범한 말로 치부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해, ‘립 서비스’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이상이 있어 보이며, 아니 우리가 거기에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고 구성해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이 어떤 의미로 국민주권을 말했는지는 사실 불분명하지만, 개헌에 관해 언급하면서 약간의 실마리를 주긴 했다. 그는 중앙 권력 구조 개편에 대한 정치권(국회)의 합의가 없더라도 “지방분권과 국민 기본권 확대” 개헌을 대통령과 행정부 차원에서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민주주의가 제도화된 오늘날 왜 국민 기본권이 문제가 되는 것일까? 한 가지는 역사적, 진화적으로 이해하는 방식이 있을 수 있다. 프랑스혁명이 인간과 시민의 자유와 평등을 천명했지만 현실에서는 일부만이 이를 향유할 수 있었고 따라서 그 이후의 역사는 사실상 인간과 시민에 포함되지 못했던 사람들이 동등한 권리를 얻기 위해 투쟁한 역사라는 이해가 그것이다. 이러한 일은 “차별 철폐”라는 구호 아래 계속되어 온 일이다. 다른 한 가지는 최소한 2차 대전 이후 형식적으로는 자유와 평등, 동등한 권리를 누리는 것처럼 보였지만 특히 최근 들어 사실은 그렇지 못하다는 이해 방식이다. 이를 어떤 사람들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화합과 불화”라는 말로 설명하기도 한다. 자본주의의 특정한 시기, 예컨대 장기 호황의 황금기에는 자본주의가 민주주의의 토대 위에서 번성했고 또 민주주의의 토대를 일정 정도 마련했지만, 이른바 신자유주의의 발흥 속에서 자본주의는 민주주의의 토대를 침식했고 둘의 관계는 불화에 빠졌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본권 확대가 다시 형식적 명문화의 과잉으로 귀결되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87년 체제를 경험하면서 모두가 분명하게 느낀 것은 헌법이 한계를 정해 주긴 하지만 그 자체로 포지티브한 현실의 결과물을 그냥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여기서 권리 확대에 대한 역사적 인식을 다시 떠올릴 필요가 있다. 이른바 당사자가 자기 목소리를 내지 않았을 때 헌법에 보장된 권리는 현실의 꽃이 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현재 사회 각계에서 ‘개헌운동’을 벌이고자 하는 것은 이런 맥락일 것이다.

하지만 침식당한 민주주의의 토대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이와 관련해서 우리는 꽤 오래 전부터 기본소득을 포함한 새로운 경제체제가 요구된다고 말했다. 물론 이 자체가 여전히 충분히 구체화된 것은 아니었다. 그건 우리의 사고실험이 게을러서만은 아니었다. 한편으로는 구체적 요소들을 발견해야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성의 승리를 가져올 이성적인 사람들의 구성이 필요했다. 전자는 제4차 산업혁명이라는 말로 상징되는 경제의 구조적 변동과 연관된 것이며, 후자는 촛불혁명의 뒤를 이을, 새로운 사회를 구성하려는 에너지의 결합에 의해 가능할 것이다. 이때 필요한 것은 새롭게 사회라는 것을 구성할 수 있는 개인과 집단들의 연대일 것이다.

 

편집위원회를 대신하여
안효상

 

이 글은『시대』 2017년 09월호 통권51호에 실린 ‘책 머리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