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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즘과 해안선

임영근 정치경제연구소 ‘대안’ 상임연구원

초기 조건의 민감성을 뜻하는 과학 용어인 ‘나비효과’는 이제 일상용어로 흔히 쓰이게 되었다. 제임스 글릭은 『카오스』 20주년 기념판 서문에서 나비효과가 대중화된 계기로 1993년에 상영된 영화 《쥐라기공원》에 나온 대사를 꼽고 있다. “나비 한 마리가 북경에서 날갯짓을 한 번 하면, 뉴욕 센트럴파크에서 화창한 날씨가 아니라 비가 내릴 수 있다.” 그 뒤로 ‘나비효과’는 말뜻 그대로 나비효과를 일으키며 대중문화에서 일상생활에 이르기까지 퍼져 나가 지금은 아주 흔히 쓰이는 상투어가 되었다.

나비효과는 1960년대 에드워드 로렌츠가 최초로 과학적으로 규명했지만, 일상생활에서 겪는 나비효과에 대해서 이미 느끼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제임스 글릭도 마찬가지이지만, 나비효과를 설명하는 서양의 교양 과학책에 흔히 인용되는 서양의 민요가 있다.

못이 없어 편자를 잃었다네
편자가 없어 말을 잃었다네
말이 없어 기병을 잃었다네
기병이 없어 전투에 졌다네
전투에 져 왕국을 잃었다네!

못 하나가 없어서 왕국을 잃었다는 과장된 노래가 오래도록 살아 남았다는 것은 사람들의 마음에 공감을 안겨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처음에 시작된 사소한 잘못이 걷잡을 수 없는 재앙으로 바뀌는 일이 드문 일은 아니다. 나비효과가 일상에서 흔히 느낄 수 있는 효과라면, 동양에도 그런 효과를 알아차리고 표현한 작품이 틀림없이 있을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중국의 과학자 장톈룽은 『나비효과의 수수께끼』 서문에서 위의 민요에 이어 한시 한 편을 인용하고 있다. 북송 때의 시인, 소동파로 흔히 부르는 소식蘇軾(1037∼1101)의 시다.

용광사에서 베어 얻은 대나무 두 개
북쪽으로 가지고 돌아가 만인에게 보여 줄 텐데
대나무 속에 든 조계의 물 한 방울
크게 불어 강서의 십팔탄을 일으키네

斫得龍光竹兩竿(작득용광죽양간)
持歸嶺北萬人看(지귀영북만인간)
竹中一滴曹溪水(죽중일적조계수)
漲起江西十八灘(창기서강십팔탄)

중국 선종禪宗의 제6조로서 육조대사六祖大師로 불리는 혜능慧能(638∼713)이 보림사寶林寺에 자리를 잡으면서 남종선南宗禪이 시작되었는데, 보림사가 있던 곳이 광둥성廣東省 조계曹溪였다. 조계는 혜능의 별호로 쓰이기도 했다. 십팔탄은 중국어 발음으로는 스바탄인데, 장시성江西省에 있는 물살이 거세고 험난한 협곡을 이르는 말이다. 장수이강章水과 궁수이강貢水이 북류하여 간저우赣州에서 합류하는데, 여기서부터 완안萬安에 이르는 구간이다. 어찌나 물살이 사나운지 열여덟 번의 고비를 넘어야 건널 수 있다는 뜻에서 “스바탄十八灘”이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대나무 속에 든 조계의 물 한 방울이 스바탄의 거센 물길을 일으키듯이 혜능의 남종선이 중국 전역에 파란을 일으키며 퍼져 나가기를 염원하는 소동파의 바람이 물씬 풍겨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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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 왕자와 천장의 눈

임영근 정치경제연구소 ‘대안’ 상임연구원

종교적 신념을 가진 사람들은 종교에는 도덕성을 떠받치는 강력한 힘이 작용한다고 믿는 듯하다. 이런 생각을 다음과 같은 시나리오에서 엿볼 수 있다. 커다란 방에 이 세상에서 딱 하나밖에 없는 예술품이 설치되어 있다고 상상해 보자.

방 중앙의 작은 테이블 위에 아름답고 멋지고 난해한 예술 작품이 놓여 있다. 다채로운 색깔의 온갖 손잡이와 황금빛 지렛대, 반짝이는 크리스털, 은빛의 공, 귀여운 종, 스파이크가 박힌 바퀴, 붉은 바큇살, 부서지기 쉬운 나뭇가지, 거미집처럼 얽힌 철사 등이 상상 속에서나 나올 것 같은 사이키델릭한 형태로 배열되어있어서 정말로 화려해 보인다. 그런데 이 작품은 손상되기 쉬운데다 유일한 것이기도 하다. 이 작품을 만든 작가는 이미 고인이 되었다. (필 주커먼, 『종교 없는 삶』, 43~4쪽.)

이제 이 방에 아홉 살짜리 어린이를 들여보내야 한다. 부서지기 쉬운 이 작품에 손 대지 않고 잘 보고 나올 수 있도록 미리 당부하고자 한다면 어떻게 말해야 할까? 우선 처음 떠올릴 수 있는 방법은 처벌과 보상으로 아이의 마음을 다잡는 방법이다. “방에는 너 말고 아무도 없을 거야. 하지만 예술 작품을 건드리면 안 돼. 아주 섬세하고 부서지기 쉬운 데다 하나뿐인 작품이거든. 또한 천장에 작은 구멍이 있어서, 이 구멍으로 교장 선생님이 널 살펴볼 거야. 선생님의 눈이 내내 널 지켜볼 거야. 만약에 네가 작품에 손을 대면, 선생님이 그걸 보고 단단히 화가 날거야. 그래서 네가 방에서 나오면 큰 벌을 내릴 거야. 하지만 네가 작품을 건드리지 않고 방에서 나오면 네게 멋진 상을 주실 거야.”

천장에 난 작은 구멍으로 지켜보는 “교장 선생님”에서 하느님을 쉽게 떠올릴 것이다. 하느님이 늘 지켜보는 가운데 벌을 피하고 상을 받기 위해 우리가 도덕적으로 행동한다는 주장을 뒷받침해주기 위해 지어낸 짧은 이야기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이런 시나리오를 별로 탐탁지 않게 여길 듯하다. 사실, 필 주커먼이 여러 무신론자를 인터뷰하면서 들은 이야기 가운데 63세의 소냐라는 여성이 들려준 것이라고 한다.

소냐는 똑같은 상황에서 방으로 들어갈 어린이에게 이렇게 당부할 수 있다고도 한다. 좀 더 세련되고 공감을 이끌어내는 방법이다. “방에는 너 말고 아무도 없을 거야. 하지만 예술 작품을 건드리면 안돼. 아주 섬세하고 부서지기 쉬운 데다 하나뿐이 작품이거든. 손을 대면 사고로 부서지거나 얼룩이 묻을 수도 있어. 작품이 달라질 수도 있지. 작품이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지면 다른 아이들은 본래의 작품을 못 보게 될 수도 있어. 물론 네가 작품에 손을 대서 작품이 사고로 망가져도, 우린 널 벌하지는 않겠지만 굉장히 슬플 거야. 그래서 네가 작품을 건드리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라.”

“천장의 구멍”을 통해 지켜보는 신 없이도 얼마든지 도덕적 행동이 가능하다는 무신론자의 태도를 보여 준다. 예술 작품의 가치에 대해 이해하기 때문에 처벌이나 보상 없이도 도덕적 행동이 가능하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시나리오다. 무신론자의 입장에서는 이런 해피엔딩을 기대하겠지만, 모든 인류 문화에 오랫동안 갖가지 종교가 번성하는 것을 보면 그저 작은 소망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개구리 왕자」를 읽으며 우리 마음에 일어나는 일

종교 현상이 다양한 만큼이나 종교의 기원을 설명하는 이론 또한 다양하다. 곤혹스러운 자연현상이나 사물의 기원을 설명하기 위해서, 아니면 악과 고통이 존재하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 종교가 필요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또는 결국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서 필연적으로 종교적 설명이 필요하다거나, 불안을 잠재우며 안락한 세계를 만들기 위해 종교가 생겨났다는 설명도 있다. 또 사회질서를 세우거나 도덕성을 뒷받침하기 위해 종교가 생겨났다는 견해도 있다. 그런게 아니라 그저 이성이 잠들어 있어서 그런 미신에 매혹되었을 뿐이라는 해석도 있다. 이런 설명들이 모두 일리가 있고 종교의 다양한 효과를 잘 설명해 주는 듯하다. 하지만 이런 설명은 근본적인 뭔가를 놓치고 있다는 느낌을 떨치기 어려운 것 또한 사실이다.

종교의 뿌리가 깊은 만큼, 종교적 심성은 우리 마음에도 깊이 뿌리 박혀 있는 어떤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종교를 쉽게 받아들이고 전파하게 하는 우리 마음의 작동 방식에서 종교의 기원을 찾는 학자가 있어 읽어 보았다. 이번 글은 파스칼 보이어가 쓴 『종교, 설명하기』에 나온 내용을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심리학자이자 인류학자인 파스칼 보이어는 카메룬에서 인류학 현지 조사를 하면서 팡족의 전통 종교를 연구한 결과를 이 책에 담았다.

우선, 널리 알려진 민담 가운데 「개구리 왕자」를 떠올려 보자. 이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여자아이들이 개구리와 공주가 뽀뽀하는 장면에서 “아이, 징그러워!” 하며 얼굴을 찌푸리던 기억이 난다. 그때 나는 ‘개구리가 왕자였다니, 참 신기한 이야기네.’ 하고 이야기에 끌렸던 것 같다. 그런데 나나 여자아이들이나 이 이야기를 따라가며 듣는데 아무 어려움이 없었다. 개구리가 공주가 연못에 빠뜨린 황금 공을 찾아줄 테니 결혼해 달라고 말하는 순간부터 더 이상 개구리는 개구리가 아니라 사람처럼 여겨지게 된다. 그 뒤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행동을 해도 전혀 거부감 없이 스토리를 따라가게 된다. 개구리가 어떻게 말을 하고 결혼해 달라고 하고 같이 음식을 먹게 해 달라고 하며 같은 침대에서 잘 수 있게 해 달라고 할 수 있는가 하는 생각조차 들지 않고 스토리를 따라가는 것이다.

더 이상 개구리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의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 해도 개구리로서의 특성을 잃어버리는 것은 아니다. 폴짝폴짝 뛴다든지 피부가 끈적끈적 하다든지 하는 특성을 우리는 잊어버리지 않는다. 그러니 개구리가 뽀뽀하는 장면에서 “아이, 징그러워!” 하는 반응을 보인 것도 당연한 일이다. 여담이지만, 다시 읽어본 그림 형제 판본에서는 키스하는 장면이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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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스러운 것과 속된 것

임영근 정치경제연구소 ‘대안’ 상임연구원

저 아랫동네 누구네 집에서 상량식이 열린다고 했다. 초가집이 하나둘씩 신식 집으로 바뀌던 70년대 초의 일이다. 어린 나이에 상량식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그 말뜻을 이해할 수는 없었다. 새집이 번듯하게 세워진 것을 축하하며 잔치를 벌이는 자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아무튼 상량식이 뭔지는 몰라도 떡과 고기를 얻어먹을 수 있겠다는 기대에 부풀어 상량식이 열리는 곳으로 몰려갔다.

벌써 집 마당에는 아이들과 동네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그런데 번듯한 집은 보이지 않고 기둥 뼈대만 서 있었다. 수수깡으로 만든 집처럼 벽도 문도 없이 얼개뿐이었다. 집을 이제 막 짓기 시작한 것 같은데 중요한 행사로 여겨지는 것이 이해하기 어려웠다. 잔치 음식이 많이 나올 것 같지 않는 작은 불안감도 한편에 있었다.

왁자지껄한 가운데 어떤 아저씨가 높은 보 위에 앉아 있었다. 차림새로 보아 집 짓는 목수처럼 보였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하얀 광목천을 몸에 휘감고 있었다. 두 다리를 벌리고 보 위에 앉아 있더니 아주 조심스럽게 앞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가운데 쪽으로 오려는 것 같았다. 높이가 2미터를 넘는 곳이라 앉아 있기만 해도 아찔할 텐데 양손을 앞으로 짚으며 천천히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높은 보 위에서 움직이는 목수를 향해, 잘 버틴다, 무서워 떠는 거 아니냐, 하는 농담을 던지는 아저씨들도 있었던 것 같다.

그런 농담에도 그저 가볍게 웃어넘기며 목수는 침착하게 움직여 얼추 가운데에 이르렀다. 몸에 두른 광목을 풀어 보를 몇 번 휘감은 뒤 양 옆으로 늘어뜨렸다. 아래 있던 아저씨가 광목 끝을 잡아 양쪽에서 넓게 펼쳤다. 그런데 그때 보 위에 있는 목수는 큰 닭 한 마리를 잡고 있었다. 몸에 두른 광목 안에 닭을 넣고 왔는지 아니면 다른 사람이 건네준 것인지 기억나지는 않는다. 높은 곳에 있는 목수에게 닭을 건네주려면 또 한 사람이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 할 테니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내 기억에는 조금씩 움직이던 목수가 어느 순간 닭 한 마리를 한 손에 들고 다른 손에 칼을 든 장면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아마 그 다음에 무슨 제문 같은 것을 읽는 그런 순서가 진행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이날 상량식의 하이라이트는 희생 제의를 치르는 것으로 끝났다. 목수 혼자서 닭 모가지를 댕강 자르고, 붉은 피가 하얀 광목에 뿌려지고, 머리 잃은 닭이 피를 흩뿌리며 하얀 광목으로 날아가고.

성스러운 것과 속된 것

엘리아데의 『성과 속』을 읽으며 떠오른 기억이다. 미르체아 엘리아데Mircea Eliade(1907~1986)는 루마니아 출신의 종교신화학자인데 20세기 사상사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엘리아데가 보기에 인간은 태생적으로 종교적 인간이다. 그런 “종교적 인간에게 공간은 균질하지 않다.” 어떤 공간이든 성스러운 공간과 속된 공간으로 구별하여 인식하게 된다. “공간 내부의 단절과 균열을” 몸으로 느끼며 사는 존재가 종교적 인간인 것이다. 성스러운 공간은 “힘이 있고 의미가 깊은 공간”이고, 성스럽지 않은 공간, 즉 속된 공간은 “일정한 구조와 일관성이 없는 무형태의” 공간이다.

이런 공간의 구분을 볼 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가 문지방이다. 어렸을 때 문지방에 올라서거나 걸터앉을 때는 물론이고 그저 문지방을 밟고 지나갔다는 이유만으로 할머니에게 호되게 혼이 난 경험이 있다. 왜 이처럼 문지방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는지 엘리아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집의 문지방을 넘어갈 때에 행하는 의례는 많다. 문지방을 향하여 절을 하거나 몸을 엎드리거나 경건하게 손을 대는 등의 여러 가지가 있다. 문지방에는 외적의 침입뿐 아니라 악마나 페스트와 같은 질병을 가져오는 힘의 침입을 방지하는 수호신 혹은 수호령이 거주하고 있다. 문지방 위에서 수호신에게 공물을 바치는 경우도 있다. 어떤 고대 동양 문명(바빌로니아, 이집트, 이스라엘)에서는 판결의 장소를 문지방 위에 두기도 하였다. 문지방과 문은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방법으로 공간 연속성의 단절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점에서 중대한 종교적 의미를 볼 수 있는데, 왜냐하면 문지방과 문은 한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의 이행의 상징이자 매개자이기 때문이다.
(엘리아데, 『성과 속』, 58쪽. 강조는 원문)

성과 속을 가르는 문지방의 의미는 오늘날의 교회에서도 뚜렷이 드러난다. 흔히 교회는 성역聖域으로 여겨지는데 교회의 문지방을 통해 공간의 연속성이 단절된다. 이런 교회의 문지방을 엘리아데는 “두 세계를 구분하고 분리하는 한계이자 경계선이고 국경인 동시에 그러한 세계들이 서로 만나고 속된 세계에서 성스러운 세계로 이행할 수 있는 역설적인 장소”라고 말한다. 성역은 신들이 지상으로 강림하는 곳이기도 하고 “인간이 상징적으로 천상으로 올라갈 수 있는 통로”가 있는 곳이다. 그러므로 천상계로 올라갈 수 있는 문이 있어야 한다.

엘리아데가 보기에 “종교적 인간”은 이런 성스러운 공간에 살고자 하는 욕망을 추구하는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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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익는 냄새에 홀린 토끼

임영근 정치경제연구소 ‘대안’ 상임연구원

국민학교 들어갈 즈음에 할머니께서 낡은 책상을 하나 얻어 오셨다. 어머니, 아버지 모두 타지로 돈 벌러 나가시고, 할머니, 나, 동생 이렇게 셋이서 둘째 이모네 밧거리(바깥채)에 살 때였다. 쫓기다시피 막 돌아온 고향이라, 살림살이라곤 이불 몇 채가 전부인 단칸방이었다.

단칸방에 낡은 책상이나마 떡 하니 놓이니 너무 기분이 좋았다. 누런색 합판을 대고 만든 싸구려 책상이라 여기저기 긁힌 자국도 많았고, 내 키에 비해 터무니없이 커서 책상 앞에 앉으면 가슴팍까지 올라오기도 했지만, 그런 것쯤은 아무 문제도 아니었다. 친구들과 뛰놀다 들어와 책상에 앉아 숙제를 할 때면 시간 가는 줄 몰랐고, 아무 할 일이 없을 때에도 그저 책상에 한참을 앉아 있곤 했다.

장작이 귀해, 밥은 일출봉 분화구에서 베어 온 촐을 지펴 해 먹었다. 육지에서는 ‘꼴’이라고 부른다는 걸 한참 뒤에 알게 되었다. 베어온 촐로 지붕을 이고 새끼를 꼬아 줄로도 썼지만, 불을 지피는 데도 맞춤이었다. 불을 지펴 밥을 할 때면, 옆에서 할머니는 “솔솔 지드라. 와랑와랑 해분다.” 하고 당부하셨다. 한꺼번에 촐을 넣으면 활활 타오르니 조금씩 살살 지피라는 말씀이었다.

어느 정도 불을 지피고 나면, 촐이 작은 벌레처럼 잘게 부서지며 빨간색 불빛이나 노란색 불빛을 내뿜으며 일렁일렁 거리다가는 조금씩 회색빛 재로 바뀌며 아래에 쌓여 갔다. 부지깽이로 괜히 일렁거리는 불빛을 쿡쿡 찔러 보기도 하고, 촐을 살짝 들어 주어 불이 확 달아오르게 하는 장난을 치기도 했다. 따스하게 번져오는 온기도 좋았지만, 빨갛고 노랗게 꿈틀거리며 달아오르는 불빛 하나하나를 바라보는 것도 좋았다. 그렇게 층층이 쌓이며 환하게 이글거리는 불빛은 한참을 들여다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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