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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단과 적폐

농단과적폐

 

마지막 달에 내는 잡지의 머리글이니 짧게라도 올해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올해’란 2017년 1월부터가 아니라 촛불이 시작된 2016년 10월 말부터 지금까지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세상에 드러난 직후 언론에 가장 많이 등장한 단어는 사람, 재단, 기구 따위의 이름을 제외하면 아마도 “농단”일 것이다.

“국정 농단”이라는 어색한 표현에서 ‘농락籠絡’을 떠올린 사람들이 있을 수 있지만, 사실 농단과 농락은 전혀 관계가 없는 말이다. ‘농단壟斷/隴斷’은 높은 언덕이라는 말이고, 『맹자』에 나오는 이야기에서는 그런 언덕에 올라 아래를 둘러보고 세상 돌아가는 것을 파악하고는 그로 인해 이득을 독점하는 것을 뜻한다.

“국정 농단”은 매우 너그럽고 고상한 표현이었다. 검찰이 박근혜 들을 기소할 때의 죄목은 직권남용, 강요 또는 강요 미수, 뇌물 수수, 공무상 비밀 누설 따위일 뿐이다. 따라서 부정 입학, 문화계 블랙리스트, 보안 손님 따위의 사태를 접하고 누군가 ‘농락’을 생각하게 된다면 자연스러운 일일 테다. 남을 교묘한 꾀로 휘잡아 제 마음내로 놀리거나 이용하는 것이 농락이니, 국정을 농락했다고 생각할 수 있으니까.

‘농단’ 세력에 대한 재판은 아직도 진행 중이고, 재판 진행 과정에서도 국민은 농락당하는 느낌이다.

그 인물들에 대한 수사나 재판과는 별도로, 새 정부가 들어선 이후 자주 등장한 단어로는 “적폐積弊”가 있다. 하지만 일찍이 2014년 현충일 추념사에서 당시 대통령 박근혜도 그 단어를 입에 올린 바 있다. “뿌리 깊은 적폐를 해소하지 않고는 국민 안전은 물론 경제 부흥도, 국민 행복도 이루기 어려울 것입니다. 지금이 아니고는 해낼 수 없는 일입니다.” “국민 안전”이 세월호 사건을 생각하고 한 말이라면 참으로 뻔뻔스러운 일이지만, 어쨌든 이때 말한 “적폐”가 언제부터 시작된 것인지는 불분명했다.

이와 달리 문재인 정부의 적폐 청산은 박근혜 정부에서 시작된 것을 겨냥하다가 이명박 정부까지 확장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두 정부를 거치며 ‘오랫동안 쌓이고 쌓인 폐단’을 쓸어 없애겠다는 것이 지금의 “적폐 청산”이다. 국정원에 적폐청산태스크포스가 설치되고 국방부에 적폐청산위원회가 설치되어, 박근혜가 당선되던 대통령 선거에 이명박 정부의 국정원이 ‘댓글 부대’를 운영했음을 밝혀냈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의 적폐 청산 의지를 의심하게 만드는 일은 적지 않다. 국회 인사청문회를 거치며 ‘고위 공직자’들이 하차하는 것이 그렇고, 세월호에서 유골을 발견하고도 쉬쉬하는 것이 그렇고, 청와대 정무수석이 뇌물 혐의로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이 그렇다.

백 번 양보해 이런 것은 일부 개인과 관련된 일이라 치더라도, 정책과 관련해서도 적폐를 청산하지 않고 오히려 그럴듯하게 포장하려는 모습을 문재인 정부는 보이고 있다. 이번 호에서, 박근혜 시절의 “규제프리존”이 “샌드박스”로 이름만 바뀌고 있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후보 시절 사드 배치 문제는 다음 정부에서 결정하자던 대통령은 사드 배치에 적극적이고, 건설 중인 핵발전소 문제는 공론화위원회라는 틀로 책임을 넘겨 공사를 지속할 수 있게 되었다. 한마디로 무엇이 청산할 적폐인지를 놓고 현 정부는 오락가락하고 있다.

행사장에서 대통령 옆에 앉게 되는 사람이 바뀌고, 대통령이 구내식당을 이용하고, ‘국민신문고’가 어느 정권보다 활성화되는 등 직전 정권과는 달리 소통하려는 모습을 보이는 것에는 성공한 듯하다. 탄핵된 대통령을 언론에서 아무 직함 없이 그냥 ‘박’으로 쓰는 것이 어쩌면 가장 큰 변화일지도 모른다.

“신자유주의 종식”이 시대의 과제라고 생각하는 우리로서는 답답할 뿐이다.

답답한 일은 그곳에서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번으로 두 번째인 민주노총 임원 직접선거는 애초의 취지를 보잘것없게 만들고 있다. 새로운 시대, 새로운 정권에 대응하는 전략을 준비해 조합원들과 토론하기보다는 그저 선거 일정을 진행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그리고 이른바 ‘좌파’가 공동으로 대응하기로 했던 시도가 있었지만, 공동의 대응이 불가능하게 끝났다. 반전과 평화를 말하려는 행사에 참가하려던 허영구 평등노동자회 대표는 일본 정부의 입국 불허로 인해 오사카공항에서 조사를 받다가 귀국했다.

이렇게 또 한 해가 지나갔다. 내년에는 좋은 소식을 기대해 본다. 기본권을 강화하자는 국가인권위원회의 개헌 권고안이 적극적으로 논의되고 있다거나, 모든 표가 같은 가치를 갖도록 선거제도 개혁이 진행된다거나, 온국민기본소득운동본부가 이름처럼 많은 국민의 운동을 포괄하는 활동을 한다거나. 한 해 동안 관심과 애정을 보인 모든 분들께 고마움을 전한다.

 

편집위원회를 대신하여
김태호

 

이 글은 『시대』 2017년 12월호 통권54호에 실린 ‘책 머리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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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의 확장과 ‘혁명적 개혁’

민주주의의 확장과 혁명적 개혁

 

지난 10월 20일에 있었던 신고리5,6호기공론화위원회의 공론 조사 결과 발표 및 최종 정책권고안 제시는 우리에게 몇 가지 시사점을 준다. 우선 탈핵과 관련해서 사람들이 보일 수 있는 이중적인 태도를 확인할 수 있었다. 당장 문제가 된 신고리 5, 6호기 건설의 중단과 재개에 대해서는 시민참여단의 59.5퍼센트가 건설 재개에 찬성표를 던져 신고리 5, 6호기는 한국 원자력발전소의 대열에 합류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원자력 발전의 축소, 유지, 확대’와 관련해서는 축소가 53.2퍼센트, 확대가 9.7퍼센트로 ‘장기적으로’ 탈핵으로 가는데 찬성했다. 471명의 시민참여단이 얼마나 대표성이 있는가, 그리고 그리 길지 않은 숙의와 토론 과정을 얼마나 의미 있게 볼 것인가와 상관없이, 장기적으로는 탈핵에 찬성하는 경향이 있지만 단기적으로는 현상 유지를 택하는 경향을 보여 주었다. 여기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을 텐데, 당장 쟁점이 된 건설 중단이냐 재개냐와 관련해서는 이른바 ‘매몰 비용’ 문제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건설 재개 찬성 쪽에서 제시한 ‘수출’, ‘국익’ 같은 것을 들 수 있는데, 이는 결국 ‘경제적 공포’를 부추긴 것이고 여기서 안전과 가치 등은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후 탈핵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의미 있는 로드맵을 제시하는가가 중요한 문제라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서 정부는 10월 24일 국무회의를 통해 ‘탈원전 로드맵’을 의결했다. 이에 따르면 신고리 5, 6호기를 제외한 신규 원전 6기 건설 백지화, 노후 원전 14기의 수명 연장 불허 등을 통해 2038년까지 원전을 14기로 줄인다고 한다. 이와 함께 2030년까지 신재생에너지 비율을 20퍼센트로 높인다고 한다. 끝으로 해당 지역과 산업이 ‘연착륙’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고 한다.

이런 로드맵을 보면서 우선 떠오르는 것은 시간이 매우 길다는 것이다. 탈원전은 직접적으로는 ‘위험한 에너지’를 더 이상 사용하지 말자는 것이지만, 기후변화를 초래하는 기존의 화석에너지 체제에서 재생에너지 중심의 새로운 에너지 체제로 전환하자는 맥락에서도 필요한 것이다. 이를 감안할 때 좁은 의미의 탈핵이 아니라 에너지 체제 전환이라는 큰 맥락에서 시간 계획을 다시 세울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는 에너지 체제의 전환만이 아니라 사회적 전환을 포함하는 것이 될 텐데, 과연 집권 세력이 이러한 상상력과 의지가 있는지는 의문이다.

시민이 참여하는 공론화 과정에 대해서는 대체로 여론이 호의적인 것으로 보인다. 특히 과거 정권에 ‘불통’이라는 트레이드 마크가 있었기 때문에 시민의 직접 참여, 토론, 의견 개진 등의 과정은 그 결과와 상관없이 주목을 받았고, 이후 발전시켜야 할 어떤 것의 지위를 얻었다. 그런데 이 자체를 발전시키는 것과 별개로 기존의 정치과정에 시민의 참여를 어떻게 폭넓게 보장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있다. 예컨대 한국의 헌법은 입법발의권이나 소환 등 직접민주주의의 요소가 하나도 없다. 또한 숙의 민주주의를 위한 조건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말해야 한다. 간단하게 말하면 시간과 돈은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다. 이것도 에너지 체제 전환과 마찬가지로 기존의 경제사회적 삶과 양립하기 어렵다. 그리하여 더 커다란 변화가 요구되고 있다.

 

신고리 5, 6호기를 둘러싼 공론화 과정은 민주주의적인 방식으로 변화 혹은 이행을 추구할 때 나타나는 난점을 보여 준다. 근본적인 문제는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저널리즘 용어로 말할 수 있는 기성 질서의 강고함이다. 사실 동어반복이긴 하지만 강고하고 지배적이기 때문에 우리가 기성 질서라고 부르는 것이다. 기성 질서의 강고함과 그 강고함을 유지하기 위한 유연함은 사실 87년 체제에서도 이미 경험한 바가 있다. 물론 민주주의 체제가 가지는 개방성으로 인해 권리의 진전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고, 체제 자체가 안정적이지 않다는 것도 분명하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적응력과 맞물린 기성 질서의 강고함과 유연함은 언제나 ‘포섭’의 위험을 안고 있다는 것도 분명하다.

특히 오늘날 문제가 되는 것은 혁명 혹은 대중의 봉기마저 흡수하는 민주주의 ‘체제’의 완고함이다. 이때 체제로서의 민주주의는 절차적 정당성뿐만 아니라 소유적 개인주의까지도 어느 정도는 확고하게 자신의 정당한 내용으로 삼고 있다. 현 정권을 탄생시켰다고 할 수 있는 ‘촛불혁명’조차 이런 민주주의 앞에서 무력했다고 할 수 있다. 아니 그 혁명의 주된 요구가 제한된 의미의 민주주의의 회복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적절한 수렴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더 커다란 변화의 가능성은 어디에 있으며, 어떤 전략이 필요한가? 아마 변화의 가능성은 민주주의의 확장과 이 속에서 나타날 틈새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이는 민주주의를 다시 정의하는 것에서 시작할 것이며, 현 체제의 난점과 모순을 찾아내는 일과 함께 이루어질 것이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기본소득개헌운동을 예로 들어보자. 국민의 권리이자 국가의 의무로 기본소득 보장을 새로운 헌법에 넣고자 하는 시도는 민주주의를 확장하려는 시도다. 현행 헌법에도 있듯이 현대 국가가 그 구성원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해야 한다는 것은 공히 인정되는 바다. 하지만 보장의 정도와 방법은 정해진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기존의 사회경제적 체제 속에서 사실상 보장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기본소득을 권리로서 보장하자는 것은 구체적인 방도를 헌법에 넣는 것일 뿐만 아니라 사회경제적 영역으로 민주주의를 확장하려는 시도다. 따라서 이는 커다란 충돌을 가져오거나 아니면 아예 무시당할 시도다. 하지만 담론 투쟁으로서의 이런 시도는 틈새에서 일어날 구체적인 투쟁의 나침반이 될 수 있고, 그렇게 되어야 하게 하려는 노력이다.

아마 틈새는 기성 질서와 실제 사이의 모순 혹은 충돌에서 찾게 될 것이다. 우리가 ‘청년문제’에 주목하면서 청년배당을 실시하는 것이 충분한 기본소득으로 가는 중요한 교두보라고 생각하는 것은 의식했던 그렇지 않던 간에 그런 방향을 지시한다. 제4차 산업혁명과 일자리 없는 미래라는 테제도 거대한 전환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완전고용의 신화와 노동 중심성에 머물러 있는 기성질서의 틈새가 될 수 있다. 물론 이만큼 심각한 것이 재생산 위기와 ‘초고령화 사회’라는 전망이다.

 

틈새를 파고드는 전략은 지난 9월말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열린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 대회BIEN Congress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기본소득의 실시Implementing a Basic Income”이라는 주제에서 알 수 있듯이, 기본소득의 제도화가 구체적인 시야에 들어왔다는 인식 하에 어떻게 하면 부드럽게 기본소득을 제도화할 수 있는가라는 발표가 제법 있었다. 예를 들어 음의 소득세(또는 마이너스소득세)를 “보편적인 방향”으로 개선해서 기본소득에 접근하자라든가 기본소득이 아니라 최저소득 보장을 우선적으로 제기한다든가 하는 접근법 등이다(리스본 대회에 관해 좀 더 자세한 것은 다음 호에 실릴 것이다).

이런 접근법을 그저 기각할 것이 아니라 앞서 말한 틈새를 찾는 시도로 볼 수도 있다. 물론 그것이 틈새를 찾는 것인지 아니면 기성질서에 포섭되는 것인지는 그러한 개혁 조치에 대한 면밀한 검토 속에서 드러날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이상에 비추어 여러 시도를 기각하는 것은 적절한 태도가 아닐 것이다.

이러한 개혁 조치들이 전면적 변화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앞서 말한 민주주의를 다시 정의하며 민주주의를 확장하는 일이 꼭 필요하다. 사실 지금 현 정부에 대한 거의 무조건적인 지지를 보내는 사람들과 우리 사이에 ‘경멸의 폭포수’가 흐르고 있다면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는 ‘새로운 사회 연대성’을 구성하는 서로 다른 지향 사이의 절연이다. 물론 촛불혁명은 죽었고 1주년은 추도식이 될 것이기 때문에 대칭적인 대립은 아니다. 하지만 이를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할 때만 우리의 싸움은 한 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편집위원회를 대신하여
안효상

 

이 글은 『시대』 2017년 11월호 통권53호에 실린 ‘책 머리에’이다.

시대 55호 책머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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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들의 자유와 존엄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개인들의 자유와 존엄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작년 가을과 겨울, 사람들은 광장에서 이런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이게 나라냐?” 이 외침은 근대의 정상 국가에 대한 열망을 담고 있으며, 한국 역사에서 반복적으로 드러났던 통치의 양상에 대한 조소를 띠고 있다. 하지만 최근 이어지고 있는 한반도 위기(?)는 국가에 대한 또 다른 질문을 낳을 수밖에 없다. 국가라는 것의 논리는 무엇인가? 여기서 국가는 물론 정상 국가다.

사실 두 질문은 겹쳐 있다. 후일 역사가들이 좀 더 상세하게 분석하고 치밀하게 서술하겠지만, 대통령 탄핵으로 이어지는 사태의 주요한 계기가 ‘세월호 참사’였다는 것은 분명하다. 통치 권력이 국가 구성원, 즉 정치 공동체의 구성원의 안전을 책임지지 못했다는 대중의 인식은 탄핵으로 이어지는 큰 흐름을 형성했다. 이것이 ‘스캔들’이었던 것은 안전을 책임지지 못한 게 통치자의 무능 때문만이 아니라 무책임과 사사로운 일 때문이었다는 (혹은 대중이 그렇게 느꼈다는) 점 때문이다. 더 나아가 현대 국가의 통치자가 대중과 완전히 분리되어 더 높은 곳 혹은 저 깊숙한 곳에 거처하고 있다는 인식은 자유와 평등의 관념으로 무장한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사실 견디기 힘든 모욕이었다.

이런 이유로 새로운 대통령이 등장했을 때 대중은 환호했다. 이 환호는 어려운 시기에 영웅의 등장을 기대하는 마음이라기보다는 자신과 같은 지평 위에 서 있는 보통사람에 대한 동일시였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그리고 당장 수행해야 하는 과제가 ‘적폐 청산’과 말 그대로의 의미에서의 ‘정상화’이기 때문에 과제의 난이도와 상관없이 방향의 제시만으로도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한반도 위기 속에서 강행되고 있는 사드 배치는 국가의 정상화가 아니라 정상 국가 자체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한다. ‘국가안보’라는 주장은, 사드는 목표로 하는 것을 달성할 수 없는 무기 체계라는 합리적 비판조차 무의미하게 만들며, 더 나아가 강정과 밀양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났듯이 해당 지역 보통사람들의 물질적, 사적 삶 자체를 파괴하는 것도 용인하게 한다. 여기서 ‘자유를 위해 자유를 제한한다’라는 것과 마찬가지의 역설이 발생한다. 사람들의 삶의 안전을 파괴하는 국가 안보는 도대체 무엇인가? 물론 여기에 대한 전통적인 답변이 없는 것은 아니다. 대의를 위해 희생해야 한다든가, 외적 압력 앞에서 정치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단결해야 한다든가 따위의 대답 말이다.

문제는 이런 답변을 그리 쉽게 반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소수자의 권리’는 좌우를 막론하고 국가 정치와 큰 담론에 가로막혔으며, 그나마 어느 정도 이런 권리들이 인정받은 20세기 후반 이후에도 반복적인 다툼을 벌이고 있는 형편이다. 또한 국가와 국가 사이의 충돌을 바라보는 ‘현실주의’ 논리를 넘어서는 틀과 행동도 여전히 발견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그렇다면 보편적인 자유와 평등의 논리는 불가피하게 국가라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부딪혀 축소될 운명인가? 이러한 축소는 힘의 충돌 속에서 결국 자유와 평등의 실현 불가능성으로 이어지는가? 이런 체념을 반박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다시 이상주의를 불러내는 일일 수밖에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건 선제적 예방 공격이 아니라 원리의 선제적 실현 노력이다. 대표적인 시도는 일방적 군축이다. 물론 전략적 사고까지 포기하자는 것은 아니다. 다자간의 힘의 균형 속에서 일방적 군축을 점진적으로 실현할 경우, 이는 그 무엇보다 현실주의적인 것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정치 공동체 내에서 개인과 개별 집단의 권리는 어떻게 보장되는가? 사실 소박하게 말하면 차이를 인정하면 될 일이다. 그런데도 동성애에 대한 일부 기독교계의 태도에서 볼 수 있듯이 차이의 인정은 고사하고 차이를 악마로 보고 처벌하려는 태도가 만연해 있다. 동성애를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개인의 성향과 지향대로 살겠다는 것에 불과한데도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비대칭성 및 지배의 문제와 만난다. 그저 차이가 아니라 어떤 것은 ‘우월’하고 어떤 것은 ‘열등’하며 또 어떤 것은 지배적이고 다른 것은 그렇지 않다.

이를 타개할 수 있는 한 가지 가능한 경로는 말 그대로의 의미에서 급진적 변화다. 하지만 역사의 경험은 급진적 변화조차 또 다른 지배적인 사회질서를 낳았다는 점을 보여 준다. 따라서 급진적인가 아닌가는 별개의 문제라 할 수 있다. 도리어 문제는 변화의 방향과 과정일 수 있다. 특정 집단의 해방인가 개인들의 해방인가, 하나의 지향을 가지는 변화인가 다층적인 변화인가? 물론 여기에는 이런 질문이 따라 나올 수 있다. 해당 사회, 즉 정치 공동체의 공통의 목표란 없는 것인가? 이에 대한 대답은 이렇다. 개인들의 자유와 존엄을 지키는 것이 최고의 목표다. 그렇다면 변화의 과정도 계속해서 이러한 목표를 향해 조정되어 가는 경로를 택해야 할 것이다. 하나의 변화가 개인들의 자유와 존엄을 확대하고 보장하며 ‘궁극적’으로도 그러한 방향 말이다.

기본소득 아이디어가 좀 더 현실감 있게 부상하고 있는 오늘날 이런 사고방식은 매우 중요한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기본소득을 둘러싼 논의는 주로 그 효과와 필요성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매우 필요하고 적절하긴 하지만 충분하지는 않다. 과연 기본소득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기본소득은 그 무엇보다 개인들의 자유와 존엄을 위한 것이다. 정말로 개인들의 자유와 존엄이 보장될 수 있다면 정치 공동체에 대한 우리의 시각도 바뀔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기본소득을 보장하는 내용을 새로운 헌법에 넣자는 시도는 그만큼의 의미가 있다. 다른 무엇보다 개인들의 자유와 존엄의 개인적인 물질적 기초를 이룰 수 있는 기본소득의 보장을 분명한 권리로 확보하고 이를 국가의 의무로 삼는다는 것은 매우 간단한 요구처럼 보이지만 심원한 목표와 역동적인 과정을 겨냥한 것이다. 그러니 당장은 한반도 위기 그리고 기타 정치적 개혁에 가려 크게 주목을 받고 있지 못하지만 기본소득을 헌법으로 보장하자는 요구는 커다란 발걸음이 될 것이다.

 

편집위원회를 대신하여
안효상

 

이 글은 『시대』 2017년 10월호 통권52호에 실린 ‘책 머리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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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국민주권 시대, 새로운 사회 구성의 연대를 위하여

새로운 국민주권시대,새로운 사회 구성의 연대를 위하여

 

1848년혁명 당시 민주파의 지도자였던 르드뤼-롤랭Ledru-Rollin은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현대 대중 정치의 중요한 측면을 드러냈다. “나는 저들의 지도자다. 나는 저들을 따라가야 한다.” 물론 좀 더 근본적인 사회변혁을 원하던 사람들은 그의 이 말을 조롱거리로 삼기도 했으며, 이를 가리키는 꽤 오래된 말이 있다. 대중 추수주의! 하지만 계몽, 이성, 지도라는 말로 행해졌던 참혹한 20세기의 사건들을 뒤로 한 이후, 누구도 함부로 ‘전위의 지도’를 말하기 어려워졌다. 게다가 포스트민주주의 하에서 점점 더 우스꽝스럽거나 철면피하거나 아무 생각이 없는 정치 지도자를 경험한 이후에는, 도대체 지도자라는 게 무엇인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피해 갈 수 없는 실정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르드뤼-롤랭의 말을 예시적인 것으로 읽으면서 긍정성을 부여할 수 있겠다.

그렇지만 여전히 또 다른 질문이 남아 있다. “따라가야” 할 “저들”이 어디에 있는가? 좀 더 근본적으로, “따라간다”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전자는 ‘대중의 형성’ 혹은 ‘주체의 형성’이라는 말로 바꾸어 쓸 수 있을 것이다. 후자는 ‘지도자와 대중의 관계’ 혹은 ‘지도자가 하는 행위에 대한 파악’으로 재개념화할 수 있다.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정치적) 주체화를 경험하는 것은 호명과 요구의 발화를 통해서다. 이때 호명은 사건에 의해 이루어지고, 요구의 발화는 처지의 인식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런 계기 자체에 대한 이해도 문제이긴 하지만, 더 큰 문제는 호명과 요구의 발화가 얼마나 넓은 지반 위에서 이루어지는가, 다시 말해 다수를 동원할 정도로 공통성이 있는가다. 한때 노동자 ‘계급’이 양적으로 다수일 뿐만 아니라 질적으로 변화의 ‘사명’을 지닌다고 생각하던 시절에 이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노동자의 파편화, 다른 요구 집단의 등장으로 인해 전반적인 변화의 공통 지반과 공통 요구가 무엇인지가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함께 주목받기 시작한 것이 ‘연대’라는 개념이다. 원래 연대는 중세적 질서가 해체된 이후 공적 단위인 국가와 개인 이외에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어떻게 사회를 구성할 것인가라는 문제의식에서 나온 것이다. 이는 고용노동과 사회보험이라는 형태로 구체화되면서 현대 국가와 사회의 기본적인 구성 원리로 자리 잡게 된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연대는 서로 다른 요구 집단 사이의 이해, 관용, 협력 등을 가리킨다. 간단하게 말해, 다르지만 함께할 수 있는 여지와 목표를 이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것이다.

지도자와 대중의 관계와 관련해서 우리는 카리스마적 지도자라는 초월적 이해(베버), 고차원적 의식의 투입 및 청교도적 삶이라는 변증법적이면서도 도덕적인 이해(레닌), 유기적 지식인이라는 생물학적 이해(그람시) 등의 전범典範이 있다. 카리스마적 지도자는 결과론적 이해이기 때문에 이를 성취할 수 있는 합리적인 경로를 파악하기 어렵다. 레닌의 이해 방식은 앞서 말한 역사적 결과물 때문에, 그리고 개인들의 역량과 감수성의 고양 때문에 환영받기 어렵다. 유기적 지식인은 목표와 태도를 가리키기는 하지만 생물학적 비유가 초월적 인식과 난점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과정에 대한 인식을 어렵게한다.

오늘날에는 지도자보다 집단 지성과 자발적 행위가 강조되고 있다. 물론 반대편에서는 ‘스타’에 대한 열망이 있다. 하지만 스타는 집단적 열망과 개인들의 바람이 잠시 머무르는 고정점이라고 할 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집단적 열망과 개인들의 바람이 흐르게 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대중조직에 대한 스탈린적 의미 부여(전달 벨트)와 반대의 의미에서 통로(채널)라는 관점에서 조직과 활동을 이해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얼마 전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100일을 맞이하는 기자회견 자리에서 “진정한 국민주권 시대가 시작되었다”라고 천명했다. ‘촛불혁명’의 힘으로 기존의 정치과정이 변경되면서 대통령 자리에 오른 사람이기에 당연한 말을 했다고 할 수 있고, 어쨌든 현행 헌법 체제 하에서도 할 만한 평범한 말로 치부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해, ‘립 서비스’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이상이 있어 보이며, 아니 우리가 거기에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고 구성해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이 어떤 의미로 국민주권을 말했는지는 사실 불분명하지만, 개헌에 관해 언급하면서 약간의 실마리를 주긴 했다. 그는 중앙 권력 구조 개편에 대한 정치권(국회)의 합의가 없더라도 “지방분권과 국민 기본권 확대” 개헌을 대통령과 행정부 차원에서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민주주의가 제도화된 오늘날 왜 국민 기본권이 문제가 되는 것일까? 한 가지는 역사적, 진화적으로 이해하는 방식이 있을 수 있다. 프랑스혁명이 인간과 시민의 자유와 평등을 천명했지만 현실에서는 일부만이 이를 향유할 수 있었고 따라서 그 이후의 역사는 사실상 인간과 시민에 포함되지 못했던 사람들이 동등한 권리를 얻기 위해 투쟁한 역사라는 이해가 그것이다. 이러한 일은 “차별 철폐”라는 구호 아래 계속되어 온 일이다. 다른 한 가지는 최소한 2차 대전 이후 형식적으로는 자유와 평등, 동등한 권리를 누리는 것처럼 보였지만 특히 최근 들어 사실은 그렇지 못하다는 이해 방식이다. 이를 어떤 사람들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화합과 불화”라는 말로 설명하기도 한다. 자본주의의 특정한 시기, 예컨대 장기 호황의 황금기에는 자본주의가 민주주의의 토대 위에서 번성했고 또 민주주의의 토대를 일정 정도 마련했지만, 이른바 신자유주의의 발흥 속에서 자본주의는 민주주의의 토대를 침식했고 둘의 관계는 불화에 빠졌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본권 확대가 다시 형식적 명문화의 과잉으로 귀결되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87년 체제를 경험하면서 모두가 분명하게 느낀 것은 헌법이 한계를 정해 주긴 하지만 그 자체로 포지티브한 현실의 결과물을 그냥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여기서 권리 확대에 대한 역사적 인식을 다시 떠올릴 필요가 있다. 이른바 당사자가 자기 목소리를 내지 않았을 때 헌법에 보장된 권리는 현실의 꽃이 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현재 사회 각계에서 ‘개헌운동’을 벌이고자 하는 것은 이런 맥락일 것이다.

하지만 침식당한 민주주의의 토대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이와 관련해서 우리는 꽤 오래 전부터 기본소득을 포함한 새로운 경제체제가 요구된다고 말했다. 물론 이 자체가 여전히 충분히 구체화된 것은 아니었다. 그건 우리의 사고실험이 게을러서만은 아니었다. 한편으로는 구체적 요소들을 발견해야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성의 승리를 가져올 이성적인 사람들의 구성이 필요했다. 전자는 제4차 산업혁명이라는 말로 상징되는 경제의 구조적 변동과 연관된 것이며, 후자는 촛불혁명의 뒤를 이을, 새로운 사회를 구성하려는 에너지의 결합에 의해 가능할 것이다. 이때 필요한 것은 새롭게 사회라는 것을 구성할 수 있는 개인과 집단들의 연대일 것이다.

 

편집위원회를 대신하여
안효상

 

이 글은『시대』 2017년 09월호 통권51호에 실린 ‘책 머리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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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와 안식을 위하여

평화와 안식을 위해

 

지난 5월 9일 이후 한국의 많은 사람들은 행복감과 만족감 속에서 살고 있는 듯이 보인다. 물론 당장은 환상적인 것이긴 하지만 미래가 지금보다 더 나아질 것이고 최소한 ‘정상화’될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눈앞에서 당장 바뀌는 것이 없어도 시간을 잘 보내고 있다. 혹은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런 이유로 민주노총의 ‘사회적 총파업’을 조급증과 이기주의로 몰아붙이고, 이제 겨우 ‘정상화된 채널’을 마련한 한미 관계를 만든 정상회담이 대단한 성과를 낳은 것처럼 말하거나 믿고 싶어 한다.

이런 말과 믿음이야 관점주의라는 말로 치부할 수 있지만 ‘사드가 주권 사항’이라고 하는 것은 좀 심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의 국가 간 체제가 일반화되면서 주권국가라는 말이 신성한 자리를 차지하긴 했지만, 그 말뜻을 감안할 때 오늘날 주권을 온전히 누리는 국가는 손으로 꼽을 정도다. 그러니 여전히 사우스코리아South Korea라고 불리며, 주둔하는 미군 규모가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한국이 주권 운운하는 것은 민족주의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좀 슬픈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자주국방”이라는 말을 금과옥조처럼 떠받드는 식의 “독립국가”로 바로 서는 것이 역사적으로나 현실적으로 가능하고 바람직한 일인지는 불확실하다. 20세기에 우리가 경험한 것은 내적으로는 폭력적이고 외적으로는 침략적인 국가의 진화였고, 그 결과가 어떤 것인지는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러한 반성에서 나온 것이 국제 협조를 더욱 심화시킨 지역 통합이며, 대표적인 것이 오늘날의 유럽연합이다. 물론 현재 유럽연합은 이런저런 문제로 삐걱거리고 있으며 앞날이 불투명하다. 하지만 처참한 과거에 대한 반성과 위기를 기회로 바꾸어 내려는 고귀한 이상이 그런 노력의 출발점이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런 시도를 동아시아로 고스란히 옮기려는 시도는 물론 가능하지 않다. 하지만 이때 가능하지 않다는 것은 맥락과 배경이 다르다는 것을 다른 말로 표현한 것에 불과하며, 그러한 이상마저 포기하자는 것은 아니다. 동아시아는 역사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유럽보다 훨씬 복잡한 다자 관계에 놓여 있다. 일본 제국주의와의 관계에서 한국과 중국은 공동의 경험이 있으며, 미국은 적대국이었다. 하지만 냉전 시기에 한국과 미국은 북한 및 중국과 전쟁을 벌인 바 있다. 한국은 북한의 침략에 대해, 북한은 미국의 가공할 군사력에 대해, 제국 경험이 있는 중국은 한반도의 변동에 대해 알레르기 반응이 있다. 일본은 미국의 품 안에서 정상 국가가 되려고 노력했지만, 과거에 대한 반성을 거치지 않았기에 동아시아의 정상적인 일원이 되기에는 부족한 데가 있다. 이런 배경 속에서 21세기 들어 G2의 갈등이 중국의 역내 안보 추구와 미국의 ‘봉쇄’전략이라는 대당 속에서 커지고 있다. 북한 정권은 누가 보아도 생존(?) 노력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핵무기 개발을 통해 국제적, 지역적 갈등의 중심이 되었다. 혹은 중심이 되고 싶어 한다.

이 속에서 한국이 번영과 평화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번 정상회담에서 북한 핵 문제에 대해 한국이 주도하기로 했다는 합의가 있었다고 한다. 누구나 바른 방향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문제는 무엇으로 주도할 수 있는가다. 현재로서는 마땅한 답이 없다. 그저 긴장 완화를 위한 전통적일지라도 몇 가지를 시도하는 것이 출발점이 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니 말의 잔치가 아니라 실제로 테이블에 무엇이 올라오는지를 지켜보기로 하자.

 

어쨌든 뭔가 변화가 있을 것 같은 시점에 우리가 “동지”라 부르는 민주노총 전 제주본부장이자 노동당 제주도당 위원장인 김동도님이 돌아가셨다. 누군가의 추모사에 나온 것처럼 힘들었던 투쟁과 투병을 생각하면 편안한 세상으로 갔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인간의 정리는 그럴 수 없으니 슬픔을 삼키거나 나눌 수밖에 없는 처지다. 각자 고인을 기억하는 계기와 방식이 있겠지만 나로서는 그의 강인한 내면과 겸손한 태도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그를 잘 모르는 사람도 그가 걸어온 삶을 보면 그가 얼마나 강인한 사람이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를 잠깐이라도 만나 본 사람은 소박하고 겸손한 태도로 그 강인함을 충분히 가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만 그러했겠는가? 지난 30년 동안 한국의 노동운동은 아마 그런 사람들 때문에 전진해 왔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과 함께 그런 이들이 하나둘 우리 곁을 떠나고 있고, 우리는 강인함이 고집으로, 겸손함이 무책임으로 바뀌어 버린 세상을 살고 있다. 이렇게 한 시대는 가고 있고, 우리는 후일 그 시대의 끝자락에서 얼마나 방황하고 얼마나 서로에게 상처를 주었는지를 떠올릴 것이다. 그러니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살아가는 게 필요하다.

 

편집위원회를 대신하여
안효상

 

이 글은『시대』 2017년 7~8월호 통권50호에 실린 ‘책 머리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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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에서 시대로

시대49호 책머리에 좌파에서 시대로

이 지면의 제호를 “좌파”에서 “시대”로 바꾸는 것이 좌파의 시대가 지나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모든 사람의 자유와 평등, 진정으로 인간적인 삶에 대한 좌파의 요구가 어떻게 소멸할 수 있겠는가? 가장 급진적인 것이 가장 인간적이라고 말하는 좌파의 근거가 어떻게 무너질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좌파”라는 제호를 뒤로 한 것은 이 기호가 그런 가치에, 최소한 한국에서는, 값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럴수록 가치에 합당한 이름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말이 사회적인 것일 때, 우리의 노력만으로 짧은 시간 내에 그런 소망이 이루어질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이름이 아니라 그 실질을 위해 노력하는 게 더 나은 일이 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소극적인 의미에서만 이름을 바꾼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말할 때 “좌파”가 위치 혹은 태도를 가리킨다면, “시대”는 상황을 의미한다. 정세적으로 “좌파”는 2008년 경제 위기 이후 가장 현실적이면서도 급진적인 대안을 제출하고 이를 통해 그리고 이를 실현할 새로운 정치를 구성하자는 요청을 말한다. 하지만 위기 이후 십 년 가까운 시간 동안 이러저러한 대중의 저항이 있었지만 적절한 대안이 제출되지 못하면서 새로운 정치는 단초를 보여 주었을 뿐이다.

한국의 경우, 좌파의 시도가 미약하게만 나타나면서 단초조차 눈에 띄지 않는 양상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올바른 우리의 노선과 대안을 부여잡고 시간의 흐름 속에서 꾸준히 무엇을 한다고 원하는 사태가 이루어질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도리어 필요한 것은 사태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며, 이에 우리의 대안을 맞추어 재조정하는 것이다.

민주적 정부의 출범으로 이어진 2016∼17년 촛불집회를 보면서 우리는 감동과 좌절을 동시에 느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김수영의 시 「풀」에 대한 통속적인 해석을 비틀어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먼저 웃는” 풀만이 아니라 “바람보다 더 빨리 눕는” 풀을 떠올려야 한다. 지난 촛불집회가 그렇게 거대한 물결을 이룬 바탕에는 최소한 2014년 4월의 세월호 참사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대중의 불만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안다. 하나의 정치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는 동등한 구성원으로서 각자의 소박한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는 수많은 사람이 체제의 작동 속에서 전혀 그럴 수 없다는 절망을 느낀 것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행태를 만나 분노로 폭발한 것이 촛불집회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보통 사회경제적 불만과 요구라고 말하는 것이 거대한 물결의 심층을 이루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 에너지는 그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투표함을 통한 기성의 질서에 대한 약간의 변경으로 제한되고 말았다.

이를 통해 우리는 몇 가지를 확인할 수 있다. 하나는 이른바 ‘민주개혁파’가 하나의 실체이자 매우 강력한 힘이라는 것이다. 87년 체제는 이들이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주었고, 이들은 노무현 정권의 성립과 실패 속에서 적절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정치 개혁, 인권 개선, 분단 체제 관리 등에서 이들은 어느 정도 성과를 보일 수 있고, 이것이 더욱 급진적인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을 것이다. 첫 번째와 연동된 두 번째로 여전히 대중은 기성 정치 질서를 신뢰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우선적으로 한국의 극우 보수 세력이 민주개혁파를 파트너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에 대한 반사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향후 자유한국당으로 대표되는 이 세력의 변화에 따라 변동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또 다른 이유는 민주주의 자체가 매우 제한적으로만 이해되는 정치 문화와 관련이 있다. 여기에도 강고한 분단 체제가 작동하고 있겠지만 가깝게는 87년 체제의 형성 과정이 결부되어 있다. 6월항쟁과 노동자대투쟁의 탈구가 계속해서 재생산되어 왔다는 것이다. 이를 벗어나는 한 가지 경로는 정치와 경제를 연결시킬 수 있는 정치과정에 대한 개혁이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그 어느 때보다 정치 개혁의 열망이 높은 이 시기에 선거법을 포함한 정치 개혁에 우리가 힘을 쏟아야 할 것이다.

끝으로 좌파의 무능력이다. 이와 관련해서 우리는 그동안 주로 시대착오성이라는 관점에서 비판해 왔다. 시대의 과제와 적절한 주체를 도출하지 못하는 무능력 말이다. 이런 판단은 여전히 유효하지만 여기에 머무르는 것은 일기예보 담당자의 태도에 불과할 것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현실적인 능력일 것이다. 현실적인 능력은 다양하게 이해될 수 있겠지만 우선적인 것은 보편적인 감수성에 기초해서 신뢰를 획득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사람들에 따라 ‘보편적인 감수성’에 대해서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낼 수 있겠으나, 여기서 말하는 것은 정치 공동체 구성원의 공통성에 근거하여 개인과 집단들의 요구를 포착하고 정치라는 통로로 흐르게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 어느 때보다 좌파는 민주주의의 옹호자로 등장해야 하고 민주주의를 삶의 모든 부문으로 확장하는 시도의 선두에 서야 한다.

물론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현실적인 능력이란 목표로 삼은 것을 실제로 달성할 수 있는 어떤 것이다. 이는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미래를 지향하면서도 동시대 보통사람들의 감수성과 눈높이에서, 말하는 바를 달성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느끼게 만드는 ‘평범한’ 능력이다. 굳이 전통적인 ‘대중노선’을 떠올릴 필요는 없다. 도리어 집요하게 우리가 미래라고 생각하는 것을 말할 수 있는 위치를 제대로 잡는 것이 필요하다. 현재 우리의 상태로 볼 때 이러한 위치를 잡는 데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하지만 정치라는 것이 미래를 지향하는 것이라 할 때 이 시간은 그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끝으로 현실적인 능력이란 시대의 변화에 맞추어 자신을 끊임없이 조정해 가는 능력이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할 때 좌파의 미래는 없을 것이고 우리는 시대를 살아간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편집위원회를 대신하여
안효상

 

이 글은『시대』 2017년 6월호 통권49호에 실린 ‘책 머리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