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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통상 정책의 정치경제학

유승경 정치경제연구소 ‘대안’ 부소장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자국 시장 보호를 위한 강력한 통상 정책을 실행에 옮김에 따라 세계경제의 긴장이 높아지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가 보호주의적 통상 정책을 취하는 목적은 자국의 무역 적자를 줄이는데 있다. 실제로 미국은 다음 쪽의 그래프가 보여 주는 것처럼 1970년대 중반부터 무역 적자를 기록하기 시작하였고 그 이후 그 폭이 지속적으로 확대되었다.

트럼프는 만성적인 무역 적자 때문에 미국의 성장이 방해 받고 일자리가 줄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무역 적자가 발생하는 이유를 미국이 맺고 있는 무역협정이 불공정하고 무역 상대국이 환율 조작 등 불공정 무역 행위를 자행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트럼프 통상 정책의 기조는 자유무역을 옹호하는 대다수 경제학자들의 강한 비판을 받고 있다. 저명한 경제학자들이 나서서 트럼프와 그의 보좌관들은 경제학 개론 수준의 기초 이론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실제로 일부 경제학자는 각종 매체를 통해서 무역 적자 발생의 원인에 대한 기초 이론을 트럼프 행정부에게 강의한다.

그렇지만 트럼프의 정책에 반대하는 학자들이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경제학의 기초 이론에 대한 해석을 두고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일부 경제학자는 무역 적자는 문제가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하며, 다른 일부 경제학자는 만성적 무역 적자는 문제이지만 통상 정책은 적절한 해결책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최근의 이러한 논쟁 때문에 대학자들까지도 경제학의 기초에 대해서 다른 해석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

이 글에서는 트럼프 통상 정책을 지지하는 학자와 그에 반대하는 학자들의 다양한 주장과 그 근거를 검토해 보고, 이를 토대로 향후 트럼프의 통상 정책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를 전망해 본다.

1. 트럼프 통상 정책의 이론적 근거

미국은 2000년대 들어와서 경제성장이 매우 느려졌다. 2000년부터 2017년까지 미국의 연평균 성장률은 2.0%에 그쳤는데, 그 이전 50년간 평균 3.0%를 상회한 것에 크게 못 미치는 수준이다. 보호주의 정책의 옹호자들은 1990년대 중반부터 특히 심화된 무역 적자가 미국 경제의 성장을 둔화시킨 가장 큰 요인이라고 주장한다.

트럼프 행정부의 통상 정책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는 경제학자는 캘리포니아 어바인 대학의 피터 나바로 교수다. 그는 현재 상무성 장관인 윌버 로스와 함께 2016년 트럼프의 정책을 뒷받침하는 보고서를 발표한 바 있다. 그들의 논거는 의외로 단순했고 많은 학자들로부터 “경제학 문맹Economic Illiteracy”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나바로와 로스는 공동으로 집필한 「트럼프의 경제계획 평가」라는 논문에서 무역 적자가 성장을 저해한다는 근거로서 “국민소득은 소비, 투자, 정부 지출, 수출의 합에서 수입을 뺀 것(GDP=C+I+G+X-M)”이라는 국민소득 균형 식을 제시했다. 이에 근거하여 수출은 GDP에 기여하며 수입은 GDP를 삭감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트럼프의 목표는 아주 간단하게 수출을 늘리고 수입을 줄이는 것이라고 못 박고 있다. (Peter Navaro & Wilbur Ross, Scoring the Trump Economic Plan, 2016, p. 9, p. 29.)

여기에 대해서 유명 학자들이 나서서 트럼프 측의 주장은 국민소득 균형 식에 대한 어처구니없는 몰이해에 기반하고 있음을 지적했다. 소비(C), 투자(I), 정부 지출(G), 수출(X)의 합에서 수입을 빼는 이유는 소비, 투자, 정부 지출에 이미 수입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이중 계산을 피하기 위해서 수입을 차감한 것일 뿐, 수입이 성장을 저해하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한다. (Noah Smith, Trump’s Trade Chief Makes a Rookie Mistake, Bloomberg View, 2016, p. 12, p. 28.)

이 지적은 정확한 이야기이지만 트펌프의 통상 정책을 자문하는 사람들은 괘념치 않는다. 그들의 계산법도 간단하다. 미국은 2015년 5,000억달러의 무역 적자를 기록했고, 미국의 2015년 명목GDP는 2014년에 비해서 6,440억달러 증가했다. 따라서 미국이 무역균형을 달성했다면 명목GDP의 증가분은 두 수치를 합친 11,440억달러가 되었을 것으로 계산한다(Peter Navarro & Wilbur Ross, 위의 책).

이들은 트럼프 정책에 대한 주된 비판에 대해서도 완강하고 강력하게 반박한다. 트럼프의 정책에 대한 널리 공유되고 있는 비판은 두 가지다. 첫 번째는 해외의 값싼 제품의 수입을 막으면 인플레이션이 발생할 것이며 이로 인해 저소득 가계에 부담을 가중시켜, 수입제한은 역진세의 효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트럼프의 정책이 무역 전쟁을 야기해서 대공황과 같은 경제 위기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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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대 총선 이후 한국 정당체제의 변화

지병근 조선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1. 정당

한국에서 정당의 수명은 대체로 정치인의 수명보다 짧다. 그 이유는 단순히 정당의 지도부가 지조가 없거나, 부도덕하거나, 능력이 없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는 정당이 정치인들에게 권력을 창출하는 하나의 수단일 뿐이지 목적 자체는 아니기 때문이다. 집권 수단으로 기능하지 못하는 정당은 정치인들에게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숭고한 조직이 아니라, 필요하면 과감히 버려야 할 소모품일 뿐이다. 물론 일체감을 강하게 느끼거나 이념적으로 신성화되었다면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정당은 그러한 위치에 있지 않다.

물론 정당의 존재 이유는 국회의 의석수 확대나 집권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정당은 다양한 목표를 두고 있으며, 오히려 행정부의 장악보다는 당헌과 강령에 묘사된 사회상을 현실화시키기 위해 사회로 ‘침투penetration’하는 데 목적을 둘 수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정당은 단기적인 집권을 위해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지 않거나 때로는 스스로 변형시키곤 한다. ‘선거 정당’ 혹은 ‘포괄 정당’으로의 변신은 사회주의체제의 몰락으로 가속화되었다. 사실 탈냉전기 현대 정당정치의 역사는 다름 아닌 이념으로부터의 탈출기exodus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민주화는 정당 중심의 정치 발전을 촉진하는 기폭제가 되었으며, 정당들의 이념과 정책적 지향을 유연화시킴으로써 이들 사이의 이합집산을 자유롭게 만들었다. 대표적으로 1997년 대선을 앞두고 국민회의가 급속히 우경화된 공약을 제시하며 김대중과 김종필이 DJP 연합을 형성한 것이나, 2012년 총선과 대선에서 새누리당이 자신의 이념적 위치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경제민주화를 공약으로 제시했던 것이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최근 정의당 지도부가 민주평화당과 공동교섭단체를 구성하기로 합의한 것도 유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당체제가 개별 정당의 생애처럼 빈번하게 바뀌는 것은 아니다. 1987년 민주화 이후 한국의 정당체제는 ‘지역주의적 정당체제’를 공고화시켜 왔다. 비록 일반 유권자들은 기억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거의 모든 정당이 당명을 바꾸거나 분열과 통합을 거듭해 왔지만, 영호남 출신의 정치인들은 지역을 대표하는 정당을 만들고 유권자들은 이들을 일관되게 지지하는 패턴이 반복되어 왔다. 아울러 한국은 권위주의 체제하에서 형성된 ‘노동 없는 정당체제’를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 2004년 이후 민주노동당이 원내에 진입하는 성과를 얻었지만, 그 규모는 10석 내외에 불과하였으며, 그 후신인 통합진보당은 헌법재판소에 의해 해산당하고 말았다. 비록 그 후에도 정의당이 통합진보당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지만, 의석수가 한자리 수에 머무르는 등 노동과 진보를 대표하는 정당들의 성과는 미약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당체제가 항상 변함이 없는 것은 아니다. 표면적으로는 동일한 정당체제가 유지되더라도 이를 구성하는 정당이나 이들 사이의 관계는 끊임없이 변화하며 요동치기 마련이다. 이 글은 20대 총선을 전후로 이루어진 한국의 정당들의 통합과 분열의 역사를 개괄적으로 탐색하고 임박한 6·13 동시 지방선거를 계기로 한국의 정당체제가 재편될 가능성에 대한 전망을 간략히 제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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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저임금제는 앞으로도 유효할까?

금민 정치경제연구소 ‘대안’ 소장

최저임금제는 노동시장 외부에서 국가가 임금 최저선wage floor을 결정하고 사용자가 그 이상의 임금을 지급하도록 법률로 강제하는 제도다. 법정 임금 최저선은 통상적으로 시간당 최저임금, 곧 최저시급의 형태로 정해진다. 임금 최저선을 노동시장의 수요와 공급에 맡기지 않고 시장의 외부에서 결정하는 제도로 법정 최저임금제만 있는 것은 아니다. 협약임금제는 노동시장의 수요와 공급이 아니라 단체협약에 의해 임금을 결정하는 제도이며, 산업별 단체협약은 동일 산업 내에서 적용되는 임금 최저선을 정할 수 있다. 단체협약의 구속력이 노조에 가입하지 않은 노동자에게도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제도를 택하고 있는 경우, 해당 산업의 임금 최저선은 법정 최저임금이 아니라 산업별 단체협약의 임금 최저선에 의해 결정된다. 물론 이 경우에도 산업별 단체협약의 임금 최저선은 법정 최저임금보다 높을 수는 있지만 결코 낮을 수는 없다. 노동시장 외부에서 임금 최저선이 결정된다는 점은 협약임금과 최저임금의 공통적인 특징이며 최저임금제만의 특징은 아니다. 따라서 협약임금에 대비하여 최저임금제만의 고유한 특징은 노사 당사자의 자율적 결정이 아니라 국가에 의해 전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임금 최저선이 결정된다는 점이라고 보아야 한다.

신자유주의 이전의 자본주의 황금기에는 산별 단체협약이 임금 최저선 기능을 비교적 충실히 수행했다. 당시에는 법정 최저임금제의 필요성은 노조의 힘이 상대적으로 약했던 영미권 국가들에 국한되었다. 하지만 전 세계적으로 신자유주의에 의해 불안정노동이 확산되면서 고용과 소득의 탈동조화 현상이 심화된 상황에서, 게다가 노조 조직률이 신자유주의 이전과 비교하여 절반 이하로 떨어지고 단체협약의 효력 확장 조항도 제 구실을 못하게 된 상황에서는 협약임금제의 임금 최저선 기능은 무력화되고 저임금 노동에 대한 보호 기능은 주로 법정 최저임금제가 떠맡게 된다. 이런 사정으로 신자유주의를 거치면서 그 이전에는 없던 법정 최저임금제가 도입된 나라가 있다. 산별협약의 일반적 구속력 제도에 의해 임금 최저선을 결정하던 독일은 2015년부터 법정 최저임금제를 도입한다. 2008년의 경제 위기 이후 긴 침체기가 이어지자 국제노동기구ILO 학자들은 최저임금 인상을 임금 주도 성장의 주요 수단으로 제시했다(Stockhammer and Lavoie, 2012). 이러한 입장은 주요 국가의 정책에도 수용되어 미국과 유럽 여러 나라 정부는 최저임금 인상 흐름을 만들어 갔다. 마찬가지로 문재인 정부도 소득 주도 성장이라는 이름 아래 2018년도 최저임금을 16.4% 인상했고 최저임금 인상을 감당하지 못할 영세기업에 대해서는 인상률만큼 임금 보조금을 지급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최저임금제가 과연 앞으로도 저임금 노동을 없애고 임금격차를 줄이는 역할을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 질문은 세 가지 차원에 걸쳐 있다.

첫째, 플랫폼 노동이 폭발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오늘날에도 최저 시급제는 여전히 임금 최저선의 기능을 가질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고, 둘째, 최저임금제와 노동자의 협상력의 상관관계, 또한 이 문제와 연동된 질문으로서 최저임금이 인상되면 다른 조건과 무관하게 평균 임금 인상 효과가 생겨나는가라는 질문이며, 셋째, 최저임금 인상과 GDP 대비 노동소득분배율의 상관관계에 대한 질문이다. 이러한 문제들을 다루면서 이 글은 일자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임금 최저선을 보장해 주는 최저임금제와 모든 사람에게 ‘소득 최저선income floor’을 보장하는 기본소득의 효과를 상호 비교할 것이다.

1. 최저시급제와 플랫폼 노동

산업자본주의는 생산과 재생산, 노동시간과 여가시간의 명확한 분리를 전제로 했다. 최저시급제는 산업자본주의의 전일제 고용에 알맞다. 최저시급제는 개별적인 노동이 공장노동으로 균질화되어 노동시간의 양적 크기로 계량될 수 있던 산업자본주의 시대의 산물이다. 계절과 기후에 따라 가변성을 가지는 ‘농경적 시간agrarian time’과 달리 ‘산업적 시간industrial time’은 균질적인 양적 단위로 분할할 수 있다. 최저시급제가 저임금 보호제도로 기능할 수 있으려면 경제의 시간 개념이 ‘산업적 시간’으로 이루어져 있어야 한다. 반면에 노동과 활동의 구분이 불분명해지고 양적 단위로 나눌 수 없는 ‘제3의 시간tertiary time’에 의해 경제활동이 진행되면 최저시급제가 임금 최저선으로 기능하기 어렵다(Standing, 1999: 3∼9; 2013: 5; 2017: 160, 189). 여기에서 굳이 노동시간 척도의 미래에 대해 더 깊이 다룰 필요는 없다. 오히려 논의의 폭을 좁혀 오늘날 폭발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플랫폼 노동에 대해 최저시급제의 보호 기능은 대단히 제한적이라는 점만을 살펴보자.

플랫폼 노동은 ‘주문형 앱 노동on-demand work via app’과 ‘크라우드 노동crowdwork’의 두 형태로 구분된다. 주문형 앱 노동이란 서비스 요청자와 제공자의 연결은 온라인 플랫폼에서 이루어지지만 실제 서비스의 제공은 오프라인에서 대면 관계로 이루어지는 형태다. 주문형 앱 노동에서는 노동시간 못지않게 대기시간이 길지만, 대기시간에 대해서는 최저시급제가 적용되지 않는다. 대기시간까지 노동시간으로 보지 않는다면 최저시급을 올려도 기대한 만큼 노동보호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다(Huws, 2018). 그런데 대기시간에 대해서도 최저시급제를 적용한다는 것은 대기시간에 대해 일단 임금을 지급한다는 것이고 누군가가 이를 부담해야 한다는 뜻이다. 즉 주문형 앱 노동에 전형적인3 각 관계인 플랫폼 기업, 서비스 요청자, 제공자의 관계에서 플랫폼 기업과 서비스 제공자의 관계를 사용-종속 관계로 정형화해야만 대기시간에 대해서도 임금을 지급할 수 있다. 법률적으로 우버 택시 운전자는 우버의 피고용자로 보고 우버는 운전자들에게 대기시간에 대해서도 최저임금을 지불해야 하고 결과적으로 우버 서비스요금은 올라갈 것이다. 결국 이와 같은 법률적인 정비는 우버나 배달앱처럼 서비스 중개를 하는 ‘린 플랫폼lean platform’의 수익을 없앨 것이고 경제적으로는 금지하는 효과를 낳을 것이다. 사용-종속 관계의 정형화는 린 플랫폼 기업의 비즈니스 모델인 불안정노동의 동원을 통한 지대 수익을 불가능하게 만들 것이므로 차라리 폐업을 택할 가능성이 높다.

주문형 앱 노동의 경우에는 적어도 서비스의 제공은 대면 관계를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사용-종속 관계의 확대가 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대기시간까지 포함하는 최저시급제를 적용할 여지는 적어도 논리적으로는 남아 있다. 하지만 온라인 플랫폼에서 특정 업무가 공시된 후 전 지구적 차원에서 불특정 다수가 참여하여 작업한 양만큼 보상을 받는 크라우드 노동에 대해서는 명확한 사용-종속 관계를 따지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크라우드 노동자가 제공하는 서비스를 노동시간 단위로 계측하는 일도 쉽지 않다. 오늘날 크라우드 노동은 저임금의 다른 이름이다. 아마존 미케니컬 터크Amazon Mechenical Turk가 제공하는 업무의 90%는 시간당 임금으로 계산하면 2달러 이하의 저임금 노동이지만, 전 지구적 범위에서 노동이 중개되기 때문에 국민국가의 노동법이나 사회보장법에 의하여 보호받지 못하고 최저시급제를 적용할 수도 없다. 크라우드 노동에 대한 보호 문제가 공동 결정권과 정보권을 중심으로 논의되는 실정은 이러한 사정을 반영한다(Leist et. al., 2017: 67∼69).

*문재인 정부의 최저임금 인상 정책의 명암에 대해서는 『시대』 2018년 3월호(제56호)에 실린 조혜경의 글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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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에 불가능한 것을 요구한다는 것은

‘68년 혁명’ 당시에 나왔던 유명한 슬로건 가운데 하나는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라!”다. 물론 “리얼리스트가 되라!”라는 슬로건과 함께이긴 했지만, 이 슬로건은 68 혁명의 유토피아적 성격을 상징하는 어떤 것이 되었다. 그리고 신자유주의의 “대안은 없다!”라는 주문 속에 ‘혁명성’이 거세된 좌파의 소심함을 꾸짖는 목소리가 되었다.

유토피아적 기운이 가득했던 시절에서 꽤 긴 시간을 지나온 오늘날 우리가 요구할 수 있는 불가능한 것은 무엇인가? 혹은 우리가 말하는 변화는 어디까지인가?

과거의 사회주의/공산주의가 인간의 해방을 ‘생산력의 발전’에 건 도박이었다면, 아마 지금이야말로 해방을 이룰 확률이 가장 높은 시기일지 모른다. 생산력의 발전이 단순히 물질적 풍요만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필요 시간인 노동시간을 줄이고 자유 시간을 확대할 수 있을 때 해방이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좁은 의미의 경제적 변화가 이를 가져오지 않는다는 것도 분명하며, 이런 점에서 노동운동의 역사는 노동시간 단축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1960년대부터 새로운 국면을 연 여성운동과 반인종주의운동은 경제적 해방이 그 자체로 인간의 해방을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것을 매우 역설적인 방식으로 드러냈다. 민주주의와 해방을 요구한다고 하는 신좌파운동, 노동운동 내에서 기성 질서의 차별이 마찬가지로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폭로하는 과정이 있었다. 이는 여성과 특정 인간 집단을 차별하고 억압하는 또 다른 구조와 문화가 존재하며 거기에 맞는 또 다른 방식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또 다른 변화의 방향으로,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바꾸는 것이 있다. 이는 자유란 ‘필연성에 대한 인식’이라는 헤겔적인 의미에서만 해방적일 수 있는데, 왜냐하면 근대의 해방이라는 프로젝트 가운데 하나에는 ‘자연의 정복’을 통해 인간의 물질적, 자연적 제약을 극복한다는 방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프로젝트를 통한 자연의 정복이 인간적 삶을 발밑에서 허물고 있다는 자각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재인식을 요청했던 것이다.

그런데 위에서 말한 것은 논리적인 것에 불과하다. 그 어느 때보다 경제적 해방을 지향할 수 있는 오늘날, 사회 양극화는 더욱 심하고, 바로 그 때문인지 조금이라도 물질적 향상을 이룰 수 있다면 거기서 위안을 찾을 것만 같은 상황이다. 여성해방과 인종해방 같은 주제는 보편적인 것으로 고양되기는커녕 특정 집단의 요구로 폄훼되고 있고, 이에 따라 사회적 분할을 자극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재인식은 발화자의 현실적 위치에 따라 너무나 넓은 스펙트럼에 걸쳐 있으며, 이는 행동을 가로막는 것으로 기능하고 있다.

그렇다면 해방이라는 유토피아적 프로젝트는 더 이상 불가능하며,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는 것도 의미가 없는 일인가? 물론 포스트 공산주의 시대, 신자유주의의 ‘대안은 없다’라는 시절을 거쳐 온 우리에게는 ‘최소 원칙’이라는 게 있다. 거칠게 요약하면, 개인의 권리, 생태적 지속 가능성, 차별의 부재 등이다. 말 자체로는 상식적이다. 하지만 하나하나 따져보면 불가능한 일이다. 최소한의 사회경제적 보장이 없는 권리는 추상적 문구이며, 산업주의를 뒤집는 실질적 조치가 없는 생태적 지속 가능성은 헛된 구호이며, 무조건적 평등과 반권위주의가 관철되지 않고서는 차별의 철폐가 가능하지 않다.

게다가 각각의 요구를 실현하기 위한 조건이 마련된다는 것 자체가 그 조건들 사이의 충돌을 수반할지도 모르는 일이며, 그 조건들을 조화시킨다는 것 자체가 진정으로 불가능한 요구일지 모른다. 이를 가능케 하는 거의 유일한 근대적 요구는 평등-자유égaliberté일 것이다. 평등-자유는 개인과 모든 사물 사이의 새로운 관계를 수립하자는 요청인데, 이때 각 개인들은 존 던John Donne이 노래했던 다음을 떠올려야 할 것이다.

“어느 누구의 죽음이라도 나를 작아지게 하나니, 그것은 내가 인류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냐고 묻지 마라./ 종은 바로 그대를 위하여 울리는 것이므로.”

 

편집위원회를 대신하여
안효상

 

이 글은 『시대』 2018년 06월호 통권59호에 실린 ‘책 머리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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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적 기본소득: 좌파의 주장인가 우파의 주장인가?*

다니엘 라벤토스Daniel Raventós, 줄리 와크Julie Wark / 번역 박선미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사무국장

[다니엘 라벤토스 / 사진-정치경제연구소 대안]

* 이 글은 『카운터펀치 CounterPunch』의 웹사이트에 2018년 4월 6일 자로 기고된 “Universal Basic Income: Left or Right?”을 번역한 것이다. https://www.counterpunch.org/2018/04/06/universal-basic-income-left-or-right/. 필자들은 2018년에 기본소득을 옹호하며 낸 책 “Against Charity(CounterPunch, 2018)”의 공저자다.

보편적 기본소득, 즉 모든 사람에게 정기적으로 조건 없이 지급하는 현금이 사회계, 정계, 학계에서, 그리고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 점점 더 토론거리가 되고 있다. 오른쪽에서도 왼쪽에서도 기본소득을 옹호하고 있다. 그런데 기본소득을 정치적 스펙트럼의 양 끝에서 밀고 있다면, 그 비밀은 무엇일까? 아주 놀라울 정도로 설득력이 있어서 정치적 양 극단 사이의 모든 차이를 없앤 것일까? 그럴 리는 없다. 기본소득이 그렇게 서로 다른 정치적 입장에게서 환호를 받는다는 사실은 진지한 논쟁을 애매하게 만들고 많은 사람을 완전히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좌파 측을 보자면, 자신은 안 속는다고 말하는 많은 사람이 기본소득 완전 반대라는 자동 반응을 보인다. 기본소득을 그저 우파의 속임수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를 들면, 크리스 헤지스Chris Hedges는 「과두제 지배층의 ‘기본소득 보장’ 신용 사기The Oligarchs’ ‘Guaranteed Basic Income’ Scam」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과두제 지배층은 구조 변화를 제안하지 않는다. 기업과 시장이 규제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노동조합을 지지하지 않는다. 개발도상국에서 빚에 몰려 강제로 일해야 하는 노동자나 미국의 창고와 배송 센터에서 일하는 노동자와 배달 차량을 운전하는 노동자에게 생활임금을 지급하지 않으려 한다. 무상 대학 교육, 정부의 보편적 의료나 적절한 연금 등을 수립하는 데 관심이 없다. 그렇기는커녕, 최저 생존 임금을 버는, 마음대로 고용되고 해고될 수 있는 절망적 노동자들을 계속해서 착취하는 메커니즘을 추구한다. 기본소득 보장을 요청하는 것은 칼 맑스와 안토니오 그람시가 이해한 바의 고전적 사례다. 즉, 자본가들은 잉여의 자본과 노동이 있으면 그 잉여분을 빨아들이기 위해 사회의 관습을 변경하는 대중문화와 이념을 이용하는데, 지금의 경우에는 신자유주의를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Against Charity(CounterPunch, 2018)”

그의 말이 딱 맞다. 그러나 과두제 지배층의 사악한 방법들을 밝혀낸다고 해서 조건 없는 보편적 기본소득을 지지하는 좌파의 주장들을 무너뜨릴 수 있는 것은 전혀 아닌 것 같다. 이제까지 봤을 때, 보편적 기본소득이 모두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 즉 물질적 생존권을 보편적으로 보장하는 방법으로 제기되는 유일한 정책이라는 주장 말이다. 게다가 기본소득은 보편적 만병통치약은 아니지만 과두제 지배층에 맞선 투쟁에서 사회 취약층의 힘을 강력하게 만드는 한 가지 방법이다.

존경받는 맑스주의 경제학자 마이클 로버츠Michael Roberts가 최근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다른 견해를 살펴보자. 논지를 모두 다 담도록 좀 길게 인용할 것이다.

그런데 로봇에게 일자리를 빼앗기게 되면 뭘 해야 할까? 일부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은 “로봇세”를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걸로 할 수 있는 건 자동화 속도를 늦추는 게 전부다. 고역을 줄이는 진보적 변화는 결코 아닌 것이다. 보편적 기본소득UBI이라는 아이디어가 경제학자들을 계속 끌어당기고 있는데, 좌파와 주류 모두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나는 이전에 보편적 기본소득의 장점과 단점을 논의했다. 보편적 기본소득은 무상의 의료와 교육, 괜찮은 수준의 연금 등을 제공하던 “복지국가”를 기본소득으로 대체한다는 식으로 많은 신자유주의 경제 전략가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그리고 보편적 기본소득은 노동하는 사람들의 임금을 낮추기 위해 제안되고 있다. 괜찮은 수준의 기본소득은 너무 비용이 많이 들어서 자본주의가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보편적 기본소득이 설령 투쟁하는 노동자들에 의해 쟁취된다고 해도, 여전히 누가 로봇과 생산수단 일반을 소유하느냐의 문제는 해결되지 못할 것이다.
내가 보기에 더 흥미진진한 대안은 보편적 기본서비스라는 아이디어다. 사용 시점에 무료인 공공 재화와 서비스라고 일컬어지는 것 말이다. 극도로 풍요로운 사회는 정의상 우리의 욕구가 고역과 착취 없이 충족되는 곳, 즉 사회주의사회다. 그러나 그런 사회로의 이행은 사회적 필요노동을 교육, 의료, 주거, 교통 같은 기본적인 사회적 욕구와 기본적 식품 및 설비의 생산에 돌리는 것에서 출발할 수 있다.

로버츠의 글은 기본소득 논쟁의 몇몇 주요 측면의 핵심에 이르는 훌륭한 출발점을 제공한다.

1) 기본소득은 여러 다양한 방법으로 재원을 마련할 수 있다. 좌파의 제안과 우파의 제안 사이의 차이는 누가 이득을 보고 누가 손해를 보는지를 물어보면 쉽게 확인된다. 좌파의 제안은 누진세 개혁을 필요로 하는데, 이 누진세 개혁은 가장 부유한 시민들에게서 사회의 나머지로의 중대한 재분배를 야기한다. 그래서 우리 책 『자선에 반대하여』의 마지막 장에서는 광범한 연구의 결과인 재원 마련 안을 상세히 밝혔고, 거기서 우리는 우리 판본의 기본소득으로는 가장 부유한 20%가 손해를 보고 나머지 80%는 이득을 본다는 점을 명시했다. 이것은 소득재분배를 의미하며, 지니계수로 볼 때 세계에서 가장 평등한 곳(약0.25)이 될 소득재분배다.

2) 복지국가 해체를 고려하는 기본소득은 모두 우파 술책이다. 밀턴 프리드먼Milton Friedman ― 사실, 그는 기본소득이 아니라 ‘음의 소득세NIT’를 지지했는데, 음의 소득세는 몇 가지 점에서는 기본소득과 비슷하지만 다른 점들에서는 기본소득과 많이 다르다 ― 과 더 최근의 우파 경제학자들이 표면상 기본소득 지지자라는 사실로 인해, 기본소득을 좌파적으로 비판하는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목욕물 버리려다 아기까지 버리고 있다. 프리드먼은 미국에서 공공 사회서비스 해체를 목표로 하고 있으면서 NIT를 미끼로 쓰고 싶었지만, 이런 점으로부터 모든 기본소득 지지자들이 복지를 없애고 싶어 한다고 결론 내리는 것은 너무 환원주의적이다. 천만의 말씀이다. 기본소득은 더 많은 사회서비스, 더 좋은 서비스를 수반할 수 있고 수반해야 한다. 1986년에 만들어져서 현재 모든 대륙에 가입네트워크들을 두고 있는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BIEN는 2016년 서울에서 열린 BIEN 총회에서 이 점을 분명히 밝히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금액과 빈도가 안정적인, 그리고 다른 사회서비스들과 어우러져서 물질적 빈곤을 제거하고 모든 개인의 사회적 문화적 참여가 가능하게 하는 정책 전략이 되는 충분히 높은 기본소득을 지지하는 것에 동의했다. 우리는 사회서비스들과 수급권을 기본소득으로 대체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혜택을 받지 못하거나 취약하거나 소득이 낮은 사람들의 상황을 악화시킨다면, 사회서비스들과 수급권을 대체하는 것에 반대한다.

3) 좌파 기본소득 지지자들은 기본소득이 노동자들의 협상력을 키울 것이라고도 생각한다. 다국적기업과 노동자가 계약을 맺을 때 양자가 법률상 “동등한 자”로 비교되는, 제도적으로 너무 비대칭적인 노동관계 상황에서, 기본소득이 더 취약한 측의 위상을 개선시키는지를 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노동자들이 최소한 빈곤선 이상의 소득을 의지할 소득으로 갖게 될 것이니 말이다.

4) 많은 페미니스트가 반복해서 지적하듯이, 매 맞는 여성의 다수가 자신을 학대하는 파트너 곁을 떠나지 못하는 것은 자신들이 독립적으로 생계비를 벌거나 생존할 수 없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학대당하는 여성들 가운데 꽤 높은 비율이 폭력적인 파트너에게 물질적으로 의존하고 있으며, 그래서 기본소득은 그런 여성들에게 긴급하게 필요한 물질적 독립성을 제공할 것이다.

5) 기본소득은 정치경제 영역의 조치이지만 “정치경제” 자체는 아니다. 좌파 기본소득 안과 우파 기본소득 안의 차이는 정치경제 영역에서 강력히 촉구하는 조치들의 수와 유형을 보면 명백해진다. 예를 들면, 나머지 인구에게 기본소득을 효과 있게 지급하기 위해 부유층에게 세금을 걷는 것은 과두제가 퍼뜨리는 조치들과 엄청나게 다를 것이다. 이 과두제는 미국의 세 인물 ― 제프 베조스Jeff Bezos, 빌 게이츠Bill Gates, 워런 버핏Warren Buffet ― 이 2017년에 그 나라 하위 50% 전체보다 더 많은 부를 소유한 것 같은 극단적 상황을 만들었다. 분명, 이 차이만으로도 기본소득은 오직 한 가지 종류만 있다는, 그것도 나쁜 종류만 있다는 관념을 떨쳐버리기 충분할 것이다.

6) 조건부 복지 급여들은 많은 행정비와 수급자 낙인을 필요로 하고 더 심각하게는 빈곤의 덫을 야기하고 영속화한다. 이런 조건부 급여들과는 달리, 조건 없는 기본소득은 그 본성상 관료제와 기관들의 감시를 제거함으로써 이런 위험들을 피하게 된다는 점이 분명하다. 더 중요하게는, 기본 개념들에서 엄청난 차이가 있다. 조건부 급여들은 문제 있는 사람들, “루저,” “실패자”를 위한 것이다. 일자리에서 쫓겨나거나 일을 구할 수 없는 사람, 사는 데 충분한 돈을 벌 수 없는 사람, 벌어들이는 소득, 능력, 인지 기술, 정신적 육체적 건강 등등과 관련해서 심각한 문제가 있는 사람 따위를 위한 것이다. 빈곤은 개인적 일탈로 평가된다. 규범은 일자리를 갖는 것, 꽤 괜찮은 생계비를 버는 것이다. 급증하는 노동빈곤층이 증명하듯, 일자리를 갖는 것이 빈곤에 대비하는 보증책이 아닌 오늘의 현실에서 이런 규범이 여전히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조건 없는 기본소득에 대한 좌파의 관념에서는, 자유, 정의, 평등, 인간 존엄 등은 내재하는 원리들inherent principles이며, 조건 없는 기본소득은 그저 시민 또는 등록된 주민이라는 사실만으로 모든 개인의 물질적 존재를 자동으로 보장하게 된다. 이 점이 확실해진다면, 다른 세부 사항들은 논의될 수 있을지 몰라도 제1의 목표는 모든 권리 가운데 가장 기본적인 권리인 생존권을 확립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들이 기본소득의 좌파 판본과 우파 판본의 차이를 분명하게 보여 준다. 물론, 그 밖의 점들도 있지만, 이 여섯 가지는 가장 중요한 차이점들이다. 밀턴 프리드먼, 마크 저커버그Mark Zuckerberg, 리처드 브랜슨Richard Branson이 지지하기 때문에 기본소득이 나쁜 아이디어라고 말하는 것은 (이라크 어린이 50만 명이 미국의 이라크 제재로 죽게 된 것에 대해 “그 희생은 치를 만한 가치가 있다”라고 말한) 매들린 올브라이트Madeleine Albright가 인권 증진을 주장하기 때문에 인권은 나쁘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수준의 주장이다.

그렇다면 기본소득은 혁명적인가? 그렇지 않다. 임금 인상, 노조 힘의 증가, 관대한 공공 의료·교육·주거 시스템을 가져다주지도 않고, 책임 있는 윤리적인 정부를 가져다주지도 않고, 또 그 밖의 것을 가져다주지도 않는다. 자본주의는 괜찮은 사회를 원하는 모든 이에게 중대한 문제이고, 기본소득은 고전적 의미에서 “개량적”이다. 그러나, 잠깐만, 바로 지금 자본주의 시스템을 확실히 뒤집을 좋은 아이디어를 가진 사람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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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와 음악

임영근 정치경제연구소 대안 상임연구원

 

음악은 만국 공통의 언어라는 말을 흔히 한다. 수긍이 가는 말이다. 전 세계를 통틀어 음악과 춤이 없는 문화는 없다. 자장가 없는 문화도 없다. 자장가가 없는 문화가 없을 뿐 아니라 엄마와 아이가 교감하는 자장가는 서로 비슷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우르르 까꿍 하며 어를 때처럼 음높이는 높아지고 박자는 느려진다고 한다. 이처럼 우리 인간의 마음 깊숙이 음악을 즐기는 심성이 자리 잡고 있다는 뜻에서 음악은 만국 공통의 언어일 수 있다.

하지만 똑같은 이유로 음악을 통해 소통하기는 매우 어려운 게 현실이다. 음악이 우리 감성을 강력하게 흔드는 그 이유 때문에 음악에 대한 선호가 민감해진다. 취향에 맞지 않는 음악을 듣는 것보다 참기 힘든 고통도 없다. 나는 ‘트로트’ 음악을 들을 때면 어렸을 때 시외버스 터미널을 떠올리곤 한다. 흔히 보는 테이프는 아니었다. 보통 테이프보다 훨씬 커서 도톰한 수첩만 한 플라스틱 통이었다. 그 물건을 운전석 앞의 구멍에 기사 아저씨가 꽂으면 어김없이 나오던 트로트 음악. 버스는 출발할 생각도 않고 꿍짝 꿍짝 하는 리듬에 사랑이니 이별이니 눈물이니 하는 가사가 되풀이되는 노래가 이어진다. 몇 곡이 흘러도 그 노래가 그 노래 같아 분간이 안 가는 노래. 제발 음악 좀 끄고 이제 그만 출발해 주세요. 이렇게 마음속으로 빌며 견뎌야 했다. 물론 이것은 그 당시의 내 취향을 얘기하는 것일 뿐 트로트 음악에 대한 평가는 아니다. 그런 내 취향이 생겨난 데에는 당시 어른들 세계에 대한 반감이 어떤 식으로든 작용한 결과일 것이다.

음악에 꽂힌 호모 사피엔스

음악은 청각을 통해 받아들인다. 청각의 특징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결코 외면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트로트가 들리는 동안 안 들을 도리가 없다. 아무리 귀를 틀어막는다 해도 우리 귀로 끝없이 스며든다. 그 자리를 빨리 벗어나는 수밖에 없다.

청각의 또 다른 특징은 자극과 반응이 매우 단선적이고 직접적이라는 것이다. 혀와 코에는 수많은 수용기들이 있어 특정 물질에 반응한다. 시각도 망막에 있는 수많은 세포를 통해 받아들인다. 이에 비해 귀는 단 한 가지 신호를 받아들일 뿐이다. 공기의 진동, 이 한 가지 신호만을 처리할 뿐이다.

‘클래식’음악을 즐겨 듣는 사람 가운데는 실황 음악 음반을 선호하는 사람이 많다. 스튜디오에서 녹음한 교향악단의 깔끔한 소리보다 기침 소리 같은 소음이 섞인 음반을 좋아하는 것이다. 현장감을 즐기기 위해서다. 그런데 우리가 듣는 것은 하나의 소리 파동일 뿐이다.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공기 압력을 듣는 것이다. 연주하는 소리, 기침 소리, 코 푸는 소리, 이 모든 것이 합쳐진 하나의 소리 파동을 듣는다. 설사 여기에 기차가 지나간다 해도 그 소리까지 합쳐져 만들어진 하나의 파동을 듣는 것이다.

참으로 놀라운 능력이 아닐 수 없다. 여러 가지 소리가 합쳐진 단 하나의 파동을 들으면서도 우리는 각각의 소리를 어려움 없이 분간해 낼 수 있다. 연주하는 소리, 기침 소리, 코 푸는 소리, 기차 소리를 분간해 들을 수 있다.

한때 라디오에서 일반인을 상대로 노래 제목 알아맞히기 프로그램을 진행한 적이 있다. 노래 시작 부분을 아주 잠깐만 들려 주고 어떤 노래인지 알아맞히는 방식이다. 나도 몇 번 들은 적이 있는데, 프로그램에 나온 일반인들이 대부분의 노래를 척척 알아맞혔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들은 노래를 어떻게 맞힐 수 있지? 여러 번 진행될수록 너무 쉽게 맞히는 바람에 퀴즈가 싱거워질 정도였다. 내가 그 노래들을 알아맞히지 못한 이유는 딱 한 가지였다. 내가 들어 보지 못 한 노래였기 때문이다. 잘 아는 노래가 나왔다면 처음 몇 개의 음만 들어도 알아맞혔을 것이다.

이처럼 음악에 민감한 우리의 능력을 실험한 사례가 『음악 본능』에 소개되어 있다. 베토벤의 <엘리제를 위하여> 같은 유명한 노래의 멜로디를 들려 주고 알아맞히는 실험이다. 처음 두 음을 들려 주었을 때 알아맞힌 사람이 무려 56퍼센트였다. 자기가 잘 아는 음악이라면 처음 두 음만 들어도 반 이상이 알아맞히는 것이다. (세 번째 음까지 듣고 알아맞힌 사람은 69퍼센트였고, 여섯 번째 음까지 들려 주었을 때는 100퍼센트 알아맞혔다.) 나머지 바그너의 <결혼행진곡>이나 독일 가곡 <소나무>에 대한 실험에서도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추세는 비슷했다고 한다.

이처럼 소리와 음악에 민감한 우리 인간은 음악에 대한 정서적 반응도 강력하다. 이 책에서는 음악에 대한 정서적 반응을 실험한 사례로 소개하고 있다. 토마스 프리츠Thomas Fritz가 카메룬의 산악지대에 사는 마파Mafa족을 상대로 한 실험이었다. 마파족은 서양음악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고 고립되어 살아온 민족이다. 당연히, 유럽인이 볼 때 아주 낯선 음악을 즐기는 사람들이었다. 프리츠는 바흐에서 탱고, 로큰롤까지 여러 음악을 들려 주고 즐거운 곡, 슬픈 곡, 위협적인 곡으로 분류하도록 요청했다. 분류 결과는 놀랄 만큼 잘 들어맞았다고 한다.

서양인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서양인들 또한 마파족 음악을 정서적으로 잘 들어맞게 분류한 것이다. 음악을 들으면 즐거운지 슬픈지 따분한지 신나는지 누구나 느낄 수 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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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저임금 논란, 무엇이 문제인가?

조혜경 정치경제연구소 ‘대안’연구원

 

최저임금 논란이 뜨겁다. 이 글은 최근 최저임금에 대한 논란이 왜 끊이지 않는지 그 원인을 짚어 보려고 한다.

최저임금제도의 취지 자체에 반대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저기서 아우성이 쏟아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최저임금제도는 1987년 민주화와 개헌의 산물로 도입되어 약 3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1988년부터 최저임금제도가 시행에 들어간 이래 매년 최저임금 시급이 인상되어 왔는데 그때마다 연례행사처럼 최저임금 수준을 놓고 노사 양측이 팽팽한 평행선을 달리며 대립각을 세웠다. 최저임금 논란은 늘 있어 왔던 일이라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다.

올해는 양상이 좀 다르다. 과거에는 최저임금안을 결정하기 직전에 노동자위원 또는 사용자위원이 퇴장하거나 표결에 불참하는 파행이 일어나면서 노사 간 갈등이 최고조에 도달했다가 우역곡절 끝에 최종안이 확정되면 논란은 자연스레 사그라졌다. 한마디로 최저임금 수준 결정 과정에서 당자사인 노사 양측의 대립과 갈등이 논란의 중심이었다. 2018년 최저임금안 협상 과정도 예외가 아니었다. 늘 그랬듯이 난항에 난항을 거듭하다가 시한을 넘겨 합의가 아닌 표결로 최종안이 확정되었다. 하지만 이번엔 예년과는 달리 그것으로 논란이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왜 그럴까?

 

한국 최저임금제도의 역사와 목표

최저임금 논란 해부에 앞서 먼저 우리나라 최저임금의 개념 정의, 그 역사와 목적을 간단히 살펴보자. 우리나라의 경우 최저임금에 관한 헌법 조항이 있고 「최저임금법」이라는 별도의 법제가 존재한다. 이 글에서는 그 법에 명시된 최저임금의 개념 정의와 목적을 소개한다. 법률적 개념 정의는 정책 시행의 준거로 사용되는 것이므로 학문적 논의에서의 개념과는 차이가 있다.

최저임금제도는 국가가 노사 간의 임금 결정 과정에 개입하여 임금의 최저 수준을 정하고, 사용자에게 이 수준 이상의 임금을 지급하도록 법으로 강제함으로써 저임금 근로자를 보호하는 제도를 말한다. 이러한 개념 정의에서 알 수 있듯이, 노동시장 당사자 간의 자율적 결정에 맡겨둘 수 없다는 판단이 전제된다. 따라서 정부가 시장을 강제하는 방식, 즉 법률에 의한 구속력이 불가피하다. 우리나라 최저임금 제도는 이미 1950년대 초반 법률적 근거가 마련되었으나 시행되지 않다가 1986년 「최저임금법」이 제정된 이후에야 비로소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1953년 제정된 「근로기준법」에 최저임금제도의 실시 근거 를 마련했으나, 당시 경제 상황에서 최저임금제도 시행이 어렵다는 판단에 따라 그냥 종잇장에 적힌 문구에 불과했다. 1970년대 중반에는 정부가 행정지도를 통해 기업을 압박하기도 하다가 1986년 12월 31일 「최저임금법」 제정으로 구체적인 시행 규정이 마련됨에 따라 1988년 1월 1일부터 시행이 되었다.

1987년 민주화운동의 성과로 탄생한 헌법 제32조 제1항에 국가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최저임금제도를 시행하여야 한다는 조항이 포함되어 최저임금제도의 헌법적 기초가 마련되었다. 「최저임금법」 제1조에서 명시하고 있는 최저임금제도의 목적은 “근로자에 대하여 임금의 최저수준을 보장하여 근로자의 생활안정과 노동력의 질적 향상을 꾀함으로써 국민경제의 건전한 발전에 이바지”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최저임금위원회가 제시한 최저임금의 효과를 보자. 최저임금위원회 홈페이지를 인용하자면, 최저임금제도의 실시로 최저임금액 미만의 임금을 받고 있는 근로자의 임금이 최저임금액 이상 수준으로 인상되면 다음과 같은 효과가 나타난다. 첫째, 저임금 해소로 임금격차가 완화되고 소득분배 개선에 기여하며, 둘째 근로자에게 일정한 수준 이상의 생계를 보장해 줌으로써 근로자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근로자의 사기를 올려주어 노동생산성이 향상되고, 마지막으로 저임금을 바탕으로 한 경쟁 방식을 지양하고 적정한 임금을 지급토록하여 공정한 경쟁을 촉진하고 경영합리화를 이룬다.

최저임금위원회가 밝히고 있는 최저임금의 효과를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저임금 해소, 임금격차 완화, 노동자의 생활 안정, 생산성 향상, 경영 합리화 등 노사 양측에 모두 행복을 안겨주는 엄청난 제도처럼 들린다. 하지만 최저임금제도가 현실에서 그런 효과를 낳는지는 전혀 다른 문제다. 특히 최저임금제도가 노동 빈곤의 문제, 즉 열심히 일해도 빈곤을 벗어나지 못하는 “워킹 푸어” 문제를 해소하는 데 기여하고 있는 것인지, 그래서 노동자의 생활이 안정되고 시장소득의 양극화가 줄어들고 있는지를 따져 볼 필요가 있다. 이하에서는 최저임금 이슈를 최저임금의 실제 효과의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논의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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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수고용노동자의 권리를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

유승경 정치경제연구소 ‘대안’ 부소장

 

전자 제품 수리 기사, 택배 기사, 배달원, 골프장 캐디, 보험설계사, 학습지 교사, 판촉 담당자, 간병인, 미용사 등은 일의 성격에 비춰보면 전통적인 의미의 노동자다. 하지만 십 수 년 전부터 이들 대부분은 법적으로 더 이상 고용관계에 묶여 있는 노동자가 아니라 독립적인 개인 사업자, 즉 자영업자로 바뀌었다.

최근에는 ‘플랫폼 노동’, ‘긱 노동’, ‘온 디맨드 노동’ 등으로 불리는 새로운 노동 형태가 확산되면서 전통적인 의미에서 노동자도 아니고 개인 사업자도 아닌 제3 유형의 직종에 취업한 사람들이 나날이 늘고 있다.

기술과 제도의 변화에 따라 새로운 유형의 노동과 취업자가 등장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이 경향은 사회경제적 문제를 낳고 있다. 그 이유는 이런 유형의 취업자들은 대부분 사회경제적 입지가 취약한데, 이들을 보호할 수 있는 법과 제도가 마련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전통적인 산업사회는 자본을 가진 자본가와 그들에게 노동력을 판매하는 노동자가 사회경제관계의 기본 토대를 형성했다. 이러한 구도에서 사회경제적인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법과 제도는 자본가에게 고용된 노동자를 기본 모델로 하여 마련되었다. 법적으로 기본적인 노동조건을 강제하는 한편 노동자에게 노동삼권을 보장했다. 그리고 사회적 안전망인 사회보험제도도 회사에 직접 고용된 노동자를 기본 대상으로 삼아 구축되었다. 그 결과, 제3 유형의 새로운 사회경제적 약 자는 사회적 균형을 맞추기 위한 법과 제도로부터 소외되어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제3 유형의 취업자를 보호할 대응책의 마련 이 시급하다. 세계적으로 제3 유형의 취업자를 보호하기 위한 노력은 기존에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해 마련된 법과 제도를 새로운 유형으로까지 확대하는 방향으로 추진되고 있다. 달리 말해, 제3 유형을 특수한 형태의 노동자로 규정하고, 노동자와 동일한 근로조건을 법으로 강제하고 노동3권을 부여하며, 기본적인 사회보험의 혜택을 제공하자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세계적 추세와 흐름을 같이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제3 유형의 취업자에게 (1) 노동3권의 부여 (2) 근로조건의 보호 (3) 사 회보험 보호를 제공하기 위한 논의가 우리나라에서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를 살피고 당면 과제가 무엇인가를 검토해 본다.

 

1. 제3 유형, 노동자인가 독립 사업자인가?

제3 유형의 취업자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법적으로나 학문적으로 합의된 바가 없다. 사실 정해진 호칭도 없다. 서구에서 는 근로자의 속성인 ‘dependent employment’와 자영업자를 의미하는 ‘self-employed’를 합성하여, ‘종속된 자영업자the dependent self-employed’라고 하기도 하며, ‘유사 노동자employ-like person’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김도균 외, 『 자신에게 고용된 사람들』, 2017년, 후마니타스, 244 쪽). 우리나라에서는 “특수유형근로 종사자” 혹은 “특수고용노동자” 등으로 불린다. 이 글에서는 “특고노동자”로 지칭한다.

특고노동자에게 노동자로서의 권리와 보호를 제공한다고 했을 때 한 가지 어려운 문제가 있다. 법적으로 개인 사업자인 특고노동자와 일반적인 독립적 개인 사업자를 어떤 기준에 따라 구분할 것인가?

이 문제가 왜 중요한가를 국내 최장기 비정규직 투쟁 기록을 가지고 있는 재능교육 학습지 교사의 사례를 통해 살펴보자. 재능교육 학습지 교사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하자 회사 측은 노조 활동을 이유로 교사들을 해고(명목상은 ‘위탁 계약 해지’)했고, 이에 교사들이 소송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 1심 재판부는 학습지 교사도 회사에 경제적으로 종속되어 있기 때문에,「 근로기준법」상의 근로자는 아니지만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이하 ‘「노동조합법」’)상의 근로자에는 해당한다고 판결했다. 하지만 2심 재판부는 교사들이 회사로부터 상당한 지휘와 감독을 받지 않는다는 등을 이유로 「노동조합법」상의 근로자가 아니라고 판결했다.

이에 대한 대법원의 판결은 아직 나오지 않았는데, 이처럼 특고노동자를 개인 사업자와 법적으로, 개념적으로 구분하는 것은 매우 논쟁적이며 사실상 정치적이다. 이렇다 보니, 특고노동자에 대한 통계도 제각각이다. 국가인권위원회에 따르면 약 230만 명에 달하지만, 통계 청에서는 그보다 훨씬 적은 약 50만 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우리나라 법률에서는 “특수형태근로종사자”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이 명칭은 「산업재해보상보험법」(‘「산재보험법」’)에 유일하게 등장한다. 2007년에 개정된 「 산재보험법」은 “계약의 형식에 관계없이 근로자와 유사하게 노무를 제공함에도 「근로기준법」 등이 적용되지 아니하여 업무상의 재해로부터 보호할 필요가 있는 자” 가운데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직종에 종사하는 자”를 “특수형태근로종사자”로 정의했다. 이 조항에 따라 현재, 골프장 캐디, 학습지 교사, 보험설계사, 레미콘 기사, 택배 및 퀵 서비스 기사, 대출 모집인, 전속 대리운전기사 등 총 9개 직종이 특수형태근로종사자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법에 따르면 특고노동자는 9개 직종뿐이며, 이것도 「산재보험법」에 한정된 것이다.

제3 유형의 직종을 개인 사업자가 아니라 특고노동자로 할 때의 기준은 ‘근로자성’이다. 달리 말하면 노동자로서의 성격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 판단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특고노동자가 법적으로 개인 사업자의 형식을 띠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다.

근로자성을 판단하는 데는 통상적으로 “사용 종속성”(“인적 종속성”)과 “경제 종속성”의 두 기준을 사용하거나 여기에 “조직 종속성” 을 더해 세 가지 기준을 적용한다(김도균 외, 위의 책, p. 236). 사용 종속성은 주로 (1) 사용자의 지휘와 감독을 받는지, (2) 사용 자가 근무 장소와 시간을 지정하는지로 판단한다. 경제 종속성은 (3) 근로 제공 관계가 지속적이며 사용자에게 전속되어 있는지, (4) 제3자를 고용해서 업무를 대체할 수 있는지, (5) 근로자가 재정적 위험을 부 담하는지, (6) 보수가 유일한 수입의 원천인지 등으로 판단한다. 그리고 조직 종속성은 (7) 노동이 기업 조직 내로 통합되는지로 판단한다.

이 기준은 대략적인 기준일 뿐 절대적인 기준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 위의 기준 중에서 몇 개를 충족시켜야 노동자라 할 수 있는지를 정하는 것은 지극히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위의 기준에 비춰 보면 화물 기사, 방송 작가, 대리운전기사는 근로자성이 약한 것으로 나온다. 그렇다고 이들이 노동자가 아니며 노동 법제와 사회보험의 보호가 필요 없다고 단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따라서 제3 유형의 직종을 노동자로 규정하고 노동 법제와 사회보험제도로 보호하기 위해서는 법규와 제도의 개선이 이뤄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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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 산업혁명 시대, 플랫폼 노동과 사회보장 개혁*

서정희 군산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백승호 가톨릭대학교 사회복지전공 교수

 

 

Ⅰ. 서론

남성 생계부양자의 유급노동을 통한 임금만으로 가족의 충분한 생활을 유지하기 어려워진 것은 이제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맞벌이 가구도 마찬가지다. 제조업 중심의 산업구조가 서비스업 중심으로 이동하면서 저임금 일자리 비율이 늘고 고용 불안정성이 증가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실업의 만연, 실직의 두려움, 낮은 임금으로 인한 불안정성은 장시간 근로와 직장에서의 충성을 강요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4차 산업혁명의 바람은 인간의 노동을 기계와 인공지능으로 점차 대체할 가능성을 예시한다. 보다 더 근본적인 변화는 4차 산업혁명으로 ‘플랫폼 노동’이 확산되면서 고용관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제조업의 쇠퇴는 숙련노동의 비중을 축소시켰고, 동시에 숙련노동의 확보 및 유지에 필요한 비용을 자본이 일정 비율 이상 부담할 필요 역시 축소시켰다. 서비스산업 중심의 경제에서는 평균적으로 제조업 중심의 산업구조에서보다 숙련노동의 비중이 낮으며 저생산성을 특징으로 하기 때문이다. 낮은 생산성을 특징으로 하는 서비스산업 경제에서 사용자들은 한편으로는 저임금 노동의 비중을 늘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비용의 중요한 원천인 사회보장 기여금을 절감하는 전략을 선택하여 왔다. 이러한 전략에서 주요하게 활용된 방식이 고용관계를 계약관계로 전환시키고 위장된 고용관계를 확대하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인공지능 혁명’ 시기의 플랫폼 경제는 사용자·노동자·자영업자라는 고용관계의 구분 틀 자체를 모호하게 만들고 있다. 플랫폼 경제에서는 사용자도 노동자도 사라지고 자영업자와 이용자와 이들을 연결시키는 플랫폼만이 남게 되었다. 이렇듯 노동시장에서는 유급노동이 불안정해지고 일자리의 축소 및 질적인 변화가 예견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보장제도는 여전히 전통적 고용관계 개념에 기초하여 대상자 적격성을 판단하고 있다. 결국 사회보장의 대상자 적격성을 충족시키기 어려워지는 고용관계가 확대되고 있는 추세를 고려해 보면, 이에 대비하여 사회보장제도에서 근본적인 관점의 변화가 있지 않다면 아무리 잘 갖추어진 사회보장제도라 하더라도 제대로 작동하기 어려울 것이다. 여기에서 근본적인 관점의 변화란 현재 사회보장제도가 천착하고 있는 노동 중심적 접근에 대한 재검토에서부터 출발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본 연구는 노동 중심성 문제를 근본적으로 되짚어 보고자 한다.

Ⅱ. 4차 산업혁명과 노동의 변화

1. 노동의 양적 변화

4차 산업혁명이 화두가 되면서 미래에는 일자리가 사라지고 노동 없는 미래가 도래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Frey, C. B. and Osborne, M. A., 2017). 노동 없는 미래에 대한 예측은 2016년 1월 스위스 다보스에서 ‘제4차 산업혁명’을 주제로 세계경제포럼(“Mastering the Fourth Industrial Revolution”)이 열린 이후 크게 부각되었다. 여기에 서 발표된 「일자리의 미래The Future of Jobs」 보고서는 로봇이 사람들의 일자리를 대신하여 2020년까지 710만 개의 일자리가 사라지고 200만 개의 일자리가 새로 만들어져서 총 500만 개의 일자리가 사라질 것이 라는 노동 없는 미래를 전망하였다(World Economic Forum, 2016). 이 외에도 세계은행 등 국제기구들의 전망과 직무 분석을 통한 많은 학자들의 노동시장 전망은 대체로 일자리의 총량이 줄어들 것이라는 예측이 지배적이다.

반면에 이전의 산업혁명도 그러했듯이 새로운 형태의 일자리가 만들어질 것이라는 전망 또한 제기되고 있다(Autor, D. H., 2015). 그러나 일자리의 양적 변화에 대한 이러한 상반된 견해에도 불구하고, 일자리의 질, 즉 불안정한 일자리가 증가할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큰 이견이 없다. 특히 4차 산업혁명으로 인한 온라인 플랫폼 노동의 확산은 새로운 노동과정을 만들어 냄으로써 노동의 질적 변화를 추동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 이 글은 서정희·백승호(2017)을 대폭 수정 보완한 것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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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를 돌보는 일

박기순 충북대 철학과 교수

 

1. 도덕의 무능력, 혹은 윤리와 정치의 분리

어느 때보다도 ‘윤리’나 ‘도덕’이라는 말이 중요하게 다가오고 있다. 사회적으로 인정받던 사람들이 그동안 숨겨져 왔던 비도덕적인 행위들로 인해 비난과 한탄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있다. 어떤 ‘구조’, ‘분위기’ 혹은 ‘상황’ 때문에 자신에게 행해지는 부당함을 온전히 감내해야만 했던 사람들의 상처와 고통에 대한 공감, 그리고 이제 용기 내어 말하기 시작한 사람들에 대한 지지와 연대를 보내는 우리 마음의 또 다른 한편에는 놀라움과 당혹감 또한 크게 자리하고 있다. 특별히 이러한 당혹감은 도덕적 비판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 그동안 보여 주고 이룩한 것들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일 경우에 더 크게 다가올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일반적으로 ‘윤리’와 ‘정치’를 서로 무관한 것이 아니라 동일 선상에 있는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둘 사이의 이러한 친화성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현실정치의 무대에서 정치인들은 사람들에게 신뢰를 얻기 위해 스스로를 ‘좋은 사람’이라고 주장한다. 이때 ‘좋은 사람’은 타인, 더 나아가 공동체 전체에게 좋은 것을 하고자 하는 의지와 품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의미할 것이다. 이렇게 보면,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은 정치의 필수 불가결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이 점과 관련하여 가장 고전적인 담론을 제시한 철학자는 플라톤이었다. 통치의 원리가 되어야 하는 ‘정의’가 무엇인지를 탐구하고 있는 책 『국가』에서 플라톤은 통치술의 고유성을 설명한다. 모든 기술은 좋은 목적에 사용될 수도 있고 나쁜 목적에 이용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의술은 병든 사람을 살리는 기술이기도 하지만 나쁜 의도로 사용될 경우 사람을 죽게 만드는 기술일 수도 있다. 따라서 통치술을 한갓 기술로만 이해한다면 그것은 정치를 잘못 이해하게 되는 결과를 만들어 낸다. 플라톤의 적대자였던 트라시마코스의 주장대로 정의란 ‘강한 자의 이익’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플라톤에게 이러한 귀결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정치란 강자가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는 행위가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좋음을 돌보는 행위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정치 개념은 우리가 보기에 이중의 의미에서 윤리에 기초해 있다고 할 수 있다. 첫째, 좋음이란 무엇인지, 혹은 어떤 것이 좋은 것인지에 대한 이해를 전제해야 하기 때문이다. 좋은 것이란 이익이 되는 것에 다름 아니라고 하더라도, 어떤 것이 누구에게 진정으로 이익이 되는 것인지를 정하기란 쉽지 않으며 깊은 성찰과 논의를 필요로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좋음에 대한 인식, 즉 윤리학은 정치의 전제가 되어야 한다. 둘째, 정치는 특별히 나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내가 아닌 전체의 이익과 좋음을 도모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정치는 그 자체로 윤리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윤리와 정치가 사람들에게 분리해서 나타날 수 있는 가능성은 이러한 논리 위에 정립된 윤리-정치의 연속성에서 연원한다. 그리고 이 연속성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특히 윤리에 대한 특정한 이해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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