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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용 부진의 진상과 원인

유승경 정치경제연구소 ‘대안’ 부소장

1. 머리말

최근 고용 부진을 둘러싸고 문재인 정부와 보수 진영이 크게 충돌하고 있다. 보수 진영은 문 정부가 추진한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이 ‘고용 참사’를 낳았다며 정부의 정책 기조인 ‘소득 주도 성장’을 전면 철회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 정부는 고용 부진은 최저임금 인상이 아니라 인구구조 변화와 제조업 경기 악화에 따른 것이라며 정책 기조를 바꿀 이유가 없다고 맞서고 있다.

실제로 고용 사정이 안 좋다 보니 정부 내에서도 이견이 나오고 있다. 처음부터 청와대 주도의 소득 주도 성장에 적극적이지 않았던 관료 출신의 김동연 경제부총리는 보수적 여론의 지원을 배경으로 최저임금 인상을 유보할 수 있다는 의견을 표명하며 현 정부의 정책 기조에 수정을 가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문재인 정부는 소득 주도 성장과 함께 ‘혁신 성장’을 내세우고 있다. 현 정부는 여러 측면에서 보수 진영과 다양한 진보 진영의 요구를 절충하는 방식으로 정국을 운영하고 있다. 사실 소득 주도 성장은 서민 경제를 지원하는 것을 주 내용으로 하지만, 혁신 성장은 “과도한 서민 위주 정책”에 대한 재계와 보수층의 반발을 달래기 위한 정책이다. 정부는 최저임금 인상, 노동시간 단축 등을 추진하는 한편으로 친재벌 행보를 통해서 보수층의 반발을 무마하는 방식으로 경제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그런데 보수 진영은 고용 사정의 악화를 빌미로 현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최소한의 친서민 정책까지 포기할 것을 압박하고 있다. 사실 정부가 말하는 소득 주도 성장은 내용이 모호하며 최저임금 인상, 노동시간 단축 외에는 구체적인 정책 내용을 마련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소득 주도 성장이 문재인 정부의 지향성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에 보수 진영은 고용 부진을 이유로 현 정부의 정국 주도권에 상처를 내기 위해서 집요하게 공격을 가하고 있다.

그러면 보수 진영이 주장하듯이 최저임금의 인상이 현재의 고용부진에 가장 큰 원인을 제공했을까? 사실 사태의 진상을 제대로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정부나 보수 진영 모두 자신에게 유리한 통계만을 집중적으로 부각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현재의 고용 사정을 최대한 객관적인 자료에 근거해서 검토해 보고, 고용 지표의 부진을 낳은 원인이 무엇인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악화되는 고용 지표

보수 진영이 고용 참사의 대표적인 지표로 내세우는 것이 월별 취업자 수 증가 폭의 급격한 둔화다. 통계청이 정기적으로 발표하는 고용 통계(e-나라지표)에 따르면, 지난 2017년까지만 해도 취업자가 전년도 같은 달에 비해서 매달 최소 30만 명 이상 증가했는데, 2018년 2월 들어서부터 그 수치가 10만 명대로 떨어지더니 7월에는 5,000명 수준으로 급락했고 8월에는 3,000명으로까지 하락했다. 이것이 보수 언론이 말하는 ‘고용 참사’의 대표적인 지표다.

보수 진영이 이 지표를 유난히 강조하는 이유는 이 지표가 사태를 실체보다 더욱 심각하게 인식하는 착각을 가져올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월별 취업자 증가 수는 앞 달과 비교한 것이 아니라 전년도의 같은달과 비교한 수치를 말한다. 따라서 2017년에 매달 취업자가 평균 30만 명 이상 증가했다는 말은 2017년을 합쳐서 360만 명 이상이 늘어났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2017년 특정 달의 취업자 수를 2016년 같은 달의 취업자 수와 비교했을 때, 취업자 수가 어떻게 변했는가를 보여 주는 것이다. 그래서 12월을 기준으로 한다면, 2017년 취업자수는 2016년에 비해서 25만 7천 명이 늘어났다.

물론 이런 점을 고려하더라도, 취업자 수의 증가가 둔화된 것은 분명하다. 2018년 1월의 경우 2017년 1월에 비해 취업자가 33만4천 명이나 많았는데, 2018년 8월의 경우 2017년 8월에 비해 불과 3,000명 많은 데 그쳤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보수 진영은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과 같은 정부 정책 원인 이외에 고용 지표의 악화를 설명할 길이 없다”라고 주장한다(「일자리 정부의 일자리 붕괴」, 『중앙일보』 2018년 9월 13일). 보수 언론은 최저임금뿐만 아니라 노동시간 단축까지 고용 부진의 원인으로 돌린다(「KDI, 정부와 다른 ‘고용참사’ 결론」, 『조선일보』 2018년 9월 13일). 논리적으로나 실제적으로나 노동시간 단축이 고용을 감소시켰다는 주장은 납득하기 어렵지만, 보수 진영은 고용 부진을 빌미로 문정부가 추진한 정책 전반을 문제 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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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국민에게 ‘기본소득을 받을 권리’를 ― 온국민기본소득운동본부 활동을 돌아보며

용혜인 기본소득정치연대 공동대표

‘기본소득을 받을 권리’를 위해 모이다

2017년 5월 18일, 광주민주화항쟁이 벌어진 지 37주년이 되는 날이었죠. 그리고 국정 농단에 분노해 타오르기 시작한 촛불로 박근혜 대통령을 끌어내리고 대통령 선거를 통해 문재인 후보가 19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지 9일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이날 제37주년 5·18민주화 운동 기념식에 참석한 문재인 대통령은 “5·18 정신을 헌법 전문에 담아 개헌”을 추진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부터 이슈가 되어 왔던 개헌이 대통령의 입에서 처음으로 나왔던 순간이었습니다.

기본소득을 의제로 한 대중운동의 필요성을 고민하고 있던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의 몇몇 청년 회원들은 30년 만에 개헌이 실제로 추진된다면 사회적 논의가 널리 진행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한국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을 합의하는 개헌 과정에서 ‘기본소득을 받을 권리’가 우리에게 있음을 적극적으로 이야기하기로 마음을 모았습니다. 구체적인 모델에 대한 견해 차이로 인해 기본소득을 지지하면서도 함께 힘을 모으지 못했던 지난 시기들을 되돌아보며, 우리에게 ‘기본소득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에 동의하는 모든 이들을 모아 내는 것을 목표로 기본소득 개헌운동을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한달 뒤인 6월 17일,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운영위원회에서 기본소득 개헌을 위한 ‘온국민기본소득운동본부’ 추진이 결정되었습니다.

그런데 약 일주일 뒤인 6월 26일, 국가인권위원회에서 기본소득이 포함된 개헌안을 공개했습니다. 온국민기본소득운동본부의 워킹 그룹을 형성했던 청년들은 신이 났습니다. 아직 많은 국민이 기본소득을 알고 있다고 말하긴 어렵겠지만 그래도 국가인권위 개헌안을 보면서 최근 기본소득 논의 확대에 힘입어 ‘기본소득을 받을 권리’가 이번 개헌 과정에서 완전히 뜬금없는 이야기는 아니겠구나, 하는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에 기본소득 개헌운동을 제안한 청년 회원은 다섯 명이었지만, 어느새 워킹 그룹에는 열 명이 넘는 사람이 모였습니다. ‘기본소득 기본권’에 동의하는 전국의 시민들을 너르게 모으기 위해 전국을 돌며 기본소득을 지지하는 시민들을 직접 만나 기본소득 개헌운동에 대해 설명하고, 온국민기본소득운동본부의 발기인으로 개헌운동에 함께 힘을 모아 주시기를 제안하기로 했습니다.

온국민기본소득운동본부는 전국을 돌며‘ 기본소득 개헌’을 설명했다.

그렇게 해서 7월 17일, 대전, 청주, 전주, 부산, 대구, 인천, 수원, 광주, 목포의 시민들을 만나기 위한 1차 전국 투어를 떠났습니다. 이후 계속해서 여러 지역에서 기본소득 개헌운동에 대한 설명을 듣기 위해 온국민기본소득운동본부를 불러주셨고 천안, 고양, 창원, 울산, 제주,서울까지 포함하여 총 15개 지역에서 기본소득 개헌운동 설명회가 열렸습니다.

생각보다 많은 지역에서 온국민기본소득운동본부를 불러 주셨고, 생각보다 많은 시민이 설명회 자리에 직접 찾아오셨습니다. 기본소득 개헌운동을 제안한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의 회원들, 기본소득을 당론으로 채택한 노동당, 녹색당, 우리미래의 지역 당원들, 그리고 기존에 연결 고리를 갖고 있지 않았던 새로운 분들을 기본소득에 동의한다는 한 가지 공통점을 통해서 만나는 일은 정말 설레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만난 사람들이 온국민기본소득운동본부의 발기인으로 함께하겠다고 힘을 모으는 장면을 보는 것은 정말 가슴 뜨거워지는 일이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 전국에서, 그리고 온/오프라인에서 총 543명의 시민이 온국민기본소득운동본부의 발기인으로 함께해 주셨습니다.

기본소득 개헌을 지지하는 개인들을 모아내는 것과 함께, 각 단체와 세력이 지지하는 구체적 기본소득 모델을 넘어 기본소득을 지지하는 단체들의 힘을 모으고 기본소득운동 세력의 영역을 확장하기 위한 시도도 있었습니다. ‘기본소득을 받을 권리’라는 간단한 명제에 동의하는 단체들을 모아 내기 위해 시민사회단체들에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비록 많은 단체가 모이지는 않았지만, 제안 단체였던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를 포함해 개혁연대민생행동, 문화연대, 소박한 자유인, 알바노조, 정치경제연구소 대안, 청년좌파(현 청년정치공동체 너머), 청년초록네트워크, 평등노동자회까지 아홉 개의 단체가 힘을 모았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온국민기본소득운동본부의 참가 단체로 함께하지는 않았지만 각 지역에서는 앞에서 이야기했듯 노동당, 녹색당, 우리미래까지 세 개 진보정당의 당원들이 모여 힘을 합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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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오의 어둠

우리가 처한 상황을 아서 쾨슬러의 소설 제목 『정오의 어둠』에서 따오는 것은 변주이긴 하지만 그리 이상하지는 않다. 1920년대와 30년대에는 유토피아적 이념의 고양과 환멸이 교차했다면, 촛불혁명의 밝음은 우리 삶의 구석구석에 박혀 있는 어둠과 대조된다. 한편으로 우리는 추상적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구체적인 인격에 투사했지만, 일상의 삶은 추상적인 패러다임이 여전히 지배하고 있다. 이는 사립 유치원 원장들이 가장 노골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데, 바로 재산권의 신성함이다. 물론 더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곳은 부동산이다. 공동체 내의 다른 사람들의 삶을 상관하지 않고 더 나아가 짓밟는 사태가 재산권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설령 많이 양보한다 하더라도 자기 노동에 기초하지 않는 재산권이 지배하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이런 사태의 배후에 신자유주의가 있다고 간단하게 말해 버렸을 것이다. ‘자유’라는 이름 아래 그 무엇보다 경제적 자유를 우선시하는 신자유주의가 기소당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할 것이다. 하지만 한국에서 교육을 사유화/사영화하고, 토지와 주택을 절대적 소유로 바라보는 태도를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로 환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도리어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그렇게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집단적 심성을 파악하는 일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시인 김수영은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좋다”라고 노래했지만, 우리에게 그런 것이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식민지, 분단, 전쟁을 거치면서 이 땅에는 그 어떤 도덕적 준거점도 남지 않고 오직 개인과 ‘가족’만 남은 것으로 보인다. 사실 개인주의가 가장 강한 나라가 미국이라 할 수 있는데, 미국의 경우 개인주의가 하나의 이념인 반면 우리의 경우에는 강요된 삶의 태도라는 점이 차이다.

사실 우리에게 이념적 지표가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근대화/산업화, 민주화, 통일 등이 그런 역할을 했을 것이다. 이보다 하위 범주로 진보, 복지, 인권 등도 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 어느것도 이 정치체의 ‘좌표’로 기능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그저 돈과 땅에 대한 사랑만이 넘쳐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이기에 절차적, 추상적 민주주의만이 유일하게 남아 있는 준거점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땅에서 진보를 추구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헌법 애국주의’에 기대고 싶은 유혹이 들 것이다. 하지만 헌법이 사회적 관계를 규제하는 틀이라 해도 이 틀은 다시 사회적 관계에 의해 구성된 것이라 할 때, 헌법에 대한 호소는 제한적일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무엇에 기초하여 사회적 관계를 바꾸려 해야하는가? 그것은 공동성을 새롭게 구성하는 노력에서 나올 것이다.

어떤 정치체의 공동성을 새롭게 구성하는 것은 그 물질적 기초의 공동성을 확인하는 일이 될 것이다. 이것은 토지와 자연자원, 사회적 생산 등에 대해 모두가 몫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일이다. 이는 거의 신성시되고 있는 재산권의 범위를 재규정하는 작업을 필요로 한다.

현재의 정치적 지형을 볼 때 이는 새로운 ‘좌파’의 출현을 요청한다. 이 좌파는 낡은 체제의 위기에서 자양분을 가져오는 게 아니라 이제 출현하고 있는 미래에서 정당성과 에너지를 얻어야 한다. 새롭게 출현하고 있는 디지털 경제에 대한 지적 인식, 공동성의 실천을위한 도덕적 헌신, 실질적 민주주의를 위한 정치적 도전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좌파이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2천 년 전에 어느 랍비의 말을 떠올려야 하지 않을까?

“내가 아니라면 누가, 지금이 아니라면 언제, 이 일을 하겠는가?”

 

편집위원회를 대신하여
안효상

 

이 글은 『시대』 2018년 11월호 통권63호에 실린 ‘책 머리에’이다.

최저임금 1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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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저임금으로 국민주권을 지키려는 맥도날드 라이더

최저임금 1만원

최저임금 1만원.
알바들의 유쾌한 반란 개정판
박정훈 지음| 2018년 7월 | 240쪽 | 박종철출판사

김태호 발행인

1.

2012년 대통령 선거에 한 여성 청소 노동자가 후보로 등록했다. 민주노총 울산지역연대노조 울산과학대 지부장 김순자. 선거운동본부 ‘순캠’은 비정규직노동자를 후보로 내세운 선본답게 “최저임금 1만원”, “온 국민 안식년 제도”, “기본소득” 등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얻은 표만 보자면 커다란 의미를 남겼다고 할 수 없겠지만, ‘순캠’에 모였던 젊은이들의 이후 운동은 한국에서 최저임금을 둘러싼 논의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2013년 1월 1일 ‘비정규불안정노동자와 함께하는 알바연대’(‘알바연대’)의 “출범을 알리는 기자회견에는 단 한 명의 기자도 없었”다(182쪽).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알바연대는 새벽에 편의점이나 PC방을 돌며 알바를 만나 실태를 조사했고, 세상에 왜 최저임금이 시간당 1만원은 되어야 하는지를 알렸다. 그리고 2013년 8월 5일 아르바이트노동조합(‘알바노조’)이 설립됐다.

2014년 3월에 나온 박정훈의 『알바들의 유쾌한 반란』은 알바연대의 활동을 알리고 ‘최저임금 1만원’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책이었다. 기획자로 되어 있는 “권문석”은 알바연대 대변인으로 활동하며 ‘최저임금 1만원’ 운동에 앞장서다 2013년 여름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 사람이다.

『최저임금 1만원』은 2014년에 나온 그 책의 개정판이다. “낡은 통계자료들을 최근 통계자료로” 바꾸었으며, 문재인 정부 들어 “최저임금이 예전보다 많이 오르면서 등장한 새로운 논쟁 지점”을 추가했다(11쪽).

2.

지금도 그런 용어가 쓰이는지 모르겠으나, 1980년대 운동권에는 ‘시각 교정용 도서’라는 것이 있었다. 주입되어 지니고 있던 생각을 뒤흔들 만한 책을 가리키는 것이다. 주로 한국의 근현대사에서 감추어져 있던 사건을 파헤치거나 처참한 사회 현실에 대한 고발을 담은 책이었다. 결국 더 많이 알고 더 많이 행동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만드는 책을 그렇게 불렀다.

초판 『알바들의 유쾌한 반란』이 그랬듯이 개정판 『최저임금 1만원』도 경어체로 되어 있다. 차근차근 이야기하며 독자에게 손을 내미는 듯한 분위기다. 말하자면 이 책은 “최저임금 1만원 운동”을 중심으로 하는 이 시대의 ‘시각 교정용 도서’로 기획된 듯하다.

3.

제1장(“알바생 vs. 알바노동자”)은 “최저임금 1만원”이라는 주제와 관련된 본격적인 논의에 들어가기에 앞서, 한국 사회에서 “알바”란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를 묻고 있다. “망한 인생의 상징일까? 자유의 상징일까?”

저자는 “알바노동 자체에 이중적인 성격이 존재하기도”(31쪽) 한다고 본다. 수입과 고용이 안정된 일자리를 얻지 못한 처지이지만, 출퇴근 시간에 얽매이는 정규직보다 자유롭다는 것이다. 원하는 시간만큼만 일하고 나머지 시간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으니까. 가이 스탠딩이 프레카리아트를 두고 “희생자로서의 정체성과 영웅으로서의 정체성이라는 이중 정체성”(『프레카리아트. 새로운 위험한 계급』, 박종철출판사, 12쪽)이라 한 것과 유사하다 하겠다.

아울러 저자는 “알바생”이라는 표현에 담긴 편견을 폭로하고 “알바노동자”로 부를 것을 제안한다. “알바노동”이 “학생이 부업으로 하는 일쯤으로 전락”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34쪽). 실제로 현재 알바노동자는 학생 연령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알바생”이라 여기면서 여러 갑질이 벌어진다. 권문석의 삶을 다룬 얼마 전에 나온 책 제목이『‘알바생’ 아니고 ‘알바노동자’입니다』다.

이런 식으로 “이데올로기”가 어떤 효과를 낳는지를 필자는 다른 예로도 보여 준다. “청소 노동자는 한 시간 7,359원, 이건희는 하루 3억원이 당연하다?”, “노동조합은 빨갱이가 하는 짓?”, “일은 군필자가잘한다?” 필자는 이런 것들을 “이데올로기가 주는 가상”이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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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소득은 어떻게 노동자 소유 기업을 활성화시킬 수 있는가? ― 경제민주주의를 향한 투 트랙 전략*

이건민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운영위원, 정치경제연구소 ‘대안’ 상임연구원

1. 서론: 경제민주주의 차원에서의 기본소득과 노동자 소유 기업

오늘날 자유, 평등, 시민권, 민주주의 등의 추상적인 가치들을 급진적이고도 해방적인 방향으로 확장하고자 고민하는 그 누구라도 기본소득이라는 아이디어와 만나게 되고 이와 고투하게 된다. 기본소득을 지지하고 옹호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기본소득이 다음과 같이 자리매김되는 것은 너무도 자명한 일이다. 기본소득은 자유의 측면에서는 형식적 자유에서 실질적 자유로(Van Parijs, 1995; Van Parijs and Vanderborght, 2017), 가장 확장된 자유의 개념인 공화주의적 자유로(Raventós, 2007; Casassas, 2016; Casassas and De Wispelaere, 2016;Standing, 2017) 나아가기 위한 필수 요소다. 평등의 면에서는 현재의 극심한 사회경제적, 젠더 차원의 불평등을 좀 더 평등한 방향으로 변화시키기 위한 필요조건이다(Fraser, 1994; Zelleke, 2008, 2011; 이건민, 2017). 시민권과 민주주의의 차원에서는 인구학적 상황, 경제적 상황, 종사상의 지위와 계급 등에 상관없이 모두에게 지급되는 정당하고도 바람직한 사회배당이자, 공민권과 정치권, 절차적 민주주의를 넘어서 사회경제적 권리와 경제민주주의로 나아가기 위한 필수 구성 요소다.

그런데 우리 시대에서 경제민주주의를 심화, 발전시키기 위한 주요한 방안으로는 기본소득뿐만 아니라 노동자 소유 기업(노동자 소유 협동조합을 포함하여)도 함께 떠오른다. 본고에서는 경제민주주의를 다음과 같은 사중의 능력으로 정식화한 카사사스(David Casassas, 2016:1)의 정의를 따를 것이다. “(ⅰ) 일하기 위해 ‘진입’하기를 바라는 사회적 관계들을 정할 능력. (ⅱ) 우리가 머무르고 일하기로 한 공간의 (비)물질적 성격을 결정할 능력. 그것은 실질적으로 들리는 ‘목소리 (발언권)’를 갖는 능력을 필요로 한다. (ⅲ) 이 공간의 성격과 기능이 우리의 삶에서 바라는 바에 반하는 경우 이 공간에서의 ‘탈출’을 선택할 능력. (ⅳ) 떠나기로 선택한 경우에, 그 다음의 기회들을 위한 이전 직장의 외부에서 제공되는 수단들에 의지할 수 있는 능력. 즉 지금과는 다른 조건과 상태에서 (재)생산적 삶을 효과적으로 ‘다시 시작할’ 능력.” 이러한 경제민주주의의 추구라는 점에서 보자면, 기본소득과 노동자 소유 기업은 조금은 다른 점들을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기본소득이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생산과 노동, 작업장의 영역을 넘어서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들에서 광범한 의미에서의 경제민주주의의 만발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되는 반면, 노동자 소유 기업은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생산과 노동, 작업장 영역에서의 민주주의, 즉 기업민주주의나 산업민주주의의 심화, 발전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되어 왔다.

경제민주주의 측면에서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노동자 소유 기업은 기본소득과 관련하여 거의 연구되어 오지 않았다. 이는 일자리의 양과 질 모두 문제시된다고 전망되자 일자리 보장과 참여소득이 기본소득의 대안이 될 수 있는지, 무엇이 더 우월한지, 대체 관계에 있는지 보완 관계에 있는지 등이 활발히 연구되어 온 것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하지만 비록 지금까지 거의 논의되어 오지 않긴 했지만 경제민주주의 혹은 산업민주주의 면에서 일자리 보장이나 참여소득보다 훨씬 대담한 제안은 바로 노동자 소유 기업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이 기본소득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 살펴보는 것은 비판적, 해방적 사회과학과 사회정책을 추구하는 데 핵심적이다.

이 글에서는 기본소득의 도입과 노동자 소유 기업의 발흥이 경제민주주의의 핵심을 이룬다는 관점 하에서, 기본소득이 노동자 소유 기업의 활성화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경로와 기제를 탐구할 것이다.

이 글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우선 노동자 소유 기업이 자본주의적 기업에 대해 지니는 비교우위와 비교열위를 검토한다. 다음으로 기본소득의 도입이 노동자 소유 기업의 활성화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경로와 기제를 탐구한다. 이 글의 마지막에서는, 경제민주주의를 향한 투 트랙 전략으로서 기본소득의 도입과 노동자 소유 기업의 활성화가 우리 시대의 주요한 해방적 대안이 될 수 있음을 강조하면서 글을 맺는다.

 

* 이 글은 제18차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 대회(2018년 8월 24~26일, 핀란드 탐페레대학교) 세션 B4에서 필자가 발표한 “How Can Basic Income Activate and Encourage Labor-Managed Firms?: A Two-Track Strategy for Economic Democracy”를 번역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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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의 죽음과 노회찬의 죽음

박기순 충북대 철학과 교수

1. 자살이란 무엇인가?

지난 7월 23일 정의당 국회의원이었던 노회찬 의원이 세상을 떠났다. 자살이었다.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사실이 드러나면서 자신의 “어리석은 선택”에 책임을 지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한국진보운동과 함께해 왔던 그의 삶을 알기에 많은 사람이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충격을 받았고 슬퍼했다. 그리고 또 많은 사람은 ‘꼭 그래야만 했는지’를 물으며 아쉬워하고 안타까워했다.

사실 일반적으로 스스로 삶을 마감하는 ‘자살’이라는 행위는 쉽게 이해될 수 없는 종류의 것이다. 왜냐하면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흔한 경우는 아니지만 때로는 목숨을 걸고 어떤 일을 하는 경우도 물론 있지만, 이 경우에도 죽음이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다. 두려운 것이기 때문에 ‘무릅써야’ 하는 결단이 필요한 것이 아니겠는가? 따라서 두려움의 대상인 죽음을 자발적으로 선택한다는 것은 쉽게 이해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이다. 사실 우리는 살기를 원한다. 어쩌면 이것은 모든 살아 있는 생명체의 가장 원초적이고 기본적이며 보편적인 욕구일 것이다. 이렇게 보면, 자살은 살아 있는 존재에게는 자기모순적 행위다. 즉 그것은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행위인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인간은, 존재들 가운데 가장 뛰어나다고 간주되는 인간은 살고자 하는 자연적 욕구를 거스르는 행위를 하는가?

현상적으로 자살의 형태를 띠고 있는 행위들이 엄밀히 말해 모두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외견상으로는 자살이지만 실제로는 타살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요즈음 뉴스를 매일같이 장식하는 이러저러한 자살 소식들은 더 이상 놀라운 일이 아니다. 우울해서, 살길이 막막해서, ‘왕따’를 당해서 사람들은 자살을 선택한다. 그러나 이 선택은 강제된 선택이다. 살기를 원했지만 최소한의 살아갈 의지마저도 앗아간 이러저러한 환경과 원인 때문에 더 삶을 계속할 의지를 상실한 것이기에, 최종 행위자는 자기 자신이지만 그 행위의 진정한 원인은 외부에 있다. 이러한 이유로 철학자 스피노자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자살은 우연히 칼을 든 손이 외부의 힘에 의해 자신의 심장을 찌르는 행위라고 정의한 바 있다.

이 정의에 따르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자살’로 부르지 않는 행위도 앞에서 말했던 자살적 행위와 같은 것이 된다.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 그것도 잘 살기 위해서는 부와 쾌락과 명예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들을 맹목적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추구한다. 그러는 사이 우리 삶은 황폐해지고, 돌보고 사랑해야 할 많은 것을 잃는다. 이 경우, 우리가 살기 위해서 하는 많은 것은 실제로는 우리의 삶을 파괴하게 된다. 스스로의 행위를 통해서 부지불식간에 자신을 죽이는 것이지만, 실제로 여기에서도 죽음의 실제적인 원인은 내가 아니라 외부 원인에 있다. 예를 들어 보자. 즐거운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즐거운 것들을 추구할 것이다. 그러나 나를 즐겁게 하는 모든 것이 나를, 나의 삶을 아름답고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많은 경우 그것들은 반대로 나의 삶을 불행에 빠뜨리거나 파괴한다. 그런데 이렇게 내가 나의 삶을 파괴하게 되는 것은 내가 행복(잘 사는 것, 잘 존재하는 것)을 쾌락적인 삶으로 혼동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혼동은 외부의 어떤 것(나에게 쾌락을 주는 것)이 나에게 미친 영향(쾌락)에 굴복하여 그것을 올바르게(나에게 진정으로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판단하지 못한 것에서 온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잘못 살아가는 것’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자살’이라고 부르는 것과 하등 다를 바가 없다. 즉 그것은 자살의 형태를 띠고 있는 타살인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의미의 자살은 없는가? 이것이 우리가 생각해 볼 문제다. 고 노회찬 의원의 자살은 분명 앞에서 언급한 ‘자살의 형태를 띤 타살’과는 조금 달라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경우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 경우를 성찰할 수 있게 해 주는 사례 하나가 철학사에 있다. 다름 아닌 소크라테스의 죽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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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경제의 시장화와 북핵 해결 전망

유승경 정치경제연구소‘대안’부소장

1. 도입

북한이 2018년 6월 12일 역사상 최초로 싱가포르에서 열린 북미정상회담에서 완전한 비핵화에 합의했다. 미국 일각에서는 북핵 폐기의 구체적인 원칙(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비가역적인 폐기)이 명시되지 않은 것을 두고 비판이 일고 있지만, 북한이 비핵화를 위한 과정에서 이탈하여 상황을 되돌릴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만약 북한이 핵보유를 다시 고집하면서 한국 및 미국과 대립한다면 북한에 대한 국제사회의 제재와 봉쇄는 과거보다 훨씬 더 강화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북한이 과거의 대립 노선에서 벗어나려고 한다는 사실은 비단 핵문제와 대외 관계에 한정된 것이 아니다. 사실 북한은 경제 영역에서도 사회주의의 기본 통념에서 벗어나 시장 관계를 폭넓게 받아들이는 개혁을 진행시켜 왔다. 대다수 연구들은 북한의 시장화를 계획경제의 토대가 붕괴되고 개인과 기업이 자구책을 찾는 과정에서 시장이 자생적으로 확산된 것으로 설명한다. 하지만 북한 당국이 시장화의 흐름에 저항하지 않고 오히려 시장을 양성화하고 제도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장화는 개혁적 의도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북한 경제의 시장화 확산은 대외 정책 및 군사 전략의 변화와도 맞물려 있다. 역사상에 존재한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의 모순인 시장의 무정부성을 ‘중앙 계획’으로 대체하려는 목적에서 탄생한 것이 아니다. 여러 연구들이 말해 주는 것처럼, 현실의 사회주의는 경제 자원을 국가 전략상의 최우선 분야인 군수산업으로 집중하기 위한 전쟁 동원체제다. 폴란드 경제학자 오스카 랑게에 따르면, 현실의 사회주의는 “독특한sui generis 전쟁경제”로서, “모든 자원을 하나의 유일한 목적을 위해 집중하는 체제, 중요하지 않은 부분으로의 자원 유출을 피하기 위한 자원의 집중적 배분 체제, 정치적 판단에 따른 우선순위에 따라 행정적으로 자원을 분배하는 체제, 정치적 자극과 애국심에 호소함으로써 노동을 독려하는 체제”다. (Oskar Lange, “The Role of Planning in a Socialist Economy”, Indian Economic Review, Vol. 4, No. 2, August 1958).

사회주의에서 계획의 실질적인 의미는 자원을 동원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데 있다. 따라서 사회주의체제의 시장화란 자원 배분의 방식이 계획에서 시장으로 대체된 것을 의미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국가에 의한 군사 부문으로의 경제적 동원이 완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북한 경제에서 계획 부문이 축소되는 시장화의 현상은 북한에서 어떤 이유에서든 군수산업으로 동원하던 자원의 양이 줄어들고 있는 것을 반영한다.

이 글은 위와 같은 관점에서 북한 경제의 시장화 현상을 역사적으로 검토하고 향후 북한 당국의 대내외적 정책 방향을 전망해 본다.

제2절에서는 북한이 전통적인 사회주의를 고수하던 시기에 시장이 어떤 방식으로 존재했는가를 살펴본다. 계획경제라 불리던 시기에도 시장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일반적인 통념과는 달리 공식적으로 인정되던 시장이 있었고, 비공식적이고 은폐된 형태로도 다양한 시장이 존재했다. 사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시장화는 비공식적이고 은폐된 형태의 시장이 제도화, 양성화되는 과정이다. 따라서 현재의 시장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통적인 사회주의에서의 시장을 먼저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제3절에서는 북한 경제의 시장화 현상이 시기별로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살펴본다. 북한 경제의 시장화는 1990년대 이후 빠르게 진행되었으며, 2000년대 들어서는 북한 당국의 정책에 의해서 가속되었다. 이후 시장화의 흐름이 일시적으로 후퇴하기도 했지만 북한에서 시장화는 이제 되돌릴 수 없는 흐름이 되었다는 점을 확인해 본다.

그리고 결론에서 향후 북한의 대내외 정책을 전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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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정당의 지방선거 패배와 정당체제의 변화 가능성

지병근 조선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1. 들어가며

선거를 관전하는 즐거움은 무엇보다 누가 이길 것인지 모르는 ‘불확실성uncertainty’에서 온다. 그러나 간혹 어떤 선거는 그 결과가 너무나 확실해서 굳이 개표 결과를 기다릴 필요가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아무리 승패가 확실해 보이더라도 대부분의 선거는 개표가 완료될 때까지는 마음을 졸이며 지켜봐야 하기 마련이다. 제7회 동시지방선거도 선거운동이 시작되기 전부터 끝날 때까지 불확실성의 수준이 매우 낮았다. 문재인 정부와 집권당인 더불어민주당의 지지율은 고공 행진을 지속하고 있었다. 거의 모든 여론조사와 언론 보도가 더불어민주당의 압승을 예상하고 있었으며, 선거가 종반으로 가면서 이러한 전망이 더욱 굳어졌다.

남북 정상회담이나 북미 회담 역시 더불어민주당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하게 작동했다. ‘북한의 김정은이 문재인의 선거운동을 도와주고 있다’라는 홍준표의 탄식에서 잘 드러나듯이, 여당의 입장에서 북한 변수는 ‘총풍’이 아니라 ‘훈풍’의 역할을 해 주었다. 이번 지방선거를 앞두고 유일하게 더불어민주당을 긴장시킨 이슈는 ‘드루킹 사건’이었다. 자칫 국정원 댓글 사건처럼 정권의 정당성을 위협할 수 있을 만큼 중대한 사건이었고 파장이 커질 수 있었다. 하지만 여당은 지방선거를 한 달여 앞둔 시점인 5월 18일 이 사건에 대한 야당의 특검 요구를 수용함으로써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거 결과를 지켜본 이들은 더불어민주당이 기대 이상의 성과를 낸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난 2014년 지방선거 당시 세월호 사건의 여파로 당시 집권당이었던 새누리당은 참패할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지만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따라서 이번 선거에서도 더불어민주당이 압승할 것이라는 예상은 상당히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역대 선거에서 나타났던 영남 유권자들의 지역주의적 투표 성향을 고려할 때 자유한국당이 참패할 것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려웠다. 아울러 여론조사에 응답하지 않아 잘 드러나지는 않는 소위 “샤이 보수”가 본선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지도 알기 힘들었다.

그렇다면 제7회 지방선거는 ‘중대 선거critical election’가 될 수 있을까? 물론 지방선거는 총선이나 대선과 달리 중앙권력이 아닌 지방권력의 구성을 위한 것이기에 통상적으로 전국적 차원의 정당체제의 재구성을 의미하는 중대 선거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지방선거는 단순히 더불어민주당의 압승과 자유한국당의 대패로만 그 의미를 한정하여 바라볼 수만은 없다. 왜냐하면 이번 선거에서 기존의 영호남 지역 균열만으로 설명하기 힘든 투표 행태의 변화가 목도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이념적으로 ‘보수’를 대표하고 지역적으로 ‘영남’을 대표하던 자유한국당에 대한 지지가 현격히 약화되어 그 위상이 추락한 반면, 더불어민주당은 호남은 물론 부산·울산·경남에서도 광역단체장 선거를 비롯한 거의 모든 지방선거에서 승리하였을 뿐만 아니라 대구·경북에서도 과거에는 기대할 수 없었던 득표율을 올릴 수 있었다.

2. 지방선거 결과

이번 지방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은 ‘역대급’ 승리를 거두었다. 14명의 광역단체장(82.4%), 151명의 기초단체장(66.8%), 605명의 광역의원(82.1%)과 47명의 광역비례의원(54.0%), 1,400명의 기초의회의원(55.1%)과 238명의 기초비례의원(61.8%)을 당선시켰으며, 대구와 경북을 제외한 15개 광역의회에서 원내 제1당이 되었다. 이로써 더불어민주당은 호남을 벗어나 전국적으로 가히 ‘일당 우위 체제’를 구축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자유한국당은 대구와 경북 등 두 곳에서만 광역단체장을 배출하였으며, 나머지 선거에서도 더불어민주당과는 비교하기조차 힘들 정도로 저조한 성과를 거두었다. 바른미래당은 광역단체장 선거는 물론 기초단체장 선거 가운데 단 곳에서도 승리하지 못하였으며, 불과 1명의 광역의원, 4명의 광역비례의원, 19명의 기초의회의원, 2명의 기초비례의원만을 당선시킬 수 있었다. 민주평화당은 그나마 5명의 기초단체장(전남 3명, 전북 2명)과 2명의 광역비례의원(전남과 전
북 각 1명), 46명의 기초의원(모두 광주, 전남·북), 3명의 기초비례의원(모두 전남)을 당선시켰다. 진보정당인 정의당과 민중당 또한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통합진보당의 후계 정당인 민중당은 11명의 기초의원(광주 3명, 울산 1명, 경기 2명, 전남 4명, 경남 1명)을 당선시키는 데 만족해야 했으며, 그나마 정의당은 1명의 광역의원(전남), 10명의 광역비례의원(서울, 인천, 광주, 충남, 전북, 전남, 경남, 제주 등 각 1명, 경기 2명), 17명의 기초의원, 9명의 기초비례의원을 당선시킬 수 있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무엇보다 영남 지역에서 자유한국당에 대한 지지가 급속도로 약화되었다는 사실이다. 다음의 그림은 이 지역에서 더불어민주당 당선인 비중과 자유한국당 당선인 비중 사이의 차이를 보여 준다. 자유한국당은 대구와 경북에서는 기초단체장 선거와 광역의회 선거에서 당선인의 수가 차지하는 비율이 더불어민주당보다 훨씬 더 높았다. 특히 대구의 경우, 자유한국당은 더불어민주당보다 기초단체장 선거에서 87.5%p, 광역의회 선거에서 70.4%p 당선인의 수의 비중이 더 높았다. 그러나 광역비례대표 선거, 기초의회 선거, 그리고 기초비례의원 선거의 경우 그 차이가 현격하게 감소하였다.

그런데 이보다 더 주목할 만한 것은 부산, 울산, 경남에서 나타난 선거 결과였다. 특히 통상적으로 자유한국당의 전신이었던 새누리당의 지지도가 높았던 부산과 울산에서 자유한국당의 당선인 비중은 더불어민주당에 비해 현격하게 낮았다. 특히 울산 지역에서 모든 기초단체장 선거의 당선인이 더불어민주당 후보였으며, 자유한국당은 단 한명의 당선인도 배출하지 못하였다. 다만, 경남에서 자유한국당은 더불어민주당에 비해서 각각 16.7%p, 10.6%p, 13.9%p 더 높은 비율의 기초단체장, 기초의원, 기초비례의원을 배출하는 데 성공하였다.

* 이번 지방선거를 앞두고, 「최저임금법」 개정을 둘러싼 논란이 있었고, 서지현 검사를 시작으로 안태근, 안희정, 조민기, 조재현 등 정계와 영화계 인사들의 성추행에 대한 폭로가 이어지는 소위 ‘미투 운동’이 일어났다. 그 외에도 이 시기에는 이명희를 비롯한 한진 그룹 오너 가족의 ‘갑질’이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그런데 이번 지방선거의 특징은 ‘지방’이 없는 선거였다는 점이다. 지역 이슈는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 회담에 묻혀 언론의 주목을 거의 받지 못하였다. 각 정당들이 제시한 10대 정책에는 ‘일자리 창출’과 함께 ‘미세먼지’ 대책이 포함되었다. 한편, ‘세월호 사건’ 발생 직후 실시된 지난 2014년 제6회 지방선거에서는 거의 모든 정당이 ‘안전’을 1순위 정책으로 제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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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넘랜드, 자동화, 기본소득: 하나의 응답*

말콤 토리, 번역 이건민 정치경제연구소 ‘대안’ 상임연구원

지난 호에서 프레더릭 피츠, 로레나 롬바르도치, 닐 워너 등은 기본소득이 저임금에 대한 우울한 보조금으로 기능할지 모른다는 이유로 기본소득 아이디어를 비판했다. 여기서는 기본소득의 주요한 옹호자가 기본소득은 단순한 임금 보조금과는 다르게 기능한다는 주장으로 이에 응답한다.

『갱신』 2017년 마지막 호(25권 3∼4호)에서, 프레더릭 피츠, 로레나 롬바르도치, 닐 워너는 1795년 스피넘랜드 개혁 경험이 “일종의 기본소득 실험”이었다고 주장한다.1)

스피넘랜드 제도는 그런 게 아니었다. 그것은 노동빈곤층에 대한 구제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었다. 다양한 비율로 지급된 보충 급여들은 순소득을 보장했다. 절대로 ‘기본소득’이 아니었다. 그 차이는 결정적이다. 스피넘랜드 제도에서 보장된 최저소득은 가구소득이 그 수준 아래로 떨어지도록 허용되지 않는 최저소득이며, 주어지는 급여는 가구의 순소득을 특정 수준 위로 끌어올리기 위해 설계된다. 현재 그와 유사한 것들로는 근로세액공제Working Tax Credits와 이른바 유니버설 크레딧Universal Credit이 있다. 스피넘랜드 제도에서 지급되는 보충 급여는 노동자의 소득과 특정한 최저소득 사이의 격차를 메우도록 설계되어 있었고, 이때 그 특정한 최저소득은 가족 규모나 빵 가격과 연관된 것이었다. 보충 급여는 자산 조사에 기반하는 복지 급여였다.

기본소득은 이와는 전적으로 다르다. 기본소득은 동일한 연령의 모든 개인에게 똑같은 액수로 지급된다. 그 차이는 뚜렷하다. 스피넘랜드 급여는 소득이 증가할 경우 감소했으며 소득이 감소할 경우 증가했다. 기본소득은 개인의 소득이 어떠하든 동일한 액수로 유지된다. 이는 효과가 매우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스피넘랜드 보충 급여는 동태적 보조금으로서 기능했다. 보충 급여는 임금이 하락하면 상승해서, 임금을 삭감했던 고용주들은 보충 급여가 임금 삭감을 벌충할 것임을 알았다. 기본소득은 정태적 보조금이 될 것이다. 말하자면, 임금이 하락해도 상승하지 않을 것이어서, 고용주와 피고용자 모두 만약 임금이 하락하면 피고용자 가족들의 경제적 상황이 더 나빠지게 됨을 알 것이었다. 단체협상과 국가생활임금 모두 현재보다 훨씬 더 중요할 것이며, 그것들을 지키기 위한 노력은 격렬할 것이다.

또 다른 차이는 고용 인센티브와 관련된다. 스피넘랜드 보충 급여가 지급되던 공동체들 내에서는, 저임금 생계부양자가 한 명인 대가족에게는 임금을 인상하고자 시도하는 것, 보수가 더 좋은 직업을 찾는 것, 또는 추가 기술을 습득하는 것의 재정적 이점이 없었다. 임금 상승은 더 적은 보충 급여를 의미할 것이었다. 하지만 기본소득은 결코 변화하지 않기 때문에, 현재 자산 조사에 기반하는 복지 급여에 의존하는 사람의 경우, 기본소득으로의 전환은 그들로 하여금 위에서 언급한 다양한 재정적 불리함을 제거할 수 있게끔 할 것이고, 더 높은 임금을 받고자 시도하거나 보수가 더 나은 직업을 얻고자 추가 기술을 습득하는 등 인센티브 증가를 즉시 경험하게끔 할 것이다. 더 이상 임금 인상으로 인한 급여 상실이 발생하지 않으므로, 노동소득 증가는 훨씬 더 큰 순소득 증가를 낳을 것이다.2)*

* 아래의 글은 『갱신: 노동정치 저널Renewal: a Journal of Labour Politics』(www.renewal.org.uk) 26(1)호(2018년)에 실린 “Speenhamland, automation, and Basic Income: A response”을 번역한 것이다. 이 글이 실린 잡지의 편집자의 주에서 알 수 있듯이, 이 글은 2017년에 나온 같은 잡지 25/3-4호에 실렸던 「스피넘랜드, 자동화, 기본소득: 역사로부터의 경고? Speenhamland, automation and the basic income: A warning from hiatory?」에 대한 비판이다. 말콤 토리Malcolm Torry는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BIEN 가입 단체인 영국의 시민기본소득트러스트Citizen’s Basic Income Trust의 대표자이자 런던정치경제대학교 방문선임연구원이다. 저자와 잡지사 모두의 허락을 얻어 번역했으며 이 주를 제외하고 번호로 표시된 세 개의 주는 저자의 것임을 밝혀 둔다.

1) F. H. Pitts, L. Lombardozzi, &N. Warner, ‘Speenhamland, automation and the basic income: A warning from history?’, Renewal, 25/3-4, 2017, p.150.

2) 실현 가능한 예시적인 기본소득 제도에 의해 자산 조사 기반 복지 급여로부터 벗어나는 가구 수에 대해서는, 그리고 그 제도가 보장하는 한계공제율의 중요한 감소에 대해서는 M. Torry, “A variety of indicators evaluated for two implementation methods for a Citizen’s Basic Income”, Euromod working paper 12/17, Institute for Social and Economic Research, University of Esse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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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혁명을 생각한다

인간 지식의 불완전함과 인식의 불철저함으로 인해 우리는 끊임없이 다시 보기revision를 해야 한다. 과거를 다루는 역사학을 보자면, 새로운 사료(사실)의 발견이나 증거를 다루는 새로운 방식이 나타날 경우 혹은 둘 다일 경우 과거를 다시 보는 작업이 집중적으로 벌어진다. 하지만 이 바탕에 가치나 지향이 깔려 있는 것도 사실이다. 프랑스혁명을 ‘위대한 부르주아 + 민중의 혁명’으로 보지 않고 어중이떠중이(민중)가 정치라는 장에 난입하여 올바른 개혁을 엉뚱한 방향으로 몰고 갔다고 보는 ‘수정주의’가 냉전 자유주의를 배경으로 하고 있듯이, ‘광주사태’가 ‘광주의 민주화 운동’ 혹은 ‘광주민중항쟁’으로 명칭이 바뀐 것은 87년 체제의 형성과 완성을 향한 움직임을 반영한다.

사실 일상에서 우리가 흔히 내뱉는 말 ‘이러려고 * * 했나?’라는 말도 같은 행위다. 요즘 같아서는 이 말을 ‘이러려고 촛불혁명 했나?’ 혹은 ‘이러려고 그 추운 겨울에 우리가 거리에 나갔나?’로 바꿀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촛불혁명은 21세기에 비폭력적이면서도 상당히 합법적인 방식으로 시민의 의지에 반하는 권력을 교체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놀라운 사건이었다. 기무사가 당시 대통령과의 ‘교감’ 속에 계엄령을 ‘준비’했다는 것을 방증하는 문건들이 나오긴 했지만, 거꾸로 보면 계엄령을 실시하고픈 마음은 있었겠지만 감히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은 한국 민주주의가 제도나 심성이라는 면에서 꽤나 완강하다는 것을 보여 줄 뿐이다. 사실 사태가 그렇게 된 것은 박근혜 대통령과 그 일당이 보인 너무나 터무니없는 행태 때문이긴 하다. 당시 새누리당조차 탄핵에 동의했다는 것은 그저 대중의 움직임에 편승하려는 기회주의적 태도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어찌되었든 추운 겨울이 지나고 따뜻한 봄에 우리는 민주적이고 개혁적이면서도 가깝게 느껴지는 스타일의 대통령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는 우리에게 여러 가지 면에서 감동을 주었다. 격식 문제에서부터 과거사에 대한 이해까지 그는 사람들이 대체로 바라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비핵화를 향한 남북 관계의 개선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도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른바 경제 영역으로 자리를 옮기면 문재인 대통령과 민주당 정권이 지난 두 번의 정권과 다른 점을 찾기가 쉽지 않다. 이른바 “소득 주도 성장”의 유일한 정책 수단인 최저임금 인상 추진도 어려운 경제 여건 앞에서 스스로 철회했다는 점뿐만 아니라 집값 안정과 적절한 재분배를 위해서 꼭 필요한 토지 관련 세금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이 정부의 경제철학을 읽을 수 있다.

이러한 모습을 두고 간단하게 ‘부르주아 정권’의 본질이 드러났다고 비난하는 것은 편한 일이긴 하지만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는 데 크게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의 ‘본질’을 간과하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좀 더 구체적인 방식으로 이해해 보자는 것이다. 거칠게 말하면 김대중-노무현-문재인으로 이어지는 정부는 자유주의 개혁 세력과 사회민주주의적 경향의 연합이라 할 수 있다. 한국 자유주의자들의 오랜 꿈은 정상적인 자본주의 질서를 만들어 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베를린장벽의 붕괴 속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회민주주의로 미끄러져 갔고 1997년의 실질적인 평화적 정권 교체 속에서 제도적, 실천적 가능성을 발견한 후자는 실현 가능한 복지국가를 자신의 목표로 삼고 있다. 이들의 공통분모를 찾자면 “경제적 공포”일 것이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적 성장을 지상 목표로 삼고, 여기에 자신의 운명을 걸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이 신자유주의자들과 유일하게 다른 점은 성장의 과실이 좀 더 공평하게 분배되어야 한다는 생각일 것인데, 이는 무엇보다 고용의 증대로 귀결되어야 한다고 본다.

여기에 또 하나의 강박을 더해야 할 것이다. 87년 체제를 거치면서 한국 현대사를 해석하는 두 개의 핵심어로 산업화와 민주화가 떠올랐다. 이 두 단어는 20세기 후반 대한민국이 이룩한 성취를 자랑스럽게 내세울 때 등장한다. 문제는 둘 사이의 관계다. 산업화는 개발 독재에 의해, 민주화는 그 속에서 민중의 저항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이 통속적인 이해 방식이다. 이것이 지난 20여 년 정도 지속되고있는, 현대사를 둘러싼 논쟁의 배경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사실 집권한 민주개혁 세력의 아킬레스건이라 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자본축적, 고용 안정, 복지 등의 순환적 관계를 원활하게 하는 게 현대 국가라는 인식에서 이들도 벗어나 있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이 집권의 이유를 보여 주는 것은 이를 더 잘 수행 할 수 있다는 능력을 보여 주는 것 이외에는 없는데, 이들이 생각하는 정책 수단이 신자유주의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게 문제다. 따라서 의지는 산업화를 민주화에 수렴시키려 하나 현실은 민주화를 산업화에 수렴시키는 것이며, 이는 어쩌면 이전 정권보다 더한 경제적 배치와 상황을 만들어 낼지도 모른다.

그런데 현 정부가 경제와 관련해서 이런 태도를 보이는 게 그저 이들의 본질 때문은 아닐 것이다. 자유한국당이 촛불혁명 당시 탄핵에 동의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현 정부도 대중의 움직임에 의해 탄생했고 또 거기에 신경 쓰고 있다. 문제는 무엇이 촛불 정신인가다. 눈에 보이는 촛불혁명의 한 가지 공통된 목표는 물론 대통령 탄핵 혹은 퇴진이었다. 하지만 그 아래에 다양한 열망이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세월호 참사의 억울함부터 청년의 불안한 미래와 여성에 대한 차별까지 개별적으로 혹은 집단적으로 표출한 불만과 간직한 바람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대통령 탄핵이라는 공통의 목표 이외의 것은 억압당하거나 심한 경우에는 서로 갈등하는 처지로 내몰렸다. 이는 현행 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과도한 믿음에서 나왔거나 민주개혁 세력에 대한 과도한 기대에서 가능했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촛불혁명은 최소한 현재까지는 87년 체제에 대한 일종의 보수 혁명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87년 체제에 대한 대중의 신뢰가 여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른바 ‘경제문제’가 눈앞의 과제가 되면서 갈등의 지형이 퇴행하고 있다. 현재의 정치 지형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촛불혁명의 의미를 새롭게 구성하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가기 위해서는 갈등의 지형 자체를 바꾸는 일이 필요하다. 물론 짧은 시간 내에 될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자본주의적 성장, 고용, 복지의 관계가 이미 어긋한 시대, 제4차 산업혁명의 전망이 어른거리는 시절에 이는 꼭 불가능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편집위원회를 대신하여
안효상

 

이 글은 『시대』 2018년 10월호 통권62호에 실린 ‘책 머리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