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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일, 한국 최초의 배달 노동조합이 뜬다

박정훈 라이더유니온 준비위원장

 

이 글은 『시대』 구독자들에게 라이더유니온 후원회원이 되어 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띄우는 편지다.

 

2019년 5월 1일, 대한민국 최초로 배달 노동자들의 노동조합이 뜬다. 그날 국회 앞에서 오토바이를 탄 라이더들이 출범 총회를 열고 행진을 할 예정이니, ‘시동을 건다’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 같다. 출범 총회는 1시, 본격적인 행진은 2시부터 시작된다. 보험회사, 근로복지공단, 고용노동청, 청와대로 향하는 코스다.

라이더들은 목적지가 분명한 사람들이다. ‘오배송’이 아니라면, 이유 없는 주행을 하지 않는다. 라이더유니온은 그동안 라이더들에게서 많은 주문을 접수했고, 이 주문을 각각의 목적지에 정확히 배달할 예정이다. 반송은 없다.

국회

플랫폼 자본주의와 플랫폼 노동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라이더유니온 준비 모임에 언론, 학계, 정부 기관의 문의가 계속되고 있다. 심지어 활동가들 중에서도 과외를 요청하는 분들이 있다. 『시대』 독자들도 복잡한 배달 산업에 대해 궁금해 하실 것 같아 여기서 한 번 설명해 보고자 한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전통적인 근로자인 가게에 고용된 라이더와 개인 사업자 신분인 배달 대행 기사를 구분하는 것이다. 전통적인 근로자인 가게 소속의 배달원들은 다들 아실 거라 믿고 넘어가겠다.

그럼 새로운 플랫폼 노동자로 떠오르는 배달 대행 기사, ‘라이더’들을 살펴보자. 이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주문 중개”와 “배달 중개”를 구분해서 이해해야 한다. 주문과 배달이라는 말에 주목하시라.

우리가 소비자로서 사용하는 배달의 민족이나 요기요는 “주문 중개 앱”이다. 소비자와 가게를 이어 주는 플랫폼이다. 배달의 민족이 1위이고, 요기요와 배달통이 2, 3위를 차지하는 독과점 시장이다. 배달의 민족의 최대 주주는 중국 베이징에 본사를 두고 헤지 펀드와 벤처 투자를 전문으로 하는 회사인 힐하우스BDMG홀딩스이고, 2위인 요기요와 3위인 배달통의 최대 주주는 독일의 회사인 딜리버리히어로다. 배달의 민족은 이름에서 느낄 수 있는 것과는 달리 해외 자본에 열려있는 회사다. 배달의 민족은 가게 광고비와 3% 정도의 결제 수수료로, 요기요는 12.5%의 배달 중개 수수료와 3%의 결제 수수료로 먹고산다. 즉, 이들은 실제의 배달을 통해서 수익을 얻는 회사가 아니다.

실제 음식을 배달하는 회사는 따로 있다. 이걸 “배달 대행사”라고 한다. 물론, 배달의 민족은 배민라이더스, 요기요는 요기요플러스를 운영하면서 배달 대행 사업도 하고 있지만 배달 대행업에서는 미비한 수준이다. 배달의 민족에 주문을 하더라도 실제 배달은 소속을 알 수 없는 검은 옷을 입고 온 라이더나 ‘부릉’이라는 배달 대행 회사에서 오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 한 가지 더 헷갈리는 게 있다. 배달 대행업을 하려면 음식 가게에 들어온 주문을 라이더의 핸드폰에 띄워 라이더들이 배달할 수 있게 만드는 어플리케이션이 필요한데, 이게 배달 중개 앱이다. 이 분야의 대표적인 회사가 부릉이다. 이걸 솔루션 업체 또는 프로그램 업체라고도 하는데, 실제 동네에서 사무실을 차리고 기사들에게 오토바이를 리스 형태로 제공하고 관리하는 배달 대행사들이 이 프로그램사와 일종의 계약을 맺는다. 배달 대행사 사장님과 기사는 동네를 기반으로 하는 오프라인의 존재들이고, 배달 중개 앱 회사는 이 오프라인의 기사와 동네의 사장님들을 데이터로 연결시켜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동네 가게를 뚫는 것과 기사를 모집하는 것은 동네 사람인 배달 대행사 사장님이 더 잘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정보가 배달 중개 앱 회사로 넘어가고 정보가 집중되면, 배달 중개 앱 회사에서 직접 음식 가게와 라이더들을 모집해 버릴 수도 있다. 그래서 배달 중개 앱 회사와 오프라인 회사는 협력과 갈등의 관계다.

이 복잡한 이야기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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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 정상회담과 북한의 미래 비전: 하노이 북미 정상 회담을 중심으로

차문석 통일교육원 교수

2018년 6월 12일과 2019년 2월 28일, 두 차례 북미 정상회담이 개최되었다. 북미 역사상 처음으로 개최된 1차 싱가포르 정상회담은 성공하지 못하였고, 2차 베트남 하노이 정상회담은 결렬되었다. 서로에게 추구하는 바와 자신이 세워 놓은 미래 비전이 극도로 상이한 두 국가는 두 차례 만난 뒤에 다시 뿌연 안개 속으로 진입해 버렸다.

안개 속으로 진입하기 직전의 하노이 회담은 여러 모로 스펙터클한 이벤트가 되기에 충분한 요소를 지니고 있었다. 협상의 진행과 결렬 과정은 이 두 상이한 세계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그 단면을 비추어 주었을 뿐만 아니라 미래에 있을 양국 간 관계라는 것이 어떤 방향으로 진행될지를 주시하게 만들었다. 특히 실현 가능성을 떠나 북한이 추구하는 미래 비전을 이해하는 것이 이번 북미 정상회담을 설명하는데 중요하다는 사실도 일깨워 주었다. 북한에게 북미 정상회담은 자신의 미래 비전의 실현에 불가결하고, 그 비전의 완성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다.

1. 2차 북미 정상회담의 출발 지점과 결렬 지점

2차 북미 정상회담을 위한 논의는 2018년 10월에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가장 무난하다. 2018년 10월 7일,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의 4차 방북이 있었고 이때부터 2차 북미 정상회담을 위한 논의가 개시되었다.* 당시 협상의 출발점은 북한의 영변 핵시설 폐기와 종전 선언을 교환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가장 기본이었고, 정확하게 말하면 ‘출발 지점’이었다. 이후의 전개를 보자면, 미국은 영변 이상(이른바 ‘플러스 알파’)을 요구하는 방향으로, 북한은 대북 제재 완화에 초점을 맞추어, 양자 간의 협상이 진행되어 왔다. 미국은 북한이 영변 이외의 핵시설과 미 본토를 위협할 수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을 협상 테이블에 올려놓기를 바라고 있었다. 만약 북한이 그렇게 한다면 미국은 제재 일부 완화와 연락사무소 개설로 보답할 계획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출발 지점에서 무언가 변화가 발생한 것은 2019년 2월의 비건의 방북 때였다. 2019년 2월 6일, 스티븐 비건 미국 대북정책특별대표가 평양으로 들어갔다.** 이때 비건이 북한 측과 실무 협의에서 합의한 내용은 기본적으로 “북한이 핵심적인 핵시설에서 핵물질 생산을 중단하면 미국은 제재 일부를 완화한다(US would lift some sanctions on North Korea in exchange for a commitment from Kim to stop nuclear-fuel production at a key nuclear facility)”라는 것이었다.*** 또한 연락사무소 교환, 평화 선언 체결, 미군 유해 송환 등도 포함되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협상의 출발 지점에서 보면, 이것은 실무 협의를 진행한 비건의 명백한 실패이자 북한의 대성공일 것이다. 이는 당연히 미국의 트럼프가 받아들일 수 없는 합의였다. 따라서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이전에 결렬의 씨앗이 이미 존재했고 이 씨앗은 2월 28일 정상회담에서 발아해버렸다.

 

* 2018년 7월 6일 방북한 폼페이오는 김정은을 만나지 못했다. 7월 6일은 미국이 6월 15일에 기획을 완료한 중국에 대한 관세전쟁을 실행하는 날이었다. 따라서 4차 방북을 2차 북미 정상회담을 위한 본격적 논의의 시작으로 보는 것이다.

** 애초에 판문점에서 실무 대화가 이루어질 것으로 알았으나, 북측이 비건을 평양으로 초대하였다.

*** VOX.com, 2019년 2월 26일.(http://www.ifs.or.kr/bbs/board.php?bo_table=news_board&wr_id=2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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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진실, 분개의 정치

 

세월호 5주년을 지나면서 거리에 다음과 같은 문구가 많아졌다. “기억 너머 진실로.” 세월호 사건 속에서 함께 아파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나라의 의미에 대해 회의하고 고민했던 모든 사람들에게 이 문구가 주는 의미는 작지 않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 또 그 속에서 살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출발점으로 “진실”이 필요하기때문이다. 그리고 진실이 드러날 때 “기억”은 격정을 멈추고 온전한 자리를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기억이 무뎌지는 게 아니라 더 날카로워지고 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리라. 하나는 세월호에 대해 끊이지 않고 나오는 폄훼와 왜곡이다. 지면에 옮기기조차 저어되는 모욕은 사건 자체를 넘어 인간성 자체에 대한 회의를 낳을 뿐이다. 다른 하나는 세월호의 진실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사건의 총체적 진실은 말할 것도 없고 이러저러한 사실조차 밝혀진 것이 많지 않다.

하지만 진실에 대한 기대와 인간의 존엄에 대한 바람이 우리가 “기억 너머”로 나아갈 때 다가올 것인가?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어떤 기억을 가지는가에 따라 진실도 다르게 다가올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 기억은 하나의 틀이며, 가변적인 쟁점이고, 만들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기억과 진실은 아마 왕복운동을 하면서 각각을 특유한 방식으로 구성할 것이다.

 

기억과 진실, 과거와 현재의 가변성은 5월 광주민중항쟁을 둘러싼 쟁투 혹은 그 역사적 사건의 이용 방식에서도 드러난다. 꽤 오랫동안 광주는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하고자 한 “신군부”에 맞선 민주화 투쟁과 폭도들에 의한 무질서 사이에 형성된 전선에 놓여 있었다. 이러한 거대 서사 속에서 비무장 시민을 향한 무차별 총격이라든가 북한군과 간첩의 개입 등은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하나의 등장인물이었을 뿐이다. 그리고 1987년 이후 민주주의가 수립되면서 광주는 이 나라를 만든 가장 최근의 민중 항쟁으로, 민주화를 향한 거대한 발걸음의 하나로 자리 잡았다.

물론 그 이후로도 항쟁 이후의 광주의 삶이 순탄한 것은 아니었다. 이런저런 핑계로 그 역사적 의미를 온전히 평가하려 하지 않거나, 이른바 흠집을 내기 위한 시도는 끊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공식적으로, 형식적으로 광주항쟁을 부정할 수는 없었는데, 아마 우리는 여기서 민주주의 담론이 가지는 힘을 느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런 광주의 운명을 감안할 때 최근에 도드라지게 보이는 광주에 대한 폄훼, 모욕, 왜곡은 의아해 보일 수도 있다. 당연히 첫 반응은 이럴 수 있다. “광주에 대한 평가는 이제 끝난 것 아닌가?” “도대체 왜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지?” 하지만 반복될 뿐만 아니라 도무지 바뀔 것 같지 않은 사태를 보면서 우리는 광주에 대한 폄훼, 모욕, 왜곡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다.

오늘날 가짜 뉴스 혹은 사실 왜곡을 통한 대중 동원은 비단 한국만의 일은 아니다. 이를 “포퓰리즘” 현상으로 설명할 수 있을 텐데, 이때 포퓰리즘은 사회를 두 개의 진영으로 나누는 정치 전선을 구축하는 담론적 전략이다. 이 전략에는 다양한 소재와 정체성이 동원될 수 있고, 우리의 경우 분단과 반공주의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반공이 시대착오적이긴 하지만 한국 사회의 배치를 감안할 때 포퓰리즘적 동원 전략의 일순위인 것은 분명하다. 이런 이유로 모호할 것이 하나도 없는 북한군 개입설이 사라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포퓰리즘과 관련해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동원을 위해 거짓 뉴스나 악의적 왜곡을 하는 발화자가 아니라 그런 이야기를 듣는 수신자의 처지다. 오늘날 포퓰리즘의 발흥을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에 따라 경제적 손실을 입고 정체성 정치 속에서 상대적으로 자신의 지위가 하락한 것으로 느끼는 사람들, 예컨대 백인 노동자계급의 “분개의 정치”로 설명하는 것은 이런 점에 주목한 것이다. 과거에 자신이 사회의 주역이었고 자기 목소리를 정치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가능했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더 이상 자신이 그런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느낄 때 분개의 정치의 조건이 형성된다.

따라서 이 조건을 바꾸는 것이 문제다. 정체성의 정치가 가져온 성취, 즉 어떤 집단에 속하는 것이 배제당하거나 차별받는 것이 아닌 일이 되게 만든 것을 보존하면서도, 정체성의 정치가 가져온 또 다른 분할선이 대립선이 되지 않게 만드는 것이 필요한 일이다. 이는 결국 사회의 모든 구성원의 공통성에 근거하고, 모두에게 동등하게 보이는 보편성을 설정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한때 자본주의, 자유주의, 민주주의가 특유하게 결합해서 적절하게 작동하는 것처럼 보인 시절이 있었다. 자본주의 황금기 혹은 복지국가 황금기라 불리던 때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양적 성장에 힘입어 주로 남성 시민에게 완전고용이라는 정책적 목표 아래 적절한 지위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노동자-시민이다. 하지만 당시에도 여성은 배제되어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고, 오늘날 더 이상 양적 성장이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파괴적인 기술 변화가 진행 중이라는 점을 놓치지 않는다면, 과거처럼 노동자-시민의 구성으로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활력을 발휘할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런 점에서 만약 기본소득이 모두의 것인 공유부에 대한 몫으로 정의되고 호소력을 발휘할 수 있다면 새로운 보편성을 구성하는 주요한 요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우리가 설정할 수 있는 새로운 정체성은 이해당사자-시민일 것이다. 이는 인민주권에 맞먹는 새로운 권리의 지평을 여는 일이다.

 

편집위원회를 대신하여
안효상

 

이 글은 『시대』 2019년 05월호 통권68호에 실린 ‘책 머리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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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즘과 해안선

임영근 정치경제연구소 ‘대안’ 상임연구원

초기 조건의 민감성을 뜻하는 과학 용어인 ‘나비효과’는 이제 일상용어로 흔히 쓰이게 되었다. 제임스 글릭은 『카오스』 20주년 기념판 서문에서 나비효과가 대중화된 계기로 1993년에 상영된 영화 《쥐라기공원》에 나온 대사를 꼽고 있다. “나비 한 마리가 북경에서 날갯짓을 한 번 하면, 뉴욕 센트럴파크에서 화창한 날씨가 아니라 비가 내릴 수 있다.” 그 뒤로 ‘나비효과’는 말뜻 그대로 나비효과를 일으키며 대중문화에서 일상생활에 이르기까지 퍼져 나가 지금은 아주 흔히 쓰이는 상투어가 되었다.

나비효과는 1960년대 에드워드 로렌츠가 최초로 과학적으로 규명했지만, 일상생활에서 겪는 나비효과에 대해서 이미 느끼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제임스 글릭도 마찬가지이지만, 나비효과를 설명하는 서양의 교양 과학책에 흔히 인용되는 서양의 민요가 있다.

못이 없어 편자를 잃었다네
편자가 없어 말을 잃었다네
말이 없어 기병을 잃었다네
기병이 없어 전투에 졌다네
전투에 져 왕국을 잃었다네!

못 하나가 없어서 왕국을 잃었다는 과장된 노래가 오래도록 살아 남았다는 것은 사람들의 마음에 공감을 안겨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처음에 시작된 사소한 잘못이 걷잡을 수 없는 재앙으로 바뀌는 일이 드문 일은 아니다. 나비효과가 일상에서 흔히 느낄 수 있는 효과라면, 동양에도 그런 효과를 알아차리고 표현한 작품이 틀림없이 있을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중국의 과학자 장톈룽은 『나비효과의 수수께끼』 서문에서 위의 민요에 이어 한시 한 편을 인용하고 있다. 북송 때의 시인, 소동파로 흔히 부르는 소식蘇軾(1037∼1101)의 시다.

용광사에서 베어 얻은 대나무 두 개
북쪽으로 가지고 돌아가 만인에게 보여 줄 텐데
대나무 속에 든 조계의 물 한 방울
크게 불어 강서의 십팔탄을 일으키네

斫得龍光竹兩竿(작득용광죽양간)
持歸嶺北萬人看(지귀영북만인간)
竹中一滴曹溪水(죽중일적조계수)
漲起江西十八灘(창기서강십팔탄)

중국 선종禪宗의 제6조로서 육조대사六祖大師로 불리는 혜능慧能(638∼713)이 보림사寶林寺에 자리를 잡으면서 남종선南宗禪이 시작되었는데, 보림사가 있던 곳이 광둥성廣東省 조계曹溪였다. 조계는 혜능의 별호로 쓰이기도 했다. 십팔탄은 중국어 발음으로는 스바탄인데, 장시성江西省에 있는 물살이 거세고 험난한 협곡을 이르는 말이다. 장수이강章水과 궁수이강貢水이 북류하여 간저우赣州에서 합류하는데, 여기서부터 완안萬安에 이르는 구간이다. 어찌나 물살이 사나운지 열여덟 번의 고비를 넘어야 건널 수 있다는 뜻에서 “스바탄十八灘”이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대나무 속에 든 조계의 물 한 방울이 스바탄의 거센 물길을 일으키듯이 혜능의 남종선이 중국 전역에 파란을 일으키며 퍼져 나가기를 염원하는 소동파의 바람이 물씬 풍겨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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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비정규직노동자 김용균, 빛으로 묻히다

글·사진 / 임성용

김용균이라는 빛

2월 9일, 싸늘한 겨울 해가 넘어가는 늦은 오후였다. 5시 반이 지나면서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 앞이 분주해졌다. 대형 버스들이 공원 입구로 들어오기 시작했고 노동조합 차량들도 점차 늘어났다. 버스 전면에는 ‘謹弔’ 알림이 붙어 있고 ‘청년 비정규직 故 김용균 노동자 민주사회장’이라는 문구가 보였다. 김용균이 죽은 지 62일이 지나고 나서 비로소 장례식이 열린 것이다.

버스에서 많은 사람이 내렸다. 민주노총 조합원들, 비정규직노동자들, 세월호 유가족들, 일반 시민들이었다. 이들은 이날 이른 새벽부터 충남 태안과 서울대 병원에서 발인제를 하고 노제를 지내고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영결식을 마쳤다. 그리고 마지막 안장을 위해 모란공원으로 함께 온 사람들이었다.

2019년 2월 9일, 죽은 지 62일 만에 ‘청년 비정규직 고 김용균 노동자 민주사회장이’ 열렸다.

수십 개의 만장이 줄을 이었다. 김용균의 얼굴이 그려진 커다란 현수막이 앞장서고, 영정을 고등학생쯤으로 보이는 앳된 친구가 들었다. 김용균의 큰이모의 아들이라고 했다. 영정 뒤에는 붉은 바탕에 흰색 글씨로 “김용균이라는 빛”이라고 쓴 대형 명정이 뒤따랐다.

큰 ‘빚’을 진 사람들에게 김용균은 하나의 ‘빛’으로 돌아왔다. 김용균의 죽음 이후에서 장례식까지, 한 사람의 청년 노동자가 죽어 비정규직 투쟁의 빛으로 되살아났다. 일명 “김용균법”이라는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이 28년 만에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정부와 민주당에서도 당정대책회의를 통해 공공과 민간 기업들의 경영 방식 변화가 필요한 “위험의 외주화 개선 방안”을 논의했다. 하지만 일부 위험한 업종에서 도급을 제한하고 안전 조치 위반 사업장에 대한 처벌을 강화한다고 해서 제2의 김용균을 막을 수 있을까? 해결해야 할 근본적인 과제가 남아 있다. 그러므로 김용균은 빚이면서 빛이고, 빛이면서 빚이 되었다.

김용균은 누구인가?

충남 태안화력발전소 산하 한국서부발전 하청 업체인 한국발전기술에서 일하다 숨진 김용균은 군대를 갓 제대하고 사회에 첫발을 디딘 스물네 살의 청년이었다.

1994년 12월 6일 경상북도 구미 출생
2018년 9월 17일 한국발전기술 입사, 서부발전 태안화력본부 트랜스퍼타워 배치.
2018년 12월 11일 오전 3시 23분 컨베이어 벨트 구간에서 발견.

참으로 짧은 삶이었다. 한 인간의 생이 기계에 휘말려 비참한 죽음으로 끝났다. 한치 앞도 분간하기 힘든 어둠과 분진 속에서 석탄가루를 뒤집어쓴 그의 몸은 일순간에 갈기갈기 찢겨졌다. 입사 3개월 만에 머리와 몸통이 분리된 그의 몸은 비정규직노동자들의 참담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그의 몸이 곧 비정규직이라는 이름표를 단 노동자들의 몸을 대변했다. 그의 몸은 단순한 비극이 아니었다. 슬픔과 추모만으로 대치할 수 없는 분노였다. 그래서 그의 몸은 냉동고에 두 달이 넘게 얼어 있었으나 그의 심장은 식지 않았다.

2월 15일. 광화문 세월호광장에 있는 故 김용균 시민분향소에서는 김용균 사망사건 규탄 시민단체(한국작가회의) 기자회견이 열렸다. 작가들은 김용균의 죽음을 이렇게 규정했다.

김용균은 왜 죽었습니까?
일하다 잘못해서 죽은 겁니까? 작업 중에 실수로 죽은 겁니까?
고장 난 손전등이 하청 노동자 김용균이 왜 죽어야만 했는지를 증명합니다.
핸드폰 후레쉬를 비추면서 혼자 일하다가 컨베이어 벨트에 말려들었습니다.
그곳은 이미 열 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목숨을 잃은 죽음의 작업장이었습니다.
(중략)
김용균의 죽음은 공기업 민영화, 죽음의 외주화가 부른 타살이었습니다.
세계적인 석학 노암 촘스키는 말했습니다.
“부패한 정부는 공기업을 민영화시킨다.”

– 한국작가회의 성명서, 「비정규직 철폐하고 죽음의 외주화를 당장 멈춰라」

 

임성용
화물 운수 노동자, 시인. 시집으로 『하늘공장』 등이 있고, 산문집으로 『뜨거운 휴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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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리의 이론과 현실

유승경 정치경제연구소‘대안’

금리는 돈을 일정 기간 빌릴 때 그 대가로서 이자를 얼마나 내야하는가를 나타낸다. 금리는 이자율이라고도 하는데, 1년 동안 내는 이자와 원금 간의 비율이다. 금리가 연 10%이면, 100만원을 빌렸을 때 이자는 1년에 10만원이다.

금리는 개개인의 일상생활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경제 상황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집이나 자동차를 마련하기 위해서 대출할 경우 금리는 매우 민감한 문제이며, 중앙은행이 결정하는 기준금리의 변화는 기업의 투자, 주가, 환율 등 경제의 주요 지표에 지대한 파급효과를 낳는다. 그런데 은행의 예금 금리(수신 금리)와 대출 금리(여신 금리), 중앙은행이 정책적으로 결정하는 기준금리 이외에도 은행 간 콜금리 등 수많은 금리가 있기 때문에 각종 금리의 성격, 결정 과정, 파급효과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이 글에서는 금리가 일상적인 생활이나 전체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금리의 기본 이론과 현실 경제의 사례를 통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글의 순서를 소개하면, 첫 번째로 금리에 대한 경제 이론을 설명한다. 금리 이론의 차이는 경제학파를 고전학파 전통과 케인스 전통으로 가르는 매우 중요한 지점이다. 그래서 금리 이론을 이해하면 현실의 경제 현상뿐만 아니라 경제사상의 중요한 흐름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 두 번째로 중앙은행의 기준금리를 비롯한 대표적인 시장금리의 내용과 결정 과정을 살핀다. 이 부분은 경제 뉴스나 금융 정보를 이해하는 데 매우 유용한 개념을 제공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금리와 관련하여 알아 둘 필요가 있는 몇 가지 추가적인 내용을 담았다.

1. 대부자금시장 이론

대부분의 경제학 교과서는 돈을 빌려주고 빌리는 가상의 대부자금시장market for loanable funds을 상정하고, 그 시장의 수요와 공급에 의해서 금리가 결정된다고 설명하는 ‘대부자금시장 이론’을 제시한다. 대표적인 예가 하버드 대학의 그레고리 맨큐 교수가 쓴 『맨큐의 경제학』이다.

대부자금시장 이론은 매우 간명하다. 한 경제 내에서 빌려줄 수 있는 돈은 적은데 필요로 하는 돈이 많다면 당연히 금리는 높을 것이고, 그 반대의 경우에는 금리가 낮을 것이다. 또한 금리가 높아지면 빌려주려는 돈은 늘어날 것이며 빌리려는 돈은 줄어들 것이다. 금리가 낮아지면 반대의 일이 일어난다.

경제학에서 소득 중 소비하지 않고 남은 돈을 모두 저축이라고 한다. 대부자금시장 이론은 모든 사람이 자신의 저축을 빌려주고자 하고 자금이 필요한 사람은 대부자금시장을 통해서 투자 자금을 마련한다고 가정한다. 대부자금시장 이론은 이 가상의 시장에서 작동하는 수요와 공급의 원리가 현실의 금리를 가장 잘 설명한다고 본다. 대부자금시장에서 공급은 저축이며 수요는 투자다. 이런 전제에서는 수요(투자)와 공급(저축)이 일치하는 지점에서 금리가 결정된다. 공급이 수요보다 많으면 금리가 내리고 그 반대의 경우에는 금리가 오르며, 이 과정을 통해서 수요와 공급이 일치하게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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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4월, 한국에서 처음으로 기본소득이 도입되다

김태호 발행인

우여곡절

2018년 2월 28일, 국회에서 「아동수당법」이 통과되었다. 2018년 9월부터 시행하기로 된 이 법의 주요 내용은 6세 미만의 아동에게 매월 10만원의 아동수당을 지급하되 가구의 경제적 수준이 2인 이상 전체 가구의 100분의 90 수준 이하이어야 수급 자격이 있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약간의 예외는 있지만 대체로 볼 때 10% 안에 드는 부자를 제외한 가구에게 아동수당을 지급한다는 것이다.

이 법이 통과되던 때 대통령은 후보 시절에 2018년 7월부터 6세 미만 아동이 있는 모든 가구에 월 10만 원을 지급한다고 공약한 바 있었다.

아동수당에는 찬성하지만 선별하여 지급하겠다는 발상에는 반대하는 목소리는 법안을 협의하던 시절부터 있었다. 소득을 기준으로 선별 지급될 경우 사회 통합을 저해할 수 있다(참여연대)는 비판도 있었고, 그렇게 되면 보편적 사회수당으로서의 아동수당의 의미가 훼손될 것이며 선별하는 행정이 만만치 않을 것(‘내가만드는복지국가’)이라고도 했다.

많은 사람이 학교 무상 급식이 도입될 때의 일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급식을 모든 학생에게 무상으로 할 것이냐 아니면 경제적으로 넉넉한 학생에게는 유상으로 할 것이냐를 놓고 논란이 있었다. 자신의 처지가 어렵다는 것을 입증하는 절차를 밟도록 하면서 모멸감을 주면 안 된다는 논리와 갑부의 자식들에게까지 왜 거저 주느냐는 논리가 맞붙었다. 전면적 무상 급식에 반대하던 당시 오세훈 서울시장은 결국 이 문제로 임기를 마치지 못하고 사퇴하게 되었다. 지방자치단체마다 조금씩 범위가 다르기는 하지만, 전면적 무상 급식은 지금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되었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아동수당 제도가 처음 시행되는 2018년 9월을 기준으로 대상이 되는 아동이 243만 명이지만 2018년 6월부터 8월 29일까지의 신청자는 222만 명이었다. 8.4%의 대상자가 신청조차 하지 않은 것은 몰랐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수급권자인지를 확인하는 것이 번거로웠기 때문일 수도 있고, 소득과 재산 등이 드러나는 것을 꺼렸기 때문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문제는 뜻밖의 방식으로 해결됐다. 2019년 1월 15일, 국회에서 2018년의 「아동수당법」이 개정됐다. “경제적 수준”이라고 명시되어 있던 재산이나 소득에 따른 자격도 없어졌다. 게다가 연령 자격이 “6세 미만”에서 “7세 미만”으로 확대되었고, 액수는 그대로 “매월 10만원”이었다. 이 법은 얼마 후인 4월 1일부터 시행될 예정이다. 100% 지급에 반대했던 정당의 대표는 “갑자기 안 변하고 언제 변하냐”라는 말로 1년 전과의 태도 변화를 설명했다.

대한민국에서 처음으로 기본소득이 도입된 사건이었다.

부분 기본소득

“자격 심사 없이 모든 사람에게, 개인 단위로, 노동 요구 없이 무조건 전달되는 정기적인 현금 지급.” 이것이 현재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BIEN가 정의하는 기본소득이다. 이 정의에는 수급권자가 가구 단위가 아니라 개인 단위라는 ‘개별성’, 자격 심사 없이 모두에게 지급된다는 ‘보편성’, 수급의 대가로 노동이나 구직 활동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무조건성’, 한 번만 지급하는 것이 아니라는 ‘정기성’, 마지막으로‘ 현금 지급’ 등의 원칙이 담겨 있다.

2019년 4월부터 시행될 아동수당에서는 “수급권자”가 “7세 미만”이므로 현실적으로는 그 “보호자”에게 수당이 지급될 것이지만, 이 아동수당은 위의 원칙과 정의에 비추어 볼 때 기본소득이라 할 수 있다. 드디어 한국에서 기본소득이 시행되는 것이다.

기본소득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물론 “모두에게” 지급되는 기본소득을 원한다. 하지만 당장 그럴 수 없다고 한다면 가능한 수준에서 특정한 집단부터 기본소득을 지급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고, 위의 다섯 가지 원칙이 지켜진 그러한 기본소득은 “부분 기본소득”이라 부른다. 따라서 2019년 4월 이후의 한국의 아동수당은 대한민국 최초의 부분 기본소득인 것이다.

어떤 집단을 부분 기본소득의 수급권자로 정할 것이냐, 말하자면 어떤 집단부터 부분 기본소득을 지급할 것이냐를 결정할 때의 기준은 위에서 말한 기본소득의 정의와 원칙들에 위배되면 안 될 것이다. 그 기준은 사회적인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생물학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는 연령과 성별이 있다. 그런데 성별에 따라 기본소득 수급권(또는 ‘금액’)에 차이가 생기는 것은 상식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기에, 남는 것은 연령뿐이다. 모든 사람에게 기본소득을 지급하는 모델을 수립할 때에도, 연령에 따라 금액의 차이를 두는 경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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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의 선택이다

앙드레 지드가 자신의 유일한 ‘소설’이라고 한 『위폐범들』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제도와 인습에 대한 반항뿐만 아니라 거짓된 세계 속에서 “진정한 삶과 의미”를 찾을 가능성 혹은 이를 위한 분투를 경험하는 일이 될 것이다.

과거에 반항해야 할 혹은 전복해야 할 제도와 인습은 좌파에게 꽤나 명료해 보였다. 체제로서의 자본주의라든가 “자본주의 최고의 단계로서의 제국주의” 혹은 “독점자본의 정치적 지배의 테러적인 형태”인 파시즘이거나 이것도 아니면 “부르주아지 전체의 공동 업무를 관장하는 집행위원회”로서의 국가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1989∼91년 이후 이런 현대의 신화는 종말을 고했다. 물론 그 신화를 구성했던 신화소神話素는 죽지 않고 살아 있는데, 이는 “맑스주의를 낳았던 상황을 넘어서지 않는 한 맑스주의는 우리 시대의 철학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라고 했던 사르트르의 말과 비슷한 맥락에서 그러할 뿐이다.

계속해서 좌파라는 말을 사용하자면, 좌파에게 더욱 곤혹스러운 것은 역사의 담지자 혹은 혁명의 주체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혁명의 주체라고 생각했던 “노동자계급”이 더 이상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여전히 노동자가 의미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사회적으로 그만큼의 중요성만 있는 사회학적 범주일 뿐이다. 그런데 그런 의미의 노동자마저 사라져갈 운명의 문턱에 서 있는 지금, 자칫하면 신화는 그 비극성마저 잃어버리고 희극이 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진정한 삶과 의미를 찾는 일이 세계와 분리될 수 없는 일이라 할 때 전복의 대상을 상실한 것은 삶과 의미를 구성할 틀을 상실했다는 것과 같은 일이 된다는 것이다. 상황이 이러한 데도 계속해서 하던 일을 하는 것은 제도와 인습을 전복하는 일이 아니라 인습의 포로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인습의 포로가 된 것은 한편으로 생존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과거의 신화와 정신적 사랑을 계속하기 때문이다. 육체적 패배 속에서도 지속되는 정신적 사랑.

육체적 패배와 정신적 사랑의 위태로운 동거를 끝내기 위해서는 사건의 경험 속에서 삶과 의미를 재발견하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물론 사건은 저절로 경험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건을 경험하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는 사건을 구성하고 사건 속으로 돌진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어떤 정향이 필요하다. 이 정향의 설정은 결단의 다른 말이기도 할 텐데, 이 결단이 불장난이나 가망 없는 도박으로 끝나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세계를 제대로 바라볼 용기를 가져야 할 것이다.

 

앙드레 지드는 열세 살의 어린 나이에, 정신적 고통을 겪고 있던 외사촌누나를 위해 평생을 바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이는 흔히 말하는 신비주의적 사랑이었고, 이는 결혼한 이후에도 신비주의적 사랑의 행태, 즉 육체적 관계나 쾌락이 없는 정신적 사랑으로 지속되었다. 이런 정신적 사랑은 북아프리카 여행을 통해 경험한 대지와 동성애의 발견이라는 대립적 상관물과 병치된다. 그리고 이러한 병치는 그의 정신적 위기의 지속적인 근거가 된다. 하지만 청년 마르크 알레그레와의 사랑, 이를 알게 된 아내 마들렌이 지드가 마들렌에게 평생 보냈던 편지를 불태워 버린 사건 등을 겪으면서 그는 1926년에 발표한 자서전을 통해 동성애 경험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아내가 편지를 불태운 사건은 앙드레 지드에게 해방이자 부채 청산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청산해야 할 부채는 무엇이고, 맞이할 해방은 무엇일까?

사르트르를 다시 떠올리면 우리의 과거를 낳았던 상황을 넘어서지 않는다면 우리는 여전히 과거의 철학으로 남아 있게 될 것이다. 물론 그 몫은 여전히 남아 있겠지만 그것은 과거의 상황을 연장시키는 것, 새로운 상황을 지연시키는 일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사르트르의 말처럼 “우리는 우리의 선택”이라고 한다면 어떤 선택을 하는가가 삶과 의미를 찾는 문턱을 넘는 일이 될 것이다. 비록 지옥의 문 앞에 서 있다 하더라도 말이다.

편집위원회를 대신하여
안효상

이 글은 『시대』 2019년 04월호 통권67호에 실린 ‘책 머리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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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 왕자와 천장의 눈

임영근 정치경제연구소 ‘대안’ 상임연구원

종교적 신념을 가진 사람들은 종교에는 도덕성을 떠받치는 강력한 힘이 작용한다고 믿는 듯하다. 이런 생각을 다음과 같은 시나리오에서 엿볼 수 있다. 커다란 방에 이 세상에서 딱 하나밖에 없는 예술품이 설치되어 있다고 상상해 보자.

방 중앙의 작은 테이블 위에 아름답고 멋지고 난해한 예술 작품이 놓여 있다. 다채로운 색깔의 온갖 손잡이와 황금빛 지렛대, 반짝이는 크리스털, 은빛의 공, 귀여운 종, 스파이크가 박힌 바퀴, 붉은 바큇살, 부서지기 쉬운 나뭇가지, 거미집처럼 얽힌 철사 등이 상상 속에서나 나올 것 같은 사이키델릭한 형태로 배열되어있어서 정말로 화려해 보인다. 그런데 이 작품은 손상되기 쉬운데다 유일한 것이기도 하다. 이 작품을 만든 작가는 이미 고인이 되었다. (필 주커먼, 『종교 없는 삶』, 43~4쪽.)

이제 이 방에 아홉 살짜리 어린이를 들여보내야 한다. 부서지기 쉬운 이 작품에 손 대지 않고 잘 보고 나올 수 있도록 미리 당부하고자 한다면 어떻게 말해야 할까? 우선 처음 떠올릴 수 있는 방법은 처벌과 보상으로 아이의 마음을 다잡는 방법이다. “방에는 너 말고 아무도 없을 거야. 하지만 예술 작품을 건드리면 안 돼. 아주 섬세하고 부서지기 쉬운 데다 하나뿐인 작품이거든. 또한 천장에 작은 구멍이 있어서, 이 구멍으로 교장 선생님이 널 살펴볼 거야. 선생님의 눈이 내내 널 지켜볼 거야. 만약에 네가 작품에 손을 대면, 선생님이 그걸 보고 단단히 화가 날거야. 그래서 네가 방에서 나오면 큰 벌을 내릴 거야. 하지만 네가 작품을 건드리지 않고 방에서 나오면 네게 멋진 상을 주실 거야.”

천장에 난 작은 구멍으로 지켜보는 “교장 선생님”에서 하느님을 쉽게 떠올릴 것이다. 하느님이 늘 지켜보는 가운데 벌을 피하고 상을 받기 위해 우리가 도덕적으로 행동한다는 주장을 뒷받침해주기 위해 지어낸 짧은 이야기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이런 시나리오를 별로 탐탁지 않게 여길 듯하다. 사실, 필 주커먼이 여러 무신론자를 인터뷰하면서 들은 이야기 가운데 63세의 소냐라는 여성이 들려준 것이라고 한다.

소냐는 똑같은 상황에서 방으로 들어갈 어린이에게 이렇게 당부할 수 있다고도 한다. 좀 더 세련되고 공감을 이끌어내는 방법이다. “방에는 너 말고 아무도 없을 거야. 하지만 예술 작품을 건드리면 안돼. 아주 섬세하고 부서지기 쉬운 데다 하나뿐이 작품이거든. 손을 대면 사고로 부서지거나 얼룩이 묻을 수도 있어. 작품이 달라질 수도 있지. 작품이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지면 다른 아이들은 본래의 작품을 못 보게 될 수도 있어. 물론 네가 작품에 손을 대서 작품이 사고로 망가져도, 우린 널 벌하지는 않겠지만 굉장히 슬플 거야. 그래서 네가 작품을 건드리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라.”

“천장의 구멍”을 통해 지켜보는 신 없이도 얼마든지 도덕적 행동이 가능하다는 무신론자의 태도를 보여 준다. 예술 작품의 가치에 대해 이해하기 때문에 처벌이나 보상 없이도 도덕적 행동이 가능하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시나리오다. 무신론자의 입장에서는 이런 해피엔딩을 기대하겠지만, 모든 인류 문화에 오랫동안 갖가지 종교가 번성하는 것을 보면 그저 작은 소망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개구리 왕자」를 읽으며 우리 마음에 일어나는 일

종교 현상이 다양한 만큼이나 종교의 기원을 설명하는 이론 또한 다양하다. 곤혹스러운 자연현상이나 사물의 기원을 설명하기 위해서, 아니면 악과 고통이 존재하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 종교가 필요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또는 결국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서 필연적으로 종교적 설명이 필요하다거나, 불안을 잠재우며 안락한 세계를 만들기 위해 종교가 생겨났다는 설명도 있다. 또 사회질서를 세우거나 도덕성을 뒷받침하기 위해 종교가 생겨났다는 견해도 있다. 그런게 아니라 그저 이성이 잠들어 있어서 그런 미신에 매혹되었을 뿐이라는 해석도 있다. 이런 설명들이 모두 일리가 있고 종교의 다양한 효과를 잘 설명해 주는 듯하다. 하지만 이런 설명은 근본적인 뭔가를 놓치고 있다는 느낌을 떨치기 어려운 것 또한 사실이다.

종교의 뿌리가 깊은 만큼, 종교적 심성은 우리 마음에도 깊이 뿌리 박혀 있는 어떤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종교를 쉽게 받아들이고 전파하게 하는 우리 마음의 작동 방식에서 종교의 기원을 찾는 학자가 있어 읽어 보았다. 이번 글은 파스칼 보이어가 쓴 『종교, 설명하기』에 나온 내용을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심리학자이자 인류학자인 파스칼 보이어는 카메룬에서 인류학 현지 조사를 하면서 팡족의 전통 종교를 연구한 결과를 이 책에 담았다.

우선, 널리 알려진 민담 가운데 「개구리 왕자」를 떠올려 보자. 이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여자아이들이 개구리와 공주가 뽀뽀하는 장면에서 “아이, 징그러워!” 하며 얼굴을 찌푸리던 기억이 난다. 그때 나는 ‘개구리가 왕자였다니, 참 신기한 이야기네.’ 하고 이야기에 끌렸던 것 같다. 그런데 나나 여자아이들이나 이 이야기를 따라가며 듣는데 아무 어려움이 없었다. 개구리가 공주가 연못에 빠뜨린 황금 공을 찾아줄 테니 결혼해 달라고 말하는 순간부터 더 이상 개구리는 개구리가 아니라 사람처럼 여겨지게 된다. 그 뒤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행동을 해도 전혀 거부감 없이 스토리를 따라가게 된다. 개구리가 어떻게 말을 하고 결혼해 달라고 하고 같이 음식을 먹게 해 달라고 하며 같은 침대에서 잘 수 있게 해 달라고 할 수 있는가 하는 생각조차 들지 않고 스토리를 따라가는 것이다.

더 이상 개구리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의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 해도 개구리로서의 특성을 잃어버리는 것은 아니다. 폴짝폴짝 뛴다든지 피부가 끈적끈적 하다든지 하는 특성을 우리는 잊어버리지 않는다. 그러니 개구리가 뽀뽀하는 장면에서 “아이, 징그러워!” 하는 반응을 보인 것도 당연한 일이다. 여담이지만, 다시 읽어본 그림 형제 판본에서는 키스하는 장면이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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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가와 휴식

박기순 충북대 철학과 교수

1. 필요한 일과 필요하지 않은 일

플라톤이 남긴 저작들은 대부분 마치 희곡처럼 대화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그것들은 “대화편”이라 불리기도 한다. 그렇다면 그는 왜 그렇게 글을 썼을까? 답은 아주 간단하다. 그에게 대화는 철학하는 방식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플라톤의 철학적 방법으로 알려진 ‘변증술dialectics’이 ‘대화하다dialegesthai’ 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것이라는 사실에서도 잘 나타난다. 변증술은 말logos을 할 줄 아는 두 사람이 서로 주장하고 반박하고, 그리고 의견을 수정해 가면서 중요한 질문, 예를 들면 정의란 무엇인지 혹은 사랑은 무엇인지 등의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방법을 일컫는다. 플라톤의 각 대화편에는 고유한 대화 주제가 있고 그 주제를 논하는 등장인물들이 있다. 플라톤은 자신의 스승인 소크라테스를 항상 주인공으로, 그리고 그의 적대자들이었던 소피스트들이나 깨우침을 받아야 할 젊은이들을 대화 상대자로 등장시켰다. 대화편의 제목은 보통 대화 주제나 대화 상대자를 따라 지었다.

『파이드로스』는 이 대화편 가운데 하나다. 파이드로스라는 대화 상대자의 이름을 제목으로 하는 이 대화편은 사랑과 연설술을 논의 주제로 삼고 있다. 이렇게 하나의 대화편이 두 개의 주제를 가지고 있는 것은 다소 이례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이 글에서 논의하고자 하는 것은 정작 이 주제들과는 상관없는 것이다. 우리의 관심은 오히려 이 두 주제에 관한 대화들 사이에 마치 간막극처럼 끼워져 있는 매미 신화와 관련이 있다.

소크라테스는 어떤 의미에서는 사랑을 한다는 것이 곧 철학함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파이드로스에게 설명한 후, 어떻게 하는 것이 말을 잘하고 글을 잘 쓰는 것인지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한다.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대화의 도입부에서 파이드로스가 뤼시아스라는 사람으로부터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소크라테스를 만나 뤼시아스가 사랑에 대해 아주 아름다운 말을 했다고 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을 잘했다던 뤼시아스의 이야기는 결국 소크라테스에 의해 반박되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파이드로스에게 도대체 말을 잘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한번 검토해보자는 의미에서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제안에 파이드로스는 이렇게 답한다. “필요가 있느냐고 물으시는 거예요? 막말로 그런 즐거움을 위해서가 아니라면 누군들 뭐 하러 살겠어요?”(플라톤,『 파이드로스』, 258e, 김주일 옮김, 이제이북스, 103쪽.) 소크라테스는 필요한가를 물었고, 파이드로스는 긍정으로 답한다. 그런데 여기서 합의되고 있는 필요성, 즉 대화의 필요성은 어떤 종류의 필요성일까? 살기 위해서 우리가 먹고 마시고 잠자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할 때의 그 필요성일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무엇보다도 두 사람이 그 대화를 하지 않는다고 해도 죽는 일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생존을 위해서 꼭 해야만 하는 그런 일은 아닌 것이다. 이 대화의 필요성은 그러한 필요를 넘어서는 것이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사실은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다. 필요 이상의 것이고, 혹은 생존의 관점에서 보면 사치스러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왜 소크라테스와 파이드로스에게는 필요한 일인가? 심지어 파이드로스는 그것을 하지 않는다면 살 가치도 없다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삶에 필요한 것인가? 당연히 그것은 생존으로서의 삶에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다른 의미의 삶, 즉 생명의 단순한 보존으로서의 삶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삶,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인간에게만 허락되는 좀 더 고결한 삶에 필요한 일일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파이드로스가 말하고 있듯이 그러한 일은 우리에게 즐거움을 준다. 단순히 먹고 살기 위해서 하는 일은 우리에게 즐거움을 줄 수가 없다.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필요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어떤 일을 할 때, 우리는 어떤 필연성에 얽매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한에서 우리는 예속되어 있고 자유롭지 못하다. 또한 그러한 필연성에 얽매 있을 때, 우리는 타인에 대해 폭력을 행사하게 된다. 남의 것을 빼앗고 남의 나라를 침범하는 등의 일은 모두 생존의 필연성에 묶여 있을 때 사람들이 하는 것들이다.

반면 우리가 꼭 해야만 하는 일은 아니지만 좀 더 고귀하고 아름다운 삶을 위해서 하는 일은 우리가 자유롭게 선택해서 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러한 한에서 그것은 우리에게 즐거움을 준다. 생각을 하고, 그 생각을 타인과 나누면서 대화를 하는 일, 이것이 그러한 일에 속한다. 그래서 파이드로스는 삶은 오직 이것을 할 때만 의미와 가치가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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