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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 자동화 럭셔리 공산주의”의 전망과 쟁점

안효상 편집주간

2008년 대침체Great Recession가 1929년 대공황Great Depression과 비교할 만한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누구나 동의한다. 하지만 대침체 직후 두드러진 것이 있다면, 이른바 패러다임의 전환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지배계급의 무능력에서 기인한 것일 수도 있고, 대안 세력의 전망 부재 때문일 수도 있다. 어쨌든 결과는 “자본주의적 리얼리즘”이라고 하는 일종의 반유토피아주의가 지배하는 세상이다.

자본주의의 종말보다 세계의 종말을 상상하는 게 더 쉽다는 말로 요약할 수 있는 자본주의적 리얼리즘은 일종의 “헤게모니 없는 지배” 상태다. 헤게모니 없는 지배 상태 속에서 2011년부터 대중의 반란이 점거에서부터 새로운 정당의 출현까지 이어졌고, 이는 기성 질서의 붕괴 조짐으로까지 나아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때 기성 질서의 붕괴는 정치 질서의 변동을 넘어서는 더 큰 위기와 함께하고 있다. 이 위기가 아론 바스타니가 “완전 자동화 럭셔리 공산주의”를 말할 수 있는 출발점이다.*

 

바스타니는 인류가 다섯 가지 위기에 직면해 있다고 말하는데, 이는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것이긴 하다. 기후변화 및 지구온난화의 파멸적인 결과, 자원 고갈(특히 에너지, 광물, 깨끗한 물의 부족), 사회고령화, 점점 “필요 없는 사람들unnecessariat”을 구성해 가는 지구적 빈민의 증가, 기술적 실업을 가져올 것이라고 예상되는 새로운 기계 시대. 흥미로운 것은 이런 위기 속에서 바스타니는 묵시록적 미래가 아니라 매우 낙관적인 내일을 그려 내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완전 자동화 럭셔리 공산주의”다.

바스타니는 보통 20세기의 실패한 프로젝트를 가리키는 “공산주의”라는 용어를 굳이 쓰는 이유를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이때 그가 공산주의라는 말로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일이 없어지고 희소성이 풍요로 대체되며 노동과 여가가 서로 섞이게 되는 사회다.

이런 공산주의가 현실적으로 가능한 프로젝트가 된 이유를 바스타니는 자신이 “세 번째 단절the Third Disruption”이라고 부르는 기술 변화에서 찾는다. 첫 번째 기술적 단절은 이른바 농업혁명이며, 두 번째 기술 단절이란 산업혁명을 말한다.

그리고 자본주의사회에서 이런 변화가 가져올 결과를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에 들어 있는 「기계에 관한 단편」에 의지하여 그려 내고자 한다. 그에 따르면, 맑스의 사고 가운데 크게 주목받지 않고 있는 측면은 자본주의가 기계로 노동을 대체하는 경향에 대해 그가 어떻게 인식했느냐는 점이다. 그리고 이것이 모순으로 가득한 체제에서 이 체제를 잠재적 해방의 힘으로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본다.

 

* Aaron Bastani, Fully Automated Luxury Communism: A Manifesto,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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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레이드 러너》와 포스트휴먼,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강준상*

《알파고》가 처음 등장했을 때, 프로 기사들은 “인간이 두는 바둑 같다”라고 말하곤 했다. 그 이전의 바둑 프로그램들은 기계 같았는데 《알파고》는 생각하는 인간처럼 느껴졌다는 것이다. 《알파고》는 이세돌과의 세기의 대결에서 승리한 이후, 세계 1위 커제까지 가볍게 이겼고, 《알파고》끼리 둔 50국의 기보를 남기고 사라졌다. 기사들은 《알파고》의 바둑을 공부하며,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바둑을 두는 것 같다고 말하곤 한다.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인간들은 학습해 온 방식을 벗어나지 않지만 《알파고》는 인간들이 두지 않는 창의적인, 아니 창의적으로 보이는 수들을 둔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들은 《알파고》의 수를 보며 반성하고 새롭게 공부하고 있다.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구절에서 어떤 영화 한 편이 떠오를지 모른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1982년 영화 《블레이드 러너》.

영화 속에서 리플리컨트(복제인간)를 만드는 회사의 회장 타이렐은 신형 복제인간(넥서스 6호)의 모토가 “인간보다 더 인간답게”라고 말한다. 이 모토는 역설적인 의미에서 조금씩 관객의 마음을 움직인다. 영화의 핵심은 인간과 복제인간이 어떻게 다른지 구별하는 것에 있으나, 영화가 진행되며 과연 인간은 인간적인지, 복제인간이 더 인간적인 건 아닌지, 그렇다면 인간과 복제인간을 구별하는 것이 가능한지, 무엇보다 주인공 데커드(해리슨 포드)는 인간인지 복제인간인지 고민하게 된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의 배경은 2019년이었다. 올해가 2019년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아직 우리에게 《블레이드 러너》와 같은 세계가 도래하진 않았다. SF 영화 속 인간과 구별하기 어려운 사이보그, 안드로이드 등은 아직 문화적 아이콘들일 뿐 현실화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미 과학기술은 그에 가까이 다가간 것으로 보이며, 로봇과 인공지능은 많은 부분 현실화되고 있다.

이 글은 《블레이드 러너》와 재작년에 만들어진 후속작 《블레이드 러너 2049》(이하 《2049》) 두 편의 영화를 통해, 포스트휴먼 자체가 아니라 포스트휴먼 시대 인간적인 것은 무엇인지, 또는 인간이란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몇 가지 징후를 살펴보고자 한다.

 

《블레이드 러너》의 첫 번째 컷과 두 번째 컷

《블레이드 러너 2049》의 첫 번째 컷과 두 번째 컷

 

*강준상
다큐멘터리 《달려라 휠체어, 달려라 박정혁》,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등을 연출했으며, 공연연출작으로 《옹달샘》, 《꼴》, 《줄탁동시》, 《스퀘어 – 다시 지금 여기에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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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도에서 살아남기

임영근 정치경제연구소 ‘대안’ 상임연구원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책이 무엇인지 알고 싶을 때, “무인도에 갈 때 가져갈 세 권의 책은 무엇입니까?” 하는 다소 진부한 물음을 던지는 경우가 있다. 이 물음에 대해 “책이라고? 무인도에서? 뭐 하러?”(응우옌 후이 티엡) 이렇게 짐짓 딴죽을 걸 수도 있다. “이렇게 고약한 질문을 하는 사람은 스핑크스가 틀림없다.”(아멜리 노통브) 또는 “이 질문은 비인간적이다. 문학 유산은 대양의 방식으로만 작동하기 때문이다.” (파트리크 샤무아조) 이렇게 책 좋아하는 마음을 너무 솔직하게 드러내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성경』과 셰익스피어는 제외해 달라는 단서를 달아도 기어코 이 두 가지를 목록에 포함시키는 작가가 많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고 해도 묵직한 책, 두껍고 오랫동안 명성을 누려온 책들에 치우친 목록이 될 가능성이 클 것이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오디세이아』, 단테의 『신곡』,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천일야화』 ……. 전 세계의 유명한 작가들이 무인도에 가져갈 책에 대한 답변이 『무인도의 이상적 도서관』에 실려 있다.

그런데 장 자크 루소Jean Jacques Rousseau(1712~1778)에게 그런 질문을 던진다면 어떨까? 루소의 대답은 이미 나와 있는 셈이다.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책이 있다면 단 한 권이 있는데, 내 생각에 그것은 가장 좋은 자연 교육 개론을 제공해 줄 것이다. 그 책은 나의 에밀이 읽게 될 최초의 책이 될 것이다. 그 책만이 오랫동안 그의 책꽂이에 꽂혀 있을 것이며, 그곳에서 품격 있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 도대체 그런 훌륭한 책은 어떤 책일까?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일까, 플리니우스의 책일까, 뷔퐁의 책일까? 아니다. 그것은 『로빈슨 크루소』다. (장 자크 루소, 『에밀』, 329쪽)

『무인도의 이상적 도서관』에서도 『로빈슨 크루소』를 꼽은 작가들이 더러 있지만, “무인도에 가져갈 책”이라고 듣는 순간 대다수는 『로빈슨 크루소』를 우선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마치 “다람쥐”하면 “도토리”가 떠오르듯이. ‘무인도에서 홀로 사는 삶은 로빈슨 크루소의 삶이다. 무인도에 가져갈 책은 로빈슨 크루소가 되어 읽는 책이다.’ 작가 대부분의 의식 속에는 이런 생각이 은연중에 깔려 있을 것이다.

내가 어렸을 때 이런 질문을 받았다면 주저 없이 『로빈슨 크루소』를 첫째로 꼽았을 것이다. 아무도 없는 섬에서 혼자서 모든 일을 하나 하나 척척 해결해 나가는 로빈슨 크루소의 모습이 그렇게 멋져 보일 수가 없었다. 『로빈슨 크루소』를 읽고 있으면 어쩐지 나도 무인도에서 로빈슨 크루소처럼 살고 싶다는 마음이 일었고, 로빈슨 크루소처럼만 하면 못 살 것도 없겠다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루소가 열두 살의 에밀이 읽어야 할 유일한 책으로 『로빈슨 크루소』를 꼽은 이유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로빈슨 크루소』는 워낙 재미있어서 에밀에게는 좋은 “오락거리”가 될 것이다. 거기에다 “교육거리”의 역할을 하는 데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루소는 『로빈슨 크루소』를 읽는 에밀이 이렇게 되기를 소망한다. “나는 그가 그 책에 심취하여 끊임없이 저택과 염소와 식물에 대해 생각하며, 책에서가 아닌 사물을 바탕으로 하여 로빈슨 크루소와 같은 상황에 처할 경우 알아야 하는 모든 것을 자세하게 배웠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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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4월, 우리가 세월호를 기억하는 방식

양지혜 청년정치공동체 ‘너머’ 공동대표

세월호 4주기, 기억이라는 투쟁

2014년 4월 16일, 세월호가 침몰했다. 세월호 침몰은 불의의 사고가 아니라 검토된 비용이었다. 정부는 경제적 효용을 위해 운영 제한 규제를 완화했고, 기업은 비용을 줄이기 위해 노후한 선박을 부활시켰다. 이윤 앞에서 인간은 ‘감수할 수 있는 비용’이었다.

세월호 참사 이후 우리에게 펼쳐진 세계는 ‘깨어진 상식’의 세계였다. 우리는 책임지지 않는 국가를 보았다. 구조가 가능한 골든타임동안, 박근혜 씨는 침몰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박근혜 씨를 움직이게 한 것은 침몰하고 있는 세월호가 아니라 최측근인 최순실 씨의 연락이었다. 언론은 ‘전원 구출’ 오보를 낸 것으로도 모자라, 높은 조회 수의 특종을 위해 자극적이고 저열한 보도를 이어 갔다. 그 와중에 누군가는 불안과 참혹함을 거름 삼아 보험 영업을 했다. 진실을 밝히고자 하는 유가족의 투쟁은 정치권의 야합에 가로막혔다. 2014년 8월, 여야는 수사권과 기소권이 빠진 특별법을 밀실에서 야합으로 처리했다. 2015년, 간신히 결성된 세월호참사특별진상조사위원회는 당시 여당 새누리당의 방해로 무력화되었다. 유족들이 간절히 외쳐 왔던 세월호 인양은 3년이 넘도록 이뤄지지 못했다. 미수습자 가족들은 긴 시간을 차디찬 바다 앞에서 버텨야 했다.

2017년 4월, 홍준표를 제외한 대선 후보자들은 모두 안산으로 달려갔다. 후보들은 저마다 미수습자 수습, 진상 규명, 추모 공원 조성 등을 약속했다. 그간 특조위를 무력화하고 “세월호특별법보다 민생 문제가 우선”(2016년 4월 18일 국민의당 최고의원 회의)이라고 밝혀 온 정치세력들이 한 일이었다. 그렇게 세월호는 ‘기억’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다시 돌아온 4월, 우리는 한 치도 변하지 않은 세상을 마주한다. 1기 특별조사위원회를 방해한 황전원 위원이 ‘사회적 참사 특별조사위원회’에 임명되었다. 황전원 위원이 조사를 거부했던 ‘대통령의 사라진 7시간’이 밝혀지며 진상 규명은 간신히 시작되었을 뿐이다. 모든 후보가 약속했던 추모 공원 조성은 지역 야당의 반대로 난항을 겪고 있다. 안산 화랑유원지에 위치한 정부합동분향소는 4주기 영결식을 끝으로 철거된다.

세월호는 조금도 제대로 ‘기억’되지 못했다. 우리는 아직 이 참사가 무엇인지조차 밝혀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언제나 기억하는 일은 투쟁이었다. ‘순수한 추모’만을 허용하는 세력에 맞서, ‘이제는 일상으로 돌아가라’라는 요구에 맞서, ‘추모가 변질되었다’라고 선전하는 보수 언론에 맞서, 우리는 기억의 투쟁을 이어 왔다. 청년정치공동체 ‘너머’는 세월호 참사 4주기를 맞아, 기억의 투쟁을 이어 가기 위해 안산을 방문했다. 교육청 옆으로 이관된 기억교실을 찾았고, 영결식이 끝나고 나면 철거될 정부합동분향소를 들렀다.

여느 때와 다르게 기억교실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기억교실은 수학여행 전 날까지 피해자들이 머물었던 흔적, 피해자를 그리워하고 참사를 추모하는 이들의 메시지로 가득했다. 한 반에 두세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희생자가 되었다. 방명록에는 유가족들의 방문 편지가 남아 있었다. 문장을 다 마무리하지 못한 채 눈물로 얼룩진 편지가 있었다. 기억교실은 한 번 이전했던 역사가 있다. 참사 이후, 더 이상 교실을 존속할 수 없다는 학교 입장에 따라 현재 교육청 옆 건물로 이전했다. 지난 2016년 교실이 이전될 때, 세월호 유가족들은 희생자들의 유품을 옮기며 또다시 눈물을 흘렸다. 책상과 걸상을 옮길 상자를 설치하기 위한 차량에는 “이사”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고, 새 교실에는 유품을 놓을 공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참사 이후에도 유가족들은 기억을 보존하기 위해 끊임없이 싸워야 했다. 기억교실을 둘러보며, 내가 세월호 참사를 처음 만난 순간을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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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급투쟁을 다룬 영화 《기생충》?

강준상*

한국 사회에서 영화 《기생충》은 그저 한 편의 영화가 아니라 사회문화적 현상이 된 듯하다. 많은 평론가가 《기생충》을 “계급투쟁”에 대한 영화로 소개하고 있고, 연예계 뉴스가 아닌 정치·사회면의 기사와 토론 프로그램에서도 빈부 격차나 갑질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면서 《기생충》을 언급한다.

《기생충》이 봉준호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최고의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으나, 비평적 의미에서건 대중적 의미에서건 성공한 작품은 맞다. 칸에서 만장일치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고, 그에 대해 이견을 가진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영화 《기생충》이 한국 사회에서 소통되는 방식은 좀 불편하다. 《기생충》이 계급투쟁에 대한 영화라고 볼 수 있을까? 거기서, 그 불편함에서 출발하기로 한다.

이 글은 《기생충》에 대한 보편적인 의미에서의 영화비평을 목적으로 하진 않는다. 《기생충》이 동시대 한국 사회의 현실에서 계급 문제를 어떻게 반영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만 집중해 몇 가지 지점들을 짚어 보고, 영화의 의미를 조금 다른 길로 비틀어 보고자 한다.

산수경석! 상징적이네!

기택(송강호) 가족의 희비극이 시작되는 출발점은 기우(최우식)의 친구 민혁(박서준)의 방문이다. 민혁이 와서 처음 한 일은 자신의 할아버지가 선물로 준 산수경석을 전달한 것이다. 이 장면에서 이상한 컷이 하나 있다. 바로 산수경석의 시점 숏(산수경석의 시점에서 촬영한 장면)이다. 선물함이 열려 산수경석이 보이는 컷 바로 뒤에 그것을 바라보는 기우의 묘한 표정을 산수경석의 시점에서 극단적인 로우 앵글(낮은 곳에서 위를 향해 찍는 앵글)로 보여 준다.

함이 열리고 보이는 산수경석(왼쪽), 바로 다음 컷(오른쪽)은 산수경석 시점 숏으로 기우를 보여 준다

이것은 비상식적인 시점 숏이다. 사물의 시점 숏은 거의 사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시점 숏은 대부분 사람의 시점에서 보이는 장면, 간혹 동물의 시점에서 보이는 장면으로 사용되지 사물의 시점에서 보이는 장면으로 사용되지는 않는다. 그러고 나서 평범한 앵글로 돌아가, 뒤의 민혁이 기택 가족들에게 산수경석을 가져온 이유를 설명하고 있을 때, 기우가 돌을 의미심장하게 바라보며 “야, 이거 진짜 상징적인 거네”라고 말한다. 이후에도 그는 산수경석이 “상징적”이라는 말을 한 번 더 한다.

이 두 가지 사실을 중요하게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사물, 돌덩어리에 불과한 산수경석을 의인화라도 하듯 시점 숏을 사용했다는 점. 그리고 기우가 산수경석을 보며 처음으로 내뱉은 말이 “상징적”이라는 단어였다는 점. 이 두 가지가 이후 영화에서 어떤 의미를 파생시키는지는 글의 후반부에서 쓰기로 하고, 여기서는 “상징”에 대해 언급하기로 한다.

상징symbol은 눈이나 귀 등으로 직접 지각할 수 없는 무엇인가를 어떤 유사성에 의해서 구상화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상징으로 사회구성원들 사이에서 의사소통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승인된 약속’으로서의 사회적 성격을 보통 포함하고 있다. 평화의 상징으로 비둘기가 사용되는 것은 사회적인 약속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지, 비둘기에게 평화를 의미하는 어떤 과학적이거나 물질적인 속성이 있기 때문이 아니다. 사회는 본성으로서 그 관습, 그 제도 중에 자신을 상징적으로 표출한다고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는 말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산수경석은 영화 《기생충》으로 들어가는 입구이고 무엇인가 추상적인 것을 상징하는데, 그것은 단지 개인이 아니라 사회가 스스로를 상징적으로 표출하는 것이라고.

*강준상
다큐멘터리 《달려라 휠체어, 달려라 박정혁》,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등을 연출했으며, 공연연출작으로 《옹달샘》, 《꼴》, 《줄탁동시》, 《스퀘어 – 다시 지금 여기에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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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사회상속제(안)에 대한 비판적 평가*

이건민 기본소득신진연구자네트워크

1. 열며

“기본자산”(“기본재산”, “기본자본”, “사회적 지분 급여” 등으로도 불림)이란 보편성, 무조건성, 개별성, 현금 지급이라는 특성은 “기본소득”과 공유하면서도 기본소득과는 달리 주 또는 월 단위로 정기적으로 지급하는 대신 성인 초기에 일회성으로 목돈을 지급하는 정책을 말한다.** 기본자산은 18세기 말 토머스 페인이 제안한 이래로 제임스 토빈, 윌리엄 클라인, 로버트 헤이브먼, 브루스 애커만과 앤 앨스톳 등 여러 사람에 의해 다양한 형태로 제안된 바 있으며(판 파레이스, 판데르보흐트, 2018: 86), 그리 크지 않은 액수이긴 하지만 영국, 스페인 등에서 실제로 도입된 바 있다(위의 책 제2장 후주 4). 기본자산이 추구하는 핵심 정책 목표는 바로 기회의 평등 제고와 자산 재분배로서, 그 재원으로는 부유세, 상속세, 증여세가 제안되고 있다. 성인 초기에 들어서는 청년들 사이에 기회의 평등을 높이기 위해 사회가 그들에게 일정 자산을 물려주자는 ‘사회적 상속(social inheritance)’이라는 개념에 비추어 볼 때, 부유세와 상속세와 증여세가 기본자산의 재원으로 제시되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도 기본자산과 유사한 정책이 제출된 바 있다. 2017년 대선 때 정의당의 심상정 후보는 ‘청년사회상속제’라는 공약을 제안했다. 20세가 되는 청년 모두에게 1천만 원씩 자산을 지급한다는 정책 구상으로서, 상속세와 증여세 세입을 재원으로 고려한다고 밝힌 바 있다. 대선 후에 심상정 의원은 이 공약을 정교하게 다듬고 나서 국회에 「청년사회상속법안」을 대표로 발의했다(의안 번호: 12473, 발의 연월일: 2018. 3. 14, 발의자: 심상정 의원 등 12인). 법안의 내용을 보면, “국가가 20살(만 19살) 청년들에게 1천만 원의 기초자산을 지급하자”는 것으로, 그 취지는 “불평등 해소와 기회 균등이라는 상속·증여세의 본래 취지를 살려 그 세입 예산으로 국가가 청년들에게 사회 상속을 해 주자는 것”이다(엄지원, 2018. 3. 14). “2017년 기준으로 5조 4천억 원에 이르는 상속·증여세 재원이면 61만 명(2018년 기준)의 20살 청년에게 충분히 자산을 배당할 수 있다”라고 주장하였다(엄지원, 2018. 3. 14).

발의 법안이 통과되지 않으면서 청년사회상속제(안)은 한동안 잠잠한 듯했으나, 박원순 서울시장이 “청년기초자산제”(‘청년출발자본’ 정책)를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지면서 다시 주목받고 있다(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2019, 7. 17; 이제형, 2019. 7. 22). 논의가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어서, 서울시가 앞으로 청년기초자산제를 실시하게 될지 자체도, 그리고 만약 향후 도입한다고 하더라도 그 구체적인 형태가 정의당에서 제안했던 청년사회상속제(안)과 얼마나 유사할지도 현재로서는 불투명한 상황이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청년사회상속제(안)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검토할 이유는 충분할 것으로 생각한다.

첫째, 기본자산과 유사한 제도로서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제안되었다는 점에서 청년사회상속제(안)은 향후 서울시뿐만 아니라 다른 지자체, 혹은 중앙정부 차원의 정책 검토 단계에서 논의 테이블의 중심에 놓일 가능성이 크다. 둘째, 청년사회상속제(안)을 비판적으로 평가함으로써 이를 바탕으로 우리는 이 정책안에서 후퇴하는 형태가 아니라 전진하는 형태의 새로운 정책안을 적극적으로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새로운 정책(안)이 기존의 청년사회상속제(안)에서의 미세 조정 수준에 그치는 형태로 제안되든 아니면 그것을 대폭 수정한 형태로 제안되든, 청년사회상속제(안)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작업은 앞으로 제시될 특정 제안을 비판적으로 평가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이 글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2절에서는 청년사회상속제(안)의 주요 내용을 살펴보고 이를 비판적으로 평가한다. 3절에서는 청년사회상속제(안)에서 제안된 액수가 정기적으로 지급되는 기본소득으로 환산하면 어느 정도의 크기가 되는지를 계산하고, 이를 토대로 몇 가지 함의를 도출한다. 마지막으로 결론에서는 평가 내용을 요약하고 정책적인 시사점을 제시하면서 글을 맺는다.

* 본고의 일부 내용은 정치경제연구소 ‘대안’에서 제작한 팟캐스트 《이럿타》에서 소개된 바 있음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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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리포니아 AB5와 플랫폼 노동

장흥배 정치경제연구소 ‘대안’ 연구원

노동 중개 플랫폼의 비즈니스 모델을 근저에서 흔드는 법안이 지난 7월 10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상원 고용위원회를 통과했다. AB5법(Assembly Bill 5)는 대다수 주문형(on-demand) 플랫폼 노동자(platform workers)*의 법률상 지위를 현재의 “독립 계약자(independent contractors)”에서 “피고용인(employees)”으로 분류하는 효과를 낳을 것이다. 이 법안이 현재와 같은 내용으로 최종 발효된다면, 우버(Uber), 리프트(Lyft), 태스크래빗(TaskRabbit) 등의 주문형 노동 중개 플랫폼은 적어도 캘리포니아에서는 존폐 기로에 설 전망이다.

AB5는 기업이 노무를 제공받을 때 ‘ABC 테스트’를 통과해야만, 법률상 노무 제공자가 “피고용인”이 아니라 “독립 계약자”임을 인정한다. ABC 테스트는 2018년 4월 캘리포니아 대법원 판결**에 기초하고 있다. 이 판결은 미국 전역에 당일 배송 서비스를 제공하는 피고 회사 다이나멕스(Dynamex)가 회사의 직원으로 일해 오던 배달 기사들을 2004년 모두 독립 계약자로 전환하면서 직원들이 2005년 집단소송을 제기하는 것에서 시작됐다.

캘리포니아 대법원의 다이나멕스 판결

원고 패소 판결을 내린 1심 법원은 항소법원의 파기환송 결정에 따라 1심 판결을 뒤집고 원고들의 피고용인 지위를 인정하면서 2010년 캘리포니아 대법원의 마르티네스 판결***에서 나온 “고용”에 관한 세가지 정의에 의존했다. 마르티네스 판결에서 대법원은 고용을 (1) 시간, 임금 또는 노동조건에 대한 통제력을 행사하고, (2) 노동을 감내하도록 하거나 허용하며, (3) 계약을 맺어 보통법의 고용관계를 형성하는 것으로 정의했다. 이와 같은 포괄적 정의에 따를 경우 원고들의 피고용인 지위가 인정되는 것은 불가피했다. 이에 대해 원고 다이나멕스는 마르티네스 판결에서 나온 정의 (2)와 (3)은 누가 피고용인의 ‘공동’ 고용주(joint employer)인가를 정하는 데 적용될 뿐 원고들의 노동자성 인정 여부에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맞섰다. 피고는 그 대신 정의 (2)와 (3)은 보렐로 테스트****로 고용관계의 존재 여부를 판단하는 데 적용된다고 주장하였다(SheppardMullin, 2018년 5월 1일).

보렐로 테스트는 고용관계의 존부를 열두 가지 지표를 종합하여 제시한다. 그러한 지표로는 △ 노무 제공자가 수행하는 업무가 해당 회사의 비즈니스와 구별되는지, △ 수행 업무의 수단, 도구, 장소를 회사와 노무 제공자 중에서 누가 조달하는지, △ 제공되는 노무가 특별한 기술을 요하는지, △ 노무가 회사의 지시에 의해 수행되는지 또는 지시나 감독 없이 전문가에 의해 수행되는지, △보수의 지불 방식이 무엇인지, △노동 수행의 방식이나 수단의 측면에서 회사가 통제권을 갖는지 등이 있다(K. Van den Bergh, 2019).

보렐로 테스트는 이렇게 열두 가지 지표를 모두 고려하지만, 이러한 지표들을 통해 얻고자 하는 정보는 수행되는 노무에 대한 통제권을 누가 행사하느냐로 모아진다. 보렐로 테스트는 다이나멕스 판결 이전까지 고용관계의 존부를 다투는 많은 소송에서 인용돼 왔다. 확실히 마르티네스 판결에서 수립된 고용에 관한 정의는 매우 포괄적이기 때문에, 정의 (2)와 정의 (3)을 고용관계 분석에 적용할 경우 원고의 피고용인 지위 주장이 수용될 가능성이 그만큼 커진다. 추정컨대, 피고 다이나멕스는 원고와의 분쟁 요점을 수행되는 노무에 대한 통제권이 누구에게 있는가로 좁히기를 원했고, 이것이 정의 (2)와 (3)에 의한 고용관계 분석에 보렐로 테스트가 적용되어야 한다는 주장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항소법원은 마르티네스 판결이 공동 고용주 분석에만 제한되어야 한다는 피고의 주장을 기각하면서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 “worker”는 자주 “노동자”로 번역되지만 영어권에서는 맥락에 따라 그저 “일하는 사람”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특별히 사업자 간 계약에 의해 노무를 제공하는 “worker”는 “독립 계약자(independent contractors)” 또는 “자영업자(elf-employed)”를 의미하고, 고용계약에 의한 “worker”는 “피고용인(employees)”을 의미한다. 고용계약에 의한 “worker”에 상응하는 보편적인 한국어 용어는 “임금근로자”나 “임금노동자”다.

** Dynamex Operations West, Inc. vs. Superior Court of Los Angeles(2018).

*** Martinez vs. Combs, 49 Cal. 4th 35, 64(2010).

**** S. G. Borello & Sons, Inc. vs. Department of Industrial Relations, 48 Cal. 3d 341(1989) 판결에서 노동자성 인정과 관련해 수립한 원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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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은 삼성 해고자 김용희 앞에 떳떳하십니까?

임성용*

 

삼성 해고자 김용희, 철탑 위에 오르다

2019년 6월 10일 새벽이었다. 강남역사거리 교통관제탑 아래에 배낭을 멘 사람이 나타났다. 크레인 트럭이 한 대 왔다. 그는 망설임 없이 크레인을 타고 25m 높이 관제탑으로 올라갔다. 손잡이도 없는 쇠기둥 하나, 그곳은 교통 CCTV가 설치된 곳이었다. 철제 난간이 설치된 원형의 공간은 지름 50cm도 채 못 되어서 사람이 두 발을 뻗고 누울 수도 없다. 그 비좁은 철탑에 오른 이는 배낭에서 두 개의 현수막을 꺼내 기둥에 매달았다. 하얀 바탕에 붉은 글씨로 쓴 현수막에는 “국정농단범죄자 이재용을 구속하라”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난간에는 “삼성해고자복직투쟁위원회”라는 현수막을 묶었다. 삼성그룹에서 24년 전에 해고된 김용희였다.

이미 일주일 전부터 강남역 8번 출구 부근에 있는 삼성 해복투 천막에서 단식을 하고 있었다. 김용희와 함께 천막을 지켜 온 해고자 이재용의 말에 따르면, 김용희는 단식 사실을 누구에게 알리지도 않고 그냥 밥을 굶고 있었다고 한다. 단식을 하던 그는 이재용에게 대뜸 사거리 철탑에 오르겠다고 말했다.

“아무 준비도 없이 어떻게 철탑을 오르려고?”

이재용은 김용희를 말렸고, 주변과 상의해서 행동할 것을 권했다.

“준비는 해 놓았어!”

김용희는 현수막을 직접 만들고 배낭까지 꾸려 놓은 상태였다. 단식을 시작할 때부터 사거리 철탑을 눈여겨보아 둔 모양이다.

“일주일이면 돼!”

이재용의 만류를 김용희는 듣지 않았다.

“강남역사거리가 마비될 거여.”

“만약 안 되면?”

“철탑에서 죽을 거여.”

얼마나 자기 이야기를 세상에 알리고 싶었던 것일까? 정말 그의 바람대로 강남 일대 교통이 마비되는 큰 사건이라도 일으켜 절규하고 싶은 심정이었나 보다. 아무리 호소해도 자기 말을 들어주지 않는 세상, 아무리 억울하다고 쫓아다녀도 외면하는 사람들에게 그는 생을 걸고 외치고 싶었던 것이다. 김용희는 CCTV를 수리한다고 크레인을 불렀고, 혼자서 철탑에 올라 고공농성을 시작했다.

김용희의 결심을 막을 수 없다고 판단한 이재용은 창원으로 내려가 버렸다. 김용희의 유일한 동료라고 할 수 있는 이재용은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둘 다 삼성 해고자로 길거리를 떠돈 지 십수 년, 올해 예순으로 나이도 같았다. 김용희는 전라도 사람, 이재용은 경상도 사람이었다. 20여 년 전부터 창원에서 삼성에 노조를 만들기 위해 싸운 동료였지만 작년까지는 서로를 잘 몰랐다. 서울에서 삼성과 싸움을 하던 중에 만나 친구가 되었다.

결국 이재용은 창원으로 내려간 지 나흘 만에 다시 상경해 천막농성을 재개했다. 도저히 혼자 싸우게 할 수가 없었다. 이 나라에는 삼성과의 싸움을 함께할 사람이 없다.

2018년 2월 28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청원 하나가 올라왔다. “무노조 삼성재벌 추악한 만행을 막아 주세요”라는 제목이었고, 글을 올린 사람은 김용희였다. 그러나 한 달이라는 청원 기간에 참여한 인원은 8명에 불과했다. 참여자가 20만 명 이상이 될 때만 청와대에서 답변한다. 그런데 겨우 8명만이라니! 공교롭게도 삼성의 지배자와 동명이인인 이재용은 자신마저 빠지면 김용희가 살지 못하리라 걱정하여 나흘 만에 다시 합류할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무슨 사연이 있기에 김용희는 이토록 목숨을 걸었을까?

*임성용
화물 운수 노동자, 시인. 시집으로 『하늘공장』 등이 있고, 산문집으로 『뜨거운 휴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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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74호(20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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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줍은 포퓰리즘

시대 74호(2019/12)

문재인 대통령의 임기가 절반을 지나면서 정권에 대한 일종의 평가가 나오고 있다. 아무런 대책도, 자신에게 맞는 색깔도 보여 주지 못하는 자유한국당이나, 도대체 알 수 없는 정신세계 속에서 사는 극우파 집단의 공격은 무시한다고 하더라도, 이 정권을 지지했거나 최소한 이 정권이 자기 논리에 충실하기를 원했던 사람들은 착잡한 감정을 표출하고 있다. 지난 2년 반 동안 이 정부가 실행했던 정책이나 보인 태도가 누군가에게는 배신으로 느껴지며, 또 누군가에게는 나쁜 쪽으로의 방향 전환을 보인다. 또 누군가에게는 이 정권의 본질이 드러난 것일 뿐 대단한 어떤 일이 일어난 게 아닌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진정한 의미에서 비판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모름지기 비판이란 비판의 대상을 적절한 위치에 놓는 것이기 때문이다. 먼저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약속 위반이거나 방향 전환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살펴보자.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문재인 정부가 가장 크게 내세운 이른바 소득 주도 성장의 형해화가 있다. 이는 소득 주도 성장하면 최저임금 인상이 떠오를 정도로 다른 정책 수단이 없었기 때문이다. 최저임금 인상이 넚은 의미에서 노동소득분배율을 높이기보다는 영세자영업자를 압박하는 양상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소득 주도 성장은 ILO 등이 주장한 임금 주도 성장의 한국판이라 할 수 있으며, 이윤 주도 성장과 대비된다는 점에서 수요 중심 성장론이라고도 할 수 있다. 수요의 기반이 되는 임금을 높이기 위해서는 최저임금 인상도 필요하겠지만, 노사 간의 협상을 통해 임금 인상이 가능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될 필요가 있다. 여기에는 노동조합 조직률, 노동조합 활동의 자유가 보장될 수 있는 법 제도 등이 포함된다. 따라서 문재인 정부는 최저임금 인상에만 몰두하지 말고 노동계의 힘이 커질 수 있는 조치를 취해야 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여기에 더해 한국의 경우 소득 주도 성장이 이루어지려면, 노사관계뿐만 아니라 대기업 대 중소기업으로 대표되는 불공정거래의 구조를 바로잡아야 한다. 그래야 다수를 고용하는 중소기업의 재정 여력이 확보될 수 있다. 여기에 더해 약탈적인 금융 부문의 통제, 소득의 많은 부분을 잠식하는 부동산 등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얼마 안 되는 혜택마저 오른손으로 주소 왼손으로 빼앗는 꼴이 된다. 그런데 이 정부는 이와 관련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거나 정반대로 했다. “(정부가) 국민 가슴에 가장 상처를 준 것은 부동산”이라는 말을 이 정부의 주요 인사가 하는 상황이다.

이 정부가 해야 했던 일 가운데 하지 않은 일을 지적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왜 그렇게 했는지 혹은 하지 않았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가장 간단한 이해 방식은 이 정권의 담당자들이 ‘좀 더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를 만들고 싶었으나 이마저도 할 용기가 없었거나 무능했다고 보는 것이다. 사실 무능하다는 것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이 지적하고 있다. 소득 주도 성장을 말하면서도 최저임금 인상 외에는 별다른 정책 수단이 없었다는 것이 단적인 예다. 물론 여기에는 조기 대선으로 인수위 설치 등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는 상황 논리가 더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용기가 없었단고 말하는 것이 더 맞지 않을까? 여기서 용기는 그저 정서적 고양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시대의 현실을 맑은 눈으로 볼 수 있는 태도이고, 이에 따라 오래된 인습으로 보자면 낯선 것일지라도 받아들이는 것이며, 무엇보다 이를 실행에 옮기는 것이다. 플랫폼 자본주의라는 변화된 상황,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한국적인 ‘천민적 자본주의’의 모습, 기후위기라는 비상사태 등이 시대의 현실이라면, 이에 대한 처방도 이 사태를 잘 이해하는 속에서 나와야 하지 않을까?

위와 같은 양상 속에서 불평등을 줄이는 첫 번째 방법은 마틴 루서 킹이 말한 것처럼 소득을 직접 보장하는 것이다. 이 정부가 이런 길로 나서지 않는 이유는 두 가지일 것이다. 하나는 이런 패러다임의 변화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정신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다. 일자리를 통하지 않는 소득의 이전은 말 그대로 경제적으로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만 한정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이런 소득 보장에는 상당한 돈이 들며 이를 마련하는 길은 결과적으로 부유층이 더 많이 부담하는 것이 될 텐데, 이를 강제할 경우 성장이 안 되거나 반발이 일어날 것이라는 우려다.

기후위기에 대한 대응도 소심하기는 마찬가지다. 아니, 때에 따라서는 기만적이기까지 하다. 그레타 툰베리의 호소가 천둥소리라면, 베네치아의 침수는 기후위기의 소나타가 이미 2악장을 지나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런데도 이 정부는 2030년까지 신재생에너지 비중을 20%까지 늘리겠다는 한가한 소리를 하고 있다. 물론 이마저도 화석연료 동맹 세력의 반발 속에서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게 현 상황이다.

한국의 여러 난맥상을 개혁할 수 있는 검찰 개혁이나 정치 개혁의 과제도 마찬가지다. 마치 공수처가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처럼 포장하거나 비례대표를 겨우 75석으로 늘리는 안건조차 불안해하면서 처리하지 못하는 모습에서 도대체 이들이 정치를 왜 하는 것인지, 위임받은 권력을 어디에 사용해야 하는지 모르는 것은 아닌지 등등 수많은 의문이 떠오르는 것은 몇몇 사람만이 아닐 것이다. 사태가 이러니 주당 52시간 노동의 후퇴는 당연한 일인 듯 지나가고 있고, 아마 사회경제적 후퇴 속에서도 그나마 지지를 얻었던 일본과의 대립도 지소미아 종료 연장 속에서 우스꽝스러운 꼴로 끝날지 모른다.

이런 비난을 늘어놓은 것은 그저 문재인 정보의 용기 없음을 비꼬기 위해서가 아니다. 앞서도 말했듯이 용기 없음은 사태를 제대로 보지 못한 데 따른 필연적인 귀결이다. 그래도 남은 문제가 있다. 왜 사태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가? 무엇이 이를 가로막고 있는가? 그건 아마 이 정권의 탄생 배경에 있을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정권의 탄생과 유지에 대한 정권 자신의 인식이다.

이 정권은 어떤 관점에서 보더라고 ‘노무현 정권 2.0’이라고 할 수 있다. 노무현 정권의 탄생과 유지는 정치적, 사회적 개혁에 대한 대중의 열망을 연료로 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후보가 되는 과정이나 탄핵을 넘어서고 다수당을 형성하는 과정 자체가 흔히 ‘포퓰리즘’이라고 부를 수 있는 현상 속에서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 열망을 올곧은 방향으로 가져가지 못한 것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노무현의 유산이 남은 것은 그가 성공과 실패 모두를 짊어지려 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그늘은 길게 드리워져 있다.

문재인 정부는 노무현 정부와 유사한 과정을, 아니 더 폭발적인 과정을 통해 탄생했다. 하지만 반복은 언제나 차이 속에서 나타날 뿐이다. 그 차이는 상황의 변화를 제외하면 지난 정권이 무엇을 잘못했는가에 대한 자기평가에서 나온다. 그건 추측건대 한국 사회의 주류를 포획하지 못했다는 인식일 것이다. 그리고 개혁을 추구하되 점진적으로 해야 한다는 인식일 텐데, 이는 사실상 하지 않는 것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큰 위태로운 길이다.

물론 이 정부에만 현 상황의 책임을 묻는 것은 편파적인 일이 될 것이다. 여기 말하고 싶은 것은 박근혜 정부를 물러나게 하고 현 정부를 만드는 데 사실상 원동력이 된 촛불혁명의 폭력성이다. 여기서 ‘폭력성’은 대중의 삶의 요구를 오직 탄핵과 정권 교체라는 방향으로만 몰고 가는 그 내용을 문제 삼지 않는 양상을 말한다. 물론 그 배경에는 한국 사회 주류의 비뚤어진 자화상이 있다. 그 어떤 공통성도 추구하지 않고 오직 사적인 이익만을 추구하는 ‘헤게모니 없는 지배’를 행사하고 있는 집단의 초상 말이다. 이 속에서 대중의 에너지는 결국 제도 내에서 엘리트 집단 내에서의 권력 다툼으로 축소될 수밖에 없다. 물론 가끔은 퍼팅할 때 카메라를 터트리거나 기침을 하는 예의 없는 갤러리가 있기 때문에 겉으로 보기에는 여전히 다이내믹하긴 하다.

이렇게 보면 현 정부는 어떤 때는 세련되게, 또 어떤 때는 수줍게 포퓰리즘을 동원하고 있다. 하지만 그 에너지를 절대로 실질적인 민주주의의 방향으로 가져가지는 않는다. 이런 점에서 스타일에서는 포퓰리즘이나 이데올로기 혹은 민주주의의 병리학으로서의 포퓰리즘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이는 최악의 포퓰리즘이다. 민주주의를 심화하거나 확대하는 것도 아니고 한 사회의 문제를 드러내는 것도 아닌, 오직 정권의 유지에만 봉사하는 포퓰리즘.

반복은 차이 속에서 나타나며, 앞의 것이 비극이었다면 그다음 것은 비극이 아니라 소극笑劇이 될 가능성이 크다. 물론 이것이 필연적인 일은 아닐 텐데, 소극으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는 대중의 에너지를 흐르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비록 그것을 자기가 통제하지 못할지라도 말이다.

 

편집위원회를 대신하여
안효상

 

이 글은 『시대』 2019년 12월호 통권74호에 실린 ‘책 머리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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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소득의 행진(!)

유신 독재를 펼치던 박정희가 암살당한 10월 26일이 한국 현대사에서 얼마나 중요한 날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겠지만, 그보다 70년 전 같은 날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보다 적을 것이다. 또 그보다 35년 전에 공산주의 혁명가 이재유가 청주형무소에서 옥사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여전히 소수일 것이다.

우연일 수밖에 없는 날짜를 이렇게 늘어놓는 것은 2019년 10월 26일이 또 다른 역사적인 날로 기억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이날 서울을 비롯한 전 세계 25개 도시에서 기본소득 행진이 벌어졌다. 더 이상 거부하거나 회피할 수 없는 기본소득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전 세계적으로, 처음으로 행진을 벌였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날로 기억되기를 바란다.

사실 부당한 것에 저항하기 위해, 정당한 요구를 성취하기 위해 사람들이 행진을 벌이는 것은 새로운 일이 아니다. 1930년 간디가 주도한 소금 행진이나 마틴 루터 킹의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연설로 유명한 1963년의 워싱턴 행진이 유명한 예이지만, 이외에도 무수한 행진이 있었다.

이렇게 피억압자 혹은 인민이 자신의 신체를 사용해서 어떤 발언을 하는 것은 당연하게도 다른 통로가 없거나 통로가 있는 경우에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민주주의 이전pre-democratic이거나 민주주의 이후post-democratic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아니면 특정 집단이 사실상 배제되어 있다고 느낄 때 벌어지는 현상이다. 최근 이른바 서구 민주주의 사회에서 우리가 “포퓰리즘”이라고 지목하는 현상은 이런 맥락에서 등장한 것으로 보인다. 인민이 주권자라고 말하는 민주주의 체제에서 인민의 의지를 대변한다고 하는 엘리트가 이를 제대로 대변하지 못할 때 거리의 정치가 등장한다. 한국에서 지금 촛불과 광장의 정치가 벌어지는 이유도 이와 다르지 않다.

문제는 엘리트가 제대로 대변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무었인가다. 미국과 유럽의 경우, 전 지구적 자본주의의 진전 속에서 끊임없이 악화되어 온 경제적 상황이 있다. 전후 복지국가를 뒷받침해 온 괜찮은 일자리가 줄어들면서 실업자가 늘었고, 일자리가 생겨도 낮은 임금의 질 나쁜 일자리였다. 이런 경제 상황은 디지털 경제로 표현되듯, 기술은 분명 날로 발전하는데 자신들은 뒤떨어지고 있다는 느낌이 되었다. 또한 지구화 속에서, 그리고 지정학적 충돌 속에서 이민과 난민의 물결이 위기라고 표현될 정도로 늘어났다. 이런 상황에서 이민과 난민이 자신들의 일자리를 빼앗는다는 인식이 생겨났다. 게다가 낯선 외부인의 등장으로 주류의 전통적인 가치와 문화가 파괴된다는 감정을 낳았다. 이런 조건은 주로 우파 포퓰리즘의 발흥이라는 상황을 낳았고, 2016년 브렉시트 결정과 트럼프의 당선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한국의 경우, 내용은 조금 다르지만 유사한 양상을 볼 수 있다. 미국과 유럽에서 포퓰리즘은 기성 정치계급에 대한 불신과 공격 속에서 등장했다. 한국의 경우에도 기성 정치와 정치인에 대한 불신과 경멸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중의 포퓰리즘적 에너지가 주로 기성 정치를 수호하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이는 포퓰리즘이 기성 정치세력의 권력투쟁의 도구로 이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한국의 기성 정치세력은 조심스럽지만 포퓰리즘을 하나의 전략으로 활용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이렇게만 볼 수 없는 대중의 열망이 있는데, 이는 통상 “정치 개혁”이라 불린다. 현재는 “검찰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지만, 넓게 보면 비대한 정치권력, 공정하지 못한 룰과 공정하지 못한 법 집행,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의 담합과 융합, 권력의 사적 이용 등에 대한 불신과 불만이 있다. 이는 우리 사회가 민주화 이후의 민주화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거나 “문화 전쟁”을 벌이지 못한 결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검찰 개혁은 분명 성취되어야 할 과제이며 선거법 개정 등 몇 가지 정치 개혁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문제는 개혁의 방향일 것이다. 공수처가 다른 나라에 유례가 없는 것이 아니라, 검찰이 수사권과 기소권을 다 가지고 있으면서 기소 독점주의와 기소 편의주의를 모두 누리고 있는 게 유례가 없는 일이다. 수능 시험이 그 나름 훌륭한 제도이고 수시로 선발하는게 다양한 교육과 균형 잡힌 선발을 가능케 한다는 것도 분명하다.

그런데 현실에서 개혁의 쟁점은 공수처를 설치한 것인지 말 것인지, 정시냐 수시냐 같이 옆길로 벗어나고 있다. 간단하게 말해, 사회 전반의 문화와 구조를 그냥 놓아둔 채로는 개별 정책이 아무리 의미가 있다 하더라도 고립된 섬처럼 제 기능을 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사실 혁명으로도 사회 전반의 문화와 구조가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혁명이건 개혁이건 인민이 실질적인 힘을 가지는 것이 아닐 때 전통과 인습이라는 이름의 끈질긴 힘은 언제든지 살아나고 인민의 삶을 무너뜨리려 한다. 이제 우리가 말해야 할 것은 인민의 힘 가운데에서도 경제적인 힘이다. 최근 한국 사회에서도 주목을 받는 공유 운동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기본소득운동은 모든 사람에게 경제적 힘을 주어야 한다는 운동이다. 이런 경제적 힘은 사람들에게 자율성을 줄 것이고, 그렇다면 좁은 의미의 정치 개혁보다 넓은 사회 전반의 변화로 나아갈 가능성이 있다. 기본소득 행진은 이런 힘을 스스로 찾고자 하는 우리 모두의 몸짓이다. 이런 점에서 2019년 10월 26일은 역사적 의미가 있을 것이다. 아니 역사적 의미가 있는 날이 되도록 만들어야 할 것이다.

 

편집위원회를 대신하여
안효상

 

이 글은 『시대』 2019년 11월호 통권73호에 실린 ‘책 머리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