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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지엠 비정규직노동자가 공유하고자 하는 사태의 진행과 해법

신현창 한국지엠 부평 비정규직지회 조합원

 

요 몇 달 한국지엠의 군산 공장 폐쇄와 파산 이야기로 사방이 시끄럽다. 글을 쓰기로 마음은 먹었지만, 몇 주간 단 한 글자도 쓰지 못했다.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모르겠고, 지엠을 둘러싼 상황은 매일매일 시시각각 변해 갔다. 날마다 신문 기사를 읽어 보고 현장의 교섭 내용을 파악해 봤지만, 도저히 예측이 불가능했다.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 언론에서 ‘운명의 날’이라고 칭한 부도 신청의 마지막 날이 지나가고 있다. 내부 소통망에서 확인해 본 결과, 부도 신청과 관련된 이사회 결정을 4월 23일 월요일로 연기했다고 한다. 다시 며칠을 번 셈인가?

아마도 이 글을 독자들이 읽게 될 때에는 이 글을 쓸 때와는 많은 것이 변해 있을 수도 있겠다. 지엠의 법정 관리가 확정됐을 수도 있고, 여전히 지금과 같은 상태로 진행 중일 수도 있다. 또 추가적으로 구조조정이 이뤄졌을 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글을 쓰면서는 상황을 공유하여 논의를 확장시키는 것 외에는 다른 목적이 생각나지 않는다.

기자들이나 주변 사람들은 묻는다. ‘이 지경이 되도록 지엠 노조는 무엇을 했느냐?’ ‘국가는 혹은 산업은행은 왜 알지 못했느냐?’ 하지만 모든 사건의 전조는 있기 마련이고, 오늘의 한국지엠 사태에 대해 내부 구성원들은 끊임없이 위기를 말해 왔다. 특히 비정규직을 중심으로 끊임없는 구조조정이 있었고 이에 대해 비정규직 구성원은 수년 전부터 한국지엠의 구조조정에 대해 경고해 왔다. 이에 반해 10여 년간 위기설에 시달린 탓인지 정규직노조는 다소 위기에 무감각해져 있었다. 또한 비정규직 목소리에 대해 언론은 무관심했고, 나아가 가장 큰 피해자인 비정규직 주체가 확장되지 못했다. 이런 일들이 어우러지면서 사태를 키웠다고 본다.

따라서 몇 가지를 짚어서 공유할 생각이다. 첫째, 지엠의 글로벌 전략에 따른 한국지엠의 비정규직 구조조정이 어떻게 진행됐는지 살펴볼 것이다. 둘째, 글로벌 지엠이 한국지엠 노조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어떤 작업을 진행했는지 살펴볼 것이다. 셋째, 이미 언론에서 드러난 지엠의 수탈 과정을 다시 한 번 공유할 생각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현재의 상황에 대한 해법을 놓고 생각을 공유하고자 한다.

1. 지엠의 글로벌 정책에 따른 비정규직 구조조정의 역사

1) 한국지엠 비정규직노조(지회)의 간략한 투쟁 역사

한국지엠 비정규직노동조합의 역사는 200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에는 불법파견 정규직화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면서 완성차 공장의 비정규직 주체들의 노조 만들기가 한창이었다. 2003년 현대 아산 공장을 시작으로 2004년 현대 울산, 2005년 한국지엠 창원과 현대 전주, 기아 화성 등의 공장에서 비정규직노동조합이 만들어졌다. 한국지엠 창원 공장에서는 비정규직노조가 건설될 때 특이하게도 정규직 노조가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하지만 한국지엠 사측은 끊임없이 정규직 내부를 흔들었고, 한국지엠 창원 정규직 집행부가 불신임을 받고 내려오면서 본격적인 비정규직노조 깨기에 들어갔다. 당시 한국지엠은 사내하청 업체 폐업을 통해 비정규직노조를 무력화시켰다. 오래지 않아서 핵심 활동가와 적극적인 조합원을 모두 공장 밖으로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이후 창원 공장 비정규직 운동은 깊은 수렁에 빠지게됐다. 소수의 조합원이 공장 안팎에서 명맥을 이어 왔는데, 2013년 닉 라일리 사장의 불법파견 형사처벌이 대법원에서 확정되면서 다시 반전의 기회를 얻게 됐다. 즉각적으로 창원 비정규직 주체들은 다시 조합원을 확대했고, 현장에 남아 있던 조합원을 중심으로 한국지엠의 근로자임을 확인해 달라는 근로자지위확인소송을 걸었다. 2016년 6월에 대법원 확정판결이 나면서 조합원 확대 사업에 성공했다.

부평의 경우, 비정규직노조 건설에 대한 논의는 2004년부터 본격화됐지만 창원보다 다소 늦은 2007년 9월에 노조 깃발을 올렸다. 당시 지엠의 글로벌 정책에 따라 모듈화, 외주화 정책이 추진되면서 비정규직노동자가 해고되거나 일터가 공장 안에서 공장 밖으로 바뀌게되는 상황이 자주 발생했다. 이에 더 이상 노조 건설을 미룰 수 없다는 판단에 노조를 건설했다. 하지만 창원에서 이미 비정규직노조 깨기에 성공한 경험이 있기에 한국지엠은 핵심 주체에 대한 집단 폭행과 징계해고, 조합원 다수가 조직되어 있는 업체의 폐업 등의 방식으로 비정규직노동자를 공장 밖으로 밀어냈다. 이 과정에서 정규직노조는 사측의 편에 서서 탄압을 방관하거나 눈에 보이지 않게 협조하고 있었다. 결국 조합원 절반가량은 조합 건설 한 달도 채 되지 않아서 해고됐고, 나머지 현장 조합원들도 하나둘 사측의 압력에 못 이겨 조합을 탈퇴했다. 2008년 9월에 시작된 미국발 금융위기로 인해 한국지엠도 큰 영향을 받게 되는데, 2009년 4월 한국지엠 부평 공장에 있는 비정규직 1,000명 이상이 해고되면서 공장 안에는 비정규직 조합원은 단 한 명도 남지 않게 됐다. 대규모 비정규직 해고 역시 그 과정에서 노사 합의 또는 정규직노조의 적극적인 협조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공장 밖으로 밀려난 비정규직노조는 지난한 투쟁을 통해 2011년 비정규직 전원 복직을 회사와 합의하여 2013년부터 현장에 배치되면서 활동을 재개했다. 2014년 현장 활동을 본격화하면서 조합원 확대 사업을 통해 조합원을 늘리면서 2015년 1월 근로자지위확인소송을 창원, 군산, 부평 비정규직노동자들이 집단으로 제기했다. 2016년 이후 물량이 지속적으로 줄어들자 끊임없는 한국지엠의 ‘인소싱’(정규직의 비정규직 공정 전환배치) 시도가 있었지만, 줄기차게 현장에서 투쟁을 이어가면서 어느 정도 인소싱을 막아 내고 조합원도 소폭 증가했다. 그러나 2017년 이후 구조조정이 본격화되면서 결국 12월에 조합원 상당수를 포함한 비정규직노동자들이 해고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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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입법’과 새로운 의회-시민 관계 ― 2018년 헌법 개혁 논의에 부쳐*

서현수 핀란드 땀뻬레Tampere 대학교 정치학 박사, 서울대 강사

 

1. 근대의 정치적 조건과 직접민주주의 논쟁

‘다수의 독재’ 또는‘ 무분별한 포퓰리즘’에 대한 오래된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직접민주주의 구상은 루소Jean-Jacques Rousseau(1712∼1778)로부터 페이트만Carole Pateman(1940∼ )과 바버Benjamin R. Barber(1939∼2017)에 이르기까지 많은 참여 민주주의자들에게 영감을 주어 왔다. 이들은 ‘회합 민주주의assembly democracy’에 대한 고전적 이상을 회복함으로써 선거 형태의 대의 정부가 지니는 민주적 결함을 극복하기를 희망했다. 직접민주주의가 정치과정의 중심에서 작동하는 스위스의 사례는 직접민주주의가 근대사회의 정치적 조건 속에서도 실행될 수 있음을 입증해 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근대 민주주의는 고대 그리스의 회합 민주주의와 달리 본질적으로 대의 정부 시스템의 기반 위에 수립된 것이다.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1806∼1873)과 매디슨James Madison(1751 ∼ 1836) 등은 (직접)민주주의의 불안정함과 인민들의 불완전성 때문에 대의민주주의가 ‘불가피’할 뿐만 아니라 ‘바람직’하기까지 하다고 주장했다. 보편적 참정권조차도 20세기 초반 들어서야 도입되고 확대되었다.

스위스는 1848년혁명 이후 국민투표referendum 기반 민주주의를 도입했다. 국민투표와 (완전형) 시민발의 제도가 1874년과 1891년의 헌법 개혁들을 통해 각각 도입됐다. 이후 미국의 많은 주가 스위스 모델을 따르면서 주민투표와 시민발의를 제도화했다. 그러나 독일 바이마르공화국의 몰락과 나치 등 전체주의 체제들에서 일어난 대중 참여의 남용으로 인해 직접민주주의 개념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확산됐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많은 유럽 국가가 민주주의 질서를 회복하면서도 의회와 정당 중심의 대의민주주의 시스템을 선호한 것은 이러한 배경에서였다.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재생된 것은 1960년대와 70년대에 이르러서였다. 전후 구축된 안정된 자유민주주의 체제와 복지국가 질서의 기반에 균열이 오면서 대안적 의제 설정과 직접 행동주의를 추구하는 ‘신사회운동new social movements’이 출현했다. “비판적 시민들critical citizens”은 더 투명한 정부와 모든 정치적 의사 결정 과정에 대한 직접적 시민 참여를 요구했다. 참여 민주주의의 확산과 더불어 의회와 정당 등 대의 기구를 우회하는 직접민주주의 메커니즘이 더 자주 활용됐다. 알트만에 따르면, 1984년부터 2009년까지 전 세계적으로 국가 단위 수준에서 직접민주주의 메커니즘이 총 949회(시민 주도 메커니즘 328회, 위로부터의 메커니즘 621회) 실행됐다.**

그러나 직접민주주의의 제도적 적합성, 국민투표와 시민발의의 정책적 효과와 정치적 영향, 직접민주주의와 대의민주주의 간의 관계를 둘러싼 논쟁 등은 계속됐다. 논쟁은 주로 대의민주주의와 직접민주주의 간의 고전적 이분법을 중심으로 전개됐다. 벗지는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주요 비판들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1) 근대사회에서 함께 토론하고 표결하도록 모든 시민들을 소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2) 유권자들은 이미 총선을 통해 정당한 정부와 프로그램을 선택했다. (3) 평범한 시민들은 ‘숙고된 판단’을 내릴 역량이 없으며 정책 전문성을 결여하고 있다. (4) 다수의 전제專制와 소수자 인권의 침해라는 위협은 현실이다. (5) 정당과 입법부 등 ‘중간 매개적’ 제도들을 침식하는 것은 ‘일관성 없고, 불안정하며, 무분별한 정책’으로 이어지기 쉽다.

* 이 글은 필자의 박사 학위논문 Reaching Out to the People? Parliament and Citizen Participation in Finland(Tampere University Press, 2017)을 토대로 작성됐다. 결론부의 제언은 2017년 11월 3일 국회 박주민 의원실 주최 토론회에서 발표된 바 있다.

** Altman, D., Direct Democracy Worldwid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1.

*** Budge, I., “Implementing popular preferences: is direct democracy the answer?”, Geissel, B. & Newton, K. (ed.), Evaluating Democratic Innovations: Curing the democratic malaise? Routledge, 2013, pp. 2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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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시대가 변하고 있는가?

남북 정상회담에 이어 지난 6월 12일 북미 정상회담이 열렸다. 일부 언론과 이데올로그들이 합의문에 확실한 북한의 비핵화 원칙, 이른바 CVID가 담겨 있지 않다고 당연한 시비를 걸긴 했지만, 대체로 보아 새로운 시대를 향한 첫 걸음을 떼었다는 데는 대체로 동의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열린 지방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이 압승을 거두었다. (원내에서 진보로 분류되는 정의당의 성과는 애매하지만 제법 지지를 받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유권자의 의사가 투명하게 반영되지 않는 현행 선거제도로 인해, 그리고 대통령제 하에서 대통령이 현재 누리고 있는 인기 덕분에 더불어민주당이 커다란 승리를 거둔 것이 당장 눈에 들어오는 일이긴 하지만, 자유한국당의 몰락이 아마 더 큰 사태라는 점에도 모두가 동의할 것이다.

당연히 자유한국당은 ‘쇄신’의 노력을 할 것이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적응’하려고 애쓸 것이다. 하지만 당내의 분파 투쟁을 제외하더라도 현재로서는 쇄신의 가능성이 커 보이지 않는다. 그건 이들의 진정성이 부족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유한국당으로 이어지는 정치적 흐름이 더 이상 시대 변화를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좀 더 시간이 흐른 후 자유한국당을 지지했던 대중의 열망과 욕망을 받아 안을 수 있는 새로운 조건이 형성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자유한국당의 지배를 가능하게 했던 조건을 많은 사람은 냉전과 분단, 반공 이데올로기에서 찾을 것이다. 틀린 생각은 아니다. 하지만 대중민주주의에서 이데올로기가 주는 환상적 만족이나 억압만으로 장기간 통치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감안할 때, 대중이 누렸을 실질적 이득에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다. 그건 우리가 ‘산업화’라고 부르는 한국 경제의 성장과 그에 따른 어느 정도의 분배였을 것이다. 냉전이라는 역사적, 지정학적 배경이 (이 속에서 희생당한 사람들과 무관하게) 한국 경제의 성장을 뒷받침했다는 점에서 냉전과 반공은 최소한 한반도에서는 동전의 양면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 균열을 가져온 것이 이른바 ‘97년 체제’하의 사회 양극화였다. 성장과 고용의 ‘선순환’이 깨지면서, 다수에게는 당장의 삶이 어려워졌다. 또한 저성장 국면에서 자본은 투기에 의한 수탈, 보조금을 통한 강탈, 임금 비용의 절감을 통한 초과 착취에 몰두했다. ‘갑질’은 이런 양태가 두드러지게 드러난 일일 뿐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는 신자유주의에 포획당하면서 이런 문제에 대한 새로운 해법을 제시할 수 없었다. 진보라는 세력조차 방어적인 투쟁에 몰두하던 시절에 당시 정부에 무엇을 기대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긴 한다. 경제성장에 대한 욕망이 이명박이라는 일그러진 인물로 통해 투사된 것은 냉전과 반공이라는 지배적인 이데올로기가 무너지고 이를 대신할 그 어떤 공공선도 눈에 잡히지 않을 때 대중이 선택할 수 있었던 또 다른 일그러진 초상화가 아니었을까? 이런 점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이 아버지의 후광과 자신의 묘한 아우라 덕분에 대통령이 된 것도 사실이긴 하지만, 반사회적 가족과 개인만이 삶의 준거점이 된 시절에 그나마 대중을 통합할 수 있을 것 같은 이미지 덕을 입은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그 환상은 그의 오랜 벗이 드러나고 자신의 시간은 드러나지 않은 채 산산조각이 났다.

현 대통령이 대통령이 된 것은 일종의 경로 의존성처럼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의 앞에 놓인 두 가지 과제는 각각 무겁기도 하고 서로 연관되어 있기도 하다. 하나는 “적폐 청산”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좀 더 민주적이고 차별 없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소득 주도 성장”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일자리 창출을 통해 사람도 살리고 경제도 살리는 일일 것이다.

우선 적폐 청산이라는 말은 오해의 소지가 크다. 사회의 나머지 부분은 ‘정상적으로’ 돌아가고 있었는데 어딘가에, 주로는 권력과 돈이 있는 사람들이겠지만, 잘못된 관행이 쌓여 왔다는 것으로 쓰이는 게 적폐다. 하지만 적폐 따로 정상 따로 있었던 것이 아니고, 적폐만을 암세포 적출하듯이 없앨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일자리 창출의 경우, 공공부문에서 제대로 된 일자리를 어느 정도 만드는 것은 가능하면서도 바람직한 일이다. 하지만 전 세계적으로 과잉생산의 덫에 빠진 현 국면에서, 특히 수출 주도형 경제구조를 가진 한국 경제가 적절한 수준의 일자리를 만드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현 정부가 기대하는 것은 최저임금 인상을 통한 내수 활성화, 공정한 거래를 감독함으로써 다수 고용을 유지하고 있는 중소기업의 활력 제고다. 그런데 전자는 제한적인 효과만 있을 것이고, 후자는 쉽지 않은 일이다. 물론 양자를 관통하는 남북 관계의 개선이 있긴 하다. 하지만 아직 불확정적일 뿐만 아니라 바람직한 방식으로 이루어질지도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여기에 더해진 것이 미국과 중국의 무역 ‘전쟁’이다. 물론 이것은 앞서 말한 자본주의의 현 국면을 반영하는 ‘민족주의적, 포퓰리즘적’ 방식이다. 문제는 이것이 한국 경제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게 분명하다는 것이다.

최근 거세진 반페미니즘, 예멘 난민의 제주도 입국으로 불거진 포비아 등을 볼 때 적폐를 청산하고 돌아갈 우리의 정상적인 과거는 없다. 또한 최저임금 인상이나 일자리 창출 같은 방식으로 일으켜 세울 수 있는 정상적인 경제란 것도 없다. 사태는 언제나 중층적이고 정상은 언제나 새로운 것을 요구할 뿐이다.

자신의 삶의 비참함 때문에 타인을 혐오하지 않을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것, 새로운 사태를 상상할 수 있는 여유와 기회를 가지는 것만이 언제나 위기의 물결을 새로운 ‘정상’으로 데려다줄 물길로 만들 수 있다. 만약 기본소득을 포함해서 우리가 넓은 의미의 경제민주화라는 것을 달성할 수 있다면, 우리는 큰 파도 너머를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 먼저 적폐를 벗어날 필요가 있다. 익숙함이라는 적폐 말이다.

 

편집위원회를 대신하여
안효상

 

이 글은 『시대』 2018년 07~08월호 통권60호에 실린 ‘책 머리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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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체적인 것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을 위하여!

김교성, 백승호, 서정희, 이승윤, 『기본소득이 온다: 분배에 대한 새로운 상상』, 사회평론아카데미, 2018년.

안효상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상임이사

 

급진적인 사회 변화를 꿈꾸는 사람들이라면 노아의 홍수 같은 ‘신적 폭력’을 바랄 때가 있을 것이다. 그건 깨끗한 상태에서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는 조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마처럼 얽힌 인간사의 처지는 그런 사치를 허용하지 않는다. 아무리 우리가 가진 이상이 높다 하더라도 우리 발은 부드러운 흙을 밟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근대의 혁명 과정은 ‘테러’와 ‘독재’라는 형식으로 그 부드러운 흙을 쿵쿵 밟아 단단하게 다짐으로써 도약을 꾀하기도 했지만, 최소한 현재까지는 자기 발목을 부러뜨리는 효과를 낳았을 뿐이다.

오늘날 다양한 위기와 변화의 전망 속에서 가장 유력한 대안으로 주목받고 있는 기본소득‘운동’도 비록 정신적인 차원이긴 하지만 그런 갈림길에 놓여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기본소득 아이디어는 지향하는 목표나 터 잡고 있는 근거에서 도덕적 우월성과 현실적이면서도 급진적인 태도를 확보할 수 있었다. 기본소득 아이디어는 역사적 사회주의의 붕괴 속에서도 그 홍수에 함께 떠밀려 가지 않은 ‘최소 기준’으로서의 자유, 평등, 사회정의, 인간의 존엄성을 그 어떤 사상이나 정책보다 확고하게 옹호하고 실현하는 것이며, 예상되는 사회 변화에 가장 능동적이고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대안으로 자신을 제시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런 도덕적 우월성과 현실적인 대안이기에, 머지않아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을 때가 올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신적 폭력의 유혹을 피해야만 한다면 현실의 변화는 정치적인 것의 자리에 스며들어야 하고, 정치의 장을 통과해야 한다. 이는 여기서 시작해서 저곳으로 어떻게 갈 것인가에 관한 경로를 제시하는 문제이고, 실제로 이 경로를 통과하는 실천이다.

스스로를 “상상하는 리얼리스트들”이라고 부르는 사회복지 연구자 네 명의 공동 저작인 『기본소득이 온다: 분배에 대한 새로운 상상』은 이런 경로에 대한 탐색이라는 점에서 주목받을 만하다. 네 사람은 기본소득의 필요성을 “자본주의의 질적 변화”에서 도출하는 것에서 시작해서, “한국형 기본소득”의 모델을 제시할 뿐만 아니라 기존 제도와의 실천적 비교 속에서 구체적인 이행의 문제를 검토하고 있다. 더 나아가 그동안 한국에서 이루어진 기본소득 논의와 실천, 정치적 투영과 전망 등을 검토함으로써, 한바탕 소용돌이처럼 몰아쳤던 기본소득 논의를 새로운 정치적 실천으로 끌고 갈 수 있는 쉼표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외면할 수 없는 성과물이라 할 수 있다.

우선 『기본소득이 온다』는 구성이라는 면에서도 독특하다고 할 수 있다. 그건 기본소득의 필요성과 정당성을 무엇보다도 저자들이 “자본주의의 질적 변화”라는 말로 포착하는 현실의 변화에서 찾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모든 책은 저마다 독특하고, 현대적인 의미의 국제 기본소득운동의 새로운 순환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는 2017년에 기본소득의 베테랑들이 각기 출판한 책도 마찬가지이기는 하다. 필리프 판 파레이스는 야니크 반더보르트와 함께 쓴 책에서 기본소득을 “자유의 도구”로 제시하고 있으며, 가이 스탠딩은 기본소득에 대한 정의에서 출발하며, 애니 밀러는 기존 복지국가의 문제점에 자기 논의를 근거하고 있다. 하지만 이 세 권의 책은 이른바 “철학적 정당화”라는 것에서 출발한다는 점에서 유사한 프레임을 가지고 있다. 그건 그동안 국제 기본소득운동이 걸어온 궤적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완전히 희망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공산주의는 사실상 무너져 가고 있었고 전쟁의 잿더미 속에서 다른 방식으로 정의를 구현하고자 한 복지국가는 점점 더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던 시점에서, 기본소득에서 어렴풋하나마 빛을 찾고자 한 사람들이 취할 수 있었던 태도는 무엇보다 그 정당성을 논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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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 시작되는 곳

첫눈에 반한다는 말이 있다. 나무랄 데 없는 두 사람이 만난다. 첫눈에 반해 금세 사랑에 빠진다. 이런저런 우여곡절이야 겪겠지만, 결국 사랑의 결실을 맺고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이런 얼개의 이야기는 판타지일 뿐 현실에서는 거의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소개팅에서 첫눈에 반한 상대를 만난 적이 있다는 선배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소개팅이었으니 이런저런 사회적 배경은 맞췄을테니 뜻밖의 배경을 지닌 사람을 만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용모나 매너에 반했다는 말일 텐데, 소개팅에서 첫눈에 반한 사람을 만났으니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을 것이라 예상했다. 지금 남편 자랑하려고 이 얘기를 꺼내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선배 얘기로는 첫눈에 반하고, 그뿐이었다고 했다. 다음에 만날수록 조금씩 단점이 보이고 부족한 면이 드러나고. 만날수록 재미가 없어지더라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평범한 사랑의 힘은 설렘과 놀람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쁘지 않네’ ‘호감이 가네’ ‘계속 만나 볼까’ 하는 정도의 감정을 일으키는 사람을 처음 만난다. 만날수록 이런 면모 저런 면모가 보이며, ‘어, 이런 면이 있었네’ 또는 ‘오, 멋진데’ 하며 놀라기도 하고, 이런 놀람에 다음 만남이 설레게 되고. 그러다 어느 순간 두 사람의 감정이 확 달아오르고, 뜨겁게 달아오른 감정을 지금까지 쌓아 온 믿음과 정으로 연착륙시켜서 오래 지속되는 관계로 만드는 것. 이런 관계가 아마 가장 일반적인 사람들의 사랑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말하자면, 놀람-탐색-설렘이 이어지며 사랑과 믿음과 정을 쌓아 가는 그런관계말이다.

앎이란 무엇인가

버트런드 러셀은 수학과 논리학에서 시작해서 철학의 거의 모든 분야를 다룬 저작을 펴낸 20세기의 대표적인 철학자다. 반전 평화 활동도 활발히 펼쳤고 대중서도 많이 펴냈기에 아마 가장 널리 읽히는 철학자 축에 낄 것이다. 그런 러셀은 자서전말고도 철학 자서전이라고 할 『나는 이렇게 철학을 하였다』도 썼다. 그 책에 평생에 걸친 철학 연구의 여정을 담았다. 러셀은 자신의 길고도 다채로운 철학 탐구를 다음과 같은 한마디로 간추려 말했다.

내가 평생 동안 계속 열심히 탐구했던 관심사는 오직 한 가지였다. 나는 철학을 시작해서 지금까지 우리가 안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되며, 또 우리가 안다고 주장하는 것이 어느 정도나 확실할 수 있고 어느 정도나 의심할 수 있는 것인가를 몹시 알고 싶어 했다.

러셀만이 아닐 것이다. 앎이 무엇이며, 어떻게 앎을 얻을 수 있고, 그렇게 얻은 앎의 옳고 그름을 어떻게 알 수 있는지 하는 물음은 서양철학사의 오래된 물음이다. 플라톤의 대화편 가운데 이런 물음을 다룬 것으로 『테아이테토스』가 있다. 소크라테스의 대화 상대자로 테아이테토스가 나온다. 이 대화편에서 보면 플라톤이 몹시도 테아이테토스의 자질을 아끼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실제로도 무리수 이론을 정립하고 입체기하학을 창시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이 대화편에서는 열여섯 살 정도의 어린 나이로 나온다.

『테아이테토스』는 후대에 많은 영향을 미쳤지만, 어렵기로 유명하고 그만큼 학자들 사이에서 해석을 둘러싸고 논란도 많은 대화편이다. 그런 와중에도 자주 회자되는 대목이 몇 가지 있는데, 저 유명한 산파술이 이 대화편에 나온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고상하고 건장한” 산파인 파이나레테의 아들로 소개하며 자신도 산파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 단, 산파들이 사람들의 몸을 출산하도록 돕는 데 비해 자신은 사람들의 영혼을 살핀다는 점에서 다르다고 하며 이렇게 말한다.

우리네 기술에서 가장 대단한 건, 젊은이의 생각이 모상과 거짓을 출산해 내는지 아니면 씨알 있는 참된 것을 출산해 내는지 온갖 방식으로 시험할 수 있다는 것이네. ( 『테아이테토스』, 150c)

젊은이의 영혼을 돌보며 젊은이들이 참된 지혜를 산출하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산파는 산파일 뿐 스스로 아이를 낳지는 못한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자기 스스로는 지혜를 낳지 못한다고 말한다. “신께서는 나로 하여금 산파 역할을 강제하셨지만, 직접 낳는 건 금하셨네.” 이렇게 말하며 “앎이 무엇인지” 젊은 테아이테토스가 깨달을 수 있도록 산파 역할을 시작할 테니 같이 잘해 보자며 격려한다. 이렇게 “앎은 지각이다” 하는 문제를 테아이테토스와 함께 한창 탐구해 나가는 가운데 소크라테스는 테아이테토스에게 잘 따라오고 있는지 묻는다. 젊은이에게는 거듭 이어지는 이 모든 논의가 일종의 충격처럼 다가온다.

소크라테스 선생님. 저는 이런 것들이 도대체 무엇인지 엄청나게 놀라고 있고, 때로는 저것들을 바라보다가 정말이지 현기증을 느끼기까지 합니다. ( 『테아이테토스』, 155d)

이런 말을 하는 테아이테토스에게 역시 뛰어난 자질을 보여 주는 젊은이라고 칭찬하며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말한다.

놀라워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철학자의 상태이기에 하는 말이네. 이것 말고 철학의 다른 시작은 없으니까. ( 『테아이테토스』, 155d)

놀라워하는 것thaumazein, 새로운 사실을 깨닫고 경이로워하는 것. 이것을 철학의 시작이라고 말하는 유명한 대목이다. 여기서 잠깐 놀람의 감정을 살펴보자. 놀라움은 원시 환경의 인간에게는 생존에 큰 도움이 되는 감정이었을 것이다. 갑자기 나타난 맹수처럼 새로운 위험이 닥쳤을 때 놀라지 않고 무덤덤했다면 닥친 위험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놀람은 다른 동물들에게도 흔히 보이는 감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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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통상 정책의 정치경제학

유승경 정치경제연구소 ‘대안’ 부소장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자국 시장 보호를 위한 강력한 통상 정책을 실행에 옮김에 따라 세계경제의 긴장이 높아지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가 보호주의적 통상 정책을 취하는 목적은 자국의 무역 적자를 줄이는데 있다. 실제로 미국은 다음 쪽의 그래프가 보여 주는 것처럼 1970년대 중반부터 무역 적자를 기록하기 시작하였고 그 이후 그 폭이 지속적으로 확대되었다.

트럼프는 만성적인 무역 적자 때문에 미국의 성장이 방해 받고 일자리가 줄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무역 적자가 발생하는 이유를 미국이 맺고 있는 무역협정이 불공정하고 무역 상대국이 환율 조작 등 불공정 무역 행위를 자행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트럼프 통상 정책의 기조는 자유무역을 옹호하는 대다수 경제학자들의 강한 비판을 받고 있다. 저명한 경제학자들이 나서서 트럼프와 그의 보좌관들은 경제학 개론 수준의 기초 이론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실제로 일부 경제학자는 각종 매체를 통해서 무역 적자 발생의 원인에 대한 기초 이론을 트럼프 행정부에게 강의한다.

그렇지만 트럼프의 정책에 반대하는 학자들이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경제학의 기초 이론에 대한 해석을 두고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일부 경제학자는 무역 적자는 문제가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하며, 다른 일부 경제학자는 만성적 무역 적자는 문제이지만 통상 정책은 적절한 해결책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최근의 이러한 논쟁 때문에 대학자들까지도 경제학의 기초에 대해서 다른 해석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

이 글에서는 트럼프 통상 정책을 지지하는 학자와 그에 반대하는 학자들의 다양한 주장과 그 근거를 검토해 보고, 이를 토대로 향후 트럼프의 통상 정책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를 전망해 본다.

1. 트럼프 통상 정책의 이론적 근거

미국은 2000년대 들어와서 경제성장이 매우 느려졌다. 2000년부터 2017년까지 미국의 연평균 성장률은 2.0%에 그쳤는데, 그 이전 50년간 평균 3.0%를 상회한 것에 크게 못 미치는 수준이다. 보호주의 정책의 옹호자들은 1990년대 중반부터 특히 심화된 무역 적자가 미국 경제의 성장을 둔화시킨 가장 큰 요인이라고 주장한다.

트럼프 행정부의 통상 정책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는 경제학자는 캘리포니아 어바인 대학의 피터 나바로 교수다. 그는 현재 상무성 장관인 윌버 로스와 함께 2016년 트럼프의 정책을 뒷받침하는 보고서를 발표한 바 있다. 그들의 논거는 의외로 단순했고 많은 학자들로부터 “경제학 문맹Economic Illiteracy”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나바로와 로스는 공동으로 집필한 「트럼프의 경제계획 평가」라는 논문에서 무역 적자가 성장을 저해한다는 근거로서 “국민소득은 소비, 투자, 정부 지출, 수출의 합에서 수입을 뺀 것(GDP=C+I+G+X-M)”이라는 국민소득 균형 식을 제시했다. 이에 근거하여 수출은 GDP에 기여하며 수입은 GDP를 삭감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트럼프의 목표는 아주 간단하게 수출을 늘리고 수입을 줄이는 것이라고 못 박고 있다. (Peter Navaro & Wilbur Ross, Scoring the Trump Economic Plan, 2016, p. 9, p. 29.)

여기에 대해서 유명 학자들이 나서서 트럼프 측의 주장은 국민소득 균형 식에 대한 어처구니없는 몰이해에 기반하고 있음을 지적했다. 소비(C), 투자(I), 정부 지출(G), 수출(X)의 합에서 수입을 빼는 이유는 소비, 투자, 정부 지출에 이미 수입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이중 계산을 피하기 위해서 수입을 차감한 것일 뿐, 수입이 성장을 저해하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한다. (Noah Smith, Trump’s Trade Chief Makes a Rookie Mistake, Bloomberg View, 2016, p. 12, p. 28.)

이 지적은 정확한 이야기이지만 트펌프의 통상 정책을 자문하는 사람들은 괘념치 않는다. 그들의 계산법도 간단하다. 미국은 2015년 5,000억달러의 무역 적자를 기록했고, 미국의 2015년 명목GDP는 2014년에 비해서 6,440억달러 증가했다. 따라서 미국이 무역균형을 달성했다면 명목GDP의 증가분은 두 수치를 합친 11,440억달러가 되었을 것으로 계산한다(Peter Navarro & Wilbur Ross, 위의 책).

이들은 트럼프 정책에 대한 주된 비판에 대해서도 완강하고 강력하게 반박한다. 트럼프의 정책에 대한 널리 공유되고 있는 비판은 두 가지다. 첫 번째는 해외의 값싼 제품의 수입을 막으면 인플레이션이 발생할 것이며 이로 인해 저소득 가계에 부담을 가중시켜, 수입제한은 역진세의 효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트럼프의 정책이 무역 전쟁을 야기해서 대공황과 같은 경제 위기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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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대 총선 이후 한국 정당체제의 변화

지병근 조선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1. 정당

한국에서 정당의 수명은 대체로 정치인의 수명보다 짧다. 그 이유는 단순히 정당의 지도부가 지조가 없거나, 부도덕하거나, 능력이 없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는 정당이 정치인들에게 권력을 창출하는 하나의 수단일 뿐이지 목적 자체는 아니기 때문이다. 집권 수단으로 기능하지 못하는 정당은 정치인들에게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숭고한 조직이 아니라, 필요하면 과감히 버려야 할 소모품일 뿐이다. 물론 일체감을 강하게 느끼거나 이념적으로 신성화되었다면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정당은 그러한 위치에 있지 않다.

물론 정당의 존재 이유는 국회의 의석수 확대나 집권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정당은 다양한 목표를 두고 있으며, 오히려 행정부의 장악보다는 당헌과 강령에 묘사된 사회상을 현실화시키기 위해 사회로 ‘침투penetration’하는 데 목적을 둘 수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정당은 단기적인 집권을 위해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지 않거나 때로는 스스로 변형시키곤 한다. ‘선거 정당’ 혹은 ‘포괄 정당’으로의 변신은 사회주의체제의 몰락으로 가속화되었다. 사실 탈냉전기 현대 정당정치의 역사는 다름 아닌 이념으로부터의 탈출기exodus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민주화는 정당 중심의 정치 발전을 촉진하는 기폭제가 되었으며, 정당들의 이념과 정책적 지향을 유연화시킴으로써 이들 사이의 이합집산을 자유롭게 만들었다. 대표적으로 1997년 대선을 앞두고 국민회의가 급속히 우경화된 공약을 제시하며 김대중과 김종필이 DJP 연합을 형성한 것이나, 2012년 총선과 대선에서 새누리당이 자신의 이념적 위치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경제민주화를 공약으로 제시했던 것이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최근 정의당 지도부가 민주평화당과 공동교섭단체를 구성하기로 합의한 것도 유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당체제가 개별 정당의 생애처럼 빈번하게 바뀌는 것은 아니다. 1987년 민주화 이후 한국의 정당체제는 ‘지역주의적 정당체제’를 공고화시켜 왔다. 비록 일반 유권자들은 기억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거의 모든 정당이 당명을 바꾸거나 분열과 통합을 거듭해 왔지만, 영호남 출신의 정치인들은 지역을 대표하는 정당을 만들고 유권자들은 이들을 일관되게 지지하는 패턴이 반복되어 왔다. 아울러 한국은 권위주의 체제하에서 형성된 ‘노동 없는 정당체제’를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 2004년 이후 민주노동당이 원내에 진입하는 성과를 얻었지만, 그 규모는 10석 내외에 불과하였으며, 그 후신인 통합진보당은 헌법재판소에 의해 해산당하고 말았다. 비록 그 후에도 정의당이 통합진보당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지만, 의석수가 한자리 수에 머무르는 등 노동과 진보를 대표하는 정당들의 성과는 미약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당체제가 항상 변함이 없는 것은 아니다. 표면적으로는 동일한 정당체제가 유지되더라도 이를 구성하는 정당이나 이들 사이의 관계는 끊임없이 변화하며 요동치기 마련이다. 이 글은 20대 총선을 전후로 이루어진 한국의 정당들의 통합과 분열의 역사를 개괄적으로 탐색하고 임박한 6·13 동시 지방선거를 계기로 한국의 정당체제가 재편될 가능성에 대한 전망을 간략히 제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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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저임금제는 앞으로도 유효할까?

금민 정치경제연구소 ‘대안’ 소장

최저임금제는 노동시장 외부에서 국가가 임금 최저선wage floor을 결정하고 사용자가 그 이상의 임금을 지급하도록 법률로 강제하는 제도다. 법정 임금 최저선은 통상적으로 시간당 최저임금, 곧 최저시급의 형태로 정해진다. 임금 최저선을 노동시장의 수요와 공급에 맡기지 않고 시장의 외부에서 결정하는 제도로 법정 최저임금제만 있는 것은 아니다. 협약임금제는 노동시장의 수요와 공급이 아니라 단체협약에 의해 임금을 결정하는 제도이며, 산업별 단체협약은 동일 산업 내에서 적용되는 임금 최저선을 정할 수 있다. 단체협약의 구속력이 노조에 가입하지 않은 노동자에게도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제도를 택하고 있는 경우, 해당 산업의 임금 최저선은 법정 최저임금이 아니라 산업별 단체협약의 임금 최저선에 의해 결정된다. 물론 이 경우에도 산업별 단체협약의 임금 최저선은 법정 최저임금보다 높을 수는 있지만 결코 낮을 수는 없다. 노동시장 외부에서 임금 최저선이 결정된다는 점은 협약임금과 최저임금의 공통적인 특징이며 최저임금제만의 특징은 아니다. 따라서 협약임금에 대비하여 최저임금제만의 고유한 특징은 노사 당사자의 자율적 결정이 아니라 국가에 의해 전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임금 최저선이 결정된다는 점이라고 보아야 한다.

신자유주의 이전의 자본주의 황금기에는 산별 단체협약이 임금 최저선 기능을 비교적 충실히 수행했다. 당시에는 법정 최저임금제의 필요성은 노조의 힘이 상대적으로 약했던 영미권 국가들에 국한되었다. 하지만 전 세계적으로 신자유주의에 의해 불안정노동이 확산되면서 고용과 소득의 탈동조화 현상이 심화된 상황에서, 게다가 노조 조직률이 신자유주의 이전과 비교하여 절반 이하로 떨어지고 단체협약의 효력 확장 조항도 제 구실을 못하게 된 상황에서는 협약임금제의 임금 최저선 기능은 무력화되고 저임금 노동에 대한 보호 기능은 주로 법정 최저임금제가 떠맡게 된다. 이런 사정으로 신자유주의를 거치면서 그 이전에는 없던 법정 최저임금제가 도입된 나라가 있다. 산별협약의 일반적 구속력 제도에 의해 임금 최저선을 결정하던 독일은 2015년부터 법정 최저임금제를 도입한다. 2008년의 경제 위기 이후 긴 침체기가 이어지자 국제노동기구ILO 학자들은 최저임금 인상을 임금 주도 성장의 주요 수단으로 제시했다(Stockhammer and Lavoie, 2012). 이러한 입장은 주요 국가의 정책에도 수용되어 미국과 유럽 여러 나라 정부는 최저임금 인상 흐름을 만들어 갔다. 마찬가지로 문재인 정부도 소득 주도 성장이라는 이름 아래 2018년도 최저임금을 16.4% 인상했고 최저임금 인상을 감당하지 못할 영세기업에 대해서는 인상률만큼 임금 보조금을 지급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최저임금제가 과연 앞으로도 저임금 노동을 없애고 임금격차를 줄이는 역할을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 질문은 세 가지 차원에 걸쳐 있다.

첫째, 플랫폼 노동이 폭발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오늘날에도 최저 시급제는 여전히 임금 최저선의 기능을 가질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고, 둘째, 최저임금제와 노동자의 협상력의 상관관계, 또한 이 문제와 연동된 질문으로서 최저임금이 인상되면 다른 조건과 무관하게 평균 임금 인상 효과가 생겨나는가라는 질문이며, 셋째, 최저임금 인상과 GDP 대비 노동소득분배율의 상관관계에 대한 질문이다. 이러한 문제들을 다루면서 이 글은 일자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임금 최저선을 보장해 주는 최저임금제와 모든 사람에게 ‘소득 최저선income floor’을 보장하는 기본소득의 효과를 상호 비교할 것이다.

1. 최저시급제와 플랫폼 노동

산업자본주의는 생산과 재생산, 노동시간과 여가시간의 명확한 분리를 전제로 했다. 최저시급제는 산업자본주의의 전일제 고용에 알맞다. 최저시급제는 개별적인 노동이 공장노동으로 균질화되어 노동시간의 양적 크기로 계량될 수 있던 산업자본주의 시대의 산물이다. 계절과 기후에 따라 가변성을 가지는 ‘농경적 시간agrarian time’과 달리 ‘산업적 시간industrial time’은 균질적인 양적 단위로 분할할 수 있다. 최저시급제가 저임금 보호제도로 기능할 수 있으려면 경제의 시간 개념이 ‘산업적 시간’으로 이루어져 있어야 한다. 반면에 노동과 활동의 구분이 불분명해지고 양적 단위로 나눌 수 없는 ‘제3의 시간tertiary time’에 의해 경제활동이 진행되면 최저시급제가 임금 최저선으로 기능하기 어렵다(Standing, 1999: 3∼9; 2013: 5; 2017: 160, 189). 여기에서 굳이 노동시간 척도의 미래에 대해 더 깊이 다룰 필요는 없다. 오히려 논의의 폭을 좁혀 오늘날 폭발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플랫폼 노동에 대해 최저시급제의 보호 기능은 대단히 제한적이라는 점만을 살펴보자.

플랫폼 노동은 ‘주문형 앱 노동on-demand work via app’과 ‘크라우드 노동crowdwork’의 두 형태로 구분된다. 주문형 앱 노동이란 서비스 요청자와 제공자의 연결은 온라인 플랫폼에서 이루어지지만 실제 서비스의 제공은 오프라인에서 대면 관계로 이루어지는 형태다. 주문형 앱 노동에서는 노동시간 못지않게 대기시간이 길지만, 대기시간에 대해서는 최저시급제가 적용되지 않는다. 대기시간까지 노동시간으로 보지 않는다면 최저시급을 올려도 기대한 만큼 노동보호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다(Huws, 2018). 그런데 대기시간에 대해서도 최저시급제를 적용한다는 것은 대기시간에 대해 일단 임금을 지급한다는 것이고 누군가가 이를 부담해야 한다는 뜻이다. 즉 주문형 앱 노동에 전형적인3 각 관계인 플랫폼 기업, 서비스 요청자, 제공자의 관계에서 플랫폼 기업과 서비스 제공자의 관계를 사용-종속 관계로 정형화해야만 대기시간에 대해서도 임금을 지급할 수 있다. 법률적으로 우버 택시 운전자는 우버의 피고용자로 보고 우버는 운전자들에게 대기시간에 대해서도 최저임금을 지불해야 하고 결과적으로 우버 서비스요금은 올라갈 것이다. 결국 이와 같은 법률적인 정비는 우버나 배달앱처럼 서비스 중개를 하는 ‘린 플랫폼lean platform’의 수익을 없앨 것이고 경제적으로는 금지하는 효과를 낳을 것이다. 사용-종속 관계의 정형화는 린 플랫폼 기업의 비즈니스 모델인 불안정노동의 동원을 통한 지대 수익을 불가능하게 만들 것이므로 차라리 폐업을 택할 가능성이 높다.

주문형 앱 노동의 경우에는 적어도 서비스의 제공은 대면 관계를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사용-종속 관계의 확대가 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대기시간까지 포함하는 최저시급제를 적용할 여지는 적어도 논리적으로는 남아 있다. 하지만 온라인 플랫폼에서 특정 업무가 공시된 후 전 지구적 차원에서 불특정 다수가 참여하여 작업한 양만큼 보상을 받는 크라우드 노동에 대해서는 명확한 사용-종속 관계를 따지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크라우드 노동자가 제공하는 서비스를 노동시간 단위로 계측하는 일도 쉽지 않다. 오늘날 크라우드 노동은 저임금의 다른 이름이다. 아마존 미케니컬 터크Amazon Mechenical Turk가 제공하는 업무의 90%는 시간당 임금으로 계산하면 2달러 이하의 저임금 노동이지만, 전 지구적 범위에서 노동이 중개되기 때문에 국민국가의 노동법이나 사회보장법에 의하여 보호받지 못하고 최저시급제를 적용할 수도 없다. 크라우드 노동에 대한 보호 문제가 공동 결정권과 정보권을 중심으로 논의되는 실정은 이러한 사정을 반영한다(Leist et. al., 2017: 67∼69).

*문재인 정부의 최저임금 인상 정책의 명암에 대해서는 『시대』 2018년 3월호(제56호)에 실린 조혜경의 글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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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에 불가능한 것을 요구한다는 것은

‘68년 혁명’ 당시에 나왔던 유명한 슬로건 가운데 하나는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라!”다. 물론 “리얼리스트가 되라!”라는 슬로건과 함께이긴 했지만, 이 슬로건은 68 혁명의 유토피아적 성격을 상징하는 어떤 것이 되었다. 그리고 신자유주의의 “대안은 없다!”라는 주문 속에 ‘혁명성’이 거세된 좌파의 소심함을 꾸짖는 목소리가 되었다.

유토피아적 기운이 가득했던 시절에서 꽤 긴 시간을 지나온 오늘날 우리가 요구할 수 있는 불가능한 것은 무엇인가? 혹은 우리가 말하는 변화는 어디까지인가?

과거의 사회주의/공산주의가 인간의 해방을 ‘생산력의 발전’에 건 도박이었다면, 아마 지금이야말로 해방을 이룰 확률이 가장 높은 시기일지 모른다. 생산력의 발전이 단순히 물질적 풍요만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필요 시간인 노동시간을 줄이고 자유 시간을 확대할 수 있을 때 해방이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좁은 의미의 경제적 변화가 이를 가져오지 않는다는 것도 분명하며, 이런 점에서 노동운동의 역사는 노동시간 단축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1960년대부터 새로운 국면을 연 여성운동과 반인종주의운동은 경제적 해방이 그 자체로 인간의 해방을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것을 매우 역설적인 방식으로 드러냈다. 민주주의와 해방을 요구한다고 하는 신좌파운동, 노동운동 내에서 기성 질서의 차별이 마찬가지로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폭로하는 과정이 있었다. 이는 여성과 특정 인간 집단을 차별하고 억압하는 또 다른 구조와 문화가 존재하며 거기에 맞는 또 다른 방식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또 다른 변화의 방향으로,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바꾸는 것이 있다. 이는 자유란 ‘필연성에 대한 인식’이라는 헤겔적인 의미에서만 해방적일 수 있는데, 왜냐하면 근대의 해방이라는 프로젝트 가운데 하나에는 ‘자연의 정복’을 통해 인간의 물질적, 자연적 제약을 극복한다는 방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프로젝트를 통한 자연의 정복이 인간적 삶을 발밑에서 허물고 있다는 자각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재인식을 요청했던 것이다.

그런데 위에서 말한 것은 논리적인 것에 불과하다. 그 어느 때보다 경제적 해방을 지향할 수 있는 오늘날, 사회 양극화는 더욱 심하고, 바로 그 때문인지 조금이라도 물질적 향상을 이룰 수 있다면 거기서 위안을 찾을 것만 같은 상황이다. 여성해방과 인종해방 같은 주제는 보편적인 것으로 고양되기는커녕 특정 집단의 요구로 폄훼되고 있고, 이에 따라 사회적 분할을 자극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재인식은 발화자의 현실적 위치에 따라 너무나 넓은 스펙트럼에 걸쳐 있으며, 이는 행동을 가로막는 것으로 기능하고 있다.

그렇다면 해방이라는 유토피아적 프로젝트는 더 이상 불가능하며,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는 것도 의미가 없는 일인가? 물론 포스트 공산주의 시대, 신자유주의의 ‘대안은 없다’라는 시절을 거쳐 온 우리에게는 ‘최소 원칙’이라는 게 있다. 거칠게 요약하면, 개인의 권리, 생태적 지속 가능성, 차별의 부재 등이다. 말 자체로는 상식적이다. 하지만 하나하나 따져보면 불가능한 일이다. 최소한의 사회경제적 보장이 없는 권리는 추상적 문구이며, 산업주의를 뒤집는 실질적 조치가 없는 생태적 지속 가능성은 헛된 구호이며, 무조건적 평등과 반권위주의가 관철되지 않고서는 차별의 철폐가 가능하지 않다.

게다가 각각의 요구를 실현하기 위한 조건이 마련된다는 것 자체가 그 조건들 사이의 충돌을 수반할지도 모르는 일이며, 그 조건들을 조화시킨다는 것 자체가 진정으로 불가능한 요구일지 모른다. 이를 가능케 하는 거의 유일한 근대적 요구는 평등-자유égaliberté일 것이다. 평등-자유는 개인과 모든 사물 사이의 새로운 관계를 수립하자는 요청인데, 이때 각 개인들은 존 던John Donne이 노래했던 다음을 떠올려야 할 것이다.

“어느 누구의 죽음이라도 나를 작아지게 하나니, 그것은 내가 인류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냐고 묻지 마라./ 종은 바로 그대를 위하여 울리는 것이므로.”

 

편집위원회를 대신하여
안효상

 

이 글은 『시대』 2018년 06월호 통권59호에 실린 ‘책 머리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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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적 기본소득: 좌파의 주장인가 우파의 주장인가?*

다니엘 라벤토스Daniel Raventós, 줄리 와크Julie Wark / 번역 박선미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사무국장

[다니엘 라벤토스 / 사진-정치경제연구소 대안]

* 이 글은 『카운터펀치 CounterPunch』의 웹사이트에 2018년 4월 6일 자로 기고된 “Universal Basic Income: Left or Right?”을 번역한 것이다. https://www.counterpunch.org/2018/04/06/universal-basic-income-left-or-right/. 필자들은 2018년에 기본소득을 옹호하며 낸 책 “Against Charity(CounterPunch, 2018)”의 공저자다.

보편적 기본소득, 즉 모든 사람에게 정기적으로 조건 없이 지급하는 현금이 사회계, 정계, 학계에서, 그리고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 점점 더 토론거리가 되고 있다. 오른쪽에서도 왼쪽에서도 기본소득을 옹호하고 있다. 그런데 기본소득을 정치적 스펙트럼의 양 끝에서 밀고 있다면, 그 비밀은 무엇일까? 아주 놀라울 정도로 설득력이 있어서 정치적 양 극단 사이의 모든 차이를 없앤 것일까? 그럴 리는 없다. 기본소득이 그렇게 서로 다른 정치적 입장에게서 환호를 받는다는 사실은 진지한 논쟁을 애매하게 만들고 많은 사람을 완전히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좌파 측을 보자면, 자신은 안 속는다고 말하는 많은 사람이 기본소득 완전 반대라는 자동 반응을 보인다. 기본소득을 그저 우파의 속임수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를 들면, 크리스 헤지스Chris Hedges는 「과두제 지배층의 ‘기본소득 보장’ 신용 사기The Oligarchs’ ‘Guaranteed Basic Income’ Scam」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과두제 지배층은 구조 변화를 제안하지 않는다. 기업과 시장이 규제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노동조합을 지지하지 않는다. 개발도상국에서 빚에 몰려 강제로 일해야 하는 노동자나 미국의 창고와 배송 센터에서 일하는 노동자와 배달 차량을 운전하는 노동자에게 생활임금을 지급하지 않으려 한다. 무상 대학 교육, 정부의 보편적 의료나 적절한 연금 등을 수립하는 데 관심이 없다. 그렇기는커녕, 최저 생존 임금을 버는, 마음대로 고용되고 해고될 수 있는 절망적 노동자들을 계속해서 착취하는 메커니즘을 추구한다. 기본소득 보장을 요청하는 것은 칼 맑스와 안토니오 그람시가 이해한 바의 고전적 사례다. 즉, 자본가들은 잉여의 자본과 노동이 있으면 그 잉여분을 빨아들이기 위해 사회의 관습을 변경하는 대중문화와 이념을 이용하는데, 지금의 경우에는 신자유주의를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Against Charity(CounterPunch, 2018)”

그의 말이 딱 맞다. 그러나 과두제 지배층의 사악한 방법들을 밝혀낸다고 해서 조건 없는 보편적 기본소득을 지지하는 좌파의 주장들을 무너뜨릴 수 있는 것은 전혀 아닌 것 같다. 이제까지 봤을 때, 보편적 기본소득이 모두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 즉 물질적 생존권을 보편적으로 보장하는 방법으로 제기되는 유일한 정책이라는 주장 말이다. 게다가 기본소득은 보편적 만병통치약은 아니지만 과두제 지배층에 맞선 투쟁에서 사회 취약층의 힘을 강력하게 만드는 한 가지 방법이다.

존경받는 맑스주의 경제학자 마이클 로버츠Michael Roberts가 최근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다른 견해를 살펴보자. 논지를 모두 다 담도록 좀 길게 인용할 것이다.

그런데 로봇에게 일자리를 빼앗기게 되면 뭘 해야 할까? 일부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은 “로봇세”를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걸로 할 수 있는 건 자동화 속도를 늦추는 게 전부다. 고역을 줄이는 진보적 변화는 결코 아닌 것이다. 보편적 기본소득UBI이라는 아이디어가 경제학자들을 계속 끌어당기고 있는데, 좌파와 주류 모두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나는 이전에 보편적 기본소득의 장점과 단점을 논의했다. 보편적 기본소득은 무상의 의료와 교육, 괜찮은 수준의 연금 등을 제공하던 “복지국가”를 기본소득으로 대체한다는 식으로 많은 신자유주의 경제 전략가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그리고 보편적 기본소득은 노동하는 사람들의 임금을 낮추기 위해 제안되고 있다. 괜찮은 수준의 기본소득은 너무 비용이 많이 들어서 자본주의가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보편적 기본소득이 설령 투쟁하는 노동자들에 의해 쟁취된다고 해도, 여전히 누가 로봇과 생산수단 일반을 소유하느냐의 문제는 해결되지 못할 것이다.
내가 보기에 더 흥미진진한 대안은 보편적 기본서비스라는 아이디어다. 사용 시점에 무료인 공공 재화와 서비스라고 일컬어지는 것 말이다. 극도로 풍요로운 사회는 정의상 우리의 욕구가 고역과 착취 없이 충족되는 곳, 즉 사회주의사회다. 그러나 그런 사회로의 이행은 사회적 필요노동을 교육, 의료, 주거, 교통 같은 기본적인 사회적 욕구와 기본적 식품 및 설비의 생산에 돌리는 것에서 출발할 수 있다.

로버츠의 글은 기본소득 논쟁의 몇몇 주요 측면의 핵심에 이르는 훌륭한 출발점을 제공한다.

1) 기본소득은 여러 다양한 방법으로 재원을 마련할 수 있다. 좌파의 제안과 우파의 제안 사이의 차이는 누가 이득을 보고 누가 손해를 보는지를 물어보면 쉽게 확인된다. 좌파의 제안은 누진세 개혁을 필요로 하는데, 이 누진세 개혁은 가장 부유한 시민들에게서 사회의 나머지로의 중대한 재분배를 야기한다. 그래서 우리 책 『자선에 반대하여』의 마지막 장에서는 광범한 연구의 결과인 재원 마련 안을 상세히 밝혔고, 거기서 우리는 우리 판본의 기본소득으로는 가장 부유한 20%가 손해를 보고 나머지 80%는 이득을 본다는 점을 명시했다. 이것은 소득재분배를 의미하며, 지니계수로 볼 때 세계에서 가장 평등한 곳(약0.25)이 될 소득재분배다.

2) 복지국가 해체를 고려하는 기본소득은 모두 우파 술책이다. 밀턴 프리드먼Milton Friedman ― 사실, 그는 기본소득이 아니라 ‘음의 소득세NIT’를 지지했는데, 음의 소득세는 몇 가지 점에서는 기본소득과 비슷하지만 다른 점들에서는 기본소득과 많이 다르다 ― 과 더 최근의 우파 경제학자들이 표면상 기본소득 지지자라는 사실로 인해, 기본소득을 좌파적으로 비판하는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목욕물 버리려다 아기까지 버리고 있다. 프리드먼은 미국에서 공공 사회서비스 해체를 목표로 하고 있으면서 NIT를 미끼로 쓰고 싶었지만, 이런 점으로부터 모든 기본소득 지지자들이 복지를 없애고 싶어 한다고 결론 내리는 것은 너무 환원주의적이다. 천만의 말씀이다. 기본소득은 더 많은 사회서비스, 더 좋은 서비스를 수반할 수 있고 수반해야 한다. 1986년에 만들어져서 현재 모든 대륙에 가입네트워크들을 두고 있는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BIEN는 2016년 서울에서 열린 BIEN 총회에서 이 점을 분명히 밝히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금액과 빈도가 안정적인, 그리고 다른 사회서비스들과 어우러져서 물질적 빈곤을 제거하고 모든 개인의 사회적 문화적 참여가 가능하게 하는 정책 전략이 되는 충분히 높은 기본소득을 지지하는 것에 동의했다. 우리는 사회서비스들과 수급권을 기본소득으로 대체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혜택을 받지 못하거나 취약하거나 소득이 낮은 사람들의 상황을 악화시킨다면, 사회서비스들과 수급권을 대체하는 것에 반대한다.

3) 좌파 기본소득 지지자들은 기본소득이 노동자들의 협상력을 키울 것이라고도 생각한다. 다국적기업과 노동자가 계약을 맺을 때 양자가 법률상 “동등한 자”로 비교되는, 제도적으로 너무 비대칭적인 노동관계 상황에서, 기본소득이 더 취약한 측의 위상을 개선시키는지를 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노동자들이 최소한 빈곤선 이상의 소득을 의지할 소득으로 갖게 될 것이니 말이다.

4) 많은 페미니스트가 반복해서 지적하듯이, 매 맞는 여성의 다수가 자신을 학대하는 파트너 곁을 떠나지 못하는 것은 자신들이 독립적으로 생계비를 벌거나 생존할 수 없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학대당하는 여성들 가운데 꽤 높은 비율이 폭력적인 파트너에게 물질적으로 의존하고 있으며, 그래서 기본소득은 그런 여성들에게 긴급하게 필요한 물질적 독립성을 제공할 것이다.

5) 기본소득은 정치경제 영역의 조치이지만 “정치경제” 자체는 아니다. 좌파 기본소득 안과 우파 기본소득 안의 차이는 정치경제 영역에서 강력히 촉구하는 조치들의 수와 유형을 보면 명백해진다. 예를 들면, 나머지 인구에게 기본소득을 효과 있게 지급하기 위해 부유층에게 세금을 걷는 것은 과두제가 퍼뜨리는 조치들과 엄청나게 다를 것이다. 이 과두제는 미국의 세 인물 ― 제프 베조스Jeff Bezos, 빌 게이츠Bill Gates, 워런 버핏Warren Buffet ― 이 2017년에 그 나라 하위 50% 전체보다 더 많은 부를 소유한 것 같은 극단적 상황을 만들었다. 분명, 이 차이만으로도 기본소득은 오직 한 가지 종류만 있다는, 그것도 나쁜 종류만 있다는 관념을 떨쳐버리기 충분할 것이다.

6) 조건부 복지 급여들은 많은 행정비와 수급자 낙인을 필요로 하고 더 심각하게는 빈곤의 덫을 야기하고 영속화한다. 이런 조건부 급여들과는 달리, 조건 없는 기본소득은 그 본성상 관료제와 기관들의 감시를 제거함으로써 이런 위험들을 피하게 된다는 점이 분명하다. 더 중요하게는, 기본 개념들에서 엄청난 차이가 있다. 조건부 급여들은 문제 있는 사람들, “루저,” “실패자”를 위한 것이다. 일자리에서 쫓겨나거나 일을 구할 수 없는 사람, 사는 데 충분한 돈을 벌 수 없는 사람, 벌어들이는 소득, 능력, 인지 기술, 정신적 육체적 건강 등등과 관련해서 심각한 문제가 있는 사람 따위를 위한 것이다. 빈곤은 개인적 일탈로 평가된다. 규범은 일자리를 갖는 것, 꽤 괜찮은 생계비를 버는 것이다. 급증하는 노동빈곤층이 증명하듯, 일자리를 갖는 것이 빈곤에 대비하는 보증책이 아닌 오늘의 현실에서 이런 규범이 여전히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조건 없는 기본소득에 대한 좌파의 관념에서는, 자유, 정의, 평등, 인간 존엄 등은 내재하는 원리들inherent principles이며, 조건 없는 기본소득은 그저 시민 또는 등록된 주민이라는 사실만으로 모든 개인의 물질적 존재를 자동으로 보장하게 된다. 이 점이 확실해진다면, 다른 세부 사항들은 논의될 수 있을지 몰라도 제1의 목표는 모든 권리 가운데 가장 기본적인 권리인 생존권을 확립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들이 기본소득의 좌파 판본과 우파 판본의 차이를 분명하게 보여 준다. 물론, 그 밖의 점들도 있지만, 이 여섯 가지는 가장 중요한 차이점들이다. 밀턴 프리드먼, 마크 저커버그Mark Zuckerberg, 리처드 브랜슨Richard Branson이 지지하기 때문에 기본소득이 나쁜 아이디어라고 말하는 것은 (이라크 어린이 50만 명이 미국의 이라크 제재로 죽게 된 것에 대해 “그 희생은 치를 만한 가치가 있다”라고 말한) 매들린 올브라이트Madeleine Albright가 인권 증진을 주장하기 때문에 인권은 나쁘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수준의 주장이다.

그렇다면 기본소득은 혁명적인가? 그렇지 않다. 임금 인상, 노조 힘의 증가, 관대한 공공 의료·교육·주거 시스템을 가져다주지도 않고, 책임 있는 윤리적인 정부를 가져다주지도 않고, 또 그 밖의 것을 가져다주지도 않는다. 자본주의는 괜찮은 사회를 원하는 모든 이에게 중대한 문제이고, 기본소득은 고전적 의미에서 “개량적”이다. 그러나, 잠깐만, 바로 지금 자본주의 시스템을 확실히 뒤집을 좋은 아이디어를 가진 사람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