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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의 선택이다

앙드레 지드가 자신의 유일한 ‘소설’이라고 한 『위폐범들』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제도와 인습에 대한 반항뿐만 아니라 거짓된 세계 속에서 “진정한 삶과 의미”를 찾을 가능성 혹은 이를 위한 분투를 경험하는 일이 될 것이다.

과거에 반항해야 할 혹은 전복해야 할 제도와 인습은 좌파에게 꽤나 명료해 보였다. 체제로서의 자본주의라든가 “자본주의 최고의 단계로서의 제국주의” 혹은 “독점자본의 정치적 지배의 테러적인 형태”인 파시즘이거나 이것도 아니면 “부르주아지 전체의 공동 업무를 관장하는 집행위원회”로서의 국가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1989∼91년 이후 이런 현대의 신화는 종말을 고했다. 물론 그 신화를 구성했던 신화소神話素는 죽지 않고 살아 있는데, 이는 “맑스주의를 낳았던 상황을 넘어서지 않는 한 맑스주의는 우리 시대의 철학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라고 했던 사르트르의 말과 비슷한 맥락에서 그러할 뿐이다.

계속해서 좌파라는 말을 사용하자면, 좌파에게 더욱 곤혹스러운 것은 역사의 담지자 혹은 혁명의 주체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혁명의 주체라고 생각했던 “노동자계급”이 더 이상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여전히 노동자가 의미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사회적으로 그만큼의 중요성만 있는 사회학적 범주일 뿐이다. 그런데 그런 의미의 노동자마저 사라져갈 운명의 문턱에 서 있는 지금, 자칫하면 신화는 그 비극성마저 잃어버리고 희극이 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진정한 삶과 의미를 찾는 일이 세계와 분리될 수 없는 일이라 할 때 전복의 대상을 상실한 것은 삶과 의미를 구성할 틀을 상실했다는 것과 같은 일이 된다는 것이다. 상황이 이러한 데도 계속해서 하던 일을 하는 것은 제도와 인습을 전복하는 일이 아니라 인습의 포로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인습의 포로가 된 것은 한편으로 생존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과거의 신화와 정신적 사랑을 계속하기 때문이다. 육체적 패배 속에서도 지속되는 정신적 사랑.

육체적 패배와 정신적 사랑의 위태로운 동거를 끝내기 위해서는 사건의 경험 속에서 삶과 의미를 재발견하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물론 사건은 저절로 경험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건을 경험하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는 사건을 구성하고 사건 속으로 돌진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어떤 정향이 필요하다. 이 정향의 설정은 결단의 다른 말이기도 할 텐데, 이 결단이 불장난이나 가망 없는 도박으로 끝나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세계를 제대로 바라볼 용기를 가져야 할 것이다.

 

앙드레 지드는 열세 살의 어린 나이에, 정신적 고통을 겪고 있던 외사촌누나를 위해 평생을 바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이는 흔히 말하는 신비주의적 사랑이었고, 이는 결혼한 이후에도 신비주의적 사랑의 행태, 즉 육체적 관계나 쾌락이 없는 정신적 사랑으로 지속되었다. 이런 정신적 사랑은 북아프리카 여행을 통해 경험한 대지와 동성애의 발견이라는 대립적 상관물과 병치된다. 그리고 이러한 병치는 그의 정신적 위기의 지속적인 근거가 된다. 하지만 청년 마르크 알레그레와의 사랑, 이를 알게 된 아내 마들렌이 지드가 마들렌에게 평생 보냈던 편지를 불태워 버린 사건 등을 겪으면서 그는 1926년에 발표한 자서전을 통해 동성애 경험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아내가 편지를 불태운 사건은 앙드레 지드에게 해방이자 부채 청산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청산해야 할 부채는 무엇이고, 맞이할 해방은 무엇일까?

사르트르를 다시 떠올리면 우리의 과거를 낳았던 상황을 넘어서지 않는다면 우리는 여전히 과거의 철학으로 남아 있게 될 것이다. 물론 그 몫은 여전히 남아 있겠지만 그것은 과거의 상황을 연장시키는 것, 새로운 상황을 지연시키는 일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사르트르의 말처럼 “우리는 우리의 선택”이라고 한다면 어떤 선택을 하는가가 삶과 의미를 찾는 문턱을 넘는 일이 될 것이다. 비록 지옥의 문 앞에 서 있다 하더라도 말이다.

편집위원회를 대신하여
안효상

이 글은 『시대』 2019년 04월호 통권67호에 실린 ‘책 머리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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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 왕자와 천장의 눈

임영근 정치경제연구소 ‘대안’ 상임연구원

종교적 신념을 가진 사람들은 종교에는 도덕성을 떠받치는 강력한 힘이 작용한다고 믿는 듯하다. 이런 생각을 다음과 같은 시나리오에서 엿볼 수 있다. 커다란 방에 이 세상에서 딱 하나밖에 없는 예술품이 설치되어 있다고 상상해 보자.

방 중앙의 작은 테이블 위에 아름답고 멋지고 난해한 예술 작품이 놓여 있다. 다채로운 색깔의 온갖 손잡이와 황금빛 지렛대, 반짝이는 크리스털, 은빛의 공, 귀여운 종, 스파이크가 박힌 바퀴, 붉은 바큇살, 부서지기 쉬운 나뭇가지, 거미집처럼 얽힌 철사 등이 상상 속에서나 나올 것 같은 사이키델릭한 형태로 배열되어있어서 정말로 화려해 보인다. 그런데 이 작품은 손상되기 쉬운데다 유일한 것이기도 하다. 이 작품을 만든 작가는 이미 고인이 되었다. (필 주커먼, 『종교 없는 삶』, 43~4쪽.)

이제 이 방에 아홉 살짜리 어린이를 들여보내야 한다. 부서지기 쉬운 이 작품에 손 대지 않고 잘 보고 나올 수 있도록 미리 당부하고자 한다면 어떻게 말해야 할까? 우선 처음 떠올릴 수 있는 방법은 처벌과 보상으로 아이의 마음을 다잡는 방법이다. “방에는 너 말고 아무도 없을 거야. 하지만 예술 작품을 건드리면 안 돼. 아주 섬세하고 부서지기 쉬운 데다 하나뿐인 작품이거든. 또한 천장에 작은 구멍이 있어서, 이 구멍으로 교장 선생님이 널 살펴볼 거야. 선생님의 눈이 내내 널 지켜볼 거야. 만약에 네가 작품에 손을 대면, 선생님이 그걸 보고 단단히 화가 날거야. 그래서 네가 방에서 나오면 큰 벌을 내릴 거야. 하지만 네가 작품을 건드리지 않고 방에서 나오면 네게 멋진 상을 주실 거야.”

천장에 난 작은 구멍으로 지켜보는 “교장 선생님”에서 하느님을 쉽게 떠올릴 것이다. 하느님이 늘 지켜보는 가운데 벌을 피하고 상을 받기 위해 우리가 도덕적으로 행동한다는 주장을 뒷받침해주기 위해 지어낸 짧은 이야기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이런 시나리오를 별로 탐탁지 않게 여길 듯하다. 사실, 필 주커먼이 여러 무신론자를 인터뷰하면서 들은 이야기 가운데 63세의 소냐라는 여성이 들려준 것이라고 한다.

소냐는 똑같은 상황에서 방으로 들어갈 어린이에게 이렇게 당부할 수 있다고도 한다. 좀 더 세련되고 공감을 이끌어내는 방법이다. “방에는 너 말고 아무도 없을 거야. 하지만 예술 작품을 건드리면 안돼. 아주 섬세하고 부서지기 쉬운 데다 하나뿐이 작품이거든. 손을 대면 사고로 부서지거나 얼룩이 묻을 수도 있어. 작품이 달라질 수도 있지. 작품이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지면 다른 아이들은 본래의 작품을 못 보게 될 수도 있어. 물론 네가 작품에 손을 대서 작품이 사고로 망가져도, 우린 널 벌하지는 않겠지만 굉장히 슬플 거야. 그래서 네가 작품을 건드리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라.”

“천장의 구멍”을 통해 지켜보는 신 없이도 얼마든지 도덕적 행동이 가능하다는 무신론자의 태도를 보여 준다. 예술 작품의 가치에 대해 이해하기 때문에 처벌이나 보상 없이도 도덕적 행동이 가능하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시나리오다. 무신론자의 입장에서는 이런 해피엔딩을 기대하겠지만, 모든 인류 문화에 오랫동안 갖가지 종교가 번성하는 것을 보면 그저 작은 소망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개구리 왕자」를 읽으며 우리 마음에 일어나는 일

종교 현상이 다양한 만큼이나 종교의 기원을 설명하는 이론 또한 다양하다. 곤혹스러운 자연현상이나 사물의 기원을 설명하기 위해서, 아니면 악과 고통이 존재하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 종교가 필요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또는 결국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서 필연적으로 종교적 설명이 필요하다거나, 불안을 잠재우며 안락한 세계를 만들기 위해 종교가 생겨났다는 설명도 있다. 또 사회질서를 세우거나 도덕성을 뒷받침하기 위해 종교가 생겨났다는 견해도 있다. 그런게 아니라 그저 이성이 잠들어 있어서 그런 미신에 매혹되었을 뿐이라는 해석도 있다. 이런 설명들이 모두 일리가 있고 종교의 다양한 효과를 잘 설명해 주는 듯하다. 하지만 이런 설명은 근본적인 뭔가를 놓치고 있다는 느낌을 떨치기 어려운 것 또한 사실이다.

종교의 뿌리가 깊은 만큼, 종교적 심성은 우리 마음에도 깊이 뿌리 박혀 있는 어떤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종교를 쉽게 받아들이고 전파하게 하는 우리 마음의 작동 방식에서 종교의 기원을 찾는 학자가 있어 읽어 보았다. 이번 글은 파스칼 보이어가 쓴 『종교, 설명하기』에 나온 내용을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심리학자이자 인류학자인 파스칼 보이어는 카메룬에서 인류학 현지 조사를 하면서 팡족의 전통 종교를 연구한 결과를 이 책에 담았다.

우선, 널리 알려진 민담 가운데 「개구리 왕자」를 떠올려 보자. 이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여자아이들이 개구리와 공주가 뽀뽀하는 장면에서 “아이, 징그러워!” 하며 얼굴을 찌푸리던 기억이 난다. 그때 나는 ‘개구리가 왕자였다니, 참 신기한 이야기네.’ 하고 이야기에 끌렸던 것 같다. 그런데 나나 여자아이들이나 이 이야기를 따라가며 듣는데 아무 어려움이 없었다. 개구리가 공주가 연못에 빠뜨린 황금 공을 찾아줄 테니 결혼해 달라고 말하는 순간부터 더 이상 개구리는 개구리가 아니라 사람처럼 여겨지게 된다. 그 뒤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행동을 해도 전혀 거부감 없이 스토리를 따라가게 된다. 개구리가 어떻게 말을 하고 결혼해 달라고 하고 같이 음식을 먹게 해 달라고 하며 같은 침대에서 잘 수 있게 해 달라고 할 수 있는가 하는 생각조차 들지 않고 스토리를 따라가는 것이다.

더 이상 개구리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의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 해도 개구리로서의 특성을 잃어버리는 것은 아니다. 폴짝폴짝 뛴다든지 피부가 끈적끈적 하다든지 하는 특성을 우리는 잊어버리지 않는다. 그러니 개구리가 뽀뽀하는 장면에서 “아이, 징그러워!” 하는 반응을 보인 것도 당연한 일이다. 여담이지만, 다시 읽어본 그림 형제 판본에서는 키스하는 장면이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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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가와 휴식

박기순 충북대 철학과 교수

1. 필요한 일과 필요하지 않은 일

플라톤이 남긴 저작들은 대부분 마치 희곡처럼 대화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그것들은 “대화편”이라 불리기도 한다. 그렇다면 그는 왜 그렇게 글을 썼을까? 답은 아주 간단하다. 그에게 대화는 철학하는 방식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플라톤의 철학적 방법으로 알려진 ‘변증술dialectics’이 ‘대화하다dialegesthai’ 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것이라는 사실에서도 잘 나타난다. 변증술은 말logos을 할 줄 아는 두 사람이 서로 주장하고 반박하고, 그리고 의견을 수정해 가면서 중요한 질문, 예를 들면 정의란 무엇인지 혹은 사랑은 무엇인지 등의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방법을 일컫는다. 플라톤의 각 대화편에는 고유한 대화 주제가 있고 그 주제를 논하는 등장인물들이 있다. 플라톤은 자신의 스승인 소크라테스를 항상 주인공으로, 그리고 그의 적대자들이었던 소피스트들이나 깨우침을 받아야 할 젊은이들을 대화 상대자로 등장시켰다. 대화편의 제목은 보통 대화 주제나 대화 상대자를 따라 지었다.

『파이드로스』는 이 대화편 가운데 하나다. 파이드로스라는 대화 상대자의 이름을 제목으로 하는 이 대화편은 사랑과 연설술을 논의 주제로 삼고 있다. 이렇게 하나의 대화편이 두 개의 주제를 가지고 있는 것은 다소 이례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이 글에서 논의하고자 하는 것은 정작 이 주제들과는 상관없는 것이다. 우리의 관심은 오히려 이 두 주제에 관한 대화들 사이에 마치 간막극처럼 끼워져 있는 매미 신화와 관련이 있다.

소크라테스는 어떤 의미에서는 사랑을 한다는 것이 곧 철학함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파이드로스에게 설명한 후, 어떻게 하는 것이 말을 잘하고 글을 잘 쓰는 것인지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한다.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대화의 도입부에서 파이드로스가 뤼시아스라는 사람으로부터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소크라테스를 만나 뤼시아스가 사랑에 대해 아주 아름다운 말을 했다고 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을 잘했다던 뤼시아스의 이야기는 결국 소크라테스에 의해 반박되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파이드로스에게 도대체 말을 잘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한번 검토해보자는 의미에서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제안에 파이드로스는 이렇게 답한다. “필요가 있느냐고 물으시는 거예요? 막말로 그런 즐거움을 위해서가 아니라면 누군들 뭐 하러 살겠어요?”(플라톤,『 파이드로스』, 258e, 김주일 옮김, 이제이북스, 103쪽.) 소크라테스는 필요한가를 물었고, 파이드로스는 긍정으로 답한다. 그런데 여기서 합의되고 있는 필요성, 즉 대화의 필요성은 어떤 종류의 필요성일까? 살기 위해서 우리가 먹고 마시고 잠자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할 때의 그 필요성일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무엇보다도 두 사람이 그 대화를 하지 않는다고 해도 죽는 일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생존을 위해서 꼭 해야만 하는 그런 일은 아닌 것이다. 이 대화의 필요성은 그러한 필요를 넘어서는 것이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사실은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다. 필요 이상의 것이고, 혹은 생존의 관점에서 보면 사치스러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왜 소크라테스와 파이드로스에게는 필요한 일인가? 심지어 파이드로스는 그것을 하지 않는다면 살 가치도 없다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삶에 필요한 것인가? 당연히 그것은 생존으로서의 삶에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다른 의미의 삶, 즉 생명의 단순한 보존으로서의 삶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삶,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인간에게만 허락되는 좀 더 고결한 삶에 필요한 일일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파이드로스가 말하고 있듯이 그러한 일은 우리에게 즐거움을 준다. 단순히 먹고 살기 위해서 하는 일은 우리에게 즐거움을 줄 수가 없다.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필요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어떤 일을 할 때, 우리는 어떤 필연성에 얽매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한에서 우리는 예속되어 있고 자유롭지 못하다. 또한 그러한 필연성에 얽매 있을 때, 우리는 타인에 대해 폭력을 행사하게 된다. 남의 것을 빼앗고 남의 나라를 침범하는 등의 일은 모두 생존의 필연성에 묶여 있을 때 사람들이 하는 것들이다.

반면 우리가 꼭 해야만 하는 일은 아니지만 좀 더 고귀하고 아름다운 삶을 위해서 하는 일은 우리가 자유롭게 선택해서 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러한 한에서 그것은 우리에게 즐거움을 준다. 생각을 하고, 그 생각을 타인과 나누면서 대화를 하는 일, 이것이 그러한 일에 속한다. 그래서 파이드로스는 삶은 오직 이것을 할 때만 의미와 가치가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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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 산업혁명론과 디지털 전환

장흥배 정치경제연구소 ‘대안’ 연구원

1. 문제의 제기

‘4차 산업혁명’이라는 용어가 널리 쓰이게 된 계기는 클라우스 슈밥Klaus Schwab 세계경제포럼 회장이 2016년 1월 다보스포럼에서 정보통신기술ICT의 발전으로 인한 사회의 변화상을 이 용어로 기술하면서부터다. 이 용어는 그 이후 정부, 기업, 학계, 언론 등이 널리 사용하면서 대중적으로 자리 잡았다. 한국에서는 2016년 인공지능AI 바둑 프로그램 알파고가 이세돌과 대결해 승리하는 사건이 이 용어를 받아들이는 큰 계기가 됐다. 2017년 9월에는 대통령 직속 4차산업혁명위원회가 출범했다.

반면, 이 용어가 현재와 임박한 미래의 사회상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며, 특별히 생산성 지표에서 ‘산업혁명’에 준하는 변화가 진행 중이거나 임박했다는 증거가 없다는 반론도 끊이지 않는다. 이와 같은 반론은 주류 경제학계 내부에서 터져 나왔지만, 기왕의 수많은 정보화 담론이 지닌 친자본 반노동의 정치적 효과를 비판해 왔던 좌파 세력도 4차 산업혁명론에 대한 냉소적 기류에 일조해 왔다. 기술 변화가 노동시장 유연화, 산업 구조조정 등 노동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을 기술 변화의 불가피성으로 설명하며 이에 대한 적응을 개인 책임으로 돌리는 서사로 그동안 정보화 담론이 기능해 온 것은 어느 정도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한편, 기본소득운동 진영은 정보통신기술 발전이 신자유주의 불안정노동체제를 심화시키는 측면에 주목하면서 이를 과거의 복지국가 시스템이 더 이상 작동하기 어려운 근거의 하나로 강조하고자 했는데, 이들도 4차 산업혁명이라는 용어를 별다른 비판적 검토없이 수용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4차 산업혁명론이 제기된 과정과 그에 대한 찬반 입장들을 중심으로 논의를 정리해 보았다. 사회과학적 개념으로는 ‘4차 산업혁명’보다는 ‘디지털 전환’이 더 적합한 용어다. 그러나 용어와 개념에 집착하다 디지털 전환의 내용과 성격에 대한 분석, 새로운 좌파 대응 전략을 방기해서는 안 될 것이다. 디지털 전환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2. 4차 산업혁명론의 전개

1) 세계경제포럼의 4차 산업혁명론

슈밥의 4차 산업혁명론이 대중적으로 알려진 계기는 2016년 다보스포럼의 연설이었다. 슈밥의 4차 산업혁명론의 근거는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현재의 “전환이 3차 산업혁명의 연장이 아니라 그것과는 뚜렷이 구분되는 4차 혁명의 도래를 대표하는 세 가지 이유”는 전환의 속도, 규모, 시스템 충격이다. 변화는 전례 없이 “기하급수적”이며(속도), 그 파괴적 영향은 “모든” 산업에 걸쳐 있고(규모), 이 변화의 폭과 깊이가 생산, 관리, 거버넌스 시스템의 “완전한” 전환을 알린다는 것(시스템 충격)이다. 둘째, 4차 산업혁명은 “물리적, 디지털적, 생물학적 경계를 흐리는 융합”에 의해 촉진된다.

슈밥 역시 역대 산업혁명을 전통적인 방식으로 분류하고, 4차 산업혁명이 “3차 산업혁명의 기반 위에서” 구축된다고 본다. 따라서 그에게 “융합”은 4차를 3차와 구별 짓는 중요한 특징이다. 그리고 그 역시 역대 산업혁명의 핵심인 “생산성 혁신”을 거론한다. 교통과 통신비가 떨어지고 물류와 글로벌 공급 체인은 더 효율적이 되어 교역 비용이 감소하여 이것이 새로운 시장을 열고 경제성장을 견인할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에게 이 생산성 혁신은 “미래로in the future” 유보되어 있고, 이 미래의 시간적 원근은 제시되지 않으며 그저 이미 진행 중이거나 임박한 것으로 전제된다.(Klaus Schwab, 2016. 1. 14.)

슈밥의 다보스포럼 연설로부터 며칠 뒤 세계경제포럼 집행위원회위원이자 사회혁신팀장인 니콜라스 다비스는 「4차 산업혁명이란 무엇인가?」(Nicholas Davis, 2016. 1. 19)라는 글을 게재한다. 그러나 제목에서 기대하는 것과 달리 그의 4차 산업혁명 개념 정의는 슈밥 회장의 그것보다 더 빈약하다. 그는 4차 산업혁명을 “가상-현실 시스템cyberphysical systems(CPS)의 출현”으로 묘사한다. 4차 산업혁명은 “기술이 사회에, 심지어 인간의 몸에 내장되는 완전히 새로운 방식”을 대표하는데, 게놈 편집, 새로운 형태의 기계 지능, 혁명적 소재, 블록체인과 같은 암호화 기술이 4차 산업혁명을 대표하는 신기술들이다. 이것이 개념 정의의 전부이고, 나머지 논의들은 4차 산업혁명이 사회와 경제에 미치는 영향들로 채워져 있다.

CPS는 원료, 생산, 물류, 서비스, 제품 등 상품 생산 전체 과정을 내장형 시스템embedded system을 통해 네트워크화한 생산 시스템을 말한다. CPS는 2007년 8월 미국에서 대통령과학정책자문위원회 권고에 따라 주요 연구 분야로 지정됐고, 제조업 기술혁신 전략인 독일의 산업 4.0 전략에서는 스마트 공장 체계의 핵심적인 기술 동인이다(현대경제연구원,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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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이주노동자의 죽음

고영란

위험한 일에 내몰리는 현실

지난 12월 11일 새벽 태안화력발전소 9·10호기 컨베이어 벨트 사고로 인한 스물네 살 김용균 씨의 죽음은 원청과 하청, 간접고용 등으로 최소한의 인원만 일터에 투입하는 용역 회사 노동자의 현실을 그대로 드러내 주었다.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반지가 갖고 싶었던 김용균 씨에게 택배가 도착했지만, 반지의 주인공은 세상을 떠나고 그의 꿈과 낭만은 유품으로 남았다.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전국의 또 다른 ‘김용균’들이 컵라면과 팻말을 들고 연말에 추모 행사와 촛불행진을 하게 된다. 비정규직노동자들의 근무 환경에 대한 증언도 계속되면서, 전봇대나 옥상, 난간 등에서 혼자 일하는 인터넷 설치 기사, 여름철에 실내 온도 40도가 넘는 조리실에서 일하는 노동자 등은 ‘다치거나 아프면 대부분 자기 부담으로 치료해야 하는 현실’을 고발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일하지 않으려는 제조업, 건설업, 농축산업, 어업 분야 등에서 한국 경제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이주노동자의 현실은 어떨까?

한국에 처음 온 이주노동자들은 우선 한국어로 의사를 소통하는 것이 가장 답답하고 힘들다. 고용허가제로 입국하려면 한국어 능력 시험을 치르고 합격해야 하지만, 실제로 타국에 와서 부당한 대우를 받거나 몸이 아프거나 사고로 다쳤을 때 충분히 의사소통이 되지 못하면 어려움을 겪는다. 한국에 온 지 6개월 미만인 이주노동자들에게 특히 사고가 많이 발생하는데,‘ 언어’와‘ 일의 숙련도’ 부분에서 미숙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영세한 제조업체의 경우, 안전 교육이 체계화되어 있지도 않고, 낡은 기계와 장비를 교체하지 않은 채 무리하게 공장 가동을 하는 경우가 많다. 산업재해가 일어날 수 있는 상황임에도 사업주 쪽에서 위험에 대한 주의를 충분히 하지 않고 방치하다가 사고가 나기도 한다.

2017년 5월 경북 군위 등에서 축사 정화조를 청소하던 중국, 네팔, 태국 출신 노동자 네 명이 사망한 사건은 이런 현실을 그대로 드러내준다. 사업주들은 마스크 등 안전 장비를 지급하지 않았고, 분뇨 유해 가스 농도를 측정하지도 않았던 것으로 나타났다.

이주노동자의 산재 피해 상황을 조사한 한 자료(『2017 경기도 외국인 산업재해자 실태 조사』,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에 의하면, 산재를 당한 이주노동자들 중 산재보험에 따른 보상을 신청한 경우는 10%에 불과했다. 산재 신청을 하지 않은 경우가 52.9%에 해당하고,  이들 중에 산재 치료비를 본인이 부담한 경우는 36.4%에 해당했다. 산재를 당했음에도 산재보험을 신청하지 않은 이유는 “신청할 수 있는지 몰라서”(36.1%), “불법체류·불법고용이 드러날까 봐”(12.5%), “신청하지 않겠다고 사업주와 약속해서”(5.6%) 등으로 나타났다. 산재 피해 이주노동자들은 치료나 요양이 끝난 뒤에 계속 일하는 경우가 64.4%였고, 그중에서 70.9%는 사고가 났던 사업장으로 복귀했다. 산재 치료가 완벽하지 않은 상태에서 치료나 요양이 종결되고(45.7%), 사업장 이동이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대부분은 본래 일하던 사업장으로 돌아가서 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자료: 고용노동부·안전보건공단>

한편, 고용노동부에서 집계한 『2012~2017년 이주노동자 재해 현황』을 보면, 5년 동안 산재로 이주노동자 511명이 사망했다. 숫자상으로만 파악되는 이들의 죽음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통계에 나오지 않은 인원을 포함하면 그 수는 더 늘어날 것이다.

고영란
르포 작가, 프리랜서 편집자,『우린 잘 있어요, 마석』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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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롱 정책의 파산에 대한 고찰

– 진보적 신자유주의란 가능한가?

유승경 정치경제연구소 ‘대안’ 부소장

들어가며

프랑스에서 지난해 11월 17일부터 ‘노란 조끼 시위 le Mouvement des Gilets Jaunes’가 일어난 직접적인 계기는 마크롱 정부가 단행한 유류세 인상이다. 유류세 인상은 단순히 세수를 올리기 위한 조치가 아니라 화석연료 의존도를 줄이기 위한 친환경 정책의 일환이기도 했다. 프랑스는 2016년에 체결된 파리기후변화협약의 가입국으로서 이산화탄소 배출 감축 목표를 달성해야 한다. 그래서 마크롱 정부는 유류세 인상을 통해서 화석연료 사용을 줄이는 한편 그 재원을 전기차 보조금 등으로 활용할 계획이었다.

이 사안만을 놓고 보면, 프랑스 서민들의 거센 저항을 납득하기 어렵다. 화석연료 사용과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자는 것은 전 세계 환경 단체의 요구이자 대부분의 국가가 합의하고 있는 사안이다. 또한 마크롱 대통령은 2017년 5월 프랑스뿐만 아니라 유럽에서 포퓰리즘의 도전으로부터 자유주의를 구원할 지도자로서 기대를 한 몸에 받고 당선되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파리기후변화협약에서 탈퇴하여 포퓰리스트로 지목된 것과는 대조적이다.

마크롱은 결국 시위대에게 항복했다. 마크롱 정부는 지난 12월 초 문제가 된 유류세 인상을 철회했을 뿐만 아니라 2019년부터 최저임금을 월 100유로 인상하는 등 시위대의 요구 대부분을 수용했다. 이러한 사실은 노란 조끼 시위가 마크롱이 추진하고 있던 정책 전반에 대한 반대였음을 보여 준다.

이 글은 마크롱이 집권한 후 1년 반 동안 어떠한 구도에 따라 정책을 추진했는지를 검토해 봄으로써 프랑스의 노란 조끼 시위의 의미와 파장을 가늠해 보고자 한다.

마크롱 정부의 정치적 지향

마크롱의 정책 구상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가 대통령에 당선되는 과정을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프랑스의 정치체제에는 수많은 흐름이 존재하지만, 1958년부터 최근까지는 대체로 두 개의 정치 동맹이 각각 하나의 지배적인 정당으로 결집해 있었다. 프랑스고등사범학교École normale supérieure 교수인 필리프 아스크나지에 따르면, 자유주의자와 좌파는 사회당으로 결집해 있었고, 보수주의자들과 신자유주의자들은 공화당을 지지했다(Philippe Askenazy, The Contradictions of Macronism, Dissent, Winter 2018).

전통적인 두 정당은 세부적인 정책 차이에도 불구하고 대체적으로 자유주의적이고 민주적인 유럽 통합에 우호적이었다. 그런데 2000년대 들어와서 유럽 통합에 반대하는 국수주의적인 극우 국민전선Front National이 급부상하여 기존의 정치 구도를 위협하고 있으며, 좌파측에서도 신자유주의적 유럽연합에 반대하는 흐름이 독자적인 정치 세력을 형성했다. 필리프 아스크나지 교수는 마크롱이 지배적인 두 동맹 체제를 해체시키고 자유주의자와 신자유주의자들을 한데 묶어 새로운 정치 동맹을 구축했다고 평가한다.

여기서 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가 어떤 개념으로 사용되는지를 설명할 필요가 있다. 자유주의에 대한 정의와 구분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자유주의는 대체로 20세기로 넘어오면서, 국가의 역할을 최소화하는 자유방임적 혹은 고전적 자유주의Classical Liberalism에서 벗어나 자유의 신장에서 국가의 적극적 역할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전환된다. 자유주의의 내용 변화는 복지국가의 등장과 맥락을 같이하는데, 복지국가와 병존하는 자유주의는 미국에서는 근대적 자유주의Modern Liberalism로 불리기도 하며. 유럽적 맥락에서는 사회민주주의Social Democracy를 포괄한다. 이에 반해 신자유주의는 자유방임적인 고전적 자유주의로의 복귀를 주창하면서 복지국가에 반대하는 시장 자유주의 혹은 자유 지상주의Libertarianism를 의미한다.

프랑스에서는 ‘개혁하자’라는 뜻으로 “근대화하자moderniser”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마크롱으로 결집한 정치세력들은 근대성에 대한 비전은 상이하지만 모두 프랑스를 근대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유주의자들에게 있어서 근대성이란 대체로 소수자를 포함하여 모두가 동등한 권리를 갖는 것을 의미하는 반면, 신자유주의자들은 근대성을 프랑스를 디지털 혁명의 창업 국가로 만드는 것에서 찾는다.

마크롱은 이 두 흐름에 포함되는 다양한 집단으로부터, 예를 들어 성소수자 조직에서부터 첨단 산업의 기업가에 이르는 다양한 집단으로부터 지지를 받아서 집권에 성공했다. 그는 선거 기간 동안 여성의 권리를 보호할 것이며 성평등 혐오주의자와 싸워 소수자의 권리를 확대하겠다고 약속함으로써 사회적으로 진보적인 지식인과 자유주의자들의 지지를 이끌어 냈다. 또 다른 한편으로 전직 투자은행가로서의 경력을 살려 일관되게 친기업적 강령을 내세움으로써 신자유주의자의 지지를 받았다. 마크롱으로 결집된 정치세력들의 공통점이라면 소수자까지 포함하여 동등한 권리를 옹호하는 한편 개방적이고 다문화적인 프랑스를 지지하면서 유럽 통합에 우호적이라는 점이다.

이런 정치적 동맹에 힘입어, 마크롱은 유럽 통합과 이민에 반대하는 극우 민족주의자인 르 펜과 동성 결혼에 반대하는 보수 가톨릭 신자인 공화당의 프랑수와 피용를 패퇴시킬 수 있었고, 디지털 혁명에 부응하는 신자유주의적 시장 개혁을 내세워 신자유주의적 유럽연합에 반대하는 전통적인 좌파 후보인 장뤼크 멜랑숑을 따돌렸다. 물론 그의 승리는 놀라운 것이었지만 압도적이지는 않았다. 마크롱은 1차 선거에서 24%의 지지를 받았지만, 르 펜과 피용도 각각 21.4%와 20%의 지지를 받았다. 만약 중도파인 프랑수아 바이루가 마크롱을 지지하면서 사퇴하지 않았다면 마크롱은 대통령 결선투표에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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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스러운 것과 속된 것

임영근 정치경제연구소 ‘대안’ 상임연구원

저 아랫동네 누구네 집에서 상량식이 열린다고 했다. 초가집이 하나둘씩 신식 집으로 바뀌던 70년대 초의 일이다. 어린 나이에 상량식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그 말뜻을 이해할 수는 없었다. 새집이 번듯하게 세워진 것을 축하하며 잔치를 벌이는 자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아무튼 상량식이 뭔지는 몰라도 떡과 고기를 얻어먹을 수 있겠다는 기대에 부풀어 상량식이 열리는 곳으로 몰려갔다.

벌써 집 마당에는 아이들과 동네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그런데 번듯한 집은 보이지 않고 기둥 뼈대만 서 있었다. 수수깡으로 만든 집처럼 벽도 문도 없이 얼개뿐이었다. 집을 이제 막 짓기 시작한 것 같은데 중요한 행사로 여겨지는 것이 이해하기 어려웠다. 잔치 음식이 많이 나올 것 같지 않는 작은 불안감도 한편에 있었다.

왁자지껄한 가운데 어떤 아저씨가 높은 보 위에 앉아 있었다. 차림새로 보아 집 짓는 목수처럼 보였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하얀 광목천을 몸에 휘감고 있었다. 두 다리를 벌리고 보 위에 앉아 있더니 아주 조심스럽게 앞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가운데 쪽으로 오려는 것 같았다. 높이가 2미터를 넘는 곳이라 앉아 있기만 해도 아찔할 텐데 양손을 앞으로 짚으며 천천히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높은 보 위에서 움직이는 목수를 향해, 잘 버틴다, 무서워 떠는 거 아니냐, 하는 농담을 던지는 아저씨들도 있었던 것 같다.

그런 농담에도 그저 가볍게 웃어넘기며 목수는 침착하게 움직여 얼추 가운데에 이르렀다. 몸에 두른 광목을 풀어 보를 몇 번 휘감은 뒤 양 옆으로 늘어뜨렸다. 아래 있던 아저씨가 광목 끝을 잡아 양쪽에서 넓게 펼쳤다. 그런데 그때 보 위에 있는 목수는 큰 닭 한 마리를 잡고 있었다. 몸에 두른 광목 안에 닭을 넣고 왔는지 아니면 다른 사람이 건네준 것인지 기억나지는 않는다. 높은 곳에 있는 목수에게 닭을 건네주려면 또 한 사람이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 할 테니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내 기억에는 조금씩 움직이던 목수가 어느 순간 닭 한 마리를 한 손에 들고 다른 손에 칼을 든 장면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아마 그 다음에 무슨 제문 같은 것을 읽는 그런 순서가 진행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이날 상량식의 하이라이트는 희생 제의를 치르는 것으로 끝났다. 목수 혼자서 닭 모가지를 댕강 자르고, 붉은 피가 하얀 광목에 뿌려지고, 머리 잃은 닭이 피를 흩뿌리며 하얀 광목으로 날아가고.

성스러운 것과 속된 것

엘리아데의 『성과 속』을 읽으며 떠오른 기억이다. 미르체아 엘리아데Mircea Eliade(1907~1986)는 루마니아 출신의 종교신화학자인데 20세기 사상사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엘리아데가 보기에 인간은 태생적으로 종교적 인간이다. 그런 “종교적 인간에게 공간은 균질하지 않다.” 어떤 공간이든 성스러운 공간과 속된 공간으로 구별하여 인식하게 된다. “공간 내부의 단절과 균열을” 몸으로 느끼며 사는 존재가 종교적 인간인 것이다. 성스러운 공간은 “힘이 있고 의미가 깊은 공간”이고, 성스럽지 않은 공간, 즉 속된 공간은 “일정한 구조와 일관성이 없는 무형태의” 공간이다.

이런 공간의 구분을 볼 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가 문지방이다. 어렸을 때 문지방에 올라서거나 걸터앉을 때는 물론이고 그저 문지방을 밟고 지나갔다는 이유만으로 할머니에게 호되게 혼이 난 경험이 있다. 왜 이처럼 문지방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는지 엘리아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집의 문지방을 넘어갈 때에 행하는 의례는 많다. 문지방을 향하여 절을 하거나 몸을 엎드리거나 경건하게 손을 대는 등의 여러 가지가 있다. 문지방에는 외적의 침입뿐 아니라 악마나 페스트와 같은 질병을 가져오는 힘의 침입을 방지하는 수호신 혹은 수호령이 거주하고 있다. 문지방 위에서 수호신에게 공물을 바치는 경우도 있다. 어떤 고대 동양 문명(바빌로니아, 이집트, 이스라엘)에서는 판결의 장소를 문지방 위에 두기도 하였다. 문지방과 문은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방법으로 공간 연속성의 단절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점에서 중대한 종교적 의미를 볼 수 있는데, 왜냐하면 문지방과 문은 한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의 이행의 상징이자 매개자이기 때문이다.
(엘리아데, 『성과 속』, 58쪽. 강조는 원문)

성과 속을 가르는 문지방의 의미는 오늘날의 교회에서도 뚜렷이 드러난다. 흔히 교회는 성역聖域으로 여겨지는데 교회의 문지방을 통해 공간의 연속성이 단절된다. 이런 교회의 문지방을 엘리아데는 “두 세계를 구분하고 분리하는 한계이자 경계선이고 국경인 동시에 그러한 세계들이 서로 만나고 속된 세계에서 성스러운 세계로 이행할 수 있는 역설적인 장소”라고 말한다. 성역은 신들이 지상으로 강림하는 곳이기도 하고 “인간이 상징적으로 천상으로 올라갈 수 있는 통로”가 있는 곳이다. 그러므로 천상계로 올라갈 수 있는 문이 있어야 한다.

엘리아데가 보기에 “종교적 인간”은 이런 성스러운 공간에 살고자 하는 욕망을 추구하는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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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으로 돌아가다 –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 원직 복직 합의

임성용

서른 번째 죽음을 안고

지난 9월까지만 해도 대한문 앞에는 쌍용자동차 희생자 분향소가 있었다.

서울 시청역 2번출구, 지하철에서 나와 대한문 쪽으로 걸어가면 덕수궁 돌담 곳곳에 여러 현수막들이 걸려 있었고 가장 먼저 눈에 띠는 건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의 서른 번째 죽음을 추모하며”라는 글귀였다.

“여기 잊지 말아야 할 또 하나의 죽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또 하나의 죽음을 맞는 또 하나의 죽음, 또 한 사람 위에 쌓인 또 한 사람의 죽음들이었다. 무려 서른 명의 목숨이 잿빛으로 사라지는 동안, 국가와 사회는 어떤 짓을 저질렀던가?

국가는 노동자의 삶을 처절하게 짓밟았고 사회는 노동자들의 잇따른 죽음마저 외면했다. 그 쓰라리고 참담한 세월은 정리해고, 국가 폭력, 사법 살인으로 이어진 잔인한 시간이었다.

쌍용차 정리해고 이후에 9년이라는 길고 긴 죽음의 터널 속에서, 순박하게 살아온 쌍용차 해고노동자와 그 가족들이 죽어 갔다. ‘쌍용자동차 희생자 시민분향소’에는 영정으로 남은 희생자들이 열 명, 스무 명, 서른 명까지 늘어났다. 분향소는 22번째 희생자가 생기면서 대한문 앞에 설치되었고 1년 7개월 동안 농성을 벌였다.

2013년에 집권한 박근혜 정부는 가장 먼저 쌍용차 분향소부터 강제 철거하면서 노동자 탄압을 시작했다. 당시 세 명의 노동자가 지키고 있던 분향소에 경찰 병력 280명과 중구청 직원 50여 명이 들이닥쳐 기습 철거를 감행했다. 분향소에는 화단을 만들었다. 그 후, 여덟 명이 더 목숨을 끊었다.

2018년 7월 3일. 쌍용차 노동조합은 김주중 조합원이 자살하며 희생자가 서른 명에 이르자 대한문에 다시 분향소를 차렸다. 보수 단체의 방해와 충돌 속에서 5년 만에 두 번째로 설치된 분향소였다. 쌍용차 지부는 이날 기자회견을 통해 촉구했다.

“정부는 쌍용차 희생자와 가족 앞에 사과하고 국가폭력 사법 농단 책임자를 처벌하라!”

회사 측에는 해고자 전원 복직 합의를, 정부에는 해고자들을 대상으로 한 퇴직금 가압류 조치와 손해배상 소송의 철회를 요구하며 농성을 시작했다. 해고자로 남은 노동자들 전원이 공장으로 돌아가기 위해 오체투지로 몸을 길바닥에 뉘였다. 청와대까지 행진을 하고, 범국민대회를 열고, 지부장은 단식을 했다. 분향소에서는 종교, 문화, 노동, 사회 단체가 참여하는 문화제가 이어졌다. 시민들의 관심과 발길도 끊이질 않았다.

그렇게 뜨거운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다. 분향소가 설치된 지 3개월이 지난 9월 중순, 마침내 쌍용차 해고자 복직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9월 14일, 2009년 투쟁 당시의 노조인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2009년 투쟁 이후 금속노조를 탈퇴한 쌍용자동차 노조, 그리고 쌍용자동차 회사 측이 해고자 복직을 합의한 것이다.

이에 쌍용차 지부는 대한문 분향소를 해체하기로 했다. 강제 철거가 아닌 자진 철거였다. 분향소를 설치한 지 73일 만이었다. 쌍용차 지부는 밝혔다.

“정부의 사과와 손해배상, 가압류 철회 등 우리의 요구 사항에 대해 정부가 성의 있게 나선 것에 대해 존중하는 뜻에서 분향소를 정리하기로 했다.”

청와대 시민사회수석이 분향소를 방문하여 정부의 공식 사과와 퇴직금 가압류·손해배상 취하 절차를 밟겠다는 뜻도 전했다. 2019년 상반기까지 해고자 전원에 대한 복직, 해고자 119명 가운데 60%를 2018년 연말까지 우선 채용, 나머지는 2019년 상반기까지 단계적 채용 등이 합의 내용이었다. 2019년 상반기 복직 대상자 중에서 부서 배치를 받지 못한 인원에 대해서는 6개월간 무급휴직으로 전환한다는 내용도 포함되었다.

임성용
화물 운수 노동자, 시인. 시집으로 『하늘공장』 등이 있고, 산문집으로 『뜨거운 휴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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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이동에서 마주한 국가의 민낯과 정부의 대체복무제 계획

오경택 병역거부자, 청년정치공동체 ‘너머’ 반전평화모임 공동대표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주민들을 내쫓기 위해 아침부터 찾아온 강남구청 공무원을. 그 뒤를 따라 먹구름처럼 몰려온 용역 깡패를. 그들이 건너온 양재천 다리와 개천 건너 보이던 반짝이는 타워팰리스를.

지금은 그 명성이 예전 같지 않지만, 그 당시에는 타워팰리스가 ‘가장 비싸고 좋은 집’의 대명사였다. 바로 그 부자 동네에서 멀지 않은 곳에 ‘포이동 재건 마을’이 있다. 서울시 강남구 개포로25길 32(옛 주소로는 포이동 266번지)에 위치한 이 마을은 1979년 박정희 정권이 ‘넝마주이’와 ‘부랑인’ 등을 자활이라는 명목으로 강제수용하면서 만들어졌고, 1990년대 말까지도 재개발로 밀려난 철거민, 가난한 상이용사 가정 등 힘없고 가난한 이들을 강제로 이주한 곳이다.

2011년 6월 12일, 작은 불씨로 시작된 화재가 초동 진화 실패로 마을 96가구 중 75가구를 전소시키는 일이 발생했다. 당시 강남구청과 서울시는 마을 주민들을 어떻게든 쫓아내려 했는데, 허허벌판에서 금싸라기 땅으로 변신한 마을 부지 때문이었다. 사람이 살던 집들이 불타 없어지고 폐허만 남자, 구청은 주민들을 더욱 강하게 밀어붙였다. 계고장이 나붙고 공무원들은 용역 깡패와 함께 앞에서, 그리고 뒤에서 주민들을 회유하고 협박했다.

당시 대학생이던 나는 마을에 머문 시간도 짧았고 성실하게 일하지도 않았지만, 분명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어 가고 있었다. ‘국가’를 대신한 공무원으로부터 욕설을 듣고 그들이 데려온 깡패에게 패대기쳐지는 주민들을 보고서 생각했다. ‘좋은 세상’을 만들고 싶다면 최소한 ‘양재천 건너’에 서 있어선 안 되겠다고. 이후 주변의 동료들을 따라 학생운동에 가담했다. 끊임없이 내가 서 있어야 할 곳이 어디인지 찾고자 했다. 밀양 송전탑, 쌍용자동차, 강정마을, 세월호와 같은 투쟁에 연대했고 제주 4·3, 광주민중항쟁, 베트남과 이라크 파병의 역사를 학습했다. 근래에는 군대에서 동성애자를 ‘색출’하여 처벌하고 여군에 대한 성폭력을 은폐하는 데 급급한 모습까지 보게 되었다. 다른 건 몰라도 이런 나라의 군대는 갈 수 없겠다는 생각이 점점 더 확고해졌다.

저 멀리 보이는 육지, 요동치는 배 위에서

대학을 졸업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입영 통지서가 날아들었다. 미루고 미루던 입영 거부를 실행에 옮겼다. 이후 사법 절차를 설명하자면, 입영 날짜를 어겨도 3일 이내에 훈련소로 찾아가면 ‘지연 입대’ 처리를 받을 수 있다. 그 기한마저 넘기면 병무청이 경찰에 고소장을 제출한다. 경찰 조사, 검찰 조사를 거쳐 재판을 받으면 「병역법」 위반으로 1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는다. 이전의 병역거부자들은 모두 이 과정을 거쳤다. 나 또한 그와 같을 줄 알았다. 올해 5월에 시작된 재판이 6월 변론 종결을 거쳐 7월 17일 제헌절에 선고를 앞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창 재판을 받던 중 대법원에서 「병역법」 위반 사건을 전원 합의체에 회부하고 8월 30일에는 공개 변론도 연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 뒤 6월 28일에는 “대체복무제가 없는 상황에서 병역거부자에 대한 일방적 처벌은 헌법 정신에 부합하지 않는다”라는 헌법재판소의 판결이 내려졌다. 바깥세상에서의 생활을 조금씩 정리하던 나로서는 마냥 기쁘진 않았다. 이제 뭐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게 돼 버려 걱정마저 들었다. 그렇다고 그냥 감옥에 들어갈 수도 없었다. 병역거부운동에 이전과는 다른 국면이 열린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윽고 선고 날이 다가왔고 1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저 멀리 대체복무제라는 육지가 보이는데 타고 있는 배는 침몰할 듯 요동치는 처지랄까. 그나마 다행인 것은 혼란스러울지언정 무력하지는 않았다 점이다. 사법부에서 넘어온 변화의 단초가 ‘병역’라는 단단한 벽에 조그마한 균열을 냈으니, 법정투쟁을 열심히 하면 정과 망치가 되어 유의미한 싸움이 될 것도 같았다. 곧바로 항소장을 제출했다.

항소장을 제출했으나 항소심은 곧장 잡히지 않았다. 반면, ‘대체복무’에 관한 논의는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국방부, 법무부, 병무청이 공동으로 실무추진단을 꾸리고 국가인권위, 로스쿨 교수, 참여연대, 군인권센터 등 학계와 시민사회 진영을 아우르는 자문위원회가 구성되었다. 두 기구가 중심이 되어 대체복무제 도입을 활발히 논의했으나 결과물은 썩 훌륭하지 못하다. 11월 중 발표될 것으로 보이는 ‘대체복무제 정부 안’의 내용이 “교정 시설 36개월 합숙 근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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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중간선거 결과와 그것이 한반도에 미치는 영향

유승경 정치경제연구소 ‘대안’ 부소장

지난 11월 초 미국 중간선거가 치러졌다. 미국에서 중간선거는 하원, 상원, 주지사 등을 뽑지만, 대통령 임기 중간에 실시되어 국정 운영 전반에 대한 중간 평가의 의미를 갖는다. 실제로 중간선거의 결과에 따라 미국 대내외 정책이 방향을 크게 전환한 사례는 많다. 특히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국내외적으로 많은 반대를 불러일으켰기 때문에 이번 중간선거는 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중간선거가 끝난 후 미국 언론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언론들은 대부분 민주당이 8년 만에 하원을 되찾았고 주지사 선거에서 선전했기 때문에 트럼프와 공화당이 패한 것으로 분석했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는 기성 언론들이 트럼프에 대해서 강한 반감을 갖고 있기 때문에 나온 편향된 해석이다.

이 글에서는 2018년 미국 중간선거 결과를 분석하고 그 결과가 한반도와 관련이 깊은 사안인 북미 협상과 중미 무역 전쟁에 미칠 영향을 진단해 본다.

1. 미국의 의회 및 선거 제도

미국 중간선거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우선 미국의 의회 및 선거 제도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미국은 우리와 달리 의회가 상원과 하원으로 구성된 양원제를 운영하고 있기 때문에 상원과 하원에 대해서 먼저 살펴보자.

하원은 435명으로 구성된다. 각 주는 인구 비례에 따라 의석을 배분 받는다. 인구가 3천5백만 명인 캘리포니아는 하원 의원이 53명이지만, 인구가 73만 명에 불과한 알래스카는 1명이다. 인구가 적은 노스다코타, 버몬트, 와이오밍도 하원 의원은 1명에 불과하다. 하원의원의 임기가 2년이기 때문에 2년마다 한 번씩 하원선거가 치러지는데, 한번은 대통령선거와 함께 치러지고, 또 한 번은 이번과 같이 중간선거 때 치러진다

이에 반해 상원은 주마다 2명이 선출된다. 그래서 미국 전체로 상원의원은 100명이다. 임기는 6년이고, 2년마다 1/3씩 새로 선출된다. 주마다 모두 2명의 상원의원을 선발하는 것은 미국이 연방국가라는 특성을 반영한 것이다.

미국이 현재와 같은 연방국가를 구성한 것은 1787년 필라델피아 헌법회의를 통해서인데, 연방국가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각 주에 대등성을 부여하면서도 각 주의 인구 차이를 고려하여 양원제를 채택했다.

원리적으로는 하원은 국민을 직접 대표하며 상원은 주를 대표한다. 그래서 국민을 대표하는 하원은 좀 더 국민의 입장을 적기에 대변하라는 의미에서 임기가 2년이며, 상원은 보다 장기적이고 좀 더 신중한 의사 결정을 하라는 의미에서 임기를 6년으로 하고 있다.

위와 같은 원리에 의해서 구성되었기 때문에 하원은 세금과 경제에 관련된 권한을 주로 갖는다. 대표적으로 하원은 예산심의권을 가지며, 세금 관련 법안은 하원에서만 발의할 수 있다. 이에 반해 상원은 연방의 정책과 운영과 관련된 역할을 맡는다. 군대의 파병, 대법관 및 연방 관료 임명, 국제협약 승인 등의 권한을 갖는다. 이 같은 역할 분담이 있지만, 모든 법안은 양원 모두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중간선거에서는 주지사 선거도 함께 치러진다. 주지사 선거는 연방과는 관계가 없고 각 주의 헌법에 규정되어 있는데, 보통 임기는 4년이고 일부 주가 2년이다. 선거 시기도 주마다 다르다. 50개 주 중에서 34개 주는 4로 나눠지지 않는 짝수 년에 뽑는데, 2018년이 그해에 해당하기 때문에 이번에는 34개 주에서 주지사 선거가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중 9개 주는 4로 나눠지는 짝수 년에 뽑는다. 홀수 년에 뽑는 주도 있다.

2. 2018 미국 중간선거 결과

트럼프 대통령의 임기 첫 2년간은 공화당이 상하 양원에서 모두 과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앞서 설명한 것과 같이 하원 435석과 상원 총 100석 중의 35석(33개 + 2개는 임기 4년 남은 보궐선거 2곳)에 대한 선거가 있었다. 그리고 34개 주의 주지사 선거가 함께 치러졌다.

이번 선거에서 민주당은 하원에서 38석을 늘려 233석을 차지해 절반 의석(218석) 이상을 확보했다. 상원에서는 공화당이 기존 의석에 2석을 늘려 과반인 52석을 확보했다. 그리고 주지사 선거에서는 민주당이 선전해서 기존보다 7개 주를 더 얻었고 공화당은 6개 주를 잃었다. 그렇지만 공화당은 여전히 총 27개 주를 장악했고, 민주당은 이번 승리에도 불구하고 23개 주를 장악하는 데 그쳤다.

이 통계만을 두고 보면 양당 중 어느 한 당이 일방적으로 승리했다고 하기가 힘들다. 공화당이 상하 양원을 모두 차지하다가 하원을 민주당에게 빼앗겼다는 점에서 트럼프의 공화당이 패했다고 할 수 있지만, 공화당은 상원에서 의석이 늘었다. 그리고 주지사 선거에서도 민주당이 선전했지만 공화당을 압도하지는 못했다.

그렇다 보니, 미국 언론들의 평가도 조금 모호하다. 일단 표면적으로는 미국 언론들은 민주당의 ‘판정승’이라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뉴욕 타임스』는 “민주당 바람이 어느 정도 불긴 불었는데 태풍은 아니었다”라고 결론 내렸지만, 2016년 대선과 비교해 하원 선거구 317곳에서 민주당 지지가 늘었고, 전체적으론 평균 10%포인트 민주당 지지가 늘었다는 점을 들어 민주당의 손을 들었다. 한편 CNN은 민주당이 2016년 대선에서 잃어버렸던 ‘블루 월blue wall’(민주당의 아성 지역) 중 일부 지역(미시건, 펜실베이니아, 위스콘신)에서 상원 의석과 주지사직을 확보했기 때문에, 이 승리가 2020년 대선을 앞두고 민주당에 큰 힘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는 미국의 주요 언론, 특히 자유주의 성향의 언론들이 트럼프 개인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해서 파악할 필요가 있다. 선거 결과의 평가에도 그런 선호가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그러한 선호를 감안하여 냉정하게 분석하면 이번 선거는 트럼프와 공화당의 선방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 중간선거를 통해 트럼프의 지지층이 꽤 견고하다는 것이 사실로 확인되었다. 왜냐하면 전통적으로 중간선거는 집권 여당에게 불리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 첫 임기에 치러졌던 2010년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은 상원 6석, 하원 63석, 주지사 6곳을 공화당에 내줬고, 두 번째 임기 중간선거(2014년)에서는 상원 8석, 하원 13석을 잃어 공화당에 상원과 하원 다수당 지위를 모두 내줬고, 주지사 3곳을 잃었다. 그에 비하면 이번 중간선거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공화당은 하원은 뺏겼지만 상원에서는 오히려 의석을 늘렸기 때문에 선방했다고 할 수 있다. 한 언론의 분석에 따르면, 지난 105년 동안 미국의 현직 대통령이 속한 당이 상원 선거에서 의석수를 오히려 늘린 것은 딱 다섯 번이다.

그리고 트럼프는 가장 극단적으로 호불호가 엇갈리는 대통령이다. 싫어하는 사람은 아주 싫어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아주 좋아한다. 이번 중간선거는 그의 반대파만큼이나 트럼프의 지지층이 견고하다는 점을 확인시켜 줬다. 『뉴욕 타임스』의 칼럼니스트 다니엘 매카시도 비슷한 분석을 했다. 트럼프는 “널리 증오 받는 우려의 대상이지만 또한 그는 자신의 지지층들에게 깊이 사랑받는 인물”이라는 사실이 다시 확인됐다고 진단했다.

또한 중간선거가 중요한 이유는 그 결과를 통해서 대선의 향방을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 공화당이 대선의 승부를 좌우하는 플로리다, 인디애나, 오하이오 등 이른바 “스윙 스테이트”지역(공화당과 민주당이 번갈아 차지하는 주)에서 모두 승리했다는 점도 중요하다. 트럼프가 재선 가도에 중요한 고비 하나를 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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