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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와 안식을 위하여

평화와 안식을 위해

 

지난 5월 9일 이후 한국의 많은 사람들은 행복감과 만족감 속에서 살고 있는 듯이 보인다. 물론 당장은 환상적인 것이긴 하지만 미래가 지금보다 더 나아질 것이고 최소한 ‘정상화’될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눈앞에서 당장 바뀌는 것이 없어도 시간을 잘 보내고 있다. 혹은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런 이유로 민주노총의 ‘사회적 총파업’을 조급증과 이기주의로 몰아붙이고, 이제 겨우 ‘정상화된 채널’을 마련한 한미 관계를 만든 정상회담이 대단한 성과를 낳은 것처럼 말하거나 믿고 싶어 한다.

이런 말과 믿음이야 관점주의라는 말로 치부할 수 있지만 ‘사드가 주권 사항’이라고 하는 것은 좀 심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의 국가 간 체제가 일반화되면서 주권국가라는 말이 신성한 자리를 차지하긴 했지만, 그 말뜻을 감안할 때 오늘날 주권을 온전히 누리는 국가는 손으로 꼽을 정도다. 그러니 여전히 사우스코리아South Korea라고 불리며, 주둔하는 미군 규모가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한국이 주권 운운하는 것은 민족주의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좀 슬픈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자주국방”이라는 말을 금과옥조처럼 떠받드는 식의 “독립국가”로 바로 서는 것이 역사적으로나 현실적으로 가능하고 바람직한 일인지는 불확실하다. 20세기에 우리가 경험한 것은 내적으로는 폭력적이고 외적으로는 침략적인 국가의 진화였고, 그 결과가 어떤 것인지는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러한 반성에서 나온 것이 국제 협조를 더욱 심화시킨 지역 통합이며, 대표적인 것이 오늘날의 유럽연합이다. 물론 현재 유럽연합은 이런저런 문제로 삐걱거리고 있으며 앞날이 불투명하다. 하지만 처참한 과거에 대한 반성과 위기를 기회로 바꾸어 내려는 고귀한 이상이 그런 노력의 출발점이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런 시도를 동아시아로 고스란히 옮기려는 시도는 물론 가능하지 않다. 하지만 이때 가능하지 않다는 것은 맥락과 배경이 다르다는 것을 다른 말로 표현한 것에 불과하며, 그러한 이상마저 포기하자는 것은 아니다. 동아시아는 역사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유럽보다 훨씬 복잡한 다자 관계에 놓여 있다. 일본 제국주의와의 관계에서 한국과 중국은 공동의 경험이 있으며, 미국은 적대국이었다. 하지만 냉전 시기에 한국과 미국은 북한 및 중국과 전쟁을 벌인 바 있다. 한국은 북한의 침략에 대해, 북한은 미국의 가공할 군사력에 대해, 제국 경험이 있는 중국은 한반도의 변동에 대해 알레르기 반응이 있다. 일본은 미국의 품 안에서 정상 국가가 되려고 노력했지만, 과거에 대한 반성을 거치지 않았기에 동아시아의 정상적인 일원이 되기에는 부족한 데가 있다. 이런 배경 속에서 21세기 들어 G2의 갈등이 중국의 역내 안보 추구와 미국의 ‘봉쇄’전략이라는 대당 속에서 커지고 있다. 북한 정권은 누가 보아도 생존(?) 노력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핵무기 개발을 통해 국제적, 지역적 갈등의 중심이 되었다. 혹은 중심이 되고 싶어 한다.

이 속에서 한국이 번영과 평화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번 정상회담에서 북한 핵 문제에 대해 한국이 주도하기로 했다는 합의가 있었다고 한다. 누구나 바른 방향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문제는 무엇으로 주도할 수 있는가다. 현재로서는 마땅한 답이 없다. 그저 긴장 완화를 위한 전통적일지라도 몇 가지를 시도하는 것이 출발점이 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니 말의 잔치가 아니라 실제로 테이블에 무엇이 올라오는지를 지켜보기로 하자.

 

어쨌든 뭔가 변화가 있을 것 같은 시점에 우리가 “동지”라 부르는 민주노총 전 제주본부장이자 노동당 제주도당 위원장인 김동도님이 돌아가셨다. 누군가의 추모사에 나온 것처럼 힘들었던 투쟁과 투병을 생각하면 편안한 세상으로 갔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인간의 정리는 그럴 수 없으니 슬픔을 삼키거나 나눌 수밖에 없는 처지다. 각자 고인을 기억하는 계기와 방식이 있겠지만 나로서는 그의 강인한 내면과 겸손한 태도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그를 잘 모르는 사람도 그가 걸어온 삶을 보면 그가 얼마나 강인한 사람이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를 잠깐이라도 만나 본 사람은 소박하고 겸손한 태도로 그 강인함을 충분히 가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만 그러했겠는가? 지난 30년 동안 한국의 노동운동은 아마 그런 사람들 때문에 전진해 왔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과 함께 그런 이들이 하나둘 우리 곁을 떠나고 있고, 우리는 강인함이 고집으로, 겸손함이 무책임으로 바뀌어 버린 세상을 살고 있다. 이렇게 한 시대는 가고 있고, 우리는 후일 그 시대의 끝자락에서 얼마나 방황하고 얼마나 서로에게 상처를 주었는지를 떠올릴 것이다. 그러니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살아가는 게 필요하다.

 

편집위원회를 대신하여
안효상

 

이 글은『시대』 2017년 7~8월호 통권50호에 실린 ‘책 머리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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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에서 시대로

시대49호 책머리에 좌파에서 시대로

이 지면의 제호를 “좌파”에서 “시대”로 바꾸는 것이 좌파의 시대가 지나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모든 사람의 자유와 평등, 진정으로 인간적인 삶에 대한 좌파의 요구가 어떻게 소멸할 수 있겠는가? 가장 급진적인 것이 가장 인간적이라고 말하는 좌파의 근거가 어떻게 무너질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좌파”라는 제호를 뒤로 한 것은 이 기호가 그런 가치에, 최소한 한국에서는, 값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럴수록 가치에 합당한 이름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말이 사회적인 것일 때, 우리의 노력만으로 짧은 시간 내에 그런 소망이 이루어질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이름이 아니라 그 실질을 위해 노력하는 게 더 나은 일이 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소극적인 의미에서만 이름을 바꾼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말할 때 “좌파”가 위치 혹은 태도를 가리킨다면, “시대”는 상황을 의미한다. 정세적으로 “좌파”는 2008년 경제 위기 이후 가장 현실적이면서도 급진적인 대안을 제출하고 이를 통해 그리고 이를 실현할 새로운 정치를 구성하자는 요청을 말한다. 하지만 위기 이후 십 년 가까운 시간 동안 이러저러한 대중의 저항이 있었지만 적절한 대안이 제출되지 못하면서 새로운 정치는 단초를 보여 주었을 뿐이다.

한국의 경우, 좌파의 시도가 미약하게만 나타나면서 단초조차 눈에 띄지 않는 양상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올바른 우리의 노선과 대안을 부여잡고 시간의 흐름 속에서 꾸준히 무엇을 한다고 원하는 사태가 이루어질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도리어 필요한 것은 사태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며, 이에 우리의 대안을 맞추어 재조정하는 것이다.

민주적 정부의 출범으로 이어진 2016∼17년 촛불집회를 보면서 우리는 감동과 좌절을 동시에 느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김수영의 시 「풀」에 대한 통속적인 해석을 비틀어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먼저 웃는” 풀만이 아니라 “바람보다 더 빨리 눕는” 풀을 떠올려야 한다. 지난 촛불집회가 그렇게 거대한 물결을 이룬 바탕에는 최소한 2014년 4월의 세월호 참사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대중의 불만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안다. 하나의 정치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는 동등한 구성원으로서 각자의 소박한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는 수많은 사람이 체제의 작동 속에서 전혀 그럴 수 없다는 절망을 느낀 것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행태를 만나 분노로 폭발한 것이 촛불집회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보통 사회경제적 불만과 요구라고 말하는 것이 거대한 물결의 심층을 이루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 에너지는 그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투표함을 통한 기성의 질서에 대한 약간의 변경으로 제한되고 말았다.

이를 통해 우리는 몇 가지를 확인할 수 있다. 하나는 이른바 ‘민주개혁파’가 하나의 실체이자 매우 강력한 힘이라는 것이다. 87년 체제는 이들이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주었고, 이들은 노무현 정권의 성립과 실패 속에서 적절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정치 개혁, 인권 개선, 분단 체제 관리 등에서 이들은 어느 정도 성과를 보일 수 있고, 이것이 더욱 급진적인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을 것이다. 첫 번째와 연동된 두 번째로 여전히 대중은 기성 정치 질서를 신뢰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우선적으로 한국의 극우 보수 세력이 민주개혁파를 파트너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에 대한 반사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향후 자유한국당으로 대표되는 이 세력의 변화에 따라 변동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또 다른 이유는 민주주의 자체가 매우 제한적으로만 이해되는 정치 문화와 관련이 있다. 여기에도 강고한 분단 체제가 작동하고 있겠지만 가깝게는 87년 체제의 형성 과정이 결부되어 있다. 6월항쟁과 노동자대투쟁의 탈구가 계속해서 재생산되어 왔다는 것이다. 이를 벗어나는 한 가지 경로는 정치와 경제를 연결시킬 수 있는 정치과정에 대한 개혁이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그 어느 때보다 정치 개혁의 열망이 높은 이 시기에 선거법을 포함한 정치 개혁에 우리가 힘을 쏟아야 할 것이다.

끝으로 좌파의 무능력이다. 이와 관련해서 우리는 그동안 주로 시대착오성이라는 관점에서 비판해 왔다. 시대의 과제와 적절한 주체를 도출하지 못하는 무능력 말이다. 이런 판단은 여전히 유효하지만 여기에 머무르는 것은 일기예보 담당자의 태도에 불과할 것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현실적인 능력일 것이다. 현실적인 능력은 다양하게 이해될 수 있겠지만 우선적인 것은 보편적인 감수성에 기초해서 신뢰를 획득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사람들에 따라 ‘보편적인 감수성’에 대해서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낼 수 있겠으나, 여기서 말하는 것은 정치 공동체 구성원의 공통성에 근거하여 개인과 집단들의 요구를 포착하고 정치라는 통로로 흐르게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 어느 때보다 좌파는 민주주의의 옹호자로 등장해야 하고 민주주의를 삶의 모든 부문으로 확장하는 시도의 선두에 서야 한다.

물론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현실적인 능력이란 목표로 삼은 것을 실제로 달성할 수 있는 어떤 것이다. 이는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미래를 지향하면서도 동시대 보통사람들의 감수성과 눈높이에서, 말하는 바를 달성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느끼게 만드는 ‘평범한’ 능력이다. 굳이 전통적인 ‘대중노선’을 떠올릴 필요는 없다. 도리어 집요하게 우리가 미래라고 생각하는 것을 말할 수 있는 위치를 제대로 잡는 것이 필요하다. 현재 우리의 상태로 볼 때 이러한 위치를 잡는 데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하지만 정치라는 것이 미래를 지향하는 것이라 할 때 이 시간은 그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끝으로 현실적인 능력이란 시대의 변화에 맞추어 자신을 끊임없이 조정해 가는 능력이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할 때 좌파의 미래는 없을 것이고 우리는 시대를 살아간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편집위원회를 대신하여
안효상

 

이 글은『시대』 2017년 6월호 통권49호에 실린 ‘책 머리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