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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유대인의 디오니소스였다

-『예수는 신화다』

 

김태호 박종철출판사 대표

 

그리스도교와 ‘예수 미스테리아’

그리스도교의 경전 『바이블』은 유대교 경전(“타나크”)을 신과 인간 사이의 “옛 계약”(구약舊約)으로 받아들여 앞에 놓고, 예수 출현 이후의 이야기를 “새로운 계약”(신약新約)이라 부르며 타나크와 한데 묶고 있다.

구약 내용 가운데 특징적인 상당 부분이 그보다 훨씬 앞선 수메르 문명이 남긴 기록에 이미 담겨 있었다는 사실이 유적 발굴로 확인된 것은 19세기 중반의 일이다. 신이 흙을 빚어 사람을 만들었다는 이야기, 대홍수와 방주 이야기, 높은 탑을 건설하려는 시도와 그로 인해 언어가 갈리는 이야기 등이 그렇다. 오늘날 이라크 남부 지방인 옛 수메르 유적지에서 발견된 점토판에 쐐기문자로 기록된 내용은 한국에도 널리 알려져 있고, 가장 대표적인 것이 “길가메시 서사시”일 것이다. 구약의 상당 부분이 출처를 밝히지 않은 표절임은 증명된 사실, “팩드”다.

티모시 프리크/ 피터 갠디 지음, 승영조 옮김,
『예수는 신화다』, 미지북스, 2009년.
(Timothy Freke and Peter Gandy, The Jesus Mysteries,
HarperCollins Pyblishers, 1999.)

신약은 어떤가?

‘그리스도’라는 그리스어는 히브리어로 된 구약을 그리스어로 옮기면서(이른바 ‘70인 역’) ‘메시아’의 번역어로 등장했다. ‘(신에 의해 성스러운) 기름이 부어진 자’ (『바이블』의 표현을 따르면,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이며, 주로 왕이나 제사장이나 예언자를 가리켰다. 그러다가 신약에서는 ‘그리스도’ 또는 ‘메시아’가 요셉과 마리아 사이에 태어난 예수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되고, 그리스도교(기독교) 또는 예수교란 예수가 그리스도, 곧 하느님이 보낸 구세주임을 믿는 종교다. 가톨릭이든 프로테스탄트든.

신약의 주인공인 예수라는 인물이 실존했는지, 그가 정말 여러 복음서에 실려 있는 것처럼 말하고 살았는지, 그가 “그리스도”인지에 대한 의혹은 끊이지 않는다.

이를 주제로 삼은 소설도 많다. 비교적 최근의 것으로는 인간 예수를 로마의 폭정에 맞선 혁명가로 묘사하는 『젤롯』이 있다. (보통 ‘열심당’으로 번역하는 ‘젤롯’은 단검을 몸에 감추고 다니며 로마 지배에 맞서 암살과 테러도 마다하지 않던 유대 민족주의 결사의 이름이며, 한때 한국에서 선풍적 인기를 끌었던 《스타크래프트》에 등장하는 프로토스의 ‘질럿’은 이를 모델로 한 것이다.) 또한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릴 당시 유대 총독이었던 빌라도의 눈으로 예수의 생을 묘사하며 신약의 다른 복음서와 같은 형식을 취한 『빌라도 복음서』도 있다.

여기서 다루는 책 『예수는 신화다』는 소설이 아니라 말 그대로 ‘수많은’ 문헌을 검토한 오랜 연구의 결과다. 두툼한 이 책의 결론은 매우 간단하다.

예수 이야기는 역사적으로 실존한 메시아의 전기가 아니라 이교도의 여러 유서 깊은 이야기를 토대로 한 하나의 신화라고 우리는 확신하게 되었다. 그리스도교는 새롭고 유일무이한 계시종교였던 것이 아니라 실은 고대 이교도의 미스테리아 신앙을 유대인 방식으로 각색한 것이었다. (10∼11쪽)

“이교도”란 그리스도교 이외의 종교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예수 시대의 이교도는 주로 그리스(로마)신화에 등장하는 신을 숭배하는 집단이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올림피아에서 제우스를 숭배하며 거행한 축제가 이교도의 종교의식 또는 “공개적인 미스테리아”라 하겠다.

한마디로, 그리스도교 출현 즈음에 지역과 민족마다 존재하던 “이교도의 여러 유서 깊은 이야기”의 유대인 판본이 “예수 이야기”라는 것이 저자들의 결론이다. 두 저자는 이를 “예수 미스테리아 명제”라 부른다. 이 책의 원제는 “The Jesus Mysteries”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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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정당운동의 산증인, 노회찬

안재성 소설가

 

1. 조봉암을 닮은 사람

시원한 장마가 시작될 시기지만 지독한 가뭄이 끝날 줄 모르는 2017년 6월 20일, 국회의사당으로 정의당 원내대표 노회찬 의원을 찾았다. 웬일인지 여우비도 아닌 성긴 빗방울이 살짝 지나가는 오후 시간, 의사당 입구부터 아는 얼굴들이 눈에 띈다. 오래 전 노동운동을 함께하다가 인권 변호사가 된 선배도 만나고 보도연맹유족회의 낯익은 노인들도 만났다. 시골에서 올라온 행색이 역력한 노인들이 제각기 가슴에 표찰을 달고 의원회관 안팎을 물결지어 돌아다니는 사이로, 얼굴을 알 만한 의원들이 나와 배웅하느라 바쁘다.

“의원회관을 찾는 민원인이 하루에 2만 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국회의원이란 게 쉬운 직업이 아니지요.” 노 의원도 바쁘다. 온종일 십 분 여유도 없이 면담이 계속된다. 특히 이날은 댓 군데 방송과 인터뷰가 잡혀 있을 정도로 바쁘다. 문재인대통령이 추천한 장관 후보들을 낙마시키려고 트집 잡기에 혈안인 보수정당들을 상대로 특유의 촌철살인으로 당사자인 민주당 의원들보다 더 잘 싸우고 있는 그에게 언론의 취재가 집중된 탓이다.

“국회를 민의의 전당이라고 합니다. 민의의 전당에서는 민의가 이겨야 합니다. 정당들끼리 의견이 다르다면 민의를 쫓아가면 됩니다. 소속 정당이 달라도 잘하는 건 잘한다고 하고 못하는 건 못한다고 해야지요.”

민주당이 하는 일이면 무조건 비난하고 발목을 잡는 보수세력이나, 잘하는 일에는 모르는 척하면서 못하는 게 없는가만 찾고 있는 날선 진보세력과는 다르다.

그래서인가, 노회찬을 보면 조봉암이 생각난다는 이들이 있다. 조선공산당의 창당 주역이었으나 현실 공산주의의 국가폭력에 반대해 처음으로 사회민주주의를 주창했던, 필요에 따라 이승만과 손잡고 토지개혁을 주도하기도 하지만 또 이승만 독재에 맞서 싸우다가 처형된 조봉암의 일생을 떠올리는 것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조봉암은 야만적 시대의 제물로 갔으나 노회찬은 3선 의원으로 활약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여섯 석밖에 안 되는 정의당의 원내대표지만 그 여섯 석도 우리나라 진보정당 현실에는 소중하다. 물론 그가 속한 정의당이나 그가 천명해 온 주장은 진정한 진보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또 다른 여러 진보정당이 존재하지만, 국회의원이 있는 유일한 진보정당인 것이 사실이다.

노회찬을 두고 한국 현대 진보정당사의 산증인이자 주역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노회찬은 1987년 12월 대선에서 처음으로 민중후보를 내세운 이들을 중심으로 창당한 민중의 당(1988년)을 주도한 이래, 민중당(1990년)으로부터 진정추(1992년), 민주노동당(2000년), 진보신당(2008년), 통합진보당(2011년)을 거쳐 현재의 정의당(2012년)까지 한 번도 진보정당운동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을 뿐더러 늘 주역의 하나였다. 돌이켜보면 그가 만들거나 속했던 진보정당들이 모두 그와 다른 정파들에 의해 장악되어 그는 밀려나거나 스스로 분당해 나왔다.

그럼에도 맨 처음 진보정당운동을 시작했고, 많은 동지가 자의든 타의든 물러난 상황에서 유일하게 국회에 진출한 정당을 이끌고 있으니, 그를 두고 현대 진보정당사의 산증인이라고 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다.

백기완 선생이 민중후보로 나서면서 시작된 진보정당운동이 올해로 꼬박 30년째다. 노회찬의 진보정당운동 시계와 똑같다. 지겹게 들어 온 멍청한 질문이겠지만, 왜 오로지 이 운동에 일생을 바치는가 물으니 이렇게 답한다.

“한 사람이 평생에 한 가지 일만 추구해도 이루기 힘든데 어떻게 여러 가지 일을 하겠습니까? 학창 시절에 결심한 대로 이 사회의 약자와 빈자의 권익을 위해 일생을 바치겠다는 저 자신과의 약속을 지킬뿐입니다.”

신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실천이다. 일부러 낳지 않은 건 아니지만, 노회찬은 아이조차 없는 극히 검소한 생활로도 유명하다. 그럼에도 노동자를 위한 일간지 『매일노동뉴스』를 10년간 운영하느라 빚더미에 앉아 오랫동안 신용불량자로 살아야 했다. 처음 국회의원이 되었을 때 은행에서 의원용 신용카드를 발급받으려다 조건이 안 된다며 거절당한 일화도 유명하다. 지금도 그는 전세살이를 하고 있다. 삶과 사상이 일치하는, 이 변치 않는 무욕의 삶이 지금의 그를 있게 했을 것이다.

흔들리지 않음, 편향되지 않음, 재치 넘치는 특출한 표현,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욕심 없음 등등으로 표현되는 이 노회찬 특유의 인성은 어디서부터 비롯되었을까? 진보 진영 인사들은 대개 운동 경력만 내세울 뿐이다. 개인사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잡지에 이 꼭지가 만들어진 이유이기도 하다. 노회찬 의원이 부산 태생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도 많지 않을 것이다. 경상도 말은 억양이 강해서 고향을 떠나고 수십 년이 지나도 출신지를 숨기기 어렵다. 그런데 노 의원의 말투에서는 경상도 억양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 이유부터 물어보았다.

 

2. 첼로 연주하는 아이

아버지의 이력부터가 독특하다. 아버지 노인모 씨는 이북 출신이다. 일제 치하에서 흥남에 있는 조선질소비료라는 공장의 노동자로 일하다가 징병으로 끌려가 고생하고 돌아와서는 원산의 도서관에서 사서를 하던 문학예술의 열렬한 애호가였다. 6·25 때 부산으로 피난 내려와 초량동 산동네에 살면서 원태순 씨와의 사이에 셋을 낳아 키웠다.

노회찬은 위로 누나를 둔 맏아들로, 1956년 8월에 태어났다. 부모가 이북 말을 쓰니 노회찬도 자연히 이북 억양에 익숙해졌다. 노회찬이 부산 출신임에도 남과 북이 합쳐진, 어디 출신인지 짐작하기 어려운 특이한 억양을 가진 이유다.

초량동 산동네는 전쟁 피난민들이 많이 살던 빈민촌으로, 무허가로 얼기설기 지은 판잣집이 대부분이었다. 노회찬의 다섯 가족은 그나마 집도 없이 방 한 칸을 세 내어 살았다. 부산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진학할 때까지 그 집에 살았으니, 노회찬의 부산 생활은 초량동 빈민가의 셋방살이가 전부다.

산비탈 판잣집에서 셋방살이를 했어도 마음만은 빈곤하지 않은 가족이었다. 문화적으로는 다른 어느 가정보다도 풍요로웠다. 박봉이나마 안정된 수입이 있기도 했지만, 아버지가 자녀들에게 물질적 욕망보다는 문학예술을 사랑하도록 인도했기 때문이다. 방이 두 칸으로 늘자 암실부터 만들어 스스로 찍은 사진을 인화하던 멋쟁이 아버지였다.

“살림은 가난했어도 정신적으로는 풍요로웠어요. 아버지는 저에게 문학과 예술에 눈을 뜨게 해 준 분입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가 독서하는 것을 보고 배워서 밥을 먹으면서도 책을 읽을 정도였는데, 중학교 들어가니까 아버지가 전축 앞에 불러 놓고는 너도 이제 중학생이니 이걸 들어야 한다면서 베토벤의 <운명>을 틀어 주세요. 백 번은 더 들었을 거야. 토스카니니가 지휘하는 연주였는데, 처음에는 머리가 깨지는 줄 알았는데 나중에는 심취하게 되었죠.”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그 가난한 살림에 남편과 비싼 오페라 공연을 다니던 이였다. 월남을 하기는 했으나 북한에서 살면서 사회주의 교육의 좋은 점을 보았기 때문일까? 노회찬이 중학교에 들어갈 때가 되자 어머니가 먼저 나섰다. 아무리 형편이 어려워도 사람은 악기 하나는 다룰 줄 알아야 한다며 고르게 했다. 누나는 피아노를 택했고, 노회찬은 바이올린보다 큼직한 것이 배우기 쉬울 듯해 첼로를 택했다.

연습용 첼로는 가격이 그리 비싸지 않았지만 사사가 문제였다. 부산에는 첼로 선생이 한두 명밖에 없던 데다 수강료도 엄청났다. 운 좋게도 부산시립교향악단 첼로 수석주자였던 배종구 교수에게 직접 배울 수 있었고 경기고등학교에 진학한 후에도 역시 좋은 교수를 만났다. 다른 학생들과 달리 대학 진학을 위해 배우는 게 아니라 음악을 사랑해서 배우려는 것을 안 두 교수는 거의 돈을 안 받고 가르쳐 주었다. 그러나 재능은 없음이 분명하다. 그는 유쾌하게 웃으며 말한다.

“그분들께 꽤 여러 해 배웠는데 열심히 하라는 말만 잔뜩 들었지, 너는 재능이 있다고 말하신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그 대신에 제가 리코더는 아주 잘 불었어요. 무슨 노래든 듣기만 하면 즉석에서 악보로 옮겨 불 정도였지요.”

어렵게 배운 첼로 솜씨로 경기고등학교 재학 중 이화여고 축제에 초대 받아 3천원의 출연료까지 받고 공연한 적도 있었다. 첼로를 배우며 음악에 심취해, 당시 서울의 낭만파 학생이라면 필수적으로 출입하던 고전음악 감상실 르네상스에도 드나들고, 서정주의 시를 가사로 삼아 직접 작곡해 본 적도 있었다.

음악만이 아니었다. 문학, 철학 등 모든 분야의 책을 열독했고 영화도 무척 좋아해서 고등학교 때는 한 해 개봉된 모든 영화를 보러 다녔다.

책상물림의 샌님이 아니었다. 삼육국민학교, 부산중학교 다니는 내내 한 해도 빠지지 않고 반장을 했다. 아이들을 몰고 다니며 골목대장 노릇도 하고 중고등학교 때 선생들이 부당하게 굴면 바로 대들어 싸우기 일쑤였다.

“중학교 때부터 그랬고 고등학교 내내 그랬어요. 조금이라도 부당하다 싶으면 못 참고 선생님한테 바로 대들어서 엄청 많이 맞았습니다. 대걸레 자루로 엉덩이 맞기, 주먹으로 얼굴 맞기, 꽃병으로 머리두들기기 등등 정치나 학원이나 폭력이 일상이던 시절이었는데도 계속 반항했죠.”

잘못된 일에는 반항을 하되 상대방에 대한 기본적 애정과 존중심을 잃지 않는 그의 특징은 그때도 나타난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세계사 선생이 미국 인디언에 대해 무슨 이야기를 했는데 아이들이 피식거리며 동조를 하지 않자 “너희는 텔레비전도 못 봤냐?”고 성질을 냈다.이에 아이들이 전부 못 봤다고 하자 속 좁은 선생은 못 본 놈 나오라고 고함쳤다. 겁난 아이들은 아무도 나가지 않는데 노회찬이 혼자 나갔다. 자취방에는 진짜 텔레비전이 없었던 것이다. 시키는 대로 했을 뿐 인데도 대든다고 생각한 선생은 무자비하게 뺨을 때리기 시작했다. 억울한 일이었다.

“정말 무한대로 맞았어요. 싸대기를 양쪽으로 무한대로 맞고 나니까 기분이 좀 그랬죠. 선생님이 과도했고 어른답지 못하다, 그렇게 생각했지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괜히 폼을 잡아 선생님으로 하여금 학생을 때리게 만든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억울하게 맞고도 교무실에 찾아가서 ‘죄송합니다!’ 이랬어요. 그런데 선생님이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더라고요.”

아니다 싶으면 곧장 일어나 대드는 성격은 이후에도 변치 않아 참 많이 얻어터지며 학창 시절을 보냈다.

운동도 좋아해서 중학교 시절부터 펜싱과 육상은 선수급이었다. 덕분에 고등학교 2학년 때는 무술을 잘한다는 소문이 나서 노 씨 성을 따 ‘노지심’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운동도 잘했지만 아마도 커다란 체구에 그보다 더 큰 머리통, 그리고 두려움을 모르고 옳고 그름을 지적하는 대범한 성격에서 붙여진 별명이 아니었을까 짐작된다. 오늘의 그가 보수와 진보 양쪽의 공격을 개의치 않고 ‘민의’라는 상식적인 눈높이에서 나오는 소신 발언을 계속하는 이유를 알 만하다.

성격이 이렇다 보니 사회운동도 퍽 일찍 시작했다. 아는 선배의 영향을 받거나 학습 서클에 들어가 배운 게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고 주도했다. 경기고등학교 1학년이던 1973년의 일이니 참 조숙했다.

 

3. 인생의 미스터리들

인생이란 묘한 우연에 좌우되기도 한다. 나이대로 하면 1972년에 부산고에 입학해야 했던 그가 재수를 하고 한 해 늦게 경기고에 들어간 것은 그의 인생의 한 미스터리다. 지역의 명문이던 부산중학교에서는 넷 중 세 명이 부산고등학교에 들어갔다. 그런데 전교 10등 밑으로 내려가 본 적이 없던 노회찬이 낙방을 하고 만 것이다. 정말 이유를 알수 없었다. 평소 경기고에 가고 싶기는 했지만, 일부러 시험을 망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가족에게서 오해를 받는 것도 싫고 부끄럽기도 하여 고등학교를 아예 포기하겠다고 주장하는 그를 아버지는 서울로 보내 재수를 하게 했다.

“서울에 온 게 내 인생에 가장 큰 전환점이 된 거죠. 부산에 있었으면 아마 내가 이 길로 안 들어섰을 겁니다. 반항심만 극대화된 채 친구들과 어울려 이상한 길로 빠졌을 겁니다.”

어쨌든 전국의 수재가 모여든 경기고에 들어가자마자 그는 또 다시 인생의 전환을 맞는다. 이번에는 스스로 원해서 택한 길이었다.

한창 재수를 하고 있던 1972년 10월, 박정희는 소위 유신헌법을 선포해 ‘영구 대통령’의 길을 연다. 이건 분명 교과서에 나오는 민주주의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노회찬을 분개시킨 것은 국회를 해산시켰다는 점이었다.

“중학교 3학년 교과서에 나와요. 국회는 해산시킬 수 없다고. 그런데 국회가 해산됐다는 거야. 내가 잘못 알고 있는가 해서 책을 다시 봤어요. 확실히 잘못된 거라. 나는 그 다음 날 엄청난 데모가 일어날 줄 알았어. 국회가 해산됐으니까. 그런데 아닌 거야. 멀쩡한 거야. 이게 지금 뭐냐, 가만히 있으면 어떻게 하냐, 이래 가지고 어린 나이에 저항을 시작한 거죠.”

정부 발표는 일체 신뢰하지 않게 된 대신 『월간 다리』를 구독하고, 강제 폐간된 『사상계』를 청계천 헌책방에 가서 권당 30원씩 한 보따리씩 사다가 읽었다. 논문도 있고 논조도 어려워 이해할 수 있는 글이 별로 없었지만 열심히 읽었다.

재수 시절 혼자 그렇게 끙끙 앓고 지내다가 경기고에 들어가니 정광필, 이종걸 등 마음을 나눌 친구들이 몇 명 생겼다. 똑똑한 친구들과 독재에 대한 분노를 공유한 노회찬은 유신 체제를 비판하는 유인물을 제작해 학교에 배포하자고 제안했다. 다들 흔쾌히 응했다.

글은 노회찬이 썼으나 등사가 문제였다. 철필로 긁으면 공신력도 없거니와 글씨체가 드러나 체포되니 타자를 쳐서 등사하기로 했다. 타자기가 귀한 시절이고 칠 줄도 몰랐다. ‘청타’라 해서 푸른 등사 원지에 타자를 쳐 주는 몇 군데 청타집을 찾아다녔으나 원문을 읽어 보고는 즉석에서 거절하는 것이었다. 신고당하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겨우 한 군데 청타집에 사정해서 타자를 친 다음, 공범 중 한 명이 다니는 부천의 한 교회로 갔다. 전철이 없던 시절이라 완행 기차를 타고 소사역에 내려 밤중에 몰래 교회에 들어가 등사를 시작했다. 그런데 한참 등사 중일 때 목사가 불쑥 들어왔다. 밤중에 불이 켜진 것을 보고 온 것이었다.

“이제는 다 끝났구나, 신고를 당해 감방에 가고 학교에서 퇴학당하겠구나 생각했지요. 근데 목사님이 우리가 등사해 놓은 유인물을 한 장 집어 들고 죽 읽어 보더니 다시 내려놓고는 단 한 마디도 않고 나가서 문을 닫아 주는 거라. 참 고마운 목사님이었지요.”

무사히 1,200장 정도를 등사한 일행은 아무도 없는 시간에 학교에 들어가 책상 속에 한 장씩 넣어 두었다.

읽어 본 학생들이 웅성거리며 찬동하자 학교가 뒤집어졌다. 학교측은 학생들의 집단행동을 우려해 즉시 조기 방학을 선포하고는 모두 집에 가라고 내몰았다. 학생들이야 방학이 당겨졌으니 신이 나서 누가 뿌렸는지 몰라도 고맙다고 떠드는 것이었다. 경찰이 정문부터 학교를 빙 둘러 감싸고 있었지만 문제가 더 확대되지는 않았다.

이 일을 통해 규합된 친구들에게 노회찬은 기초부터 공부하자고 제안했다. 아무런 사회과학적 지식이 없는 상태로 선택한 것이 철학이었다. 지금은 없어진 종로서적에 가서 하드카버로 된 두꺼운 『세계철학사』를 사서 공부를 시작했다. 옛 소련의 아카데미에서 출간한 세계철학사와는 아무 상관없는, 플라톤이니 칸트가 등장하는 부르주아철학사였다. 도움이 될 리도 없고 재미도 없어 얼마 안 있어 포기하고 『다리』, 『사상계』를 함께 보는 시사 모임으로 바꿨다.

이듬해인 1974년 4월 3일은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이란 이름으로 전국의 주요 대학과 고등학교에서 공동으로 시위를 벌이기로 기획한 날이자, 박정희가 군대를 동원해 대학가에 위수령을 내리고 민청학련 관련자는 사형까지 내릴 수 있는 긴급조치 4호를 발표한 날이었다.

아침에 등교하던 경기고 학생 하나가 교문 밖에서 어떤 대학생이 선생님 주라며 준 서류 봉투를 받아다가 교탁 위에 올려놓았다. 선생님이 오기 전에 학생들이 열어 보았다. 유신 반대를 선동하는 민청학련 명의의 유인물이었다.

노회찬은 교실 문을 잠가 선생님들의 진입을 막고 큰 소리로 유인물을 낭독했다. 학생들은 박수를 치며 동조했고 즉석에서 독재 정부를 규탄하는 시사 토론회가 열렸다. 학생들의 수업 거부와 농성이 학교 전체로 퍼져나가자 학교 측은 또 다시 휴교를 선포했다. 교실에 들어갈 수 없게 된 학생들은 노회찬을 중심으로 도서관에서 시사 토론을 이어 갔다.

경기고 학생들의 이날 수업 거부는 전국이 공포로 얼어붙은 당시로서는 큰 사건이었다. 민청학련이란 이름으로 기획되었던 이날의 시위는 대부분 실패해 버렸는데 뜻밖에 고등학교에서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이 두 사건 외에도 고등학교 시절의 저항의 무용담이며 문화예술과 관련된 일화는 무궁무진하다. 자연히 좋은 성적을 유지할 수는 없었다. 서울대 철학과에 지원했으나 낙방하고 곧바로 입영 영장을 받는다. 베이비붐 시대라 웬만하면 현역병에서 제외될 때라 눈이 나쁘다는 이유로 보충역, 이른바 ‘방위’가 되었다.

1978년에 제대하고 다시 입시를 치러 고려대학교 정치외교과에 합격했다. 동갑내기들은 대개 75학번인데 4년 늦은 79학번이 된 것이다.

“대학에 간 이유는 오로지 데모를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고등학교 때 이미 혁명을 꿈꾸고 있었으니까요. 친구들이 대학에서 데모를 주동하다 보니 대학에 가기 전에도 벌써 몇 번 경찰서에 끌려가서 조사를 받기도 했고요.”

신입생이라지만 벌써 졸업했을 나이인 데다 이미 고교 1학년부터 경력이 화려한 그가 들어오자 학교에서는 선배이던 친구들이 곧바로 그에게 ‘이념 서클’을 맡겼다. 1학년이 지도하는 특이한 모양새가 된 것이다.

유신 독재의 마지막 해이던 1979년부터 시작해 4년 내내 마음껏 데모를 했다. 여러 이념 서클을 지원하고 고려대 처음으로 학회를 만들어 지도하는 등 학생이 아니라 ‘직업운동가’로 살았다.

이렇게 열심히 학생운동을 했으나 그는 학생운동이야 지나가면서 자동으로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나머지 긴 인생은 노동운동에 바치기로 했다. 그렇지 않아도 광주항쟁을 목도한 많은 대학생이 정치운동만으로는 사회를 바꿀 수 없다는 절박감으로 노동, 농민, 빈민 등 기층민중운동을 지향할 때였다.

성적과 취업에 목숨이 걸린 요즘과 달리 대학의 성적 관리가 느슨하던 시절이었다. 특히 운동권 학생이라면 출석을 거의 안 해도 시험만 치르면 학점을 주어 어서 졸업시켜 버리려 했다. 노회찬은 4학년이 된 1982년 서울기계공고 부설 영등포청소년직업학교에 등록해 전기용접기능사 2급 자격을 취득하고 현장 취업에 나섰다. 학교는 시험만보러 가서 졸업장은 받았다.

처음 취직한 곳은 인천에 있던 현대정공의 하청 공장이었다. 노동운동을 하려면 본인이 직접 노동자로 평생을 살아야 한다는 러시아혁명기의 인민주의적 분위기 속에 3년 가까이 열심히 공장에 다녔다. 이 3년간 받아 본 월급이 20여년 후 국회의원이 되기 전까지 받아본 거의 유일한 정규적 수입이었다.

노동자 생활은 오래 가지 못했다. 그가 공장에 다니는 동안, 대학생들 사이에는 현장 취업의 열풍이 불어 1985년쯤에는 전국에 위장 취업자가 만 명은 되리라는 말까지 돌았다. 출신 학교에 따라 소그룹을 만들거나 개별적으로 공장에 흩어진 이들을 전국적으로 조직하는 작업이 필요했다. 그렇지 않아도 수차례 시위를 주동하느라 경찰의 추적이 시작되어 공장에 다닐 수도 없게 되었다.

경찰은 그에게 공식적으로 수배령을 내렸고, 7년간의 기나긴 지하활동이 시작되었다. 정기 수입이라곤 없이 도대체 어떻게 먹고 살았는가가 알 수 없는, 그의 인생의 또 다른 미스터리가 시작된 것이다.

 

4. 인민노련에서 정의당까지

보수파가 이미 확보한 현실을 지키려는 사람들이라 이권다툼만 한다면, 진보파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상상해야 하니 논쟁이 필연적이다.

노회찬도 알게 모르게 우리 진보운동을 좌우한 중대한 논쟁과 이합집산의 한복판에 있던 인물이다. 독자적 진보정당을 만들 것인가 말것인가, 민족문제인가 계급문제인가, 사회주의인가 사회민주주의인가 등의 논쟁으로 야기된 주류 운동권의 분열 또는 연합을 이끌어 낸 사건들마다 그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이 논쟁들의 시원을 거슬러 올라가자면 ‘인민노련’이라는 약칭으로 더 잘 알려진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이라는 큰 바위를 만난다. 70년대 운동가들이 반파쇼 민주주의운동이라는 큰 틀 안에서 별다른 논점 없이 뭉쳐 있었다면, 잇달아 사회주의와 주체사상이 유입된 80년대 운동은 그 벽두부터 온갖 정파의 난립과 논쟁과 파쟁으로 얼룩졌다. 나쁜 의미든 좋은 의미든, 활동가들은 어딘가에 소속되거나 혹은 소속되기 위해 수백 종은 될 팸플릿을 읽고 밤새 논쟁을 벌여야 했다.

인민노련은 1986년부터 인천, 주안, 부천 등 경인 지역에서 활동하던 위장 취업자들이 결합해 투쟁을 전개하다가 1987년 6월 항쟁의 와중에 공식적으로 결성을 선포했다. 지도부는 노회찬, 주대환, 최봉근으로 구성되었는데 모두 민중민주주의적 성향(이른바 ‘피디PD’)이 강한 인물들이었다. 그래서인지 결성 직후 주체사상파를 포함한 민족해방 진영(이른바 ‘엔앨NL’)이 일방적으로 이탈하면서 인민노련의 성향은 더욱 선명해졌다.

인민노련은 당시 유행처럼 번지고 있던 주체사상파와 제헌의회파를 양 극단의 교조주의로 비판하며 실사구시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이에 양쪽으로부터 사민주의니 개량주의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으나 그 현실주의적인 노선은 인천뿐 아니라 전국의 활동가들로부터 상당한 지지를 확보해 나갔다. 탁월한 논객인 주대환, 최봉근, 황광우 등이 집필한 기관지의 영향도 컸다. 단시간 내에 정회원만 600명을 넘어서서 당시 전국에서 제일 큰 지하조직이라고 할 만했다.

노회찬 김지선 부부는 신영복 선생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덕에 결혼했다고 한다. 1994년 첫날 동해를 찾은 두 사람. (출처:노회찬 홈페이지)

 

인민노련에서 노회찬이 맡은 임무는 조직부장이었다. 그의 조직수완에 대해 주대환은 이렇게 증언한다.

“노회찬 씨는 자기주장을 먼저 내세우지를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서로 자기주장을 내세워 논쟁을 벌이도록 내버려 두고는 그중 다수를 차지한 주장을 선택해 자기 것으로 소화해 결론을 삼습니다. 자연히 큰 반발 없이 조직화에 성공합니다. 정략적으로 그렇게 한다기보다 본래 성품이 그런 사람이라고나 할까요? 타고난 조직가지요.”

조직 담당 중앙위원으로, 기관지 『사회주의자』 편집위원으로 인민노련을 이끌던 노회찬은 결국 수배 7년 만인 1989년 12월 24일, 성탄절 전야에 체포되어 2년 반의 옥살이를 해야 했다.

한편, 체포되기 1년 전인 1988년 12월에는 인천 지역의 다양한 노동자 조직에서 맹활약하고 있던 김지선과 결혼했다. 노회찬보다 한 살이 많아 1955년생인 김지선은 중앙여중을 졸업하고 16세 나이로 인천 대성목재 등 공장에 다니며 노동자로 일하다가 노동운동을 시작해 70년대에 두 차례나 구속된 적이 있는 맹렬한 활동가였다. 처음 보았을 때부터 그녀에게 반해 버린 노회찬은 둘이 처음 만난 자리에서 결혼하자고 구애했다가 거절당하는 등 적극적인 공세로 결혼에 성공한다.

둘 사이에는 아이가 없다. 혁명을 위해 안 가진 것이 아니라, 잇단 감옥살이와 수배 생활로 그럴 여유가 없다 보니 임신 적령기를 넘어 버린 것이다. 뒤늦게 한방과 양방을 다 동원해서 아이를 갖고 싶었지만 실패했다. 아이를 무척 좋아하는 두 사람은 입양이라도 하려고 신청했으나 집도 수입도 없다고 해서 자격 미달로 거절당했다.

1992년 석방되고 보니 인민노련을 주축으로 민중민주주의 계열의 여러 정파가 결합해 ‘진보정당추진위원회’, 약칭 진정추를 결성하고 있었다. 결성식에 5천 명이 모일 정도로 열의가 대단했다. 이미 1987년 대선에서 백기완을 민중 진영의 독자 후보로 내세운 주역이던 노회찬은 1992년 12월 선거를 맞아서도 백기완 선대본 조직위원장으로 활동했다. 선거 결과는 비참했다. 백기완은 1%밖에 얻지 못했고, 보수세력과 손잡은 김영삼이 당선되었다. 이에 많은 사람들이 진보정당운동을 포기하고 떠났지만 노회찬은 남았다.

진보정당 추진 세력은 우여곡절 끝에 1997년 민주노총, 전국연합 등과 합쳐 국민승리21을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이때도 노회찬은 진정추의 후신인 민중정치연합의 대표로 이를 주도했다. 국민승리21의 대통령 후보로 나선 권영길 역시 참패했으나 김대중의 대통령 당선으로 진보정당의 존립 여지는 넓어졌다.

이에 힘입어 2000년 1월에는 민주노동당을 결성했다. 이에 민족해방 계열도 대거 당에 합류하더니 다수파가 되었다. 이때부터 민족해방계열은 자주파로, 노회찬이 속한 민중민주계열은 평등파로, 권영길로 대변되는 중도파는 국민파로 불리게 된다.

운동권의 주류이던 자주파가 합류한 민주노동당은 2002년 지방선거와 2004년 총선에서 크게 선전했다. 비례대표 8명을 포함한 10명의 국회의원을 배출하여 조봉암의 진보당 이후 44년 만에 진보정당의 원내 진출에 성공한다.

2004년 선거는 노회찬에게도 처음으로 의원 배지를 안겨 주었다. 선대본부장을 맡았던 그는 당선되리라 예상하기 어려웠던 비례대표 8번으로 등재했는데 뜻밖에 턱걸이로 당선된 것이다.

선대본부장으로서 선거를 지휘하는 동안 그는 꼼꼼히 일지를 기록했다. 이는 ‘노회찬의 난중일기’라는 별칭으로 널리 알려졌고 『힘내라 진달래』라는 제목으로 제13회 전태일문학상 특별상을 수상했다. 한국 현대 노동운동의 기원이랄 수 있는 전태일의 이름으로 주어진 이상은 그가 받은 수많은 상 가운데 가장 가치 있는 상일 것이다.

초선 의원임에도 노회찬의 활약은 놀라웠다. 그는 국정감사의 피감기관이 뽑은 베스트 의원, 언론사 정치부 기자들이 뽑은 신사적인 의원, 시민운동가들이 뽑은 최우수 의정활동 1위, 방송국 피디들이 뽑은 최우수 의원 1위 등 여러 여론조사에서 최고의 인기를 얻는다. 출석률과 발언 등의 지표에서도 최우수 의원의 하나였고, 비정규직노동자 처우 개선 등 4년간 무려 467건의 법안을 발의해 31건을 가결시키는 등 입법 활동에서도 선두였다.

노회찬이라는 이름을 일반 국민들에게 널리 알리게 된 것은 이른바 ‘삼성 X파일’ 사건이었다. 1997년 대선 과정에서 안기부가 삼성그룹 이학수 부회장과 홍석현 『중앙일보』 사장의 통화를 불법으로 도청한 녹음테이프가 공개되었다. 그 속에는 삼성이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및 검찰 고위 간부들에게 거액의 뇌물을 뿌리며 인맥을 관리했다는 등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

‘삼성 X파일’과 관련한 2심에서 무죄를 받은 뒤 당시 진보신당 관계자들과 웃고 있는 노회찬. (출처: http://blacktv.tistory.com/501)

이 사실은 문화방송 이상호 기자가 먼저 방송을 통해 공개했는데 이때는 뇌물을 받은 검사들의 실명은 공개하지 않았다. 노회찬은 이에 해당 검사 7명의 실명을 공개해 불의 앞에 차별이 없음을 선포했다. 이에 검찰은 명예훼손, 「통신비밀보호법」 위반 혐의로 이상호 기자와 노회찬을 기소하고 나섰다. 길고 긴 재판 끝에 노회찬은 징역 6월에 자격정지 1년을 받아 국회의원 자격까지 잃었으나 2009년 2심에서 무죄판결을 받는다.

한편 2007년 12월, 다시 대선이 돌아왔다. 노회찬은 이 대선에 민주노동당 당내 경선에 나섰으나 국민파로 불리던 권영길에게 패했다. 북한 체제에 비판적이라는 이유로 평등파를 싫어하던 자주파가 집단적으로 권영길을 지지한 결과였다. 그러나 권영길은 처참한 득표로 패배하고 한나라당 이명박이 당선된다.

2007년 선거 후 민주노동당은 심각한 갈등에 빠져들었다. 주된 원인은 자주파 소속 간부 두 명이 민주노동당 당원 명단을 북한에 보고한 사건, 북한 핵실험에 대한 정파별 입장 차이, 당직 선거에서의 자주파의 전횡 등 대부분 자주파로 인한 것이었으나 자주파가 다수파로 주도권을 쥐고 있으니 개선이 어려웠다.

결국 노회찬은 2008년 심상정 등과 함께 민주노동당을 탈당해 진보신당을 결성하고 2009년 3월 단독으로 당 대표에 출마해 98%에 이르는 지지율로 당선된다. 이듬해에는 인민노련 동지이자 민노당 의원직을 함께 했던 조승수가 당대표로 선출되었는데, 다시 2010년 노회찬이 대표를 맡았다.

실패는 해도 실수는 하지 않을 듯 자기 관리에 엄격한 노회찬이 크게 실수를 하고 스스로 상처를 입은 사건은 2011년에 벌어졌다. 이 부분은 이번 인터뷰에서 이야기할 시간이 없었으므로 본인의 입장을 들어보지 못한 채 간략히 외부의 시선으로 정리해 보자.

진보신당은 2011년 들어 민주노동당과의 통합 논란에 휩싸인다. 2012년 총선을 앞두고, 진보신당의 역량만으로는 국회에 진출할 수 없으니 다시 민족해방 진영과 손을 잡자는 주장이 등장한 것이다.

이에 진보신당 당원의 다수가 반대했다. 민주노동당의 주류인 민족해방파와 이들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주체사상파와는 함께 할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일사불란하게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그들에 비해 기본적으로 자유로운 개인의 결합인 진보신당이 합류해 봐야 예전과 다를 게 없을 거라는 판단이었다. 결국 진보신당 대의원대회는 통합 안건을 부결시켰다.

그러나 노회찬은 대의원대회의 결정을 거부하고 심상정, 조승수 등과 함께 진보신당을 탈당해 새진보통합연대라는 조직을 만든다. 그리고 유시민이 이끌던 국민참여당과 함께 민주노동당과 결합, 통합진보당을 창당한다. 노회찬은 통합진보당의 대변인으로 선임되었다.

진보신당에서의 탈당을 두고 단순히 총선에서 당선되기 위한 것이라고만 폄하하기는 어려운 측면도 있는 게 사실이었다. 멋모르고 입당했다가 당원 게시판에서 일주일만 놀면 진저리를 치며 탈당해 버린다거나, 노무현을 지지했다가 입당한 사람에게는 반성문을 쓰게 한다는 등의 이야기가 나돌 정도로 경직되고 편협한 분위기가 지배하고 있던 게 사실이었다. 남자는 이래야 한다, 여자는 이래야 한다, 정치가는 이래야 한다는 식으로 상대방의 동의 없는 규칙을 창안해 놓고 이에 동조하지 않으면 적으로 규정하는 식의 오만과 편견이 진보운동권의 고질적인 허점인 것이 사실이다.

일단 통진당으로의 합류는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2012년 4월 11일의 총선에서 노회찬은 서울 노원 병 선거구에 출마해 두 번째로 당선되는 데 성공한다. 통진당은 노회찬 외에도 12명을 당선시키는 놀라운 성과를 이뤄냈다.

그러나 통진당은 선거 직후부터 극도의 혼란에 빠져 버린다. 당원 대다수가 이름도 모르고 있던 이석기가 비례대표 1번으로 선정되어 의원이 된 과정에 대한 반발로부터 시작된 분란은 한 달 후인 5월 12일 대의원대회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이 문제를 제기하던 유시민, 조준호 등이 소위 당권파 지지자 집단에 의해 공개적으로 폭행을 당하는 장면이 텔레비전을 통해 전국에 방송된 것이다.

이날의 폭력 사태로 노회찬, 심상정 등 다섯 명의 의원은 통합진보당을 탈당해 정의당을 만들게 된다. 그러나 노회찬은 삼성 X파일 사건으로 1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으며 당선 9개월 만에 의원직을 상실하고 말았다. 통합진보당도 2014년 결국 법원에 의해 강제 해산되어 의원 전원이 자격을 잃게 된다.

이 과정에서 노회찬은 본의 아니게 세 번이나 탈당하고 새 당을 만든 주역이 되고 말았고, 이로 인해 아직도 그를 비판적으로 보는 이들도 있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민주노동당 분당 사태 때나 진보신당에서의 탈당 사태 때나, 그는 최대한 당내 갈등을 완화시켜 통합을 유지하려 애쓴 인물로 평가되어 개인적 미움은 덜 받는 편이기도 하다.

2012년 10월 18일 진보정의당으로 창당해 2013년 정의당으로 당명을 바꾼 정의당은 구성원이 다양하다. ‘진보신당 탈당파’와 ‘통합진보당의 당내 패권주의와 종북 성향을 우려하던 혁신파’를 주축으로 시작된 정의당에는 진보신당의 후신인 노동당에서 추가로 탈당한 이들과 시민운동가들이며 소위 메갈리아 논쟁을 촉발한 여성주의자들까지 대거 합류해 있다.

왜 진보세력의 역량을 통합하지 않고 이합집산을 되풀이하는가 하는 비판은 일면의 진리만을 담고 있다. 좌파는 분열로 망한다는 말도 옳은 말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오지 않는 미래에 대한 상상과 계획은 무수히 많은 경우의 수로 나눠지는 게 정상이다. 유럽이나 남미처럼 진보세력은 평소에 녹색당, 사회당, 사민당, 기민당, 공산당, 좌파당 등 각자의 이론에 따라 별개의 정당으로 존재하는 것이 오히려 현실적이다. 억지로 통합시켜 끊임없는 분열상을 노출할 필요가 없이 평소에는 각자의 지론대로 나뉘어 활동하다가 선거 때 연합공천으로 뭉칠 수 있다. 공동 투쟁 사안이 생기면 또 뭉쳐 함께 싸울 수 있다. 무조건 뭉쳐야 한다, 무조건 통일되어야 한다는 말처럼 폭력적인 것도 없다. 이 세상에 단 하나의 진리가 있다는 믿음처럼 무서운 파시즘도 없다.

2016년 총선에서 노회찬은 창원성산에 출마해 더불어민주당 등 야권 후보와의 경선을 통해 단일후보로 확정되었고,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였던 문재인도 ‘야권 단일 후보’ 노회찬의 선거운동을 도왔다. (출처: http://gndomin.com/news/articleView.html?idxno=107829)

 

노회찬의 길이 항상 옳았다고 할 수도 없지만, 항상 옳은 단 하나의 진리의 길이 따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노회찬이든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이든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이든, 시기와 사안마다 옳다고 판단되면 서로 지지하고 틀리다고 판단되면 비판하면서 큰 길을 함께 걷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

노회찬 자신은 이런 문제에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을까? 영화감독 변영주와의 인터뷰에서 한 말을 인용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끝맺자. 진보신당 대표를 하던 2010년의 녹취록이다.

“진보를 좋아하고 진보를 지향하는 사람들 속에 가장 부족한 것이 다원주의, 다양성에 대한 이해와 관용의 태도라고 생각을 합니다. 자기하고 견해가 다르면 그것이 작은 일이든 큰 일이든 선을 확 그어 버리는 거죠. 저는 진보가 진보답지 않으면 보수를 이길 수 없다고 봐요. 자기가 지향하는 가치가 진보라는 이유로 자신의 모든 것이 다 합리화 될 순 없는 것이고, 끊임없이 진보는 진보적인 방식으로 풀려고 노력해야 하는데 오히려 바깥에서 진보세력을 볼 때 편협해 보이는 것이 현실이고 이것이 전혀 근거가 없는 건 아니라는 것이죠. 물론 과도하게 비판하는 면도 있지만 우리가 근거를 제공했다는 거죠. 이 싸움은 끝이 없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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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 주도 성장론과 소득 주도 성장론

유승경 정치경제연구소 대안

 

1. 머리말

새 정부의 경제성장 전략을 뒷받침하는 ‘소득 주도 성장론’이 주목을 받고 있다. 현재 문재인 정부가 추진 의사를 밝힌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와 ‘일자리 창출’ 등은 소득 주도 성장론에 입각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소득 주도 성장론은 노동자를 비롯한 서민의 소득이 향상되면 수요가 창출되고 이에 따라 기업 활동이 제고되어 성장이 촉진된다는 것을 내용으로 한다. 이에 대립되는 성장론은 ‘이윤 주도 성장론’이라 할 수 있는데, 그 내용은 기업 활동의 여건을 개선하면 투자가 활성화됨으로써 고용이 창출되고 경제가 빠르게 성장한다는 것이다.

엄밀하게 보자면, 이윤도 소득의 한 형태이기 때문에 ‘이윤 주도 성장’과 ‘소득 주도 성장’을 대립시키는 것은 이론적으로 적절하지 않다. 국민소득은 자본소득인 이윤과 노동소득인 임금으로 나누어지기 때문에 ‘이윤 주도 성장’과 대립되는 것은 ‘임금 주도 성장’이다.

하지만 한국에는 영세자영업자가 많기 때문에 임금이 아닌 전반적인 서민 소득이 향상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소득 주도 성장’이 ‘이윤 주도 성장’의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다.

과거 이명박, 박근혜 정부는 경제가 역동성을 갖기 위해서는 기업에 대한 감세와 규제 완화, 임금안정화와 노동시장유연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는데, 이러한 방침은 이윤 주도 성장론에 의해 뒷받침되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이윤 주도 성장론은 신자유주의의 성장 모델로서 1980년대 이후 세계적으로 하나의 규범처럼 받아들여져 왔다. 그렇지만 신자유주의가 세계적으로 소득불균형을 심화시키고 세계적인 불황을 가져왔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이윤 주도 성장론에 대한 대안으로서 임금 주도 성장론이 세계기구(ILO, UNCTAD 등)와 서구 학자들에 의해 제기되었다. 한국에서도 진보적 학자를 중심으로 임금 주도 성장론이 적극적으로 도입되었는데, 현재 새 정부의 소득 주도 성장론은 임금 주도 성장론의 한국판이다.

그런데 이윤 주도 성장론은 세계적인 불황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데,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이윤 주도 성장론을 뒷받침하고 있는 경제 사조가 여전히 경제학계에서 주류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서 정책 입안자들과 여론 주도층에게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글은 이윤 주도 성장론을 뒷받침하는 경제이론을 비판적으로 재검토한다.

이윤 주도 성장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 경제학은 일반적으로 “공급 측 경제학supply-side economics”으로 알려져 있다. 1930년대 대공황 이후 서구 경제학의 주류였던 수요를 중시하던 케인스주의가 1970년대에 발생한 스태그플레이션으로 한계를 보임에 따라 등장한 경제학 사조가 공급 측 경제학이다.

공급 측 경제학에 따르면, 경제성장은 공급 측 요인인 기업의 생산과 투자에 대한 장애를 완화해 줄 때 효과적으로 이뤄질 수 있다. 공급이 원활하게 이뤄지면 소비자가 상품을 저렴한 가격에 소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기업의 투자 확대에 힘입어 많은 일자리가 창출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공급 측 경제학은 기업에 대한 감세, 규제 완화, 노동시장유연화, 임금 억제 등을 경제 활성화의 관건으로 제시한다.

그런데 경제에서 공급의 역할을 강조하는 흐름은 명시적으로 혹은 암묵적으로 하나의 전제를 깔고 있다. 생산된 상품은 시장에서 큰 무리 없이 소화될 수 있다는 전제다. 이를 경제학에서는 ‘세Say의 법칙’이라고 하는데 공급 측 경제학을 비판하기 위해서는 세의 법칙에 대한 경제학의 오랜 논쟁을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2. 이윤 주도 성장론에 대한 이론적 비판

가) 세의 법칙

고전경제학은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서유럽에서 부르주아계급이 절대주의하의 봉건적 질서를 타파하고 자본주의를 발전시키던 시기에 등장했던 자유주의적 경제 사조다. 일반적으로 영국의 애덤 스미스(1723~1790)를 고전경제학의 효시로 보는데, 세Jean-Baptiste Say(1767∼1832)는 프랑스 고전경제학파다.

세는 생산에서 유래된 소득이 생산된 상품을 살 수 있는 구매력을 제공한다고 주장했다. 이후 케인스는 세의 주장을 “공급이 수요를 창출한다”로 정리하고 “세의 법칙”이라고 불렀다.

세에 따르면, 생산물이 팔리게 되면 비용을 구성하는 노동자 임금과 원자재 비용이 노동자와 판매자에게 주어지고 이윤이 자본가에게 주어지기 때문에, 생산물은 판매를 통해서 가격에 해당하는 만큼의 소득을 창출하고 그 소득은 시장의 구매력으로 전환된다. 따라서 공급은 스스로 수요를 창출한다.

한 상품이 생산되면 그와 동시에 그 순간부터 전체 가치에 해당하는 정도로 다른 상품들에 대한 시장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생산을 마친 생산자는 생산물의 가치가 감소하지 않도록 즉시 팔기를 원한다. 그는 또한 그것을 팔아서 얻은 화폐도 가치가 감소할 수 있기 때문에 즉시 처리하기를 원한다. 화폐를 처리하는 유일한 방법은 다른 상품을 구매하는 것이다. 따라서 한 생산물이 창조되는 상황은 즉시 다른 생산물에 대한 활로를 열어 준다. (Say, Jean-Baptiste, A Treatise on Political Economy (sixth American ed.), Philadelphia: Grigg & Elliott, 1834, pp.138~139.)

물론 세가 개별 상품시장에서 공급이 초과하게 되거나 부족하게 되는 것을 부정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전체 시장에서 전반적으로 초과 공급이 발생하지는 않으며 개별 상품시장의 불균형은 가격 변동을 거쳐 즉각적으로 조정된다고 믿었다. 만약 세의 법칙이 성립한다면, 자본주의경제는 정상적으로 작동할 경우 완전고용 산출을 위해 충분한 수요가 항상 보장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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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정부에 바라는 문화·예술정책

– 영화를 중심으로

 

임순례

 

소개

임순례
영화감독. 파리제8대학에서 영화학을 공부하고 와서《와이키키 브라더스》《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남쪽으로 튀어》《제보자》등 10여 편의 상업영화와 단편영화로 널리 알려졌으며 청룡영화상 등 10여 차례 상을 받았다. 동물 보호 단체 ‘카라’의 대표이기도 하다.

 

새 정부가 출범한 지 한 달 반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장관 인선 과정에서 다소의 잡음이 들려오기도 하지만 새 정부에 거는 국민의 기대치는 역대 어느 정부보다도 높다. 사실 어느 정부를 막론하고 ‘지원은 하되 간섭은 없는’ 예술정책이 가장 바람직한 기조이지만, 지난 이명박-박근혜 정부가 이 기조를 자신들 정권의 편의에 맞춰 뒤흔들어 놓았기 때문에 이를 바로잡는 작업이 반드시 필요하다.

영화 분야에서 영화인들이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 한다고 인식하고 있는 첫 번째 분야는 대기업의 투자-배급-상영의 수직 계열화 문제다. CJ, 롯데, 쇼박스, 메가박스, NEW 등 몇몇 대기업 계열사가 한국영화의 전체 공정을 장악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폐해가 너무나 크고 이 중에서도 특히 스크린 독과점 부분은 가장 심각한 문제라 아니 할 수 없다.

 

스크린 독과점 방지

며칠 전인 6월 21일 개봉한 《트랜스포머 5 ― 최후의 기사》의 경우, 한국 스크린 전체인 2,575개 중에 무려 1,739개를 차지해 거의 70%에 육박하는 점유율을 보였다. 30%에 불과한 나머지 스크린을 놓고 할리우드의 또 다른 블록버스터들과 국내의 대형 상업영화가 치열하게 다투는 구도에서는 다양한 영화를 골라 볼 수 있는 관객의 권리는 전혀 보장되지 않는다.

중소형 규모의 상업영화가 합리적 숫자의 스크린 수를 확보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현실이고, 극장을 겨우 잡았다 하더라도 관객이 많지 않으면 개봉한 지 며칠 만에 바로 ‘퐁당퐁당 상영’이나 조조/심야편성으로 내쳐진다. 최소 상영 일수 보장 같은 절실한 구호는 그저 헛된 메아리일 뿐이다.

스크린 독과점은 관객의 권리를 침해할 뿐만 아니라 한국 영화의 건강한 지형도 훼손한다. 투자자는 흥행이 불확실한 중급 규모의 영화보다는 리스크가 크더라도 대형 영화를 선호하기 때문에, 결국 티켓파워가 있는 몇몇 톱스타와 연출가 외에는 살아남기 힘든 구조로 치닫고 있다. 나는 1,000만 영화 한 편보다 200만 명 정도의 영화 다섯 편 흥행이 더 건강한 지형이라고 생각하지만, 200만 관객을 지향하는 영화의 기획은 투자자의 시선을 잡아채지 못한다.

대기업의 영화 산업 수직 계열화를 타파하는 것만으로는 스크린 독과점이 해결되지 않을 수 있다. 한 영화가 전체 스크린의 몇 퍼센트 이상을 가져가지 못하도록 하는 ‘스크린 독과점 제한에 관한 정책’이병행되어야만 한다.

프랑스는 12개관 이상의 멀티스크린 극장에서는 한 영화가 두 개관 이상 걸리지 못하게 법으로 금지하고 있고 12개관 미만의 극장에서도 전체 상영의 30%를 넘지 못하게 제한하고 있다. 프랑스의 관객들이 본 다양성영화(예술영화/독립영화)는 전체의 20.3%에 달하는 데 비해 한국은 3.8%에 머무르는 것은 바로 위와 같은 프랑스의 영화 정책 때문이다.

스크린 독과점을 방지하기 위한 노력이 한편에서 진행되고 있기는 하다. 작년 11월 안철수 의원과 도종환 의원이 대표로 영화 배급과 상영업을 동시에 할 수 없도록 하는 「영화 및 비디오물의 진흥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발의해 놓은 상태다.

 

독립영화와 예술영화의 활성화

두 번째 기대하는 정책이 독립영화와 예술영화 활성화다.

도종환 의원은 위의 법안 발의 시, 예술영화 전용상영관에 대한 지원 사업을 영화발전기금의 용도에 포함시키고 예술영화 및 독립영화를 연간 상영 일수의 60% 이상 상영하도록 법으로 정하는 안도 담았다.

도종환 의원은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에 취임한 후 첫 번째 대외 행사로 독립영화 전용상영관 ‘인디스페이스’를 방문하여 독립영화인들과 간담회를 가졌고, 이어서《재꽃》 관람으로 독립영화 활성화에 대한 의지를 재천명하였으니, 일단 이 부분은 매우 반가운 행보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지역별로 예술영화나 독립영화 전용상영관 혹은 시네마테크 건립등 관련 인프라를 확대하고 독립영화나 예술영화 제작과 배급에 전폭적으로 지원하는 것 또한 절실하다. 독립-예술영화의 활발한 움직임은 관객의 영상 문화 향유를 위한 다양한 선택권을 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들 영화의 창의성과 새로움을 통해 상업영화 산업 근간에도 건강한 자극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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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전 세계“ 기본소득 실험들”

박선미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사무국장

 

작년부터 국내외의 여러 매스미디어에서 다양한 “기본소득 실험”소식을 전하고 있다. 그 소식들은 기본소득이 바로 지금 세계 곳곳에서 실현되고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래서 그 실험들 각각의 현황을 제대로 이해하고 모두의 토론 주제가 될 만한 문제들을 끌어내는 것이 이번 글의 목적이다.

이번에 소개하는 “기본소득 실험들”은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 웹사이트basicincome.org의 ‘기본소득 뉴스Basic Income News’ 코너에 실린 케이트 맥팔런드Kate McFarland의 2017년 5월 15일자 글「지금 진행되고 있는 기본소득 실험들(과 기본소득 실험이라 불리는 것들): 개괄Current Basic Income Experiments (and those so called): An Overview)」을 발췌한 것이다. 따라서 성남시 청년배당을 비롯한 국내 실험에 대한 이야기는 이번에는 다루지 않는다.

 

1. 핀란드의‘ 기본소득’ 실험

2017년, 핀란드 중앙정부는 기본소득이 노동시장 참여에 미치는 효과를 조사하기 위해서 켈라Kela(핀란드 사회보장보험공단)에서 설계하고 총괄하는 2년짜리 실험을 시작했다. 실험 집단은 2천 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들은 2016년 11월에 켈라에서 실업수당을 받은 25~58세의 개인들(전국적으로 약 17만5천 명) 중에서 무작위로 추출된 사람들이다. 선택된 사람들은 기본소득 프로그램에 의무적으로 참가해야 한다.

참가자 2천 명은 매달 560유로(약 590US달러)를 조건 없이 지급받고 있다. 핀란드의 현행 실업부조 프로그램들과 달리, 이 시범 시행프로그램은 수급자들에게 구직 활동 중임을 증명하거나 제안된 일자리를 받아들이는 것을 요구하지 않으며, 일자리를 구하더라도 560유로 전액을 계속 받게 된다. 따라서 모든 핀란드인들을 대표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표본이지만, 개별적으로 지급하는 현금이라는 점은 기본소득의 정의에 맞는 특징이다. 비록 살아가는 데 충분한 기본소득은 아니지만 말이다.

실험은 2017년 1월 1일에 공식 개시됐고 1월 9일에 첫 지급금을 배부했으며, 2018년 12월 31일까지 계속될 것이다.

켈라는 실험 집단의 결과를 통제 집단의 결과와 비교할 것인데, 이 통제 집단은 모집단(2016년 11월에 켈라에서 실업수당을 받은25~58세의 개인들)의 나머지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 위에서도 말했듯, 분석의 초점은 노동시장 참여에 있기 때문에, 예를 들면 실험 집단과 통제 집단 사이의 고용률 차이를 분석한다. 최근 설명에 따르면, 약물 치료 지출, 의료서비스 이용, 소득 변화에 대해서도 추적 관찰할 것이라고 한다.

관찰자 효과를 방지하기 위해서, 켈라는 실험 기간 동안 인터뷰나 설문조사를 전혀 하지 않고 있고, 2018년 말에 실험이 끝나기 전에 어떠한 결과물도 내지 않을 것이다.

 

2. 기브다이렉틀리의 케냐 기본소득 실험

미국에 기반을 둔 자선단체인 기브다이렉틀리GiveDirectly가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이 프로젝트는 케냐의 농촌 지역 주민들에게 조건없이 현금을 이전하는 것이며 최종적으로 마을 200곳 주민들(다 합치면 약 26,000명)에게 조건 없이 현금을 지급하게 될 것이다.

실험은 2016년 10월에 한 마을에서 시작되었는데, 현재 그 마을의 주민 95명 모두가 매달 약 23US달러(21유로)의 현금을 조건 없이 받고 있다. 이 금액은 케냐 농촌 지역 평균소득의 대략 절반에 해당한다. 이 현금 지급은 이 마을에서 12년 동안 계속 이뤄질 것이다. 현재는 이 최초의 “시험 마을test village”만 기본소득을 받고 있다. 기브다이렉틀리의 목표는 2017년 9월에 완전한 실험을 시작하는 것이다.

완전한 연구에서는 마을 300곳이 네 집단 중 한 집단으로 무작위 배정될 것이다. 네 집단이란 모든 주민이 조건 없이 현금을 받는 일정 방식의 실험 집단 세 개와 주민 중 누구도 현금을 받지 않는 통제 집단한 마을이다.

첫 번째 실험 집단에는 마을 40곳이 속하게 될 것인데, 그 마을 주민들은 (최초의 실험 집단에서처럼) 12년 동안 매달 약 23US달러의 현금을 받게 될 것이다. 두 번째 실험 집단에는 마을 80곳이 속하게 되고, 주민들은 매달 첫 번째 집단과 같은 액수의 현금을 받게 되지만, 2년 동안만 받게 될 것이다. 세 번째 실험 집단 또한 마을 80곳이 속하게 되는데, 주민들은 2년 동안의 기본소득과 똑같은 액수를 한꺼번에 받게 될 것이다.

기브다이렉틀리가 자체 웹사이트에서 설명하듯,“ 첫 번째 마을 집단과 두 번째 마을 집단을 비교하는 것은 미래의 지급에 대한 보증이 오늘의 결과들(예를 들면, 창업 같은 모험을 하는 것)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밝혀 줄 것이다. 두 번째 집단과 세 번째 집단의 비교를 통해 우리는 주어진 액수의 돈을 나누어 지급하는 것이 그 돈의 효과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이 단체는 또한 “경제적 상태(소득, 자산, 생활수준), 시간 사용(노동, 교육, 여가, 공동체 참여), 위험 감수(이주, 창업), 젠더 관계(특히 여성 역량 강화), 삶에 대한 포부와 전망” 등에 관한 결과들을 조사할 것이라고 한다.

기브다이렉틀리는 자료(예를 들면, 이 첫 시범 시행 참가자들의 첫 설문조사에 대한 반응들)를 모으면 대다수를 공개하고 있고, 일이년 후에 첫 실험 결과들을 책으로 펴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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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와 신 포도

임영근 정치경제연구소 대안 연구원

 

지금 기억하기에, 맨 처음 가져 본 철학 책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이었다. 중학교를 졸업할 때 받은 상에 딸려 온 상품으로 받은 것이었다. 딸려 왔다고 표현했지만 상장보다야 상품에 마음이 끌리는 법. 책이 귀하던 시절에 상품으로 받은 책이 무척이나 반가웠다. 노란색 표지에 비닐 커버가 씌워져 있어서 매끄러운 감촉이 기분 좋았다. 하지만 기쁜 마음은 딱 거기까지였다.

로마의 황제가 썼다는 점이 흥미를 끌기는 했지만, 『명상록』이라는 제목이 썩 내키지 않았다. 더구나 책을 펼쳐 보니 세로쓰기로 되어 있어 읽고 싶은 마음이 또 한 번 꺾였다. 그래도 몇 줄 읽어 보았지만 무슨 말인지조차 이해하기 힘들었다. 중학교를 갓 졸업한 까까머리 남학생과『명상록』이 어울린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어린 내가 읽어서 도움 안 되는 내용이 많을지도 몰라.’ 아마 이런 식의 합리화도 했을 것이다. 비닐 커버를 씌우는 기술이 좋지 않아 비닐 커버에 갇힌 표지가 우는 경우가 많았다. 이 『명상록』도 표지가 비닐 속에서 울고 있었다. 나와『명상록』이 어긋난 것처럼.

그 뒤에 철학과에 입학을 했지만 『명상록』을 읽을 기회가 오지는 않았다. 한참 뒤에 영화 《글래디에이터》를 보면서는 한번 읽어 봐야할까 하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회색빛 전투 장면에 강한 인상을 받았는데, 그 한가운데서 마치 달관한 듯한 태도로 묵묵히 있는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모습이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때에도 『명상록』을 찾아 읽지는 못했다. ‘어차피 좋은 번역본도 없을 거야,’ 이런 자기 위안도 했을 것이다. 이렇게 저렇게 핑계를 대며 뒤로 미뤄 둔 책이 어디 한두 권이겠는가?

 

황제의 조언

『명상록』을 읽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믿을 만한 번역본이 나온 지도 오래 되었고, 사 두고 오랫동안 묵혀 두는 일이 민망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이 꼭지의 글을 쓰기 위해서였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Antoninus(121~180)는 로마제국의 16대 황제이자 오현제의 마지막 황제이며 스토아철학자로 유명한 인물이다. 『명상록』은 후대에 많은 학자에게 큰 영향을 미쳤고 이천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꾸준히 여러 사람의 사랑을 받고 있다.

지도자들이 자신의 지도력을 과시하기 위해 고전을 읽는다고 내비치는 경우가 종종 있다. 1980년대에 전두환이 대통령 전용기 안에서 정약용의 『목민심서』를 읽는 것처럼 ‘코스프레’를 펼친 적이 있는데, 우리들끼리 실컷 조롱했던 기억이 난다. 미국의 빌 클린턴에게는 『명상록』이 그런 책이었던 것 같다. 클린턴이 『명상록』을 즐겨 읽으며 삶의 교훈을 얻는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다. 하지만 “고결한 행동”을 높이 평가하는 스토아주의 철학자의 책을 클린턴이 제대로 읽었으리라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더군다나 르윈스키 스캔들을 생각하면 클린턴은 별로 할 말이 없을 것이다. 미국의 어떤 비평가의 말마따나, “왜냐하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성적 열정의 무분별함을 설교했던 반면 빌 클린턴은 이를 실천했기 때문이다.”

『명상록』은 모두 열 두 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권의 구성이 특이하다. “나의 할아버지 베루스 덕분에 나는 순하고 착한 마음씨를 갖게 되었다.” 이 첫 문장을 시작으로 자신의 삶이 가족들과 여러 스승에게 빚지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일관성 있게 서술된 점으로 미뤄 볼 때 1권은 따로 쓰인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1권 끝에는 “그라누아 강변의 과디족 사이에서 적다,” 2권 끝에는 “카르눈툼에서 적다,” 이렇게 밝히고 있어 이 두 권은 전장에서 쓴 글임이 분명하다.) 나머지 권들은 모두 짧은 경구로 이루어져 있다. 몇 가지 필사본에 제목으로 적혀 있다는 “자기 자신에게”처럼 이 책은 자기 자신에게 쓴 수상록 같은 책이다. 그러므로 본문에 나오는 “너”는 저자 자신으로 읽어야 할 것이다.

우선 『명상록』에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만한 경구들이 가득했다. 몇 가지 경구를 먼저 읽어 보자.

네 안을 들여다보라. 네 안에는 선의 샘이 있고, 그 샘은 네가 늘 파내어야 늘 솟아오를 수 있다. (7권 59)

불의의 공격에 대비하여 꿋꿋이 서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삶의 기술은 무용의 기술보다는 레슬링의 기술과 더 비슷하다. (7권 61)

네가 화가 나 폭발하더라도 사람들은 여전히 같은 일을 하고 있을 것이다. (8권 4)

남의 과오는 있던 자리에 그대로 내버려 두라. (9권 20)

최선의 복수 방법은 네 적처럼 되지 않는 것이다. (6권 6)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유명한 대목도 있다. 마르쿠스의 풍부한 감수성이 잘 드러나 있다.

우리는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에 수반되는 현상들도 우아하고 매력적인 면이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예컨대 빵을 굽다 보면 몇 군데 균열이 생기는데, 이런 균열은 어떤 의미에서는 빵 굽는 사람의 의도에 어긋나지만 우리의 주목을 끌어 나름대로 식욕을 돋운다. 무화과도 가장 잘 익었을 때 갈라지고, 농익은 올리브도 썩기 직전에 아름답다.

이처럼 누구나 아름답다고 느낄 만한 것들만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얼핏 보기에 전혀 아름답지 않은 모습도 마르쿠스는 아름답다고 이어서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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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일해도 가난한가?

-대선 직전 실시한 비정규직 실태조사 결과

 

구교현 평등노동자회 사무국


1. 들어가며

새 정부 들어 비정규직 문제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정부가 주도해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화를 선언한 상태에서 민간도 비정규직 정규직화에 하나둘 동참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 사회 비정규직노동자의 현실과 요구를 정확히 진단하는 작업은 매우 중요할 것이다.

평등노동자회는 대선 직전인 4월 한 달간 네 개 비정규직노동조합과 함께 비정규직노동자와 관련된 실태조사를 진행했다. 그 과정에서, 아무리 일해도 가난을 벗어나기 힘든 비정규직노동자의 현실을 구체적으로 파악하게 되었다. 또한 최저임금을 1만원으로 올리고 생활비를 낮추기 위한 정부의 적극적인 조치가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현재의 신자유주의 시스템은 생산 영역뿐만 아니라 재생산 영역에서도 노동자를 수탈한다. 생산 영역에서는 저임금과 불안정 일자리로, 재생산 영역에서는 주거비·부채를 비롯해 교육·의료·통신 등 사회서비스를 통해 광범위한 수탈이 벌어지고 있다. 결국 노동자들은 일정 정도 임금이 인상된다 하더라도 빈곤을 벗어나기 힘든 상태다.

불안정노동자들의 연대 운동을 구상하고 있는 평등노동자회는 재생산 영역에서 벌어지는 수탈에 저항하는 운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일터의 문제는 제각각 사안이 다양하므로 웬만한 장기 투쟁을 벌이지 않고서는 연대 운동이 어렵다. 그러나 생활 이슈는 불안정노동자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므로 연대의 가능성이 확장된다. 평등노동자회는 이번 조사를 시작으로 생활 문제 각각에 대해 보다 면밀히 조사하고 대안을 마련해 나가고자 한다.

 

2. 조사 개요와 결과

이번 조사는 평등노동자회와 정치경제연구소 대안이 공동으로 진행했다. 조사 기간은 2017년 4월1일 ~ 4월 30일이며, 결과 정리에 약 3주가량이 소요되었다. 조사 대상은 수도권 지역 비정규직노동조합(공공운수노조 서울경인공공서비스지부, 공공운수노조 의료연대본부 돌봄지부, 전국여성노동조합, 희망연대노동조합) 조합원이며, 조사는 조합원들이 근무하는 사업장마다 조사원들이 방문해 구조화된 설문지에 응답자가 직접 기입하는 방식을 취했다. 문항 수는 총 48문항이며 전체 응답자는 372명이었다. 조사 대상은 한국의 대표적인 비정규직 직종 중 임금, 성비, 연령 등을 고려해 평균 수준에 가까운 비정규직노동자들로 선정했다. 성비는 전체 비정규직노동자의 남녀 구성이 1 대 1.5인 것을 고려해 35 대 65로 구성했다. 연령은 전체 비정규직 중 비율이 높고 생활 문제에 민감한 40세 이상을 주로 선정했다(응답자 가운데 60세 이상 43.0%, 50~59세 23.4%, 40~49세 21.8%, 39세 이하 11.8%). 응답자의 업종별 분포는 아래의 <표 1>과 같다.

임금은 실수령액이 151만원으로 나타나 전체 비정규직의 평균임금 151만원(2016년 경제활동인구조사 부가조사)에 비해 14만원가량 많은 것으로 조사됐다. 이는 응답자들이 노조를 통해 4대보험을 쟁취하고 임금을 꾸준히 높여 왔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로 보인다. 따라서 평균적인 비정규직노동자들의 실태는 본 조사 결과보다 나쁠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아울러 한국의 비정규직노동자들은 일해도 가난한 ‘워킹 푸어working poor’ 상태라는 것이 수치로 확인됐다. 본인과 배우자의 소득, 공적이전 소득 등을 합한 금액보다 기본 생활비가 더 높게 나타난 것이다. 기본 생활비에는 문화·여가, 저축·보험, 교통비 및 기타 서비스 이용료 등은 포함하지 않아 이를 위해선 빚을 져야 하는 상황이다. 가족 전체를 합한 소득이 100일 때 기본 지출(의식주·공과금·교육비·의료비)은 103.85로 나타났다.

임금수준별로 나눠 보면, 임금이 가장 높은 직종의 응답자들은 소득 대비 소비지출이 91.12로 조사된 반면, 임금이 가장 낮은 직종의 응답자들은 소득 대비 소비지출이 119.5로 조사됐다. 이는 소득과 관계없이 필수적인 소비지출은 (아무리 저소득층이라도) 일정 수준 이상이 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보여 주고 있다.

한편 응답자의 10명 중 6~7명이 부채가 있다고 응답했으며, 금액은 평균 6천5백만원 수준으로 조사됐다. 응답자의 주거 형태별로 보면, 자가 거주자의 60%, 전세 거주자의 73%가 부채가 있다고 응답했다. 부채의 주요 원인은 주택 마련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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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에 바라본 6월항쟁

안효상 편집주간

 

거대한 촛불집회와 대통령 탄핵을 거쳐 사람들이 바라는 ‘민주 정부’가 탄생한 시점이 6월항쟁 30주년 직전이라는 것을 보면서 역사의 간계를 느끼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한국 근현대사가 해방과 민주주의를 위한 지난한 투쟁의 시간이었지만, 어느 정도 안정적인 민주주의 체제가 수립될 가능성을 보인 것은 6월항쟁 덕분이었다. 6월항쟁이 그럴 수 있었던 것은 다수가 공통의 목표로 싸웠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다수가 공통의 목표로 싸운 이번 촛불시위 속에서 6월항쟁이 연상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더 나아가 ‘이번 일로 유신이 끝났다’라는 평가에서 유추할 수 있는 것처럼, 지난 십 년 간의 정부가 매우 권위주의적이고 반민주적인 행태를 보였기 때문에 내용적으로도 6월항쟁과의 유비는 적절해 보인다.

이렇게 긍정적으로 보이는 면에서만 유비가 가능한 것은 아니다. 6월항쟁 직후 ‘노동자대투쟁’이 벌어지면서 민주주의 체제의 본질이 드러나긴 했지만, 여야로 구성된 8인위원회에서 급조된 87년 헌법과 이에 기초한 대통령 선거는 민주주의를 매우 형식적이고 통제된 한계 내에 머물게 했다. 이번에 벌어진 촛불집회의 장기적인 효과가 어떠할지는 아직 가늠하기 어렵지만, 6월항쟁으로 등장한 87년 체제의 여러 가지 한계가 일정 부분 6월항쟁의 성격과 진행에서 기인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촛불집회가 곧바로 대통령 선거와 새로운 정부에 대한 광범위한 지지로 이어진 것도 이번 사태의 제한된 결과를 예감하게 한다. 그러니 꼭 30주년이라서가 아니라 그 사건을 다시 보는 것은 어떻게해서든 현재적인 의미가 있다.

 

1980년 광주항쟁에서 1987년 6월항쟁으로

짧게 보면 6월항쟁은 1987년 1월에 있었던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서 시작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사건은 전두환 정권의 폭력성을 노골적인 방식으로 드러냈을 뿐만 아니라 광범위한 정치적, 사회적 연합의 형성과 대중적 동원의 감성적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길게 보면 1980년 광주항쟁에 대한 군부의 폭력적인 진압이 이미 씨를 뿌렸다고 할 수 있다.

신군부가 박정희 장군과 달랐던 점은 권력 장악 자체가 대중에게 부당한 것으로 보였다는 점이다. ‘박정희 신화’에서 잘 드러나지만 박정희의 쿠데타와 집권은 사후적으로 정당화할 수 있는 요소들이 있었다. 그 요소들이란 반공을 기반으로 안보와 성장을 추구하는 경제 발전이었다. 이에 반해 전두환 장군이 이끄는 신군부는 유신 체제의 연장 시도 및 개인들의 권력욕 이외에는 정당화할 요소가 전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광주의 피를 먹고 정권이 들어설 수 있었지만 그 피는 서서히 퍼지는 독이었을 뿐이다.

이런 상황을 만회하고자 정권이 시도한 것이 1983년 말부터의 ‘유화 조치’였다. 제5공화국 헌법이 대통령 7년 단임제를 채택한 것은 유신 체제를 연장시키면서도 개인의 권력욕을 실현할 수 있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임시적인 조치였던 것이 권력 구조가 되었을 때 이를 정당화하는 전략과 유지할 수 있는 조치가 필요했고 이것이 ‘유화 조치’로 나아간 것이라 볼 수 있다. 두 차례에 걸친 정치 피규제자 해금, 구속자의 석방, 사면, 복권, 제적생 복교, 학원 상주 경찰의 철수, 해직 교수 복직 등으로 이루어진 유화 조치는 권력의 사회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방책이었다.

이렇게 통제된 자유화는 이중의 효과를 낳았다고 할 수 있다. 하나는 정권의 의도대로 장기적으로 중산층의 포섭을 가져오게 된다. 하지만 이는 장기적으로만 그러한데, 왜냐하면 당장은 6월항쟁의 또 다른 직접적 계기였던 1987년 4·13 호헌 조치에 대한 중산층의 항의를 겪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6월항쟁과 그 이후 기성의 야당 정치인과 종교계를 통해 형식적 민주주의 체제 내로 중산층을 포섭하는 데는 ‘결과적으로’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다른 하나의 효과는 반체제적 동원이 좀 더 넓게 이루어질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되었다는 것이다. 유화 조치 이전까지는 일부 헌신적이고 전투적인 학생들의 소규모 운동만이 가능했지만 이제 정치적 동원이 좀 더 넓게 좀 더 쉽게 이루어질 가능성이 마련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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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단과 적폐

농단과적폐

 

마지막 달에 내는 잡지의 머리글이니 짧게라도 올해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올해’란 2017년 1월부터가 아니라 촛불이 시작된 2016년 10월 말부터 지금까지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세상에 드러난 직후 언론에 가장 많이 등장한 단어는 사람, 재단, 기구 따위의 이름을 제외하면 아마도 “농단”일 것이다.

“국정 농단”이라는 어색한 표현에서 ‘농락籠絡’을 떠올린 사람들이 있을 수 있지만, 사실 농단과 농락은 전혀 관계가 없는 말이다. ‘농단壟斷/隴斷’은 높은 언덕이라는 말이고, 『맹자』에 나오는 이야기에서는 그런 언덕에 올라 아래를 둘러보고 세상 돌아가는 것을 파악하고는 그로 인해 이득을 독점하는 것을 뜻한다.

“국정 농단”은 매우 너그럽고 고상한 표현이었다. 검찰이 박근혜 들을 기소할 때의 죄목은 직권남용, 강요 또는 강요 미수, 뇌물 수수, 공무상 비밀 누설 따위일 뿐이다. 따라서 부정 입학, 문화계 블랙리스트, 보안 손님 따위의 사태를 접하고 누군가 ‘농락’을 생각하게 된다면 자연스러운 일일 테다. 남을 교묘한 꾀로 휘잡아 제 마음내로 놀리거나 이용하는 것이 농락이니, 국정을 농락했다고 생각할 수 있으니까.

‘농단’ 세력에 대한 재판은 아직도 진행 중이고, 재판 진행 과정에서도 국민은 농락당하는 느낌이다.

그 인물들에 대한 수사나 재판과는 별도로, 새 정부가 들어선 이후 자주 등장한 단어로는 “적폐積弊”가 있다. 하지만 일찍이 2014년 현충일 추념사에서 당시 대통령 박근혜도 그 단어를 입에 올린 바 있다. “뿌리 깊은 적폐를 해소하지 않고는 국민 안전은 물론 경제 부흥도, 국민 행복도 이루기 어려울 것입니다. 지금이 아니고는 해낼 수 없는 일입니다.” “국민 안전”이 세월호 사건을 생각하고 한 말이라면 참으로 뻔뻔스러운 일이지만, 어쨌든 이때 말한 “적폐”가 언제부터 시작된 것인지는 불분명했다.

이와 달리 문재인 정부의 적폐 청산은 박근혜 정부에서 시작된 것을 겨냥하다가 이명박 정부까지 확장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두 정부를 거치며 ‘오랫동안 쌓이고 쌓인 폐단’을 쓸어 없애겠다는 것이 지금의 “적폐 청산”이다. 국정원에 적폐청산태스크포스가 설치되고 국방부에 적폐청산위원회가 설치되어, 박근혜가 당선되던 대통령 선거에 이명박 정부의 국정원이 ‘댓글 부대’를 운영했음을 밝혀냈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의 적폐 청산 의지를 의심하게 만드는 일은 적지 않다. 국회 인사청문회를 거치며 ‘고위 공직자’들이 하차하는 것이 그렇고, 세월호에서 유골을 발견하고도 쉬쉬하는 것이 그렇고, 청와대 정무수석이 뇌물 혐의로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이 그렇다.

백 번 양보해 이런 것은 일부 개인과 관련된 일이라 치더라도, 정책과 관련해서도 적폐를 청산하지 않고 오히려 그럴듯하게 포장하려는 모습을 문재인 정부는 보이고 있다. 이번 호에서, 박근혜 시절의 “규제프리존”이 “샌드박스”로 이름만 바뀌고 있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후보 시절 사드 배치 문제는 다음 정부에서 결정하자던 대통령은 사드 배치에 적극적이고, 건설 중인 핵발전소 문제는 공론화위원회라는 틀로 책임을 넘겨 공사를 지속할 수 있게 되었다. 한마디로 무엇이 청산할 적폐인지를 놓고 현 정부는 오락가락하고 있다.

행사장에서 대통령 옆에 앉게 되는 사람이 바뀌고, 대통령이 구내식당을 이용하고, ‘국민신문고’가 어느 정권보다 활성화되는 등 직전 정권과는 달리 소통하려는 모습을 보이는 것에는 성공한 듯하다. 탄핵된 대통령을 언론에서 아무 직함 없이 그냥 ‘박’으로 쓰는 것이 어쩌면 가장 큰 변화일지도 모른다.

“신자유주의 종식”이 시대의 과제라고 생각하는 우리로서는 답답할 뿐이다.

답답한 일은 그곳에서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번으로 두 번째인 민주노총 임원 직접선거는 애초의 취지를 보잘것없게 만들고 있다. 새로운 시대, 새로운 정권에 대응하는 전략을 준비해 조합원들과 토론하기보다는 그저 선거 일정을 진행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그리고 이른바 ‘좌파’가 공동으로 대응하기로 했던 시도가 있었지만, 공동의 대응이 불가능하게 끝났다. 반전과 평화를 말하려는 행사에 참가하려던 허영구 평등노동자회 대표는 일본 정부의 입국 불허로 인해 오사카공항에서 조사를 받다가 귀국했다.

이렇게 또 한 해가 지나갔다. 내년에는 좋은 소식을 기대해 본다. 기본권을 강화하자는 국가인권위원회의 개헌 권고안이 적극적으로 논의되고 있다거나, 모든 표가 같은 가치를 갖도록 선거제도 개혁이 진행된다거나, 온국민기본소득운동본부가 이름처럼 많은 국민의 운동을 포괄하는 활동을 한다거나. 한 해 동안 관심과 애정을 보인 모든 분들께 고마움을 전한다.

 

편집위원회를 대신하여
김태호

 

이 글은 『시대』 2017년 12월호 통권54호에 실린 ‘책 머리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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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의 확장과 ‘혁명적 개혁’

민주주의의 확장과 혁명적 개혁

 

지난 10월 20일에 있었던 신고리5,6호기공론화위원회의 공론 조사 결과 발표 및 최종 정책권고안 제시는 우리에게 몇 가지 시사점을 준다. 우선 탈핵과 관련해서 사람들이 보일 수 있는 이중적인 태도를 확인할 수 있었다. 당장 문제가 된 신고리 5, 6호기 건설의 중단과 재개에 대해서는 시민참여단의 59.5퍼센트가 건설 재개에 찬성표를 던져 신고리 5, 6호기는 한국 원자력발전소의 대열에 합류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원자력 발전의 축소, 유지, 확대’와 관련해서는 축소가 53.2퍼센트, 확대가 9.7퍼센트로 ‘장기적으로’ 탈핵으로 가는데 찬성했다. 471명의 시민참여단이 얼마나 대표성이 있는가, 그리고 그리 길지 않은 숙의와 토론 과정을 얼마나 의미 있게 볼 것인가와 상관없이, 장기적으로는 탈핵에 찬성하는 경향이 있지만 단기적으로는 현상 유지를 택하는 경향을 보여 주었다. 여기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을 텐데, 당장 쟁점이 된 건설 중단이냐 재개냐와 관련해서는 이른바 ‘매몰 비용’ 문제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건설 재개 찬성 쪽에서 제시한 ‘수출’, ‘국익’ 같은 것을 들 수 있는데, 이는 결국 ‘경제적 공포’를 부추긴 것이고 여기서 안전과 가치 등은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후 탈핵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의미 있는 로드맵을 제시하는가가 중요한 문제라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서 정부는 10월 24일 국무회의를 통해 ‘탈원전 로드맵’을 의결했다. 이에 따르면 신고리 5, 6호기를 제외한 신규 원전 6기 건설 백지화, 노후 원전 14기의 수명 연장 불허 등을 통해 2038년까지 원전을 14기로 줄인다고 한다. 이와 함께 2030년까지 신재생에너지 비율을 20퍼센트로 높인다고 한다. 끝으로 해당 지역과 산업이 ‘연착륙’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고 한다.

이런 로드맵을 보면서 우선 떠오르는 것은 시간이 매우 길다는 것이다. 탈원전은 직접적으로는 ‘위험한 에너지’를 더 이상 사용하지 말자는 것이지만, 기후변화를 초래하는 기존의 화석에너지 체제에서 재생에너지 중심의 새로운 에너지 체제로 전환하자는 맥락에서도 필요한 것이다. 이를 감안할 때 좁은 의미의 탈핵이 아니라 에너지 체제 전환이라는 큰 맥락에서 시간 계획을 다시 세울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는 에너지 체제의 전환만이 아니라 사회적 전환을 포함하는 것이 될 텐데, 과연 집권 세력이 이러한 상상력과 의지가 있는지는 의문이다.

시민이 참여하는 공론화 과정에 대해서는 대체로 여론이 호의적인 것으로 보인다. 특히 과거 정권에 ‘불통’이라는 트레이드 마크가 있었기 때문에 시민의 직접 참여, 토론, 의견 개진 등의 과정은 그 결과와 상관없이 주목을 받았고, 이후 발전시켜야 할 어떤 것의 지위를 얻었다. 그런데 이 자체를 발전시키는 것과 별개로 기존의 정치과정에 시민의 참여를 어떻게 폭넓게 보장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있다. 예컨대 한국의 헌법은 입법발의권이나 소환 등 직접민주주의의 요소가 하나도 없다. 또한 숙의 민주주의를 위한 조건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말해야 한다. 간단하게 말하면 시간과 돈은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다. 이것도 에너지 체제 전환과 마찬가지로 기존의 경제사회적 삶과 양립하기 어렵다. 그리하여 더 커다란 변화가 요구되고 있다.

 

신고리 5, 6호기를 둘러싼 공론화 과정은 민주주의적인 방식으로 변화 혹은 이행을 추구할 때 나타나는 난점을 보여 준다. 근본적인 문제는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저널리즘 용어로 말할 수 있는 기성 질서의 강고함이다. 사실 동어반복이긴 하지만 강고하고 지배적이기 때문에 우리가 기성 질서라고 부르는 것이다. 기성 질서의 강고함과 그 강고함을 유지하기 위한 유연함은 사실 87년 체제에서도 이미 경험한 바가 있다. 물론 민주주의 체제가 가지는 개방성으로 인해 권리의 진전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고, 체제 자체가 안정적이지 않다는 것도 분명하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적응력과 맞물린 기성 질서의 강고함과 유연함은 언제나 ‘포섭’의 위험을 안고 있다는 것도 분명하다.

특히 오늘날 문제가 되는 것은 혁명 혹은 대중의 봉기마저 흡수하는 민주주의 ‘체제’의 완고함이다. 이때 체제로서의 민주주의는 절차적 정당성뿐만 아니라 소유적 개인주의까지도 어느 정도는 확고하게 자신의 정당한 내용으로 삼고 있다. 현 정권을 탄생시켰다고 할 수 있는 ‘촛불혁명’조차 이런 민주주의 앞에서 무력했다고 할 수 있다. 아니 그 혁명의 주된 요구가 제한된 의미의 민주주의의 회복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적절한 수렴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더 커다란 변화의 가능성은 어디에 있으며, 어떤 전략이 필요한가? 아마 변화의 가능성은 민주주의의 확장과 이 속에서 나타날 틈새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이는 민주주의를 다시 정의하는 것에서 시작할 것이며, 현 체제의 난점과 모순을 찾아내는 일과 함께 이루어질 것이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기본소득개헌운동을 예로 들어보자. 국민의 권리이자 국가의 의무로 기본소득 보장을 새로운 헌법에 넣고자 하는 시도는 민주주의를 확장하려는 시도다. 현행 헌법에도 있듯이 현대 국가가 그 구성원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해야 한다는 것은 공히 인정되는 바다. 하지만 보장의 정도와 방법은 정해진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기존의 사회경제적 체제 속에서 사실상 보장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기본소득을 권리로서 보장하자는 것은 구체적인 방도를 헌법에 넣는 것일 뿐만 아니라 사회경제적 영역으로 민주주의를 확장하려는 시도다. 따라서 이는 커다란 충돌을 가져오거나 아니면 아예 무시당할 시도다. 하지만 담론 투쟁으로서의 이런 시도는 틈새에서 일어날 구체적인 투쟁의 나침반이 될 수 있고, 그렇게 되어야 하게 하려는 노력이다.

아마 틈새는 기성 질서와 실제 사이의 모순 혹은 충돌에서 찾게 될 것이다. 우리가 ‘청년문제’에 주목하면서 청년배당을 실시하는 것이 충분한 기본소득으로 가는 중요한 교두보라고 생각하는 것은 의식했던 그렇지 않던 간에 그런 방향을 지시한다. 제4차 산업혁명과 일자리 없는 미래라는 테제도 거대한 전환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완전고용의 신화와 노동 중심성에 머물러 있는 기성질서의 틈새가 될 수 있다. 물론 이만큼 심각한 것이 재생산 위기와 ‘초고령화 사회’라는 전망이다.

 

틈새를 파고드는 전략은 지난 9월말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열린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 대회BIEN Congress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기본소득의 실시Implementing a Basic Income”이라는 주제에서 알 수 있듯이, 기본소득의 제도화가 구체적인 시야에 들어왔다는 인식 하에 어떻게 하면 부드럽게 기본소득을 제도화할 수 있는가라는 발표가 제법 있었다. 예를 들어 음의 소득세(또는 마이너스소득세)를 “보편적인 방향”으로 개선해서 기본소득에 접근하자라든가 기본소득이 아니라 최저소득 보장을 우선적으로 제기한다든가 하는 접근법 등이다(리스본 대회에 관해 좀 더 자세한 것은 다음 호에 실릴 것이다).

이런 접근법을 그저 기각할 것이 아니라 앞서 말한 틈새를 찾는 시도로 볼 수도 있다. 물론 그것이 틈새를 찾는 것인지 아니면 기성질서에 포섭되는 것인지는 그러한 개혁 조치에 대한 면밀한 검토 속에서 드러날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이상에 비추어 여러 시도를 기각하는 것은 적절한 태도가 아닐 것이다.

이러한 개혁 조치들이 전면적 변화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앞서 말한 민주주의를 다시 정의하며 민주주의를 확장하는 일이 꼭 필요하다. 사실 지금 현 정부에 대한 거의 무조건적인 지지를 보내는 사람들과 우리 사이에 ‘경멸의 폭포수’가 흐르고 있다면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는 ‘새로운 사회 연대성’을 구성하는 서로 다른 지향 사이의 절연이다. 물론 촛불혁명은 죽었고 1주년은 추도식이 될 것이기 때문에 대칭적인 대립은 아니다. 하지만 이를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할 때만 우리의 싸움은 한 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편집위원회를 대신하여
안효상

 

이 글은 『시대』 2017년 11월호 통권53호에 실린 ‘책 머리에’이다.